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생명의 달이고 유혹의 달이다. 봄비를 맞은 초목은 생기가 돋고 꽃들은 활짝웃고 유혹을 한다. 겨우내 움추렸던 여인들의 가슴에 남쪽에서 불어온 봄바람을 살짝 불어 넣어준다.
바람맞은이 들은 물결치듯 떼를지어 이리저리 꽃을 찾아 다닌다. 김유신이 거사를 앞두고 애마가 매일 다니던 애첩의 집에 당도하자 애마의 목을 단칼에 베었듯이 나는 단호히 꽃을 버리고 수원이 자랑하는 정조의 능을 찾아갔다.
수원역에서 융건릉까지 불과 1시간 거리도 안된다. 휴일이라 그런지 주차장은 이미 꽉 차있다. 젊은이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나들이를 많이왔다. 노인들도 연인들도 정조를 보러왔다.
가던날이 장날이라더니 정문에는 융릉(장조의황제.헌경황후)제향을 지내는 프랑카드가 걸려있다..왕의 제향을 지내는 것은 처음보는 일이라 때 마침 잘왔다는 생각이든다. 제향시간은 12시라고한다.
제향행사 주최는 문화제청 조선 왕릉관리소 주관은 전주이씨 종약원이다. 수원시 문화화원이 후원을 한다. 전주이씨 문중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왔다. 제향날이라 그런지 입구에서는 따뜻한 차가 준비돼 있다.
차한잔 마시고 들어가니 65세이상 무료 입장권을 준다. 늙어가는건 싫지만 어디가서 공짜라면 좋다.
정문 입구에 들어서니 왼쪽에는 역사관이 있다. 역사관을 들러 능으로 들어가는 도로 양쪽에는 거북등처럼 버급이 갈라진 우람한 소나무들이 하늘을 찌를듯 높이 솟아있다.
이곳에 오니 숨쉬기부터 편하다. 이것이 시민들이 바라는 맑은공기 인가보다. 매일 반복되는 수백대의 자동차들이 내품는 매연속의 도심을 벗어나 이곳에오니 가슴 깊숙히 숨이 쉬어진다.
입구 에서 50m쯤 가면 좌우로 길이 갈린다. 우측으로 가면 융릉있고 좌측으로가면 건릉으로 가는 이정표가 있다. 융릉.건릉은 조선시대 왕과 비의 능(사적206호)으로 2009년 6월30일 세계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 되었다. 제향을 지내기전에 먼저 능을 둘러보기로했다.
융릉(隆陵)
추존 장조 와 현경왕후의능
장조(莊祖 1735-1762 사도세자)는 제21대 영조의 아들이자 제22대 정조의 아버지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서예와 무예에 뛰어 났으나 영조를 대신하여 정치업무를 보면서 노론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나경언의 고변으로 결국 뒤주에같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1762년 영조는 28세 나이에 죽은 세자를 슬퍼하면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존호를 장헌으로 올렸고 1899년(광무3년)고종에 의해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헌경황후( 獻敬皇后1735-1815 혜경궁 홍씨)는 영의정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딸로1744년 세자빈에 책봉 되었다사도세자가 세상을 뜬후 혜빈.정조즉위 후에 궁호를 혜경으로 올렸다.
혜경궁 홍씨의 자전적 회고록이자 궁중문학의 백미라고 평가받는 "한중록"을 남겼다.1899년(광무3년)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헌경황후로 추존되었다. 헌경황후는 1815년 돌아가셔 융릉에 합장했다.
건릉(健陵)
조선 제22대 정조와 효의선황후 능
정조(正祖1752-1800. 재위1776-1800)는 추존 장조의(사도세자) 둘째 아들로 1776년 제21대 영조가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직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천명하고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기위해 노력했다.문무를 겸비했던 정조는 규장각을 두어 학문연구에 힘쓰고 장영용을 설치하고 수원화성을 축조하는 등 조선 중흥을 이끌었다.또한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붕당정치의 폐해를 막기위해 힘을 썼다.
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 1753-1821)는 좌참찬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딸로 1762년 세손 빈에 책봉 되었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극정성으로 모셔 영조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 되었다.
건릉을 방문해 사도세자 능이라고 하니 50여년전 60~70년대 유행했던 '사도세자' 노래가 떠오른다. 우리가
30대 때 도미가 부른 이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사도세자
금이야 옥이야 태자로 봉한 몸이
뒤주 안에 죽는구나 불쌍한 사도세자
꽃피는 청춘도 영화도 버리시고
흐느끼며 가실때엔 밤 새들도 울었소
궁성은 풍악과 가무로 즐거운밤
뒤주 안이 웬말이요 원통한 사도세자
황금의 왕관도 사랑도 버리시고
억울하게 가실때엔 가야금도 울었소
제향 시간에 맞춰 융릉으로 돌아왔다. 융릉 정자각 앞에서는 사회자격인 융릉제향 진행자가 시작전 뭔가를 보며 예행 연습을 하고 있다가 제향시작을 선언하다.
제관들의 축함(축문)이 금천교를 지나 홍살문 안으로 들어와 참도에서 제향 드리러 왔음을 아뢴다.
전향례
축함을든 축관과 제관들은 신도로 걸어 정자각 동쪽에 자리를 잡는다. 축관은 제단인 정자각으로 오른다. 오르는 계단은 동쪽 어계이다. 구름 모양의 난간석이 있는 계단은 운계(향계.신계)라고 한다.
모든 집사들은 봉무할 곳에 자리를 잡는다. 이후 면과 탕에 전사관과 능사에의해 서쪽계단을 오른다. 제례식에서 메와 갱은 따뜻하게 제사상에 올려야 하기때문에 늦게 제단에 오른다. 메는 밥이고 갱은 국이다.
봉축례:
종헌관은 집사의 안내에따라 서향하고 서서 제단에 올릴 술잔에 이작수주 두개의 술잔에 술을 따른다.
이작수주한 제주가 들어간다음 종헌관의 제향에 축문을 올리는 예식이다.
종헌례:
종헌관은 첫번째 제주를 드리고 배향하는 제례 진행 주인이다. 종헌관의 4배 예식이따른다. 이때 정자각 아래에서도 참여한 모든 종친들이 제향 의식을 따른다.
종헌관은 제향공간의 동문으로 들어가 북향하고 선다. 북향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능의 영역이다. 북향의 제단문이 활짝열려있어 능이 훤히 보인다.
모든 종헌관 참례자들이 사배로 제향의식이 끝이난다. 알자(謁者)는 예필(禮畢)을 아뢰옵니다. 예필을 아뢰옵니다. 하며 진행자는 행사가 끝났음을 알린다.
정조를 찾아 융건릉을 보러왔다가 뜻하지 않은 종친들이 지내는 왕실의 제향을 보게되어 큰 보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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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관들이 축함을들고 제향을 지내기위해 홍살문으로 입장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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