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백화산장을 탈출하다 오룡대진의 괴인들은 손에 붉은 등을 들었는데, 그 생김새부터가 우선 기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전신이 온통 붉은색이고 머리까지 붉었다. 귀신처럼 흘러내린 붉 은 머리 아래 목언저리에는 붉은 비늘이 반짝였다. 게다가 괴상하 게 긴 두 손에다가 손가락에는 세 치 안팎의 손두껍을 끼었다. 게다가 낮짝은 또 뭔가? 이건 얼굴에 가면이라도 쓴 것인지 붉 은 딱지가 꼭 끼어 있어서 밖으로 나온 것이라고는 번쩍거리는 두 눈뿐이었다. 소영은 슬그머니 은란의 손에서 장검을 취해 낮은 목소리로 일렀 다. "여러분은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제가 가서 한 번 시 험해 보겠습니다." 그의 무공의 조예는 일찍부터 뭇 사람을 경복케 하고 복종케 하 는 바가 있었다. 그러한 소영이 이 다섯 명의 괴인들을 어쩌지 못 한다면 그 때는 결코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다. 금란이 나서며 소곤거렸다. "공자님, 저도 따라가겠어요." 소영은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낭자가 무얼 하겠다고?" 그러나 금란은 자못 자신있다는 어조로 말했다. "소비는 백화산장의 암호를 외우고 있거든요. 아마 공자께 도움 이 될 것입니다." 소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쓸데 없소. 내가 가서 우선 한 차례 진식을 시험해 볼 테니..." 문득 손불사가 가슴을 내밀고 한 발짝 나섰다. "이 늙은 거지가 따라 가겠소." 소영은 급히 만류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노선배님....." 이미 내상을 입었으니 어떻게 적을 또 대적하겠느냐고 말하려다 가 다시 고쳐 생각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의 일세의 영명을 생각하면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노선배님께서는 대국을 주저하시는 처지이시니 옥체를 보중하시 기 바랍니다. 제가 일차 시험을 해 볼 것이니 선배께서는 그동안 적을 부술 계획을 찾아 보십시오." 손불사는 가볍게 탄식했다. "그럼 조심하오!" 소영은 곧장 큰 걸음으로 나아갔다. 그의 시선은 한 개의 붉은 등을 줄곧 쏘아 보고 있었다. 운공을 하여 기운을 북돋은 다음 천 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이미 검과 방패를 쓰는 무사들과 싸워 본 뒤라, 이제는 백 화산장의 인물들을 깔볼 수만도 없게 되었다. 천천히 걸어가 홍의괴인과 대여섯 장 되는 거리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검을 가볍게 비끼니 두어 줄기 싸늘한 칼빛이 허 공에 번뜩였다. 그는 차디찬 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렇듯 괴상한 옷차림으로야 사람을 놀라게 할 수 있겠소?" 그러나 상대방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단지 두 눈만이 끊임없이 반짝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흥! 내 말로 그를 노하게 하여 먼저 손을 쓰게 하리라.' 그 다음에 손을 써서 대응한다면 상대방의 무공을 어림하기는 어 렵지 않을 것이다. 보아하니 가진 무기라고는 없고 오직 보이는 것 을 열 개의 손가락에 낀 두껍뿐이었다. 그것이 주로 쓰이는 병기라 면 그 씀씀이가 또한 괴상하기 짝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적을 알고 다룬다는 것은 싸움에 있어서 가장 유리한 비결이다. "입은 옷은 고기 비늘인가, 아니면 가죽인가?" 그는 거듭 비슷한 말로 상대 방의 마음을 떠보았다. 그러나 사내 는 여전히 멀거니 바라볼 뿐 일언반구의 응대가 없었다. 이렇게 대치하기를 거의 더운 차가 다 식을 시간이 지났다. 결국 못 참게 된 것은 홍의 괴인이 아니라 오히려 소영이었다. 그는 사방을 한 차례 쭈욱 훑어 보았다. 주위에는 매복인이나 상 대방을 도울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섰다. "자, 검을 받아라." 말이 끝나자 차가운 빛이 번쩍거리며 사람은 검을 따라 번개처럼 앞으로 나갔다. 핫! 하는 기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순간 예리한 장검의 끝이 곧장 홍인의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검 끝은 한 치도 사나이의 살가죽을 뚫지 못하였다. 그것은 마치 하나 의 단단한 쇳덩이 같았다. 그렇다고 백 번 달구어 만든 장검이 사 람의 피부를 뚫지 못해서야 어디에 쓸모가 있단 말이냐. 흡사 고기 비늘처럼 번들거리는 옷이 검을 퉁기는 것이란 말이냐. 그럴 순간에 사나이는 너덧 걸음 뒤로 밀려 나갔다. 검끝이 살갗 을 뚫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소영의 찌르는 공력이 너무나 엄청나 게 강했던 까닭이었다. 소영은 사나이가 퉁겨 밀리는 것을 보자 이내 검을 거두었다. 상 대는 밀려 나가면서도 여전히 손을 쓰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명성을 듣기보다는 얼굴을 직접 대하는 것이 낫다더니 그 말이 조금도 거짓이 아니구나!' 그는 금란, 은란이 왜 홍의오룡의 무공이 전율하도록 두렵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보다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상대방이 자기의 일격을 받고도 어 찌하여 대적하여 싸우려 들지 않는가 하는 점이었다. 소영이 이와 같이 이모저모 바쁘게 생각을 굴리는 판국인데 돌연 맞은편의 홍의괴인이 몸을 몇 번 흔들더니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주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나머지 네 홍의인 역시 멍청한 표정이었다. 이 뜻하지 않는 이변 에 소영은 물론이지만 주위에 둘러 섰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호걸들은 모두 영문을 몰라 멀거니 주저 앉은 자를 바라보고 있 을 뿐이었다. 신투 향비가 번개처럼 소영의 신변으로 날아왔다. "어떻게 된 일이오?" 소영 역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겠소. 나는 단지 그를 찔렀는데 그는 찔리지 않고 저 렇게 물러가서 주저앉아 버렸군요." 향비도 역시 까닭을 알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참 괴기한 일이로군. 그 가운데에서는 필시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닐까?" "글쎄요. 나도 역시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오. 그러나 우리가 뚫 고 나갈 기회는 바로 지금이 아니겠소?" "그렇군! 그대는 어서 앞길을 여시오. 이 늙은 도둑은 가서 일행 을 부르겠소." 신투는 몸을 돌려 여러 호걸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어서 뚫고 나갑시다." 소리에 따라 여럿은 총총히 달렸다. 먼저 소영이 나가고 그 뒤로 고기를 꿰듯 여러 호걸들이 따라 나갔다. 금란, 은란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오룡 대진이 이렇듯 무기 력하고 보잘것이 없단 말이냐. 소영의 한 칼에 찔린 홍의괴인은 여전히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여러 사람이 지나가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홍의인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호걸의 무리들은 단숨에 그곳을 빠져 나왔다. 아무도 그들 의 앞을 막은 사람은 없었다. 사마건은 자기들이 무사히 빠져 나온 것이 못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괴상한 걸! 다섯 사람의 홍의인은 차림새도 괴이하지만 그 위치 하고 있는 것도 은밀한 가운데 기문진을 짜고 있었단 말이오. 그런 데 어찌하여 그 일격을 감당해 내지 못했을까?" 이런 생각은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느끼는 것이었다. 좌우간 꼭 죽는 줄만 알았던 곳에서 무사히 빠져 나왔으니 죽었 던 목숨이 다시 살아난 것만 같아 모두들 일시에 긴장이 풀렸다. 마문비가 고개를 돌려 금란에게 말했다. "심목풍은 괴기 망측한 인물이므로 일부러 의병지계를 썼을 거 야." 금란은 고개를 끄덕였. "그래요. 그 오룡대진의 상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몇 사람이 입은 옷차림이 분명 심목풍이 고심에서 만든 용갑(龍甲)이....." 신투라 하여 귀신같은 도적이란 별명의 향비가 말을 가로챘다. "그 용갑은 정말 잘 만들어진 듯이 보이는데, 우리는 그 갑옷과 띠를 가지고 가야겠다." 이 말에 호걸들은 모두 속으로 웃었다. 평생 배운 게 도적질이라 이 늙은이는 정말 그 성질을 고치기는 어려운가 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금란이 웃으며 한 마디 했다. "그 용갑은 모두 오룡의 몸에 맞추어 입힌 것이기 때문에 아무나 몸에 맞지 않는답니다." "아가씨는 그 용갑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가?" 이건 마문비가 묻는 소리였다. "심목풍이 어디서 그런 고기 비늘을 가지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 비늘에다가 특제 은줄을 써서 짜 놓은 것이라서 아주 질기답니 다. 보통의 칼이나 검으로는 어림도 없지요." 말하면서 고개를 돌려 보니 이때 소영 역시 그녀의 말에 귀를 기 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신바람이 나서 계속 이야기했다. "심목풍은 다섯 벌의 용갑을 제조하기 위해서 고수를 파견하여 일류 재단사를 잡아 왔어요. 그 사람들로 하여금 갑옷을 지으라는 것이지요. 그들은 삼 년이나 걸려서 겨우 다섯 벌의 용갑을 만들었 답니다. 그러니 오룡대진은 심목풍에게 상당히 기대가 컸을 것이 틀림 없습니다." 향비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참, 괴기한 것은 그들이 어째서 일격을 감행하지 않았나 하 는 것이 아닌가?" 금란은 버들잎 같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건 소비의 능력으로 모르겠어요." 은란 역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검을 맞은 사람이 멍청이 앉아 있는 것은 그렇다 치고 그럼 나 머지 네 사람들은 왜 모두 그 자리에서 선 채 움직이지 않았을까 요?" 마문비가 소영을 돌아다 보았다. "소형, 당신이 필경 어떤 검의 초식을 쓴 게 아니오?" 소영이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사마건이 돌연 실성한 듯 소리쳤 다. "당신 성이 소가요?" 소영은 이렇듯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피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도와가며 싸웠는데 구태여 이름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바로 소영이외다." 마문비가 웃는 얼굴로 다그쳐 물었다. "진정 값이 나가는 이름 소영이오!" 지금까지 말이 없던 손불사도 고개를 돌리고 멍하니 소영을 응시 했다. "그대가 소영인가?" "그렇습니다." "노부는 산을 내려 온 뒤로 줄곧 그대의 대명을 들어 왔소. 이제 보니 과연 그 이름이 거짓 전해진 것이 아니구려." 소영은 남옥당의 일을 생각했다. 그가 자기의 이름 소영을 도용 해 썼다. 지금 와서 그 사람은 가짜요, 자기는 진짜라고 말하기도 거북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명백하게 밝힐까? 그러나 일시에 다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금산반 상팔이 돌연 입을 재촉했다. "빨리 가야지......" "왜요?" 사마건이 물었다. "심목풍이 깨어나서 우리가 백화산장을 빠져 나갔다는 소리를 듣 는다면 마음이 좋을 리 없소." 모두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 때였다. 멀리 날카롭게 들려 오는 사나이의 외침소리, 이어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흔드는 것 같았다. 일행은 모두 강호의 늙은 구렁이들이다. 한 번 듣고서 추격해 오 는 말이 열 필 이상임을 알았다. 더 물을 것도 없는 일이다. 백화 산장에서 추격해 오는 것이 분명했다. 마문비가 머리를 들어 사방의 지세를 살펴본 다음 일행을 재촉했 다. "우리 동쪽으로 갑시다.' 말하고는 곧 앞장을 서서 걸음을 떼어 놓았다. 소영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 '이들이 이와 같이 분주하게 가는 것은 필경 무슨 뜻이 있을 게 다.' 그래서 여러 말 하지 않고 상팔을 붙들었다. "우리는 뒤에 처지기로 합시다.' 상팔은 즉시 찬성하였다. "좋소. 이들 백화산장의 무리들은 수단이 악랄하고 매우니 우리 는 구태여 강호의 규칙을 내세워 신사적으로 상대할 필요가 없습니 다." 이것은 정정당당하지 않은 수법이라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뜻이었 다. 소영은 물론 그의 뜻을 잘 알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말발굽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은은히 별빛이 비치는 아 래 몇 마리 날쌘 말이 호기있게 접근해 왔다. 상팔이 자기의 품 속을 더듬어 조그만 목합을 꺼내더니 뚜껑을 열고 그 속에 있는 물질을 땅바닥에 흘려 놓았다. 소영이 물었다. "상형, 그 합에 든 물건이 무엇이오?" 상팔은 씽긋 웃으며 말을 돌렸다. "버러지같이 자질구레한 기술이니 형님께서는 보시고 웃지 마시 오." "속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소. 이미 저들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덤비거늘 우리가 구태여 정당하게 맞싸울 필요는 없지요." "이 옥합 속에는....." 그러나 여기까지 말하고 상팔은 더 잇지 못하였다. 이미 적은 가 까운 거리에 와 있었다. 무리 가운데 먼저 두 필의 건장한 말이 별똥처럼 튀어 나오더니 두 사람 앞으로 육박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은 즉시 뒤로 날아 피하였다. 이때 두 필의 말이 바야흐로 상팔이 땅바닥에 흘려 놓은 물질의 위에까지 접근해 있었다. 소영은 정신을 집중하여 바라보았다. 대체 어떤 이변이 생길 것 인가? 두 필 건마의 말발굽이 땅에 흘려 놓은 액체를 밟았다. 소리도 없었다. 다만 푸른 불빛이 땅바닥에서 지글지글 타기 시작했다. "히히힝!" 요란한 말울음 소리에 이어 앞에 있는 놈의 다리에서 푸른 불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로 뒤쫓아 달리던 사나이는 이 광경을 보고 급히 말고삐를 잡아 채며 말을 세우면서 곧장 뒤로 돌았다. 무슨 암수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재빨리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불빛이 잇따라 번쩍이더니 이어서 그 말의 배가 지글지글 타기 시작했다. 앞에선 말이 뒷발질을 하는 바람에 인화물질이 튀었던 것이다. 잇따라 들리는 말울음 소리. 동시에 두 명의 기수는 말안장에서 급히 몸을 날려, 바닥에 내려섰다. 그러나 땅바닥에 내려서자 말은 돌보지도 않고 곧장 소영, 상팔 두 사람 들을 향해 질주해 왔다. 두 필의 건마는 몸에 푸른 불이 활활 타오르자 미친 듯이 네 굽 을 놓으려 울부짖었다. 밤중이라 불은 금시 말을 불에 태워 죽일 것 같이 보였다. 이렇게 되자 뒤를 따르던 말들은 급히 머리를 돌렸다. 길을 인도 하던 두 사람이 액운을 당한 것을 즉시 깨달았던 것이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상팔은 못내 아쉬워 연방 탄식을 쏟아 냈다. "아깝도다, 아까워! 백화산장의 적도들은 과연 교활하기가 이를 데 없구나. 그들이 한꺼번에 모조리 타 죽었거늘....." 이러는 사이에 말을 버린 두 놈을 벌써 가까이에 이르렀다. 때를 놓치지 않고 소영의 오른손이 번쩍 허공을 그었다. 두 개의 돌멩이가 획! 하는 소리를 내며 날아 갔다. 밤중이라 피하는 것도 어려웠다. 더구나 두 사나이는 서로 공을 다투어 덮쳐 오는 판국이 라 이 불의의 일격을 피하지 못했다. 팍, 팍! 하는 소리가 터지자 그들의 입에서 비명이 잇따라 들려 왔다. 소영은 돌멩이가 날아가 맞는 소리를 듣고 바로 적의 혈도를 맞 추지 못했음을 알았다. 밤중이라 그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가깝다 면 몰라도 상당한 거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소영의 팔 힘은 보통 사람과는 크게 달랐다. 두 명의 장 정이 비록 급소는 맞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아픔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모두 주춤하고 자빠졌다가 엉금엉금 기어 일어났다. 푸른 불을 튀며 미친 듯이 날뛰던 말들이 벌써 까마득히 보였다. 뒤에서 쫓아오던 마필들은 일단 고삐들을 돌렸으나 다시 말머리 를 돌리더니 길을 피하며 무서운 기세로 되돌아 오고 있었다. 소영은 시선을 돌려 잠시 사방의 형세를 살펴 보았다. 입에서 저 절로 한숨이 나왔다. "보아하니 모두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더 싸우기가 어렵겠소이 다. 이 사람들이 말을 달려 들어 오는 기세를 보건대 그들이 지닌 무공도 약하지 않은 것 같소. 만일 우리들이 지세가 좁은 곳을 택 하여 이들을 일단 저지할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소만, 어디..." 그 사이 벌써 적은 눈앞에 닥치고 있었다. 형세가 심히 위급했다. "그들과 접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오. 우리 두 사람이 술수 를 써서 그들을 저지하는 것이 가장 상책이오." 상팔은 어느새 금필을 꺼내 들고 입으로는 연방, "옳아요. 옳아." 하고 소리를 질러 동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힘이 실 린 맑은 소리가 아니었다. 흡사 가래가 끓는 듯 답답한 소리였다. 그가 얼마나 피로해 있는가를 알 수 있었다. 소영은 그것이 못내 가슴이 쓰린 일이었다. '아아, 다시 이 무사들에게 포위당하여 접전을 벌인다면 호걸들 가운데에는 성하게 살아 남는 사람이 드물 것이니 이 일을....' 그가 그렇게 안타까와하고 있는데 돌연 뒤에서 마문비의 목소리 가 들려 왔다. "두 분께서는 싸우면 아니되오." 그러나 그렇다고 줄행랑을 놓을 수는 없었다. 물론 저쪽에서도 이 두 사람이 얼마나 피로해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소영은 급히 앞으로 나아가 길 한가운데를 막아 섰다. 상팔에게 낮은 소리로 일렀다. "상형은 먼저 물러가시오!" 상팔은 그의 무공을 잘 알고 있는 터라 굳이 고집을 부리지 않고 몸을 날려 삼십 장 밖으로 물러났다. 소영은 눈앞을 덮쳐 오는 마필을 보고 지체하지 않고 일장을 들 어 쳤다. 말에 타고 있던 사나이는 강력하기 비길 데 없는 한 줄기 장력이 콧잔등으로 밀려 오자 도저히 감당하기가 어려웠는지 두 손 을 마주 들어 소영의 일장을 맞이했다. "퍽!" 소리와 함께 사나이의 동작은 빠르게 움직였다. 두 손으로 막고 재빨리 한 손으로 적을 치는 솜씨는 가히 볼 만했다. 말은 크게 놀라 울부짖으며 앞발을 쳐들었다. 이때 사나이는 일 장을 막고 재빨리 한 손으로 상대방을 때렸으나 소영이 내쏟은 장 력이 너무 강하여 말안장에서 몸이 붕 떠 있었다. 소영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 손으로 적의 일장을 막고 또 다시 공력을 모아 더 거센 일장을 쏟아 내어 상대방의 면상을 향해 후려쳤다. 이 일장을 상대방은 막아 내지 못하였다. 다행히 몸이 뜨는 바람에 면상을 다치지 않았으나 거센 힘이 가슴을 치자 으윽 소리와 함께 비틀거리면서 말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사내는 강골이었다. 게다가 심성이 또한 악착 같았다. 이 내 몸을 일으키더니 다음 순간 귀신같은 상을 해 가지고 덤벼 들었 다. 두려운 빛도 없었고 거세게 얻어 맞고도 싸움을 피하려는 기색 도 없었다. 사나이의 손에는 벌써 번뜩이는 검이 들려 있었다. 이때 그 뒤를 따르던 두 명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쌍쌍이 장검을 빼들고 측면에서 공격했다. 소영은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선뜻 두 걸음을 내디디어 두 사람이 좌우에서 내려치는 검을 헛바람을 일으키게 하고는 그 바람으로 거의 십성의 내력을 발휘하여 앞으로 덮치는 사나이를 때 렸다. 장풍이 나가는 소리가 윙 울렸다. "펑!" 마치 벼락치는 소리와 같았다. 사나이는 말에서 굴러 떨어진 까닭에 몸이 시원치 않았다. 그래 서 소영이 거의 진력을 다 쓴 일력을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더구 나 한 손에 검을 들고 내려치려는 판국이니 더욱 손을 쓰는 것이 느렸다. "으윽!" 비명이 일어났다. 사나이는 비틀거리며 다섯 걸음이나 밀려나더 니 드디어 그 자리에 푹 거꾸러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다시 일어나 지 못하였다. 한 명은 이렇게 해서 해치운 셈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한꺼번에 대여섯 명이 동시에 달려 들었 다. 획획! 칼바람이 일고 섬광이 사방에서 번뜩였다. 소영은 그 와중에서 바람같이 좌충우돌, 장풍은 거의 적을 때리 고 한 손으로 상대방이 내려치는 것을 잡으며 그 기세로 몸을 허공 에 떠올리며 무릎과 발끝으로 두 명의 면상을 걷어 찼다. 질풍과 같은 동작이요, 쇳덩이와 같은 공세였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여러 차례에 걸친 악전을 치르느라 기력은 쇠할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한차례 적을 때려 눕힌 후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에 적의 검을 빼앗아 오른손에 바로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등 뒤를 소홀히 한 틈 을 타서 문득 싸늘한 검풍이 밀어 닥쳐옴을 느꼈다. 몸이 피로하면 정신이 흐트러지는 법이다. 그는 호신강기로써 적의 어떤 병기가 찔러 들어 오더라도 몸을 보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잠깐 소홀히 하여 등덜미를 내놓은 것이 아니라, 바로 몸을 운행하고 있는 호신강기를 흐트러 놓은 것이다. 적의 검은 곧장 소영의 등덜미를 파고 들다가 퉁겨 날아갔다. 상 처는 가볍지 않았다. 만일 이 찰나간의 불운한 기회에 그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호신강기를 전부 거두어 들인다면 아마도 적의 칼날 은 그의 가슴까지 꿰뚫었을 것이다. 비스듬이 몸을 기울인 그는 순간 적의 손에서 빼앗아 든 장검을 획 옆으로 그으며 계속해서 자기 몸으로 떨어지는 칼날을 동시에 쳐냈다. 쨍그렁!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몇 가닥 칼날이 허공으로 퉁겼다. "합!" 기합소리에 이어 으윽! 하는 참담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소영 의 번뜩이는 칼날에 두 명의 허리가 잘려 나갔다. 두 명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으나 다음 순간, 머리, 허리가 옆으 로 기울이더니 마치 무우를 썰어 놓은 듯 윗부분이 먼저 땅바닥에 굴렀다. 몸의 아랫부분이 쓰러지기까지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소영은 등덜미에 받은 일검의 상처가 가볍지 않음을 알았다. 그 러나 이 위급한 때에 상처를 돌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급히 운공 을 하여 피를 멈추게 하는 한편 잇따라 귀신 곡할 정도의 실력을 발휘했다. 검이 나는 곳은 모두 상상하지 못했으며 그 손을 쓰는 동작은 또한 매우 괴이하였다. 바로 내리치는가 하면 검은 어느새 옆으로 돌아가며 적의 목을 쳤다. 모두 이런 식이었다. 몸이 검을 따라 움직이는 모습도 기이하였다. 여러 차례 비명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다섯 놈이 나뒹굴었다. 모 로 자빠지는 사람, 배를 안고 앞으로 꺼꾸러지는 사람 등 각양각색 이었다. 잇따라 몇 놈을 베어 버리자 형세는 크게 달라졌다. 아무리 생명을 돌보지 않는 자들이라도 순식간에 일어난 참상을 모를 수 없었다. 소영은 포위가 풀리는 틈을 타서 이내 몸을 날려 포위망을 뚫고 나왔다. 우선 걱정이 되는 것은 부모님의 안위였다. 자신이 흔들리 면 두 분의 안위가 흔들린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기운이 솟구치는 듯했다. 곧장 앞으로 달렸다. 그의 몸은 피투성이었다. 문득 들럭오는 칼부딪치는 소리. 눈을 들어 보니 그곳에도 이미 백화산장의 무리들이 와 있었다. 그에 대적하여 다섯 사람의 무림고수들이 저마다 손에 든 병기로 적을 맞아 싸우고 있었다. 소영은 그들을 한차례 훑어 보았다. 맨 오른편에서 격돌하고 있는 사람은 팔수신룡 단목정이었다. 그 옆 사람은 아름답게 생긴 청의의 소녀, 그리고 그 옆에는 절름발이 의 의협이라 하여 통칭 파협이라 일컫는 상대해가 두 사람의 제자 를 데리고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이 다섯 사람은 한 줄로 늘어 서서 싸우고 있었는데 백화산장의 무리들은 한 걸음도 그들을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 다섯 사람 뒤에는 또 화룡봉을 들고 일신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검은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리고 서 있었으니 바로 삼양신 탄 육괴장이었다. 마문비는 그들의 뒤에 멀찌감치 비켜 서 있다가 소영이 달려 오 는 것을 보고는 반가히 소리쳤다. "어서 이쪽으로 오시오!" 소영은 멈추지 않고 싸움의 와중으로 부딪혀 들어 갔다. 단목정이 그가 달려오는 것을 보자 돌연 옆으로 몸을 날려 길을 내 주었다. 이 순간을 이용하여 소영은 바람같이 싸움판을 뚫고 지나갔다. 마문비는 곧장 소영에게로 다가섰다. "어서 앉아 좀 쉬시오......" 마문비는 문득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소영의 옷이 온통 피투성 이로 적을 벨 때 피가 튀었다면 너무 심한 편이 아닌가. 게다가 얼굴은 핏기가 없었다. "상처를 입었소?" 그는 믿어지지 않았다. 이미 백화산장에서 소영의 무공을 보아 알고 있었다. 소영은 그 처절한 혈투의 와중 속에서도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그가 하잘것 없는 추격자들에게 다 쳤으리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소형!" 이때 소영은 갑자기 긴장이 풀어짐을 느꼈다. 다리에 힘이 죽 빠지며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급기야 흔들리는 몸을 장검으로 땅 을 짚어 바로 세웠다. "내가 급히 달려 오느라고 피를 멎게 하는 일을 잊었구나!' 그는 천천히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저만큼 떨어진 곳에서 일 행이 둘러 앉아 분주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위급한 때라 모두들 기운을 차려야 했다. 소영이 상처를 입었다는 소문이 금방 퍼졌다. 맨 먼저 달려 온 것은 금란이었다. "상처가 대단하십니까?" 소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치는 않소." 금란은 조바심을 했다. "공자의 한 몸은 우리들의 안위와 크게 관계가 있습니다. 어찌 몸을 보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서 제게 보여 주십시오." 소영은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그럼 수고 좀 해 주시오." 금란이 그의 상처를 보니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다행히 심장을 다치지 않아서....." 그녀는 급히 약을 바르고 옷을 찢어 엄밀히 싸매었다. 이때 휴식을 취하던 뭇 호걸들은 소영이 상처를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라서 달려오는 자도 있었다. 소영은 때가 때인만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시간이 금쪽과 같이 귀중한 때올시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백화산장의 고수들과 일전을 불사해야 합니다. 본인의 상처 는 비교적 가벼운 것이니 여러분께서는 너무 크게 걱정하여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그는 더 말하려고 했으나 갑자기 손불사가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 다. 어떻게 된 일일까? 멍하니 입을 다물고 일동을 둘러 보고 물었다. "여러분께서는 손불사 노선배님을 보시지 못했습니까?" 여러 호걸들은 이 말을 듣고는 서로 얼굴만 쳐다 볼 뿐이었다. 그들이 안절부절 하고 있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자기 한 몸을 돌보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손불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사마건이 입을 열었다. "그 늙은 거지는 무공이 고강하니 결코 어려운 일을 당하지는 않 았을 거요. 여러분께서는 그 일에 대해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소영은 탄식을 금치 못하였다. "아, 그는 몸에 중한 내상을 입었습니다." 돌연 한 소리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한 사람, 서른 안팎의 젊은이가 온 몸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 뛰 어 나왔다. 상팔이 즉시 손을 써서 사나이의 온몸의 혈도를 봉채함으로써 피 가 계속해서 흐르지 않게 하였다. 여러 사람이 보니 그는 파협 상 대해의 제자였다. 소영이 보니 그의 오른쪽 어깻죽지가 이미 무우 잘리듯 끊어지고 없었다. 상팔이 그의 혈도를 쳤지만 피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흘렀다. 사나이는 왼손으로 장검을 짚고 몸을 지탱하며 말했다. "백화산장의 무리들은 계속해서 수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가사와 단목 노선배께서 분전하고 계십니다만 몰려 오는 적의 수가 많아서 오래 지탱하시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서....." 그러나 말을 채 맺지 못하였다. 사나이의 몸은 썩은 나무토막처 럼 털썩 땅바닥에 쓰러졌다. 마문비가 급히 몸을 날려 사나이를 부축하였다. 호걸들은 모두가 무림의 일류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음식을 먹었 고 또 얼마간의 휴식도 취하였다. 마문비가 여러 호걸들을 향하여 소리쳤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상처를 치료할 영약을 가지신 분이...."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아 신투 향비가 큰 걸음으로 나섰다. "늙은 도적이 가지고 있소." 신투 향비는 거침없이 품 속을 뒤져 금창약을 꺼내 사나이의 상 처에 손수 발랐다. 그리고 소매를 찢어서 상처를 싸매 주기까지 했 다. 보통 때라면 이러한 친절은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곳에 있는 호걸들은 일류 고수요, 또한 일파의 인물들이다. 그 누가 감 히 하잘것 없는 파협의 제자에게 손수 약을 발라 주고 싸매 주기까 지 하겠는가. 신투의 하는 거동은 모든 영웅들을 감동시켰다. 사람이 위급한 경우에 닥치면 신분이고 체통이고 다 떨어 버리게 되는 법이다. 진정 인간의 아름다운 심정이 아닐 수 없었다. 봉죽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마어른, 이 중상을 입은 분을 소비에게 맡겨 주십시오." 마문비는 자못 마음이 흔쾌했다. "하하.... 천하 영웅들이 오늘 이같이 한마음으로 협력한다면 심 목풍의 세력이 설사 배로 강해진다고 한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마문비의 이 말은 장중의 호기를 크게 진작시켰다. 사마건이 돌연 앞으로 나서며 손에 든 금환을 휘둘렀다. "어느 분이 저와 함께 지금 적을 대적하고 있는 분들을 돕겠습니 까?" "이 늙은 도적이 따르지" 바로 신투 향비였다. 사마건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두 사람이 소매를 펄럭이며 앞으로 나가는 기세는 크게 높아졌 다. 마문비는 한 차례 사방의 형세를 살핀 다음 입을 열었다. "여기서 오리 쯤 떨어진 곳에 본인이 적을 막기 위해 매복을 배 치하였습니다. 우리는 거기까지 가야만 그들과 만날 수 있을 것입 니다." 상팔이 입을 열었다. "백화산장의 세력이 이와 같이 급격히 늘어 간다면 팔수산룡 단 목정과 파협 상대해 등은 사마건과 향비의 도움이 있다고 해도 아 마 오래 지탱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마문비는 소영을 돌아다 보았다. "본인이 이미 준비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소영의 상세가 어떤 지, 걸어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금란이 얼른 말을 받았다. "괜찮습니다. 만일 움직일 수 없을 정도라면 제가 업고서라도 가 겠......." 소영은 금란이 업고 가겠다는 말에 벌떡 자리에서 뛰어 일어났 다. "걱정마시오. 이까짓 조금 다친 것을 가지고 무엇을 꺼리겠습니 까?" 마문비가 만류했다. "소형께서는 천하 무림을 생각하여 몸을 보중해야 하오. 무리하 는 것은 삼가시오." "걱정 마십시오." 소영은 이렇게 말하고 큰 걸음으로 앞으로 나갔다. 상팔, 금란 두 사람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소영의 뒤를 바싹 좌우 에서 보살피듯 따랐다. 뒤에서는 여전히 칼부딪치는 소리와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쌍 방의 혈전은 극에 이른 듯했다. 소영은 마음 같아서는 즉시 되돌아 가서 싸움을 돕고 싶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몸을 보중해야 한다. 하는 수 없이 그대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오 리의 길을 순식간에 도착했다. 먼발치로 큰바위를 양쪽에 낀 좁은 길 가운데 얼굴에 고슴도치 수염을 한 거대한 장한이 딱 버티 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소영은 그가 남악 보천성임을 대번에 알아 보았다. 마문비가 바람같이 날아 그 사람 앞에서 두 손을 맞잡고 예를 올 리며 말했다. "보형, 준비는 다 되었습니까?" 보천성이 찌렁찌렁 울리는 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처분대로 다 배치해 놓았습니다. 마형과 여러분께서는 산 마루로 돌아가 쉬십시오. 이미 여러분을 위해서 충분과 음식과 건 강한 마필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소영은 그들의 계획이 주도 면밀함에 속으로 감탄해 마지 않았 다. '그러나 누구의 계책인지 모르겠구나!' 생각하는 사이에 무리들은 길 옆을 돌아서 큰 바위를 양쪽에 끼 고 좁은 길로 들어 섰다. 좁은 길을 지나니 눈앞의 경치가 일변했 다. 넓은 풀밭, 그리고 말울음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말소리도 들려 왔다. 이미 안장을 갖춘 말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마문비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소형과 여러 영웅들께선 여기서 잠시 쉬십시오. 제가 돌아가서 앞에서 적과 대적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퇴각을 하도록 이르겠습니 다." 소영이 나서며 말했다. "제 몸도 회복된 것 같습니다. 청컨대, 마형과 함께 가기를 바랍 니다." "우리는 이미 서로 연락하는 신호를 해 두었소. 따라서 급히 되 돌아 갈 필요도 없소. 그러니 감히 소형께서 수고를 끼칠 거야 없 지요." 마문비가 만류했다. 그러나 소영은 못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여러분께선 이 소영을 위하여 그토록 분전을 하고 계신데 내 어 찌 감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으리오." "소형이 꼭 보아야만 한다면 상관이 없지요. 가장 나은 길은 손 을 쓰지 않는 것이오." 상팔은 선뜻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인이 함께 가서 형님을 지키겠습니다." 소영은 과히 달갑지가 않았다. 그러나 상팔의 성의가 고맙게 느 껴져 더 말하지 아니했다. 세 사람은 풀밭을 나와 골짜기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이미 싸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영은 그곳에서 쭉 늘어서 있는 영웅들을 보았다. 태반이 아는 얼굴들이었다. 제일 왼쪽에는 상복을 입고 체모가 출중한 소년이 서 있었는데 그의 손에는 두 자가 채 못 되는 장검을 들려 있었다. 바로 남파 태극 문하의 회풍십팔검으로 전 무림을 떨어 울린 지 난날의 장문인 석준산의 아들 석봉선이 아닌가. 그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나이가 쉰이 될까 말까한데 검을 잡고 숙연한 모습을 하고 서 있었다. 바로 남파 태극 문하의 등곤태이다. 그 다음으로는 한 사람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이 서 있었으니 그는 또 누군가? 소영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곧 의혈문의 동공성을 생각해 냈다. 그 다음으로는 보천성이 서 있었고, 그 다음으로는 키가 팔 척이 넘어 보이는 거인이 우뚝 서 있었다. 붉은 얼굴에 허리에는 연삭 양은주를 차고 손에는 큰 활을 들고 있었는데 벌써 활에는 살이 매겨져 있었다. 바로 신전진건곤이라 불리는 당원기였다. 이 다섯 사람을 제외하고도 양쪽 바위와 풀더미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번뜩 움직이곤 했다. 모두 매복해 있는 자들이 분명했다. 매복해 있는 사람들은 한 둘에 그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소영 등은 지나쳐 오면서도 그들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마문비의 말소리가 전해 왔다. "당형, 활을 쏘아 그들을 후퇴시켜도 되겠지요?" 당원기는 끄덕이고 즉시 공중에다 대고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곧장 하늘로 치솟아오르더니 얼마쯤 올라가자 펑! 하는 소리와 함 께 화살 끝에서 흰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 올랐다. 마문비가 영웅들을 독려했다. "백화산장의 인물들은 한꺼번에 덤비는 것을 다반사로 알고 있 소. 그러니 여러분께서는 인정을 두지 마시고 사정없이 손을 써서 적을 상대해도 무방합니다." 고슴도치처럼 온 얼굴이 장비수염으로 뒤덮인 보천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 이제 마형께서는 산 뒤로 돌아가 쉬십시오. 이곳의 일 은 우리가 처리할 테니....." "그러지요. 본인은 절벽 사이로 숨어 지키겠소이다. 우선은 손을 쓰지 않겠습니다." "그럼 저를 따라 오십시오." 보천성은 이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손을 휘둘렀다. 신호를 본 사 람들은 모두 대열에서 흩어지며 분분히 바위 뒤로 돌아가 몸을 은 신하였다. 보천성은 앞장 서서 성큼성큼 바위 뒤로 돌아 높은 곳으로 향했 다. 소영과 마문비가 그 뒤를 따라 올라갔다. 그들이 닿은 곳은 한 거대한 암석의 틈바구니였다. 그곳은 전후 좌우가 모두 풀더미에 싸여 있어 위에 안아서 아래를 내려다 보기 에는 더없이 좋았다. 시계도 확 트이고 넓어서 아래에 보이는 길과 그 사이사이에 매복한 자들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만일 적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말에서 내려 몸을 은신해 가 며 싸우는 모습이 샅샅이 보일 것이 분명했다. 머리를 들어 바라 보니 벌써 멀리로 네 필의 인마가 달려 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문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아하니 벌써 우리들의 제 일 저지선은 크게 흐트러진 것이 분 명하오." 달려 오는 자들은 모두가 검은 옷을 입은 백화산장의 무사들이었 다. 보천성이 한마디 했다. "먼저 저들을 족쳐서 상판대기를 좀 볼까?" 그리고는 저 아래 나무 밑에 서 있는 당원기를 향해 소리쳤다. "당형, 저놈들은 전부 백호산장의 무사들이오. 당형은 인정사정 볼 필요가 없소이다." 당원기는 활에 긴 화살를 매었다. 소영은 그가 느긋이 힘을 주어 화살을 겨냥하는 것을 보았다. 다음 순간 피융!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곧장 날아 갔다. "악!" 멀리서도 비명 소리는 처참하게 들렸다. 이 강궁의 힘은 얼마나 센지,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사나이는 화살리 가슴을 꿰뚫고 등허 리까지 길쭉하게 나와 있었다. |
첫댓글 ㅈㅈㅈㅈㅈㅈ
소설 잘 읽었습니다
기분좋은 꿈 꾸시고 포근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