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회장 신경애
지난날을 써 달라하니 감회가 새롭다 . 문인협회 시절을 흑백 사진을 보듯
생각에 잠긴다. 창립식을 했고 여성 회원도 몇 명 있었다 .그 즈음 홍일점
으로 문인협회에 여성 문인은 나 혼자 남게 되었다.
2대 이원규 회장 최병기 부회장을 선출하면서 조석구 초대 회장님이 총무
로 회비나 걷고 기록하라고 선출했을 당시 진짜 난 아무것도 몰랐다. 난 그
자리서 회원 모두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기록했고 회비도 받았다.
최병기 부회장님은 총무 하다가 아는 건 대답하고 모르는 건 의논해서 답
한다고 하라고 했다. 모두 나하고 나이차도 6살 정도 되는 회원들 이었다 .
회원들은 거의 조석구 선생님 제자가 많았다.
서예 학원을 하는 문인, 사업하는 문인, 공무원, 교사 등 직업도 다양했다.
이원규 회장은 출판사 새물터를 하게 됐다. 우린 거기서 자주 모였다. 우
리는 월간지 편집에 주력했다. 신입회원으로 성백원, 손창완, 이상희, 주
혜진 회원이 들어왔다. 보통리 저수지로 야유회를 갔으나 참석인원이 이
상희, 나, 이원규 회장뿐 이었다. 꺼져가는 촛불처럼 무력했다.
나는 눈치없이 전화도 많이 걸며 자주 회원을 방문하였다 .임병석 회원도
있었고 병으로 돌아가신 회원도 있었다. 훗날 사업적으로 오랜 어려움을
극복하며 나중엔 전체 회원에게 밥을 사주신 회원도 있고 1년치 회비 완
납을 해 주신 분도 있었다. 김밥을 먹고 회의하며 회비를 축적하기도 했다.
그 당시엔 시에서 후원이 없었다.
문인협회는 출판사 새물터에 모여 "새물터" 라는 월간지를 냈다. 이 상희
회원과 주혜진 회원이 타자를 쳤다. 나는 문화공보실에 편지를 보냈다.
그동안 우리가 해 온 일을 길게 써서 보냈다. 최네집에서 공보실 과장님과
공보실 직원들이 돌아가며 편지를 읽었다고 했다. 공보실 과장님은 연극
배우도 했었다며 환경 시화전에 100만원 지원받게 해 주었다.
항아리에 시 쓰기, 수예로 시를 쓰기, 뿌리목 비슷한 의자에 시 쓰기, 창호
지 위에 티셔츠 뒤에 쓰기도 했다. 의견들은 손창완 시인과 내 친구가 아
이디어를 주었다. 그 즈음 가정사로는 경기 호황이었다. 직장이 서울인
남편은 롯데백화점에서 흰 브라우스에 회색 주름치마를 사오기도 했다.
이원규회장과 나는 적십자사 로터리 모임등 잔잔한 행사 교류도 가졌다.
발전을 위한 좋은 의견들은 이원규회장님이 주었다. 최병기 부회장님도
큰 역할을 했다. 그 당시 많은 인쇄소를 돌아보며 편집을 배우기도 했다.
편집을 강조하며 중요하게 여긴 회장이다. 문인협회는 경기도의 모든 문
인협회와 교류하게 된다. 글 잘 쓰는 모든 문인을 동경하는 나의 바램을
회장님은 현실로 만나게 해주었다. 문학 동우회 매홀회까지 통합한 문인
협회는 신규 회원도 생겨가며 3대 정 원택 회장을 배출한다 .
그러나 정원택 회장은 임기 1년 반을 마치고 돌아가셨다. 나는 부회장으
로 있다 남은 1년 반의 임기를 채웠다. 그래서 4대 회장이 된 것이다.
어찌 어찌 갈등을 빚다가 매홀회 문학동우회 회원들도 많이 문협을 나갔
다.시의 후원을 못 받을 때였다. 후원 없으면 문단지를 낼 수 없었다.
시 재정도 적자이거나 간신히 지탱 할 정도였다.
발이 부르트도록 회장님은 뛰었고 난 확신 속에 하나님께서 주실 거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아마 이원규 회장은 남
몰래 자기 돈으로 메꾸었으리라. 홍승갑, 김의식, 박연근 ,박현진 시인 등
이 문단지 발간 자금 광고를 따 오셨다. 그 분들이 아니었으면 유지가 됐
을까?
어느 날은 만두를 직접 빚어 떡 만둣국으로 회의를 하기도 했다. 회원의
부인까지 모두모여 빚고 있었다. 나는 감사의 말을 하였다. 이원규회장은
나더러 공식석상에서 인사만 잘 한다고 하기도 했다. 지부장이 되고 나는
회오리에 휘말렸다. 남편의 사업이 곤두박질 쳤다. 대외적인 일은 이원규
시인이 하기로 약속하고 한 회장이다. 우리는 노작발굴도 하자고 했고 나
는 싸인만 하고 노작 묘소에도 가보지 못했다. 내 코가 석자였다.
시민 대상 받던 날 하늘엔 풍선이 떠다녔고 난 추락 속을 헤메고 있었다.
국어사전을 찾아서 쓴 시가 있었는데 신발은 발등을 덮고 발바닥은 못 덮
은 신발을 신은 내 모습이었다. 난 그런 신발을 신고 있었다. 지금은 그 낱
말도 잃어버렸다. 글이 돈이 되진 않았으나 책임은 오히려 열심히 살게 했
고 구원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모든 長자리를 거부했다.
장이 되어서 어려운 가정사 까지 겹치면 책임이란 종잇장 같아도 순간 바
윗덩이 무게로 다가온다. 이해로, 파트너쉽으로, 희생으로 모이게 했던 그
시절이 아름다운 추억 한 장이 되었다 .이원규 고문은 정말 모든 사람과 화
목하고 모이게도 만들었다 .박민순 수필가와 이원규, 최병기 세 거목도 지
금은 원만하다. 최병석, 김경욱, 은정기 시인 등 창립 당시의 선배 문인들도
희생 많이 하였다. 성백원 시인도 열심히 했다. 차기는 성백원 시인이 바톤
을 받았다.
* 약력
1961 전북 임실 출생
1991 제20회 월간 <동양문학> 신인상으로 등단(시인)
오산문협 4대 회장
1991 첫 시집 <사랑의 무게 하나로>
1995 제 2시집 <높은음자리표에서 낮은음자리표까지>
1999 제11회 경기도민상(문화예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