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숨쉬는교회 주일예배/ 7. 3일
성경: 갈라디아서 6장 1 – 5절.
제목: 여러분은 신령합니까?
서론>
여러분은 자신이 신령하다고 생각합니까? 이렇게 제가 물으면, 신령하다는 말은 기독교 용어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신령하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무당이 점을 잘 치거나 외작두에 맨발로 올라가 잘타거나 퇴마를 잘하는 것을 두고서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또는 신령하다는 것은 인간 이성의 합리적 사고를 뛰어넘거나 인간의 능력 밖에 일을 행할 때, 우리는 그를 신령하다고 칭합니다. 다만, 무속과 기독교와의 차이는, 신령하게 하는 분을 무속인은 신내림을 받아서 자기가 모시는 신들, 즉 열두 신령에게서 찾지만, 기독교는 성령 하나님에게서 찾습니다.
그러면, 본문 1절에서 바울도 우리가 신령하다고 했는데, 환상을 보고, 방언을 말함, 귀신 축사, 예언, 병고침 이런 은사를 행하기 때문에 신령하다고 했을까요? 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속인들도 귀신의 힘을 빌어서 인간 이성을 초월하거나 인간의 능력을 뛰어 넘는 것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속인이 신령하다는 것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령하다는 것의 차이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뚜렷한 차이가 무엇일까요? 여러분, 무속인은 그가 육신이 좋아하는 대로 살더라도 점만 잘 치고 축 귀만 잘하면, 외작두를 맨발로 잘 타면, 신령하다 소리를 듣겠지만, 기독교인이 그가 아무리 환상을 보고 방언하고 예언하는 능력과 중보기도의 능력이 있고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과 원수 맺고, 분내고, 당짓고, 분열하고, 투기하고, 술에 취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탐욕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면, 그를 신령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육신을 따라 육신이 좋아하는 대로 사는 행위이기 때문에 결국 육신에 속한 사람은 될지언정, 성령의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육신대로 살지 않고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인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갈라디아 교회 내 특정한 사건을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6장 1절에 보시면,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이라고 가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 범죄는 5장 19절~21절의 죄의 목록일 수 있고, 고린도전서 6:9, 10절 죄의 목록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죄를 행하여 육신의 열매를 맺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출석하는 교회에 유부남과 처녀가 간통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두 사람이 모텔에 들어가는 것을 본 목격한 사람이 있었고, 저녁에 들어갔다가 새벽에 나온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다 직분자는 아닙니다. 새 신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불륜이 명백해 보입니다. 우선, 우리 사회법은 간통, 간음을 범죄로 처벌하지 않습니다. 민사상에 손해배상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간음을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습니다. 이럴 때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도, 성도들도 어떻게 이 문제를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 클 것입니다.
다행히 장로나 안수집사와 권사와 같은 중직자가 범죄한 것이 아니라서 안도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출석한 지 1년도 안 된 새 신자인데, 온 성도들이 이 사실을 다 알고 있다면, 만약, 이것을 담임목사님이 그냥 권면 정도로 넘어간다면, 같은 문제가 교회 안에 발생했을 때, 더구나 중직자가 그러한 일을 범했을 때, 목사님이 태도를 달리한다면, 새 신자는 봐주고, 중직자라서 엄하게 치리했다고 하면, 목사님이 너무 공정하지 않다, 정의롭지 않다고 비판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성도들은 그렇게 죄를 범한 형제의 허물을 모른 채하고 덮어주어야 하는지, 문제는 내가 그 범죄한 남녀를 잘 알고 있다면, 앞으로 그와 어떻게 교회 안과 밖에서 지내야 하는지? 에 대해서 난감해할 것입니다. 먼저 교회 밖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법적인 문제 외에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간통죄 폐지를 앞둔 2008년 주간동아지 인터넷 기사에 이런 제목이 올라왔습니다. “간통을 바라보는 여덟 개의 시선” 부제로는 법이냐, 윤리냐, 본능이냐? 로 기사를 썼는데, 그 여덟 개의 시선이란, 첫째 시선은 우리나라가 간통 천국인데, 간통을 법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허울뿐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시선은 성욕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이지만 결혼 안에서만 허용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남녀의 부적절한 행위가 타인이나 국가에 해롭지 않다면, 법적으로 규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넷째, 일부일처제로 묶는 것은 행복한 구속이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간통은 쌍방 과실로 생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여섯째, 남녀의 바람기는 유전자 탓이라는 것입니다. 일곱째, 결혼과 사랑 사이에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은 사람을 안심시키지만, 그 사랑이 문제가 생기면 일탈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덟째, 간통 가지고 윤리와 도덕 따지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녀의 불륜은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어 왔습니다.
이처럼 교회 밖 세상에서는 간음, 간통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기 보다는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간통죄는 2015년 위헌판결로 형법상으로는 폐지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간음, 간통한 성도를 엄격하게 다루는 것에 대해서 그래서 치리를 한다면, 시대착오적인 행동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간음과 간통을 한 당사자가 다름 아닌 여러분이 출석하는 교회 성도요, 더구나 여러분이 평소 가깝게 지내는 성도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갈라디아 교회에 바울이 권면한 대로 한다면, 이러한 문제는 본문 2절에서 서로 나누어져야 할 짐이며, 또한 5절에 보시면, 여러분 각자가 져야 할 짐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단서가 달려 있습니다. 본문 1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신령한 너희는” 바꾸어 말하면, 너희는 교회 밖의 무리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교회 밖 세상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가볍게 볼지라도 간음이, 간통이 형사처벌이 안 된다고 할지라도 너희 무리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신령한 무리라는 것입니다.
교회 밖 세상 사람들은 자기 가족이나 자기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으면 내 살기도 바쁜데, 남이사 하면서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저런 것들 하면서, 아주 차갑게 반응하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다가 자기 가족 문제가 되면, 가문의 수치라고 여기거나 대체로 시간이 지나면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너희 무리는 신령한 무리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무리입니까? 그것은 우리 각자는 신령한 몸이신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가족, 그리스도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의 아픔은 곧 아버지의 아픔이며 가족의 아픔이되고, 자식의 자랑은 곧 아버지의 자랑이며 가족의 자랑이 되듯이, 자식의 수치는 곧 아버지의 수치이며, 가족의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한 몸 공동체라고 부르지만, 교회에서는 성령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26절에서,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라고 하면서 27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가족이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면, 가장의 권위가 떨어져서 자식들이 아버지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한 가족은 지체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가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무관심하고 냉대하고, 범죄를 하게 되면, 범죄한 가족 외에 모두가 재판관이 돼서 정죄해 버립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곧 너희는 신령한 무리이며, 여러분 각자는 신령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부를 때, 형제들아 라고 한 것은 몸인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지체인데, 나도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서 너희는 나와 형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간음, 간통 문제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출석하는 교회에 새 신자가 간음하고 간통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이 전 교인이 다 알게 됐습니다. 그럴 때 바울은 교회가 무관심한 채 그냥 넘어가 버리라고 했습니까? 아니면, 그런 일이 우리 교회에 발생한 것은 교회의 수치요, 성도의 수치이기 때문에 범죄한 당사자들을 당장 치리해서 출교시켜야 한다고 했습니까? 설사 치리를 해서 출교는 하지 않더라도 교회에서는 범죄한 당사자들과는 말도 섞지 말라고 합니까? 그래서 나는 저런 간음이나 간통을 하는 사람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의롭다고 여겨야 합니까? 그러면서 여러분은 범죄한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신령하다고 여깁니까?
만약, 여러분이 정말 신령하다면, 이 일에 대해서, 그렇게 범죄한 당사자에 대해서, 그것이 간음이나, 간통이나, 우상 숭배든지, 술에 취하거나 방탕한 것인지, 시기와 투기이든지 간에 온유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당회는 온유한 마음으로 그러한 자를 치리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9절 ~23절에서 육신과 성령을 대조하면서 특히 23절에서 성령으로 행하여 맺는 열매에 대해서, 온유함을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5장 22절과 23절을 보시겠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우리는 성령의 열매가 9가지 일뿐 이라고 생각하지만, 여기 오직 이란 육신이 맺는 열매와 대조해서, “오직”은 강조입니다. 왜냐하면, 여기 열매라고 사용된 “카르포스”는 단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마음으로 그러한 자를 대하고 그 문제를 치리하라는 것은, 너희가 신령한 자다, 성령으로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신령한 지체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교회에 출석한 성도가 그러한 범죄한 행위를 내가 목격했다면, 그러한 자를 못 본 체하고, 내 문제 아니니, 괜히 문제를 들추어내서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으니, 그냥 넘어가라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잡아야 할 문제지 그냥 눈 감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당히 권면하고 훈방 조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를 몸인 그리스도의 지체로부터 잘라내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몸인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신령한 무리에 속한 사람이 되도록, 그가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이것을 반면교사로 삼으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너도 이러한 일로 시험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모두가 다 이러한 일로 시험받을 수 있는데, 재수가 없게 그 사람만 걸린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누구도 이러한 범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이러한 문제를 보면서 경각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서로 나누어져야 할 짐과 각자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져야 할 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사람이나 아니면, 다른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사람의 이러한 범죄에 대해서, 어떻게 대해야 하고, 처리해야 할지를 고민할 때, 그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을 때 그가 다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제 기능을 다 할 수 있도록, 회복하도록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를 회복하도록 도와주라는 것입니까? 바로 짐을 서로 나누어지라는 것이며, 너도 이 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족이라면 짐을 나누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져야 할 짐은 곧 나도 지고 가야 할 짐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아멘. 짐을 서로 지라는 것은 짐을 서로 나누어 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내 짐을 대신 져주셨습니다. 저주받은 내 죄의 짐을 지고서 내가 못 박혀야 할 십자가에 대신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모든 죄로부터 자유로우십니까?
나는 지금까지 죄를 짓고 살지 않았다고 할 분이 계십니까? 우상숭배는 범하지 않았지만, 시기하고 투기하고 탐욕스럽고, 원수 맺고, 싸우고, 분내고, 분열하고, 속여 빼앗고,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모욕하고, 마음으로 간음하는 일로부터 무죄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또한 그러한 범죄로부터 나는 무죄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나도 그러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지만, 성령으로 육신을 이기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범죄한 자에 대해서 서로 짐을 지라고 하는 것은, 그를 비난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듯이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리스도를 보내시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벌을 당하게 하신 것처럼, 그를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에게 돌로 그녀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불쌍히 여기셨던 예수님처럼, 그가 회복할 수 있도록, 그에게 시간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를 당장 치리대의 심판대로 세우기 전에 그가 이 일이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그래서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육체는 벌을 받더라도 그 영혼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보혈을 실제로 이 지상에서 성취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한번 2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모세 율법은 이런 간음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지만, 그리스도의 법은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가 자기 잘못을 깨달을 수 있도록 회개하여 회복시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그를 창피를 주고, 모멸감을 주고 그를 비난하는 것은 그래서 그에게 폭력을 가하고 아픔을 주는 것은,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짐을 그에게 지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은 자기를 스스로 속이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바울은 왜 이러한 행위를 두고서 스스로를 속임이라고 했을까요? 이것은 그렇게 죄지은 사람을 향해 비난하고 정죄하며 아픔을 주고 고통을 배나 더 가중시키는 자신은 자기만족과 자기를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누가복음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바리새인과 같은 태도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이 기도의 내용만 보면, 바리새인이 세리보다 더 신령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더 신령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구별 지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스스로 깨닫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불쌍히 여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리는 긍휼이 있었지만, 바리새인은 무자비하게도 긍휼이 없었습니다.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스스로 속이지 않았지만,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도 스스로를 속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해서도 안 되지만, 자기 자신을 너무 높게 평가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문제는 자기가 하나님이 보실 때 괜찮은 사람이면 문제가 안 되겠지만, 반대로 하나님이 보실 때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기만하고 나 자신도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본문 4절 말씀대로, 각자 자기 자신의 행위들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한 죄로 인해 실패한 사람들을 보면서, 시험에 넘어진 사람들을 보면서, 나에게는 그런 마음은 없었는지, 그런 행동을 한 적은 없는지를 자기 자신을 검증해 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나를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시험하여 행하지 않은 내가 자랑할 근거가 되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랑할 근거가 되는지를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져야 할 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아멘).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도 예외 없이 나의 생애와 행동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꽤 괜찮은 사람이며, 의롭게 살아왔다고 할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벌거벗은 것처럼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말씀은, 바울서신 곳곳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고후 5장 10절, 고전 3:12-13, 4:5, 살전 4:6, 롬 2:6-10, 16, 14:10 등에서
이 구절 중에 고린도후서 5장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 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아멘). 어떤 분은 이 말씀이 바울의 이신 칭의 또는 이신득의와 다르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하여 나의 자랑의 근거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여 검증받듯이, 마지막 날, 최후의 심판은 내가 신령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검증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그리스도의 법을 따라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왔는지, 아니면, 나 자신이 스스로가 법이 되어서 그 법을 따라 살아왔는지를 검증받게 될 것입니다. 몸인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몸을 위해서 선한 행실로 살아왔는지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왔는지를 검증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순종하여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왔는지, 아니면, 나 자신의 이익 때문에 순종하여 봉사해 왔는지를 검증받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말씀 한 곳 보시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2, -15절 말씀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과 같으리라.“(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