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김계권(金係權) 1. 문종실록 10권, 문종 1년 11월 24일 무오 3번째기사 / 사헌부에서 이백선·임효련·이연 등에게 죄를 주도록 청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7참 찰방(七站察訪) 이백선(李伯善)이 도망간 참리(站吏)의 전지(田地)를 입마(立馬)한 사람에게 주지 않고 남과 병작(幷作)하여 소출된...주었고, 또 이조 판서 권맹손(權孟孫)의 사위 전 직장(直長) 김계권(金係權)의 청을 들어 도롱이[蓑衣]와 녹비(鹿皮)를 주고, 또 진임자(眞荏子) 10두(斗)를 몰래 권맹손에게 뇌물로 주어 뒷날을 위한 소지(素地)로... 2. 문종실록 10권, 문종 1년 11월 25일 기미 3번째기사 / 사헌 지평 문여량이 권맹손·김계권을 사면한 것의 부당함을 아뢰다 사헌 지평(司憲持平) 문여량(文汝良)이 아뢰기를, "권맹손(權孟孫)이 집정 대신(執政大臣)으로서 뇌물을 받았으니 율(律)에 정죄(正罪)가 있는데도 ‘논하지...받았으니 율(律)에 정죄(正罪)가 있는데도 ‘논하지 말라.’고 명하시고, 김계권(金係權) 등도 또한 장리(贓吏)를 면하게 하시니, 그것이 법을 세우는 데 어떠하겠습니까?" 정죄(正罪) 법 조문에서 논한 죄와 같은 죄.... 3. 문종실록 10권, 문종 1년 11월 26일 경신 1번째기사 / 보충군의 진고하는 법을 위반한 신자승을 파면토록 명하다 정사(政事)를 보았다. 처음에 도관(都官)에서 보충군(補充軍)에 진고(陳告)한 자에게 자매(姉妹)를 아울러 주었더니, 헌부(憲府)에서 말하기를, "보충군의 자매는...필요가 없다." 하였다. 이맹영(李孟英)이 또 말하기를, "김계권(金係權)이 장인[妻父]의 형세에 의지하여 이백선(李伯善)에게 청구하였는데, 장리로 논(論)하지 아니하는 것은 더욱 미편(未便)합니다." "김계권(金係權)의... 4.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12월 27일 무진 3번째기사 / 의정부에 전지하여 연창위 안맹담 등을 원종 공신에 녹훈하다 의정부에 전지(傳旨)하기를,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성원위(星原尉) 이정녕(李正寧)·좌찬성(左贊成) 권제(權踶)· 전의위(全義尉) 이완(李梡)·지돈녕(知敦寧) 성봉조(成奉祖)·도절제사(都節制使)...유효담(柳孝潭)·부사(府使) 김숙(金潚)· 겸 주부(兼注簿) 김계권(金係權)·겸 군기 주부(兼軍器注簿) 이양검(李良儉), 녹사(錄事) 정흔(鄭忻)·이증(李竲), 겸 군기... 김계권(金係權), 1410년 ~ 1458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호는 묵둔재(默遁齋)이며 본관은 안동(安東). 고조부는 정의대부 판예빈시사 김근중(金斤重), 증조부는 중현대부 전농정(典農正) 김득우(金得雨), 조부는 예조정랑 봉례랑(奉禮郞) 김혁(金革)이며,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내고 안동 풍산현 소산리(素山里=금산촌)로 낙향한 김삼근(金三近)의 맏아들이다. 도승지 사간원대사간 성균관대사성 사헌부대사헌을 역임한 정헌공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은 그의 동생이다. 생애 세종때 음보(蔭補)로 관직에 나가 직장(直長), 주부(注簿)를 거쳐 1455년 겸주부(兼主簿)때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녹훈 되었다. 그 후 조산대부(朝散大夫) 한성부 판관(漢城府 判官)을 역임하였다. 1458년(세조4년)에 사망하였고 묘소는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역골 건좌(乾坐)에 있다. 묘표(墓表)는 후손 이조참판(吏曹參判) 김응순(金應淳)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였을 때 고쳐 세우고 썼다. 배위(配位)의 묘소는 판관부군(判官府君=김계권)의 조후(兆後) 건좌(乾坐)에 있고 묘표가 있다. 그는 장자인 학조대사(道號는 등곡또는황악산인,세조~연산군때의 國師) 영형(永衡)를 위시하여 영전(永銓:사헌부감찰), 영균(永鈞:진사 봉사), 영추(永錘:문과 수원부사), 영수(永銖:사헌부장령)를 두었는데, 막내인 영수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배위 영인(令人) 예천권씨(醴泉權氏)는 1409년(태종9년) 2월 22일 태어나 1496년(연산군2년) 겨울 88세로 사망하였다. 친정아버지는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제평공(齊平公) 권맹손(權孟孫:1390-1456)이고, 할아버지는 성주목사(星州牧使) 권상(權詳)이며, 증조는 영해부사(寧海府使) 권군보(權君保)이다. 외조는 종성부사(鐘城府使) 남적(南績)으로 본(本)은 의령(宜寧)이다. 또한 처외조 남씨(南氏)의 족보(族譜)를 상고(詳考)하건대, 제평공(齊平公) 권맹손은 곧 의정부좌찬성 증영의정 남을경(南乙敬)의 손녀사위이고, 찬성(贊成) 남적(南績)은 곧 남을경의 아들이며, 남적은 태조때 영의정을 지낸 충경공(忠景公) 남재(南在:1351-1419)의 종형제(從兄弟)이다. 슬하(膝下)에 5남6녀를 두니, 1남은 국사(國師) 등곡(燈谷) 학조대사(學祖大師) 영형(永衡)이고, 2남은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영전(永銓)이며, 3남은 진사(進士) 봉사(奉事) 영균(永鈞), 4남은 문과(文科) 수원부사(水原府使) 영추(永錘), 5남은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 영수(永銖)이다. 1녀는 아버지가 현감(縣監)인 유유(柳牖)로 진주인(晉州人), 2녀는 현감(縣監) 이장생(李長生)으로 성주인(星州人), 3녀는 주부(主簿) 정훈로(鄭勳老)로 청주인(淸州人), 4녀는 현령(縣令) 한영(韓穎)으로 평산인(平山人), 5녀는 봉사(奉事) 김윤만(金允萬), 6녀는 화천군(花川君) 병조판서 좌참찬 권함(權瑊,1423-1487)으로 안동인(安東人)이다. 가문의 성장과정 新안동김씨의 역사는 서기930년경 고려 개국공신 김선평(金宣平,901~ ? )과 함께 시작된다. 김선평은 신라말 안동의 성주(城主)로서 권행(權幸) 장길(張吉)과 더불어 태조 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에 책봉되고 태사(太師)의 작위(爵位)를 받은 인물이었다. 지금도 안동에는 이들 3太師를 제향하는 태사묘(太師廟)가 남아 있으며, 약 1000년 동안 金․權․張 3姓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기능해 왔다. 그러나 (신)안동김씨는 개국공신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 내내 사환․ 학문적으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향역(호장,부호장,호장정위)을 세습하는데 만족하였다. 심지어 세계마저 불완전하여 김선평과 김습돈 사이의 대수(약250년 7~8대)를 확인할 수 없으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8대조 김득우(金得雨)이전은 산소의 위치도 알 길이 없다. 이는 같은 개국공신의 후손으로 고려후기부터 명문으로 성장한 안동권씨와는 매우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신안동김씨가 기가(起家)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청음의 8대조 김득우(金得雨)때였다. 그는 비록 높은 벼슬은 아니었지만 전농정(典農正)을 지냈으며, 풍산유씨 유난옥(柳蘭玉)의 손녀사위가 됨으로써 풍산유씨와의 세의(世誼:대대로 사귀어 온 정(情))를 확보하게 된다. 유난옥은 바로 선조조에 영의정을 지낸 풍원부원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8대조이다. 한편 김득우(金得雨,1332~ ? )는 안동권씨 권희정(權希正)가문과의 혼인을 통해서도 가문의 입지를 더욱 신장하게 된다. 김득우는 권희정(權希正)의 딸을 외아들 김혁(金革)의 아내로 삼았는데, 권희정은 세종조에 이조판서 우의정을 지낸 권진(權軫)의 아버지였다. 더욱이 김득우는 권진을 사위로 삼음으로서 안동김씨와 안동권씨 사이에는 연혼․중혼관계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이 혼인은 안동김씨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만 하더라도 신안동김씨는 고려시대 이래로 단 한명의 문과(대과) 급제자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비록 사위이기는 하지만 권진(權軫,1357~1435)이 문과를 통해 정승(우의정)의 반열에 오름으로서 그 반사적 효과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통혼의 과정에서 김혁은 배상지(裵尙志) 이운후(李云候)와 동서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배상지(裵尙志,1351~1414)는 고려말의 은사로서 서애 유성룡은 그를 두고 “상설처럼 맑고 옥처럼 정갈하며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고절을 지킨 선비”로 평가하였다. 그의 5세손 배상룡(裵尙龍,寒岡高弟)은 학행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7세손 배삼익(裵三益,1534~1588)은 퇴계 이황의 고제(高弟:제자들 가운데서 학식과 품행이 특히 뛰어난 제자)로서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특히 배삼익의 계열은 조선후기 안동의 대표적인 명망가문으로 성장․발전하였다. 이운후(李云候)는 바로 퇴계 이황의 고조부로서 진성이씨 예안 입향조였다. 이처럼 안동김씨는 혼인을 통해 안동 굴지의 명가들과 연계하였는데, 이는 곧 문호의 신장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한편 신안동김씨는 김득우(金得雨) 김혁(金革) 김삼근(金三近) 대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수반하게 되었다. 우선 김득우․김혁 부자는 시조 이래 450년 세거지인 안동의 강정촌(江亭村,현재 안동시 정상동 귀래정 부근)을 떠나 풍산현의 불정촌(佛頂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이들의 풍산 이거는 처가이며 외가인 풍산유씨(豊山柳氏)의 경제적 기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풍산현 불정촌(안동시 풍산읍 하리리)도 안동김씨의 영원한 기반이 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김득우의 손자 김삼근(金三近,1390~1465) 대에 이르러 인근의 소요산(素耀山)으로 이주했기 때문이었다. 소요산은 풍산현의 치소와 5리 정도의 거리에 있으며, 원래의 명칭은 금산촌(金山村=소산리)이었다. 김삼근의 입거를 계기로 풍산 소산은 안동김씨의 <백세터전>으로 자리하게 된다. 현재 안동에서는 이들을 <素山金氏>로 부르고 있으며, 안동.파주.서울.충청 등 경향 일대에 거주하는 신안동김씨 11개파 모두 소산에서 분파된 가문들이다. 가족관계 고조부:정의대부 판예빈시사 김근중(金斤重) 증조부:전농정 김득우(金得雨)서운정 유개(柳開,유성룡의7대조부)의 사위이며, 창평현령 유난옥(柳蘭玉,유성룡의8대조부)의 손녀사위 조부: 예조정랑 봉례랑 김혁(金革) - 감찰규정 권희정(權希正)의 사위로 우의정 권진(權軫)과 처남매부간 부: 봉화현감 비안현감 김삼근(金三近,1390~1465)부인:예천권씨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 제평공 권맹손의 딸 동생:도승지 성균관대사성 사헌부대사헌 증이조판서 대제학 보백당 김계행(金係行) o (맏아들)세조~연산군 국사(國師) 등곡,황악산인 학조(學祖) 김영형(金永衡) o (둘째아들)사헌부감찰 합천군수 김영전(金永銓) o (세째아들)진사 봉사 김영균(金永鈞) o (네째아들)합천군수 수원부사 김영추(金永錘) o (다섯째아들)영천군수 사헌부장령 김영수(金永銖) o (조카) 영릉참봉 김극인(金克仁) o (조카) 진사 김극의(金克義) o (조카) 생원 김극례(金克禮) o (조카) 1490년 21세때요절 김극지(金克智) o (조카) 무과 문천군수 김극신(金克信) o 손자:동부승지 강원도관찰사 삼당 김영(金瑛) o 손자:시강원문학 평양서윤 증이조판서 김번(金璠) o 손자:찰방 형조좌랑 수군절도사 김순(金珣) o 증손자:신천군수 증좌찬성 김생해(金生海) - 성종의 아들 경명군 이침의 사위 김계행(金係行) 1. 철종 10년 5월 27일 병신 1859년 啓曰, 啓曰, 洪州牧使, 今當差出, 而本州以湖西雄邑, 物衆地大, 素稱難治, 不可不擇差, 他道有聲績未準朔守令竝擬, 何如? 傳曰, 계왈, 홍주목사, 금당차출, 이본주이호서웅읍, 물중지대, 소칭난치, 불가불택차, 타도유성적미준삭수령병의, 하여? 전왈, 允。以朴臣圭爲副應敎, 李謙在爲判尹, 申錫禧爲刑曹參判, 洪在喆爲判義禁, 鄭基世爲同春秋, 윤。이박신규위부응교, 이겸재위판윤, 신석희위형조참판, 홍재철위판의금, 정기세위동춘추 李悅爲淑陵令, 都必中爲定陵令, 金在敬爲慶州府尹, 吳光默爲洪州牧使, 權中本爲平陵察訪, 贈吏參金係行贈吏判·文衡例兼, 이열위숙릉령, 도필중위정릉령, 김재경위경주부윤, 오광묵위홍주목사, 권중본위평릉찰방, 증이참김계행증이판·문형례겸, 學行卓異, 加贈正卿事, 承傳 학행탁이, 가증정경사, 승전 2. 고종 5년 3월 12일 경신 1868년 啓曰, 吏曹啓曰, 贈諡文獻公金係行延諡, 定行於來四月初四日安東府鄕第云矣, 敢啓。傳曰, 知道。 이조계왈, 증시문헌공김계행연시, 정행어래 4월초 4일안동부향제운의, 감계。전왈, 지도。 1. 성종실록 126권, 성종 12년 2월 3일 정미 1번째기사 / 대사헌 정괄 등이 심안인의 일을 아뢴 옥산군 이제를 국문할 것 등을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헌(大司憲) 정괄(鄭佸)이 아뢰기를, "옥산군 이제(李躋)가 멋대로 심안인의 일을 아뢴 것은...문·무과의 합격자. "누군가?" 하자, 정성근이 말하기를, "조호문(趙好問)·김수형(金秀荊)·신자주(申自周)·김계행(金係行) 등입니다." "사람을 서용하는 것이 어려우니, 용모(容貌 )와 언어(言語)로써 취할 수 없으며, 마음씨는 쉽게 알지... 2. 성종실록 128권, 성종 12년 4월 17일 신유 2번째기사 / 집의 박숙달이 김영추·이계명의 관직을 개차하라고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강(講)하기를 마치자,집의(執義) 박숙달(朴叔達)이 아뢰기를,"김영추(金永錘)는 문무관(文武官) 출신(出身)도 아니고 별다른 재덕(才德)도.하고, 정언(正言) 정광세(鄭光世)는 말하기를,"새로 급제(及第)한 김계행(金係行)이 해가 지나도록 서용(敍用)되지 못하였습니다. 모든 선비들 가운데 머리털이 희고 학문을 깊이 연구한 자나, 과거에 일등으로... 3. 성종실록 236권, 성종 21년 1월 24일 정축 9번째기사 / 예조와 이조에서 의논하여 뽑은 자들이 사유에 합당한가를 의논하게 하다 예조(禮曹)와 이조(吏曹)에서 같이 의논하여 사유(師儒) 반우형(潘佑亨)·표연말(表沿沫)·김계행(金係行)·장강(張綱)·손번(孫蕃)· 권경우(權景祐)·이점(李坫)·권빈(權璸)·이창신(李昌臣)... 4. 성종실록 242권, 성종 21년 7월 21일 신미 3번째기사 / 이염의·김여석·박숭질·이약동·이종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염의(李念義)를 가정 대부(嘉靖大夫)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김여석(金礪石)을 가선 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박숭질(朴崇質)을...지평(司憲府持平)으로, 이세영(李世永)을 승의랑(承議郞) 지평으로, 김계행(金係行)을 조산 대부(朝散大夫)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으로,유빈(柳濱)을 승의랑(承議郞)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장순손(張順孫)을... 5. 성종실록 242권, 성종 21년 7월 25일 을해 2번째기사 / 헌납 김계행이 정숙지 제수에 관련해 그 아비인 정문형의 파직을 건의하다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김계행(金係行)이 와서 아뢰기를, "《대전(大典)》 가운데,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의 낭관(郞官)과 어질고 능하며 공로가 있는 자 외에는 올려서 서용(敍用)하지 못한다.’ 하였는데 정문형(鄭文炯)은 그 아들 정숙지(鄭叔墀)의 벼슬을 추천해 올렸으니, 신은 탁란(濁亂)한 조짐이 이로부터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파면하소서. " 하였는데,... 6. 성종실록 242권, 성종 21년 7월 25일 을해 4번째기사 / 대간의 재서용을 반대하는 헌납 김계행과 논하다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김계행(金係行)이 와서 아뢰기를, "전일에 대간(臺諫)을 모두 바꾼 것은 침묵하고 말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인데, 이제 다시 쓰면 뒤의 대간이 반드시 말하기를, ‘아무개와 아무개는 침묵하고 말하지 아니한 까닭으로 파면되었다가 곧 다시 쓰여지게 되었는데, 내가 어찌 홀로 곧은 말을 하다가 실패함을 취하겠느냐?’라고 할 것이니, 신은 곧은 말을... 7. 성종실록 261권, 성종 23년 1월 6일 정축 5번째기사 / 동부승지 조위가 홍문관 관원에게 다른 관직을 제수하지 말 것을 청하다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동부승지(同副承旨) 조위(曺偉)가 아뢰기를, "근일 홍문관(弘文館) 관원을 다른 관직에 많이 제수하고 있는데, 옛날..."지금 성균관(成均館) 관원으로 능히 교훈(敎訓)을 감당할 자는,이문흥(李文興)·김계행(金係行)·반우형(潘佑亨) 3인인데, 이문흥과 김계행은 나이 장차 70입니다. 사유(師儒)로서 적당한 자가 이같이 적은 것은 작은 일이... 8. 성종실록 283권, 성종 24년 10월 24일 을유 5번째기사 / 이문흥과 이거인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문흥(李文興)을 통정 대부(通政大夫)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으로,이거인(李居仁)을 절충 장군(折衝將軍)전라좌도 수군 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삼았다. 사신이 논평하기를, "이 정사(政事)에 김계행(金係行)을 성균관 사성으로 삼았는데, 김계행은 학행(學行)이 있었다. 형(兄)의 아들인 중[僧] 김학조(金學祖)가 일찍이 광묘(光廟) 에게... 9. 연산군일기 29권, 연산 4년 5월 6일 신축 1번째기사 / 왕이 보경당에 나가 강을 받고 김계행·조순도를 당상으로 승진시키다 왕은 보경당(寶慶堂)에 납시어 문신(文身)·무신(武臣)을 강받았는데, 문신으로는 김계행(金係行)이 약통(略通)을 받고, 무신으로는 조순도(趙順道)가 통(通)을 받았으므로, 명하여 당상(堂上)으로 승진시켰다. 계행(係行)은 다른 재능과 덕업(德業)은 없으나, 경학(經學)에 있어서는 훈고(訓詁)에 조금 밝은 편이었다. 나이 50이 넘어 경자년 과거에 합격하고 국 자원(國子員)으로... 10. 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17일 신해 2번째기사 /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대한 왕의 전교와 신하들의 논의 전지하기를,"김종직은 초야의 미천한 선비로 세조조에 과거에 합격했고,성종조에 이르러서는 발탁하여 경연(經筵)에 두어 오도록...베어 마땅하옵니다."하고, 이극규(李克圭)·이창신(李昌臣)·최진(崔璡)·민사건(閔師蹇)·홍한(洪瀚)·이균(李均)·김계행(金係行)이 의논드리기를, "종직의 범죄는 차마 말로 못하겠으니, 율문에 의하여 논단해서 인신(人臣)으로 두 마음 가진... 11. 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25일 기미 9번째기사 / 이집·이승건·성세명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집(李諿)을 이조 참판으로,양희지(楊稀枝) 를 충청도 관찰사로,이승건(李承健)을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성세명(成世明)을 승정원...김영정(金永貞)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이세영(李世英)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김계행(金係行)을 사간원 대사간(司 諫院大司諫)으로, 권주(權柱)를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윤희손(尹喜孫)을 직제학(直提學)으로,... 12. 연산군일기 31권, 연산 4년 9월 3일 무술 1번째기사 / 왕이 인정전에 나가 책제를 내고 모화관에서 무과를 시험하다 왕은 인정전(仁政殿)에 납시어 책제(策題)를 내고, 모화관(慕華館)에 가서 무과(武科)를 시험보여, 이순경(李舜卿) 등 일곱 사람을 뽑았다. 이날에 여악(女樂)을 잡혔는데, 대사헌(大司憲) 김영정(金永貞), 대사간(大司諫) 김계행(金係行)이 아뢰기를 "천둥하고 번개치고 또 변괴가 있사온데, 여악을 잡히는 것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13. 연산군일기 31권, 연산 4년 10월 16일 무인 1번째기사 / 의정부·육조·대간이 임금의 사냥 일에 대해 논하다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대간(臺諫)이 사냥할 때 부교(浮橋)와 군마(軍馬) 동상(凍傷)의 폐단을 들어 극론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니, 대사간(大司諫)...동상(凍傷)의 폐단을 들어 극론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니, 대사간(大司諫) 김계행(金係行)이 한 마디 말도 없이 우는 형상만 짓고 있었다. 사간(司諫) 안윤덕(安潤德)이 아뢰기를, "모자의 사이는 상하가 다름이 없사온데, 전하께서... 14. 연산군일기 31권, 연산 4년 11월 9일 신축 1번째기사 / 대사간 김계행 등이 배목인 사건의 포상의 일과 윤은로·신수근의 일에 대해 논하다 대사간(大司諫) 김계행(金係行) 등이 아뢰기를, "배목인을 문초한 추관에게 상가(賞加)한 것은 불가불 개정되어야 하오며, 또 윤은로(尹殷老)는 탐독(貪黷)하고 무염(無厭)한 자로서, 성종조에 이조 참판이 되어서, 각관(各官)에 요청하여 친히 방납(防納)을 하다가 대간의 논박을 입어 곧 체임되었사온데 지금 한성 우윤(漢城右尹)이 되었사오니, 청컨대 개정하옵소서 . 판서(判書)... 15. 연산군일기 31권, 연산 4년 11월 17일 기유 1번째기사 / 대사간 김계행이 날씨 관계로 밤 사냥을 정지할 것을 간하다 대사간(大司諫) 김계행(金係行) 등이 아뢰기를, "숭례문(崇禮門) 밖에서 얼어죽은 사람이 있사오니, 일기가 찬 것이 지금보다 심한 때는 없사온데, 수많은 군중을 몰고 산판을 오르내리면 어찌 얼어죽는 자가 없사오리까. 임금은 백성의 부모이온데 적자(赤子)의 죽음을 걱정하지 아니하신다면, 그 성덕(聖德)에 어찌되겠사옵니까." 하였다. 16. 연산군일기 31권, 연산 4년 12월 15일 병오 2번째기사 / 대사간 김계행 등이 재신을 능욕한 이부의 죄에 대해 논하니 왕이 듣지 않다 대사간(大司諫) 김계행(金係行), 집의(執義) 이자건(李自健)이 아뢰기를, "내수사(內需司)의 종 이부(李富)가 정유지(鄭有智)를 능욕하고 내금위(內禁衛) 박환(朴桓)을 구타하였습니다. 유지는 명을 받드는 재신(宰臣)이온데, 천한 자에게 욕을 당하였으니 듣는 사람 누가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 단지 속(贖)만으로 명하시니, 그 형(刑)을 잃은 것 이 심하옵니다. 또... 17. 연산군일기 32권, 연산 5년 1월 20일 경진 1번째기사 / 정언 윤은보가 신돈의에게 건너뛰어 관직을 제수한 잘못을 아뢰다 정언 윤은보가 아뢰기를, "신돈의는 내금위(內禁衛)의 소속으로써 제장(諸將) 취재(取才)도 없이 선전관에 특임하고, 또 임용 시험도 않고 건너뛰어...함을 제수라고 한다. 하고, 지평 권세형이 아뢰기를, "대사간(大司諫) 김계행(金係行)은, 나이가 70이 찼다 하여 치사(致仕)하기를 청합니다. 김계 행은 나이가 늙고 기운이 쇠퇴하여 사간원의 자리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18. 연산군일기 32권, 연산 5년 1월 21일 신사 1번째기사 / 대사간 김계행을 체임하고 군직에 서용하게 하다 대사간 김계행이 아뢰기를, "사헌부가 어제 신의 본직을 체임(遞任)하기를 청하였습니다. 대간은 일체이온데, 이미 그 논박을 받고 안연하게 본직에 있을 수 없사오니 체직하여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군상의 명령에 의하여 본직에 취임한 것인데, 어찌 사헌부의 망령된 말을 혐의하여 그 직을 사임하겠는가. 사피(辭避)하지 말라." 하였다. 김계행 이 잇달아... 19. 연산군일기 56권, 연산 10년 11월 9일 을미 7번째기사 / 춘추관이 하계증 등의 형 집행에 대해 상세히 아뢰다 춘추관이 아뢰기를, "하계증(河繼曾)은 다른 죄로 장 1백에 처하여 삭주(朔州)에 유배되고, 유희철(柳希轍)은 태 50에 처하여 부안(扶安)에 유배되었으며,...죽었습니다. 사천(私賤)의 내수사 소속에 관한 일은 김숙정(金淑貞)과 김계행(金係行)이 논계한 것인데, 숙정은 일찍이 다른 죄로 장 1백에 처하여 진천(鎭川)에 유배되었고, 계행은 안동(安東)에 살고 있으며, 낙수물 받는... 20. 연산군일기 56권, 연산 10년 11월 9일 을미 13번째기사 / 하계증·유희철 등을 잡아오게 하다 전교하기를, "하계증(河繼曾)·유희철(柳希轍)·조세당(曺世唐)·이곤(李坤)·박권(朴權)·김숙정(金淑貞)·김계행(金係行)·성희철(成希哲)·홍수(洪脩)를 모두 잡아오라." 하였다. 21. 연산군일기 57권, 연산 11년 1월 6일 임진 4번째기사 / 전 대간 김영정 등을 형신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전 대간(臺諫) 김영정(金永貞)·김계행(金係行)·유숭조(柳崇祖)·박권(朴權)·성희철(成希哲)·홍수(洪脩)·유희철(柳希轍)·손중돈(孫仲暾)·유세침(柳世琛)·김숙정(金叔貞)·장순손(張順孫)에게 또 형신(刑訊)을 가하라. 그들의 말하는 것은 다 명예를 낚는 것일 뿐 진정이 아니다." 하였다. 22. 연산군일기 57권, 연산 11년 1월 10일 병신 2번째기사 / 김영정 등 대간을 장죄에 처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대간(臺諫)들 중에 젊은 사람이 사체(事體)를 모르고 더욱 말하기를 좋아한다. 김영정(金永貞)·김계행(金係行)은 늙은 사람이니 태(笞) 50으로 감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전지(傳旨)대로 장형(杖刑)에 처하며, 장순손(張順孫)은 젊지는 않으나 명예 낚기를 좋아하는 자이니, 또한 장형에 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23. 연산군일기 57권, 연산 11년 3월 2일 정해 5번째기사 / 김영정 등을 추국하여 아뢰게 하다 전교하기를, "김영정(金永貞)·이자건(李自健)·김숙정(金淑貞)·이세인(李世仁)·김계행(金係行)·안윤덕(安潤德)·이곤(李坤)·윤은보(尹殷輔)·권세형(權世衡)을 추국(推鞫)하여 아뢰라." 하였다. 24. 연산군일기 57권, 연산 11년 4월 15일 경오 1번째기사 / 김영정 등의 형을 집행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김영정(金永貞)·이자건(李自健)·최한원(崔漢源)·안윤덕(安潤德)·김계행(金係行)·이곤(李坤)·이세인(李世仁)·김숙정(金淑貞)·권세형(權世衡)은 모두 율(律)에 따라 장에 처하여, 전에 배소(配所)를 분정(分定)한 사람은 도로 배소로 보내고, 관직에 있는 사람은 파출(罷黜)하고, 안윤덕은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 하였다. 김중청(金中淸) 1. 선조실록 1권, 부록 / 편수관 명단 만력(萬曆) 37년 7월 12일 춘추관이 교지를 받들어 편찬을 시작하여 만력 44년 병진 11월에 편찬을 마쳤다. 이에 참여한 전후의...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세자 시강원 문학 지제교(行世子侍講院文學知製敎) 신 김중청(金中淸) 2. 광해군일기[중초본] 48권, 광해 3년 12월 21일 병술 3번째기사 / 사간 임연이 동료와 논계하는 일로 의논할 때 적절함을 잃었다 하여 피혐하다 〈사간 임연(任兗)이 아뢰기를, "신이 그저께 거처를 옮길 때 대사간 및 이 정언(李正言)과 함께 창덕궁 밖에서 모였습니다. 수령의...수령의 가자(加資)가 너무 지나치고, 과거의 정식(定式)이 상규(常規)에 어긋나며, 감찰 김중청(金中淸)은 아주 패악한 행실이 드러났으므로 아울러 논계하자는 일로써 동료들과 의논하여 초안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초안을 완료하기도... 3. 광해군일기[중초본] 48권, 광해 3년 12월 26일 신묘 3번째기사 / 사간원이 허욱·한응인·최천건에게 직첩을 돌려주라고 한 명을 거둘 것을 청하다 사간원이 연계하기를, "허욱·최천건·한응인에게 직첩을 다시 주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반드시 과거를 실시하는 것은...타당치 못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감찰 김중청(金中淸)은 사람됨이 시기가 많고 간사하며, 성품과 행실이 음란하고 패악하여 사람들에게 용납되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결코... 4. 광해군일기[중초본] 72권, 광해 5년 11월 11일 을축 2번째기사 / 지평 박홍도가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다 지평 박홍도가 아뢰기를, "지난 날 향인(鄕人)이 영광(靈光)의 양반인 이락(李珞) 등 세 사람의 죄를 글로 엮어서 본부에 올렸는데, 대개 이락 등이...속이고, 밖으로 공론이라 하면서 몰래 제 뜻을 실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정랑 김중청(金中淸)이 사는 집을 자신이 직접 몰아내고 공공연히 빼앗아 들어갔으니, 이 몇 가지 일은 여론이 분하게 여길 뿐 아니라 모두 탄핵해야... 5. 광해군일기[중초본] 88권, 광해 7년 3월 10일 병진 2번째기사 / 기윤헌을 장령으로, 김중청을 문학으로 삼다 기윤헌(奇允獻)을 장령으로, 김중청(金中淸)을 문학으로 삼았다. 6. 광해군일기[중초본] 89권, 광해 7년 4월 28일 갑진 1번째기사 / 이병·유간·홍방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병(李覮)을 대사헌으로, 유간(柳澗)을 대사간으로, 홍방(洪霶)을 장령으로, 박홍도(朴弘道)를 지평으로, 조존도(趙存道)를 헌납으로, 이익(李瀷)을 정언으로,...황중윤(黃中允)을 사서로, 유여각(柳汝恪)을 부수찬으로, 정광경(鄭廣敬)을 부교리로, 유인길(柳寅吉)을 대사성으로, 김중청(金中淸)을 정언으로, 임석령(任碩齡)을 필선으로, 양시진(楊時晉)을 문학으로 삼았다. 7. 광해군일기[중초본] 91권, 광해 7년 6월 5일 경진 2번째기사 / 지난해 천추사인 허균, 서장관 김중청, 당상 역관 송업남에게 가자할 것을 전교하다 전교하였다. "지난해의 천추사(千秋使) 허균(許筠)은 서책(書冊)을 많이 무역하여 왔을 뿐만 아니라, 변무사(辨誣事)에 대해서 다방면으로 듣고 보아...지은 잠(箴)과 어필(御筆)을 사가지고 왔는데, 이것은 참으로 보묵(寶墨)이었다. 가자(加資)하라. 그리고 서장관 김중청(金中淸)도 상의하여 주선한 공이 없지 않으 니 승서하고, 당상 역관(堂上譯官) 송업남(宋業男)은 가자하라." 8. 광해군일기[중초본] 94권, 광해 7년 윤8월 8일 임자 1번째기사 / 임금이 선정전에서 동지 겸 진주사 민형남과 부사 허균을 인견하다 왕이 선정전에서 동지 겸 진주사 민형남(閔馨男)과 부사 허균(許筠)을 인견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경들이 중국에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네 종의 책을 찾아가지고 오라." "《임거만록(林居漫錄)》은 소신이 중국에 갔을 적에 김중청(金中淸)과 같이 보았는데, 간본(刊本)이 아니었습니다. 대신의 뜻은 간본이 아니기 때문에 개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소신이 마음대로 할... 9. 광해군일기[중초본] 135권, 광해 10년 12월 18일 계유 2번째기사 / 형조가 명화적을 체포한 신안·삼가 현감의 논상을 청하자 법대로 가자하다 형조의 계목에, "점련한 경상 감사의 서장에 운운하였습니다. 지난번 신안 현감 (新安縣監) 김중청(金中淸)은 명화적(明火賊) 패거리인 백가미(白加未) 등 2명을 체포했고, 삼가 현감(三嘉縣監) 신경진(申景珍)은 백가미와 같은 패거리를 체포했다 합니다. 전례대로 논상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니, 상께서 재가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법전대로 가자하게 하였다. 10. 광해군일기[중초본] 176권, 광해 14년 4월 20일 을유 6번째기사 / 호조가 수령 및 실직을 가진자의 상납할 미곡의 석수가 헐하니 의논하기를 청하다 호조가 아뢰기를, "각도 선유사(宣諭使)가 가지고 갈 사목 안에 응당 주어야 할 수령 및 실직(實職)을 가진 사람들이 납입할 미곡의 석수(石數)가 너무 헐한 듯합니다. 다시 묘당에 의논하여 참작하여 더...이들로서 명을 받든 일이라고 칭탁하고는 감사와 더불어 이때를 틈타 못하는 짓 없이 멋대로 포학함을 부렸다. 그 가운데 영남의 김중청(金中淸)이 더욱 심하였다고 한다. 】 11. 광해군일기[정초본] 72권, 광해 5년 11월 11일 을축 2번째기사 / 지평 박홍도가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다 지평 박홍도가 아뢰기를, "지난 날 향인(鄕人)이 영광(靈光)의 양반인 이락(李珞) 등 세 사람의 죄를 글로 엮어서 본부에 올렸는데, 대개 이락 등이...속이고, 밖으로 공론이라 하면서 몰래 제 뜻을 실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정랑 김중청(金中淸)이 사는 집을 자신이 직접 몰아내고 공공연히 빼앗아 들어갔으니, 이 몇 가지 일은 여론이 분하게 여길 뿐 아니라 모두 탄핵해야... 12. 광해군일기[정초본] 88권, 광해 7년 3월 10일 병진 2번째기사 / 기윤헌을 장령으로, 김중청을 문학으로 삼다 기윤헌(奇允獻)을 장령으로, 김중청(金中淸)을 문학으로 삼았다. 13. 광해군일기[정초본] 89권, 광해 7년 4월 28일 갑진 1번째기사 / 이병·유간·홍방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병(李覮)을 대사헌으로, 유간(柳澗)을 대사간으로, 홍방(洪霶)을 장령으로, 박홍도(朴弘道)를 지평으로, 조존도(趙存道)를 헌납으로, 이익(李瀷)을 정언으로,...황중윤(黃中允)을 사서로, 유여각(柳汝恪)을 부수찬으로, 정광경(鄭廣敬)을 부교리로, 유인길(柳寅吉)을 대사성으로, 김중청(金中淸)을 정언으로, 임석령(任碩齡)을 필선으로, 양시진(楊時晉)을 문학으로 삼았다. 14. 광해군일기[정초본] 91권, 광해 7년 6월 5일 경진 2번째기사 / 지난해 천추사인 허균, 서장관 김중청, 당상 역관 송업남에게 가자할 것을 전교하다 전교하였다. "지난해의 천추사(千秋使) 허균(許筠)은 서책(書冊)을 많이 무역하여 왔을 뿐만 아니라, 변무사(辨誣事)에 대해서 다방면으로 듣고 보아...지은 잠(箴)과 어필(御筆)을 사가지고 왔는데, 이것은 참으로 보묵(寶墨)이었다. 가자(加資)하라. 그리고 서장관 김중청(金中淸)도 상의하여 주선한 공이 없지 않으 니 승서하고, 당상 역관(堂上譯官) 송업남(宋業男)은 가자하라." 15. 광해군일기[정초본] 94권, 광해 7년 윤8월 8일 임자 1번째기사 / 임금이 선정전에서 동지 겸 진주사 민형남과 부사 허균을 인견하다 왕이 선정전에서 동지 겸 진주사 민형남(閔馨男)과 부사 허균(許筠)을 인견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경들이 중국에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네 종의 책을 찾아가지고 오라." "《임거만록(林居漫錄)》은 소신이 중국에 갔을 적에 김중청(金中淸)과 같이 보았는데, 간본(刊本)이 아니었습니다. 대신의 뜻은 간본이 아니기 때문에 개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소신이 마음대로 할... 16. 광해군일기[정초본] 135권, 광해 10년 12월 18일 계유 2번째기사 / 형조가 명화적을 체포한 신안·삼가 현감의 논상을 청하자 법대로 가자하다 형조의 계목에, "점련한 경상 감사의 서장에 운운하였습니다. 지난번 신안 현감(新安縣監) 김중청(金中淸)은 명화적(明火賊) 패거리인 백가미(白加未) 등 2명을 체포했고, 삼가 현감(三嘉縣監) 신경진(申景珍)은 백가미와 같은 패거리를 체포했다 합니다. 전례대로 논상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니, 상께서 재가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법전대로 가자하게 하였다. 17. 광해군일기[정초본] 176권, 광해 14년 4월 20일 을유 5번째기사 / 호조가 수령 및 실직을 가진자의 상납할 미곡의 석수가 헐하니 의논하기를 청하다 호조가 아뢰기를, "각도 선유사(宣諭使)가 가지고 갈 사목 안에 응당 주어야 할 수령 및 실직(實職)을 가진 사람들이 납입할 미곡의 석수(石數)가 너무 헐한 듯합니다. 다시 묘당에 의논하여 참작하여 더...이들로서 명을 받든 일이라고 칭탁하고는 감사와 더불어 이때를 틈타 못하는 짓 없이 멋대로 포학함을 부렸다. 그 가운데 영남의 김중청(金中淸)이 더욱 심하였다고 한다.】 18. 인조실록 8권, 인조 3년 2월 18일 정유 6번째기사 / 유백증·이윤우·김반·이경의·김주우 등에 대한 인사를 실시하다 유백증(兪伯曾)을 사간원 사간으로, 이윤우(李潤雨)를 시강원 보덕으로, 김반(金槃)을 헌납으로, 이경의(李景義)·김주우(金柱宇)를 정언으로 삼았다. 김주우는...보덕으로, 김반(金槃)을 헌납으로, 이경의(李景義)·김주우(金柱宇)를 정언으로 삼았다. 김주우는 김중청(金中淸)의 아들인데, 김중청은 폐조(廢朝) 때에 곡식을 모집하는 신하가 되어 남쪽 지방에 추한 소문을 퍼뜨린... 19. 인조실록 23권, 인조 8년 9월 27일 계묘 2번째기사 / 헌부가 김중청, 경차관 이탁 등의 일로써 아뢰다 헌부가 아뢰기를, "김중청(金中淸)이 죽은 것은 그의 아우 김득청(金得淸)의 저주(詛呪) 때문이었으니, 김중청의 아들 된 자가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관에 발고하여 추문하기 바라는 것은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김득청의 일 때문에 그의 조모(祖母)가 옥하(獄下)에서 목을 매었으니, 그가 시종 잘 돌보아 구호하지 못한 탓으로 목숨을 잃게 한 죄는 실로 윤 기(倫紀)에... 김주민(金柱旻) 1. 인조실록 23권, 인조 8년 9월 27일 계묘 2번째기사 / 헌부가 김중청, 경차관 이탁 등의 일로써 아뢰다 헌부가 아뢰기를, "김중청(金中淸)이 죽은 것은 그의 아우 김득청(金得淸)의 저주(詛呪) 때문이었으니,김중청의 아들 된 자가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관에 발고하여...됩니다. 김중청의 아들 김주민(金柱旻)·김주국(金柱國)·김주우(金柱宇)·김주한(金柱漢) 등을 모두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경차관(敬差官) 이탁(李濯)은 경솔하게 정범(正犯)에게 고신(拷訊)을 가하여... 김주우(金柱宇) 1. 인조실록 5권, 인조 2년 4월 28일 신해 2번째기사 / 정시를 시행하여 진사 김주우 등 11인을 뽑다 문사(文士)와 무사(武士)를 정시(庭試)하여 진사 김주우(金柱宇) 등 11인과 사과(司果) 구의준(具義俊) 등 4인을 뽑았다. 2. 인조실록 8권, 인조 3년 2월 18일 정유 6번째기사 / 유백증·이윤우·김반·이경의·김주우 등에 대한 인사를 실시하다 유백증(兪伯曾)을 사간원 사간으로, 이윤우(李潤雨)를 시강원 보덕으로, 김반(金槃)을 헌납으로, 이경의(李景義)·김주우(金柱宇)를 정언으로 삼았다. 김주우는 김중청(金中淸)의...시강원 보덕으로, 김반(金槃)을 헌납으로, 이경의(李景義)·김주우(金柱宇)를 정언으로 삼았다. 김주우는 김중청(金中淸)의 아들인데, 김중청은 폐조(廢朝) 때에 곡식을 모집하는 신하가 되어... 3. 인조실록 8권, 인조 3년 3월 15일 계해 3번째기사 / 오백령·김주우에 대한 인사를 실시하다 오백령(吳百齡)을 대사간으로, 김주우(金柱宇)를 지평으로 삼았다. 4. 인조실록 8권, 인조 3년 3월 27일 을해 5번째기사 / 최명길·김주우·윤형언 등이 왕손을 모함했다는 죄목을 받았으므로 인피를 청하다 대사헌 최명길이 아뢰기를, "일에 따라 탄핵하여 종척도 피하지 않는 것은 법관의 직책이고, 실상을 조사하여 경중에 따라 죄를 주는 것은 해조의 직책입니다....논열할 수 있겠습니까. 파척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지평 김주우(金柱宇)와 장령 윤형언(尹衡彦) 등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였다. 집의 엄성(嚴惺)이 처치하여 출사하게 하기를 청하니, 특병히 명하여 체직시켰다. 5. 인조실록 8권, 인조 3년 3월 29일 정축 1번째기사 / 승지 정광성·이성구·이목이 대간을 체차하라는 명을 거둘 것을 청하다 승지 정광성(鄭廣成)·이성구·이목(李楘)이 아뢰기를, "대간을 체차하라는 명이 천만 뜻밖에 내렸기에 신들이 서로 돌아보며 아연 실색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대관은 체면이 매우...없다. 그러나 이와 같이 아뢰었으니, 체차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장령 윤형언(尹衡彦), 지평 김주우(金柱宇)가 모두 직에 나아가지 않았고, 대사헌 최명길은 정사하고 나오지 않았다. 6. 인조실록 16권, 인조 5년 4월 5일 신축 3번째기사 / 간원이 파천할 때 오지 않은 이준·이민성 등의 파직을 청하다 간원이 아뢰기를, "난리에 임하여 달려와 문안하는 것은 바로 신하의 의리인데, 하물며 출입하며 시종하는 신하로서...자들입니다. 이준(李埈)·이민성(李民宬)·이언영(李彦英)·최연(崔葕)·윤전(尹烇)·김광혁(金光爀)·고부천(高傅川)·임련(林堜)·홍호(洪鎬)· 김주우(金柱宇) 등을 모두 파직하소서. 그리고 이 밖에 누락된 자는 해조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여 일체로 시행하소서."... 7. 인조실록 23권, 인조 8년 9월 27일 계묘 2번째기사 / 헌부가 김중청, 경차관 이탁 등의 일로써 아뢰다 헌부가 아뢰기를, "김중청(金中淸)이 죽은 것은 그의 아우 김득청(金得淸)의 저주(詛呪) 때문이었으니, 김중청의 아들 된 자가 아비의 원수를...기(倫紀)에 관계가 됩니다. 김중청의 아들 김주민(金柱旻)·김주국(金柱國)·김주우(金柱宇)·김주한(金柱漢) 등을 모두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경차관(敬差官) 이탁(李濯)은 경솔하게 정범(正犯)에게 고신(拷訊)을 가하여 곧바로... 8. 인조실록 26권, 인조 10년 1월 16일 갑인 3번째기사 / 사헌부가 경성 판관 김주우를 삭거 사판하라고 청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경성 판관(鏡城判官) 김주우(金柱宇)는 한 집안이 막대한 변을 만나 심지어 숙부(叔父)가 갇히고 조모(祖母)가 이로 인해 스스로 목을 매 죽었으니, 이는 실로 윤기(倫紀)에 죄를 얻은 것으로 통분하고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때는 비록 가장(家長)이 아니어서 죄를 면했으나 지금은 다시 사로에 낄 수가 없으니, 사판에서 삭거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김주한(金柱漢) 1. 인조실록 23권, 인조 8년 9월 27일 계묘 2번째기사 / 헌부가 김중청, 경차관 이탁 등의 일로써 아뢰다 헌부가 아뢰기를, "김중청(金中淸)이 죽은 것은 그의 아우 김득청(金得淸)의 저주(詛呪) 때문이었으니, 김중청의 아들 된 자가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관에...아들 김주민(金柱旻)·김주국(金柱國)·김주우(金柱宇)·김주한(金柱漢) 등을 모두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경차관(敬差官) 이탁(李濯)은 경솔하게 정범(正犯)에게 고신(拷訊)을 가하여 곧바로 죽게 만들었고, 또... 김한운(金翰運) 1. 숙종실록 57권, 숙종 42년 1월 29일 경신 3번째기사 / 사헌부에서 김한운을 파직할 것을 청하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논핵(論劾)하기를, "승문 정자(承文正字) 김한운(金翰運)은 외람되게 청로(淸路)를 더럽혔으므로 물의가 떠들썩하게 퍼지는데도 태연히 행공(行公)하기를 염치없이 무릅썼으며, 그 밖에 행실이 비굴하고 처사가 도리에 어그러진 것을 이루 거론하기 어려우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행공(行公) 공무에 행함. 하였 으나, 임금이... 2. 숙종실록 57권, 숙종 42년 2월 2일 계해 1번째기사 / 사헌부에서 아뢴 일 중 김한운의 일만을 따르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니, 임금이 김한운(金翰運)의 일만을 따랐다. 3. 영조실록 5권, 영조 1년 4월 25일 임진 5번째기사 / 장령 이의천이 김한운·신박·박사제·이삼·파주 유생 정하복 등을 탄핵하다 장령 이의천(李倚天)이 전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기성(李基聖) 등의 계사(啓辭)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이보욱(李普昱)은 다른 죄로...아뢰기를, "남해 현감(南海縣監) 김한운(金翰運)은 역적 심단(沈檀)의 지시를 받고 윤선도(尹善道)의 원우(院宇)를 영건(營建)하였는데, 널리 부민(富民)을 불러 강제로 원생(院生)에 소속시키고 수천 냥(兩)의... 4. 영조실록 24권, 영조 5년 11월 24일 갑오 1번째기사 / 김한운을 정언으로 삼다 김한운(金翰運)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5. 영조실록 24권, 영조 5년 11월 24일 갑오 3번째기사 / 초복을 행하다 초복(初覆)을 행하여, 서울에 수금된 아들을 죽인 죄인 안성익(安成益)을 다시 사실(査實)하도록 명하였다. 정언 김한운(金翰運)이 앞서 아뢴 일을 거듭 전계(傳啓)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도승지 조현명(趙顯命)이 밤이 깊어졌음을 들어 내일 입시(入侍)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초복(初覆) 사죄(死罪)에 대한 1차 복심(覆審). 사죄에 대해서는 신중을 기하기... 6. 영조실록 24권, 영조 5년 11월 25일 을미 1번째기사 / 죄인 유을엽 등을 사핵하도록 하다 초복하는 일 때문에 입시하니, 살인한 옥사(獄事)의 죄인 사노(私奴) 유을엽(留乙葉)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엄중하게 사핵(査覈)하도록 하고, 세 추관(推官)을 잡아다가 추문(推問)하며, 전후의 도신을 엄중하게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다. 정언 김한운(金翰運)이 앞서 아뢴 일을 전계(傳啓)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7. 영조실록 24권, 영조 5년 11월 29일 기해 1번째기사 / 삼복을 행하여 죄인 임금선·권광금을 사형에서 감등하여 정배하다 삼복(三覆)을 행하여 살인한 옥사(獄事)의 죄인 임금선(林金先)과 인신(印信)을 위조한 죄인 권광금(權廣金)을 모두 사형에서 감등하여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정언...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정언 김한운(金翰運)이 앞서 아뢴 일을 전계(傳啓)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인신을 위조한 죄인 권광금을 사형에서 감등하여 정배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8. 영조실록 24권, 영조 5년 12월 1일 신축 3번째기사 / 신겸제·김한운·송수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신겸제(申兼濟)를 장령(掌令)으로, 김한운(金翰運)을 지평(持平)으로, 송수형(宋秀衡)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9. 영조실록 24권, 영조 5년 12월 7일 정미 4번째기사 / 이진유의 감죄를 청한 김한운·신치근 등을 논핵한 이현록의 상소 대사헌 이현록(李顯祿)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소하(疏下)의 삼적(三賊)들의 죄는 진실로 이미 위로 하늘에 닿게 된 것인데도 오히려 지금도 그들의 머리를 보존하고.그 뒤에 과연 김한운(金翰運)이 율을 감하기를 청하는 계사(啓辭)가 나왔었습다. 김한운이 방자하고 기탄없는 짓을 한 것은 진실로 말할 것이 없거니와, 이진유의 기세와 위력이 참으로 두려워집니다.... 10. 영조실록 52권, 영조 16년 11월 22일 기축 1번째기사 / 권현·이격·김한운·서명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권현(權賢)을 집의로, 이격(李格)을 장령으로, 김한운(金翰運)을 지평으로, 서명신(徐命臣)을 헌납으로, 이수해(李壽海)를 정언으로, 윤심형(尹心衡)을 응교로, 신사건(申思建)을 수찬으로, 민응수(閔應洙)를 수어사(守御使)로, 윤순(尹淳)을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11. 영조실록 52권, 영조 16년 12월 12일 무신 2번째기사 / 장령 이휘항이 구휼할 것과 황해 수사 민창기·개천 현감 손진민 등을 견책하라고 상소하다 장령 이휘항(李彙恒)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금년에 우박의 재해를 입은 곳에서는 전혀 수확할 것이 없으며, 바닷가 개펄땅에도 흉년이 들어 떠돌면서 구렁에 죽어...파 직하소서. 지평 김한운(金翰運)은 처음 청망(淸望)에 허통되었을 적에 이미 비천(卑賤)하다는 지척(指斥)을 받았으며, 일찍이 대지(臺地)에 들어갔을 적에는 멋대로 이진유(李眞儒)의 계사(啓辭)를 고쳐... 12. 영조실록 52권, 영조 16년 12월 17일 계축 7번째기사 / 이휘항이 지평 김한운을 논한 일로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다 임금이 이휘항(李彙恒)이 지평 김한운(金翰運)을 논한 일 때문에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신은 알지 못합니다." 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은 아뢰기를, "이진유(李眞儒)의 계사(啓辭)에 연계(連啓)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김한운으로 하여금 고쳐서 속히 방형(邦刑)을 바루기 위해 국문(鞫問)하게 한 것입니다. 18일의 처분(處分) 때에... 13. 영조실록 53권, 영조 17년 1월 2일 무진 1번째기사 / 지평 김한운이 이휘항이 상소하여 배척한 것을 가지고 스스로 변명하다 지평(持平) 김한운(金翰運)이, 이휘항(李彙恒)이 상소하여 배척한 것을 가지고 스스로 변명하기를, "이른바 이진유(李眞儒)에 대한 계사(啓辭)를 마음대로 고쳤다고 하는 것은 ‘빨리 국가의 형정(刑政)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엄중히 국문하여 처단해야 한다.’는 것으로 고친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처분이 엄중하게 국문하는 데로 돌아갔는데, 지금에 와서... 14. 영조실록 62권, 영조 21년 9월 26일 을미 4번째기사 / 신사건 외 11명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신사건(申思建)을 대사간으로, 이위보(李渭輔)를 사간으로, 이하종(李夏宗)을 헌납으로, 김상로(金尙魯)를 동의금으로, 홍정보(洪正輔)·김이만(金履萬)을 정언으로, 서종급(徐宗伋)을 대사헌으로, 이광식(李光湜)을 집의로, 유건(柳謇)·홍득후(洪得厚)를 장령으로, 김한운(金漢運)·남학종(南鶴宗)을 지평으로 삼았다. 15. 영조실록 62권, 영조 21년 10월 23일 신유 2번째기사 / 이장오 외 10명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장오(李章吾)를 승지로, 남태제(南泰齊)를 대사간으로, 유언술(兪彦述)을 헌납으로, 안상휘(安相徽)를 사간으로, 윤상임(尹尙任)을 정언으로, 김한운(金翰運)을 장령으로, 황경원(黃景源)을 수찬으로, 유우기(兪宇基)를 부응교로, 조영국(趙榮國)을 대사성으로, 김이만(金履萬)을 정언으로, 한광조(韓光肇)를 지평으로 삼았다. 16. 영조실록 62권, 영조 21년 10월 28일 병인 1번째기사 / 숙장문에 나아가 이덕하와 남익한을 친국하다 임금이 숙장문(肅章門)에 나아가서 이덕하(李德夏)와 남익한(南翼漢)을 친국(親鞫)하였는데, 형신(刑訊)해도 자복(自服)하지 않았다. 이용발(李龍發)은 절도(絶島)에 정배하고,...하였다. 장령 김한운(金翰運)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용발은 이색의 사환(使喚)이 되었으며, 김덕재도 역시 음모에 참여하여 알고 있으니, 이색이... 17. 영조실록 62권, 영조 21년 11월 3일 경오 4번째기사 / 숙장문에 나아가 권두령, 이용발, 신후담, 신후함 등을 국문하다 임금이 숙장문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다. 권두령을 국문하니, 공초하기를, "영성군(靈城君)은 누구인지 모르나 심부름꾼을 시켜 편지를 전하였다는 이야기를 단지 이색에게서...가하다." 하였다. 장령 김한운(金翰運)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 를, "연일 현감(延日縣監) 김취보(金就寶)는 역적 김태기(金泰起)의 친조카로서 물의(物議)가 있을까... 18. 영조실록 62권, 영조 21년 11월 24일 신묘 1번째기사 / 유최기 외 12명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유최기(兪最基)를 대사간으로, 김한운(金翰運)을 장령으로, 임순(任珣)·이창유(李昌儒)를 지평으로, 김양택(金陽澤)을 정언으로, 윤동도(尹東度)를 사서로, 남유용(南有容)을 사간으로, 권적(權𥛚)을 대사성으로, 윤용(尹容)을 대사헌으로, 유우기(兪宇基)를 집의로, 이윤신(李潤身)을 보덕(輔德)으로, 정우량(鄭羽良)을 우빈객(右賓客)으로, 이달(李鐽)을 전라 좌수사로 삼았다. 19. 영조실록 62권, 영조 21년 12월 13일 경술 2번째기사 / 인정문에 나아가 이광흡을 친국하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이광흡(李光翕)을 친국하였는데, 곧 무신년 역적 이배(李培)의 조카로서 형신에 승복하였다. 이유필(李有弼)은 형신을 하자 직초(直招)하였는데, 곧 무신년 역적의 괴수...동참한 것으로 능지 처참(凌遲處斬)하였다. 장령 김한운(金翰運 )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엄우(嚴瑀)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0. 영조실록 62권, 영조 21년 12월 14일 신해 1번째기사 / 인정문에 나아가 이유필을 친국하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이유필(李有弼)을 친국하였는데, 승복(承服)하였다. 결안하기를, "신은 이색을 곽산(郭山)에서 만났는데, 이색이 말하기를, ‘이사성(李思晟)의 아들과 황진기(黃鎭紀)가 전라도의...장(羽林將)으로 임명한다." 하였다. 장령 김한운(金翰運)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엄우(嚴瑀)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1. 영조실록 62권, 영조 21년 12월 22일 기미 1번째기사 / 장령 김상구·김한운과 정언 엄우 등이 심수의 상소로 인피하다 장령 김상구(金尙耉)가 피혐(避嫌)하여 아뢰기를, "동료 대관(臺官)이 상소 가운데 이진망(李眞望)의 일로 참국(參鞫)했던 여러 신하들을 배척하였습니다마는, 이는 성명(姓名)이...하라." 하였다. 장령 김한운(金翰運)과 정언 엄우(嚴瑀)도 역시 심수(沈鏽)의 상소 때문에 인피(引避)하니, 헌납 박치문(朴致文)이 처치(處置)하여 아뢰기를, "의논하여야 될 것을 의논하지 않아서... 22. 영조실록 62권, 영조 21년 12월 23일 경신 1번째기사 / 인정문에 나아가 김덕조와 나숭경을 친국하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김덕조(金德祚)와 나숭경(羅崇敬)을 친국하였는데, 김덕조가 공초하기를, "신은 무신년 이후에 원배(遠配)된 지 7, 8년 동안 문 밖에...유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령 김한운(金翰運)이 소회(所懷)를 진달하면서 박종인과 심해용을 작처(酌處)하라는 명 을 거두고 더욱 엄중하게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 23. 영조실록 62권, 영조 21년 12월 25일 임술 3번째기사 / 주강을 행하고, 송인명이 임금의 지나친 거조를 간언하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성상(聖上)의 중도에 지나친 거조가 비록 지금은 큰 해가 없는 것 같지만, 말류(末流)의 폐단은 반드시 망국(亡國)에까지 이를...권병(權柄)을 삼는다면 곤란하다." 하였다. 장령 김한운(金翰運)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 유언술(兪彦述)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4. 영조실록 62권, 영조 21년 12월 26일 계해 1번째기사 /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니 대왕 대비전의 육순을 위한 칭경, 칭상을 논하다.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께서는 명년이 꼭 육순이 차는 해입니다. 이미 진하(陳賀)를 행할 것이면 칭경(稱慶)하고 칭상(稱觴)하는 거조가 없을 수...말하기를, "원조(元朝)의 하례가 끝난 뒤에 마땅히 하교하겠다." 하였다. 장령 김한운(金翰運)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5. 영조실록 64권, 영조 22년 8월 22일 을유 3번째기사 / 유건기 외 12명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유건기(兪健基)를 대사헌으로, 유최기(兪最基)를 대사간으로, 조관빈(趙觀彬)을 형조 판서로, 권적(權𥛚)을 한성부 판윤으로, 심육(沈錥)을 제주(祭酒)로, 윤봉구(尹鳳九)를 진선(進善)으로, 윤지태(尹志泰)를 집의로,...헌납으로, 민백상(閔百祥)·이중조(李重祚)를 지평으로, 안윤행(安允行)을 정언으로, 김한운(金翰運)을 장령으로, 정익하(鄭 益河)를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26. 영조실록 64권, 영조 22년 11월 16일 정미 2번째기사 / 조영국 외 15명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조영국(趙榮國)을 대사헌으로, 조명겸(趙明謙)을 대사간으로, 심육(沈錥)을 성균관 좨주로, 김상적(金尙廸)·엄우(嚴瑀)를 승지로, 민계(閔堦)를 집의로, 이구령(李耉齡)을 사간으로,...사간으로, 전명조(全命肇)·김한운(金翰運)을 장령으로, 권기언(權基彦)을 지평으로, 정순검(鄭純儉)을 정언으로, 김희로(金希魯)를 호조 참판으로, 홍상한(洪象漢)을 예조 참판으로, 황정(黃 晸)을... 27. 영조실록 64권, 영조 22년 11월 19일 경술 6번째기사 / 장령 김한운이 상소하여 혜릉에 표석을 세울 것을 청하다 장령 김한운(金翰運)이 상소하여 혜릉(惠陵)에 표석을 세울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이어 목릉(穆陵)에도 일체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28. 영조실록 64권, 영조 22년 11월 26일 정사 3번째기사 / 대사간 조상명이 상소하여 이조 참판 심성희의 정사를 탄핵하다 대사간 조상명(趙尙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조 참판 심성희(沈聖希)의 어제 정사는 많은 대관(臺官)의 차출이 모두 한쪽 사람으로 몰렸습니다. 고르지 못한...또 말하기를, "장령 김한운(金翰運)은 행동 거지가 변화 무쌍하고 거조가 거칠어서 늙은 추태를 숨길 수 없으니, 보고 듣는 사람마다 놀라워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이번의 인피는 더더욱 군색스러워서... 29. 영조실록 65권, 영조 23년 4월 25일 갑신 2번째기사 / 송익보·윤지태·유우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송익보(宋翼輔)를 대사간으로, 윤지태(尹志泰)를 사간으로, 유우기(兪宇基)를 집의로, 안식(安栻)·김한운(金翰運)을 장령으로, 정언유(鄭彦儒)를 헌납으로, 유언국(兪彦國)·홍서(洪曙)를 지평으로, 박홍준(朴弘儁)·이성억(李聖檍)을 정언으로, 홍우한(洪羽漢)을 교리로, 홍중효(洪重孝)를 수찬으로, 한광회(韓光會)를 부수찬으로, 김시찬(金時粲)을 필선으로 삼았다 . 30. 영조실록 65권, 영조 23년 6월 16일 을해 2번째기사 / 이장오·송수형·송창명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장오(李章吾)를 승지로, 송수형(宋秀衡)을 대사간으로, 송창명(宋昌明)을 집의로, 김시찬(金時粲)을 사간으로, 홍익삼(洪益三)·김한운(金翰運)을 장령으로, 윤광찬(尹光纘)·홍서(洪曙)를 지평으로, 한광회(韓光會)를 사서로, 김상로(金尙魯)를 이조 참판으로, 신만(申晩)을 형조 판서로, 김상철(金尙喆)·오언유(吳彦儒)를 교리로, 민백상(閔百祥)을 부교리로, 이규채(李奎采)를... 31. 영조실록 65권, 영조 23년 6월 21일 경진 2번째기사 / 장령 김한운이 상소하여 걸군하는 폐단을 진달하다 장령 김한운(金翰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요즈음 걸군(乞郡)하는 것도 한 가지 폐습(弊習)입니다. 그 중에 비록 정세를 남들이 모두 아는 자라 하더라도 진달하여 걸군하는 소장이 전후에 서로 잇달고 있는데, 이름난 고을과 부유한 고을을 문득 편리함을 차지하는 바탕으로 삼으니, 이것이 어찌 청조(淸朝)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신은 진실로 개연(慨 然)하게... 32. 영조실록 65권, 영조 23년 7월 22일 경술 2번째기사 / 장령 김한운이 상소하여 의열과 충절을 포창할 것을 아뢰다 장령 김한운(金翰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나라가 나라답게 되는 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권면하여 오직 유학 (儒學)을 숭상하여 장려하고 의열(義烈)을 포창하여 숭상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우리 현종(顯宗)과 숙종(肅宗) 양조(兩朝)의 세대에는 찰방 신 곽시징(郭始徵), 정랑 신 이지렴(李之濂)과 같은 이가 있어 사우(師友) 사이에 종사(從事)하였 는데, 어렸을... 33. 영조실록 66권, 영조 23년 10월 8일 을축 3번째기사 / 이덕중·김상익·조재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덕중(李德重)을 이조 참의로, 김상익(金尙翼)을 대사간으로, 조재민(趙載敏)을 집의로, 김한운(金翰運)을 장령으로, 한광회(韓光會)를 헌납으로, 이게(李垍)를 지평으로, 임명주(林命周)·이광직(李光溭)을 정언으로 삼았다. 34. 영조실록 67권, 영조 24년 5월 10일 계사 3번째기사 / 황재·어유룡·조재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황재(黃梓)를 대사헌으로, 어유룡(魚有龍)을 대사간으로, 조재덕(趙載德)을 집의로, 조중직(趙重稷)을 사간으로, 김한운(金翰運)을 장령으로, 박수(朴璲)를 헌납으로, 이영록(李永祿)을 정언으로, 윤동도(尹東度)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