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학동계곡에서 만난 한줄기 바위글씨와 옛 절터
▲ 도봉산 방학동계곡 산길 |
도봉구의
새로운 샛별, 전형필 가옥을 간만에 복습하고 햇님의 퇴근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
어 방학동계곡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는 오래된 바위글씨와 절터를 오
래간만에
보고자 함이다. 이들도 우리집에서 무지하게 가까운 곳은 분명하나 1년에 1~2번 찾
을 정도로 인연이
잘 닿지를 않는다. 아니 너무 가까운데 있어서 인연을 일부러 거절했는지도
모른다.
방학동계곡 산길은 시루봉과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로 이어지는 숲길이다. 방학동
주민의 소
중한 산책지로 산길 또한 잘 닦여있는데, 길과 가깝게 거리를 두고
방학동계곡이
졸졸졸~♪
교향곡을 선사하며 흘러간다.
|
▲ 숲에 묻힌 방학동계곡 |
방학동계곡은 도봉산 최남단에 자리한 조그만 계곡으로 방학천과 중랑천(中浪川)으로 흘러간
다.
숲이 짙은 계곡 중류에는 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싹둑 다듬은 각이 진 바위와 반석이 즐비
해
경관이 나름 일품이다. 서울 시내와 가까운 이런 계곡에는 옛 사람들이 남긴 풍류 흔적이
나 낙서가 꼭 있기 마련인데, 그 예상대로 이곳에도 그들이 남긴 숙성된 바위글씨가 숨겨져
있었다.
허나 그들을 알리는 어떠한 안내문도 없기에 계곡을 더듬으며 알아서 숨바꼭질을 벌여야 된다.
다행히도 숨바꼭질 난이도는 낮으며 계곡을 따라 한문이 새겨진 바위만 찾으면 술래는 끝이다. |
▲ 귀록계산 바위글씨 윗쪽 방학동계곡
대자연이 칼로 싹둑 다듬은 것일까? 유난히 각이 지고 반듯한 암반이 많다.
비록
골짜기는
작아도 이 정도의 경치면 충분히 옛사람들이 반할만하다. |
바위글씨와 숨바꼭질을 벌이며 계곡을 더듬으면 조그만 폭포가 나온다. (산길에서 조금 떨어
져
있음) 사실 폭포라 하기에도 좀
민망한 수준인데, 그래도 계곡물이 완만하게 누운 바위를
타고
아래로 미끄러지니 엄연한 폭포이다.
바로 이 폭포 주변에 바위글씨 2개가 서려있다. |
▲ 바위에 의연하게 깃든 귀록계산(歸鹿溪山) 바위글씨 |
폭포 옆에 90도로 각을 진 바위 피부에는 귀록계산 바위글씨가 선명하게 들어있다. 바위에 네
모나게 홈을 파고 행서체(行書體)로 글씨를 새겼는데, 그 홈 크기는 77x28cm이다. 그 4자를
단순히
풀이해보면
사슴이 산과 계곡으로 돌아간다는 뜻인데, 여기서 귀록(歸鹿)은 그 뜻이
아니라 방학동과 인연이 깊은 귀록 조현명(趙顯命, 1691~1752)의 호이다. 그러니까 조현명의
산과 계곡,
즉 그의 조그만 세상이란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조현명은 누구일까?
조현명은 풍양조씨로 조인수(趙仁壽)의 아들이다. 자는 치회(稚晦), 호는 녹옹(鹿翁), 귀록(
歸鹿)으로 모두 '사슴록(鹿)'자가 들어가는데, 이중 귀록은 1731년 이후 2번이나 파직과 복직
을
당하면서
사용했다고 한다.
1713년 진사(進士)가 되고, 1719년 증광시 문과(增廣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관직
에
진출했다. 1721년 경종(景宗)이 숙종(肅宗)의 아들이자 숙빈최씨의 소생인 연잉군(延礽君)
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자 겸설서(兼說書)로서 세제보호론을 내세워 소론(小論)의
공격으
로 힘들어하던 왕세제를 지켰다. 그 연잉군이 바로 영조(英祖)이다.
1728년 영조를 부정하는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
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종군했고, 반란이 진압되자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녹훈, 풍원군
(豊原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대사헌(大司憲)과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1730년 경상도관찰사
가
되어 영남 남인(南人)을 다독거리며 백성을 보살폈다.
1731년 경상도에서 가장 큰 섬인 대마도(對馬島)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자 대마도주 종씨가 급
히 지원을 애걸했다. 그래서 조정에서 쌀을 내리려고 했으나 이를 반대하자 파직을 당했으며,
1733년 전라도관찰사로 다시 기용되면서 공조참판(工曹參判)과 총융사(摠戎使), 어영대장(御
營大將)을 지냈다. 허나 1736년 예조판서 시절에 형정(刑政)의 불공평을
상소했다가 또 파직
을 당하고 만다.
다행히 1738년 복직되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공조판서(工曹判書) 등을 역임했고, 1740년
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1743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왔으며, 1746년 우의정(右議政)
이
되면서 문란해진 양역(良役)을 손질하고자 군액(軍額)과 군역부담자 파악에 착수, 1748년
에 양역실총(良役實總)을 간행하여 왕에게 올렸다.
1749년 청나라에 다시 사신으로 갔다오고, 이듬해 영의정(領議政)이 되었으며, 균역법의 제정
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대책 마련에 부심했으나 대사간 민백상(閔百祥)의 탄핵으로 영돈녕
부사로
물러났다.
조현명은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을 적극 지지하며 양역의 개혁과 온갖 세금의 개선책을 제시
했다. 그리고 당시 많은 문인과 교류했는데, 그중에서도 김재로(金在魯), 박문수(朴文秀)와
친분이 깊었다. 그가 남긴 책으로는 '귀록집(歸鹿集)'이 있고, 해동가요(海東歌謠)에 그의 시
조 1수가 전한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
▲ 아직도 뚜렷한 귀록계산 바위글씨의 위엄
▲ 바위에 비스듬히 누운 와운폭(臥雲瀑)
바위글씨
(25x94cm 크기로 행서체) |
조현명이 방학동계곡과 인연을 맺은 것은 처음
파직을 당한 1731년 이후로 여겨진다. 벼슬에
서
떨려나자 아버지가 묻힌 방학동에 들어와 잠시 머물렀는데, 그 묘역이 바로 전형필가옥 동
쪽 언덕에
있다. (시루봉로 길가 북쪽 언덕)
그때 묘역과 가까운 이 계곡에 홀딱 반하여 별서
(別墅)를 짓고 '귀록계산'과 '와운폭' 바위글씨를
남긴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글씨를 굳이 조현명과 연관 짓는 것은 그가 시루봉 주변에 별서를 지은 적이 있고, 귀록
이란 호를 사용했으며, 그의 '귀록집'과 귀록집
권3에 실린 '와운폭우증가련(臥雲瀑又贈可憐)'
, '와운폭'이란 시가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의 글씨로 100%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으며, 그
의
후손이나 후학들이 새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별서 위치도 정확하지 않음)
계곡에 있었다는 그의 별서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흔적 조차 더듬을 수 없지만 1744년 별서 후
원에 명오정(名吾亭, 귀록정)을 짓고 소기영회(小耆英會) 벗들을 불러 시문을 짓고 술을 마시
며
놀았으며, 등산을 좋아하여 종종 도봉산과 우이암(관음봉) 부근 원통사(圓通寺)에 올라가
몸을 풀었다.
또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와운폭'이란 시를 남겼는데, 이 와운폭을 두고 당시 함경도
함흥
(咸興)의 유명한 늙은 기생과 시를 몇 수 주고 받았다. 그때 기생에게 보낸 시 1수를 보면 다
음과 같다. 정리하면 즉 인생무상... 인간의 인생은 결국 다 그렇고 그런 것이다.
功名文武前身事 -
문무의 공명은 모두 전생의 일만 같고
歌舞繁華一夢間 - 번화한 가무는 한바탕 꿈결처럼 지나갔다
大笑相看頭似雪 - 크게 웃는다 서로 쳐다보고 머리가 새하얗게 센 것을
空山斜日水流閑 - 공산에는 해 기우는데 강물은 유유히 흘러가네
* 귀록계산, 와운폭 바위글씨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0-1 |
▲ 각이 진 바위와 반석이 많은 방학동계곡 |
방학동계곡에 깃든 2개의 바위글씨를 둘러보고 방학동사지를 찾고자 도봉산의 품으로 더 파고
들었다. 북한산둘레길19구간 방학동길과 만나는 곳에서 둘레길에 미련을 두지 말고 계속 직진
하면 얼마 가지 않아서 너른 밭두렁이 나타난다. 이곳은 장수주말농장으로 도봉동과 방학동에
흔한 주말농장의 하나이다. |
▲ 방학동사지 2단과 3단 석축 |
장수주말농장에서 잘 닦여진 산길을 따라 산속으로 더 들어가면 숲속에 자리한 체육시설이 나
온다. 이곳은 방학동 주민들이 결성한 장수산악회가 닦아놓은 것으로 단순히 보면 도시 뒷산
에 널리고 널린 운동시설로 보고 지나치기 쉽지만 문제는
그 운동시설이 자리한 곳에 돌로 쌓
은 심상치 않은 석축(石築)이 요란하게 널려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석축을 이루고 있는 돌도
꽤 늙어 보여 이곳에 무슨 사연이 있음을
귀띔해준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고? 무슨 일이 있었을까? 놀랍게도 이곳은 오래된 절터이
다. 이곳에
둥지를 틀었던 절의 이름이나 창건 시기, 망한 시기에 대해서는 전혀 전하는 내용
이 없어 안타까울 따름인데, 절터에 남아있는 석축과 맷돌은 마지막 날의 충격이 참 대단했던
지 여전히 입을 굳게 닫고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인근 계곡에 별서를 지었던 조현명의
기록에도 절은
나오지 않는다. 이처럼 절의 모든 것이 수수께끼에 덮여있기 때문에 지역 이름
을 따서 편의상
'방학동사지'라 부른다.
이 미지의 절터에는 돌을 거칠게 다듬어 쌓은 석축 3단이 남아있다. 가장 위에 있는 1단 평탄
지는
길이 60m, 너비 17m로 20~120cm 크기의 장방형 석재를 5단 정도로 쌓아서 구축했다. 터
가 가장 넓어서 법당(法堂) 같은 건물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1단 밑에는 2단을 두
었는데, 평탄지
길이 15m, 너비 5m이며, 석축 길이는 10m, 높이 1.5m로 15~95cm 크기의 석재
를
6단 정도로 쌓았다. 그리고 3단 석축 평탄지는 길이 14m, 너비 6m이다. 석축 앞에는 완만
하게 내리막
경사가 펼쳐져
있고, 바위와 온갖 돌들이 널려 있다.
3단의
석축 외에 맷돌과 우물이 있으며, 서울역사박물관이 2003년에 1,100㎡를 조사하면서
어
골문(魚骨文)과 종선문(縱線文), 사선문, '官'이 새겨진 기와, 청자 양각 접시, 청자와 백자,
기와, 토기 파편 등을 수습했다. 이들 유물을 통해 최소 고려 중/후기에 세워졌다가 조선 중/
후기 홀연히 망한 것으로 보인다.
허나 절터가 아주 쥐꼬리만한 것도 아닌 그런데로 면적을 갖추고 있다. 서울 주변에서 이 정
도 규모의 절이 조선 중/후기까지
있었다면 이름 두 자는 충분히 남기고도 남았을텐데, 그 이
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아틀란티스나 무우대륙처럼 소리도 없이 사라졌으니
그저 충격과 공
포일
따름이다. 마치
옆집이 없어지거나 죽은 것도 모르고 지내는 요즘의
인간 사막처럼 말이
다. |
▲ 방학동사지 2단 석축 (석축 서편에는 시멘트와 현대 벽돌이
섞여 있음) |
절이 망한 이유는 억불정책으로 인한 경영 악화도 있을 것이고, 주변에 도선사(道詵寺)나 천
축사(天竺寺) 등 쟁쟁한 절도 많았으며, 계곡을 낀 숲속이라 자연재해도 늘 도사리고 있으니
충분히 상상과 추측은 가능하다.
절이 사라진 이후, 터만 황량하게 방치되어 오다가 1970년대 이후 장수산악회에서 이곳에 체
육시설을 닦으면서 크게 훼손되었다. 아직까지도 문화유산으로 제대로 인정도 받지 못해 관리
의
손길마저 부실한 실정이다. 그래도 절터 석축과 맷돌이 간신히 남아있으니 눈썰미가 있다
면 이곳이 절터였음을 그런데로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
▲ 맷돌과 마애불이 있는 절터 서쪽 구역 |
방학동사지는 서울에 몇 없는 제대로 된 절터 유적으로 그
희소성이 크다. 현재 서울에 전하
고 있는 절터 유적으로는 이곳과 일원동(逸院洞) 절터, 북한산 향림사(香林寺)터 등이 있으며
, 그 외에는 이름만 남았다. (종로 탑골공원에 있던 경천사지는 10층석탑과 비석만 있지 절터
의
흔적은 싹 사라짐)
|
▲ 형태만 남은 절터 맷돌
맷돌 손잡이가 바쁘게 돌아가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저 맷돌을 통해 절 사람들은 음식을 만들고 공양을 했었다.
▲ 절터 1단 석축 평탄지에 조성된 무심한 체육시설들 |
터가 너른 1단 석축 위에는 법당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있었을 법당과 주변 건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법당 좌우에는 명부전(冥府殿)이나 선방(禪房)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고,
건물 크기도 다 고만고만했을 것이다. 그렇게 내 돌머리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옛 절
터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차피 정답은 없다.
절터를 무심히 짓누르고 있는 체육시설과 의자들을 싹 밀어버리고 이곳 일대를 뒤집어 제대로
된
발굴조사를 벌였으면 좋겠다. 혹시 아는가 이곳의 놀라운 비밀이 드러날지도. 지금까지는
그저
간보는 수준의 조사만 벌였기 때문에 토기나 도기, 자기 파편 정도만 수습된 것이다. |
▲ 마애불(磨崖佛)과 불상복원비 |
절터 서쪽 바위에는 늠름한 체격에 잘생긴 마애불이 깃들여져 있다. 이 석불은 옛 방학동사지
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존재로 동네 주민들이 장수산악회를 조직하면서 그 기념으로 1973년
5
월에 조성한 것이다. 절도 아니고 산악회에서 마애불을 만들어 봉안한 점이 이채로운데, 그들
은 이곳이 절터였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마애불은 이곳의 상징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켜왔으나 기독교 애들이 불상에 해코지를 하며 훼
손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하여 산악회 회장이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1993년 음력 4월에 불
상을 복원하고
불상복원비를 세웠다. |
▲ 가까이서 대한 마애불의 위엄 |
마애불을 살펴보면 윗쪽에 비를 막아줄 보개(寶蓋) 같은 것이 두툼히 씌워져 있다. 머리와 몸
통에는 각각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두텁게 달려있어 그를 윤기나게 빛내주고 있으며, 머
리는 민머리 스타일로 머리 정상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두 눈은 지그시 감았으며, 코는 약간 오똑하고, 다물
어진 입술에는 그런데로 미소가 피어나 있다. 볼살은 풍만하며,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어 중생들의 소리만큼은 정말 잘 들을 것 같다.
마애불의 체격은 매우 당당해 보이며, 오른쪽 어깨를 훤히 드러냈다. 손에는 보주(寶珠) 같은
것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었으며, 연꽃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
아 명상에
임한다. 그리고 대좌 밑에는 법륜(法輪) 2글자가 굵직하게 쓰여 있다.
이렇게 방학동절터를 둘러보니 어느새 19시가 되었다. 햇님의 퇴근 시간이 코앞에 이르러 동
네 마실은 이 정도로 흔쾌히 마무리 짓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여기서 집까지는
지척이라
30분이면 충분히 닿는다.
이렇게 하여 도봉산 방학동 구역 동네 1바퀴는 마무리를 고한다.
* 방학동사지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5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