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懲毖錄) 제2권- 27
잡기 (明日 양국 강화사건의 실체)-1
심유경은 평양에 있을 때부터 적의 진중을 출입했으니 그 노고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적진을 출입한 것은 강화한다는 명분 때문이었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최후에 적은 부산에 머물러 있는 채 오랫동안 건너가지 않았다.
이 책사가 도망해 돌아오자 중국에서는 심유경을 부사로 삼아 양사와 함께 왜국에 들어가게 했지만, 종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소서행장도 가등청정 등도 다시 바다 위에 돌아와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중국과 우리 사이에는 여러가지 의논이 분분했다. 모두 허물을 심유경에게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심한 사람은 심유경이 적과 함께 모반할 계획을 한다고까지 말했다.
우리 나라 중 송운(유정)이 서생포에 들어가서 청정을 만나봤다. 그리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적들은 중국을 범하고자 하여 그 말이 몹시 불공하니, 즉시 중국에 이 사실을 알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을 듣고 사람들은 더욱 노했다. 심유경은 화가 장차 자기 몸에 미칠 것을 알았다.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김명원에게 글을 보내어 일의 시말을 갖추어 변명했다.
그의 글은 이러했다.
"세월이 흘러 지난 일들이 어제와 같습니다. 생각하면 전에 왜적이 귀국을 침입해서 바로 평양에 다다랐으니 우리 안중에는 이미 팔도가 없었습니다. 이 늙은 몸(심유경 자신)이 명을 받고 왜인의 실정을 탐지하고자 서로 기회를 보아 족하(김명원)와 이체찰(이원익)과 더불이 시끄러운 속에서 서로 만나지 않았습니까. 평양 서쪽 일대를 목격하건대 거민들이 유리하고 조심해서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것같아 아침에 저녁 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어찌 이마음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족하(김명원)께서는 몸소 그 일을 겪어 보았으니 이 사람이 여러 말 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내가 행장을 불러서 건복산에서 만났을 적에는 다시 서쪽으로 침입하지 않기로 약속했었습니다. 그런 뒤로 그들은 우리 말을 들어 감히 어기지 못한 채 몇 달이 지나갔었지요. 그 뒤에 대병이 이르러 평양을 탈환한 게 아닙니까. 만일! 그때에 내가 나오지 않았던들 왜적은 조승훈의 파한 것을 승세하여 의주까지 왔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평안도의 거민만이라도 그들의 화를 입지 않은 것은 역시 귀국의 큰 다행이 아닙니까.
이윽고 왜장 행장이 물러가 서울을 지키고 있을 때 풍신수길은 석전삼정, 증전장성 등 장수 30명을 보내어 군사를 합하고 영책을 연해 험하고 요긴한 곳을 점거하고 있었으니, 이 견고함을 깨칠 수가 없었습니다. 벽제에서 싸운 뒤로 우리는 더욱 나가지 못하고 있었지요. 이때 귀국의 판서 이덕형이 개성에 와서 나를 만나보고 이렇게 말했지요."
"적세가 저렇듯 굉장한데 중국의 대병이 물러가고 보면 서울을 수복시킬 가망이 없습니다. 그는 울면서또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울은 나라 근본이 되는 곳입니다. 여러 도를 통솔하는 곳인데 지금 사세가 이렇게 되었으니 장차 어찌한단 말입니까."
이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한갖 서울만 수복하고 한강 남쪽이 만일 없다면 여러 도의 사세를 유지할 수가 없지요." 덕형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서울만 수복하고 보면 한강 이남은 우리 나라 군신이 자력으로 지탱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 말에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내 그대 나라를 위해서 한 번 해보지요. 서울을 도로 찾고 아울러 한강 이남 제도까지 수복시켜 왕자와 대신들을 돌아오게 해서 나라를 온전하게 해보지요."
나의 이 말을 듣자 덕형은 또 울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더군요.
"만일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 노야의 우리나라를 재조해 주신 공덕이 실로 적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