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38~151
잃어버린 전통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로마 8,22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요한 16.12
내가 이 책에서 말하려는 내용이 크게 보면 하나라는 사실을 짐작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과의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만남이 하느님과의 합일로 가는 가장 분명한 길이라는 생각, 자기를 방어하지 않고 비이원적으로 지금 여기에 벌거벗고 현존하는 것이 '참으로 현존하시는 분'과 만나는 최선의 기회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나는 지금 한 가지 주제를 놓고 수백 가지 방법으로 접근하는 중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다양한 수준으로 저마다 이 주제를 회피하고 거절하고 저항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웬일인지 이 복잡한 세상에서는 단순한 것을 가르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모든 '신비'가 다양한 수준의 드러냄과 깨달음으로 가득 차있다. 특히, 관상적인 깨어남인 '생명나무'의 신비가 그렇다.
나는 에덴동산 '중심부'에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세 2,9 에 견주어 '생명나무'를 관상이라고 부른다. 이 두 나무가 사람의 두 마음을 보여주는 이상적인 은유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원론을 나타낸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그것을 먹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신다. 생명나무는 사람을 영원히 살게 하는 창세 3,22 열매를 '일 년에 열두 번' 매달 맺고 '그 잎은 사람의 병을 고치는 약이 된다.'묵시 22,2 그 나무는 하느님과 자아의 깊은 바탕에 닿아있다. 관상에 근거한 비이원적인 마음은 인간의 영혼과 세계를 위하여 일 년 열두 달 끊임없이 열매를 맺는 나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해야 하는 이원 시스템은 논리학, 수학, 공학, 과학의 영역에서 그리고 어디로 가려면 좌회전을 할 것인지 우회전을 할 것인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하고 유용하다. 오늘 우리가 그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는 산업혁명이 바로 이것의 산물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 앞에서 이원 시스템이 그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 시스템은 우리를 아주 멀리 데려왔지만 중심으로는 데려가지 못했다. 그것은 생명을 주는 나무가 아니다. 단지,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일 뿐이다.
매력 있고 알 수 있는 사물의 앞면을 보고 즐기면서 동시에 그 감추어진 면, 그 '너머'와 어두운 면을 받아들이는 것은 비이원적 의식을 지니기 시작했다는 증표다. 무엇의 장점과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면서 그것의 단점과 한계를 아울러 인정하는 것 또한 지혜와 비이원적 의식의 증표다.
사람들 대부분이 사물의 어두운 면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을 잘 못한다. 차라리 '신음한다'는 바오로의 표현이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 같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말해주는 사람이 근래에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동산 중심부에 있는, 뿌리를 깊고 넓게 뻗은 생명나무야말로 그것을 말해줄 수 있 다. 어쩌면 그에 대한 좀 더 익숙한 단어는 '용서'라는 단순한 단어이리라. 눈앞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용서하려는 노력이 우리를 이끌어 비이원적 의식으로 데려간다. 우리가 깊은 상처와 기억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에고와 이성의 다스림을 넘어서야 한다. 즈카르야의 아름다운 노래처럼, 우리는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깨닫게 될 것이다.루카 1.77 그래, 그것이다!
이 땅에서 살려면 누구나 상반됨과 모순을 조화시켜야 하는 긴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상생활에서 겪는 이런저런 일들이 더 이상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이 아닌 방식으로 우리에게 비이원성을 가르쳐 준다. 모든 사람, 모든 사물, 모든 사건, 모든 관념에서 비이원성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겉모습만 슬쩍 보는 눈에는 감추어져 있다. 창조된 모든 것이 소멸되는 중이고 유한하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언제나 역설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역설은, 이렇게 보면 분명히 서로 상충되고 불가능해 보이는데 다른 차원에서 다른 틀로 보면 그 자체가 진실임이 보인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나는 그것이 균형 있는 행동, 분명한 결론, 확고 한 결심을 다지는 게 아니라 진정한 긴장을 유지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싶다. 그것은 최소한 얼마 동안이라도 확고한 결심 없이 살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 모두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확고한 결심 없이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럴 수 있다는, 아니 그래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누가 우리에게 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보지 못하고,할 수 있으니까 하라고 말하지 않은 일은 하지 못한다.
바오로가 말했듯이 희망이라고 하는 게 금방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그래서 '참고 기다려야'로마 8,24-25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걸 어찌 희망이라 하겠는가? 저명한 유다인 그리스도교 구도자였던 시몬 베유는 이것이야말로 신앙과 영성 추구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영웅 적인' 창조적 긴장 속의 삶을 훌륭히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이 '열려있으면서 붙잡는 양식'이 신앙의 본디 이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신앙은 어떻게 자기를 열어놓고(믿음), 그리스도의 법을 붙잡고(희망), 자기 아닌 다른 근원에서 오는 기운으로 자기를 채울(사랑) 것인지에 대하여 알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닦는 게 아니라, 어떤 사실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믿는(머리로 동의하는) 것으로 되었다. 이 책에 부록으로 몇 가지 수련법이 소개되어 있어서 독자들은 이 덕목들을 '실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평범한 일 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수련 기회를 제공하신다.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사람과 만날 때, 좀처럼 바뀌지 않는 신호등으로 급한 걸음이 묶여있을 때, 스스로 봐도 변덕스럽게 이랬다저랬다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가 모두 좋은 수련 기회이다.
우리는 신조를 바탕으로 삼는 종교에서 수련을 바탕으로 삼는 종교로 옮겨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별로 달라지는 게 없을 것 이고, 자기가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처럼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인지에 대하여 끝없이 토론할 것이다. 힌두교, 유교, 도교, 수피즘, 불교, 이스라엘 예언자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과 고대 금언집에 담겨있는 지혜를 보라. 예수의 가르침조차 너무 난해하거나 순진하거나 엉뚱하게 여겨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익숙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더 이상 그의 비유를 해독할 암호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해거름에 와서 일한 사람이 새벽부터 일한 사람과 같은 삯을 받는다는 얘기를 보자. 이것 아니면 저것일 뿐인 눈으로 또는 합리적인 눈으로 볼 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린가? 그래 서 우리는 그 이야기를 거부하거나 못 들은 척하거나 아니면 아예 잊어버린다. 서양에서 예수는 새로운 마음의 대변자로 인식되었지만 그 새로운 마음은 1, 2세기 사막의 교부들과 초창기 수도원 특히 헤시카스트(동방교회의 신비적 정적파-옮긴이)와 켈트 그리스도교, 그리고 소수의 성인, 신비가, 수도자가 그 명맥을 유지 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온전한 상태를 보존하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이른바 주류 그리스도교에서 스스로를 분리해야 했다. 많은 경우 우리는 그것을 '수도생활'이라 불렀고, 이들과 비이원적 사고에 저항하는 주류 그리스도교인들을 구별하는 이중 체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관상의 소멸
세월과 함께 적어도 가톨릭 세계에서,많은 수도자와 탁발승들이 제도와 기관에 들어가 일하게 되었고 전례에 몰두하느라고 '카리스마'라 부르는 변화의 전통을 상실했다. 그리하여 사람을 변화시키는 본디의 그리스도교Christianity보다 교회교Churchianity 로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교회교와 그리스도교가 그렇게 상충할 필요가 없는데도 우리는 복음에 따른 생활보다 성사들을 더 중시하도록 교육받았다. 그러나 복음을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 복음을 실천하는 생활양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복음 생활Gospel life이라는 말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복음이 생활양식이라기보다 특별한 신조와 제도에 속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 수도회 사부인 성 프란치스코가 회복하고자 애쓴 것이 수도회와 내적 체험 또는 카리스마의 통합이었다. 그 둘이 균형을 이룬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보다는 긴장을 유지하면서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결혼이 그렇고 다른 인간관계가 그렇듯이 균형을 이루려는 행위 자체가 바로 우리가 더욱 깊어지는 길이다. 결국은 모두가 '그리고and'의 작품인 것이다.
지혜의 전통은 언제나 비주류인 듯하다. 적대자들 앞에서 합리적이고 체계적이고 방어적이어야 하는 주류 전통에게는 수상쩍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그래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그대들을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떼 속으로 보내는 것 같다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세상의 나쁜 사람들이(착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공격해 오는데 자기를 방어하지 않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한 거룩한 예수회원이 예언하기를, 그리스도교는 그 동안 합리적 구조에 너무 깊이 빠져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다른 종교들보다 더 많이 자신의 신비주의 전통을 위하여 싸워야 할 것이라고 했다.
15, 16세기에 이르러 관상 전통이 기울어지기 시작하면서 유럽 전체를 휩쓴 종교개혁 바람과 함께 우리는 방어적 . 공격적 사고방식에 빠져들었다. 가톨릭 수도회와 정교회 수도회도 마찬가지였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그 자체로서 하느님께 감사드릴 일이지만, 프로테스탄트protestent라는 이름이 암시하듯이 양쪽 진영 모두 공격하고 방어하는 정신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불행하게도 이원적 사유는 존 웨슬리, 조지 폭스 등 몇 사람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종교개혁자에게서 발견된다. 너무 많은 개혁자와 너무 많은 교황이 화가 났고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에 사로잡혀 한 발짝도 자기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물론, 관상은 그런 게 아니다!
많은 가톨릭 신자가 관상의 전통을 상실한 반면, 많은 정교회와 개신교 신자는 오히려 그것을 재발견하는 역사적 과정이 있긴 했으나, 그럼에도 '가톨릭(보편적)'은 교회의 바른 방향을 가리키는 좋은 이름이다. 무엇을 상대로 하여 분리하거나 저항하는 뜻이 그 안에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톨릭'은 1054년 처음 분열이 일어 나기까지 1000년 동안 그리스도교 전체가 사용한 이름이었다. 그러다가 서로 갈라진 다음부터, 마치 싸움 끝에 이혼한 부부처럼 저 마다 자기가 '옳다'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다투고 갈라진 자들로서 는 자기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겠다. 계몽주의가 관상의 관棺 뚜껑에 마지막 못질을 했다. 종교는 '새로운 적'으로 등장한 합리주의, 세속주의, 과학주의에 두려움을 느껴 전보다 더 강하게 반대하고 방어적으로 변했다. 무엇을 공격하거나 방어해야 할 때, 무엇을 조작하거나 저항해야 할 때, 무엇을 밀거나 당겨야 할 때 당신은 관상적일 수 없다. 사방이 적으로 에워싸인 상태에서는 누구라도 이원적일 수 있다. 당신은 그런 태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많은 경우에 당신은, 당신이 적대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변한다.
'적대자들'이 정결예식을 무시한 예수, 안식일을 어기는 예수를 보고 깜짝 놀라서 비난을 퍼부을 때, 예수는 합리적 이론으로 그들을 설득하거나 논쟁으로 이기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자기 제자들에게 말한다.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면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들은 눈먼 자들이다. 만일 그대들 이 그들을 똑같이 적대한다면 그대들도 눈먼 자들이고, 눈먼 자 가 눈먼 자를 인도하면 둘 다 구렁에 빠질 것이다.마태 15.13-14 이것이야말로 심오한 가르침이다. 우리가 비폭력이라는 단어를 쓰기 훨씬 전에 예수는 비폭력을 가르친 것이다.
1950년대 이전에는 서양에 비폭력이라는 말이 없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어란 그런 것이다. 말은 사람이 먼저 경험하거나 상상한 뒤에 만들어지는 법이다. 머잖은 장래에 '비이원론'이라는 말이 그렇게 되기를 나는 희망한다. 웬일인지 서양인들은 '비非'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 낀다. 우리는 정통으로, 합리적으로 무엇을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알 수 있는 영역은 오히려 더욱 좁아질 따름이다!
최근에 재발견한 것들
역설적이게도 서양 그리스도교는 계몽주의Enlightenment를 적대하면서 자신의 독특하고 값진 '開明개명enlightenment'을 잃었다. 합리주의에 반대하느라고 스스로 합리적이 되어, 바오로가 말하는 비밀스런 "지혜"1코린 1,17-2,16를 잃은 것이다. 그것이 유럽에서는 신학이라는 고도의 학문적 형태로 나타났고, 미국에서는 좁은 비역사적 근본주의 형태로 나타났다. 둘 다 주로 머리, 그것도 왼쪽 뇌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고,따라서 인간의 고통, 치유, 가난, 환경, 생태, 사회정의, 포용, 정치적 억압 같은 문제들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최근 수 세기 동안 교회는 세계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변혁운동에 걸림돌이 되어왔다. 그 결과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별 볼 일 없는 집단, 심지어 신용불량 집단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제 역사는 우리를 거슬러 흘러간다.
토머스 머튼1910-1968은 이 점을 간명하게 지적한다. "우리는 지나치게 합리적이다. - 가장 좋은 것은 의식되지 않거나 의식 너머에 있는 것이다." 켄터키에 있는 시토회 수도승 토머스 머튼은 평생토록 동료 수도승들이나 교회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너무나 시대를 앞서갔고, 처음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기가 속한 전통에서 너무 멀리까지 갔기 때문이다. 그를 수상쩍게 본 미국 주교단이 공식 가톨릭 교리문답서에서 배제한 토머스 머튼을 나는 20세기 미국 수도승 예언자라고 부르겠다. 1950년대와 1960년 대에 머튼은 거의 혼자 힘으로, 오랜 전통의 먼지를 쓰고 있던 단어들과 참된 관상정신을 일깨워 서구세계에 다시 소개했다. 그는 또 하나의 전설적인 사람이었다. 1968년에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40년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그가 남긴 풍성한 열매들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용기에 힘을 얻어 커튼을 젖히고, 서양 그리스도교 대부분이 '벌거벗은 임금'임을, 아니 면 최소한 자신의 고유한 옷을 잃었다는 사실을, 달리 말해 예수가 그토록 잘 가르친 심오한 지혜의 전통을 거의 모두 상실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중이다.
1985년 피정을 지도할 때 갯세마니 수도승 한 분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토머스 머튼은 우리가, 관상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했죠." 듣기 거북한 말이지만 그의 말이 옳았다. 자기를 성찰하는 점에서는 착하고 거룩한지 모르겠으나, 자주 이원적 사유의 틀에 빠져서 자기와 남들에게 불필요한 괴로움을 안겨주는 사람들을 나는 여러 수도공동체에서 보았다. 지난 500년 동안 대부분의 관상수도자들이 아빌라의 데레사와 비슷한 어려음을 겪었다. 자서전에 보면 데레사는 "생각하는 기도를 유일한 기도방법으로 알았기 때문에 많은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프란치스코회의 프란시스코 데오수나1492-1542를 만나기까지 스승을 찾지 못했다. 그는 더 오래 된 전통을 알고 있었다. 한 탁발승은 그것을 '생각 없이 생각하기 no pensar nada; pensar sin pensar 라고 불렀다".
필자가 입회했을 당시, 우리는 새벽마다 기도실에서 20분 동안 침묵하며 무릎을 끓고 기도했다. 그러나 누구도 우리에게 '생각 없이 생각하기'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우리는 20분이라는 고통스럽고 긴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동료가 꾸벅꾸벅 졸면서 종내에는 '묵상기도'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것이 어김없는 실상이었다. 우리는 위대한 보나벤투라와 함께 그가 가르친" 오랜 전통을 상실한 희생자였다. 그가 남긴 저술에 모든 것이 담겨있는데도 우리는 누가 보라고 시키지 않은 것은 보지 못했고, 우리를 가르친 교사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은 경험할 수 없었다. 기도를 '거룩한 생각을 하는 것' 또는 '경건한 이미지들을 묵상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이원적 의식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당신은 그런 기도를 뛰어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빌라의 데레사가 그와 같은 기도를 '고통'이라고 부른 것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지력을 동원하여 생각하는 기도를 바치면서 한평생 살아온 수도자들에게도 그런 기도 방식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힘들고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그 때문에 힘들어하는 동료들을 본다. 그 공백을 부분적으로 '사회적 기도'가 채워왔다. 오늘의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공동기도문'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자기 안에 훨씬 큰 마룻바닥이 있음을 몰라서다.
우리는 이 잃어버린 전통을 아직 찾지 못했고, 아마도 그래서 수도회는 독신생활 말고는 그 어떤 진지한 대안도 세상에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독신생활이라는 것조차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이원적 사유의 틀을 더 굳어지게 할 따름이다. 우리는 정신과 몸과 마음에서 우리의 바탕이 되어야 하는 근본적인 대안을 잃어버렸다. 이 사회가 전통이 살아있도록 지켜주리라는 기대를 우리는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관상은 사고팔고 일하고 아이들 키우는 일에 사로잡혀 분주하기만한 우리에게 너무나 반문화적인 것이다.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 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루카 23,31는 예수의 말 그대로 되었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가르침도 세상에서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이 그를 탁월한 영적 교사로 인정하면서도 금방 포기하고 돌아서면서, 그의 가르침대로 지금 여기를 산다는 게 너무 어렵다고 말한다.
어떤 위안이 있다면, "맏물로 바치는 빵 반죽 덩이가 거룩하면 나머지 반죽도 거룩합니다"로마 11.16라는 성 바오로의 말에서 찾을 수 있겠다. 예수와 바오로는 자주 은유로 누룩을 활용한다. 하느님은 언제나 남은 자, 비판적 집단, 또는 창세기 18장 32절에 언급된 '의인 열 명'과 함께 일하신다. 하느님은 겸허하신 분이라서,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하는 적은 누룩처럼, 당신이 지으신 세계의 남은 대안으로 존재하신다.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으며 내가 이 책으로 세상에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관상적 정신의 르네상스다. 이것이야말로 종교가 세상에 주어야 할 유일하고 진정한 대안이다. 이 새로운 정신 없이는 종교의 교리, 도덕, 제도, 구조가 오해받고 오용되어 잘못 운영될 수 있다. 그릇이 작은 사람은 무엇이든지 작게 만드는 법이다.
이원적 사유의 틀에 갇힌 사람은 에고를 키우고 속이고 자기와 남을 통제하기 위하여 모든 지식을,종교적 지식까지도 이용한다. 그렇게 하면 효과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비이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과 제도를 바꾸기 위하여, 무엇보다 먼저 자기를 바꾸고 새로운 눈과 가슴으로 현실을 보기 위하여 지식을 활용한다. 그들은 인생의 갈등과 대결을 남에게, 다른 어딘가에 떠 넘기거나 투사하지 않고 스스로 안고 괴로워한다. 그것으로 배울 것을 다 배우기 전에는 인생의 아픔을 떨쳐버리려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제외하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수용하는 오수汚水 탱크처럼 사는 것이, 내가 말하는, 자기 생각에 휘둘리지 않고서 벌거벗은 지금을 사는 길이다.
이것을 기억하라. 나는 당신의 신념, 교리 또는 도덕률을 바꾸려고
지금 이 책을 쓰는 게 아니다. 다만 그것을 이해하는
당신의 마음에 변화가 있기를 희망할 따름이다.
그 변화가, 바뀌어야 할 것들을 모두 바꿔줄 것이다.
하지만 그 변학를 일으키는 건 당신이 아니라 다른 어떤 분이다.
바뀌어야 할 것들이 모두 바뀌면 그때 우리는 그냥 친구로,
그냥 사람으로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