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은 참 가난했다. 엄마는 오뎅장사, 개란 장사, 보험설계사,
앙고라 토끼도 키워봤지만 들인 돈만 날리고 돈은 벌지를 못하셨다.
망연자실ㅠ.ㅠ 엄마는 다 포기하시고 하나님만 붙잡으셨다.
어느날부터인가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신다고 국가에서 나오는 생활보호대상자 지원도 거부하셨다.ㅜ.ㅜ
나와 동생은 불안한 마음에 하나님도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고 국가지원을 안받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냐고 보챘지만 엄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ㅠ.ㅠ
그런 엄마가 너무 답답했다. 하지만 그런 엄마를 답답하게만 보시지 않고 안쓰럽게 보셨는지
하나님은 우리를 한번도 굶기신 적은 없으셨다.~.~;
요즘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하늘아래 한점 부끄럼 없이 살고싶다는 마음은 바보들이나 하는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같다.
어떻게 해서든 받을 수 있는 지원은 다 받아서 챙겨야 현명한 삶을 사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기꺼이 지원금앞에서는 자존심도 쉽게 내던진다.
예수병원에서 미숙아로 태어난 나.~.~;
엄마가 30세에 나를 낳으셨고 그 전에 수술전력이 있으셔서
아이를 자연분만 할 수 없다고 병원에서 말씀하셨다는데
수술에 대한 고통스런 기억이 있으셨는지 절대 자연분만하신다고 고집하셨다고 합니다.ㅠ.ㅠ
(엄마, 아빠에 대해서 나는 기억이 없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추측은 하지 않겠습니다.ㅠ.ㅠ 살면서 사람들이 하는
추측때문에 내가 얼마나 황당하고 억울했는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냥 내가 전해 들었던 얘기들만 들려드리겠습니다.~.~;)
엄마가 아주 어렸을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그 시절 시집을
가지 않으면 안되셨나봅니다..ㅜ.ㅜ 졸지에 천덕꾸러기가 된 엄마는
어려서부터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셨다고 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위에 통증이 심했는데 병원에서 위암으로 진단하고
대수술을 하셨고 개복해서보니 암이 아니라 위궤양이었다고..ㅜ.ㅜ
오진으로인한 수술..그리고 회복은 고스란히 환자본인 몫으로 남겨지니
병원에 대한 인상이 어떠하셨을지 짐작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고집스레 자연분만을 결정하셨어요.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낳은 아이가 2.5kg 미숙아에 황달이 심하고 젖도 빨지 못했다고 합니다.ㅜ.ㅜ
병원에서는 산모만 퇴원하고 아이는 잉큐베이터에서 더 키웠다가 데리고 가야 한다고하셨다는데
엄마는 그럴수 없다고 아이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셨다고.~.~;;
(엄마는 병원이 생명에 대해 크게 책임지지 못한다는 것을 정확히 아셨던 것입니다.
진료에 최선을 다하지만 그 어떤 결과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거기에 대한 책임은 환자가 지는 것이란 것을 이미 뼈저리게 경험하신 것입니다.)
젖도 빨지 못하고 황달이 심하니까 큰삼촌이 황달에 좋은 약초를 산에서 캐와서 먹이고
쌀을 묽게 갈아서 아이에게 조금씩 먹였다고
그렇게 어른들의 정성과 사랑으로 살이 토실 오른 나를 데리고
당당히 예수병원에 예방접종하러 가셨다고 합니다.~.~
엄마랑 같은 날 아이를 낳으셨던 분도 아이상태가 좋지않아 잉큐베이터에 놓고 퇴원하셨는데
그 아이는 하늘나라로 갔다고 전해들으셨다는.ㅜ.ㅜ 그러고보면 생명은 과학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 바로 정성과 사랑으로 살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멋진 장막을 각자 우리에게 하나씩 주셨어요.
그런데 나는 내 장막이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지 깨닫지 못하고 마구 다루었어요.ㅠ.ㅠ
우리 엄마가 어려서 광복도 맞이하시고 6.25전쟁도 겪으시면서
땅속에 굴을 파서 숨어 계시기도 하셨다는데...
그 시대에 어른들이 얼마나 팍팍하셨을지 그림이 그려집니다.ㅠ.ㅠ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이었겠죠?!! 엄마가 서너살 즈음 밖에 나가
수수껍질을 벗겨 수수대의 단물을 빨아 드시다가
그만 그 날카로운 껍질에 혀가 짤렸다고 하셨어요.
혀의 한쪽 끝만 간신히 붙어 있으셨다는데
지금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을텐데요.
그때는 아니었나봐요. 전쟁으로 사람들이 퍽퍽 죽어갔으니 말이예요.ㅠ.ㅠ
어린 엄마는 혀가 잘려서 아프고 앞으로 장애를 가질 수 있다거나 죽을 수 있다는 생각보다도
부모님께 혼날 생각에 잔뜩 얼어 있었다고 해요. 그 날 하루동안
절대 입을 벌리지 않으리라 말도 안하리라 스스로 다짐하고ㅜ.ㅜ
저녁에 살짝 입을 벌려서 혀를 움직여보니 어느새 모두 붙어있었다는...@.@;;
그 이야기를 듣고 먼 훗날 우리 첫째가 막 아장아장 걷다가 가구모서리에 입술
안쪽 얇은 막이 찢어졌어요.ㅠ.ㅠ 우는아이 달래며 입가를 손으로 만져주고 재웠어요.
첫아이라 엄청 당황했는데 우리엄마의 혀가 붙은 일이 생각되어 졌어요.
혀도 붙는데 얇은 막은 더 잘 붙을꺼야..
잊어버리고 며칠 후 보니 얇은 막이 그 자리에 잘 붙어 있었어요.~.~;;
둘째가 8개월쯤 기어다닐때 뜨거운 후라이팬을 손으로 순식간에 짚다가 새끼손가락을 크게 데여서
살점이 상당부분 녹아버렸어요.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 데라고 병원을 찾았는데 아이의 손가락을 보시더니
손가락 윗부분과 아랫부분 힘줄과 신경들을 잇는 수술을 해야한다고 하셨어요.@.@;;
그 수술하면 깨끗히 나을 수 있냐고 여쭈어보았어요.
그런데 50대50으로 손가락 장애가 생길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그때도 우리엄마의 혀 사건이 생각나면서 수술을 안하기로 했어요.ㅠ.ㅠ
수술해도 장애가 생길 확률이 반이나 되니
수술하는 고통대신 정성을 다해보자..하고 병원에서 나와 아이를 집에서 직접 케어 했어요.
막 기어다니는 즈음이라 손바닥에 이것저것 많이 묻히고 손가락을 빨아서 수시로 붕대를 새것으로 갈고
마데카솔 가루약을 수시로 뿌려주었어요. 하루에 7~8번은 붕대 갈고 약바르고.. 혹시나 덧날까봐..ㅠ.ㅠ
그런데 며칠 후 아이 손가락은 장애 없이 깨끗히 나았어요.~.~
녹았던 근육이랑 신경도 잘 연결되어 있었어요. 할렐루야!!!
어느날 동생이 한살배기 조카를 데리고 집에 놀러왔어요. 블록을 쏟아서 놀다가
그 안에 모기향 피우는 뾰족한 쇠붙이에 발바닥을 푹 찔렸어요.ㅠ.ㅠ 녹슨 쇠붙이라서
내 짧은 생각에 파상풍주사를 맞혀야 될 것 같아서 우는 조카를 데리고 인근 병원으로 향했어요.
조카는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는데 의사선생님이 상처깊이를
확인하셔야 한다고 깊게 찔린 상처 부위를 벌려보시는 거예요.ㅜ
조카는 다시 깨어서 자지러지게 울고 의사선생님은 말없이 간호사에게 꿰멜 준비를 시키셨어요.!!!!
잠깐만요!!! 제가 말씀 드렸어요. 아이에게 파상풍 주사만 맞히러 왔는데요.~.~;;
의사선생님이 아무 말씀도 없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시다가 간호사에게 주사맞혀 보내라고 하셨어요.ㅠ.ㅠ
옆에 있던 동생이 불쾌했었는지 한마디 하더라구요.ㅜ.ㅜ;;;
집에 와서 조카의 발에 역시 마데카솔 가루를 듬뿍 뿌리고 붕대로 꽁꽁 감아주었습니다.
걸어다니는 시기라서 발바닥을 단단히 감아서 양말 신기고
일주일 정도 손도 대지 말고 그냥 두라고 했습니다.
손처럼 이것저것 만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예요.
일주일 후 동생에게 전화했더니 발바닥이 모두 붙었다고 했어요.~.~
물론 모든 상황에서 통용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상황은 꼭 수술이나 꿰매지 않아도 몸이 스스로 회복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무조건 병원에 모두 맡기는 시대가 된 것같습니다.ㅠ.ㅠ
막 중학교에 입학해서 걸어서 한시간 되는 거리의 학교를 매일 걸어다녔습니다.
간혹 늦었을때는 버스도 탔었는데요. 미어지는 만원버스여서 국민학교졸업 후
혼자서 버스이용하는 것이 늘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엄마가 싸주시는 보온도시락을 들고 한시간을 걸어서 학교에 갔습니다.
(없는 형편에 토큰도 아낄 수 있었구요.~.~;;)
며칠전부터 등하교길에 자주 차에 부딪힐 뻔 했었습니다.
그때 정신을 바짝 차렸어야 했는데요. 어느 날 아침 횡단보도 건너면서
딴생각을 하고 말았어요.ㅠ.ㅠ 멀리서 택시가 달려온다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그냥 건너다가 택시에 꽈당 온몸으로 부딪쳤습니다. 그날 기억은 택시가 어렴풋이 달려오고 있다는 것
그리고 기억이 없습니다. 부딪혔을때의 기억은 없지만 그날 동네아주머니가 저를 보았다고 증언해주셨습니다.
택시에 부딪힌 후 저는 아스팔트에 2~3번 튕겼다고 했습니다.
그때 얼굴로 아스팔트를 받아서 병원에 실려가서 입원 일주일이 지나도록 손거울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막 중학교에 입학한 여자아이가 충격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일주일 정도 지나서 손거울을 보는데 얼굴이 온통 보라색 이었고 이는 고정시켜놓은 상태였습니다.
그 모습이 충격이 아니라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홀로 저희 자매를 어렵게 키우시던 엄마는 늘 엄하고 간식도 잘 사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사고난 직후 살짝 엄마가 내 뜻을 다 받아주셨습니다.~.~;;
그때 원없이 베지밀을 마셔보고 흔들려 고정시킨 이 사이로 평소 그렇게 좋아하던 쥐포도 뜯고 너무 행복했습니다.~.~
오른쪽 다리를 다쳐서 절뚝 거렸는데 앞으로 다리에 장애가 생길 수도 있다는 병원의 말을 뒤로한 채
엄마는 저를 개인병원으로 옮기셨습니다. 저를 친 택시운전사는 우리 옆동네에 세들어 사시는 분이셨더라구요.
부인과 두 따님을 두셨는데 형편이 참 딱하다고 생각하셨는지 엄마의 형편도 생각지 않으시고 딸의 다리고치는
생각도 전혀 않고 삼촌의 앞으로의 교통사고 후유증을 생각해서 보상금을 받으라는 권유도 뿌리치고
하나님께 우리 딸 온전히 맡긴다고 하시며 개인병원에서도 얼마 안 지내고 다리를 절뚝거리는 상태에서 퇴원을 시키셨습니다.
주위에서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시고 삼촌도 알아서 하라고 떠나버리시자
저도 내심 엄마가 야속하고 원망스러웠습니다.ㅜ
이미 동네에서나 친척집에서도 엄마가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하셨었고
그래서 상식적인 생각을 못하신다고 생각되어지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시는 것 같아
맘으로 엄마를 이해못하고 원망했습니다.
(지금은 엄마 마음을 이해합니다. 엄마는 하나님께 올인하셨던 것입니다.
보상금을 받는다고 다리가 괜찮아질꺼라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없는 형편 알면서도 우리 형편 따지며
그분들께 고난주는 것도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셨겠지요.
사람이 믿음이 있어도 다급해지면 사람에게 물질에게 의탁하려고 하는 것이 일반인데
엄마는 오로지 하나님께 저를 맡기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엄마가 미쳤다고 했습니다.ㅠ.ㅠ)
한동안 집에 있다가 다리를 절며 등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학교에서 저는 유명인사가 되어있었습니다.
그 해 첫부임하셨던 우리 담임선생님은 제 사고소식을 듣고 엄청 우셨다고 하셨습니다.ㅠ.ㅠ
먼 훗날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우연히 중학교 동창을 만났
는데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았습니다. 이유는 제 사고가 머리와 얼굴을 다친 것이라서 저와 접촉이 없었던 친구들
사이에서는 제가 머리에 이상이 생겨 말이 없고 웃지도 않는 것이라고 추측했다는 것입니다.ㅜ.ㅜ
그래서 제가 농담을 하며 얘기하는 모습을 놀란 눈으로 쳐다 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엄마의 기도를 들으셨는지 절뚝거리는 다리도 다 나았고 큰 후유증 없이 반백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도 그런 위기의 순간에 엄마처럼 하나님께만 올인할 수 있을까요?!! 특히 자녀문제에서 말이죠..ㅠ
마음은 원이지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 같습니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입술로 고백하는 것만이 아니라
삶으로 고백되어져야 하는 것 같습니다.ㅠ.ㅠ(하나님께 올인한다는 것은..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간혹 미쳤다는 소리도 이겨낼 수 있어야 되고 순교도 할 수 있어야 되는 엄청난 고백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러 가는 모습을 우리가 눈으로 목격했다면 우리는 그를 미쳤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으면 사자밥이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정녕 믿음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중학교때 교통사고가 크게 났었어요.
택시에게 옆으로 들이 받아서 아스팔트에
3번 튕겼다는 얘기를 동네 아주머니가 사고 당시
목격하시고 저에게 알려주셨어요.
금이간 이를 모두 고정하고 일주일이 넘도록
병원에서 거울을 안 보여주었을때 알아봤어야 했는데요. 제가 어디로 아스팔트를 들이 받았는지를요.ㅎㅎ
일주일 후 간호사언니가 거울을 처음으로 보여주셨는데요. 글쎄 일주일이 다 되었는데도
얼굴 전체가 진한 보랏빛으로 새까맣게 보였어요.
중학교1학년 여학생은 그 즈음 그런 얼굴을
마주하면 큰 충격을 받는가봐요.?! 그런데 저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새까맣게 변해버린 얼굴이 너무 신기했어요.
금이 간 이에 대해서도 전혀 걱정되지 않았어요.
그때는 제 기억으로 엄마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조건적으로
제 뜻을 다 받아주시고 잘해 준 시절 이었어요.
베지밀도 원하는 데로 마시고 고정해서 잘 벌어지지도 않은 입을 통해서
쥐포를 먹겠다고 하니 쥐포도 사주시고 먹게도 해주시고.~.~
제겐 너무도 꿈같은 나날이었어요. 그런데
집에서는 제동생이 언니 걱정을 많이하며 기도했다고 했어요.
엄마도 없이 혼자서 힘들었을텐데요.ㅠ.ㅠ
또 처음 학교에 들어오셔서 담임맡은 반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얘기를 접하고 우셨다는 우리선생님...
오~ 저만 천하태평이었어요.
한달만에 절뚝거리는 다리로 학교에 다시 복귀한 후세월이 흘러흘러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어느날
키가 커서 중학교때 맨뒷줄에 앉았던 (참고로 저는 중간키로 앞줄 언저리에 앉았었어요.)
친구를 우연히 만났어요. 말이 많은 저를 보고 헉!놀라는 눈치였어요.
친구말이 중학교 친구들 특히 저하고 말한번 섞지 않았던 키큰 뒷줄 아이들 사이에서
저는 머리(뇌)를 다쳐서 잘 웃지도 말을 잘하지도 못하는 아이로 기억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앗!! 충격이었어요.
그 사실을 6년후에 듣게 될줄이야ㅠ.ㅠ;;;
제가 잘 안 웃고 말이 없었던 것은 사고 이후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가서 였을꺼예요. 베지밀도 잘
못먹고 쥐포도 내마음대로 못먹고 엄마가 더이상 제뜻을 무조건 받아주시는 일도 없어졌으니까요.
ㅠ.ㅠ
만약 그 시절 뒷줄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줄
꿈에라도 알았더라면 참 어려운 가정환경과 맞물려정말 힘들었을꺼라는 생각이 들어요.
먹을것을 너무 좋아해서 사고후에도 생각이 없는것처럼 보였지만 자존심은 있어서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의식하며 해명하려고 노력했을꺼니까요.
요즘은 쓸데없는 정보까지 쏟아져 나와 우리를 옭아매는 것같아요. 감기걸린 사람이 버스안에서
기침이라도하면 엄청난 감기바이러스가 튄다는 정보로 인해 감기걸린 사람도 옆에 있는 사람도
힘든 삶을 사는것 같아요. 예전엔 버스안에서 기침하는 것이 눈치가 보이지 않고 기침하는 사람 또한 자연스러웠는데요.ㅠ.ㅠ
화장실도 변기뚜껑을 열고 물을 내리면 세균이 온통 퍼진다는 실험 결과.. 사람몸속에 여러세균
들을 발달된 현미경으로 찾아내고 쓸데없이 깔끔해진 현대사회가 인간의 존엄성은 잊어버린채
서로를 세균덩어리로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 같아 안타깝더라구요. 정스럽지 못해요.
인간은 위생적이어서 잘 살아가는게 아니라 정이 있어야 잘 살아가는데 말이지요?!!
몰라도 되는 일을 굳이 알게 되는 불편한 현실속에 우리는 힘겨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덕이 되기위해서는 몰라도 되는 것을 굳이 알아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정보들을 굳이 보려고 하거나 들추어내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사람이 되지않기를 바랍니다.
누가 나를 봤을때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아는 똑부러진 사람이란 소리를 듣기보다는 어설퍼도
따뜻하고 편한 사람으로 남기를 기도합니다 그게 모두에게 덕이 되는 살아 볼만한 삶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