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나는 씨 비유
마가복음 4장 26-29절『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는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 (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로서 성부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성부 하나님이 심령 속에 새성전이 세워진 성도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의미한다. 땅은 흙으로 된 사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흙의 모양을 만드시고 영을 부어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성전)이 있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심령 속에 있는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옛성전(옛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새성전을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예정하시고, 마지막 사람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와서 부활의 몸(새성전)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새성전을 얻는 자는 예수님과 함께 옛사람(옛성전)이 죽고(파괴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사람(새성전)으로 태어나는 것을 믿는 자가 되는 것이다. 새성전이 성도의 심령 속에 세워지면 그리스도가 그 성전에 재림하여 들어가는 것이다. 그 재림하여 들어가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짐을 의미한다.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으면 새성전이 세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첫열매라고 말을 하고, 그 다음에 성도가 부활의 열매를 계속 맺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도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하나님이 열매를 맺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땅인 사람이 스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이루어짐을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과 연결된다. 로마서 4장 18-22절『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아브라함은 처음 믿을 때,『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는 놀라운 결단을 하지만, 친척 롯을 데리고 나온다. 우리가 주인됨을 포기하지 않으면, 계속 자기 의지대로 믿는 것이다. 우리가 순종하는 만큼만 주님의 명령에 분별된다. 아브람에게 약속을 하셨다. 제물을 쪼개게 하시고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제물 안으로 오고 가는 것을 보여주셨다. 안믿을 수 없다. 아브라함은 그 때 언약을 받는다. 언약을 받지만,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낳는다.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안되는 것이다. 사래의 말을 듣고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죽은 자 같이 될 때까지, 하나님이 더 이상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이게 99세까지다. 이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그 믿음은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서 얻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브람이 주님의 말씀에 속으로 웃었다. 아브람은 자기가 인간적으로 낳은 생명 이스마엘에게 믿음과 사랑이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마엘과 하나되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 믿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사라의 태가 죽었는데 어찌 자녀를 낳으리요』라는 것이다.『이스마엘이나 당신 앞에서 살게하소서』라고 말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예수믿으세요, 예수의 공로를 믿으세요 믿으면 의롭다하심을 얻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그 말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아브람이 전쟁을 이기는 승리를 체험하고, 멜기세덱을 만나는 영적 체험을 해도 안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베드로처럼 자기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오늘밤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라고 말해도 베드로는 자기 확신 때문에『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인간 중에서 가장 예수님을 잘 믿는 자로 보여질 수 있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더 믿는 자였다. 이것이 회개하지 않는 자의 모습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말을 믿는 자를 구원하신다. 아들의 말은 십자가와 부활과 연합하라는 것이다. 현재적으로 그 분과 십자가에서 연합하여 죽고, 현재적으로 그 분과 부활로 연합하여 열매맺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도들은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육체가 죽은 후에 그 육체가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