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25 章 관문이 설치된 뜻은……
절강(浙江) 임안(臨安)의 동쪽에 우뚝 솟아오른 거산(巨山).
동서 두 개의 거대한 봉우리를 가진 천목산(天目山)이 그것이다. 임
안현 쪽으로 있는 봉우리를 동천목산이라 했고, 잠현(潛縣) 쪽으로
있는 봉우리를 서천목산이라 했다.
동천목산의 가장 높은 곳은 대선봉(大仙峯)이라 했다.
서천목산의 가장 높은 곳에는 용왕정(龍王井)이라 불리는 장소가 있
다. 용왕정에서 동쪽으로 보면 가파르기 이를 데 없는 단애(斷涯)가
있다.
그리고 그 밑에서 불어 올라오는 차가운 안개가 사시사철 서천목의
최고정(最高頂)을 빙굴같이 만들고 있기에 사람들이 감히 산 위로 오
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뼈를 깎는 차가운 안개.
안개가 왜 그리 차가운지 자세한 연유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
여름에도 뼈를 깎는 추위가 머물러 있는 곳, 산행에 능한 사냥꾼이라
도 그곳에 발을 들여놓는 일은 없다.
만 장 벼랑 아래 얼음보다 차가운 물을 담고 있는 한담(寒潭)이 있다
. 한담은 서천목의 동쪽 벼랑 아래 형성되어 있는 거대한 분지의 절
반 가량을 점령하고 있었다.
현빙담(玄氷潭)이라 불리는 호수였고, 그 차가움은 천하의 한천수 중
에서도 가장 심한 편이었다.
현빙담을 갖고 있는 골짜기는 한여름이라 해도 만년빙토마냥 추운 상
동의 영토이다.
현빙담으로 인해 일어난 찬 안개는 골짜기를 가득 덮고도 남아 벼랑
을 타고 서천목 정상으로 치솟아 오른다.
벼랑을 타고 오르는 희뿌연 빙무(氷霧).
거대한 잠룡(潛龍)이 현빙담 밑에 도사리고서 승천(昇天)하지 못한
한을 차가운 안개로 토하는 것으로 분풀이하는 듯했다.
현빙담의 추위는 극을 이루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현빙담 근처가 얼음으로 덮여 있는데도 현빙담의 물만은
얼어붙지 않다는 것이었다.
현빙담의 물은 짙은 쪽빛이었다.
물빛이 너무 아름다워 한 번 손을 담가 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데
, 그럴 경우 손을 잃기 쉬웠다. 인육이 얼음 조각으로 변하고 마는
극한지기(極寒之氣)가 현빙담의 특징이기 때문이었다.
진시(辰時) 초.
현빙담을 갖고 있는 거대한 분지(盆地) 입구로 모습을 드러내는 흑의
인 하나가 있었다.
나이는 약관 정도, 지극히 준수한 모습의 소유자였다.
등에는 고검을 메고 있고 허리춤에는 은빛 보따리 하나를 걸친 미청
년의 신법은 가히 입신지경(入神之境)에 달했다.
그는 신발 바닥을 땅에 대는 것 같지 않은데, 몸이 나아가는 속도는
섬전을 방불케 했다.
그의 몸은 빙무(氷霧) 냉하(冷霞)로 완전히 가리어진 상태였다.
"흠, 이곳이 천목산 중 절지(絶地)라는 냉하곡(冷霞谷)이 분명한데?"
중얼거리는 흑의미청년은 망망신니에게서 신비마궁에 대한 소문을 듣
고 자초지종을 알아보기 위해 급히 달려온 옥면살성자 냉운이었다.
냉운은 지금 냉하곡의 초입에 이른 중이었다.
휘휘휙!
곡풍(谷風)이 불어닥치며 차가운 기운이 옷소매 속으로 파고들었다.
뼈를 깎는 한기(寒氣)였다.
"지독한 추위군. 내공이 약한 사람은 이 추위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
냉운은 중얼거리다가 냉하곡의 심장부를 향해 신형을 폭사시켜갔다.
십 장 갔을까.
"아니?"
냉운은 호리병 모양을 한 곡구(谷口) 근처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며
흠칫 놀라게 되었다.
"시체군."
냉운의 망막 안으로 들어오는 열다섯 구의 즐비한 시체더미가 있었다
. 언뜻 보면 얼음덩이로 보일 정도로 꽁꽁 얼어붙은 시체였다.
극심한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얼어붙은 사람들일까?
냉운은 시체의 산을 향해 접근해 가다가 다시 몇 구의 시체가 얼음
구덩이같이 되어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마치 무림기인전 안과 같은 백골산(白骨山)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왜 여기 죽어 있을까?"
냉운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흩어져 죽어 있는 시체의 수는 근 일백 구에 달했다. 시체 근처 검과
도가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무림인들임에 틀림없었다.
언제 죽었는지 모를 시체들이었다.
추위가 강한 곳이라 오래 전에 죽었다 해도 시체의 모양이 변화하지
않을 것이니, 언제 죽었는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잠시 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냉운은 짙은 안개 속에 우뚝 서 있는
검은 비각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한쪽 벼랑의 밑바닥 부분을 움푹 판 다음 만든 비각이었다.
비각의 지붕은 오색기와로 되어 눈을 현란하게 했고, 기둥은 황금(黃
金)으로 이루어져 다시 한 번 놀라게 했다.
비각 가운데 서 있는 금비(金碑) 하나가 있었다.
높이 일 장, 폭이 세 자 되는 금비는 완전한 순금으로 되어 있고 정
면에 큼직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신비마궁(神秘魔宮)에 들어오는 자를 환영한다.
신비마제는 뛰어난 사람을 찾아 천하군림(天下君臨)의 대업을 이룩하
고자 한다. 신비마제와 함께 군림천하하고 싶은 사람은 주저하지 말
고 냉하곡 안으로 들어와라. 냉하곡 안 신비마궁까지는 관문(關門)이
있다. 하나, 천하를 좌우할 용자(勇者)들에게는 장애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관문을 만든 까닭은, 자신의 실력을 알지 못하고 만용을 부
리려 하는 무리들을 금하기 위함일 따름이도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감히 무림기인전의 흉내를 내다니…….'
냉운은 호승심을 자극하는 글귀를 보고 비웃음을 금할 수 없었다. 신
비마제는 불사검제의 무림기인전을 흉내 내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천하를 내려다보고 무림인들에게 신비함을 주는 동시에 호승심을 자
극하는 관문을 만들어 두었을 줄이야…….
그렇다면 근처에 뒹굴고 있는 시체는 신비마궁을 찾아왔다가 냉기(冷
氣)를 이기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임에 틀림없었다.
신비마궁이 세워진 지 불과 십여 일, 그 사이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
었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극한관(極寒關)>
신비마궁이 만든 첫 번째 관문.
한담의 한기를 이용해 만든 극음지관으로 내공수위 삼십 년 이하인
자는 한기를 견디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
"흥! 무슨 속셈으로 이런 수작을 부리는지 알지 못하겠군. 하나, 내
가 온 이상 더 계속하지 못한다."
냉운은 오만히 외치며 안개 속에 버티고 서 있는 금비를 향해 손을
번쩍 쳐들었다. 일 장을 내쳐 금비를 박살내기 위함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쯧쯧!"
어디선가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비마궁 사람이 되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 같은데, 무엄히도 신비
마궁의 물건을 파괴하려는가?"
안개 속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홍의복면인 하나가 있었다.
"누구냐?"
냉운이 차갑게 외치자.
"나는 신비마궁의 첫 번째 관문 극한관을 지키는 일관주(一關主)이다."
홍의복면인이 냉운에게서 이 장 떨어진 곳에 서서 거만히 말했다. 냉
운이 누군지 알고 있다면 그렇듯 오만무도한 자세를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모르는군.'
냉운은 홍의복면인에게 손을 쓰려다가 무슨 속셈인지 손을 거두어들
이고 낭랑히 웃었다.
"이곳이 신비마궁으로 가는 길이 틀림없소?"
"물론이다. 신비마제가 저 안에 계시다. 신비마제는 너같이 무공이
뛰어난 젊은이들을 원하고 있다. 신비마궁까지 가는 길에 마련되어
있는 관문을 통과하는 도중 무공 수준이 나타날 것이고, 그에 따라
신비마궁 안에서의 지위가 배정될 것이다."
"재미있군."
"아주 공평한 방법이다."
"관문이 몇 개요?"
"그것은 말해 줄 수 없다.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네가 신비마궁
의 일관을 통과했다는 것뿐이다."
홍의복면인이 음침히 웃다가 소매 속에서 붉은 끈으로 만든 동심결(
同心結)을 꺼내 냉운 쪽으로 집어던졌다.
"네 것이다."
매듭이 허공을 날아 냉운의 손 안으로 쥐어졌다.
아주 화려한 모양을 한 매듭이었다.
"이게 뭐요?"
"흐흐……, 일관을 통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신표이다. 그것을 가진
사람은 신비마궁의 홍의대(紅衣隊)에 속하게 된다."
"홍의대가 뭐요?"
"신비마궁에서 가장 얕은 지위다. 하나, 강호에서는 고수로 불릴 수
있는 지위이다. 너는 홍의대가 됐다. 축하한다."
"나는 홍의대 정도로 만족할 수 없소!"
냉운은 비웃으며 홍색 매듭을 움켜쥔 손에 힘을 가했고, 삼매진화가
일어나며 홍의대 신분을 상징하는 매듭이 한순간 재로 변해 버렸다.
"좋아. 오만할 정도로 무공이 강한 놈이군. 하긴 너 정도 되면 홍의
대 정도에 만족할 수야 없겠지. 하지만 불경은 바로……."
홍의복면인의 눈에서 살광이 폭사되었고, 그 순간 손가락 다섯 개가
일제히 퉁겨졌다.
활시위가 잇달아 당겨지듯 파공성이 울려 퍼지며 다섯 줄기 지력이
일어나 허공을 갈랐다.
지력이 향하는 곳은 냉운의 심장 부근이었다.
"흥! 개방( 幇)의 풍뢰지력(風雷指力)이군."
냉운은 홍의복면인의 수단을 한눈에 알아보며 소매를 가볍게 흔들었
다.
아무런 바람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냉운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
던 지력이 폭음과 함께 산산이 흩어지는 동시에 복면인의 몸이 뒤로
벌렁 나뒹굴어 갔다.
"크으으……!"
홍의복면인이 쥐어짜는 소리를 내며 안개 속으로 도망쳐 갔다.
그가 서 있던 곳, 다섯 개 손가락이 얼음 위를 펄떡펄떡 뛰고 있었다.
'생김새로 보아 마사자(魔使者)임에 틀림없다. 개방의 수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개방 제자 중 배반자겠군.'
냉운은 홍의복면인이 사라진 쪽을 힐끗 바라보다가 골짜기 안을 향해
몸을 끌어올렸다.
그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얼음보다 차가운 안개가 보이지 않는 칼에
잘려 나가듯 갈라졌다. 무형의 호신강기로 빙무를 가르며 나가는 모
습은 가히 압권이었다.
절곡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냉기가 심해졌으나 냉운의 앞길을 조금도
막지 못했다.
반듯하게 세워진 목대(木臺).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기둥으로 삼은 소나무에서 은은한 솔
향이 배어 나오고 있다.
폭이 서른 걸음 정도 되는 골짜기를 꽉 막고 있는 목대의 높이는 이
장 정도, 그 근처에는 한 폭 지옥도를 연상케 하는 살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 머리통이 눈을 뒤집어쓰고 아무렇게나 굴러다녔고, 팔다리가 끊
어진 채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하나같이 예리한 병기에 잘린 시신들
이다.
"검(劍)에 잘렸군."
냉운은 흠칫 놀라다가 목대 아래 세워져 있는 또 하나의 금비를 보게
되었다.
<신비마궁의 제일관을 통과한 것을 환영한다. 이곳은 제이관(第二關)
검관(劍關)이다. 검관주(劍關主)의 시험을 거친 자는 청의대(靑衣隊
)로 들 것이며, 삼관으로 들 자격을 얻는다.>
먼젓번 금비 위의 글씨와 똑같은 글씨체였다.
'악독한 놈들. 관문을 통과하려는 사람들을 이렇게 주살하다니…….'
신비마궁에 대한 살감이 더욱 강하게 일어났다.
신비마제는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삼대거파와는 다른 방식으로 강호
를 경영해 왔다. 삼 파가 마성에 물든 자들을 닥치는 대로 휘하로 받
아들일 때, 신비마제는 절정의 무사들만을 골라 수하로 삼았다.
마사자의 무공은 구 파 장문인 셋을 합친 것보다 강하다. 신비마제의
휘하에는 약졸이 없다. 잔혼사, 수라신궁, 백화궁이 급속도로 세력
이 약화됐으나 신비마제의 세력은 눈덩이 구르듯 강성해지고 있다.
천목산에 세워지는 신비마궁으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까닭은, 신비마
제를 마도제일인으로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 마궁이 세워지는 날, 천하가 마제 앞에 굴복하게 된다.
천하에 이러한 소문이 퍼지고 있다.
무림을 보이지 않는 공포로 몰아넣은 신비마제. 마궁이 완성되면 그
의 정체가 드러나게 된다. 그때도 그에게 신비감이 남아 있을는지…
….
냉운이 금비를 노려보고 있을 때, 절곡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휘이익!
서쪽 벼랑에서 표표히 떨어져 내리는 홍의인영 하나가 있었다.
등에 검신이 넓적한 보검 한 자루를 둘러메고 있는 홍의복면인. 그는
수십 장 거리를 한 마리 혈응마냥 날아들더니 목대 위로 사뿐하게
떨어져 내렸다.
"으하하……!"
홍의복면인은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비무대 위로 사뿐히 떨어져 내
리며 아주 거친 투로 웃어제쳤다.
'낯익은 목소리군.'
냉운이 움찔할 때, 홍의복면인의 눈빛이 이채를 뿜어냈다.
마광으로 물든 눈빛, 그 깊숙한 곳에는 알 수 없는 빛이 흐르고 있다
.
"으음, 이제 보니……."
냉운은 저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려댔다.
'혈영신마를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형상 원공노인에게 제압돼 십 년 간 제자로 머물러 있다 원공노인을
독살하며 마도로 들어선 혈영신마. 그가 벽독신주를 주지 않았다면
냉운이 무림기인전주가 되는 기연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냉운은 선뜻 손을 쓰지 못했다.
혈영신검가 그를 쏘아보며 쇠북 치듯 큰소리로 말했다.
"신비마궁은 과거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내력을 지녔건 따지지 않
는다. 신비마궁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두 받아들인다. 나는
신비마궁의 이관주(二關主)로 너를 시험해 보겠다."
이상하게도 그는 냉운을 처음 대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이미 마성이 골수까지 찼기에 냉운을 몰라보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기괴한 성격이 발동한 탓일까?
냉운이 의아함을 느낄 때, 혈영신검마의 검이 뽑아지며 검광을 뿌려
댔다.
치리릿 ―.
핏빛 검망(劍芒)이 뿌려지며 일대가 붉은빛에 젖어들었다.
마검(魔劍) 혈마흔(血魔痕).
무림 백대병기 안에 꼽히는 보검으로 그 검신에 하나의 마검결이 적
혀 있다. 혈영신마는 그것을 익힌 후 마도고수의 반열에 자신을 이름
을 넣을 수 있었고, 들끓는 마성으로 인해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게
되었다.
파파파팟!
무수하게 피어오르는 핏빛 검화.
허공을 붉게 물들이던 검망은 이내 하나로 뭉쳐져 한 줄기 홍광(紅光
)이 되어 냉운의 목젖을 노리고 들어왔다.
혈영신마가 장기로 삼고 있는 혈영낙화혼(血影落花魂).
기이한 마검식이 거기 배가되어 있기에 강호상에 알려진 것보다 검초
는 더욱 독랄했다. 빈틈을 보이는 순간 검극은 목젖을 파고들 것이고
, 대지는 혈우에 젖게 된다.
냉운은 검파가 한 자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허리를 가볍게 꿈틀거리
는 동작으로 검세를 피해냈다.
파팟!
검은 대상을 놓치고 애꿎은 바위에 거미줄 같은 검흔을 새겨 넣었다.
"좋아, 빠른 신법이로군."
혈영신마는 감탄사를 연발해 내며 검초를 더욱 빠르게 전개해 냈다.
그는 어느새 냉운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고, 그의 손이 떨쳐지며 검영
수백 개가 만들어졌다.
그는 잇달아 칠 초의 마검식을 연환으로 전개해 냈다.
인정이란 조금도 느껴지지 않은 살초(殺招)!
혈영신마는 냉운을 죽여야 직성이 풀린다는 듯 거듭 가공할 마검식을
전개해 냈다.
냉운은 차마 손을 쓰지 못하고 피해만 다녔다. 무영신법을 익히지 않
았다면 피부를 베이는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십오 초가 순간적으로 지나갔다.
"차앗!"
혈영신검은 냉운을 시체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릴 듯 신검합일(身劍合
一)해 냉운의 등판을 향해 검 무지개를 만들었다.
'진짜 나를 죽일 작정이로군.'
마침내 냉운의 검미가 칼끝처럼 일어났다. 피하기만 한 것은 과거의
은혜를 잊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그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 은원은
더 이상 없는 것이다.
냉운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혼신진기를 일으켰다.
'죽여 버리겠다.'
번쩍 쳐들린 우수에 불사현공이 모아졌다.
그 순간 혈영신마의 검이 다가왔고, 냉운은 이형환위로 슬쩍 검봉을
피하며 우수로 기이한 원호를 그렸다.
거칠게 다가서던 검극이 그 순간 허공에 멈추었으며, 이내 수십 조각
의 철편으로 부서진다. 마검 혈마흔을 쇳조각으로 만든 손은 멈추지
않고 혈영신마의 가슴을 향해 뻗어나갔다.
한 치만 더 뻗어나가면 혈영신마의 몸뚱이 역시 부서지고 말리라.
"신비마제보다 낫군. 혼신공력을 그렇게 간단히 막아내다니……."
냉운이 손을 더 이상 뻗어내지 못한 건 귓가를 파고드는 전음 때문이
었다.
혈영신마의 눈빛이 야릇한 빛을 띠고 있지 않은가.
냉운은 기이함을 느끼며 멈칫했고, 혈영신마는 그 한순간의 틈을 놓
치지 않고 삼 장 높이 날아올랐다.
모든 것은 찰나지간에 벌어진 일이다.
누군가 봤다면 냉운이 검을 장력으로 파괴시키는 순간 혈영마검이 몸
을 피했다 여겨질 정도로.
혈영신마는 운리번신의 신법으로 크개 선회를 하더니 목대 위로 사뿐
하게 내려섰다.
"노부를 꺾은 이상 검관을 통과한 것이다."
그의 음성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냉운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혈영신마는 분명 냉운을 알고
있다. 좀 전에 보여 주었던 눈빛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냉운에게 혼신의 공세를 펼친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
냉운은 침묵하며 그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혈영신마는 마광이 번득이는 시선으로 냉운을 응시하더니, 품안에서
청색 실로 만든 매듭 하나를 꺼내 냉운에게 던져 주었다.
"그대는 청의대가 되었다! 청의대로 머물고 싶으면 나를 따라가고,
더 높은 지위로 오르고 싶다면 계속 들어가라!"
"으음……."
냉운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청색 매듭을
움켜쥐었다.
그것을 태워 버리려는 찰나였다.
"지금은 안 된다. 여길 벗어난 다음 해도 늦지 않다."
고막 속으로 파고드는 모기 소리만큼 가는 목소리가 있었다.
혈영신마의 목소리가 아닌가.
"으하하하……!"
곧바로 포악한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작은 목소리는 전음입밀로 한 것이고, 지금 웃는 것은 일부러 진기를
모아 외치는 것이었다.
"……."
냉운은 흠칫해하며 혈영신마를 쳐다봤다.
혈영신마는 여전히 싸늘한 눈빛을 던지고 있다.
"네가 누군지 모르나 무공이 막강하다는 데 놀랬다. 나를 따라가 청
의대로 만족하느니, 계속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혈영신마는 말을 마치는 순간 훌쩍 날아 올라갔다. 안개가 그의 신형
을 감췄고, 답답한 정적이 시작되었다.
'내게 무엇을 바라는 눈치였는데…….'
냉운은 야릇한 심정이 되어 혈영신마가 집어던진 청색 매듭을 내려다
보았다.
극한관을 통과하면서 받은 붉은 매듭과 똑같은 생김새였고, 빛깔만이
다른 매듭이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매듭이 불룩하다는 것이었
다.
그 안에 어떤 물건이 들어 있는 것처럼.
'설마, 내게 전하는 물건이 들어 있단 말인가?'
의문이 구름처럼 일어났으나 매듭을 풀어헤치지 않았다.
혈영신마의 당부도 있었으나 미약하나마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
미세하게 느껴지는 살기.
누군가 그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안개 속에 머무르고 있는 자, 그는 호흡과 심장 소리마저 강기막 안
에 가둔 채 냉운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 있다.
냉운은 그제서야 혈영신마가 전음을 전한 까닭을 알 수 있었다.
"후후……, 어찌 신비마궁의 관문 따위가 나를 막을 수 있단 말이냐?
어떤 관문이라도 부숴 버리고 말 것이다."
냉운은 비웃듯 목대를 바라보다가 훌쩍 날아올랐다.
그가 이관에서 사라진 직후 안개 속에서 붉은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혈영신마의 애검이 부서져 흩어진 곳에 소리 없이 내
려섰다.
"무형강기로 혈마흔 검을 부수다니…… 역시 본좌의 적수가 될 만한
놈이다."
그는 철편으로 변한 혈마흔 검의 잔해를 보더니 슬쩍 소매를 흔들었
고, 철편은 이내 고운 모래로 변해 버렸다.
"옥면살성자 냉운! 네놈이 강한 것은 인정하나, 본좌의 적수가 될 수
없다. 후후, 어찌 됐건 네놈은 죽을 수밖에 없다."
악마의 음성보다 잔혹한 음성이 흘렀고, 그의 모공에서 너무도 차가
운 잿빛 기류가 흘러나왔다. 어찌나 차가운지 한기를 띤 안개마저 얼
어붙을 지경.
잿빛 기류가 흩어졌을 때 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골짜기는 좁고 길었다. 골짜기 초입에서 현빙담이 있는 분지까지 가
는 거리는 무려 오 리(里)에 달했다.
냉운은 차가운 안개로 휘감겨 있는 골짜기 안을 달리다가 으슥한 곳
에 이르러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매듭 사이로 칠채보광(七彩寶光)이 흘러나왔다.
"벽독신주(劈毒神珠)!"
놀랍게도 매듭에 감춰진 물건은 벽독신주였다. 그 외 쪽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쪽지는 아주 단단히 뭉쳐져 있었다.
"이것을 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냉운은 궁금해하며 쪽지를 풀어 보았다.
깨알만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잘 쓴 글씨는 아니었으나 정성 들여
쓴 글씨임에 틀림없는 글이었다.
<네가 이것을 보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무림기인전의 후예 옥면살성
자가 어찌 노부의 시시한 검초 아래 죽겠는가?>
'으음, 내가 어디 출신인지 이미 알고 있단 말인가?'
냉운은 적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냉운의 사문을 짐작하고 무사히 살아 남으리라 여겨 맹공을 가하다니
……
과연 혈영신마다운 행동이었다.
냉운은 쓴웃음을 지으며 글을 계속 읽어 나갔다.
<여러 관문은 신비마궁이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한 관문이 아니고 너
를 죽이기 위한 관문이다. 여기까지 온 이상 무사히 나가기는 힘들게
되었다. 하나, 인정(人情)에 끌리지 않는 한 아직 너를 이길 고수가
없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명심해야 한다. 신비마제가 준비한 함정은 너의 인정(人情)을 시험하
는 관문이라는 것을!
견디기 힘들 일이 닥칠 것이다. 그러나 대의(大義)를 위해 사정(私情
)을 포기해야 한다. 네가 꺾이게 되면 억조창생이 신비마궁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사사로운 정
을 끊어야 한다. 그러면 너를 노린 함정은 신비마궁의 무덤으로 변화
될 것이다. 벽독신주를 돌려주어 노부가 너를 아직 잊지 않았음을 알
린다. 부디 노부의 권고를 잊지 마라.
신비마제는 냉혈마(冷血魔)다. 너를 해치기 위해 갖은 수단을 쓸 것
이다!>
구절구절 끈끈한 정이 배어 있다.
혈영신마는 냉운이 그를 생각하는 이상으로 냉운을 아끼고 있지 않은
가.
원공노인이 그를 죽이지 않고 십 년 간 마성을 씻어 준 결과가 이제
야 나타나는지, 아니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건네준 벽독신주로 인해
냉운이 무림기인전을 열었다는 데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이 모든 것이 나를 노리는 함정이란 말인가?"
냉운은 다시 쪽지 안의 글을 읽어 보았다. 인정에 끌려서는 안 된다
는 대목이 눈에 거슬렸다.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인정에 끌리면 안 된다니…… 가차 없이 살수
를 전개하란 말인가?'
냉운은 혈영신마의 진의를 알 수 없었다.
그는 궁금증을 간직한 채 삼매진화를 일으켜 쪽지를 재로 만들었다.
'신비마제가 저 안 어딘가에 있다면 강호행(江湖行)이 단축될 수 있
다.'
냉운은 벽독신주를 거두어들이며 구절양장같이 이어지고 있는 냉하곡
안의 지세를 살펴보았다.
안개는 갈수록 짙어졌고, 추위도 강해진 상태였다.
"계속 가 보자!"
냉운은 혈영신마의 글을 뇌리에 새기고 다시 냉하곡 안을 향해 나는
듯 달리기 시작했다.
이십 장 갔을까.
골짜기가 급히 휘어지는 장소에 세워진 작은 정자(亭子) 하나가 있었
다.
<신비마궁(神秘魔宮) 제삼관(第三關) 독관(毒關)>
정자의 처마 아래 황금빛 편액이 걸려 있었다.
정자 안, 냉운이 다가서는 것을 바라보며 눈을 끔벅끔벅하고 있는 홍
의인 하나가 있었다.
홍의인은 복면을 착용하고 있어 전형적인 신비마사자 차림이었다. 그
앞에는 향로 하나가 놓여 있고 향로 뚜껑 틈으로 붉고 푸른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홍의인은 두 손바닥을 펼쳐 향로에서 일어나는 김을 쏘이는 중이었다
.
냉운은 정자를 발견하는 순간 천마행공(天馬行空)의 신법을 시전해
정자 바로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정자 주변은 그 동안 거친 이관과는 달리 깨끗했다.
"네가 삼관주(三關主)냐?"
냉운이 차갑게 묻자, 홍의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몇 명이 여기까지 왔으나, 무사히 온 자는 네가 처음이다."
노소(老少)를 구분할 수 없는 삭막한 음성이다. 복면 아래 어떤 얼굴
이 들어 있는지 음성만으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인간의 정서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음성. 극악한 사공을 익혔거나 변
성을 해 본래의 음색이 사라졌기에 그런 무색의 음성으로 들리는 것
이리라.
냉운은 이미 살망(殺網)에 걸려든 상태. 보이지 않는 비수날이 온몸
을 난자할 기세로 다가오고 있다.
'대체 누구란 말인가?'
냉운은 삼관주가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는 데 충격을 받으며 호신강기
를 강하게 끌어올렸다.
그는 이제껏 네 명의 마사자를 접한 바 있다.
청성신협 방호, 무당의 백우자, 극한관을 지키고 있는 개방 출신의
괴고수, 검관주로 나타난 혈영신마.
그 하나하나 이미 절정고수의 반열에 올라선 자들이었으나 정체불명
의 삼관주를 능가하지 못했다. 그런 자가 삼관을 지키고 있다니……
앞으로 마주칠 관문을 지키는 자는 어떠하겠는가?
냉운은 새삼 신비마궁의 힘에 경탄을 했다.
삼관주의 눈빛이 돌연 강해졌다.
섬광이 작렬하듯, 눈알을 후벼팔 듯 쏘아지는 빛이 너무도 강렬하다.
냉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그의 시선을 응시했다.
삼관주는 냉운이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자 안광을 거두며 예의 무색
의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나는 단 일 장(掌)으로 시험을 마치라는 마제의 명령을 받았다. 일
장을 받아내면 회의대(灰衣隊)가 된다."
삼관주은 왼손을 들어 정자 아래를 가리켰다. 회색 매듭 하나가 정자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회의대는 상당히 높은 지위다. 회의대에 들게 되면 이후 평생을 신
인(神人)같이 살 수 있지. 최후 관문까지 통과한다면 일인지하 만인
지상의 위치에 오를 수도 있고."
"썩은 물에서 호강하느니, 이대로가 낫다."
"그렇게 살아도 탓할 사람은 없지."
삼관주는 천천히 말하며 매듭을 가리켰던 왼손의 방향을 냉운 쪽으로
향했다.
그와 냉운 사이의 거리는 삼 장 정도. 꽤 먼 거리라 할 수 있으나 절
정 고수자들에겐 지척지간이라 할 거리였다.
삼관주의 왼손은 어느덧 검은색으로 변해 있다. 흑옥(黑玉)을 깎아
만든 듯 윤기마저 흐르는 손. 기이한 사공을 익혔음에 틀림없다.
냉운은 붉고 푸른 연기를 토하고 있는 향로와 삼관주의 검게 변한 손
을 번갈아 응시했다.
'독관주라 한 것은 독공(毒功)을 익혔기 때문이었군.'
냉운이 그렇게 짐작할 때, 삼관주의 손바닥이 돌연 두 배로 부풀어오
르기 시작했다. 검은색을 띠었던 손바닥에서 청홍자녹(靑紅紫綠), 네
가지 색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설마, 오행마강(五行魔 )이란 말인가?'
냉운은 일순간 굳은 표정이 되었다.
불사검제가 남긴 글귀 하나가 뇌리를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신마(神魔)의 무공은 극랄하다. 익히기 어려운 반면 그 위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쌍수를 다섯 가지 독물에 담가 독기를 흡수한 후
동정녀의 음기(陰氣)를 취해야만 얻을 수 있는 오행마강은 절대독강(
絶代毒 )이라 불릴 정도로 가공하다.
완벽하게 익힐 경우 손바닥이 흑홍청자녹, 다섯 가지 색으로 변하는
데 강기에 내포된 독기는 금강불괴를 녹일 정도이다.
내공이 사 갑자 이하인 자는 익힐 수 없으며, 그 위력은 신마의 최고
절학 혈화천지참의 칠 성(成) 정도. 오행마강을 시전하는 자가 있다
면 무조건 참살해야 한다.>
냉운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불사현공(不死玄功)을 칠 성으로 끌어
올렸고, 그 순간 삼관주의 왼손이 쭉 앞으로 내뻗어졌다.
흑홍청자녹, 다섯 가지 색깔이 눈부신 섬망으로 변하며 다가왔다. 그
와 함께 비릿한 독향이 밀려왔다. 냉운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급
히 진기를 일주천시켰고, 한 줄기 뇌섬으로 다가오는 오색독강을 향
해 장력을 발출해 냈다.
바로 그 순간, 삼관주의 오른손이 허공을 가르며 무형의 경력을 뻗어
내는 것이 아닌가.
냉운은 불사검제의 무공을 익혔으나 강호 경험은 아직 일천하다 할
수 있다. 삼관주는 이미 수백의 혈전을 거친 노련한 고수. 그가 노린
필살수는 오색독강이 아닌 오른손의 무형수였다.
냉운의 장력이 오색독강과 마주하는 순간 섬뜩한 경력이 가슴팍을 후
려 갈겼다.
호신강기를 파고드는 장력.
쾅!
"크으윽……!"
냉운은 심장 부위에 찢어질 듯한 통증을 느끼며 열두 걸음 크게 물러
나 겨우겨우 신형을 안정시켰다.
앞가슴에 장인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천잠사로 된 옷이 완전히 녹았
고, 살가죽이 독기로 인해 검게 변해 있었다.
"이, 이럴 수가……?"
냉운은 육체의 고통보다 불사현공이 깨졌다는 데 경악을 했다. 칠 성
의 공력에 불과했으나 어떠한 강기류의 무공도 막아낼 것이라 여겼었
는데…….
냉운의 놀라움은 삼관주의 놀라움에 비할 바 아니었다. 삼관주는 어
찌나 놀랐는지 오장육부가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지, 지독한 놈! 금강불괴의 경지마저 뛰어넘다니……."
복면을 들춰보며 걸레처럼 일그러든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냉운을 향해 잔혹한 눈빛을 던지더니 훌쩍 날아올라 안개 속으
로 자취를 감추었다.
냉운은 쫓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쌍심마공(雙心魔功)을 익혀 동시에 두 개의 공세를 전개할 줄이야…
…."
독관을 지키던 자, 그가 누구였건 이제껏 냉운이 만나 본 자 중에 가
장 강한 자임에 틀림없었다. 잔혼사의 잔혼악승보다 오히려 강하게
느껴졌다.
오색독강에 마주친 손바닥은 완연한 검은색이다. 독기가 피부 속으로
파고든 결과였다.
냉운은 서둘러 품안에서 소림의 오공대사가 준 태환단(太丸丹)을 꺼
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분명 오행마강이다. 쌍마의 무공이었기에 불사현공을 파고든 것이다
."
신마의 절학이 아니었다면 그의 호신강기를 깨뜨리지 못했을 것이다.
불사검제의 무공에 적이 될 수 있는 것은 천하쌍마의 무공뿐이었다.
냉운은 천하쌍마 중 한 사람의 후계자였던 요지천마가 무림기인전의
일곱 관문을 격파하고 불사전 안까지 들어와 죽었다는 사실을 상기했
다.
소름이 오싹해졌다. 쌍마의 무공이 나타난다면 무림기인전의 무공으
로 안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냉운은 답답한 마음을 씻어내려는 듯 거듭 불사현공을 일으켰다. 진
기를 일주천시키자 몸 안을 파고든 독기운은 말끔하게 제거되었다.
태환단의 약효도 있었으나 혈영신검이 주고 간 벽독신주의 영향이 컸
다.
벽독신주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일각 정도 운기행공을 해야 독기를
제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냉운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다음 가슴팍에 새겨진 한 개 장인(
掌印)을 다시 살펴보았다.
심장 바로 위, 붉은빛을 띤 장인 하나가 새겨져 있다. 처음 새겨졌을
때는 검은빛을 띠었으나 이제는 완연한 선홍색. 하루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그가 금강불괴지신의 강한 신체를 갖지 못했다면 그 일 장으로 심장
이 으스러졌을 것이다. 그리고 만독불침지신이 아니었다면 독강으로
인해 썩어 문드러져 죽었으리라.
그리고 문득 냉운의 얼굴이 밀랍처럼 창백해졌다.
심장에 박힌 장인, 그 흔적은 냉운이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최심수(催
心手)의 흔적이 아닌가!
"설마, 그놈이……."
냉운의 눈에서 한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놈은 분명 신비마제이다. 교활한 놈! 수하로 가장해서 나를 공격하
다니…….'
더불어 이제껏 밝혀진 바 없는 냉가장의 원흉에 대한 의혹이 구름같
이 피어올랐다.
'그놈이 바로 그놈이라면…….'
냉운은 심장이 터질 듯한 압박감을 맛봤다.
그의 선친이 죽어 가는 오악신마에게 얻은 게 구절마제의 마패라는
건 이미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났다.
냉가장의 원흉은 구절마제의 마공과 악독하기 짝이 없는 최심마수를
익힌 자.
방금 전 삼관주를 가장해 나타난 자는 그 두 가지 마수를 동시에 펼
쳤다.
"그 자가 바로 수라신궁 안에서 수라천마를 죽인 백의인이고, 그리고
색혼경을 지닌 여인을 죽이려 했던 자이고…… 바로 내가 찾던 자다
."
냉운은 몸서리치며 냉하곡 안을 노려봤다.
신미마제라 의심되는 자가 사라진 골짜기 안은 여전히 짙은 안개에
덮여 안계를 방해하고 있다.
"놈이 신비마제가 분명하다면, 신비마궁은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냉운은 씹어뱉듯 말하며 성큼성큼 냉하곡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
했다.
그의 모습은 곧 안개에 가리어졌다.
그리고 안개에 가려진 절벽 면 위에서 나직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음, 지독한 놈."
절벽 중간 부위에 박쥐같이 매달려 있는 홍의인 하나가 냉운의 뒷모
습을 바라보며 흉흉한 안광을 뿌려냈다.
"최심마수에 격중되고도 살아나다니……."
그는 바로 삼관주였다.
삼관주는 안으로 도망치는 척했으나 사실 속임수에 불과했다.
그는 다시 돌아와 절벽 면에 몸을 밀착시키고 냉운이 어찌하는가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가히 신출귀몰한 움직임이었다.
"가히 천하제일고수이다. 그러나 이곳을 빠져나가지는 못하리라."
그는 씹어뱉듯 말하다가 안개 속을 부유하듯 스르르 날아올랐다.
모공에서 흘려내는 기류로 몸을 감추고, 움직일 때 어떠한 흔적도 남
기지 않는다는 유령잠마신(幽靈潛魔身).
구절마제를 끝으로 사라진 신마의 절정 경공술이 아니라면 그렇듯 신
묘한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