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외환시장 대수술… 환율 안정성에 '기대 반 우려 반'
해외 금융기관 국내시장 참여 허용… 운영시간도 새벽 2시까지 연장
“접근성 높이고 안전성 키운다”지만 일부에선 “거래 쏠림현상” 우려도
“국내에 지점을 두지 않은 해외 금융기관의 국내 외환시장 참여를 허용하고, 외환시장 운영시간도 런던시장 마감 시간에 맞춰 현재 3시 30분 마감에서 새벽 2시까지 10시간 연장한다. 이와 함께 외국인 투자자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투자자 등록 의무를 폐지하고, 일정 자산 규모 이상의 기업은 영문공시를 확대하도록 한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외환시장 구조개선 및 선진화 방안’의 골자다. 기획재정부는 2월 7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서울외환시장운영협의회 세미나에서 이 방안을 공개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충격 이후 20년 넘게 폐쇄적으로 운영한 외환시장을 개선한다는 취지다.
우리나라 무역규모나 자본시장은 선진국 수준의 괄목할 성장을 거뒀지만 외환시장은 해외 투자자들의 접근이 제한되는 등 상대적으로 정체돼 있다는 지적에 따라 대대적인 수술에 나선 것이다.
●20년 묵은 외환시장의 기형적 구조를 바꿔라 = 김성욱 기재부 국제경제관리관(차관보)은 이날 개회사를 통해 “우리 외환시장은 과거 외환위기에 대한 트라우마로 시장안정을 정책 최우선에 두면서 수십 년 동안 폐쇄적이고 제한적인 구조를 유지해왔다”며 “외부로부터의 접근성이 제약 받고 이로 인해 국내 시장과 산업의 발전이 정체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한국 외환시장은 무역이나 경제규모 맞지 않는 기형적 구조라는 지적이 많다. 2021년 12월 50여개 글로벌 투자기관을 대상으로 실시한 외환시장 접근성 설문조사에서도 해외 소재 외국 금융기관이 국내 은행 간 외환시장에 직접 참여할 수 없고 원화의 역외 외환시장 거래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지적됐다. 또 달러나 유로, 엔화 등 주요국 통화가 역외에서 24시간 거래되는 것과 달리 현재 한국 외환시장은 오전 9시에 열어 오후 3시 30분까지만 운영하고 있다.
김 차관보는 “IMF 외환위기 이후 무역규모나 자본시장은 빠르게 성장했지만 외환시장은 여전히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의 외환시장이 한국의 무역이나 경제규모에 비해 폐쇄적이고 제한적이어서 외환시장이나 자본시장 자체의 성장은 물론 한국경제의 성장도 가로막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연간 무역규모는 1997년 2802억 달러에서 지난해 1조4159만 달러로 5배 넘게 커졌다. 같은 기간 주식시장 거래량도 하루 평균 6억 달러에서 124억5000만 달러로 불었다. 이에 반해 원·달러 현물환 거래량은 1997년 18억3000만 달러에서 2008년 78억1000만 달러로 확대됐지만 이후에는 성장세가 둔화하며 지난해 90억4000만 달러 수준에 머물렀다.
글로벌 외환시장과 역외 차액결제선물환(NDF) 시장도 기술혁신 등을 바탕으로 빠르게 발전하면서 국내 외환시장과 격차가 벌어졌다. 특히 외국 금융기관의 국내 외환시장 접근성 제한으로 역외 NDF 시장이 기형적으로 성장했다. 2013년 현물환시장 하루 평균 거래규모는 194억 달러로 NDF 거래(196억 달러)와 비슷했지만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NDF 거래(601억 달러)가 현물환시장 거래(303억 달러)의 두 배에 달했다.
▲오재우 기획재정부 국제금융과장이 2월 7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글로벌 수준의 시장접근성 제고를 위한 외환시장 구조 개선 방안 세미나’에서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
김 차관보는 “폭이 좁으면 유속 빨라지듯 2008년 선박 수주가 호황이던 시기에 조선사의 막대한 선물환 매도를 통해 환율이 지속적인 하락과 절상 압력을 받았다”며 “2018년 이후부터는 개인과 연기금의 해외투자가 확대되면서 대외 환율 상황과는 관계없이 우리 원화는 지속적인 상승, 절하 압력을 받고 있다”고 진단했다. 일방향 거래 유형의 규모가 커져 국내 외환시장의 좁은 문을 관통하게 되면 환율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과거에 비해 지나치게 확대되고 있다는 뜻이다.
김 차관보는 “외환은 나라 안과 밖의 자본이 왕래하는 길”이라며 “나라 밖과 연결되는 수십 년 된 낡은 2차선의 비포장도로를 4차선의 매끄러운 포장도로로 확장하고 정비하고자 한다”고 비유했다. 그는 “지금과 같은 낡은 도로로는 그간 비약적으로 확대된 이동 수요를 감당할 수도 없고, 좁은 도로 때문에 안정성이 오히려 위협받을 수 있다”며 “무엇보다 불편한 도로 여건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접근성이 제약받고 이로 인해 국내 시장과 산업의 발전이 정체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는 외환시장 접근성을 글로벌 수준으로 제고해나가고자 한다”며 “당국과 시장의 규율에서 벗어나는 역외 외환시장에서의 원화거래는 여전히 허용하지 않는 대신 국내 외환시장을 보다 개방적이고 긍정적인 시장구조로 전환하겠다”고 덧붙였다.
●외환시장 안정성 높아진다고는 하지만... 위험도 상존 = 정부는 외환시장 구조 개선 및 선진화를 통해 중장기적으로 시장 자금 유입이 늘어나고 원화 표시 자산 매력도도 올라가는 한편, 국내 금융기관의 사업 기회도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국내 무역업체의 경우 심야시간대까지 시장 참여(환전 및 외환거래 등)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 모로 기대감을 갖게 한다.
국내 개인 투자자의 경우 야간에도 시장 환율로 바로 환전해 해외 주식에 투자할 수 있게 된다. 그동안은 야간에 환전하면 시장 환율보다 높은 가(假)환율로 1차 환전되고 다음 날 외환시장 개장 후 실제 시장 환율로 정산을 받아야 했다. 이 경우 원래 계획했던 수량만큼 해외 주식을 매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 불편함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외환시장 변동성에 대해서는 낙관과 우려가 교차한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역외 거래를 완전히 자유화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효과는 상당히 근접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외국 금융회사들이 서울 외환시장에 들어와서 외환거래를 하면 그만큼 외환시장의 유동성을 확대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다음 아마 일상적 거래에 있어서는 변동성도 줄어드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외환시장 개방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있다. 외국 금융기관의 참여가 자유로워지면 투기성 자금 유입이 많아져 원/달러 환율 변동성이 오히려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개장 시간이 연장되면 거래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야간시간대에는 ‘쏠림 현상’이 심해질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석재 한국무역협회 트레이드프로 외환전문위원은 “국내은행이나 기업이 현실적으로 야간에 얼마나 거래를 할 것이냐 하는 데에는 물음표가 있다”며 “심야시간 대에 역외세력들이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다는 점은 시장이 역외세력에게 휘둘릴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한데, 이 점에서 외환시장 변동성이 높아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하지만 외환거래 시간 연장은 시장에서의 거래가 촘촘해진다는 측면에서 안정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정부의 설명도 설득력은 있다”며 “양면성이 있다”고 봤다. 실제로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문영선 하나은행 외환파생상품운용섹션장은 “야간 시장은 열어 놨는데 국내 외환시장에 외국 금융기관이 활발하게 들어오지 않을 경우 시장 유동성은 없고 호가 스프레드가 벌어져 시장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는 충분한 안전장치를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일정 요건을 갖춰 정부 인가를 받은 외국 금융기관만 외환시장에 참여하도록 하고 단순 투기목적 기관의 참여는 불허하는 방식이다. 또 시장에 참여하는 외국 금융기관은 반드시 국내 외국환 중개회사를 경유해 거래하도록 해 당국의 거래 모니터링·시장 관리 기능을 유지하기로 했다.
이번 외환시장 구조 개선 방안 시행 목표 시기는 내년 하반기다. 정부는 앞으로 공론화와 법령 개정, 은행권 준비 등을 거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