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경계를 다 지운 하염없는 눈
은곡에 갇혀있는 오늘은
사무치게 황홀하다
더 두껍게 껍질을 쌓아가던
처마 끝 송곳 고드름들도
자라기를 멈추고 꼼짝 않은 채
눈의 길을 보고 있다
눈의 가면 속에서 모든 것은 새 모습으로 태어나고
속계도 없이 허물어진 세상의 담은
깨진 침묵처럼 아름답다
마음 지키던 돈등화의 온기마저 사라지고
꿈의 장강으로 침수하는 부표 같은 눈송이들
어느 해 겨울, 얼음 기둥이 되어
하늘로 꽂히던 직소폭포
가는 길은 지금 어디쯤 숨어있을까
갑자기 기억의 꽃들 일어섰다 쓰러지고
나는 그 꽃을 들고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어디에서 오고 있는 것일까
끊임없이 떨어지는 눈의 폭포는 바다를 이루었는지
이상하다. 눈 한 송이 보이지 않는다
연비를 찍으며
날개 접은 시간들 모여있는 낡은 골동품 가게
먼지도 숨죽여 내려앉은 구석 한 켠
조용히 웅크려있는 대바구니
한세월의 다리를 건넌 침묵 속에
검은 우담바라가 피어있다
난 모질게도 그 꽃의 흔적 무참하게 지운다
바구니 틈새마다 숨어들어 간 화문들
꼼꼼히 후비어 파낸다
물에 녹고 흩어져 버려지는 아픔들
한 사람의 생애가 이생에 머물러있는 시간은
처절하지도 않게
먼저 떠난 빛의 흔적을 좇고 있다
내밀히 숨겨졌던 뜨거운 상처마다
더욱 짙게 피어난 검은 우담바라
오늘 나는 본다
애초 필 수 없던 꽃
피더라도 사랑이 될 수 없던 꽃
환부의 검은 연비를 내 가슴에 찍는다
영화를 보고 나온 낮, 한 시
거리는 바삭거려
눈알을 바꿔껴야 제대로 보이는 시간
거꾸로 선 사람들이 뜨거운 프라이팬 꼭 쥐고
어디론가 타닥타닥 튕겨가고 있어
어둔 공간에 갇혀 한시적으로 누렸던
비겁하거나 우울한 고독
또는 화려한 본능의 법적 탈출
뭉클뭉클 무더기로 풀려나온
검은 꿈들이 뜨거운 바람에 압사하고
머리에는 이유 모를 구토증이 사막의 햇빛처럼 이글거리지
난 그저 조금 즐겼을 뿐이고 아주 조금 자위했을 뿐인데
길거리는 고비사막에서 진출한 황사들로 메꾸어져 있어
이런 뿌연 하늘이 차라리 좋아
살았던 내가 죽기에는 죽었던 내가 살아나기에는
이끼 오른 삶의 껍질들 뭉클뭉클 벗겨지고
외발로 간신히 붙어있던 환상의 거품마저 날아가는 시간
사람들, 녹의 기둥을 붙들고 급히 이동을 서둘고 있다
질경이 뿌리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으로
굳이 한적한 곳 피해
딱딱하고 굳은 땅
사람들 발길 잦은 곳에
서로를 얼싸안고 애써 뿌리내린 질경이
단단한 발길에 짓이겨질 때
비로소 희열을 느끼는 가녀린 생명
예견되지 않는 불안한 삶에
땅 속 깊이 목을 푹 박고 있다
목덜미 깊은 곳으로
번득이며 들어오는 은빛의 칼날
절명의 순간에 질경이들은
여러 겹 껍질의 문을 열며
낱잎파리로 흩어져버린다
땅 속에 묻어둔 눈물의 뿌리 끌어올린다
잠 못 이루고 뒤척인 울음기가 마르기도 전에
마른 흙에 칼을 갖다댄 모질음.
약이라고 먹은 질경이가
삼켜지지 않는 목울음 되어
저 보다 더 깊은 뿌리
돌 틈 구멍마다 쑤셔박는다
무인속도측정기
까딱, 신경을 늦추면 찍히고 말지
무인속도측정기
빗속을 달리다 오갈 데 없이 비속해지면
찍히는 새벽 두 시의 무차별 속도
찍히고 싶지 않았어
은밀히 둘러친 챠도르 속에서
밤 밝혀 치닫고 싶었어
손톱 길게 세운 세기의 여자
조이너스가 되어
숨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뛰고 또 뛰어 드디어 닿는
흰색의 결승선까지
그런데 젠장, 재수없어 캭 찍히고 말았지
네 입 속에 꿀꺽
속도를 낸 것도 아니야
백 미터 달리기를 했을 뿐
이제 막 오르가슴의 실크로드를
달리려고 한 것뿐인데
항상 덫은 검은 고양이 눈으로
도처에 숨어있다
<시인수첩>
거미집에 걸린 하얀 시
시작이 반이다, 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 반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우선 시작하고 싶다는 열정이 목울대 가득 넘쳐 자신을 흔들어야 하고, 그 열정을 튼실하게 뒷받침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야 하고, 때론 무모한 용기와 거친 힘으로 태산과도 부딪히고 어떤 굴헝에 빠져도 절망을 가져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은 용기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며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칠 개월 전 나는 그 행복을 꿈꾸며 내가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다 지우고, 다 버려 새로운 시작이라고 마음 할 것은 없지만 힘차게 솟구치는 하나의 폭포를 찾아, 그 폭포가 별이 되어 흐르고 무지개로 일어서는 계곡으로 이사왔다. 헌걸차게 살아가리라던 소망을 접고 조용하고 끝없는 신생을 거듭하는, 죄의 열매 대신 구원의 열매 넝쿨 무성한 흙의 세상으로.
봄이 되어 텃밭을 괭이질하고 호미로 흙을 잘 골라 퇴비를 골고루 뿌리고 호박이며, 상추며, 깻잎이며, 아욱, 치커리, 고추, 감자, 근대, 옥수수, 가지, 토마토, 부추, 토란 등등 많은 씨앗들을 심었다. 마당에는 잔디를 그 가를 돌며 라일락, 목단, 애기사과, 산수유, 은행나무, 살구나무, 자귀나무, 호랑가시나무, 동백나무 등등을 심었다. 행복을 깊이깊이 식재하면 나의 행복이, 나의 사랑이 땅 밑으로는 쭉쭉 뻗고 땅 위로는 주렁주렁 열리리라 여기며.
나는 행복한가, 그것마저도 불안해 땅을 깊이 파고 퇴비 듬뿍 넣어 두 발로 꼭꼭 밟아 쓰러지지 않도록 지주목까지 세웠다.
여기저기 많은 잡초들이 무성해지기 시작했다. 잡초들은 조금의 습기와 온기만 있으면 잘디 작은 뿌리를 내려 자기를 키운다. 보이지 않는 그들의 용기와 투쟁은 감히 따라가기 힘들다. 그러나 나는 작물들의 성장에 조금이라도 방해되는 세력들은 가차없이 뽑아버렸다. 그렇게 몇 달을 힘들게 손톱이 무디어지도록 일했다. 풀들은 소리 없이 죽기도 했지만 때론 악착같이 살아남아 빗속에 앙상한 다리들을 드러내고 땅 속에서 목이 뜯긴 채로 버티다가 힘들게 새순을 올리기도 했다.
아, 내가 바람에 가벼이 실려온 풀씨라고 하찮게 생각했구나, 모질게 그들의 행복을 뽑는구나. 나의 행복도 어느 누군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뽑아버릴 수 있겠지. 모처럼 시작한 꿈이, 사랑이, 이 앙다물며 포기하고 선택한 용기들이 가뭇없이 사라지겠지. 나의 가슴은 잠자고 있던 불안으로 가득 차고 마음은 태풍 속 여린 나뭇가지처럼 흔들린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행복을 뽑는 자는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나임을,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불안을 초록의 대지에 꼭꼭 심고 있었음을 알기 시작했다. 절망의 나선운동이 광대한 우주쇼처럼 펼쳐지고 다리를 벌린 거미처럼 나를 덮쳤다. 희미하게 타오르던 육신의 초롱불마저 꺼져 캄캄한 슬픔들은 커다란 입을 벌리고 흙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의 행복을 일순 덮어버린 눈발은 따뜻하던 세포들을 눈물 속에서 부유하게 했다.
어느 틈엔가 산이 하나 생겼다. 그 산은 중력의 끈질긴 힘에서 벗어나 맨살의 영혼을 점령하고 생의 부표를 침수시켰다. 깊은 어둠 속에서 스산한 꿈들이 일어서지 못해 쟁쟁 다투는 소리만이 귀에 윙윙 거렸다.
신열이 났다. 온 몸에는 무당벌레의 까만 점들이 웅성거리며 발기하고 빗장 풀린 나는 한달음에 가시 등성잇길 넘어 산의 끝에 능선처럼 엎드려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 있나.
감정 때문에 일어난 많은 일들이 생각나고 닦지않아 생긴 먼지들이 보이고 마음에 가득 낀 암영들이, 욕심의 수만큼 많았던 삶의 함정이나 구멍들이 여기저기 뚫렸다.
시간의 힘이다. 세월은 일어선 것을 누이고 스러진 것들을 돋아나게 한다. 세월은 없던 것을 있게 하는가 하면 있던 것을 떠나게도 한다. 그렇다. 나는 그 시간 속에 불꽃처럼 저 혼자 타고 있었던 것이다.
*
나는 언제나 ‘시 속에 살고 있다’고 ‘시처럼 살고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구태여 손과 언어의 힘을 빌어서 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사금파리 같은 내 삶이 곧 시라고, 삶을 시처럼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쓰는 것을 부정하면 하는 만큼 내 속에는 시의 잎과 줄기가 자라고 있었으며 내가 입을 열지 않은 만큼 그는 장명등이 되어 스러지는 나의 빛을 지켜주고 있었음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내가 오만을 떨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눈 부릅뜬 장승으로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나를 굳게 지켜주는 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시는 구원이 되어 큰 팔을 한껏 벌려 저의 깊은 품에 나를 온전히 보듬고 있음을 고통의 징검다리를 건너 또 다른 고통의 징검다리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한숨 돌리고 나면 느끼곤 했다. 그러나 그뿐 난 또 시의 존재를 언제나 변함없이 주위를 싸고 있는 공기나 물처럼 잊어버리곤 했다. 잠시, 여름 햇살을 받아 몸 전체를 앞뒤 없이 흔드는 미루나무를 볼 때면 시가 가까이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언제나 적당한 거리에서 나를 관망하는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
많은 봄꽃들이 피었다 지고, 산의 움직임이 조용해지고, 알게 모르게 여름꽃들이 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유월의 어느 화요일이었다. 이곳으로 이사온 지 몇 개월 되지 않아 사람도 길도 서툰 나에게 화요문학회란 곳에서 주최하는 ‘이 달의 시인’이 있는데 같이 가보지 않겠느냐는 이가 있었다. 머뭇거리는 나에게 그 사람은 우유부단한 내 성격을 눈치라도 챈 듯 단호한 목소리로 같이 가는 걸로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것은 그냥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가 나를 아주 가까이 부르기 위한 소리였다. 비겁하게 삶의 맨 밑바닥에 납작하니 엎드려 자고 있는 나를 꿈결같이 흔들어 깨우는 그의 다감하고도 매서운 목소리였다.
행사는 진주시에 있는 진주문고 북카페라는 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차창 밖의 사위는 굴풋한 내음의 이내에 감싸이기 시작해 오랫만에 은빛강 흐르는 고향으로 가는 듯 마음을 감미롭게 했고, 백킬로 넘게 달리는 자동차의 속도는 그런 나의 마음을 가속화시켰다. 젖었던 영혼이 아지랑이처럼 피고, 뜬구름처럼 여기저기 하늘을 떠돌았다.
나는 자고 있었어. 자는 시늉을 했던 것은 아니야. 하지만 이렇게 빨리 잠이 깨다니!
꿈결에서도 나는 그의 정원 뒤뜰 어느 구석에 사계절 내내 꽃으로 피어나기를, 바람결에 사랑의 꽃말들 마구마구 흩뿌릴 수 있기를, 죄의 바늘에 찔리고 게으름의 녹에 절은 몸이 사실은 청명한 소리 가득 채운 푸른 종이 되어 늘 맑은 소리 하늘 끝에 울리기를 기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진주문고는 대형서점이었다. 이층 한 구석에 있는 아담한 북카페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작은 공간에는 비상하던 새 떼들이 보이지 않게 날개접고 숨죽여 앉아있었고 적막은 홰를 치며 일어서고 있었다. 시끄러운 적요, 소리 없는 일렁임, 한순간에 내 몸의 모든 기능들이 정지했다.
이름도 예쁜 은현리에 사는 정일근 시인이 거기 있었다. 그날 정일근 시인은 아주 많은 시 얘기를 했다. 시와 한몸이 되기 위해 시를 쓴다는 시인. 끝까지 자신에게 등돌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주머니에 남아 자신을 구원해준 시에게 귀의하기로 했다는 시인. 은현리에서 새로 입학한 초등학생이 되어 자연이 불러주는 ‘문학 교과서’를 새로 읽고, 연필에 침 발라가며 받아쓰기한다는 시인. 받아쓰기를 위해 나무와 꽃과 새와 벌레의 이름을 불러 준다는 시인. 시인은 그들만을 불러준 게 아니었다. 나도 함께 불러주어 나 또한 그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해준 것이다.
*
집에 와서 나는 그 동안 읽지 않았던 시집을 우선 읽기로 마음먹었다. 기억에 남아있는 시집들도 다시 읽었다. 자서를 읽고 해설을 읽고 평을 읽은 후 목차에 씌어진 제목을 읽을 때는 무슨 의식을 행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경건한 마음까지 들었다. 제목을 읽으면서 아직 읽지 않은 내용을 상상하는 즐거움은 청청한 진동으로 숨죽인 내 몸을 전율케 했다.
음미하고 속으로 낭송하고 다음은 소리내어 읽고. 빈 공책에 받아쓰기하듯 옮겨적다 보면 작가는 뚜벅뚜벅 걸어가 한순간에 시의 초례청으로 녹아들고, 홍역의 흔적 같은 발자국을 무덤 같던 가슴에 선명히 남긴다.
*
죽음 같은 옹벽을 저승새나 날아와 앉을 만큼 높게 치고, 꽃등을 켰던 꿈들이 무심히 사라져간 해저물녘 하늘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눈으로 응시하는 게 몇해 전 나의 유일한 일거리였다. 야심에 찬 통증마저 주검처럼 납작하니 엎드려 잠자듯 쓰러져있는 내 붉은 영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 주위는 온통 검은빛이, 검은색이 에워쌌고 나는 역병을 얻어 금방이라도 죽음을 맞이할 것처럼, 눈물마저 담근질 당해 찢어진 간장이 녹아내려 검은 물방울로 흘렀다.
아이들의 몸은 원인 모를 병으로 모닥불처럼 뜨겁게 타고 희망의 비늘들은 눈꽃처럼 녹아 기다림의 바다를 검게 덮어버렸다. 차라리 신에게 구원의 죽음을 기약받을 수만 있다면 내 삶의 반쯤 남은 기둥쯤이야 통째로 뽑혀도 좋았다. 어금니 질끈 깨물고 오늘만 살았다. 내일을 생각함은 입을 수 없는 옷, 변수를 알 수 없는 사치였다.
나는 검은 옷을 입기 시작했고, 검은 시를 쓰기 시작했다. 마음에도 검은 꽃의 싹이 피어 의좋은 오누이처럼 색감은 짙어져 갔다. 내가 품는 것은 모두 검은 새순을 밀어올렸고 검은꽃을 피워 검은 종자를 남겼다. 어둠의 화단에는 검은 바람이 불어, 꽃들은 바늘 같은 상처를 쓸어안고 제 살 속의 인을 태우며 비명도 없이 흔들렸다.
나는 파계의 실날을 품은 ‘거미’ 연작시를 썼고, 건조한 화석으로 남는 ‘낙엽’을 썼고, 검은 옷 입고 빛으로 나아가는 여자, ‘아십니까’를 ‘거울’을 ‘탑’을 공중을 부유하며 속계와 선계를 넘나드는 ‘연’을 밝아지지 않을 어두운 문체로 써나갔다. 돌아보지 않으리라 마음먹은 검은 씨앗의 화단, 어느 날 어둠의 길이 열려 홍옥같은 비 내리고 있었다.
기울대로 기운 소멸의 닻이 스러지고 희망의 티끌이 불처럼 일어나 깊고 음습한 잠이 지배하던 어둠을 밝히기 시작했다. 벌거벗은 생채기들이, 침묵의 눈물들이 소금인형처럼 녹아 검은빛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날은 신으로부터 죽음의 기약을 해제 받은 날이었다. 원인 모를 병은 성자의 몸을 빌어야 천명으로 개화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 날이었다. 검은 빛 속에, 검은 색 속에 무지개가 들어있었다니! 조용히 일어나 제 키를, 제 살을 키우는 꽃들.
*
검푸르게 일렁이는 시의 바다에 빠지는 일은 눈부신 자맥질을 하게 한다. 시와 매일을 사는 것은 내가 시가 되는 일이다. 시가 되기 위해서는 매일을 시와 함께 살아야 한다. 이제 눈물과 허물과 아픔과 꿈으로 무수히 못질한 기둥에 함초롬히 불 밝혀 걸려있는 지등의 맨살, 비로소 만져진다.
며칠째 궂은 비 내려 눈시울 붉은 땅에, 풀꽃들은 쓰러지는 일 없이 마음대로 피어난다. 믿음의 올로 하얀 실을 짜서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거미집에 맑은 이슬들이 영롱히 매달려있는 깊은 산골의 아침. 검은 관념의 옷을 벗자 하얀 이슬의 시들이 수정 쌍무지개를 이루어 금빛 햇살에 눈부시다.
나는 검은 폭풍우가 지나면 더 깨끗한 하늘과 더 푸른 나무들과 더 활기찬 대지들이 새 생명을 띠고 살아난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무지개 다리를 건너 지금, 꿈의 새 세상, 시가 만든 나만의 아름다운 세상을 만나러 풀 이슬 적시며 시의 숲으로 들어가고 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그래요 은곡에서는 검은 옷을 벗어버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