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장. 은원천리(恩怨千里) 2
쨍- 쨍강
얼른 눈물을 훔치고 칼부림의 현장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주시하고 있는 사내의 칼이 스스로 길을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저런 칼에는 초식이나 정해진 검로라는것이 무의미했다.
막히면 돌아 흐르고 덮으면 스며드는 물처럼 칼이 스스로 빈틈을 찾아 흘러가고 있었다.
"으흑-"
현란하기 짝이 없는 제왕성의 무공조차도 스스로 생명을 띤 채 살아 움직이는 그 칼을 다 받아내지 못하였다.
두 명의 가슴에 구멍이 나고 한 명의 목이 반쯤 잘린 채 쓰러졌다.
그 쓰러지는 순간마저도 칼은 호흡을 멈추지 않고 두 명의 가슴을 향해 살아 춤을 추었다.
놀란 척마단 사내의 칼이 그 칼을 쳐 올리자 튕겨 나간 칼은 그 사내의 눈을 파고들었다.
"크악-"
고통을 못이긴 사내가 바닥을 뒹구는 순간 동료의 눈을 파낸 그 칼은 나머지 한 명의 목을 잘라왔고 사내가 풀쩍 뒤로 뛰어 나서자 그 칼은 주인의 손에서 날개가 달린 것처럼 빠져나와 자신이 노린 먹잇감의 복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수리검처럼 날아와 자신의 복부에 박힌 칼을 믿기지 않는 눈으로 내려다보던 사내가 고개를 들어 정사청을 쳐다보고는 쿵 하고 바닥을 굴렀다.
"이놈-"
좀 전에 안쪽 눈을 꿰뚫린 사내가 발악을 하듯 칼을 놓은 정사청을 향해 달려들었고 단리장영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펑-
폭음과 함께 척마단 사내의 가슴에서 손가락만 한 구멍이 생기고 피분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곧이어 등 뒤에서도 같은 크기의 구멍과 피분수가 터져 나오며 경악에 찬 눈을 부릅뜬 사내가 천천히 무너졌다.
척마단 무리들을 척살한 사내가 무심한 얼굴로 단리장영에게로 다가왔다. 단리장영이 주춤거리며 일어서려 했지만 기력이 모두 고갈된 그녀는 헝겊 인형처럼 풀썩 쓰러졌다.
"업히시오!"
정사청이 단리장영을 등에 업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순간 등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린놈이 감히!"
척마단주 나백상이 이빨을 갈며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서. 어서 도망가야해요!"
단리장영의 기운 없는 목소리에서 더 이상 다급할 수 없는 긴박감이 묻어 나왔다. 정사청은 신형을 날렸고 나백상이 가소롭다는 듯 천천히 뒤를 따랐다.
"정말 놀랍군! 여긴 어떻게 알아냈나?"
어느새 정사청의 앞을 막아선 나백상이 대견스런 손자를 대하듯 정사청을 바라보았다.
며칠 동안 근처를 이 잡듯이 돌아다니며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여 정한 곳이 그곳이었다. 언뜻 보기엔 결코 동굴이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곳에서는 주위 사방의 상황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런데 철저히 경계를 서던 부하의 이목을 속이고 접근해서 남은 부하들을 모두 처치한 솜씨는 절로 혀를 내두를 만했다.
제왕성의 혈전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자신과 함께 탈출한 부하들은 일파의 명숙들과 겨룬다 해도 호락호락하지 않을 실력을 갖춘 무인들이었다.
"좋아! 정말 좋아! 크 하하하-"
나백상이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업고 있던 단리장영을 저만치 옆에 내려놓고 천천히 칼을 다잡는 모습에서 눈곱만큼도 주눅 들거나 흔들림이 없었다.
자신들의 거처를 정확히 찾아내고 단리장영을 구출했다면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을 터인데도 추호의 흔들림 없이 무심히 가라앉은 눈빛은 적아(敵我)에 앞서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찬탄을 자아내게 했다.
나백상 자신도 저 나이 때는 저런 눈빛을 하지 못했는데 정말 좋은 자질을 가진 탐나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것이 적대감보다는 절대강자로서의 여유와 함께 강한 호감으로 표출되었다.
"야 이놈아! 싸울 땐 싸우더라도 서로 인사정도는 하고 싸우는 게 무인의 예절이거늘 네놈은 그런 것도 안 배웠단 말이냐?"
나백상이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고함을 질렀다.
"돈이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는 법이지요. 인근의 심마니, 약초꾼, 땅꾼을 전부 동원했소!"
정사청이 조용한 음성으로 답했다
"하하하! 정말 좋은 방법이군. 그런데 우리가 이 근처에 있을 것이라고는 어떻게 알았느냐? 그렇게 범위를 정하지 않고 이 넓은 중원을 뒤진다면 일 년이라도 모자랄 텐데?"
나백상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 정사청을 바라보았다.
"나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역으로 짚어 나갔을 뿐이오. 단리소저가 제 발로 나 단주를 따라 갔을 리는 없을 테고 납치해서 데려갔다면 인적이 없는 울창한 숲 속을 달려갔으리라 생각했소. 나 같으면 그렇게 했을 것 같소. 그리고 그렇게 멀리 이동 하다보면 아무리 노인이지만 남자가 정신을 잃은 소저를 납치해 가는 모습을 무심히 넘길 사람은 결단코 없는 법이지요. 그래서 되도록 이면 제왕성 가까운 곳에 있으리라 생각했소!"
정사청의 빈틈없는 생각에 나백상이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웃었다. 정말 볼수록 탐나는 놈이라고 몇 번씩이나 속으로 되 뇌인 나백상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네 녀석의 이름과 사문은 어떻게 되는 거냐? 그 정도는 나도 알 권리가 있다고 보는데!"
영악스런 손자와 함께 어떻게든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조부처럼 나백상이 칼을 잡을 생각은 않고 정사청을 응시했다.
"이름과 사문은 버린 지 오래됐소. 그러니 알려줄 수가 없음을 양해하시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 하오만...."
다시 한 번 칼을 다잡은 정사청이 싸울 거냐 말 거냐는 듯 나백상을 쳐다보았다.
"크 하하하-"
나백상이 광소를 터뜨린 후 천천히 칼을 들어 올렸다.
"그동안 내상을 치료 하는라 뼈마디가 굳었는데 그것도 풀 겸 또 완벽한 치료가 되었는지도 궁금하던 차인데 한 판 신나게 어울려 보도록 하지!"
나백상이 우두둑 손마디를 꺾었다. 그리고 목덜미와 허리를 툭툭치며 자고 일어난 노인네처럼 몸을 풀었다.
'어렵다!'
정사청은 나백상의 한 동작 한 동작에서 뿜어 나오는 절대강자의 기운을 느끼며 온몸 근육을 팽팽히 긴장시켰다.
어차피 칼을 잡는 순간부터 죽음은 예약되었던 일, 지금 당장 나백상의 손에 죽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칼 든 자의 운명일 뿐이다.
하지만 자신이 진 빚을 다 갚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너무나 한이 되는 일이다.
슬쩍 단리장영을 돌아보았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기력 없이 주저앉아있는 커다란 눈망울에 온통 염려의 빛이 가득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투지가 솟아올랐다.
설사 이 자리에서 나백상의 칼에 천 갈래 만 갈래 찢긴다 하더라도 저 여자만큼은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온 가슴속에 가득 찼다. 그리고 그 열망은 고스란히 눈빛으로 폭사되었다.
"좋아 정말 좋아!"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 한 나백상이 칼을 뽑아 들었다.
"자 오너라! 내 이 자리에서 네놈에게 진정한 무학이 어떤 건지 아낌없이 견식 시켜주마!"
나백상이 태산처럼 버티고 섰고 그 기세를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정사청이 나백상을 쓸어갔다.
휘익- 휙
허공을 가르는 칼바람 소리가 땅거미가 내리 깔린 야산 자락을 휘 감았다.
째쟁- 쨍
몇 번의 신법으로 여유롭게 피하던 나백상이 소홀히 보아 넘길 칼이 아니라 여겼는지 들고 있던 칼을 마주했다.
"어린놈이 어디서 이런 칼을 얻었느냐!"
훌쩍 물러난 나백상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정사청을 바라보았다.
처음 가슴을 찔러오던 칼은 소림의 칼이었다. 그래서 그 초식으로 마주쳐 나갔는데 어느새 미끄러진 칼이 허리를 쓸어왔고 허리 어림에서 무당의 칼이 불쑥 튀어 나왔다.
흠칫 놀란 얼굴로 재빨리 막아가자 삼재검법의 횡소천군이 자신이 막은 그 칼 사이로 유효적절 하기 짝이 없게 밀고 들어왔다.
이건 보통 놈이 아니다 하고 화급히 칼을 마주친 후 다시 격돌한 자리에서도 도저히 형과 식을 종잡기 힘든 칼들이 구석구석을 찌르고 자르고 쳐 올리며 날아들었다.
"도대체 그건 누구의 칼이냐?"
나백상이 물끄러미 정사청의 칼을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어떤 외로운 노인에게 배웠지만 결국은 내 칼이오!"
정사청이 담담히 답하며 나백상의 시선을 마주쳐왔다.
"하하하...정말 좋아! 거듭거듭 이 말 밖에는 할말이 없을 정도로!"
누구에게 어떻게 배웠건 결국 칼은 휘두르는 사람의 것이다.
가장 단순한 삼재검법이라도 나백상 자신이 휘두른다면 어느 문파의 장문인도 쉽게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칼이란 게 어떤 초식으로 휘두르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순간 어떤 곳을 얼마만큼 빠르게 찔러 넣는가가 더 중요하다.
어떤 순간과 어떤 곳을 정확히 찾아낼 수 있는 실력을 가진 고수라면 삼재검법의 단순한 검초라도 그것을 막을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조금 전 몇 차례 검을 나눈 저 놈은 그 순간과 그곳을 찾아 물이 흐르듯 막힘 없이 칼을 휘둘러 왔던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직 젊은 나이라 내력의 축적이 부족하여 그 찌르는 강도가 약하다는 것이다. 그것마저 어떤 경지를 넘어선다면 나백상 자신도 그 칼을 완벽히 막을 자신이 없었다.
'조금만 더 커서 만난다면 정말 좋은 상대가 되겠군!'
내심 중얼거린 나백상이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칼을 휘둘러 정사청에게로 달려들었다.
쨍- 쨍강
때로는 물이 흐르듯 때로는 파도가 쇄도하듯 살아 춤을 추던 정사청의 칼이 이 십여 합을 겨루고 나자 나백상의 노도 같은 내력과 잠마혈경의 악마적인 검초를 이기지 못하고 무디어지기 시작했다.
쨍그랑-
정사청의 칼이 땅에 떨어졌다.
"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지켜보던 단리장영이 비명을 토했다.
칼을 놓친 정사청의 팔뚝에 큰 상처가 뱀처럼 기어가고 그 자리에서 선혈이 솟구치고 있었다.
"이놈아! 아무리 찌를 자리를 정확히 잘 찾아간다고 해도 마지막 순간에 그 자리를 완벽히 점할 능력이 없다면 언제나 이런 꼴이 되는 법이야!"
나백상이 철컥 하고 칼을 집어넣었다.
"죽이지 않소?"
정사청이 무심한 눈빛으로 나백상을 쳐다보았다.
"왜 죽여야 하나?"
"지금 날 죽이지 않으면 언젠가 당신이 괴로울 텐데....!"
"그런가? 그럼 기다려보지! 네놈이 정말 그만 한 능력이 있는 놈인지! 때로는 그런 기다림이 나같이 늙은 무인의 낙이기도 하고!"
나백상이 등을 돌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나백상의 뒷모습에서 정사(正邪)를 따지기 이전에 일대종사의 냄새가 물씬 풍겨져 나왔다.
"천천히 이 물을 마셔 보시오!"
정사청이 단리장영에게 물통을 내밀고 물을 마시게 했다.
몇 모금 물을 마신 단리장영이 심하게 기침을 하며 등을 구부렸다.
"업히시오! 마을에 데려다 주겠소!"
정사청이 등을 돌려대자 단리장영이 도리질을 했다.
"아니에요! 좀 더 이렇게 있고 싶군요. 그 보다도 공자님의 상처를...."
단리장영이 힘없는 팔로 정사청의 팔을 잡았다
"괜찮소. 이미 지혈은 시켜 두었소!"
정사청이 팔에 길게 그어진 상처를 쳐다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상의 한 자락을 쭉 찢어 둘둘 감았다.
"언제나... 언제나 이렇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으시나요?"
단리장영이 젖은 눈빛으로 정사청을 바라보았다.
"물을 좀 더 마시시오!"
단리장영의 눈빛과 질문을 함께 회피한 정사청이 다시 물통을 단리장영의 입에 갖다 대었다.
한 모금 더 물을 마신 단리장영이 다시 기침을 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의원에게라도 가야겠소. 어서 업히시오!"
정사청이 재촉했지만 단리장영은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애타게도 그리웠던 사내였다. 지금 이 사내의 등에 업혀 마을로 내려가고 그래서 안전한 곳에 눕혀 진다면 사내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럴 바엔 오늘밤을 더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 하더라도 이곳에서 같이 있고 싶었다.
긴장이 풀리고 오래된 장작처럼 바짝 마른 몸에 물기가 스며들자 한기와 열기가 한꺼번에 온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 현기증이 밀려왔다.
'안돼! 정신을 잃어서는!"
단리장영이 나무 그루터기를 잡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단리소저! 괜찮소! 정신 차리시오!"
정사청의 다급한 목소리가 아득해지며 단리장영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곳은!"
단리장영이 눈을 뜨자마자 주변을 살폈다.
며칠을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방을 살피던 장영이 후-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민가나 의가(醫家)의 방이 아니었다.
습한 흙 내음과 바위에 붙은 이끼 냄새가 풍기는 동굴 안이었다.
그렇다면 그 사내는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동안 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자신을 간호하며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일어나 앉았다.
금방이라도 일어나 뛸 수도 있을 만큼 몸이 가볍고 기력이 돌아와 있었다.
주위에 널려져있는 나뭇잎과 잘게 잘라져있는 나무 뿌리들이 약초임에 틀림없었다. 그것들로 즙을 내어 자신의 입에 흘러 넣었나 보다!
"정신이 들었소?"
정사청이 가운데가 움푹 파인 돌에 약초즙을 담아들고 들어왔다. 마을에라도 갔더라면 그릇을 구했을 것인데 한시도 이곳을 떠나지 않은 모양이다. 가슴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열기가 온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마셔 보시오!"
정사청이 들고 있던 돌그릇을 내밀었고 단리장영이 한 방울도 흘릴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그것을 마셨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쓴맛과 함께 푸성귀의 비린내가 비위를 자극했다.
절로 눈이 감겨 왔지만 이것을 만드느라 몇 시진을 고생했을 사내를 생각하니 한 방울도 남길 수가 없었다.
모두 다 마시고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는 단리장영을 정사청이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몸은 좀 어떠시오?"
"날아갈 듯 하군요. 제가 얼마나 누워 있었나요?"
단리장영이 돌그릇을 내려놓으며 정사청을 바라보았다.
"오늘이 사흘째요!"
단리장영의 눈이 주위를 훑었다.
"지금은 어느 때 인가요?"
"좀 전에 해갸 졌소!"
단리장영이 다시 한 번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아무리 무심한 사람이지만 기력이 회복되었다고 한 밤의 깊은 산중에 자신을 혼자 두고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많이 잤군요!"
정사청이 아무 말 없이 옆에 놓인 약초들을 다시 돌그릇에 담았다.
"이젠 그만 마시겠어요. 정신이 없을 때는 모르겠지만 맨 정신으로는 마실 만 한 것이 못 되는군요! 그리고 기력도 회복 된 것 같아요!"
장영을 한 번 훑어본 정사청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돌그릇을 치웠다. 그리고는 약초 부스러기들과 자신의 잠자리로 만들어 놓은 건초 더미들을 치우며 주변을 정리했다.
장영은 그런 정사청의 행동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다시 눈을 붙이고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저 사내는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고맙다는 말도 못했군요!"
장영이 조용히 정사청을 바라 보았다.
"빚을 갚으려 했을 뿐이오!"
정사청이 여전히 자신이 치우고 있는 물건들에 시선을 둔 채 억양 없이 대답했다.
"제게 무슨 빚을 졌던가요?"
말을 하고 난 장영이 후회로 가슴을 쳤다.
이년 전 비영단 무사와의 결투를 말린 일을 저 사내는 큰 빚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질문으로 저 사람은 그 치욕스런 일을 떠 올려야 할 것이다.
"소저로 인해 내 목숨이 아직 붙어있는 것이고 그것은 빚이지요!"
예상대로였다.
빚을 지우고 그 빚을 받으려고 한시도 잊지 못하고 그리던 사내가 아니었다.
다시 만난다면 몇 달이 결려도 다 하지 못할 만큼 할 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이런 말 밖에 나누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안타까웠다.
여전히 자신을 외면하며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정사청을 조용히 바라보던 단리장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이 아니면 애타게 그리웠던 저 사내에게 자신의 마음을 영원히 전하지 못할 것이다.
"전 말이에요....."
단리장영의 음성에 애한(愛恨)이 묻어 나왔다.
정사청도 그것을 느꼈는지 흠칫 몸을 굳히며 외면하려 했지만 장영의 말은 그치지 않았다.
"정 공자님의 모습이 사라진 후부터 지금까지 단 한시도 공자님을 잊은 적이 없어요. 꿈속에서... 꿈속에서도 그리워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난 무당의 사람이오!"
정사청이 급히 단리장영의 말을 막았다.
"버렸다고 하지 않았나요? 사문도, 이름도 모두다....?"
정사청의 대답이 이어지지 않고 침묵이 흘렀다.
"이젠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가문도, 이름도 모두 버렸어요! 너무 싫어요 모든 것이....!"
장영의 두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동안 감옥 같은 처소에서 당신의 모습을 그리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었어요. 당신은 빚을 졌다는 생각에 단지 그 빚을 갚기위해 내 모습을 기억했을 지 모르지만 난... 난 내 모든 걸 포기할 결심을 하며 당신을 그렸어요..."
단리장영이 얼굴을 양 무릎에 파묻고 오열했다.
나백상에게 납치되어 와서 그동안 제왕성과 백도무림, 그리고 율자춘과 잠마혈경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하늘처럼 존경했던 아버지와 백도의 우상이라 자부했던 자신의 가문이었는데 이젠 모든 가면이 벗겨지고 만인 앞에 드러난 얼굴들은 야욕이 일그러진 아수라의 얼굴과 다를 게 없었다.
그 한없는 절망과 허탈함에 천길 나락으로 떨어지는 심정을 맛보았고 한 모금의 물도 입에 대지 않고 그렇게 위선과 허욕으로 얼룩진 세상과 작별하고 싶었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며 공복감에 뒤틀리고 조여오는 뱃속의 고통을 참으며 며칠이 더 지나고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온통 그 의식을 뒤덮은 얼굴은 정사청이었고 꿈인지 생신지 구별이 안 되는 상황 속에서 정말로 그 사내는 자신을 찾아와 자신을 구해낸 것이다.
이젠 몸을 추스르고 죽음을 의식하는 순간까지도 생각나던 그 사내 앞에 앉았건만 현실의 벽은 치워지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똑 같은 사내의 무심한 눈빛에 장영은 그 동안 절제하고 있던 모든 감정의 둑이 무너지며 흐느꼈다.
"난 사문도 이름도 모두 버렸지만 버리지 못한 것이 두 가지 있소!"
오열하는 단리장영의 귓속으로 정사청의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 들었다. 옷 소매롤 눈물을 닦으며 단리장영이 정사청을 쳐다보았다.
"모든 걸 다 버려도 내 사부와 사제는 버릴 수 없소!"
정사청이 천천히 말했고 단리장영의 얼굴이 창백해 졌다.
좌설연으로부터 정사청의 사부 한중광과 사제 이가송에 대해서 틈나는 대로 자세히 들었었다.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좌설연과의 대화는 자연스레 정사청의 이야기로 흘러갔고 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람됨과 그가 사부와 사제를 얼마나 깊은 정으로 대하는지 어린 시절부터 같이해온 사부와 사제의 이야기를 좌설연으로부터 들을 때는 때로는 가슴 뭉클함에 밤잠을 설쳤고 때로는 상상도 못한 엉뚱함과 통쾌함에 박장대소하며 웃다가 혹 누가 보지나 않았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부와 사제에 대한 그의 정이 어떤지는 단리장영 자신도 잘 아는 바였다. 그런 그의 사부와 사제의 불행이 모두 제왕성에 기인된 것임을 이젠 명백히 알게 되었고 절망감에 눈앞이 캄캄해 졌다.
"그렇군요! 결국... 결국 저는 원수의 딸이군요!"
단리장영이 넋이 다 나간 사람처럼 공허하게 중얼거렸다.
절망으로 무너지는 듯한 단리장영을 바라보며 정사청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그런 뜻은 아니었소!"
이제까지 무심하던 음성과는 확연히 다른 정사청의 다급한 목소리에 단리장영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사청을 바라보았다.
"나에게는 아직 할 일이 있다는 말이었소!"
단리장영이 아직 이해되지 않는 듯 정사청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광인으로 내 몰렸던 사부를 원래의 자리로 모셔다 놓고 사제도 철없이 날뛰지 않게 지켜야 하오. 그런 후라면 칼을 버리고 평범한 촌부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오!"
단리장영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사제가 살아 있었나요?"
"그렇소. 이젠 나로서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광폭해져서 야차같이 설치려 하고 있소. 하지만 아직은 좀 더 지켜 주어야 할 것 같소. 그리고 사부의 자리를 차지한 사숙의 마수가 조만간 사부에게 뻗칠 가능성이 있소. 그것도 서둘러 손을 써야 할 일이요!"
"아아! 천지신명이여...."
단리장영이 하늘에 대고 감사하는 심정이 되었다.
그의 사제가 멀쩡히 살아있고 그리고 그의 사부 또한 그의 손으로 지켜 낸다면 그와 자신은 직접적인 원수지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지의 과욕과 그로 인해 얽힌 더 근본적인 흑백양론의 문제는 칼을 버림으로서 무의미해 질 것이다.
단리장영이 천천히 동굴 벽에 등을 기대었다.
무심히 단리장영의 그런 변화들을 지켜보던 정사청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문득 두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손에 든 칼과 함께 한 가지 목적밖에 없었던 그 목석 같은 사내도 애절한 사랑 앞에서는 무너지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동안 자신의 무심함을 후회하지 않았던가! 이젠 정사청 자신도 그런 무심함으로 한 여자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일어납시다. 소저!"
정사청이 몸을 일으키며 단리장영의 손을 끌었다.
단리장영이 흠칫 놀라며 자신의 손을 잡은 정사청의 손을 바라보다 걱정스런 얼굴로 정사청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시간이 많지 않소. 한시라도 빨리 무당으로 가서 사부 주변을 살펴야 하오!"
정사청이 단리장영의 손을 끌어 동굴 밖으로 나왔고 단리장영이 안절부절못하며 정사청의 기색을 살폈다.
"소저가 묵을 만한 좋은 곳이 있소! 언젠가 칼을 버리고 그곳으로 가서 평생을 학을 돌보며 살아가려 했소. 소저가 원한다면 그곳에 방 한 칸을 내어줄 수 있소!"
"당신 정말!"
단리장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망연한 얼굴로 정사청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예측 불허하게 행동하며 사람을 종잡을 수 없게 하나요?"
"그랬다면 미안하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데 남들에겐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오!"
정사청이 천천히 자신의 겉옷을 벗어 단리장영의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등을 돌려댔다. 업히라는 뜻이었다.
"아니에요! 이젠 기력이 다 회복되었어요!"
"아직은 무리요!"
정사청이 거절하는 단리장영의 팔을 당겨 등에 업었다.
이미 업힌 적이 있는 정사청의 등이었으므로 단리장영도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나에겐 누이가 있었소! 살아 있다면 소저의 나이거나 아니면 한두 살 더 많았을 것이오. 웃을 때는 소저처럼 백목련이 활짝 피는 듯 했지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어가는 정사청의 등에서 단리장영은 숨을 죽였다.
"소저가 그동안 내 생각을 했듯이 나 역시 그동안 또 다른 수련을 하면서 소저의 그 백목련 같은 미소를 잊은 적이 없었소! 단 하루라도..."
그러고도 좀 더 정사청의 말이 이어졌지만 단리장영의 귀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볼을 타 내린 두 줄기 눈물이 정사청의 목덜미를 적시든, 성숙할 대로 성숙한 가슴이 정사청의 등을 압박하며 찌그러지든, 그런 것들은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는 듯 정사청의 목을 감은 단리장영의 팔은 점점 힘을 더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