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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
소우당 별당, 양반의 풍류 가득… 선운사 '천년숲길' 비경 자랑
'의로운 고장(義城)'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경상북도 의성은 지도를 펼쳐 놓고 위에서 보면 땅콩처럼 생겼다. 동과 서쪽으로 길고 남과 북쪽으로 완만하다가 가운데가 살짝 들어간 폼이 영락없는 땅콩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고즈넉한 산운마을과 사촌마을, 고운사와 산수유마을을 알면 알수록 땅콩처럼 고소한 맛이 절로 난다고 의성 사람들은 말한다.
◇고풍스러운 운치를 간직한 산운마을
안동(하회마을), 영주(무섬마을) 등 인근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의성에도 전통 마을이 잘 보존돼 있다. 수백년 된 고택과 회화나무가 늘어선 전통 마을은 요즘 같이 청명한 하늘이 펼쳐지고 햇살이 부드러운 가을과 잘 어울린다.
금성산의 운해 아래 자리했다고 해서 산운(山雲)이라고 불렸다는 산운마을은 420여년을 이어온 영천 이씨의 집성촌으로 지금도 80여 가구의 절반이 영천 이씨다. 학록정사와 운곡당, 소우당, 점우당 등 저마다 특색 있는 전통 가옥들과 돌담이 어울려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과거에 급제하거나 높은 관직에 오르면 심었다는 회화나무도 마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40여채의 고택 중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소우당이다. 19세기에 지어져 조선 말기 양반가의 풍류와 운치를 유감 없이 보여준다. 소우당은 안채보다 별당이 압권이다. 별채로 들어서는 쪽문을 통과하면 못과 숲이 어우러진 한식 정원이 펼쳐지는데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한반도 모양이라는 못과 둘레에 소나무를 심어놓은 화려한 조경은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의병의 기상이 서린 사촌마을
산운마을이 남부의 반촌이라면 사촌마을은 북부의 반촌이다. 사촌마을은 중국의 사진촌(沙眞村)을 본 따서 지은 마을 이름으로, 안동 김씨, 안동 권씨, 풍산 류씨의 집성촌이며 송은 김광수, 서애 류성룡 등이 이 곳에서 태어났다. 600여년전 연산군 때 안동 김씨 송은 김광수는 당파주의를 반대하며 이곳으로 내려와 영귀정이라는 작은 정자를 짓고 은둔 생활을 하다 98세에 세상을 떠나면서 후손들에게 "과거는 보되 높은 벼슬에 출사치 말라"고 일렀다고 한다.
그의 외손자인 서애 류성룡을 비롯 풍산 류씨를 통틀어 사촌마을에서 대과에 급제한 사람이 18명, 소과에도 31명이 합격한 기록이 남아 있으나 조상의 유지를 따르기 위함인지 높은 벼슬에 오른 이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사촌마을 문화관광해설사인 류근하 씨는 "이 곳 학자들은 과거에 급제해도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고 향학 발전에 이바지했다"고 설명했다.
오랜 역사에도 불구 마을 곳곳에는 지은 지 100년도 안 되는 신축 한옥이 눈에 띄는데 이는 아픔의 역사를 반증하는 것이다. 의성(의로운 성)이라는 이름처럼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이 곳에 왜군이 와서 불을 질렀고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다시 의병(병신의병)을 일으키자 일본군들이 몰려와 또 불을 질러 마을을 황폐화시켰다고 전해진다.
숱한 파괴의 역사 속에서도 1582년 지은 만취당은 유일하게 남아 있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이며 궁궐이나 절이 아닌 사가(私家)로는 유일하게 오래됐다. '서쪽이 허하면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풍수지리에 따라 마을이 생길 때 마을 바깥 쪽으로 가로숲길이 조성돼 지금도 멋진 풍광을 뽐내고 있다. 수령이 최고 600년에 달하는 가로 숲길은 길이가 1㎞나 돼 천천히 걷기에 그만이다.
◇가을의 절정을 만난 고운사
단촌면에 자리한 고운사는 681년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신라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이 중건한 유서 깊은 고찰이다. 말사가 60여개에 이르는 조계종 제16교구 본사라지만 절 앞에 그 흔한 산채 비빔밥집 하나 없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사찰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천년고찰 고운사로 향하는 진입로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운치가 있어 '천년 숲길'로도 불린다. 고운사 경내 입구에서 만난 가운루는 특별한 건축 양식에 다시 한 번 눈길이 간다.
신라 말기 최치원이 세웠다는 가운루의 기둥 길이는 저마다 다른데 물길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계곡 속 바위를 초석 삼아 거기에 맞춰 기둥을 세웠기 때문이다. 특히 보물 246호인 석조석가여래좌상과 우화루 호랑이 그림은 고운사의 자랑거리인데, 호랑이 그림은 서있는 위치를 바꿔도 범과 눈이 마주치니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다.
◇빨간 열매 가득한 산수유 마을
산수유 마을은 숲실마을(화전2리)과 전풍마을(화전3리)로 나뉜다. '숲실'은 숲으로 둘러싸인 골짜기라는 뜻의 순 우리말로 임진왜란 때부터 마을에 다래와 머루 넝쿨이 어우러지며 넓은 숲을 이뤄 붙여진 이름이다. '전풍'은 마을에 중풍에 효과가 있는 산수유 나무가 많고 산 좋고 물이 좋아 끊임없이 풍년이 든다고 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봄에는 샛노란 산수유 꽃으로, 늦가을엔 새빨간 산수유 열매로 뒤덮이는 산수유 길은 의성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자리잡았다. 마을 입구로 가는 10리 길에 수령이 30년부터 300년이 넘는 3만여 그루에 달하는 산수유 나무가 뒤덮여있다.
지금은 관광 명소가 된 산수유 나무가 화전리를 온통 뒤덮을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마을의 가난 때문이었다고 한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한약재로 쓰이는 산수유 열매를 길러 내다팔기 위해 마을에 산수유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전국 최고의 산수유 마을의 씨앗을 제공한 것이다.
산수유 열매에는 동맥경화 예방에 좋은 불포화 지방산인 리놀산과 체내의 불필요한 수분 배출을 촉진하는 사포닌 등이 다량 함유돼 있어 내과 질환에 좋으며 원기 회복에도 효능이 있다. 나뭇잎이 모두 떨어져 새빨간 산수유 열매가 가로수 길을 뒤덮는 것은 보통 11월 중순. 이맘 때는 붉은 양탄자처럼 펼쳐진 산수유의 장관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 곳을 찾는다.
◇왕국의 자취가 숨어있는 의성
국내 최고의 사화산이라는 금성산 주변에는 역사책에도 잘 남겨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신라 석벌휴이사금(벌휴왕) 2년인 185년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는 조문국이 바로 의성이라는 것. 김천 감문국, 경주 사로국, 영천 골벌국, 경산 압독국, 상주 사벌국, 청도 이서국 등의 성읍 국가들과 함께 찬란한 고대문화를 꽃피웠다고 한다.
잊혀진 왕국 조문국이 다시 조명 받게 것은 세월이 흐른 조선 중기. 오극겸이라는 농부의 꿈 속에 조복 차림에 금관을 쓴 백발 노인이 나타나 "나는 조문국의 경덕왕인데 네 원두막이 내 능 위이니 속히 철거하라"고 해 비로소 조문국 유적이 발견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실제로 이 곳에선 출(出)자 장식의 신라 것과 달리 산(山)자 모양의 조문국 금관이 함께 출토돼 조문국의 역사를 입증해준다. 의성군은 현재 조문국 고분군을 문화유적지로 개발하기 위해 고분들을 차례로 복원중이다.
◇의성의 먹거리
의성은 단연 육쪽 마늘을 이용한 음식이 최고다. 마늘 삼겹살ㆍ마늘 먹인 한우 등과 마늘 밥을 추천할만하다. 봉양면 도원리 일대의 식당 10여곳이 늘어선 마늘 한우식당가가 유명하다. 축협에서 직접 마늘 한우 쇠고기를 구입, 식당에 1인 당 3,000원씩 주면 불판과 반찬을 내온다. 마늘 정식을 찾는다면 군청 근처의 서원(054-834-0054)이 잘한다. 흑마늘과 함께 익힌 닭고기와 불고기, 직접 쑨 도토리 묵채 등이 푸짐하고 맛깔난다.
# 권정생, 그의 집 앞에서 삶의 방식을 되돌아보다
경북 의성을 향하는 길에 꼭 들러야 할 곳이 한 곳 있다.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나들목으로 나가 914번 지방도로에 오르면 곧바로 길 왼편에 작은 표지판이 하나 서 있다. ‘권정생 선생 살던 집’. 행정구역으로 보자면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지만 의성군과의 경계를 이룬 남쪽 끝에 있어 안동을 찾았다가 들르기란 쉽지 않은 곳이다. 오히려 의성으로 향하는 길에 찾아가는 편이 더 맞춤하다.
안내판을 따라 시멘트길로 가면 길이 흐려지면서 다섯평짜리 허름한 빨간 슬레이트집 마당으로 들게 된다. 그곳이 바로 아동문학가 고 권정생이 거의 한평생을 기거하면서 글을 쓴 곳이다. 평생을 자신이 쓴 글대로 바른 삶을 실천하며 청빈하게 살았던 그가 소유했던 것들은 생전의 유언대로 이웃들에게 다 나누어졌지만, “내가 살던 오두막은 허물어서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라”는 유언만은 그의 삶과 작품을 추억하고 기리려는 사람들에 의해 지켜지지 않았다.
대문도 울타리도 없이 곧 허물어질 듯 서 있는 오두막집에 그의 체취를 느낄 만한 것은 없다. 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고, 까치발로 창틈을 들여다봐도 말끔히 치워진 방에서 그가 기거했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창호문 위에 그가 손수 비뚤배뚤 쓴 ‘권정생’이라는 글씨 하나만이 그가 이곳에서 기거했다는 유일한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를 추모하는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지은 책이 수십 권에 달해 인세만으로도 이렇듯 궁핍한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됐지만, 조탑동 교회 문간방에 기거하며 종지기 생활을 했던 그는 돈이 생기면 항상 더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했고, 초라한 오두막에서 글을 쓰며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했다. 그 집 앞에 서면 그가 생전에 몸소 보여준 “중요한 것은 ‘어디서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라는 가르침을 얻게 된다. 자녀와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그가 지은 책 몇 권을 챙겨 들고 가서 오두막집 앞 평상에 앉아 마당에 심어진 노란 은행나무 그늘 아래에서 읽어 보면 어떨까.
# 아무도 마주치지 않는 단풍 숲길을 걷다
경북 의성은 도로 사정이 좋지 않기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지역이다. 의성을 관통하는 중앙고속도로, 그리고 안동·예천을 잇는 5번, 28번 국도를 제외하면 군내의 모든 도로는 예외 없이 왕복 2차선이다. 면소재지와 연결되는 주요 지방도로들은 중앙선이 없는 구간이 허다하고, 교행이 불가능한 도로들도 자주 만나게 된다. 길은 빨래가 걸린 낡은 슬레이트집의 담장과 주렁주렁 열린 사과나무 아래를 굽이굽이 돌아간다. 주민들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겠지만, 여행자들에게 목적지까지 맹렬하게 달려가는 길보다 굽은 길이 더 반가운 것은, 이런 길에서 시골마을의 푸근한 정취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의성에서 느끼고 봐야 할 것도 이런 것들이다.
의성에서도 가장 오지로 꼽히는 옥산면 일대로 접어들면 길은 더 옹색해진다. 옥산면 일대는 사과나무 과수원이 밀집해 있는 곳. 비가 적은 데다 일교차가 커서 당도 높은 사과가 난다. 과수원에는 울타리도 가림막도 없다. 길가에 바짝 붙어 심어진 과수원의 사과나무들이 빨갛게 익은 사과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옥산면에서는 어디로 길을 잡든 사과나무 사이를 가로질러 굽이굽이 달리게 된다. 이름을 붙이자면 ‘사과로드’인 셈이다. 마침 사과를 선별하던 농부에게 “왜 울타리를 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천지가 사과밭인데 하필 내 밭의 것을 따 가겠느냐”며 웃고는 사과 한 아름을 안긴다.
어디 사과뿐일까. 안동과 청송의 경계를 이룬 옥산면의 금봉리, 금학리, 오류리 일대는 제법 높은 산들이 연봉을 이루고 있어 단풍이 빨갛게 물든다. 금봉리의 오지마을에 들어선 금봉자연휴양림에서는 고즈넉하게 아름다운 단풍을 만날 수 있다. 특히 휴양림에서 청석골로 이어지는 6㎞ 남짓의 임도는 산림청이 꼽은 ‘한국의 아름다운 임도 100선’에 이름을 올린 운치 있는 숲길이다.
#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가득한 조문국 고분·적석탑
의성은 이웃한 안동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깊이’가 느껴지는 곳이다. 하지만 의성은 안동의 남쪽에 있어 안동을 지나야 당도한다. 의성에는 안동에 버금가는 전통마을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안동 땅의 오랜 전통마을과 유서 깊은 세도가의 고택들을 다 지나쳐 찾아가야 할 이유를 찾긴 어렵다. 의성의 고택이나 전통마을이 안동에 비해 고즈넉한 맛이 있긴 있다고 해도 그 규모와 크기를 안동에 비교하자면 아무래도 모자라다. 따라서 의성에서 ‘시간의 깊이’를 만나겠다면 ‘안동 땅에는 없는 것’들을 찾아가는 게 더 낫겠다.
먼저 의성군 금성면 탑리의 조문국(召文國·召는 이두문자로 ‘조’로 읽음) 유적인 고분군이다. 조문국은 신라에 멸망했던 삼한시대 부족국가. 당시 부족국가로는 김천의 감문국, 영천의 골벌국, 경산의 압독국, 상주의 사벌국, 청도의 이서국 등이 있었지만, 이처럼 100여기가 넘는 대규모의 고분군이 발견된 곳은 이곳 의성이 유일하다. 조문국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신라 벌휴왕 2년(185년) 신라가 조문국을 복속했다’는 단 한 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기록대로라면 이곳의 고분은 무려 2000년에 가까운 시간을 건너온 것들이다. 잘 정비된 고분의 부드러운 능선을 바라보면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깊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의성에서 찾아봐야 할 또 하나는 다양한 탑이다. 의성의 유일한 국보인 탑리 오층석탑은 나무탑과 돌탑, 벽돌탑 양식을 두루 갖춘 독특한 풍모를 지니고 있다. 금성산을 뒤로하고 힘차게 솟아오른 탑의 위용이 자못 당당하다. 높이 9.6m에 달하는 대형 탑을 이렇듯 균형과 비례에 맞게 세워낸 도형감각이 감탄스럽다. 관덕동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석탑의 양식인데 몸돌에 정교하게 새겨진 사천왕상과 보살상이 빼어나다. 의성의 탑 중에서 가장 독특한 것을 꼽으라면 안평면 석탑리의 방단형적석탑(아래 사진)이다. 넓적한 돌을 사각형의 단처럼 쌓아 올렸는데, 어찌 보면 무덤 같기도 하고 사방에 돌구멍(감실)을 만들어 불상을 앉힌 것을 보면 탑 같기도 하다. 이 역시 아무런 기록이 없어 언제 무슨 목적으로 세운 것인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 의성의 옛 전통마을과 마을 숲, 그리고 사과밭
의성은 안동 못지않게 유교적인 전통이 남아 있는 곳이다. 안동 김씨와 풍산 류씨의 집성촌인 사촌마을이 자리 잡은 ‘점곡면’만 해도 공자의 제자인 증자의 아버지 증점(曾點)의 점(點)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증자의 시에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바람을 쏘이다’라는 구절에서 따 점곡면을 가로지르는 하천에도 ‘기천(沂川)’이란 이름을 붙였을 정도다.
사촌마을은 퇴계학문의 맥을 이어온 곳으로도 유명하다. 90여호가 사는 사촌마을은 대부분 기와집이고, 구불구불 이어진 돌담도 멋스럽지만,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곳은 만취당 단 한 곳뿐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마을이 초토화됐던 탓이다. 사촌마을에서는 옛집이나 전통마을의 풍모보다 오히려 마을 숲이 더 볼만하다. 마을을 앉히면서 좌청룡의 기세는 빼어나지만 우백호의 지세가 약해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만든 숲이라는데, 팽나무와 상수리나무 등 아름드리 활엽수가 활개를 치듯 거대하게 펼쳐져 있다.
숲은 가운데 제방을 끼고 양편으로 800m쯤 이어지는데, 숲 옆으로 울타리도 없이 딱 붙어 사과나무 과수원이 들어서 있다. 의성 북부의 반촌이 사촌마을이라면, 남쪽에는 산운마을이 있다. 산운마을은 백두산보다 앞서는 국내 최초의 사화산인 금성산을 끼고 있는 마을인데, 영천 이씨의 집성촌으로 운곡당, 소우당, 점우당 등 운치 있는 10여채의 전통가옥들이 늘어서 있다. 이 중 눈여겨볼 곳은 전통정원이 멋스럽게 꾸며진 소우당. 별당의 연못과 소나무 숲의 풍류가 빼어나다. 마을 서당 역할을 한 학록정사 본관에 걸린 편액도 표암 강세황의 솜씨이니 눈여겨볼 만하다.
가는길
고운사와 사촌마을을 먼저 들르려면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남안동 나들목으로 나와 5번 국도를 타고 가다 79번 국도로 갈아타면 된다. 남안동 나들목으로 나와서 의성 방면으로 가다 보면 왼쪽에 집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산운마을이나 면 쪽으로 가려면 의성 나들목으로 빠져 927번 지방도와 68번 지방도를 타면 된다. 고운사 쪽에서 사촌마을로 넘어가는 79번 도로가 확장공사를 벌이면서 아예 길을 막아 5번 국도와 914번 지방도를 타고 돌아가야 한다.
묵을 곳 & 먹을 것
속소로는 금봉자연휴양림(054-833-6922)을 가장 추천할 만하다. 인근 대구 등지에서 찾는 이들이 많아 주말 숙박 예정이라면 일찌감치 예약을 해야 한다. 게르마늄 온천수가 나온다는 탑산온천(054-833-5001)은 모텔을 겸하고 있다. 시설은 낡은 편이지만, 숙소에 머물며 온천욕을 즐길 수 있어 편리하다. 숙박객에게는 온천입장권을 제공한다.
의성 사람들에게 ‘맛집’을 물으면 십중팔구 의성시장의 ‘남선옥’(054-834-2455)을 든다. 대폿집 스타일의 허름한 한우 숯불구이집인데 한우를 1인분(180g)에 1만원에 내온다. 가마솥을 얹고 장작으로 불을 때서 끓여내는 김이 펄펄 나는 소머리곰탕(4000원)도 유명한데 장날에만 내놓는 메뉴다. 의성시장에서 장날에만 맛볼 수 있는 연탄닭발구이와 전국수 등도 별미로 꼽힌다. 의성은 마늘을 먹여 키운 이른바 ‘마늘한우’로도 유명한데, 봉양면소재지에 가면 의석축협에서 직영하는 식육판매장(054-833-9505)이 있다. 이곳에서 고기를 사서 지정음식점으로 가면 상차림 비용만 내고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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