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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거를 배경으로 자리잡은 클라이네 샤이데크의 호텔
불효자의 회한
오랜만에 밥을 해서 아침을 먹고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 공장으로 내려갔다. 후버 씨의 비서가 우리를 공장의 창고로 안내해주었다. 창고는 들어서자마자 긴 카운터로 막혀 있었는데 그 너머로 빽빽이 들어선 진열대에 가득 쌓여 있는 많은 종류의 장비들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창고 직원들이 우리가 요구하는 장비를 하나씩 가져다주었지만, 길게 적혀 있는 장비 목록을 보고는 아예 카운터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구석에 서 있던 쇼핑카트를 세 대 끌고 와 손에 하나씩 쥐어주고는 창고 직원을 한 명씩 붙여주면서 원하는 장비를 직접 담으라고 한다.
당연하지, 그들도 그게 편하겠지.
상당히 넓은 창고 안에는 사레와 제품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유명 상표에서 미국 제품까지, 말 그대로 없는 것이 없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마치 보물섬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징비 구입이 끝난 후 대금 지급을 하고 후버 씨에게 작별 인사도 할 겸 그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사무실 벽장 속에 감추어 두었던 코냑 한 병을 꺼내 한 잔씩 따라주며 우리의 행운을 빌어주었다.
그는 뮌헨 근처의 질이 별로 좋지 않은 푸석바위 석회암과 인수봉 등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그에게 머무는 동안 베풀어준 호의에 감사를 표하고 작별의 악수를 나눈 후 돌아왔다. 물론 코냑은 다 마신 후였다.
내일은 출발해야지.
선우와 정원이는 짐들을 꾸리고, 나는 회계 정리를 시작했다. 몇 개국 화폐와 그 동안 개인 돈까지 섞여버린 회계 정리를 하는 데 한 시간 넘게 끌다가 선우의 도움으로 겨우 끝마친 나는 내 머리의 산술적인 능력에 절망감을 느꼈다. 나는 변동 환율제를 적용하고 게다가 소수점 이하 두 자리까지 정확히 계산하려했던 반면, 그는 열한 개를 세 명이 나누어 가지려면 한 명이 한 개를 적게 가지면 된다는 지극히 간단한 방식으로 계산을 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적합한 방식이었다.
비오는 밤거리를 걸어나가 이탈리아 식당에서 분말 치즈를 듬뿍 친 스파게티 등으로 우아한 저녁을 먹고 돌아왔지만 우리들은 굵직굵직한 벌건 깍두기를 곁들인 뜨끈한 곰탕을 생각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7월 24일 토요일이다. 아침 일찍 기상하여 가벼운 조반을 들었다. 싸놓은 짐을 다시 점검하다가 어제 저녁 이탈리아 식당에 여권과 비행기표 및 돈을 포함한 여러 가지 중요한 물품이 들어 있는 손가방을 놓고 온 사실을 알았다.
서둘러 뛰어간 선우의 뒤를 쫓아가 보니 식당 문은 잠겨 있고 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선우는 말도 안 통하는 순경을 붙들고 사정하고 있었다. 그래도 파출소장 정도면 영어는 조금 하겠지 싶어서 나는 다짜고짜로 제일 높은 사람을 찾아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마침내 영화에서 본 게슈타포같이 생긴, 배가 불룩 나온 순경을 앞세우고 식당 건물을 향해 돌진하여 여기저기를 수색한 끝에 잠자고 있던 이탈리아인 식당 종업원을 잡아냈다(아니, 찾아냈다). 그는 식당 문을 열어주었고 우리는 어제 식사하던 자리에 그대로 걸려 있는 손가방을 운 좋게도 되찾을 수 있었다.
만약 식당이 문을 열지 않는 날이라든가, 종업원이 딴 데서 산다든가, 혹은 없어지기라도 했다면 우리의 계획에 상당한 지장이 초래될 뻔한 위기의 순간이엇다. "당케'를 연발하고는 공장으로 돌아와 짐을 역으로 옮기기 위해 택시를 불렀다.
뮌헨 역에 서둘러 도착하여 환전을 하고 매표창구에서 70살은 족히 되셨을, 무척이나 꾸물대는 할아버지 직원으로부터 취리히 행 기차표를 건네받았을 때는 9시 5분에 출발하는 기차가 1분 전에 막 떠난 뒤였다. 덕분에 우리는 두 시간이나 더 기다려 11시 11분에 출발하는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가 독일 국경을 벗어날 때 지나가던 세관원에게 사레와에서 꾸며온 세금 환급 신청서에 확인 스탬프를 받았다. 이 서류를 사레와로 보내면 어제 구입한 장비에 붙은 13%의 세금이 환급되어올 것이다.
오후 4시 30분, 취리히 역에 도착하여 그린델발트 행 기차표를 사고 어제 짐을 싸면서 따로 추려놓은 불필요한 장비와 옷가지를 역 안의 보관소에 맡겼다. 보관료는 하루에 1프랑인데 찾는 날 지불하면 된다고 한다(당시 환율로 1스위스프랑은 미화 약 0.5달러).
5시 25분에 출발하는 인터라켄 행 기차에 올랐다.
인터라켄이 가까워질수록 좌우의 산이 점점 높아져간다. 서 인터라켄을 통과하여 동 인터라켄에 도착한 시각은 저녁 8시 30분, 그린델발트 행 기차가 5분 후에 출발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서둘렀으나 열 개가 넘는 짐을 앞뒤에 메고 양손에 들고, 발로 밀면서 두 개의 기찻길을 지하도로 건너야했던 우리는 또 다시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었지만 한 시간을 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역 구내에 '코리아나'라는 이름의 4인조 한국인 보컬 그룹 공연 포스터가 붙어 있는게 눈에 띄었다. 포스터는 우리나라 시골 장터에서나 보 수 있는 곡마단의 그것처럼 어딘가 세련되지 못하고 썰렁하면서 촌스러워 보였다.
역 처마 밑의 벤치에 앉아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서울의 어머니 생각을 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허구한 날 산에서 다쳐서 올 때마다 눈에 띄게 늙어가는 우리 어머니, 장기 등반에 들어갈 때는 엄마라고 부르지도 말라고 하시지만 산에 가서 행여 추울세라 밤새워 스웨터며 털장갑을 떠주시던 어머니, 우리집에 와서 자고 간 일도 많았던 건호 형이며 동규가 작년 여름에 '아이거인가 뭔가 하는 산'에 가더니 알루미늄 통 안에 한줌 재로 담겨 돌아오는 걸 보고는 미국으로 보내신 편지에 '그래도 네가 같이 안 갔으니 다 부처님의 도움이다'라고 쓰셨던 어머니께 차마 그 산에 간다고 말씀드릴 수 없었다. 여름 휴가는 없다고 얼버무렸지만 혹시 어디서 듣지나 않으셨는지.....(나는 물론이고 서울을 막 떠나온 선우나 정원이도 우리의 원정 등반 출발 소식이 신문에 난 것을 모르고 있었지만, 신문을 읽으신 어머니께서는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시고 하루에 두 번식, 새벽과 밤이면 절에 가셔서 30일 동안이나 소식이 끊긴 몹쓸 아들의 무사를 비셨다고 한다. 그것을 나중에 전해들었을 때 나의 마음은 깊은 회한, 바로 그것이었다).
기차를 타고 깜깜한 산 속 길을 허덕허덕 올라 그린델발트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오후 10시를 막 넘고 있었다. 그린델발트 역사는 빗속에 젖은 채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북벽은 살아서 움직인다네"
아이거 북벽이 검은 어둠 속 저편 어디엔가 솟아 있겠지. 그린델발트는 몽블랑(4,807m) 밑의 샤모니나 마터호른 밑의 체르마트처럼 베르네 알프스의 등반 시발점이 되는 곳이다. 그린델발트의 아름다운 묘지에는 목숨을 잃은 등반가들과 가이드들이 누워 있다.
짐을 내려놓고 무엇을 먼저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비대한 중년 신사가 취한 걸음으로 다가와 우리와 짐을 번갈아 보더니 간단히 물었다.
"아이거 노르트 반트(아이거 북벽)?"
고개를 끄덕이는 우리에게 그는 서투른 영어로 스위스 산악회원이라며 자기 소개를 하고는 아이거 북벽에서 사라져간 등반가를 많이 안다며 되돌아가라고 제법 진지하게 타이른다. 아무리 우리의 운명을 불쌍히 여겼기로서니 아이거 북벽을 오르고자 몇 년을 이를 갈아온 우리에게 무슨 당치도 않은 이야기인가. 그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도 하기 싫어하는 우리의 눈을 한 동안 쳐다보더니 중얼거렸다.
"아이거 북벽은 살아서 움직인다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다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인사말을 덧붙이고는.....
"....."
비는 계속 추적추적 내린다.
선우와 나는 그린델발트 아래 강가의 유료 야영지까지 내려가 보았으나 진흙 바닥이 빗물로 질퍽거려서 텐트를 칠 마음을 아예 지워버리고 다시 올라왔다. 일단 역 근처의 호텔 식당에서 제일 싼, 그러나 엄청나게 비싼 샌드위치를 입 안으로 구겨넣고는 각자 값싼 호텔을 찾기 위해 흩어졌다.
10분 후에 다시 모인 우리들의 의견 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곳은 정원이가 발견한 곳으로서 역사에서 50m 정도 떨어진 역 창고의 처마 밑. 그곳은 바닥이 마루판이라 냉기가 올라오지 않고 지붕에서 뻗어나온 처마는 비를 막아주기에 충분했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재미있는 비박이 생각났다.
1961년 9월 어느 날 남부 독일 출신인 게오르그 후버와 게르하르트 마이어는 아이거 북벽을 시도하기 위해 그린델발트에 도착했다.
그들도 여느 산꾼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처지였기에 들판에서 비박을 준비하고 있을 때, 마침 등산가가 되는 것이 꿈인 열네살의 목수 견습공을 만났고, 소년은 그들을 목공소 2층의 마룻바닥으로 몰래 데리고 가 하룻밤을 지내도록 해주었다.
이튿날 아침 눈뜬 그들은 간밤에 잔 곳이 완성된 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래층에서는 작업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을 곤란하게 할까 봐 그들은 다락방으로 살금살금 올라가 자일을 걸고 창문 바깥으로 하강하여 빠져나갔다.
그 후 9월 22일, 그들은 세 번의 비박 끝에 아이거 정상을 밟는 데 성공했다. 그 해 겨울에 후버는 마터호른 북벽 동계 등반에서 도합 여덟 개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동상으로 절단해야 했으나, 1964년 초유에서 몬순기류에 휘말려 스물다섯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등반을 계속했다.
짐을 모두 옮기고는 침낭을 꺼내어 깔고 몸을 길게 눕혔다.
"아, 편하다!"
재정이 궁핍한 등반대에게 이 정도의 비박지란 가히 최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젖은 알프스의 밤 내음이 폐 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통나무집 베이스 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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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멈춰 있던 기차가 움직이는 소리와 빗소리에 잠이 깨어 일어나니 주위가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사진: 알피글렌에 있는 통나무집 베이스 캠프. 아이거 북벽을 오르기 위해 수많은 클라이머들이 이곳에 머물렀으리라)
7월 25일 일요일.
우리는 짐을 꾸려 아침 7시 28분에 출발하는 클라이네 샤이데크 행 기차에 올라탔다. 여기서부터는 급경사였기 때문에 톱니바퀴 기차가 운행되고 있었다. 양쪽 기차바퀴 사이로 또 하나의 톱니바퀴가 있어 레일 가운데로 깔린 톱니레일과 맞물리며 올라가게 되어 있다.
안개가 자욱한 가파른 숲 사이로 기차는 힘겹게 올라 고도 1,615m의 알피글렌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역에 짐을 놔둔 채 역에서 바로 보이는 'Hotel des Alpes Alpiglen'이란 이름의 호텔 1층 식당으로 가서 주인을 찾았다. 알피글렌에 있는 집이란 역 건물과 낡은 3층의 이 호텔뿐인데 호텔 주위에는 1937년 '죽음의 비박'에서 죽은 세들마이어와 메링거가 묵었음직한 통나무로 지은 오래된 움막들이 대여섯 채 드문드문 서 있었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움막을 사용하겠다고 말하자 1인당 하루 17프랑씩 내라고 한다. 작년에도 여기 움막에서 묵었다고 우기며(사실은 아니지만) 깎자고 하자 10프랑씩 내라고 한다. 나는 다시 통사정을 하여 결국 5프랑에 낙착 지었다.
회사 생활을 시작한 후 물건 값을 깎아서 사는 구매업무만 해 온 나의 특기가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3분의 2도 더 깎았으니..... 호텔에서 일한다는 일본인 주방장의 말에 의하면 아주 파격적인 가격이라고 한다.
빵과 우유로 아침식사를 했다. 비에 젖은 우리들에게 뜨거운 우유는 무척이나 좋았다.
호텔에서 리어카를 빌려 빗속에 짐을 움막으로 날랐다. 움막 안에는 열댓 명이 한꺼번에 잘 만큼 넓은 나무로 짠 침대가 두 줄로 놓여 있고 반대편으로는 통나무 장작을 패놓은 것이 천장까지 가득 쌓여 있었다.
식량과 장비를 대충 구분해서 정리해놓고 그린델발트로 내려갔다. 보험에 관해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우선 그린델발트 경찰서에 들렀다. 역에서 윗길로 조금 올라가다가 왼쪽으로 난 골목 안에 박혀 있는 조그만 경찰서 안에는 두 명의 경찰이 무언가 열심히 쓰고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우리를 보더니 일어나며 웃는 얼굴로 반가이 맞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작년 사고시 우리 팀은 이곳 경찰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우리 소개를 하고는 작년에 실패한 아이거 북벽 등반을 끝마치고자 왔노라고 말하자 예상 외로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꼭 성공하길 빈다고 악수를 청한다.
또 사고가 발생하면 귀찮아지므로 이것저것 캐묻고 까다롭게 굴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들에게 보험회사 대리점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만에 하나 등반 중 사고가 나서 부상당했을 때 당장 돈이 없다고 죽어가는 사람을 이 나라의 병원이 거절하리라고는 믿지 않지만, 나중에 물어야 할 그 비싸다는 병원비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 사실 작년 사고가 났을 때도 보험 혜택을 톡톡히 받았다고 했다.
일요일이라 보험 가입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우리는 경찰이 내주는 입산 신고서 양식 같은 것에 인적 사항을 채워놓고는 경찰서를 나왔다.
그린델발트는 유명한 관광지답게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여행객들로 붐볐다. 등산복에서 양복 입은 사람까지, 아이들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비오는 날씨를 개의치 않고 몰려다니며 사진도 찍고 가게도 기웃거렸다.
깎아지른 듯한 경사도와 잡아먹은사람의 숫자를 과시하며 세계의 명 클라이머들을 유혹하는 악명 높은 아이거 북벽을 비롯하여 순백의 만년설로 온통 치장을 한 묀히와 융프라우, 정상께부터 빙하가 시작되는 듯한 모습의 베터호른 등의 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있는 그린델발트는 마치 설악산에 둘러싸여 있는 설악동과도 같은, 무언가 들뜬 분위기를 자아내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우리가 경찰서 가까이에서 발견한 등산 장비점에 들러 구경했다. 사레와 공장에서 이미 장비 구입을 끝낸 터라 특별히 살 것은 없었지만 산꾼들의 빼놓을 수 없는 취미 중의 하나가 장비점 구경인지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 명의 발걸음이 저절로 장비점 안으로 향했다. 가게 안에는 장비가 썩 많지도 않았을 뿐더러 공장에서 아주 싼 가격에 장비를 구입한 우리들의 눈에는 모두 비싸 보이기만 했다.
장비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싸구려 식당에서 양을 꽤 많이 주는 돈가스와 스프로 점심식사를 하고 콜맨 피크-I 버너(미국제 휘발유 버너)용으로 5리터의 휘발유를 주유소에서 산 후 기차로 알피글렌으로 향했다.
북벽은 여전히 짙은 가스로 덮인 채 좀처럼 자태를 드러내지 않았다. 움막으로 들어가 각자 짐을 정리했다. 그 후 정원이는 보유식량의 전체량을 파악해가며 식단표를 짜고 부족량을 체크했고, 선우는 보유장비와 대조해가며 부족한 품목을 뽑아나갔다.
등반하다가 여하의 이유로 다시 돌아서서 내려가는 것조차도 생명을 걸어야 하는 곳에서는 단 한두 가지의 장비 부족이나 파손이란 종종 어처구니없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저녁식사 준비를 하던 정원이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먹음직스러운 된장찌개 그림이 붙어 있는 통조림을 따고는 완전히 실망하고 말았다. 내용물은 당연히100% 순 된장, 순 살코기 그림이 붙어 있던 통조림 역시 내장 비슷한 것과 기름덩어리들뿐이었다. 서울로 돌아가면 보사부장관에게 편지라도 써야겠다고 결심했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겉포장만 그럴듯하게 해놓은 통조림 제조업자들은 모두 벼락 맞아라!'
호텔에서 얻어온 치즈를 넣고 끓인 국은 뭐라고 명칭을 붙이기도 힘들었다.
침대 위에는 담요들이 깔려 있었으나 우리는 그 위에 침낭을 깔고 기어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