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속 산행 외 2편

[석염]

                                                                  부산대 명예교수

                                                                 2015년 <수필춘추>로 등단

                                                                 달구벌 수필문학회 회원

                                                                대경상록 아카데미 수필창작교실 회원

폭염 속의 산행

김 선 구

타오를 듯 화기를 뿜어내던 햇볕이 기세를 잃고 처연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금년 여름 더위가 대단했다. 70여년 만에 오는 폭염이라 했다. 이제 9월의 문턱에 접어들었으니 가을기운이 서서히 닥아 오나본다. 아침 산책길,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에서 새삼 생동감을 느낀다. 생명력은 끈질기고 자연의 변화는 위대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폭염에 시달려서 누렇게 메말라가던 잔디가 아침이슬을 머금고 생기를 뽐내는 것 같다. 그 모습이 지난 번 산행에서 더위에 시달렸던 내 모습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폭염이 한 창 무르익던 지난달 초 산행에 나섰다. 수필 창작 반 문우들이 모여 친목을 겸한 단합행사를 갖자고 미리 약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모인 사람은 불과 다섯 명이었다. 모두들 폭염의 공포에 밀려 산행을 포기 했나 보다. 용기 있는 사람 다섯이서 산행 길에 올랐다.

산행 코-스는 마천산 둘레길. 대구지하철 2호선 문양 역에서 집결하였다. 대합실을 나서니 멀지 않은 곳에 마천산 등산로입구가 있었다. 마천산은 높이는 274m, 둘레길 길이는 7.5Km, 등산로 따라 둘레길 모습이 마치 아프리카 지도와 닮게 그려져 있었다. 산을 한 바퀴 돌면 아프리카 대륙 해변 가를 거니는 셈이 되는 것인가?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산을 올랐다. 산행길이 숲으로 그늘 져 있어서 그렇게 힘들지 않다는 얘기만 듣고 별 준비도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산행에 임하였다.

산 속에 들어서 보니 서너 사람만이 지나갈 뿐 인적이 뜸했다. 평소에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산이라고 알려졌는데 등산객들이 없는 것을 보니 산행에 적합지 않은 날씨인 것이 분명했다. 이 무더위 속에 산행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짓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행 중 누군가가 오늘이 8월 8일이니 팔팔하게 한번 걸어보자고 제안 하였다. 더위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지만 아직은 아침 밥 먹은 기운이 남아 있어 도전해 볼 만 하다고 생각했다.

이곳 지리에 익숙하다는 M위원장이 앞장서서 길잡이가 되었다. 등산로는 훤하게 잘 뚫렸고 나뭇잎으로 햇볕을 가려 주었다. 얼마쯤 올라가니 세 갈래 갈림길에 이르렀다. 산 정상으로 가는 길과 산 전체를 둘러보는 길, 그리고 짧은 코-스를 둘러보며 하행하는 길이다. 짧은 코-스를 택하여 하행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길잡이 M위원장이 앞장서서 걸어가니 그 뒤를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한참 걷고 나니 숨이 차고 갈증이 몰려왔다.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가져온 과자를 나누어 먹으며 잠시 휴식하였다.

M위원장이 한마디 하였다. “이제 산행도중에 빠져나갈 수 있는 샛길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전진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에 문우 O가 한 마디 더 거들었다. “우리는 이제 가두리 양식장에 갇힌 물고기 신세입니다. 산을 빠져 나가려면 열심히 걸어서 입구를 찾아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K선생님은 유쾌하게 웃었다. 문우 J도 싱긋이 웃는다. 모두 한바탕 웃고 마음에 여유를 가다듬었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오늘 고생께나 하게 되었다고 되 뇌이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꾸 일행에서 뒤처지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등산로가 나무그늘로 햇볕을 차단해 주어도 폭염 속 공기는 무덥기만 하였다. 땀을 씻겨 줄 시원한 바람 한 줌이 아쉬웠다. 산은 계곡을 끼고 있어야 제 맛이 난다. 계곡 속에서 맑은 물이 흐르고 시원한 바람을 공급해 준다면 여름철 산행도 즐거울 수 있다. 그러나 마천산등산로는 능선을 따라 이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천혜적인 자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건조한 황토 빛 흙과 숨 막힐 듯 밀려오는 열기만 가득하였다.

하도 무더워서 잠시 휘파람을 불어 보았다. 고되거나 무더울 때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러보는 것은 나의 습관이다. 젊은 날 뙤약볕 밑에서 종일 김 메기 하던 시절에 얻은 버릇이다. 여름방학이면 어머니를 따라 여름 내내 조밭에서 김 메기 하였다. 못 견디게 무더우면 일어서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면 그에 답변이라도 하듯이 산들 바람이 불어 잠시 더위를 식혀주곤 하였다. 그러나 그 날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의 어머니는 이러한 무더위를 맞으면 오히려 즐거워했다. 날이 무더워지면 조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벼들이 이삭 팰 채비를 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벼들 포기 사이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쌀밥냄새를 사랑했다. 농부들은 본인의 안위보다 날씨가 농작물에 미칠 영향을 더 우려했다. 어머니가 땀 흘리던 모습을 떠 올리니 오늘 나의 산행 길이 호사하는 것 같아 죄스런 마음이 일순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일 뿐 가는 길이 더욱 험난하게 느껴졌다. 등산은 산의 정상을 정복하는 즐거움이 있다. 힘들여 올라가면 내려올 때 후련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마천산 등산로에서는 전혀 이러한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간신히 오르막길을 끝내고 한 숨 돌리려면 다시 오르막길이 도래하였다. 때로는 내리막 길, 평지 길 등 예측할 수 없는 지형의 변화가 더욱 힘들게 하였다. 짜증나는 산행 길에 나의 기력은 더 쇠잔해 갔다.

한참 따라 걷다보니 쉼터에 이르렀다. M위원장이 다시 한마디 했다. “이제 딱 중간지점에 도착했습니다. 앞으로 계속해 가거나 왔던 길을 돌아가거나 등산로 종점까지 가는 어려움은 마찬가지입니다. 딴 생각 하지 말고 힘을 내십시오.” 그동안 험난한 인생길을 헤쳐 온 것처럼 힘들었는데 이제야 절반에 이르렀다고 하니 앞길이 막막하였다. 앞으로 나가려니 갈 길이 멀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아도 별 감흥이 없었다.

철학자 니체는 ‘인생이란 두 탑 사이에 메인 줄을 걸어가는 나그네’에 비유했다. 앞으로 나가려니 떨어질까 두렵고 뒤로 돌아가려니 그것도 두렵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도 두렵다. 등산로 중간지점에 서 있는 내 모습이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 대신 막막함이 엄습해왔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니체는 초인이 되라고 했다. 그래, 초인은 못되어도 초인처럼 행동해 보자! 이를 악물고 힘을 모아 앞으로 나아갔다. 천신만고 끝에 종착점에 도착했다. 종착점 가까이 있는 논밭에서 타오르는 뜻한 더위 속에도 벼들이 기세 좋게 활착피어 있었다. 논밭에서 구수한 쌀밥 냄새가 진동했다. 그 냄새 속에 어머니의 강인했던 삶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그래 좀 더 힘을 내자하고 스스로 다짐했다.

드디어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 아줌마가 이 폭염의 날씨에 무슨 등산이냐며 걱정 반 반가움 반의 표정으로 우리들을 맞이했다. 아마도 우리가 그날 유일한 손님이었나 보였다. 자리를 잡고 시원한 물부터 주문하였다. 물을 몇 컵을 들이마셨는지 모른다. 물맛이 이렇게 좋은 줄은 여태 몰랐다. 감로수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세상에 이보다 더한 편안함과 행복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폭염 속에서 산행한 결과 열락의 세계를 맛 본 셈이었다.

오늘 아침 남천변 산책길에 본 이슬 머금은 풀잎이 감로수 맛을 음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천 따라 불어오는 바람결이 상쾌했다. 이제 곧 가을이 올 것이다. 폭염 속에서 어머니의 영상을 떠올리고 감로수의 묘미를 느끼게 해준 마천산 둘레길이 떠오른다. 오는 가을날에 마천산을 찾아 그 둘레길을 다시 한 번 걸어볼 생각이다.

정자은행 난자은행

김 선 구

정자은행과 난자은행은 사람의 정자와 난자를 살아있는 상태로 안전하게 보관해 두는 장치이다. 저장되는 정자와 난자는 고객이 저축해두는 예금인 셈이고 훗날 유용하게 쓰이는 가치가 예금이자가 되는 셈이다. 은행관리자는 보관료를 위시한 제반 비용을 받을 수 있으니 소득의 원천이 된다. 그래서 정자와 난자의 동결보존에 은행이란 용어가 채택된 모양이다.

1785년 이태리의 동물학자 스팔란짜니가 개에게 인공수정을 실시하여 성공한 이 후 기술이 비약적인 발전을 거쳐 동물생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인공수정 기술의 효율을 높이기 위하여 정자를 체외에서 오래 보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중 1949년 동물의 정자를 동결보존 하는데 성공하였다. 저온생물학자들은 동물세포가 -60도 이하가 되면 세포에 손상을 주지 않고 오래 보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에 따라 –196도의 액체질소 속에서 정자들을 반영구적으로 냉동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후 동물들의 정자가 국제간의 교역대상이 되었다. 동물자체를 운반하는 것 보다 그 동물의 정자를 운반하여 후손을 생산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고 비용이 저렴했기 때문이다.

동물정자를 동결하고 보존하는 기술을 응용하여 인간의 정자를 동결 보존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정자은행이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54년에 처음으로 출범하였다.

원래 정자은행은 남성불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출발하였다. 남성불임형태에는 정자가 생산되지 않은 무정자증, 정액 내 모든 정자가 죽어서 배출되는 정자사멸증, 정자의 운동성이 현저하게 약한 정자무력증, 정액 내 정자의 수가 현저히 적은 정자감소증 등이 있다. 이들 부부는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통하여 아이를 가질 수 없으므로 인공수정이 불가피하였다. 특히 무정자증이나 정자사멸증의 경우 자신의 정자로 임신이 불가능 하였다. 정자를 기증해준 사람의 정자로 인공수정 해야 하기 때문에 기증자의 정자를 냉동보존 했다가 불임부부의 아내에게 제공하였다. 정자기증자들은 젊은 남성들로 일정한 검사기준을 통과해야한다. 생명윤리법에 따르면 정자기증자의 신원은 혈액형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알려주어서는 안 된다. 기증자의 신원에 따라 정자를 고를 수 있게 한다면 정자를 사고파는 상업형태로 변질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정자은행에 보관된 정자는 기증자의 정자뿐만 아니라 환자나 일반인들의 정자도 장례에 대비하여 보관해 두고 있다. 백혈병이나 고환암 등의 젊은 환자들은 항암치료를 받을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정자를 보관해 둔다. 그 외에 먼 곳으로 장기 출장을 떠나거나 건강상의 문제로 정자의 질이 저하 될 우려에 대비하여도 미리 정자은행에 정자를 보관해 두고 있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남편이 사망 후에도 정자은행에 보관된 남편의 정자를 이용하여 임신한 사레가 있다. 이처럼 정자은행의 효율과 기능은 좀 더 확대되어 인류복지에 기여하게 되었다.

1978년 세계 최초의 시험관 아기(루이스 브라운)가 영국에서 태어나자 인류가 달 착륙 이래 이뤄낸 최대의 업적이라고 세상이 요란했다. 시험관 아기란 정자와 난자를 시험관에서 공동배양하며 수정시킨 후 생산된 수정란을 모체의 자궁에 이식하여 태어난 아기이다. 정자와 난자를 체외에서 수정시켜 수정란을 생산할 수 있게 됨으로서 여성의 불임문제를 해결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자궁이 약하여 임신이 안 되는 경우에도 대리모를 지정하여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또 난자도 정자처럼 동결시켜 난자은행에 보관 해두면 적당한 시기에 체외수정 시켜 자궁에 이식함으로서 임신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난자은행의 근본 취지는 암이나 백혈병 등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게 될 여성 환자의 경우 난자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안전하게 저장해 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만혼의 여성들이 안전한 출산을 위한 수단으로 더 많이 이용되고 있다. 여성들의 자연 임신율은 37세 이전에 50~60%이던 것이 37세를 넘어서면 20~30%, 40세 이상이 되면 10%정도로 낮아진다고 알려졌다. 이것은 연령이 증가함에 따라 난자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난자를 보관해 두면 설령 만혼이 되어 결혼 하여도 건전한 아이가 태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국내의 모 병원 여성의학 연구소에서는 임신이 무난하게 잘 되는 나이의 마지노선을 37세로 보고 이 시기를 넘기지 말고 난자를 보관시킬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정자은행과 난자은행 제도가 생활에 유익한 면을 제공해 주고 있는 반면 예기치 않은 부작용도 발생하고 있다. 몇 년 전 미국의 한 젊은 부부가 가족계획의 일환으로 수정란을 생산하여 냉동보관 하였다. 그런데 결혼 생활이 파탄이 나서 헤어지게 되자 이 수정란이 문제가 되었다. 아내는 이혼 후에라도 수정란을 이식 받아 애를 갖고 싶다고 하여 자기의 소유를 주장 하였고, 남편은 원하지 않은 애가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폐기할 것을 요청하였다.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 모르나 우리 주변에 닥칠 사회문제의 일면임을 예상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사례는 결혼한 딸이 자궁이 약하여 임신에 실패하자 엄마가 딸 내외의 수정란을 이식 받아 손자를 낳아주었다. 이 아이의 생물학적 지위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법리학적으로는 이 아이의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되어야하고, 어머니는 누나, 아버지는 매형, 외할아버지는 의부가 되었다. 법적으로는 아이를 출생한자 만이 어머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엊그제 신문보도에 의하면 영국에서 60세의 할머니가 딸이 대장암으로 죽자 난자은행에 보관중인 딸의 난자를 체외수정 하고 자기의 자궁에 이식하여 손자를 낳고 싶다하여 화제라 한다. 체외수정에 사용할 정자는 남편의 것이라 하니 부녀간에 근친상간을 용인하는 셈이다. 우리의 상식기준으로는 도저히 용인할 될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최근에는 정자와 난자에 대한 음성적인 거래가 국내외에서 성행되고 있다한다. 미국의 대학신문에는 이를 부추기는 광고가 공공연하게 보인다니 윤리와 도덕을 무시하고 돈벌이수단으로 전락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여학생 학부모들이 딸애가 난자매매에 나서지 않을까하고 전전긍긍 한다니 먼 나라의 얘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정자은행과 난자은행 제도가 불행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숭고한 이념이 퇴색되지 않을까 우려되는바 크다.

아무리 위대한 과학기술도 도덕과 윤리 그리고 휴머니즘의 철학을 동반하지 않으면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무기로 변질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추석 절 세우리 다듬기

김 선 구

부추를 정구지, 솔 등 지방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을 한참 후에 알았다. 뿌리가 번성하면 집을 파괴 시킨다하여 파옥초(破屋草)라고도 했다. 남편의 정력을 돋우기 위하여 강장식품으로 알려진 부추를 집 뜰에 너무 많이 심었다가 집이 무너졌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제주도 토속어로는 부추를 ‘세우리’라고 불렀다. 기양초(起陽草)라는 닉네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으켜 세운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나의 뇌리에서는 부추라는 표준어 보다 세우리라는 사투리가 더 깊숙이 투영되어 있다.

옛날 고향집 뒤뜰 처마 밑에는 세우리가 무성했다. 축담 주위로 심어진 세우리는 뿌리가 엉켜져서 축담주변의 흙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것을 방지해 주었다. 파옥초가 아니라 보옥초(保屋草)라 해야 맞을 것 같았다. 특별히 관리하지 않아도 세우리는 잘 자랐다. 베어버리면 다시 자라고 다시 베면 또 자라고. 세우리의 생명력은 대단했다. 그 생명력을 섭취하여 우리 형제들이 건강하게 자랐는지 모른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부모님은 밭에 나가버렸고 집안이 썰렁하였다. 무쇠 솥을 열어 보리 밥 한 그릇 떠내고 보면 반찬이 없었다. 그러면 처마 밑에 가서 세우리를 한 움큼 뜯어다가 채 썰었다. 그것을 양념으로 된장에 넣고 섞으면 좋은 반찬이 되었다. 냉수 한 그릇 떠내서 양념된 된장 한 숟갈 풀어 놓으면 된장국이 되었다. 세우리 된장과 함께 한 끼 식사가 해결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된장에 보리밥은 궁합이 잘 맞는 상차림으로 여기고 있다.

그 뿐인가. 소풍가는 날이면 으래 세우리를 채 썰어 섞은 계란찜이 도시락 찬으로 담겼다. 계란이 귀했던 시기라서 양을 늘리기 위하여 넣었는지 모르지만 계란과 세우리는 궁합이 잘 맞았다. 쌀밥에 계란찜 먹었던 기억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이다. 지금도 음식 중 궁합이 가장 잘 맞는 것을 고르라면 계란과 세우리라고 추천하고 싶다. 그만큼 세우리는 우리 집 식재료로 중요했고, 그 영양성분이 우리 형제들의 체질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고향에 다녀왔다. 형제들과 벌초도 함께하고 추석도 쉘 겸해서다. 고향 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잘 보존되고 있었다. 바깥채는 남에게 새놓아 살게 하고 안채는 비워두었다. 그래서 고향에 가면 언제나 내 집에 머무를 수 있어 좋다. 방안을 정리하고 나서 집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처마 밑에는 세우리가 하나도 없고 다른 풀이 무성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주인의 손길이 뜸해지니 스스로 삶을 포기한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만 해도 무성했었는데 자주 비어주지 않으니 뿌리가 썩어 삭으라져 버렸나 보았다.

주인 없어 비워둔 집을 파옥 시키지 않으려는 세우리의 뜻이라 여기고 싶었지만 어쩐지 세우리가 없는 뒤뜰이 허전하였다. 계란을 부쳐 먹으려 했으나 세우리가 없다. 단발한 소녀의 머리처럼 가지런히 고개 숙여 기다려주던 모습이 환영처럼 스쳐 지나갔다. 양애라는 야채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양애는 그 뿌리를 캐어 영념에 무쳐놓으면 냄새가 그윽하고 좋다. 그러나 내손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채소이다. 어머니의 손맛을 그리게 할 뿐이었다.

다행히 막내 동생이 세우리를 재배하고 있었다. 동생은 이웃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나의 빈 집도 돌봐주고 있다. 동생이 재배하는 세우리는 개량된 품종이어서 굵고 길었다. 추석을 앞두고 시장에서 수요가 많았다. 그렇지만 일손이 모자라서 전전긍긍하고 있어 나의 두 여동생이 이른 아침부터 농장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나도 세우리를 다듬는 일을 거들어 주었다. 고급노동력을 투입할 곳이 아니라고 말렸지만 세우리에서 옛 정취를 느껴볼 수 있어 기꺼이 참여하였다. ‘백지장도 맞들면 가볍다’고 했으니 서툴지만 힘을 보태면 좋지 않은가. 막내 동생은 밭에 가서 세우리를 베어내 운반해주었고, 두 여동생과 나는 비닐하우스 속에서 세우리 다듬기에 열중 하였다. 그러나 작업성과는 마음과 같지 않았다. 한단을 만들기가 숨이 바랬다. 1kg짜리 한단을 만들고, 열 단을 만들어 한 박스를 채웠다. 한 박스를 다듬어야 일만 원 정도 받을 수 있다니 농사짓는 것이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소비자들의 요구조건은 까다로 와서 조그만 흠이 있어도 신용을 잃게 된다. 거래를 유지하기 위하여 무게는 넉넉히, 물건은 정갈하게 준비하라고 했다. 농사짓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짐작할 만 했다.

70대 오빠와 60대 두 여동생이 마주 앉아 손놀림만 하고 있으니 지나간 옛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자연히 담소가 이어졌다. 우리의 얘기는 5ㆍ60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조부모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부모님이 남긴 이야기, 어렸을 때 함께 생활하던 얘기 등. 세우리 다듬기 삼일 간을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지만 끝이 없었다.

사람은 추억에 산다고 했다. 실현의 기쁨도 중요하지만 아름다운 일들을 많이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이다. 황혼의 나이에 불쾌한 기억만을 떠올린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유쾌한 기억을 많이 떠올릴 수 있다면 그만큼 내 자신이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세우리 다듬기가 끝나던 날 형제식구들이 모두 모았다. 그리고 함께 식사하며 덕담을 나누고 헤어졌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 예기치 않았던 세우리 다듬기를 통하여 혈연간의 우애를 느껴볼 수 있었다. 추석 상에 마주했을 조상님들도 이번 일을 함께 기뻐해 주셨을 것으로 여기고 있다

[choess]

좋은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