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화원 四書三經] *—<제11강>
— <周·人·工 四書三經>은 ‘周易과 人性을 工夫하는 四書三經 강좌’를 말한다 —
중 용(中庸) (제3강)
* [도산서원의 봄] — 지성무식(至誠無息), 하늘은 끊임없이 생명작용을 하고 있다…
안동 도산서원에 매화(梅花)가 만발했다. 일주일 전에는 잔뜩 부풀어 있기만 하던 꽃망울이 일주일만에 활짝 핀 것이다. 하늘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것이다. 계절이 쉼 없이 변화하고 우리가 무심코 있는 사이에서 하늘은 끊임없이 생명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매화나무에 내린 천명(天命)이 그렇게 꽃봉오리로 본성(本性)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지성무식(至誠無息)’이다.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광대하고 섬세한 생명의 본질이다. 그것이 중용(中庸)에 이르는 하늘의 생명 작용, 즉 도(道)인 것이다. ‘도(道)라는 것은 잠시라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라(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는 말씀이 적실한 것이다. 매화 꽃 한 송이에도 하늘의 뜻[道]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일체의 천지 만물이 또한 이 도(道)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성무식(至誠無息)이다. 그래서 하늘과 지상의 생명은 하나의 길로 연결되어 있다.
* [도산서원 수련회] — 3월 20일, <도산서원의 참공부> 모임…
어제 3월 20일, 도산서원에서 <도산서원 참공부> 모임이 있었다. 도산서원 선비수련원 김병일 이사장, 동인문화원 이기동 원장, 우리나라 최고의 한학자 허관수 선생, 동인문화원 선비인성수련원 손기원 주임교수 등 사계의 최고 석학 여덟 분이 회동하여 퇴계학과 한국 유학의 나아갈 길을 주제로 수련회를 가진 것이다. ‘좋은 모임’이란 첫째 성자가 되는 길에 동행하는 벗들의 모임이고, 둘째 그 벗들이 만나면 학문적 수준이 상향평준화가 이루어지는 모임인데, 이날의 모임이 그랬다. 참으로 의미 있고 아름다운 모임이었다. 손기원 선생은 이날 회동을 통하여 퇴계 선생의 학통과 도산서원의 정신을 계승하는데 가장 적실한 학단이 동인문화원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주제에 따른 말씀을 나누어 가던 중, 동인문화원 도은 이기동 원장님의 말씀이 좌중의 호응을 전폭적으로 받았다는 데서 근거한 것이다.
시사단 비각 앞에서 (왼쪽에서부터 네번째 이기동 원장-김병일 도산서원 이사장)
* [농운정사(隴雲精舍)의 문호(門戶)] — 중용(中庸)의 도(道)를 생활화한 퇴계 선생
이날의 <참공부>에 참가한 인사들은 모임을 끝내고, 도산서원 경내와 <시사단>을 답사했다. 우선 <농운정사(隴雲精舍)>의 문호(門戶)의 형태가 ‘中’ 자(字)의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퇴계 선생이 경(敬)사상을 중심으로 한 중용(中庸)의 도(道)를 얼마나 중시하였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가운데 출입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작은 창호를 배치하여 구조적인 아름다움을 꾀하면서, 도산서원에서 공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윤집궐중, 즉 중용의 도(道)를 생활 속에서 깊이 인식시키고자 하는 선생의 깊은 뜻이 반영된 것이다. 농운정사는 도산서당의 서생 기숙사 건물인데 서생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문을 지나다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중용의 덕이 몸에 배지 않겠는가.
* [도산서원 앞 <시사단(試士壇)] — 퇴계 선생의 학덕을 기린 '도산별과'의 현장
그리고 <도산서원> 앞 낙동강 건너편에 위치한 <시사단>을 찾았다. <시사단(試士壇)>은 1792년 3월, 정조(正祖) 임금이 이조판서 이만수(李晩秀)에게 명(命)을 내려 퇴계 이황(李滉) 선생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는 뜻에서 ‘도산별과’를 신설하여 이 지방의 인재를 선발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시행하고 기념하던 장소가 <시사단>이다. 이 도산별과는 급제(及第) 2인, 진사 2인, 초시(初試) 7인, 상격(賞格) 14인을 선발하는 특별 시험이었다. 이날 참가한 선비는 7,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안동댐으로 수몰되기 전에는 도산서원과 마주 보이는 강변의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 비각이 세워져 있었는데, 1975년에 원 위치에 10m 높이의 돌 축대를 쌓아올린 뒤 원형대로 옮겨지었다. 비각(碑閣)은 4면 1칸인 팔작지붕 건물로 비바람을 막기 위하여 중방(中枋) 밑에 판벽(板壁)을 둘렀으며, 추녀 네 곳에 모두 활주(活柱 : 추녀 뿌리를 받친 가는 기둥)를 받쳐 구조적 안전을 꾀하였다. 기둥 위 보 위에 올린 화반(花盤 : 초새김한 받침)과 공포(栱包)에 새겨진 초각(草刻)이 아름답다. 비각 안에는 1824년(순조 24) 비각을 다시 지을 때 새로 새겨 세운 비석이 있다. 이보다 앞서 1796년(정조 20)에는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이 도산별과(陶山別科)를 기념하려고 지은 글을 새긴 비석이 있었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산서원 바깥 마당에서 바라본 <시사단> - 안동댐 담수로 높이 단을 쌓아 비각을 올려 앉혔다
* [퇴계 명상길] — <도산서원> … <퇴계고택>~<청량정사>에 이르는 강산의 길
수도(修道)에는 크게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그 하나는 ‘진리 학습’ 즉 학문의 정진이요, 다음은 ‘명상 수련’이다. 퇴계 선생은 <도산서원>에서 <청량정사>까지 맑은 낙동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산길’에서 ‘강가’를 따라 이어지는 ‘길’을 걸으면서 명상과 사색을 하였다. 이 길을 오르내리시면서 하늘의 명(命)과 인간의 성(性)을 사유하고 성인이 되기 위해 깊은 고뇌에 잠겼으며, 경(敬) 사상과 중용의 실천을 위한 철학적인 방법을 모색하였다. 지금은 이 길을 <퇴계 명상길>이라고 명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옛 성현을 생각하며 명상과 사색의 길을 걷는다. 길목 곳곳에는 퇴계 선생의 시편(詩篇)들이 설치되어 있어, 강과 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옛 성자의 마음을 음미하면서 걷는 그윽함이 있다. 청량정사(淸凉精舍)는 산수가 아름다운 청량산 아래, 청량사(淸凉寺) 옆에 위치한 자그마한 별채의 산방(山房)이다. 퇴계 선생이 어리고 젊은 시절,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공부하던 별당이다.
* [다시 새김](1) — 윤집궐중(允執厥中)과 수도(修道)의 의미
· ‘允執厥中’(윤집궐중) — ‘진실로 그 中을 잡아라.’
· ‘處中(처중)’과 ‘時中’(시중) — 지금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서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라.
· ‘修道’(수도) — 수(修)는 ① (나의 길을) ‘닦다’, ② (길을) ‘닦아 준다’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전자(①)의 수도는 ‘사람이 스스로 하늘[天]에 이르는 길을 닦으면 하늘의 명(命)’이 나의 성(性)을 환하게 밝힌다. 그것이 자수(自修)요 자명(自明)이다. 그리고 후자(②)는 나의 수도(修道)가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이 된다. 그러므로 나의 수도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 [다시 새김](2) — 중용(中庸) (제1장)을 다시 마음에 새기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
是故君子 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 愼其獨也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 道也 …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 [활인심방 - 중화탕(中和湯)] — 퇴계 선생이 처방한 천하의 보약
퇴계 선생이 <중화탕(中和湯)>을 처방하셨다. 총 30가지의 약재를 사용하여 만든 심신(心身)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는 보약(補藥)이다. <중화탕>은 의사가 못 고치는 병(病)을 고친다. 이것을 복용하면 타고난 기운을 굳게 보존하고 삿된 기운이 침범하지 못 하게 되어 갖가지 병이 생기지 않고, 오래도록 편안히 살면서 근심할 일이 없다. 퇴계 선생의 활인심방, <중화탕(中和湯)>은 다음의 30가지 약재로 조제한다.
1. 思無邪(사무사)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
2. 行好事(행호사) 좋은 일을 실천한다.
3. 莫欺心(막기심)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는다
4. 行方便(행방편) 적절한 방법을 적용한다.
5. 守本分(수본분) 자기의 본분을 지킨다.
6. 莫嫉妬(막질투) 시기아 질투를 하지 않는다.
7. 除狡詐(제교사) 교활하게 속이지 않는다.
8. 務誠實(무성실) 정성스럽고 참되도록 힘쓴다.
9. 順天道(순천도) 하늘의 운행에 순응한다.
10. 知命限(지명한) 命(명)에 한계가 있음을 안다.
11. 淸心(청심) 마음을 맑게 한다.
12. 寡慾(과욕) 욕심을 줄인다.
13. 忍耐(인내) 참고 견딘다.
14. 柔順(유순) 부드럽고 순하다.
15. 謙和(겸화) 겸손하고 조화롭다.
16. 知足(지족) 만족할 줄 안다.
17. 廉謹(염근) 청렴하고 조심한다.
18. 存仁(존인)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보존한다.
19. 節儉(절검) 절약하고 검소하다.
20. 處中(처중) 지금 있어야 할 그곳에 있다.
21. 戒殺(계살) 생명을 죽이지 않도록 조심한다.
22. 戒怒(계노) 분노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23. 戒暴(계포) 사납지 않도록 경계한다.
24. 戒貪(계탐) 탐욕을 경계한다.
25. 愼獨(신독) 마음을 참되게 하고 돈독하게 한다.
26. 知機(지기) 변화의 기미를 안다.
27. 保愛(보애) 약자를 보호하고 사랑한다.
28. 염退(염퇴) 물러날 때 담담하게 물러난다.
29. 守靜(수정) 평정심을 갖는다.
30. 陰櫛(음즐) 남모르게 선행을 한다.
위의 30가지 약재를 꼭꼭 씹어서 잘게 만든 다음 심화(心火) 한 근과 신수(腎水) 두 대접을 넣고 약한 불로 반이 되도록 계속해서 은은하게 달인다. 그리고 수시로 따뜻하게 복용한다.
* [오늘의 주역 코드] (34) 뇌천(雷天) 대장괘(大壯卦)
상괘는 진괘(震卦)이고 하괘는 건괘(乾卦)이다. ‘대장이정(大壯利貞)’이라. 힘이 매우 왕성하다. 결실하고 마무리해야 하는 형국이다. 단(彖)에서 말했다. “대장은 큰 사람이 씩씩하니, 굳세면서 움직이기 때문에 씩씩하다. 힘이 왕성한 형국에서 결실하고 저장하는 것은 큰 사람이 바르게 하기 때문이다. 바르고 크게 되면 천지의 실상을 알 수 있다.” 상(象)에서 말했다. “우레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대장이니, 군자는 이 괘의 이치를 잘 살펴서 예가 아니면 실행하지 않는다.(彖曰,“大壯”大者壯也, 剛人, 故壯.“大壯, 利貞”大者正也. 正大而天地之情可見矣! 象曰, 雷在天上, 大壯, 君子以 非禮弗履.)”
‘예가 아니면 실행하지 않는다.(非禮弗履)’는 것은 공자와 제자 안연과의 대화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논어』〈안연(顔淵)〉편에, 안연이 인에 대하여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감이 인이 된다(顔淵問仁 子曰克己復禮爲仁). 하루라도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간다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인을 행함은 자기를 말미암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말미암겠는가(爲仁由己 而由人乎哉). 안연이 그 조목(條目)을 여쭈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예가 아닌 것은 보지 말고 예가 아닌 것은 듣지 말고 예가 아닌 것은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결국 대장(大壯) 이정(利貞)에서, ‘이(利)’는, 바르게 하는 것이 이롭고, 이롭게 하고 바르게 한다는 뜻이요, ‘정(貞)’은, 굳세게 해야 할 때 굳세게 하고 부드럽게 해야 할 때 부드럽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전자는 양(陽)의 정(貞)이요, 후자는 음(陰)의 정(貞)이다.
오늘의 중용 읽기 (제9장~제12장)
* [제9장] — 중용, 실천하기 정말 어렵다!
09-01 子曰 天下國家 可均也 爵祿 可辭也 白刃 可蹈也 中庸 不可能也
공자가 말씀하셨다. “천하나 국가도 고르게 할 수 있으며, 벼슬이나 녹(祿)도 사양할 수 있으며, 시퍼런 칼날도 디딜 수 있으나 중용은 할 수가 없다.”
[자구(字句) 해석] ————
· ‘白刃’은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흰 칼날’이지만 우리말에서는 ‘시퍼런 칼날’이라고 한다.
· ‘中庸 不可能也’이라고 한 것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욕심을 버리는 일’이 그렇게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자(聖者)가 되고자 하는 확고한 목표가 있다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중용의 도(道)가 오직 행복의 길이라는 흔들림 없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한 걸음 한 걸음 지성(至誠)으로 나아가면 된다. 지극한 마음으로 ‘진리 학습’과 ‘명상 수련’을 실천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강설(講說)] ————
중용을 실천하는 것이 매우 정말 어려움을 강조한 말이다. 중용은, 마음의 바탕인 성(性)을 완전히 회복하여 성(性)을 따름으로써 남과 하나됨을 실천하여야 하고[仁], 또 외적 상황을 잘 파악하여 가장 합당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知], 합당한 일을 가장 과감하게 실천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勇], 인(仁)·지(知)·용(勇) 세 덕목을 동시에 실현하는 것이 최고의 덕(德)이다. 그러므로 천하나 국가를 고르게 잘 다스리는 일보다도 벼슬이나 녹을 다 사양하는 일보다도, 시퍼런 칼날 위를 딛고 서는 것보다도 중용(中庸)을 실천하는 게 더 어렵다. 중용을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공자 자신도 중용을 실천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중용을 실천하기 매우 어려움을 강조한 말이다.
* [제10장] — 진짜 강(强)한 자는 중용(中庸)을 실천하는 자(者)이다!
10-01 子路 問强
02 子曰 南方之强與 北方之强與 抑而强與
03 寬柔以敎 不報無道 南方之强也 君子 居之
04 衽金革 死而不厭 北方之强也 而强者 居之
05 故君子 和而不流 强哉矯 中立而不倚 强哉矯 國有道 不變塞焉 强哉矯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
자로가 강한 것에 대해서 물었다. 이에 공자가 대답하셨다. “남방의 강함인가? 북방의 강함인가? 아니면 너의 강함인가. 너그럽고 부드러운 것으로 가르치고 무도한 자에게 보복하지 아니하는 것은 남방의 강함이니, 군자는 이를 택한다. 창검과 갑옷을 깔고 누워 죽어도 싫어하지 아니함은 북방의 강함이니, 너의 강함은 이를 택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조화되지만 흐르지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가운데 서서 기대지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나라의 도(道)가 있으면 궁색하던 때의 절조를 변치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나라애 도(道)가 없으면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자구(字句) 해석] ————
· ‘子路’는 중유(仲由), 자는 자로(子路) 또는 계로(季路)라고도 한다. 원래 무인으로 공자의 제자 가운데 용기 있는 자로 유명하다.
· ‘抑而强與’에서 ‘抑’은 ‘그러나’ ‘아니면’의 뜻이고 ‘而’는 2인칭 대명사 ‘이(爾)’와 같은 ‘너’의 뜻이다. ‘死而不厭’에서 ‘而’는 앞, 뒤의 서술어를 이어주는 접속사이다. ‘而强者 居之’에서 ‘而’도 주자와 공영달은 ‘접속사’로 보았고 일본의 오규 소라이(荻生徂徠)는 앞에 ‘抑而强與’에서와 마찬가지로 ‘너’로 보았다. 이기동 선생은, 여기에서 ‘而’를 접속사로 보게되면 , 앞의 ‘君子 居之’ 앞에도 접속사가 있어야 할 것이므로 문맥상 옳지 않고, 앞 부분의 ‘而强’에 대한 설명이 없게 되므로 내용상 무리가 생긴다. 그러므로 ‘而强者 居之’의 ‘而’는 오규 소라이의 견해대로 ‘너’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 ‘强哉矯’의 ‘矯’는 ‘굳세다’, ‘강하다’의 뜻이다.
[강설(講說)] ————
자로(子路)는 무인으로 그 자신 무력(武力)이 뛰어났기 때문에 무(武)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공자에게 강함에 대해 질문을 한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자로가 생각하는 강함 이외에도 차원이 다른 강함이 있음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남방(南方)의 강함은 육체적인 힘의 강함이 아니라, 남을 자신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너그럽고 부드럽게 가르치며 무도한 자를 보복하지 않는 마음에서 드러나는 강함이다. 북방의 강함이란 창검을 쓰다가 죽음에 이르러도 싫어하지 않는 무인의 강함인데, 자로가 생각하는 강함이다.
남방의 강함을 실천하는 군자는 남과 동화되어 조화를 이루지만 이익을 좇아 흘러가지 아니하며, 중용을 실천함으로써 마음이 하늘에 뿌리를 박고 살아간다. 그래서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궁색(窮塞)하였을 때의 절조를 바꾸지 아니하고 나라에 도가 없는 경우에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절조를 바꾸지 아니한다. 나라의 도가 있을 때는 누구나 정당한 노력만 하면 출세도 할 수 있고 부자가 될 수도 있지만 도(道)가 없을 때는 정당한 사람일수록 국가의 핍박을 받게 된다. 보통사람은 궁색하게 있을 때는 절조를 지키고 있지만, 지위나 재물을 얻게 되면 그 지위나 재물에 마음이 팔려 궁색하였을 때 절조를 잊어버리기 쉽다. 몸을 중시하는 보통사람은 죽음을 가장 큰 슬픔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를 면하기 위하여 무슨 짓이든지 한다.
그러나 삶의 주체는 육체적인 요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 즉 성(性)에 있는 것임을 자각한 군자는 정치적 지위, 경제적 부, 죽음 등의 육체적 요소에 마음이 팔리지 않고 성(性)의 작용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 [제11장] — 중용(中庸),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
11-01 子曰 素隱行怪 後世 有述焉 吾弗爲之矣
02 君子 遵道而行 半塗而廢 吾弗能已矣
03 君子 依乎中庸 遯世不見知而不悔 唯聖者 能之
공자가 말씀하셨다. “은벽한 것을 찾고 괴이한 것을 행하는 것은 후세에 칭술함이 있지만 나는 그러한 것을 하지 않는다. 군자(君子)가 길을 따라서 가다가 길을 반쯤 가서 그만두기도 하지만 나는 그만둘 수 없다. 군자는 중용에 의지하는 것이니 세상에 숨어서 알려지지 아니하여도 후회하지 아니한다. 오직 성인(聖人)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자구(字句) 해석] ————
· ‘素隱行怪’에서 ‘素’는『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 인용된 글에서 ‘索’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도 ‘素’는 ‘索’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음도 ‘색’이다.
· ‘遯世不見知而’의 ‘ 遯’은 ‘숨다’의 뜻이다. ‘隱遁’ 그리고 ‘見’은 피동을 나타내는 말이므로 ‘見知’는 ‘알려지다’로 해석하면 좋다.
· 위의 문장에서 ‘君子’가 두 번 나오는데, 전자는 ‘진리에 뜻을 둔 구도자’를 말하고 후자는 ‘진리를 체득하여 진리의 모습으로 사는 성인’을 말한다.
[강설(講說)] ————
은벽한 것을 찾아내고 괴이한 것을 행하는 것은 자신이 남에게 알려지려는 마음에서 나타나는 거이며, 그 결과 후세 사람들은 그를 괴이한 사람으로 칭술할 것이지만, 남과 하나된 마음으로 남과 조화를 이루고 사는 공자는 이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 군자들 중에 중용의 도(道)를 실천하다가 도중에 그만두는 사람이 있지만, 공자는 최후까지 실천한다. 참으로 덕이 있는 사람은 남보다 유명해지려는 마음이 없이 오직 남과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루면서 산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에 숨어서 알려지지 아니하여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할 수 있는 참다운 군자가 바로 성인이다. 성인은 중용을 완벽하게 실천하는 자이다.
* [제12장] — 군자의 도는 가장 작은 것부터 가장 큰 것까지 다 적용된다.
12-01 君子之道 費而隱
02 夫婦之愚 可以與知焉 及其至也 雖聖人 亦有所不知焉
夫婦之不肖 可以能行焉 及其至也 雖聖人 亦有所不能焉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
故君子語大 天下莫能載焉 語小 天下莫能破焉
군자의 도는 널리 쓰이면서 은밀하다. 일개 부부(夫婦)의 어리석은 수준에서도 알 수가 있지만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며, 일개 부부의 못난 수준에서도 행할 수 있지만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비록 성인이라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천지가 아무리 커도 사람은 오히려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군자가 큰 것을 말하면 천하에 실을 수 있는 것이 없고 작은 것으로 말하면 천하에 쪼갤 수 있는 것이 없다.
[자구(字句) 해석] ————
· 여기서 말하는 ‘君子之道’의 ‘君子’는 상징적으로 설정된 완벽한 인격자이고, ‘道’는 군자의 실천 원리인 ‘중용의 도’이며 ‘聖人’은 구체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역사적인 인간이다.
· 여기서 말하는 ‘知’와 ‘行’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차원에서의 ‘知’와 ‘行’이 아니라, 의식이 작용한는 차원에서의 ‘知’와 ‘行’이고 ‘不肖’는 부모나 스승을 닮지 못하였다는 말이니 ‘못났다’는 말이다.
[강설(講說)] ————
중용의 도(道)는 천지만물의 공통적인 존재의 본질인, 속에 있는 마음이 외적 상황에 가장 알맞제 발현되어 조화를 이루는 것이므로 전체적이 조화 속에서 삶을 누리고 있는 만물은 모두 중용의 도를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중용의 도의 발현처인 마음의 깊은 속은 은밀하여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중용의 도의 쓰임은 넓지만 은밀하다고 한 것이다. …중용의 도는 쓰임이 넓기 때문에 못난 한 남자와 여자라 하더라도 행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은밀한 발현처는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성인이라 하더라도 다 행할 수가 없다.
천지가 아무리 커도 사람들은 오히려 작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군자가 큼을 말하면 그 군자의 말을 다 포용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며, 작음을 말하면 그것을 부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군자의 도는 그 쓰임이 한없이 넓기 때문에 천지보다 더 넓고, 그 발현처가 은밀하기 때문에 천하에 그보다 더 미세한 것은 없다고 한 것이다.
12-03 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
04 君子之道 造端乎夫婦 及其至也 察乎天地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솔개가 날아서 하늘에 이르거늘 고기는 못에서 뛴다” 하니 그 위와 아래로 나타남을 말한 것이다. 군자의 도(道)는 그 실마리가 부부 사이에서 만들어지지만,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하늘과 땅에 나타난다.
[자구(字句) 해석] ————
· ‘詩’는『시경(詩經)』대아(大雅) 한록편(旱麓篇)
· ‘鳶飛戾天’의 ‘戾’(려)는 ‘도달하다’, ‘이르다’의 뜻이다.
· ‘言其上下察也’에서 ‘察’(찰)은 ‘드러나다’, ‘나타내다’의 뜻이다.
[강설(講說)] — ① ‘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 ————
하늘에 날고 있는 솔개와 못에서 뛰고 있는 물고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상반된다. 하늘을 나는 솔개는 물속을 헤엄치지 못하고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는 하늘을 날지 못하므로 불공평하고 불평등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솔개의 존재의 본질이나 물고기의 존재의 본질은, 그 몸이 아니라 그 몸의 삶을 계속 유지시켜 가는 공통적인 ‘삶에 대한 의지’이니, 곧 ‘성(性)’이며 ‘하늘의 뜻[天命]’이다.
그렇게 존재의 본질에서 본다는 솔개와 물고기는 하나가 된다. 공통적인 ‘삶에 대한 의지’는 솔개와 같은 몸을 가진 존재에게 최선으로 유지시켜 주기 위해서 하늘을 날게 하고, 물고기의 몸을 가진 존재에게는 물속을 헤엄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삶에 대한 의지’에 충실하면 솔개와 물고기는 서로 대적하는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날고 있는 솔개는 그 자체로 자족하여 헤엄치지 못함을 불평하지 않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그 자체로 자족하여 날지 못함을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을 날고 있는 솔개와 물에서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는 존재의 본질인 ‘삶에 대한 의지’가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나타나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이를 보면 상반되고 대립된 관계에 있는 것같이 보이는 현상들도 사실은 조화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 [율곡 선생 이야기] — 삶과 죽음의 문제를 풀어낸 '연어(鳶魚)의 시(詩)'
조선조 중기의 철학자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은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을 여의고 18세 때까지 3년간 묘막(墓幕) 생활을 한 후 ‘사람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금강산(金剛山) 마하연으로 들어가 수도생활을 했다. 거기에서 작은 암자에서 면벽 중인 스님을 만나 문답을 주고받다가, 스님이 ‘나를 위하여 시를 지어 ‘연어(鳶魚)의 구(句)’를 풀이해 달라는 청을 받고 그 자리에서 ‘절구(絶句)’ 한 편을 썼다.
魚躍鳶飛上下同 물고기는 뛰고 솔개는 날지만 위아래가 같은 것
這般非色亦非空 이는 색(色)도 아니고 또한 공(空)도 아니다.
等閑一笑看身世 부질없이 한번 웃고 이 몸을 돌아보니
獨立斜陽萬木中 석양 빗긴 총림(叢林) 속에 홀로 서 있네
이 시를 보면, 율곡 선생은 물고기가 물에서 뛰고 솔개가 하늘을 나는 현상을 대립되고 상반된 것으로 보지 않고 동일한 존재의 본질이 위아래로 나타난 조화된 현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상반된 것으로 보이는 두 현상도 사실은 동일한 본질에서 나타난 조화된 현상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율곡은 ‘사람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유가사상(儒家思想)에서 해결되고 있음을 알게 되어, 산을 내려와 유가사상으로 회귀한다.
[강설(講說)] — ② ‘君子之道 造端乎夫婦 及其至也 察乎天地’ ————
대립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예(例)는 부부(夫婦)의 관계이다. 부부간의 갈등과 대립은 조화를 전제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므로, 그 대립과 갈등은 조화의 한 표현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파악되는 군자(君子)의 도(道)는 부부의 관계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
<중용 제3강,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