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 청정무구한 마음의 소유자 오두영 시인
이화엽('창작과 의식' 편집장)
비- 내린다. 그것도 흠뻑 모두를 적신다. 모처럼 비의 출연은 왠일인지 이별과 해후를 동시에 약속하는 미련과 설레임이었는지 모르겠다. 여름을 떠나 보내기와 가을을 불러오기에 해당하는 비의 역할일 것이다. 여름내내 곳곳에서 태양의 오만은 작열하지 않았던가, 그의 낮은 온도는 이를 잠재우고 이제 고향의 소식처럼 가을을 들고 왔다. -가을날-의 결실을 위한 긴 긴 릴케의 편지만큼 감미로운 시인의 전주곡이 어디쯤 흐를 것이다.
현재 시인은 서울에 거주 하시지만 고향은 '용인시 원삼면 학일리(學日里)'에 자리하고 있었다. 부산에서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용인 인터체인지까지 네시간 가량 달렸다. 가는동안 내내 비가 오고 있었다. 비상등 깜박이를 타닥타닥 켜면서 차들은 속도를 줄인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내린다. 내려오는 비를 보면서 한 번도 그는 오르거나 생명을 이끌고 달아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닫는다. 찾아와 우리의 가슴을 열고 그리하여 젖을 뿐이다. 시인의 정신과 문학이 이처럼 비에 해당한다면 그의 입장에서 순환법칙에 어긋난다고 하실까, 아니다. 분명 언어와 지성의 유연성은 비의 씨앗을 음미했거나 그것이 발아된 까닭이다. 그래서 고속도로는 이 비가 위험할 지 모르나 시인에겐 안전하다. 시인의 詩는 그의 근원인 영원성에서 비롯되며 영원 할 것이라는 짐작보다 더 강렬한 운명의 무게를 시인은 이제부터 고향에서 찾는다. 찾아나선 시인의 고향은 도시근교였으나 도시를 부인하고 녹색의 회화적인 풍경으로, 묻어온 도시의 답답한 공기를 씻어내고 있었다. 내리던 비의 탓도 있으리라. 처음부터 지금까지 고향에 남아서 푸른 것들의 고집은 자라고 그만큼 건강 할 뿐이었다. 야트막한 산자락과 들판에 둘러 싸여 있던 용인시 원삼면 학일리였다. -날마다 배운다-라는 뜻의 '학일(學日)'리는 마을 사람들에겐 산교육의 터전이었다. 자연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시간으로부터 날마다 배우며 터득하면서... 고향은 그렇게 이름처럼만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어머니로부터 태어나 지어졌던 이름은 그 이름처럼 자라거라 했거늘 나는 과연 그 뜻에 융화되고 있는가, 반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시인은 공부를 마다하지 않고 계신다. 그래서 문학의 갈피를 열면 모티브는 인간에 대한 겸손한 사랑과 참여하는 문학으로서의 실천이 있다. 그의 고향 학일리에서 시인은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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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일리 입구-
시인의 연륜이 월력의 인식 대로라면 원로라고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시는 오히려 연륜을 더 할 수록 더욱 순수해지며 자연과 사람과의 동화에서 교감의 열매는 그 맛이 달기만 하다. 이는 시인뿐만 아니라 시를 쓴다는 선배작가들의 시론에서 얼마든지 증명되어져 왔다. 왔으므로 우리는 시의 분포를, 시대를 살아가는 생명의 평등주의에서 함양한다. 우주란 둥글다의 어원을 가지고 있어서 둥글다의 개념은 높낮이의 고정관념을 지양하지 않던가, 시인의 아호는 노아(老兒)다. 아이는 어른에게서 배우고 어른은 또 아이에게서 배우므로 아이는 어른으로 어른은 아이로 되어가는 원리가 둥글다의 철학이라고 강조하신다. 그렇게 학일리는 시인의 세월처럼 지상으로부터 부여받은 모든 생명은 순수하고 건강한 자세였다. 어제까지 도시의 양식으로 아침을 지탱하고 출현한 이방인은 저들에겐 영원한 타인일 것인가, 그러나 우리도 고향을, 시를 갈망하고 염원하고 있었던 탓에 반겨주는 시인이고 고향이다. 거슬러 시인을 탐구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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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 간장 숙성중인 장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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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모해 가는 학일리-
풀은 왜 키가 크지 않는가, 김수영의 풀을 문득 떠올리며 학일리의 입구에 들어서니 바랭이 개망초가 자자하게 피어 우리를 맞는다.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난다는 김수영의 풀은 질긴 생명력이었다. 역사는 끈질기게 생명을 물고 늘어진다. 살아서 존재했던 시대를, 살아서 다시 존재를 증명하려면 시대는 그가 지닌 뿌리의 역사를 분석해 보아야 한다. 풀은 그렇게 뿌리로부터 역사를 쓰고 있었다. 한곳에 머물러 수동적인 까닭은 고향이란 정서적 뿌리에서 그의 필연적인 존재론을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고향의 지붕이 풀의 어록처럼 푸르거나 키가 낮은 까닭은 사람보다 겸손하며 이를 존중하고 어우르려는 까닭일 것이다. 인간은 지금 도시를 건설 중이다. 그래서 발을 묻고 섰던 도시의 기억은 모서리가 둥글지 못하여 날마다 피곤했다는 결론이다. 온통 회색의 검은 그림자처럼 때로는 죽음을 빨리 떠올리게 하는 도시의 군상이다. 어느 고향은 그러하지 않은가, 땅과 흙은 겨우 사람의 발 아래 있으나 생명을 받들고 기원은 바람과 공기를 만들어 삶의 영원성을 떠올리게 한다. 시인의 영원성은 그러고 보니 고향이었으며 그로 비롯된 詩라고 할 수 있겠다. 고향집으로 가는 길목에 잠깐 차를 세운다. 호박밭을 지나서 우리는 시인의 선산으로 향했다. 호박은 잎도 열매도 둥글넓적하다. 아침에 마신 까다로운 커피 한 잔보다 구름만큼 마음이 펀펀해 진다. 동행한 작가 한 분이 장난처럼 한 개만 딱 서리하자 했지만 용기를 못내던 그 분이었다. 하지만 호박을 새우젓 간에 묻히면 여름반찬은 그만일 것이라고 하면서 여름 한낮의 허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시인의 선산엔 부모님과 조부가 안락한 안방에 앉아서 자식을 기다리듯 모셔져 있었다. 시인은 고향에 들어오면서 부터 나를 키워주신 어른들께 절을 드리는 일을 우선으로 했다. 우리는 다시 배운다, 멀리서 손님이 찾아온다는 소식을 고향에 상주하는 조카에게 일러 두었고 그러므로 정갈하게 단장하고 손님을 맞아야 한다는 정성을 미리 전했으므로 산소는 이미 벌초가 되어 있었다. 마음을 다 해 부모님께 절을 드리는 시인곁에서 우리도 인사를 드렸다. 비석엔 직접 쓰셨다는 오남매 나으시고 키우신 은혜의 글이 있었다. 이처럼 시인은 부모에겐 한 번도 그르침 없는 효자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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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과 청소년기를 보낸 고향에서 추억의 아픈 편린들을 회상하는 시인이셨다. 당시는 6.25가 발발하고 전시상황이었다. 피난을 떠나야 했는데 마을사람들은 이곳에 남아 꿋꿋이 위험한 하루하루를 지내면서 지혜롭게 상황을 대처해 나가고 있었다. 쌍영산과 구봉산을 경계로 해서 중공군과 국군이 대치를 하고 있었고 마을은 이편도 저편도 아니어서 중립마을이라고도 했다. 하루는 중공기가 나부끼고 하루는 태극기가 펄럭일 때마다 어린 시인에겐 의식의 혼란이 찾아왔다. 어느날 큰집 마루에 우두커니 앉아서 밖으로 나간 형제들과 어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정찰수색을 나온 군인들이 총으로 소년을 위협했고 소년은 영문도 모른 채 쌍령산 고개너머로 군부대를 따라가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북으로 가지 않고 남으로 향하였으니 정찰나온 군인들은 국군이었다.그리하여 학생의 신분으로 국군의 일원으로서 전시에 가담하게 된다.그 때 나이 열일곱 되던 해였다. 소년의 의식속에 파괴와 폭력이란 체제로 전쟁의 공포가 잠재되어 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총을 겨누어야 하는지, 그로인한 가치관의 혼돈은 소년의 역사관에 기초가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보다 사건은 사촌형이 좌와 우의 갈림길에서 국군의 기관총에 사살되는 운명을 면치 못한다. 그 피냄새는 지금도 의식으로 사무쳐서 그의 비망록엔 인간과 전쟁의 필수불가결에 대한 정의가 화해와 용서의 휴머니즘으로 정립되어 있다고 하셨다. 이제는 학문으로 문학으로 회복되면서 사고란 끊임없는 경험과 참여로서 판단과 이성을 갖게 한다. 당시를 재현한 문학은 그래서 대부분 자신의 실제체험을 바탕으로 하며 그렇지 않더라도 비극의 극적 상황을 몸소 겪은 만큼 사실만을 채집하여 역사를 정당하게 평가한다. 선이 분명한 요즘 젊은이들의 뚜렷한 자기개념이나 주장이 아닌, 사실에 의한 타당한 근거로 내려지는 결과에 순응해가는 것이 한 시대를 살았던 실존의 증인인 것이다. 마을은 평화로웠다. 문득 시인처럼 하늘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이제 비를 거두고 하늘은 태양을 느리게 느리게 말려간다. 새삼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 열기보다 열매로 익히는 연습을 다시 한 번 하는 듯 했다. 사뭇 박목월 시인이 '나그네'에서 읊었듯 구름에 달가듯이 술 익는 마을에서 타는 노을을 보려면 시인과 함께 여기 이대로 주저 앉은 채 저녁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좀 더 시인과 고향이 달관했을, 이를 다시 현실에 반영했을 시와 인생을 감상하고 싶었다. 마을은 그렇게 산으로 담을 친 듯 구름으로 지붕을 쌓은 듯 평화롭고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몇 시간 전에 밟고 지나온 도시는 빨리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다. 어느날 부터 문명가는 자동차의 눈치빠른 속도를 짚어 고향을 염탐하고 갔는지 모른다. 마을의 길가에 알록달록 아기손처럼 피어난 백일홍 코스모스가 한순간 염탐가에 의해서 겁탈을 당한다면- 이 무슨 끔찍한 상상인가, 시인의 안색을 살피니 고향의 저 들판과 어울려 그저 천진무구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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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슴엔 꽃신처럼 어여쁜 그리움이 있다. 겨우 다섯해 살고 간 아기를 보낸 슬픔은 고향이 대신 위로해 주었으며 어쩌면 고향의 소식은 아기의 생명처럼 순수해서 다시 찾아와 안주할 수 있었으리라. 도시여- 외면하라. 이곳을 찾지 마라. 이 땅은 아버지가 마련한 자식의 그늘이고 그곳에 우리가 쉬어 갈지니 아버지의 기도를 하늘은 기억하리라. 시인의 마음이 이러하실까,우리는 시인의 부모님 묘를 벌초해 주셨다는 친척집에 잠시 들렀다. 자식은 모두 도시로 나가고 부부만 살고 계시는 친척은 시인에겐 조카 뻘 된다고 하셨다. 산에서 직접 체취해서 말린 다음, 그것을 가마솥에 넣고 고와서 엿이 되도록 해 차를 달여냈다는 칡차를 대접 받으며 두 분의 삶을 잠깐 엿 볼 수가 있었다. 어느땐 심심해서 도시로 나간 자식들 집에 몇 날씩 머물러도 보지만 도무지 그곳은 답답하고 또 이곳이 궁금하여 견딜 수 없으므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고 하셨다. 부모는 그렇다, 객지로 나간 자식도 염려가 되므로 찾아가서 안심하고 또 집에 두고 온 자식(농사와 짐승)이 궁금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마음이 놓인다. 시인의 고향인 이곳 학일리에 대해서 잠시 두 분께 설명을 듣는다. 이곳의 또다른 이름은 -청정학일아름마을-로 되어있다. 농사는 오리농법을 활용하여 친환경 오리쌀을 재배중이라고 했다. 또한 맑은 물과 맑은 공기를 겻들여 빚은 된장과 메주가 유명하다고 했다. 이처럼 시인의 고향은 정말 화학재료를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여느마을보다 훨씬 깨끗했다. 산등성이에 걸린 구름처럼 넉넉한 친척분의 인심을 뒤로하고 시인이 현재 살고 계시는 서울집을 방문하기로 일정이 잡혀 있어서 아쉽지만 그곳을 떠나와야 했다.
고향인 용인에서 출발해 서울 집까지는 한시간 남짓 걸리지만 아마도 두 세시간 걸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유는 시계가 오후 네시를 가리키고 있었으므로 러시아워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시인과 주어진 시간을 기왕에 만남과 여행의 방면으로 누릴 요량을 가졌다. 양평에 있는 '두물머리(양수리)로 둘러서 가기로 약간의 일정을 변경하기에 이른다. 서울시내로 지금 들어선다는 건 축적한 고향의 이모저모를 하마터면 도시의 소음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찾아오기도 했었다. 그래서 우린 서울의 외곽인 양평으로 차를 돌려 나가기로 했다. 시인은 차 안에서 학교생활과 당시의 성품을 이야기 하셨는데 듣고보니 지금까지 쌓아놓고 계신 덕망이나 지성으로 보아 왠지 그랬을 법 했다는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좀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놀이를 하거나 다툼에 관여하던 성격이 아니었다고 한다. 조용히 앉아 생각을 하고 책을 읽었을, 스스로 외로움을 만들었거나 그것이 타인으로 하여금 비롯됐다 하여도 문제는 자신의 의식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 적적함은 책으로 인해 또다른 세계관을 정립하기에 이르게 했을 법 했다.무엇보다 어린 시인은 사색의 동기를 자주 마련했다. 사고하고 창조하면서 학문과 문학의 기둥을 점점 세워갔을 그 였다.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기 보다 행동의 주저함은 자연과 생명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문학으로 맥을 잇기 위한 동기가 아니었을까 한다. 유치원 때 있었던 일화를 들려주시는데,필자는 또한번 중간의 말마디를 자르고 질문을 안드릴 수가 없었다. 유치원이라니요?당시도 지금처럼 학교가기 전 사설 학원이 존재했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시인의 집안은 유복했으며 부모님의 교육열의가 대단했던 것처럼 여겨진다. 누구나 다녔다고 말씀하시는건 환경이나 형편같은 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누구보다 더 굉징히 애틋하고 절절했음이다. 하루는 어머니가 유치원으로 도시락을 들고 오셨는데 그것이 창피해서 어딘가로 숨어버렸다고 했다. 이유는 친구들에게 과보호를 받는 아이라고 놀림을 받는 게 싫어서라고 하신다. 이러한 성품은 지금까지도 남을 먼저 배려하고 염려하시면서 이는 또 문학적 가치에 기인했다는 생각이다.시인의 어머니는 일제시대, 삼일운동, 해방, 6.25동란, 4.19를 겪어오며 살아오신 세대다. 아버님이 일제말, 32세 되로록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해 가난하게 사셨는데 어머님은 아이들을 어찌 그리도 많이 낳으셨는지 모두 9남매를 낳아 키우시며 살으셨다. 현재 5남매(3남2녀)가 살아있는 형제자매는 위로 누님(현84세)한 분과 남동생 두분, 누이동생 한분이라고 하신다. 본인의 위로 형 2명은 어렸을 때 잃고 한 분 형님은 6.25 때 군인가서 훈련병시에 병으로 사망하고 누이 하나도 어려서 홍역으로 사망하였으니 모두 어머님은 젊은 날에 아이들을 잃으셨으므로 시인을 비롯해 그 후에 난 자식들, 자식이라면 끔찍하게 애지중지하셔서 과잉보호하는 편이었다고 시인은 말씀하신다. 지금의 부모들이 자식을 지나칠 정도로 어르고 달래며 신주단지 여기듯 키우는 것과 지극히 차별되는 경우다. 유년은 이처럼 대부분 일을 하거나 책으로 소일을 하며 지낸다. 고향에 머물면서 어머니는 산에서 산나물을 캐오거나 도토리를 채취하여 도토리묵을 쑤거나 바느질거리를 구해다가 일하시며 이를 도와 밤을 낮처럼 밝힌적도 한 두 번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 해 겨울을 어찌 잊으랴
/오두영
온 들엔 하얀 눈이 덮혀있었다
홑이불 뜯어내어
온몸을 휘 감고
행주치마 찢어내어
총자루 칭칭 감은
구팔육일부대 수색중대 병사들이
한줄로 늘어서서 남쪽으로
쌍령산 고개를 넘어 갔다
그 이듬해 정월,
홍안소년의 중공군 병사들이
쌕새기 호주비행기
미국의 제비비행기
그들의 폭격을 견디지못하고
패잔병 신세가 되어 북으로 사라져갔다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 일진
(維歲次 某年 某月 某日 oo)
칠대손 모모등 감소고우
(七代孫 某某等 敢昭告于)
조상님들의 혼백을 불러 내어
시제를 지내는 날
어설픈 빨갱이노릇 하다가
총살 당한 사촌형 무덤 위에 달빛이 차갑다
청정학일 알음마을 저수지에서
무자맥질 하던 기러기떼들
물안개 속을 뚫고
북녘하늘로 줄지어 날아간다
빈들에 칼바람 맞으며 돌아오는 길
도깨비 바늘이
바지가랑이에 달라 붙는다
지금도 돌꼬지(石花地) 안씨네집 마당에서
드르륵 갈겨대는
기관총 소리 들려온다
저 높은 산, 그 너머에 '미리내' 성지가 있다
그해 겨울을 어찌 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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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두물머리(양수리)-
고향은 점점 서산에 기우는 노을과 더불어 멀어지며 야위어 가고 있었다. 대신 차로 달려가는 이 길은 고향의 풀길과 많이 흡사했다. 멀리 산이 보이고 밭의 농작물이 아직은 도시를 잊고 살아도 될 만큼 그 푸른 것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산은 도시의 위력에 목숨의 일부를 내어주고 본연의 모습을 기형화 해 가고 있었다. 까페와 모텔이라고 적혀있던 간판들을 보면서 고향은 그나마 생면부지 할 것인지 또한번 마음이 착잡해진다는 시인의 안색을 살핀다. 목적지는 '두물머리(양수리)'라는 곳이였다. 우리를 위하여 손수 안내를 맡으신 시인은 그곳에 이르자 자세한 설명을 시작해 주셨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각자 흐르다가 한강을 만든다고 하여, 순수한 말 그대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셨다. 그 곁으로 족히 몇백년은 되었을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강의 세월을 묵묵히 지켜가고 있었고 주변엔 수련이 물 빛깔보다 짙은 엽록소를 건강하게 자아내고 있었다. 산책로가 어여쁜 그곳의 풍경에 그만 넋이 나간다. 오늘 시인과 강 그리고 고향을 한꺼번에 얻은 것이 마냥 행복하여서 시간을 고장내고 싶다는 바램을 다시 한 번 한다. 이른저녁을 장작이 많이 쌓인 어느 이름난 식당에서 먹고 우리는 시인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간간이 비가 오고 있었다. 이제 더듬어 가을이 길을 찾아 나선다는 예고일까, 어디서인지 가을바람 한 줄 상큼하니 새어 전율을 일으킨다. 가을은 오리라, 이제 그 가을이 찾아와서 시인을 만난다면 더 녹록해진 인생예찬을 탐할 것이고 시인이 앞으로 탐구할 스승앞에서 겸허히 무릎을 꿇었듯 우리도 그렇게 인생과 문학의 자세를 저 자연앞에 조아릴 것이다. 시인의 댁은 어딘지 고향에서 느꼈듯 생명의 노래가 떠오르고 만지면 부드러운 촉감의 아담한 이층집이었다. 맞아 주시는 사모님의 꽃잎처럼 소박하던 미소와 그 미소를 잘 다려서 내오셨던가, 빛깔이 봉숭아 꽃물처럼 참 곱던 차를 음미하면서 부부는 어딘지 닮아 있음을 알았다. 벽 한 편에 나즈막하니 걸린 액자안의 두분을 대하면서 그렇게 느꼈다. 제주도에 가셨다가 (참고로, 시인은 농대에서 공부를 하셨으며 뜻을 농촌운동에 두셨었다. 각 지역마다 두루 농협에서 강의를 청원받아 초빙되셨었다.) 호텔로비에서 사모님과 나란히 쇼파에 앉아 찍은 사진인데 참으로 어울리는 청빈한 부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론 시인의 눈빛에서 의욕과 양 어깨의 건장함엔 어떤 패기와 정열이 넘쳐나는 듯도 했다.거실엔 물고기가 없는 어항이 하나 있었는데 갖가지 모양의 돌들과 깨끗한 물이 어울려 출렁이고 있었다. 이들도 생명을 자부할 수 있도록 시간 틈틈이 몇 마디의 말을 서로 주고받곤 하신단다. 그래서인가,다만 물처럼 순하고 부드러운 꽃과 사물들이 시인과 더불어 이 집에선 살고 있었다.도시가 지어다 준 건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문명의 이기뿐이었다. 시인의 정신을 양육하는 건 이를 벗어난 자연과 고향다운 순박한 것들 이어야 했다. 서재는 그야말로 시인의 지적 면모를 설명하고 있듯 사방이 책으로 빼곡했다.
아무래도 문학의 시작은 스승이신 함석헌 선생과의 인연으로 접하게 됐다고 하신다. 『함석헌(咸錫憲 : 1901∼1989), 문필가, 시민운동가, 종교사상가, 독립운동과 민주화, 인권운동에 공헌하였으며 씨알사상을 정립·선양하신 분으로서 그의 사상의 밑바탕에는 늘 성서사상 곧 기독교적인 요소가 있으나 정통주의 기독교의 교리주의나 형식주의에 반대하고 노장사상, 공맹사상, 화엄사상 등에도 깊은 종교적 진리와 구원의 지혜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의 대표적 저서를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개창하고, 말년에 그는 퀘이커에 가입하여 평화운동에 진력하였다.그의 중심사상은 '씨알사상'으로 대표되는데 '씨알'은 민중중에서도 순수한 사람됨을 지향하는 순수 우리말 표현이다.』[인터넷 발췌]
이러한 그분을 서재에 모셔두고 철학과 인생을 날마다 끊임없이 탐구하는 시인이셨다. 청년시절 도시로 나와 농업에 뜻을 두며 공부를 시작한다. (시인은 정확히 학력을 말하면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부설 중등농업교사 양성소 2년 졸업이라고 말씀하신다.그리고 함선생님으로부터 <대학>을 배웠으므로 일반 대학을 나온 것 이상으로 자부하며 학벌에 대한 미련은 없다고 말씀하시는 시이인이시다.)시인은 농업에 대한 연구와 열악한 농촌현실 극복을 위해서 지식인의 고뇌는 깊어간다. 그 무렵,시인은 함석헌 선생의 사상을 가슴으로 흡수하면서 유교집안에서 자란 시인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불평등한 성차별 주의에 저항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집안의 제사만 해도 그렇다, 일년에 예닐곱 여덟차례나 되던 제사를 지켜보면 여자들은 상차림에 분주하고 남자들은 사랑방에 뎅그머니 앉아서 제사 시간을 기다린다. 이처럼 제사를 떠받는 진풍경이 시인의 어떤 비판과 저항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그것은 유교사상이나 서양의 풍속도에 억눌린 민족혼의 주체사상을 일깨우던 스승의 인간문제와 사회문제를 고민하던 지론에 합류한 경우였다. 당시 수복후 수원으로 이사를 오게되므로 시인은 서울까지 함선생의 강의를 들으러 매 주말마다 빼놓지 않고 수원에서 서울을 가고오고 했다고 한다. 함선생의 이론은 문학도 마찬가지로 시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한다. 강의 하시다가 가끔 휘트먼의 <풀잎>이라든지 롱펠로우를 들려 주셨는데 시인은 수업을 마치는 즉시 서점에 가서 롱펠로우나 휘트먼의 시집을 구입해다 밤새 읽곤 한다. 우리는 여기서 롱펠로의 '인생예찬'을 짚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음이다. -인생은 진실이다/인생은 진지하다/무덤이 종말이 될 수는 없다(중략)/, 아무리 즐거워도 미래를 믿지 마라/죽은 과거는 죽은 채 매장하라/활동하라 살아있는 현재에 활동하라(중략)-. 무엇을 음미했는가, 삶의 존재성만 인정하라는 메세지가 다만 내일을 잃어 버리도록 집요하다. 미래를 믿지 말라 한다. 내일로 미루지 않던 시인의 지식과 행동이 일치함은 사상과 정신의 체계가 합리적인 면모로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참고로, 시인의 산문집의 몇 구절을 인용해 본다.
-내 젊은 날에 함석헌 선생님이 서울 YMCA강당에서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강연회를 열으셨는데 함선생님의 말씀 중에 휘트먼의 <풀잎>, 쉘리의 <서풍의 노래> 등 서양사람들의 시를 인용하고 동양, 특히 중국의 도연명의<귀거래사>, 소동파의 "국파산하재/성춘초목심.."등 명시를 접할 때마다 20세 청년의 가슴에 시의 씨알이 떨어져 그 유명한 시인들의 시집을 구입해다 읽곤 하였다. 한국의 시인들의 시집은 1950년대인 만큼 일제말에서 8.15 .광복 이전,그 시대에 처절하게 싸워온 한국문단의 큰 별들의 시집을 읽었다. 김소월,윤동주,이육사,정지용,한용운,한하운 등등 닥치는 대로 당시에 유명한 시인들의 시집을 망라하였다. 내가 시집을 읽으며 눈물을 펑펑 흘린 시집은 한국민에게 격려시를 주신, 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드 타골의 <키탄자리>이다. 33세에 봄비 내리는 수원 '팔달공원'에서 우산을 바쳐들고 소리 내어 시를 낭송해 가다가 33번 글인가에서 울음이 폭팔했다. 기뻐서 우는 울음을~! 무릇, 인생 공부는 훌륭한 스승을 잘 만나야하고 젊어서 훌륭한 스승을 찾아야한다. 위대한 스승을 만나는 것은 운명인가, 나의 선택인가. 나는 나이 30에 농촌 개척원으로 취직하여 농민지도, 농협 임직원 교육에 평생의 열정을 쏟았는데 나는 강의 할 때마다 내가 아는 시를 인용하여 수강생들에게 인생에서 참삶의 길을 가도록 아름다운 서정시 보다 철학이 담긴 시를 읽어주곤 하였다.-[老兒오두영]
시인은 더이상 이론만으로 되어진 문자의 한계에 어느정도 염증을 느끼며 씨알농장의 체험기에 들어가게 된다. '창작과 의식 통권 10호' 산문부분에 게재된 바 자세히 언급을 하고 있는 {씨알 농장에서 뵈온 함석헌 선생님}-곧 학문의 실천은 산 경험이었음을 즉시 실감하게 된다. 기록에 보면 시인의 농장 체험은 그야말로 자연의 놀라운 경험이었고 직접 접하던 농촌 현실은 곧 귀중한 공부자료가 되어 주었다. 인용하면,
-하루는 골목길에 들어가 인분을 퍼싣고 'ㄱ'자(字) 골목을 빠져나오면서 한 쪽 바퀴가 일본식 가옥 코너의 기둥을 툭 쳤다. 기둥은 쑥 빠져 퉁그러져서 서 있었다. 완전히 빠져서 집이 무너지지는 아니했다. 이거 큰일났다. 남의 집에 기둥을 쳐서 이 모양을 만들어 놓다니…. 마차는 아무나 끄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한다. 나는 할 수 없이 집주인에게 사죄하고 변상해 드리겠으니 씨알농장에 가자고 해서 집주인을 데리고 농장으로 와 인분을 저장탱크에 쏟아붓고 난 후, 먼저 홍명순에게 이야기했고 선생님께 보고할 참이었는데 선생님은 저만치 밭에서 김을 매고 계셨다. 이내 아침식사 시간이 되어서 선생님도 나오셨다. 나는 선생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고개만 끄떡이시고 나에게 '가서 씻고 식사하라.'고 하시고는 그 집주인을 만나셨다. 아마도 변상 약속을 하셨을 것이다. 내가 우물가에서 씻고 오니 선생님은 그분에게 아침식사 같이 하자고 권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한사코 사양하시고 "이곳은 자기가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 할 곳이라. 학생은 걱정하지 말고 일이나 잘하라" 하시고 자기집 기둥은 장끼로 다시 들어올리면 될 것이라 하고 돌아갔다. 선생님은 내게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老兒오두영 -
이렇게 선생은 겁을 주지 아니하시고 학생의 신분은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의욕을 더더욱 불어넣어 주셨다. 필자의 기억이 하나 떠오른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아이들은 앞다투어 교실로 들어가느라 복도는 한순간 아수라장이 되기도 한다. 필자도 마찬가지로 아이들과 뒤섞여 교실로 들어가다가 그만 밀치고 뒤치고 하다 창문가에 놓아둔 화분 몇개를 와르르 깨고 만다. 몇몇의 무리들은 선생님 앞에 불려나가 종아리를 걷어 올린다. 그 아까운 화분은 소위 부자집 엄마들이 사다가 장식해 놓은 것인데 그걸 박살을 냈으니 선생님의 속은 이만저만 쓰린게 아니었으리라. 회초리에 퉤퉤 침까지 묻혀가며 있는 힘껏 몇 대를 맞았고 그러고도 분이 안풀리는지 담임은 다음날 부모님을 학교에 오라고 했던 것 같다. 함석헌 스승님 같은 분은 내 기억엔 드문 경우다. 이처럼 스승의 길은 곧 제자의 길일 수도 있다. 그분이 수행한 대로 제자도 그 길을 반듯이 실천했으니 지금 뵙는 시인의 삶과 그분의 인생처럼 날마다 지혜의 샘애선 깊은 향기가 우러난다. 사람의 향기 자연의 향기 고향의 향기까지 두루 퍼 올리는 시인이시다.
연이틀 비가 내리고 있다. 시인을 공부하는 동안,비는 내내 떠나지 않고 필자와 함께 시인의 인생과 문학을 접하도록 했다.어느새 우리는 여름을 잊었고 가을을 충분히 예감하고 있었다. 가을은 저절로 생겨난 풍경화가 아니다. 시인이 한 세기를 앓아내며 빚어내온 세월의 윤곽이며 언어와 삶의 가장 아름다운 질곡만을 녹여 표현한 위대한 서사시가 바로 시인의 가을인 것이다. 이렇게 여름이 청춘이어서 치열과 혈기였다면 가을의 몫은 그의 이야기를 써서 찬란한 시의 영혼을 구축하는 일이라고 했다. 시인의 작품세계는 어떠한 방향을 설정하기보다는 순수와 참여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진실과 이성을 두루 섭렵하고 있다. 시인은 영원한 현역이란 어느 시인의 말씀을 자주 인용하면서 우리에게 시인임을 자부하라는 긍정의 입김을 퍼트려 주신다. 그만큼 삶을 쓰고 시대의 아픔을 논하며 역사를 기록하는 시의 진정성을 지금도 실천중에 계시기 때문이다. 독자나 요즘 시를 쓰는 젊은 작가들에게 귀감이 될, 혹은 시의 작법에 대해서 언급을 해 주셨으면 하고 부탁을 드렸다. 세계적인 위대한 시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젊은 날 역사에 남는 훌륭한 글을 썼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지만, 대체로 젊은 분들이 시를 잘 쓰는 것 같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젊은 날 감성이 풍부할 때 훌륭한 글을 썼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므로 나이많은 시인은 젊은 분들과 오히려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얻는다고 겸양의 손사레를 치신다. 무엇을 더 어쭈어 배움을 터득하랴, 가르치기 보다 날마다 배운다는 시인의 자세를 본받기로 한다. 고향 학일리의 실천이 이곳 시인의 가슴에서 끓고 있음이다. 사물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고 닮을 때 비로소 우주는 하나가 되며 그래서 분리될 수 없는 인간과 자연의 어원을 시인은 작품을 통해 역설하고 있다. 시간이 늦어 밤에 이르도록 했다. 방이 여러개 있어서 잠자리가 되므로 일행의 늦은 밤, 먼길을 달려가는 귀가를 만류하셨지만 작별을 서둘러야 했다. 아이의 웃음이 나팔꽃처럼 피었다/나팔꽃 속으로 남긴 웃음 소리/아이의 입이 나팔꽃같이 폈다 접힌다/저 아이의 웃음이/ 이제 내 웃음이 되었구나-(하략) 천양희 -그 소리-를 인용해 본다. 바로 노아老兒 오두영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내 몸안에선 시인의 나팔꽃같은 웃음소리 가득가득 여운되어 웅웅 거린다.
첫댓글 잘 쉬어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