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구상의 권유로 대구로 내려온 이중섭은 1955년 4월 11일부터 16일까지 6일간 북성로 소재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가 끝난 후 곧바로 상경할 예정이었으나 외상으로 가져간 그림값을 수금해야 했고, 또 기대와 달리 전시회가 저조해 심신이 고달팠다. 향촌동의 백록다방에서 은박지로 그림을 그리며 소일하거나 음악감상실 녹향에서 무료함을 달래거나 지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기도 했으며 때로는 왜관의 구상 집과 태전동의 최태응 집을 찾아 몸을 추슬렀다.
이중섭 상(그림, 송영방)
왜관은 구상의 아내 서영옥이 순심병원을 개원하여 가족들과 함께 사는 집이고, 태전동은 최태응의 부인 김경애가 매천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안정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왜관에서의 생활은 “왜관 성당 부근” “구상 네 가족 2점” “낙동강 풍경” “자기네(이중섭) 가족풍경 등 5점의 그림을 통해 잘 드러나 있는 데 비해 태전동의 생활은 특정할 만한 그림도 확인되지 아니하고, 마을 이름도 잘 못 알려져 있다. 서규수(대구시 중국어문화해설사)의 그간 연구실적과 배석운(팔거역사문화연구회장), 도성탁(대구보건대 교수), 필자 등이 최태응의 맏아들 최수철의 학적부(매천초등학교)를 살펴보고 현장을 확인 한 바에 의하면 이중섭이 잠시나마 전원생활을 즐겼던 최태응이 살던 곳은 처음은 북구 학정로 82-52(태전동 459-5. 현, 숲속나라어린이집)이고, 두 번째 집은 같은 학정로 102(태전동 571. 현, 서동두채 즉 콩나물공장)이었다. 이중섭은 두 번째로 옮겨 간 집에서 기거했다.
최수철은 1951년 9월 7일 부산남부국민학교에서 매천국민학교로 전학해 1955년 3월 21일 제1회로 졸업했다. 따라서 최태응도 아들 전학과 비슷한 시기에 태전동(太田洞)으로 이사 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중섭은 밤마다 부인과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잠꼬대를 해 최태응 부부는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1956년 최태응의 부인 김경애 선생이 복막염으로 죽자 학교 부근 야산에 매장하고 이후 서울로 이사했다. 한 주민은 최태응의 형 일명 최 포수가 먼저 피란 와서 원대동에 살았다고 한다.
조선일보(2016년, 7월 4일)는 미국에 거주하는 최태응의 차녀 은철씨가 부친의 일기장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이중섭의 미공개 자작시 6점과 그림 3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1955년 이중섭· 최태응이 살던 집터
인터뷰에서 그녀는 “아침마다 시골길을 산보(散步) 갔다가 돌아오면 늘 저를 업어주었던 아저씨(이중섭)의 넓고 편안했던 등이며 우리 아버지(최태응)가 사다 준 그림물감을 가지고 아저씨가 동네 연못가에서 그림을 그리시던 모습 등이 제겐 모두 소중한 추억”이라고 했다. 또 다른 자료는 태전동 시절 이중섭은 소 그림 한 점을 매천초등학교에 주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새벽부터 일어나 길에 버려진 쇠똥을 치우고 밭에 묻고 했다. 그랬기에 그 일대의 사람들은 모두 다 중섭을 너무 잘 안다.” 했고 “소를 사랑했던 이중섭은 시골의 소에 눈길을 주었고 그래서 작품 ‘소’를 그려 매천초등학교에 주었다.” 고 했다.
이런 정황을 보면 소 그림 한 점과 그가 대구에서 그린 것으로 알려진 “우리 안에 든 청조(파랑새)” “병든 새” “열리지 않는 창” 거꾸로 서 있는 동자상“ “달과 해“ 중에서 ”우리 안에 든 청조“는 태전동에서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더불어 이번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기로 한 미발표작 3점을 포함하면 5점 정도가 태전동에서 그려진 것 같다.
특히, <이중섭의 생애와 예술>의 석사학위 논문을 쓴 조정자는 “우리 안에 든 청조(파랑새)”에 대해. ‘우리 안에 같혀 있는 청조(파랑새)는 이중섭 자신을 표현하고, 복숭아꽃도 가지가 꺾여 있는 것을 보면 절망스러운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해 이를 뒷받침한다. 그 얼마 후 이중섭은 정신이상 증세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즉 서울에 이어 대구에서도 성공하지 못한 전시회, 가족과 함께할 수 없는 외로움, 밝지 못한 장래, 자신을 옥죄는 가난 등 이중섭 자신의 불운한 모습을 잘 표현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태전동에서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 안에 든 청조(파랑새)”
이 작품을 태전동에서 그려졌을 것이라고 보는 또 다른 이유는 당시 일대에는 큰 복숭아밭이 있어 그림 속의 가지가 꺾인 복숭아꽃은 이 복숭아밭에서 영감을 얻었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외도 이중섭의 그림 중에는 “사과 따는 남자” 등 사과를 주제로 한 그림이 있는데 그 그림 역시 태전동에서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서울, 제주, 통영 등에는 사과가 널리 재배되지 아니하였던 반면에 태전동은 복숭아, 사과재배가 활발했던 곳이다.
태전동은 그때와 달리 상전벽해로 변했다. 복숭아밭도 없어지고 최태응과 이중섭이 함께 살던 집도 헐리고 새로 지워졌으며, 그림을 그리던 연못은 고층 아파트단지가 되었다. 그러나 옛 모습이 다소 남아있는 골목에는 어쩌면 그들의 자취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표석, 조형물, 벽화 등을 조성해 국민화가 이중섭과 한국 휴머니즘 문학의 기수 최태응을 다시 불러왔으면 한다.
많은 이중섭 연구자들은 이중섭의 칠곡 거주를 매천동이라고 하는 사실도 바로 잡아야 한다. 최태응의 부인 김경애 선생이 매천초등학교 교사였던 까닭에 생긴 오해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이중섭의 대표작 “흰소”
대구에서 이중섭을 말하면 최태응이 뒤따라 붙는다. 두 분이 이북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는 황해도, ‘이’는 원산으로 고향이 다르고, ‘최’는 소설가이며, ‘이’는 화가로 장르도 다르다. 그런데도 ‘이’와 ‘최’가 같이 경복여관에서 묵었을 뿐 아니라, ‘이’가 ‘최’에게 정신이상 증상에 특효약이라며 해골을 구해달라고 부탁한 막역한 사이이고, 1남 3녀가 세 들어 사는 태전동까지 불러 물감을 지원해 주고, 입원한 이중섭의 간병(看病)은 물론 입원비까지 부담하는 호의를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이야기를 발견할 수 없다. 이중섭이 부산 범일동에서 피란살이를 할 때 이웃에 살며 쌓은 남다른 친분 때문일까? 아니면 두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친화력일까 상상해 볼뿐 이다.
최태응(1916~1998)은 이중섭과 동갑으로 황해도 은율의 부유한 집에 태어나 일본 니혼대학을 졸업했다. 탁류의 작가 채만식의 지도로 24세에 “바보용칠이” 등을 『문장』에 발표하여 데뷔했다. 그는 피란지 대구에서 매일신문에 장편소설 <낭만의 조각>을 연재하기도 했다. 친구와 술을 좋아해 고료를 받으면 백록다방 등을 전전하다가 술집으로 향했다. 그에게 소설수업을 받은 대구 출신의 소설가 윤장근은 “유순한 데다 정이 많다 보니 따르는 여인도 많았다. 대구에서도 몇 사람의 여인이 그의 주변을 서성거렸다. 이상하게 최태응은 모성애 같은 여성의 본성을 자극하는 데가 있는 사람이다.”라고 인물평을 했다. 가정을 소홀히 하며 친구와 술을 좋아했다는 풍문이 사실인 것 같다.
동촌유원지
그의 대구 출현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하늘과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그의 또 다른 제자로 미국에 거주하던 최태응과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임도순(대구여성문학회 초대회장 역임)씨에게 최태응·이중섭 두 사람에 관한 일화를 듣기 위해 전화를 시도했으나 대화가 이어지지 못했는데 그 얼마 후 작고해 아쉬움이 남는다.
매남마을 배상권(82)씨의 증언도 흥미롭다. 어느 날 지게를 지고 나무하러 가든 한 허름한 사람으로부터 즉석에서 연필로 그려 준 그림 한 점을 받고 책갈피 속에 간직해 두었는데 몇 년 후 헌책을 모아 불쏘시개로 쓰고 난 후 그가 이중섭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그때가 1951년이라고 하는데 이중섭 연구의 어느 자료에도 그해에 이중섭이 대구로 왔다는 기록이 없다. 배상권씨의 기억 1955년의 착오가 아니라면 1952년 6월 26일부터 7월 5일까지 대구 미국공보원에서 김병기, 정규, 한묵, 문선호, 윤중식, 김형규, 황유엽, 신석필, 이중섭(출품작, 소년들) 등이 참가하는 <월남화가 작품전>이 열렸는데 부산에 거주하던 그가 이때 잠시 대구에 와서 태전동을 방문했을 수도 있다. 이렇다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중섭에 대한 새로운 역사(?)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