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홍 신부
사순시기 첫 주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조금은 심하다고 느껴지는
표현을 듣게 됩니다.
그분 주위에 모여 있는 군중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으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죄가 많은 죄인이라 하더라도 악하다는 표현을 듣고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분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자신들이 악하다고 하는데 그 자리에서 폭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됩니다.
그것은 분명 그분의 말씀이 그들을 단죄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경상도에서 좋아하는 여자 친구를 부르는 호칭 중에
“문디 가시나”라는 표현이, 여자 친구에게 하는 욕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못난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타지에 사는 사람들은 그 속에 담겨진 어감을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경상도 형제님과 사귀고 있는 전라도 자매님이 저에게 와서
어떻게 자기 여자 친구에게 문둥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하소연을 해서,
그 자매님에게 그것은 나쁜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라 정말 편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을 부르는
애칭이라고 설명해 줬던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악하다고 표현한 것은
단지 그들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향한 측은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 속에 담겨진 의미를 더욱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말을
그분의 삶에 비추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 그 당시 사회적으로 악하다고 일컬어지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외면받던 사람들, 곧 죄인들을 배척하셨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함께
머무르셨고 그들에게 용서를 베푸셨으며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대신해 변호해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더 많이 용서받는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그분께서 함께 하시는 죄인들이
용서를 통해서 하느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고 죄인들을 치켜 세우십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악하다고 표현하는 그 세대와 함께 계시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십니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둘 때 그분께서 이 세대가 악하다고 표현하시는 것은
군중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며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로 돌아오도록
회심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은
단순히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여러 가지 기적들을 기대하며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려고
안달하고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가르침들이 하느님의 뜻을 찾고 구하라는 것이었지만
군중들은 회개의 모습, 변화의 모습 보다는 예수님의 기적에만 매달려
기적과 가르침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 나라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했던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설교로 회개를 하였지만
이 세대는 요나보다 더 큰 이, 곧 하느님의 아들의 가르침을 들으면서도 회개보다는,
오히려 현세의 이익만을 추구하기에 악하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러한 마음가짐과 행실로부터 벗어나
니네베 사람들처럼 회개의 삶으로 돌아와 하느님의 자녀로 남아있도록 그들을 초대하십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기에,
이제 그분의 초대에 응하며, 참된 마음으로 뉘우치고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여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을 호기심 가득찬 눈으로 바라보며
‘기적’만을 바랄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진실된 마음으로 응답하여 그분께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에서 하느님께서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나는 너그럽고 자비롭도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게 될 때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기쁜 마음으로 그분의 품 안에 품어 주실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그분과 함께 참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부산교구 이주홍 신부
*************
김범연 미카엘 신부
요나 예언자의 표징
복음 : 루카 11, 29-32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당신께서 보여주실 수 있는 표징은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과연 무엇이기에 그 표징밖에 없는 것일까요?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오늘 독서에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고 타락한 대도시인 니네베로 갔습니다.
그 도시는 가로 지르는 데에만 걸어서 사흘이나 걸리는 큰 도시였습니다.
보통 사람이 여행하면서 하루에 10시간 정도 걸을 때, 걸을 수 있는 거리는
보통 100리, 약 40Km입니다.
그렇다면 니네베는 도시의 직경이 120Km정도나 되는 거대한 도시라는 말입니다.
서울시의 가로 길이가 40Km가 넘지 않으니 니네베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큰 도시에 들어간 요나는 하루를 걸어 들어가서 이렇게 외칩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어떻게 보면 어이없고 황당하기까지 한 외침입니다.
니네베의 죄가 커서 하느님께서 심판하시려고 하니
회개하고 용서를 청하라고 말해도 부족할 상황에서 단지 멸망할 것이라는 말 한마디만
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니네베 사람들은 왕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모두
하느님을 믿고 40일 동안 단식을 하며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정도로 죄로 가득 차 있던 그 니네베가
성의없어 보이는 예언자의 말 한마디에 그렇게 바뀔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기적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이유로 군중들에게 요나의 표징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사실 기적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일 뿐입니다.
기적은 어린 아이에게 사탕을 주어가며 공부를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 아이에게는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어린 아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무언가를 주어야 하지만 어른에게는 사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하느님을 믿는 데에는 기적이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또 우리는 요나의 표징에서 다른 모습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요나는 하느님께서 그를 예언자로 부르셨을 때, 하느님을 피해 도망갔던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는 하느님을 피해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타르시스 지방으로 배를 타고
도망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폭풍을 보내셔서 배가 가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배가 침몰할 지경에 이르자 요나는 이 모든 것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을 알고
바다에 자기를 던져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렇게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 빠진 요나를 하느님께서는 큰 물고기가 삼켜서
사흘 낮, 밤을 그 물고기 배에서 지내게 하셨습니다.
사흘 낮과 밤을 마치 죽은 사람처럼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며 회개한 요나는
새 사람이 되어 물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죽은 사람처럼 지낸 사흘,
이 모습은 우리가 아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와 거의 비슷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나의 표징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또한 미리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요나의 표징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너무 기적만을 바라고 살아오지 않았는지
반성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평소에는 우리 마음대로만 살다가 힘들 때, 기적이 필요할 때, 하느님께 매달립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기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단지 순간의 불편을 피해가기 위한 방법으로만 기억될 뿐입니다.
그러나 기적 없이도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기적은 하느님 현존의 증명이며 확인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에게는 믿음을 위해 기적이 따로 필요 없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를 달래기 위해 사탕이 필요하듯이 기적은 믿음이 약한 사람을 위한 영혼의 사탕입니다.
과연 우리 영혼은 어떨까요?
우리 영혼에게 기적이라는 사탕이 필요한가요?
아니면 그런 사탕을 먹을 나이는 이미 지나갔나요?
오늘 우리의 마음의 나이는, 우리 마음의 성장은
어디까지 왔는지 살펴보시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김범연 미카엘 신부
**********
이기양 신부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세상 만물은 관심 갖는 대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식사 때가 되어 국수가 먹고 싶으면 그 날은 국수집만 눈에 띕니다.
또 귀가 아파서 병원에 가야하면 이비인후과 병원만 눈에 들어오지요.
어쩌다 남편 옷을 사야할 일이 생기면 남자 옷가게만 보이는 이런 일들을
여러분들도 경험해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관심 갖는 것이 보이게 되어 있고, 관심이 없으면 아무리 많이 있고 또 여러 번 보아도
놓쳐 버리는 것이 우리 인간인 것 같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오늘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계시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늘 나라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여러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치시고 마귀를 쫓으셨으며 빵의 기적을 보이시며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을 전하고
말씀 안에 살 것을 가르치셨지요.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빵에만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 좀 더 놀라운 것을 보여 줄 것을 졸라댔습니다.
빵을 더 많게 해 주든지, 놀라운 기적으로 마귀를 쫓아내든지,
점령군 로마를 물리쳐주든지 하는 식이었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을 가르치시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와 더 신기한 기적을 청하며 자신들이 바라는 바를 요구할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군중이 계속 몰려들자 예수님께서 탄식하시지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루카11,29)
니네베 사람들에게 요나의 사건이 기적이 된 것처럼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들에게는
사람의 아들이 분명 기적이었을 것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완전히 삶을 바꾸었지요.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 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요나3,8)
그런데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요나보다 훨씬 능력 있고 권위 있는 하느님의 아들이 오셨는데도
회개하기는커녕 또 다른 기적만을 요구하였습니다.
너무나도 답답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그것을 직접 지적하여 말씀하시지요.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11,32)
니네베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솔로몬왕 때 세바의 여왕은 하느님과 함께 하며 하느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고자 멀고 먼 길을 찾아왔습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모든 지혜를 지켜보고 그가 지은 집을 보았다.”(1열왕10,4)
그런데 여기에 솔로몬왕 보다도 요나 예언자보다도 더 큰 사람,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가르치고 말씀을 전하는데도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거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진리를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군중들의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을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지만
사목자인 저 또한 사목을 하면서 똑같은 안타까움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수없이 가르쳐주어도 세상의 일에만 관심이 있는 신자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행하려고 하지 않지요. 그러니 하느님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을 큰 축복으로 생각하고 그 안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지요.
재물이 쌓이고, 지위가 높아지며 자녀 교육 등이 뜻대로 잘 되면 행복할 것 같지만
영적인 인간의 행복은 그렇게 육적인 것에서 채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갈증만을 느낄 뿐이지요.
끝없는 욕심은 집착을 부르고, 집착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게 만듭니다.
세상 것의 추구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목자는 세상만을 바라보는 신자들에게 눈을 들어 하느님을 바라볼 것을
거듭 요청하고 가르칩니다.
하느님을 만나면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많은 재물이나 높은 직위, 성공한 자녀 교육도 물론 축복이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그 이상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여러 가지 세상 것에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는 그것의 노예가 됩니다.
재물에 관심을 가지면 재물의 노예가 되어 돈벌이에만 끌려 다니게 되고,
자녀 교육에 관심을 가지면 점점 더 매달리게 되어 더 높은 점수,
더 좋은 학교에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건강이나 미모, 체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착하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고 결국 삶 자체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관심을 두면 다른 세상을 만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누리게 되지요.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2)
하느님 안에서 진리를 알게 되면 우리는 참 자유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신 이유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거나
세상에 없는 권위를 보임으로써 사람들의 놀라움을 표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능력을 보이고 가르치심으로써 하느님 안에 살 때
얼마나 자유롭고 참 평화를 누릴 수 있는가를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시고 괴로워하시는 이유는
아무리 가르치고 설명해도
사람들이 엉뚱한 곳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관심과 너무나 다른 곳에 있었지요.
“견월망지(見月忘指)”라는 한자성어가 있습니다.
“달을 보라고 가리켰건만 달은 보지 않고 내 손가락만 보는구나.”
하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시고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시며 하느님을 알려 주시고자
애쓰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의 의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의 갈증만을 풀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천 년 전 유다인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성당에 와서 간구 하는 여러분의 기도 내용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과연 내가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를 헤아려본다면 예수님의 오늘 말씀이 나와 상관없는
먼 과거의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 가정, 내 자식, 내 건강에만 관심이 있기에 예수님이 옆에 계셔도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며 자유롭지 못한 것이지요.
사람은 좋은 것에 집착하게 되어 있습니다.
집착이 나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집착할 것에 집착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느님 안에 마음의 중심을 두고 주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오늘 사순절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회개할 것을 거듭 요청하십니다.
회개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정화의 기간이요 회개의 시기인 이 사순절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관심이 이 세상의 것에서 하느님에로 승화되기를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