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께서 추천하신 책입니다.
황보윤 소설가가 쓴 ‘광암 이벽(바오로딸·1만4,000원)’은 조선시대 천주교 초기 지도자인 광암 이벽에 대한 삶을 꼼꼼한 문장으로 담은 장편소설이다. 유학의 나라 조선에 천주교 신앙이 수용되는 과정과 그 당시 조선의 사회상을 그리고 있다.
소설은 자발적으로 천주교 신앙이 태동하게 된 배경과 그 탄생 과정을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재구성하고 있기에 몰입감과 감동을 준다.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고자 하는 선비들의 만남 속에서 이벽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세상의 아픔을 고치고자 하는 뜻을 머금는 모습은 성가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소설에서 이벽은 천지만물의 이치에 대해 천주교로서 답을 얻었고, 가족과 나라의 압박에도 믿음으로 죽었다. 이벽의 성품과 학문 세계, 이벽의 가족 이야기 그리고 세례자 요한으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앙의 길을 닦아가는 과정은 생생하다.
소설은 이벽이 죽고 나서도 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마음의 불씨를 지폈는지도 함께 담았다. 이벽과 정약용, 두 사람의 관계가 사실과 허구를 오가며 우정과 학문과 종교를 중심으로 흥미롭게 전개되는 과정도 재미를 더한다.
황보윤 소설가는 서문을 통해 포천에서 이벽의 묘를 찾았으며, “이벽이 읽은 책들을 파고들었다. 읽으면서 이벽을 이해하게 되었다. 삼 년 동안 정조 시대 유학자들 사이에 머물렀다. 이벽을 대신하여 그들을 설득해야 했다”라고 썼다. <출처 : 전북도민일보>
---서문---
임오년(1822) 여름, 정약용은 회갑을 맞이했다. 죽음의 고비를 몇 차례나 넘기고 맞은 회갑이었다. 정약용은 순탄하지 않았던 생을 돌아보았다. 육십 년이란 긴 세월이 하룻밤 꿈처럼 아스라했다. 행복했던 날들은 뭉텅이로 사라지고 불운했던 시절만이 날 선 송곳처럼 폐부를 찔렀다. 분하고 답답한 심사가 치받칠 때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 - - - - - - - - -
긴 하루가 저물어 갈 무렵 반백의 상투머리를 수건으로 동인 사내가 문간으로 들어섰다. 볕에 그을린 가무잡잡한 피부와 골 깊은 주름은 정약용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사내는 정약용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주름진 눈꺼풀과 덮인 퉁방울 눈이 어쩐지 낯익었다. 이벽의 노비, 천복이었다. 이벽은 을사년(1785) 천주교 박해 때 서른 둘의 나이로 집 안에 갇혀 목숨을 잃었다. 삼십칠 년 전의 일이었다. 그리운 벗이고 우러르던 스승이었지만 삶과 죽음으로 갈라진 지 오래이다. - - - - - - - - - -
정약용은 먼 과거로부터 당도한 천복을 의심의 눈길로 살폈다. 천복은 뜻밖에도 빛깔이 누렇게 변한 서신 한 통을 꺼내놓았다. 이벽이 남긴 글이라는 말에 정약용은 적이 놀랐다.
- 이것이 정녕 광암 공의 서찰이란 말이냐?
- 그러하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나리께 전하라는 말씀을 남겼습니다.
-허면 운명하기 전에 쓰신 것이더냐?
-예, 나리.
-어찌하여 이제야 가져온 것이냐?
- 송구하옵니다...... . 서방님께서 돌아가시고 나리 댁을 찾았사온데 그날따라 대문이 잠겨있었습니다. 도리 없이 바위 밑에 넣어두고 이제나저제나 기다린 것이...... .
우인友人, 미용에게 보낸다.
미용,
상현달이 남쪽 하늘에 걸려있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을 벽에 기대고 앉아 밖을 내다 본다. 나무에 깃들은 새들도 잠들었는데 깨어있는 것은 나와 바람뿐이다. 밤바람에 달그림자가 고요히 흔들린다. 달이 하늘 가운데를 벗어나 서쪽으로 기울고 있다. 달이 떨어지는 곳을 땅 끝이라 생각했다.
계사년(1773) 정월, 녹암 선생을 따라 주어사에 갔다. 선생의 책보에는 서학 책이 들어있었다. 서양의 학문은 유학의 천원지방天圓地方을 뒤집었다. 땅은 달항아리처럼 둥글고 해와 달은 둥근 땅을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했다. 구만리나 떨어진 나라에서 배를 타고 왔다는 서양 학자의 증언은 믿을 만했다. 그들은 땅과 천문의 만물을 만든 이가 천주라고 했다.
내 나이 스물이었다. 나는 유학을 접고 서학을 파고들었다. 천진암은 책과 씨름하기에 맞춤한 장소였다. 나는 천진암의 전나무 숲에서 이십 대를 보냈다. 바늘잎이 나무밑동에 떨어져 켜켜이 쌓이는 시간 속에 머물렀다. 햇볕과 바람과 비와 눈이 나무를 거목으로 기르는 동안 나의 시간은 명례방으로 흐르고 있었다. 녹암 선생과 만천, 자네의 시간도 같은 곳으로 흘렀다.
미용, 명례방 집회는 여럿이 힘써서 얻어낸 결실이었다. 저마다 한 몸에 딸린 지체처럼 머리가 되고 손발이 되어 입교식을 치르고 칠 일마다 교리 강학을 열었다. 반상의 예와 법도에서 멀찍이 비켜 선 명례방은 평등의 다른 이름이었다. 양반과 중인과 상민이 한자리에서 묻고 답하고 먹고 마셨다. 조선 천지 어디에도 없는 낯선 풍경이었다. 그러나 가슴 뛰며 함께하던 시절은 짧았다 새로운 도가 나타날 때마다 이단으로 몰았던 것이 이 나라의 역사였다. 형조의 탄압으로 명례방은 와해되고말았다.
모두의 집안은 들쑤셔진 벌집이 되었고 나는 집 안에 갇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밤낮으로 생각의 탑을 쌓고 허물었다. 자네와 만천이 천주에게 등을 돌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모든 것이 허위虛位로 돌아간 현실이 참담했다. 먹을 수도 잠들 수도 없었다. 육의 기력이 쇠하자 영도 시들어 갔다. 영육이 피폐해진 날에 자네가 찾아왔다.
미용,
자네는 천주를 떠나 주역으로 돌아가 있었다. 지금은 겸괘謙卦의 시기이니 차후를 도모하자 했다. 겸괘는 음효 다섯이 양효 하나를 짓누르는 모양새였다. 산이 땅 밑에 있으니 흙이 무너지고 산이 솟아오를 때를 기다리자는 자네의 말이 백번 옳았다. 나는 말기운이 넘치는 자네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복숭앗빛 뺨에 새까만 눈동자와 부시게 흰 도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네에게서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도성의 향내였다. 배교한 자네의 몸은 윤기로 반들거리고 있었다. 어쩐지 자네의 배교가 온당해 보였다.
천주를 버리는 데는 하룻밤이면 충분했다. 고단한 영이 지루한 싸움을 끝내자 기다렸다는 듯 걸귀가 육을 장악했다. 영이 떠난 육은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눈은 희번덕이며 먹을 것을 찾았고 입은 흙이라도 퍼먹을 기세였다. 네발로 가는 한 마리 금수, 그것은 바로 나였다. 궁지에 몰리면 누구든 금수가 될 수 있었다. 자네는 그것을 일깨워 주었다.
미용,
촛불이 일렁인다. 반 뼘쯤 남은 양초는 날이 새기 전에 수명을 다할 것이다. 명례방의 불씨도 이와 같다. 가물거리는 불씨를 살리려면 잘 마른 장작을 넣어야 한다. 나무는 태양으로부터 온 화의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 어디 나무만 그러하랴. 자네와 나도 뜨거운 발길을 품고 있다. 나는 이미 타오를 준비를 마쳤다.
약망,
자네와 나는 같은 날 성세를 받았다. 나는 약한, 자네는 약망.
약한은 야소를 세상에 알린 자였고, 약망은 야소의 생애를 기록한 자였다.
그러니 기록하라.
이 땅에 박해의 먹구름이 몰려올 것이다. 모진 바람이 불고 흙비가 나릴 것이다.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벗과 벗이 맞설 것이다. 천주를 믿는 무수한 이가 형장으로 끌려갈 것이다. 고향은 버려지고, 끝내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을 똑똑히 보고 낱낱이 적어라. 나는 이름대로 사는 길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렸고, 다음 주자는 자네다.
짙은 어둠이 물러가고 있다. 새벽빛이 붉다.
을사년 유월 초엿새, 덕조가 쓰다.
이벽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있다. 타오를 준비를 마쳤다거나 달릴 길을 다 달렸다는 문장이 그것이었다. 이벽의 서신은 다름 아닌 유서였다. 편지를 든 정약용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유서라는 것 외에 정약용을 당혹하게 만든 것이 또 있었다. 그것은 서신에 적힌 이름이었다.
'약망!'
이벽은 글의 말미에서 자신을 약망으로 불렀다. 정약용은 그 이름을 의금부 추국청에서 들었다. 그 이름을 버리고 목숨을 부지하여 유배 길에 올랐다. 해배되어 돌아왔을 때 늙은 몸을 반겨준 것은 둥치가 굵어진 팥배나무뿐이었다. 뜰에서 뛰놀던 형제들은 불귀의 객이 되었고 사랑채를 드나들던 벗들은 그림자도 내비치지 않았다. 고향의 강물 앞에 서자 강진 앞바다에서 느꼈던 멀미가 일었다. 살아남은 자의 회한이었다. 약망이라는 이름은 그 굴곡진 세월을 원점으로 되돌리고 있었다.
*약한若翰 : 세례자요한
*약망若望 : 사도요한
*이벽 : 자는 덕조德祚, 호는 광암曠菴
*정약용 : 자는 미용美庸, 호는 다산茶山 여유당與猶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