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베네치아 수상도시 풍경
2024. 4. 17
시편 31장~41장까지!
(시편 37,5)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
묵상ㅡ
시편은 내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어준
치료서이며 죽어가던
영육을 회복시켜준
나의 자서전이다.
지독한 병마는 물론
집안의 어려움,
불가능해보이던 문제들.
그리고 남편에 대한
미움으로 괴로울때,
시편을 정독하면서
정신을 차렸다.
하느님 자비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이었는데,
나는 수시로 땡기는대로
막 복용했다. 죽을것같은
두려움 때문에..
시편은 다윗의 모든것이 다
드러나 녹아있는데다,
그의 올곧은 성정과
배신한 상대들을
영적신념으로 포용하며
존중했던 큰 그릇의 품성,
그리고 누가 죽거나
떠나기만 해도
자루옷을 쓰고 목놓아
울면서 진심으로
애도하는 인간애 등등
그러면서도 믿음이
깊은척, 또는 그런것쯤은
나에게 문제가 아니다라고
허세를 부리거나,
두려움따위가 무슨
대수냐고 우쭐대는 일이 없이,
정말 적나라하게 자신의
내적상태와 트라우마,
콤플렉스들을 개방한다.
희망이 있다와 희망이
없다 사이를 오가면서
심정의 변덕스러움과
감정의 기복, 양가감정을
고스란히 겪어낸 사람이다.
남자이면서도 나약함의 상징인
감정을 잘 느끼고 만나준거다.
이 얼마나 진솔하고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냔 말이다.
시편을 보면서 나 역시
오늘은 살수있을까.
내일은 죽으려나.
하느님 살고싶습니다.
너무 두렵고 불안해서
미칠것 같습니다.
내가 왜 이리 고통스럽게
살아야 합니까. 왜요.
남편이 너무 미워서
가슴이 조이고,
명치끝에 날카로운
칼이 꽂힌듯 아픕니다.
억울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합니다.
용서할 힘을 주십시요.
집안에 돈이 다 바닥이
났습니다. 굶어죽으라면
죽어야지요. 주님,
저의 구원을 위해
이러시는거라면 저를 놓지마소서.
지금 생각해도 참,
솔직하고 적나라한
몸부림이었던 거다.
그때는 단지 시편을
읽는다는 마음이었는데
지금은 다윗의 마음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다.
옛추억을 소환하며
하나씩 묵상해보련다.
시편 32, 8~9)
나 너를 이끌어
네가 가야 할 길을
가르치고 너를
눈여겨보며 타이르리라.
미운놈 떡하나 더주기
영성이 나를 지금의
여기로 데리고 온거다.
나에게 잘하는 사람위해
기도하는건 누구나
할수있고 또 쉽다.
하지만 다윗처럼
자기등에 칼을 꽂는
사울이나 자기를 배신하고
뒤통수치는 어이없는
상대 덮어주는 건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그건 다윗이 사내
대장부라서가 아니라
주님께 자기약함을
드러내며 소통해온
자아인식의 은총
덕분이었던 거다.
자기약함의 그릇을 알고
자기한계를 알면
타인을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때문,
자기가 약하니까
주님께 그토록 매달리며
도움을 청할수 있었던듯.
남자로서 자기가 부족하고
약한 존재임을 안다는것,
그게 바로 자존감인거다.
지각없는 말이나
노새처럼 되지 마라.
재갈과 고삐라야 그
극성을 꺾느니. 그러지
않으면 네게 가까이 오지 않는다.
이거봐 이거봐!!!!!
재갈과 고삐가 있어야만
인간의 속성인 자기
생긴대로의 기질과
극성을 꺾을수 있다는
인식, 캬, 정말 대단한
자아인식이라니까.
자기 스스로가 알았던거야
나는 그런사람이라는
인식말이야.
자아인식은 곧 겸손이라는
아빌라의 데레사성녀의
말씀, 하여 다윗은 겸손한 사람.
(시편 33,3)
그분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를. 환성과
함께 고운 가락 내어라.
여기서도 다윗의
총체적이고도 총천연색
무지개빛 매력이 드러난다.
새로운 노래 부르는것까지는
오케이. 좋단 말이지
그런데 환성과 함께
고운가락을 내어라고
썼다. 환성과 고운가락은
극명하게 대비되는
표현이다. 강하고 여린,
우렁차고 고요한,
앞장서 나가고 한발
뒤로 물러서는,
힘있는 장수의 모습과
목놓아 울던 인간적인
고운 모습, 무거운
군복과 무기와 부드럽고
작은 돌멩이 다섯개,
절규하는 탄식과
주님에 대한 찬양과 감사함.
다윗의 언행을 한눈에
볼수있게 펼쳐놓은
양면거울같은 표현,
환성을 올리며 고운가락 내어라.
내유외강, 외유내강,
내가 좋아하는 성향이다.
(시편 34, 19)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넋이 짓밟힌 이들을
구원해 주신다.
상처받고 버림받은것 같고
큰 문제에 봉착할때마다,
무너져내리는 마음으로
감실앞에 앉으면,
이 말씀을 주시곤 했다.
부서지고 넋이 짓밟힌
영혼일수록 주님이
더 가까이 계시고
구원해주신다는 믿음을
갖게 한 효과 딥따 빠른
처방약이다.
(시편35,21)
저를 거슬러 한껏 입을
벌려 “옳거니,
우리 눈으로 보았지!”
합니다.
(시편 36,3)
그는 오히려 죗거리를
찾아내고 미움을 일삼으려
자기 눈앞을 잘 닦아 놓았다.
위 두절은 내가 자주
성찰하는 대목이다.
뭐좀 안다고, 기도좀
해봤다고, 뭘좀 체험했다고
내가 남들보다 나은것
같은 착각과 교만이
들어오면 영락없이
눈이 밝아진다.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약,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별걸 다 보는 눈이 되었듯이.
남이 보이면 즉시 사탄이
뛰어와 자기 사람이라고
찜해서 장바구니에 킵해놓는다.
십자가의 성요한은,
'남의 말과 행위와 생활을
보지 않을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사랑은 침묵에서 온다.'
라는 명언을 남기셨다.
남의 허물이 보이면
얼른, '어이쿠야,
사탄이 또 지랄하네.'
라고 하면서 나에게로
눈을 돌리거나 눈을
감아버려야 한다.
그렇게 해서 아래와 같은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
(시편 36,10)
정녕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
(시편 38, 23)
주님, 저의 구원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다윗의 매력이 정점을
이루는 이 지점,
그는 온갖 억울함과 비방,
절망과 두려움 슬픔,
불안과 무서움,
외로움, 수치감, 원망 등
내면에 폭풍이
휘몰아칠때마다,
자기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이끌어가시는
방법으로 받아들였다는것,
그래서 원망과 탄식의
기도를 하면서도
주님께 스스로의 구원만을
위해 울부짖었다.
이게 다윗을 통해 주님이
이뤄내신 구원의 기적이며
열매였던 거다.
누군가(아빠와 남편)의
구원을 위해 죽도록
기도만 하다가 문득
그들을 통해 나를 구원하시고
치유해주셨다는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혀를 차며 감탄했고
해방감과 함께 자유를 느꼈다.
네길을 그분께 맡기고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하시리라.
아멘 대박 맞는 말씀,
옳고 지당하신 말씀이다.
위 구절은 시편 61,3의
'저를 이끌어주소서'라는
말씀과 함께 쌍두마차가 돼서
우리집 가훈으로 전격
등극, 추앙을 받고 있다.
+주님,
저게 시편은 구원의 노래이며
치유의 약입니다.
부부의 매듭을 푼
관계회복의 일기이며,
무엇보다 주님을
믿기만 하면 당신께서
몸소 다 해주신다는 것을
체험한 믿음 단련의
훈련장입니다.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성경통독을 통해
특히 시편을 통해
많은 영혼들이 구원되고
모든 일상의 주도권을
당신께 되돌려 줄수
있기를 청해봅니다.
다윗이시여,
당신의 깊은 신앙의
뿌리와 흔들리지않는
내면의 강직함,
그리고 섬세하게
주님의 영을 따라가는
그 열린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저를 도우시어
간구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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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묵상 글 잘 읽고 갑니다.
묵상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