화폐전쟁
쑹훙빙/ 차혜정 역 / 랜덤하우스
영국과 미국이 1980년대에 실시한 고금리 정책은 달러의 신인도를 높이는데 성공하고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개발도상국을 위기에 빠드렸다.그러나 고금리는 미국의 공업 능력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혀 일본 제품이 1980년대 들어 미국시장을 대거 점령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그러나 일본 전국이 경제 개발의 성과와 자신감에 한껏 부풀어 있을때,일본 금융을 습격하는 국제 금융재벌들의 전략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1985년 9월,국제 금융재벌들이 마침내 손을 쓰기 시작했다.미국,영국,일본,독일,프랑스 5개국 재무장관이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플라자합의"를 체결했다.목적은 다른 주요 화폐에 대한 달러의 환율을 통제하면서 평가절하하는 것이었다.일본은행은 미국재무장관 베이커의 압력으로 엔화의 평가절상에 동의했다.플라자 합의를 체결한 후 몇개월 안에 엔화 대 달러의 비율은 250대 1에서 149대 1로 엔화가 크게 절상했다
1987년 10월,뉴욕증시가 붕괴하자 미국 재무장관 베이커는 일본 나카소네 야스히로 수상에게 압력을 행사해 일본은행이 금리를 계속 인하하도록 했다.그래서 미국 증시가 일본증시보다 강해져 도쿄 증시로 들어간 자금이 미국으로 방향을 틀도록했다.이과정에서 베이커는 민주당이 집권하면 미일 무역적자 문제를 들고 나와 일본에게 보복할것이라고 협박했다.물론 당근 정책도 빠뜨리지 않았다.즉 공화당이 계속 집권할 경우 부시가 미일 친선을 대대적으로 촉진할것이라고 했다.나카소네 수상은 베이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엔화의 금리를 2.5%까지 인하했다.일본은행 시스템은 유동성 위기가 찾아왔다.대규모의 염가 자본이 증시와 부동산으로 몰려들었다.도쿄 증시의 성장률은 무려 40%나 되었으며,부동산은 심지어 90%까지 성장함으로써 거대한 금융 거품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토록 짧은 시간 동안 발생한 통화 환율의 극단적 변화는 일본의 수출 생산업자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엔화의 평가절상으로 말미암은 수출 하력의 손해를 만회하고자 기업들은 은행에서 저리로 대출을 받아 증시에 투자했다.일본은행의 단기 대출시장은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가 되었다.1988년이 되자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은행은 모두 일본이 독차지 했다.이때 도쿄 증권시장은 이미 3년간 300%나 올라 있었다.부동산은 그보다 더 심해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일본의 금융시스템은 위태로운 상태로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외부에서 그토록 파괴적인 공작을 하지 않았다면 일본 경제는 안정적인 긴축 작전으로 무사히 연착률을 할 수도 있었다.그러나 이 모든 사태가 국제 금융재벌들이 저지른 선전포고 없는 금융 교살행위라는 사실을 일본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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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통화전쟁
하마다 가즈유키 /곽해선 역 /경영정신
"플라자합의"로 미국의 불량 채권을 떠맡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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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세계적인 혼란의 외중에서 대책을 강구하려고 열린것이 1985년 7월 G7 정상회담이다.무대는 뉴욕 플라자호텔,미국은 자국의 금융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브레턴우즈협정 이후 조종되어온 환율 메커니즘을 단숨에 무용지물로 만들려고 나섰다.여기서 타결된 내용은 "플라자 합의"라고 불리며,아직까지도 일본인들의 생활을 옥죄고 있디.이른바 "달러약세와 엔고"노선의 시작이었다
이 합의 뒤 얼마 되지 않아 달러는 엔에 대해 30퍼센트.마르크에 대해서는 60퍼센트나 평가절하됐다.거꾸로 엔화는 3년남짓 사이에 달러에 대해 86퍼센트나 평가절상됐다.그 결과 일본 경제는 공전의 거품 시기로 돌입했다
일본은 플라자합의로 "인공 버블 바이러스"주사를 맞은 것처럼 힘을 잃엇다.그러나 일본인들 다수는 당시 "엔이 강해졌다"또는 "일본의 국력이 발전하는 증거"라고 착각했다.그래서 다투어 미국의 토지와 건물을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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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그 배경에 "미국인들이 만든 미국의 부동산 거품을 어떻게 가라앉힐것인가"하는 문제가 놓여 있었는데.당시 일본은 이 문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알아챘지만 일부러 외면한 것인지도 모른다
미국은 전후 최대의 부동산 붐을 맞았고.일본에서도 유명해진 도널드 트럼프 등이 크게 활약했다.그러나 그 화려한 부동산 붐 뒤편에서는 금융기관들이 불량 채권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누가 마지막 골칫거리를 치울 것인가.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제팬 머니였다.미국에게는,사들여봤자 가져 갈 수도 없는 것을 비싼 값에 자꾸만 사들이는 고마운 일본인들이 등장했다.당시 CIA의 극동 담당 책임자는 "일본인들 덕택에 미국은 부동산 거품의 위기를 피할수 있었다"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플라자 합의를 전후로,상품과 돈의 관계가 변질됐다.상품 이동이 수반되지 않는 투기적 시장에서 돈거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투기 대상도 통화에서 자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졌다.미국의 대일 무역 적자는 1980년 100억 달러를 조금 넘었는데.1987년에는 550억 달러 이상이 되었다
플라자 합의 직후,1985년 10월에는 미국의 베이커 재무장관 요청으로 위싱턴에서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세계의 주요 은행 대표들이 모여 "금융 글로벌화 촉진회의"를 열었다.그 자리에서 세계은행과 IMF까지 포함된 금융 글로벌화 전략이 상세하게 논의됐다.개도국으로의 자본 이동이나 선진국간 환율 정책에 관한 조정도 이루어졌다.
아울러 구미 은행들이 IMF를 업고 개도국 경제에 대한 투자와 융자 리스크를 어떻게 피해갈 수 있을지를 테마로 한 심도 있는 검토도 있었다.그런 회의에 IMF가 빠질수 없는 일원으로 참가하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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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없는 세계화
피터 고완 /홍수원 역 /시유시
G7은 미국이 다른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로 하여금 미국이 원하는 바를 그대로 실행하도록 만드는 데 활용될 뿐 그밖에는 아무런 구실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카터 행정부 시절에 엿볼수 있었던 얼마간의 협동정신도 레이건 행정부 시절에는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다.통화정책 관련 고위회담에서 그나마 실질적 협의가 이뤄진 것처럼 보인 사례는 1985년 달러 가격을 용인시키기로 합의한 플라자합의이다.이 회담에서 달러 가격을 끌어내리기로 합이하고 뒤이어 실제로 가격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데스틀러와 랜덜 헤닝이 지적한 것처럼 베이커 미국 재부장관은 플라자 합의 이전에 이미 달러가격을 낮추기로 결정한 뒤였고 또 실제로 달러 시세가 떨어지고 있었다.베이커가 G7회담에서 합의를 이끌어낸 것은 국내 정치용이었다.달러의 평가절하에 반대하는 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전술로 G7을 활용했던 것이다
미국이 국제 금융체제의 관리에서도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펼친 것은 분명하다.우선 1970년대 미국 정부(닉슨 행정부 시절)는 IMF를 멸시하다가 1970년대 말경에는 아예 국제무대에서 잊혀지게 만드는 쪽으로 나아갔다.국제금융의 규제 문제에 대한 실제적인 협이는 국제결제은행으로,그리고 관련 당사국과의 쌍무협의 쪽으로 옮겨갔다.레이건 행정부는 처음에는 IMF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였다(세계은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그러다가 IMF와 세계은행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달라지게 되었다.이는 일방적인 미국 우선주의를 포기해서가 아니라,중남미의 외채 위기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역활만 제대로 주어지면 이 두 기구가 매우 쓸모가 많다는 점을 베이커가 알았기 때문이었다.여기서도 과두체제의 협의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그런 협의식 접근방식이 강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면 협의의 내용이 위싱턴이 사전에 결정한 실행방침과 합치되는 경우에 한해서 일 것이다
미국 학계에는 이같은 미국 일방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패러다임이 구축되어 있었다.국제 통화문제는 단일 강대국이 압도적인 지배력을 발휘할 때 비로서 안정선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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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폰의 실패에서 배운다
박정훈 /바다출판사
개미형 경제의 몰락
엔화가치를 폭락시키고,일본의 대외 신인도를 추락시킨 이른바 일본의 "금융 패전"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명법이 있지만 일본인의 본심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개미와 베짱이론"이 아닐까 한다
가나가와 대학 깃카와 모토타다 교수나 조치 대학 와타나베 쑈이치 교수 등에 따르면 개미는 일본이고 베짱이는 미국이다.하지만 개미가 선이고 베짱이가 악이어야 마땅한 이솝 우화식 세계관과는 정반대의 결말이 난다.개미는 50여 년간 피땀 흘리며 일해서 마침내 물건 만들기(제조업)에 관한 한 세계 일등이 되었고,세계 최대의 채권국가 자리에도 올랐다.쌍둥이 적자(재정,무역적자)로 고생하는 베짱이를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했다.미국 국채를 앞장서 사주었고."플라자합의(1985년)다.구조조정 협의(1989년)다 해서 숱하게 도와주었다.그러던 어느 날 베짱이는 돌연 새로운 게임의 룰을 들고 나와 애써 축적한 국부를 빼내가기 시작했다.시장원리며 투명성과 정보 공개며,베짱이가 "보편적질서"라고 주장하는 것도 개미가 보기엔 "월 스트리트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예컨대 글로벌 질서를 지탱하는 IMF,신용등급회사,BIS(국제결제은행)의 이른바 "3종의 신기"도 따지고 보면 미국이 만들어낸 것들 아닌가.
개미의 세계관에 따르면 부란 최종적으로 물건을 만들어 파는 데서 창출된다.금융이란 물건이 거래와 이동에 수반되는 종속적 존재에 불과하다.실물경제만 튼튼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신념 아래 "좀더 좋은 제품을,좀더 싸게"만 부르짖어왔다.그러나 아시아 통화위기로 격발된 금융전쟁은 개미의 신념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려놓았다.금융불안은 실물경제에 연쇄적인 타격을 미치면서 일본 경제 전반을 위기로 몰아넣었다.세계 최대의 채권국이 세계 최대의 채무국(미국)에 무릅을 꿇는다는 것은 일본의 전통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아무리 곪았다고 해도 "일본 은행의 신용등급이 어떻게 브라질 ,멕시코와 같을 수 있냐"고 깃카와 교수는 흥분한다.경악과 절규의 시간이 흐르자 이윽고 개미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음을 깨닫기 시작했다.21세기는 금융이 실물경제의 우위에 있는 시대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다.국가경제의 실력을 가늠하는 패러다임 자체가 변했고,결국 베짱이가 승리한다는 것으로 일본판의 "신 이솝우화"는 끝을 맺는다
1998년 봄 일본 금융 시스템이 교란과 대외 신인도 추락으로 상징되는 일본 경제의 위기는 이처럼 "개미형경제"의 몰락으로 비유되고 있다.글로벌 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제조업 만능주의"로 상징되는 일본식 모델의 한계를 여지없이 노출시키고 있다.근면성과 높은 저축률,물건 만들기 기술만으로는 21세기 경제 패권을 거머쥘 수 있는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경제사의 실증인 셈이다
엔화의 폭락으로 결말난 1998년 "엔달러 전쟁"의 개전초만 해도 일본은 자신감을 가졌던 듯하다.일본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고 최대의 외환보유국이다.무역에서 연간 10조엔을 벌어들이고 있으며,흑자 규모는 갈수록 불어나기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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붐 앤 버블
로버트 브레너 /정성진 역 /아침이슬
재무부장관 로버트 루빈의 주도하에 미국은 1995년 봄과 여름 사이에 일본 자동차 부품 시장 개방 압력을 모두 중단했다.게다가 미국은 일본과 독일 정부와 엔화와 마르크화 가치의 하락과 달러 가치의 상승을 위한 공동 보조를 취하기로 합의했다.이것은 그때까지 경쟁력 지향적이고 수출지향적인 미국의 대외 경제정책의 근간이 되는 것으로 보였던 상황을 완전히 역전시켰다,,, ,,,미국과 일본과 독일이 이룬 합의는 중요한 것이었으며,1985년 플라자합의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미국의 주요동맹국과 경쟁국들의 정책 기조의 돌발적인 전환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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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클린턴 행정부는 레이건 행정부가 1980년대 전반기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비교역재의 공급자,대부자,주식시장 투기자를 유리하게 하고 제조업체를 불리하게 하고 있었다.클린턴 행정부는 미국 제조업 부문이 갈수록 몸이 가벼워지고 경쟁력이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달러 가치 상승을 성공적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을 수도 있다.또한,클린턴 행정부는 비제조업 부문의 이윤율과 경제적 활력의 증대와 제조억 제품의 국내 소비 증대가 국제 기준 상대적 비용증가와 수출 증가율 하락으로 인해 발생한 제조업 부문에 대한 압력 증가를 보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그러나 어떤 계산에서 그랬건 간에,이와 같은 국제 경제정책의 급격한 입장 선회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일종의 도박이었다.역 플라자합의의 엄청난 반향은 세계체제 전반에 걸쳐 즉시 그리고 갈수록 크게 나타났으며,원래의 플라자합의의 극적인 충격을 역으로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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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레이건 행정부는 저항할수 없는 정치적 압력에 대응하여,그리고 위기에 시달리는 미국 제조업 부문의 활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획기적인 방향전환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85년 9월 22일 G5 국가는 미국의 압력을 받아 플라자합의에 서명하고 달러환율을 인하하여 황폐해진 미국 제조업을 구출하기 위해서 공동 보조를 취하기로 합의했다.바로 그 다음날 레이건은 타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을 공격하고 미국 무역정책을 노골적인 보호무역주의 반향으로 전환시키겠다고 발표했다.이러한 조치는 플라자합의 자체를 보완하는 것이었으며,1970년대 닉슨 포드 카터 행정부이 공격적 정책들,즉 달러의 급격한 평가절하를 추구했을 뿐아니라,
1973년 다국간 섬유협정과 1974년 통상법 301조를 통해 강력한 보호무역주의와 "시장개방"압력을 가한 정책들을 부활시킨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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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자합의와 그 후의 결과는 미국 제조업 회복의 전환점이자 세계 경제 전체의 주된 분수령이었음이 입증되었다.그로 인해 달러화는 10여 년 동안 엔화와 마르크화에 대해 다소 지속적으로 또 대폭 평가절하 상태를 유지했다.또 이는 10년 동안 실질임금 증가율을 제로 수준으로 유지시켰다.그리하여 미국 제조업은 경쟁력을 회복하고 수출은 비약적으로 증가했으며,독일 산업과 일보 ㄴ산업은 장기적인 위기에 빠졌고,동아시아 전체는 수출 기반 제조업이 폭발적 성장을 구가했다.특히 동아시아 경제는 대부분 통화를 달러화와 연동시켰기 때문에 1985년에서 1995년 사이에 달러 가치가 떨어지는 동안 자국 제조업 수출기업들이 일본 경쟁자들과 비교하여 주요한 경쟁우위를 갖게 되었다.이러한 경쟁력 추이의 역사적 전환과 그에 수반되는 제조업 이윤율의 상승은 국민경제 사이의 생산성 증가율 차이나 미국 제조업 생산성 증가율의 가속화(1994년 이전)에 조금도 기인하지 않았다.거의 모든것이 임금 상승률의 차이와 환율 차이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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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지배한 경제학자 이야기
우에노 이타루 / 신현호 역 /국일증권경제연구소
미국의 어느 경제분석가는 이와 같은 일본 경제의 붕괴현상은 미국에 의해 초래된 것으로 1980년대 전반에 나타났던 미국경제의 실패를 일본의 자금력으로 메워가기 위한 시나리오에 불과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플라자 합의 이래 지금까지 전개되어 왔던 일련의 사건들을 추적해 보면,미국은 우선 환율정책과 금융정책을 통해서 일본을 길들이려 했으며 일본은 미국이 원하는 대로 일본 경제의 모든 것을 갖다 바쳤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도식화된다.미국의 경제적 제국주의가 또 한번 진가를 발휘했던 것이다
일본 사회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이코노미스트가 경제용어를 아무리 남발해도 경제의 흐름을 제대로 짚어낼 수는 없다.하지만 경제라 하는것은 국가와 민족 간에 벌어지는 생존경쟁이었던 것이다
버블경제의 희비에 대해 일본인에게 다소의 위안거리가 있다면,이 시나리오의 결과로 미국 역시 1080년대 말에 엄청난 경제적 곤란을 겪었다는 사실이다.미국은 한 발로 일본을 짓누르는 데 성공했지만 다른 한 발로는 결과적으로 스스로를 짓밟았다.이는 오늘날의 사화경제가 한 나라 안에서는 결코 완성될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교훈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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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자본주의와 미국의 금융지배전략
홍찬선 /무한
미국의 금융지배전략이란 말 그대로 "미국이 금융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전략"을 가리킨다.현재 세계경제의 주도권은 돈의 흐름,즉 금융에 있다.80년대까지는 물건을 만드는 제조업에 있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달라진 점이다.제조업 시대에서는 일본이 세계제패의 꿈을 키웠다."21세기는 일본의 시대"라든지,"일본제일"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됐다.그러나 90년대 들어 일본의 영향력은 급격히 축소됐다.일본이 2류국가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감도 많아졌다
일본이 이처럼 패권경쟁에서 뒤떨어지게 된 것은 파워의 중심이 제조업에서 금융으로 옮겨가는 패러다임 시프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패러다임 시프트는 미국이 지난 70년대부터 은밀히 추진해 온 "금융을 통한 세계지배전략"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은 80년대 말과 90년대 초,S&L(저축대출조합)의 대규모 부도로 요약되는 금융위기를 극복하면서,금융의 실력을 축적했다.그때 쌓은 실력을 바탕으로 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실력행사에 나서고 있다.97년 7월부터 시작된 동남아시아의 통화,금융위기도 이런 미국의 금융지배전략에 의해 비롯됐다는것이 이책이 주장하는 요지다.
미국의 금융지배전략은 BIS(국제결제은행)의 자기자본규제와 국제적인 신용평가기관,그리고 헤지펀드와 국제자금의 신제국순환을 연결하는 네 개 기둥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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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레이거노믹스는 군사력우위와 달러강세를 양축으로 하는 "강한 미국"정책이었다.이를 위해 고금리와 재정지출확대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재정적자와 경상수지적자가 함께 늘어나는 쌍둥이적자를 유발했다.그러나 이같은 쌍둥이적자는 이면에 신제국 자금순환 구조를 정착시킴으로써 금융을 통한 세계지배전략을 마련하는데 튼튼한 기틀이 됐다.85년 9월에 등장한 플라자협정은 이런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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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일본은 95년 8월 그때까지 지속돼 온 [엔고--달러저]를 {달러고--엔저}로 전환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했다.이 합의를 85년 9월 ,달러약세에 합의했던 플라자합정에 빗대 "역 플라자협정"이라고 부른다
주요내용은 1(95년 4월 한때 80엔까지 급락했던) 엔 달러 환율을 달러당 1백 엔 선으로 회복시키고,2미국은 일본에 대해 통상압력을 상당기간 보류하는 대신,3일본은 저금리 정책을 견지함으로써 미일간 금리차를 4%이상으로 유지하고,4내수확대를 위해 재정확대정책을 채책한다는 것이었다
역플라자협정은 금융을 통한 지배(달러강세가 미국이익에 부합한다)를 주장한 루빈과 통상압력을 통한 지배(달러약세를 통한 경상수지적자 감소)파인 버그스텐과의 이데올로기 경쟁에서 루빈이 승리한 것을 의미한다.즉 통상을 통한 문제해결방식을 버리고 금융을 통해 세계의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정책전환인 것이다.이는 토마스 라블렉 체이스맨하탄 회장이 94년에 "리스트럭처림을 마친 미국 은행은 자본충실도와 재무건전성에서 세계 최강이 됐다"며 미국의 승리를 전언한 것과 일맥상통한다.이후 미일간 통상마찰은 사라졌으며 대신 미국은 일본금융시장 진출을 둘러싼 마찰이 심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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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세동괴론은 멀게는 71년의 닉슨쇼크에서부터 시작됐다.미국의 금융지배전략이 싹튼 것이 바로 닉슨쇼크였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서세동괴론의 실질적인 출발은 85년 9월의 플라자협정이라고 할 수 있다
되돌아보면 동아시아의 경제발전과 통화,금융위기는 엔 달러환율의 변동과 밀전하게 관련돼 있다.동아시아 경제가 높은 성장을 계속한 기간은 엔화가치가 강세를 나타냈던 86~96년의 10년간이었다.85년 9월 이른바 "플라자협정"에 의해 엔 달러 환율은 달러당 2백 40엔대에서 95년 4월에는 80엔대로 3분의 1수준으로 급락했다.그동안 일본은 "엔고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아시아에 진출했다.임금등 생산 코스트가 싼 아시아를 생산거점으로 삼기 위한 전략이었다.동아시아는 일본기업의 직접투자 바람을 타고 "기적적"인 성장을 이뤄냈다.국제투자자금은 연평균 8~10%에 달하는 높은 성장을 노리고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자금시장에 넘치는 돈은 주식과 부동산에 몰려 결국은 버블을 발생시켰다
그러나 95년 8월,이런 성장은 호순환에 급브레이크가 걸렸다.이른바 "역플라자협정"에 의해 엔 달러 환율아 급격히 상승(엔화가치의 하락)했기 때문이다.역 플라자협정은 미국의 재무성과 일본의 오쿠라쇼(대장성)가 95년 8월 초 그때까지의 "엘고--달러저"를 "엔저--달러고"로 바꾸기로 비밀리에 합의한 것을 가리킨다.역 플라자협정에 의해 일본은 95년 9월 재할인율을 사상 최저수준인 0.5%로 인하,4년 4개월이 지난 99년 12월끼자도 유지하고 있다
역 플라자협정에 의해 엔 달러 환율은 "V자형"곡선을 그리며 급상승했다.태국에서 통화위기가 일어난 97년 여름에는 달러당 120엔대까지 상승했다.엔화가치가 2년간에 50%나 떨어진 셈이다.엔화 약세가 진행됨에 따라 아시아의 수출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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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의 역사
장진모 / 한국경제신문
플라자합의는 사실 만성적인 대일 무역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이 이를 타개하기 위해 달러 가치의 평가절하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플라자합의 이후 달러 가치는 크게 하락했고 엔화가치는 그만큼 상승했다.
1985년 2월 달러당 263엔이었던 엔달러 환율은 1985년 말 200엔까지 떨어졌다.그후 1986년 말에는 160엔,1987년 말에는 127엔가지 급락했다.그러나 이 같은 엔화 강세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경상적자는 줄어들지 않았다.엔고가 급격히 진행된 1986년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1,509억달러로 1985년보다 오히려 267억달러 증가했다
엔고의 덕을 본것은 미국이 아니라 바로 한국이었다.엔화 강세는 국제시장에서 일본의 수출제품 가격이 그만큼 올랐다는것을 으의미한다.이는 전자제품,자동차등에서 경쟁관계에 있던 한국 기업의 수출가격이 상대적으로 싸졌다는 뜻이기도 하다.극내기업은 엔고 덕택에 수출가격 경쟁력을 제고해 수출을 크게 늘릴 수 있는 반사이익을 챙긴 것이다
1985년 이후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국이 금융완화 정책을 편 결과 국제금리가 하락하기 시작했다.국제금리 하락은 외채가 많은 우리 경제의 부담을 줄여줬다.
때마침 국제유가도 약세를 보였다.원유 생산국들은 달러가치 하락으로 구매력이 감소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산유량을 늘렸기 때문이다.1985년 북해산 브렌트유 기준으로 배럴당 27.4달러였던 국제유가는 1986년 14.2달러,1987년 18.3달러,1988년 14.9달러로 떨어졌다.유가하락은 우리 경제의 수입부담을 완화시킬 뿐 아니라 물가안정에도 기여했다.유가하락과 저금리는 비용절감으로 이어져 기업의 실적 개선폭을 더욱 확대시켰다.결국 플라자합의에서 촉발된 3저 현상은 수출 중심의 한국경제에 큰 선물을 안겨준 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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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통해 본 부동산 10년 대폭락 시나리오
다치키 마코토 / 강신규 역 /21세기 북스
1985년 9월 22일 미국,영국,서독,일본,프랑스의 선진 5개국,G5는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회담을 열었다."플라자합의"라 불리는 이회담은 "미국이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외환율을 인위적으로 조정한다"는 내용에 합의한것이다.플라자합의의 결과에 따라 일본은 엔고 불황에 대비하여 극도로 금리를 낮추는데,이는 경제 버블을 발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차대전 후 줄곧 중앙집권적 금융정책을 고수해왔던 일본정부는 플라자합의로 엔고가 타격을 받자,수출 업계를 구제하기 위해 금융완화 정책을 시행한다.이에 막대한 은행 자금이 시장으로 흘러나와 돈이 넘치는 상황에 이른다
시중의 남아도는 자금은 폭등하는 주식시장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부동산 시장으로 몰려들었다.결과적으로 일본정부의 초저금리 정책은 시중의 막대한 자금을 주식과 부동산 시장으로 모은 것이다.당시 시중의 자금은 미국 등지의 부동산과 명화수집 등으로 이어졌다.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도쿄의 23개구 땅값이 미국 본토를 사들이고도 남는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1989년 미쓰비시 부동산은 2천억 엔에 룩펠러 센터를 매수하기도 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은 일본정부는 부동산 가격을 잡기 위해 나선다.부동산에 돈이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금리를 상승키키고,"부동산 융자 총량 제한"을 만들었다.하지만 정부의 정책은 토지 가격을 급락시키는 것도 모자라 시중에 자금이 얼어붙게 만들었다.결국 주가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후 버블경제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1991년 이후 집값은 60퍼센트,상업지의 경우 80퍼센트까지 폭락했다.부동산 대출 비율이 높았던 은행과 부동산을 많이 보유했던 기업들이 줄줄이 파산 일로의 길을 겪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일본정부는 여지없이 한발 늦은 조치들을 내놓기 시작한다.부동산관련 융자 총량규제법,특별토지보유세 대상 확대,보유세강화,토지거래제한,양도차익의 60퍼센트 징세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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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미국을 움직이는가
소에지마 다카히코 /신동기 역 /들녘
,,, ,,, 70,80년대 단숨에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으며 "묘한 부자나라"가 되었다.그래서 미국인들은 이 "묘한 동아시아의 부자나라"에 쌓여 있는 금융자산을 빼앗기 위해 현제 "일본 두들겨패기"라는 교묘한 전략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즉 일본의 금융기관과 기업들에게 엔고로 인한 미국 국체의 가치감소,국제 원조금 지출,주일 미군에 대한 비용 부담등 "일본 국민의 부"가 매년 엄청난 규모로 미국에 몰수당하고 있다.특히 85년 플라자 합의 이후에는 800조엔 정도가 날아갔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런 사실을 피부로 느끼는 사람은 일본에서 소소의 정치가나 재계인사정도이고,대부분의 일본 국민들은 "왜 경기회복이 빨리 안되는 것일까"라고만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