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김 준 선
1904년 독일계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이론물리학의 대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어릴 때부터 천재로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지적호기심이 매우 높았고 7개국의 언어를 구사했다. 여러 대학에서 공부했고 교수로 일했다.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의 소장으로도 일했다.
제2차 세계대전당시 핵무기개발을 위해 만들어진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그때의 나치독일은 미국보다 먼저 핵무기개발을 시작하고 있었다.
당시 나치독일은 산업시설이 세계최고 수준이었고 원자폭탄 개발에 필요한 기술과 능력은 최고였다. 나치는 1939년9월15일 비밀회의를 열어 우라늄원자폭탄 개발을 전담할 우라늄클럽을 조직했다.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보다 3년이나 앞섰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주도아래 영국 캐나다가 참여한 핵무기 개발 계획으로 세계최초로 우라늄과 플루토늄의 핵분열을 이용한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프로젝트다. 초반에는 폭탄을 실제로 사용할 계획이 없었고 강력한 무기가 평화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약 나치독일이 핵무기를 먼저 개발한다면 세계가 나치의 손에 다 넘어갈 것을 우려한 미국이 핵무기를 먼저 개발하기 위해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개발 나치독일이 먼저 핵무기를 개발할 수 없도록 사활을 건 치열한 연합국의 정보전도 시작됐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우라늄의 원자핵분열이 가공할만한 폭발력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규명된 만큼 불안하고 비밀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순수과학연구가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을 핵무기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된 것이다. 연합국들은 이를 주의 깊게 지켜보며 초조함은 깊었고 연합국들은 핵무기개발 못지않게 나치독일의 핵무기개발 저지가 시급했다.
그즈음 나치는 핵무기개발의 중요한 한걸음을 먼저 내디뎠다.1940년 5월 노르웨이를 점령 우라늄핵분열유도에 필수적인 중수 (重水)를 대량 확보 했다. 노르웨이는 비료생산용 암모니아를 만들기 위해 물을 전기분해하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중수가 대량생산된 것이다. 윈스턴처칠은 곧바로 자신의 전쟁 전위조직인 비밀 특수 작전단 (SOE)을통해 중수를 생산 못하게 하거나 절대 독일로 운반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라고 지시했다. 프레쉬 맨 작전으로 명명된 과학자 군인 정보요원 으로 구성된 34명의 특수요원들은 무음 (無音)으로 낙하하려했으나 추운날씨와 구름 때문에 낙하지점을 찾지 못하고 밧줄이 끊어져 고난도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전원이 즉사하거나 독일군에게 총살당했다. 성공한 작전도 실패한 작전도 있었으나 영국의 집요한 방해에 부딪혀 나치의 핵개발이 늦어진 것이다. 물리학자 새뮤엘 가우드스밋을 중심으로 알소스팀을 만들어 유럽전역을 돌아다니며 나치의 원폭개발정보를 수집했다.
특히 유럽과학자들이 나치의 핵무기 개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적극 차단하는 정보활동도 전개했다. 또한 독일본토와 나치치하의 프랑스에 숨겨져 있던 약1000톤의 우라늄도 어렵게 찾아내 미국으로 보냈다. 성공에 한발 다가선 것이다.
미국의 최초 핵무기개발 성공 뒤에는 나치가 먼저 개발하지 못하게 집요한 방해도 했지만 연합군의 필사적인 저지활동과 희생이 있었다.
영국 특수작전단 (Special Operations Executive) 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요인암살 후방교란 등 특수작전 수행을 위해 설립된 비밀조직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나치는 여러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느라 원폭개발에 집중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특히 뛰어난 유대계 독일과학자들이 나치의 박해를 피해 대부분 미국의 맨해튼프로젝트에 합류한 것도 나치독일에게는 주요한 실패 원인이었다.
연합군의 저지활동이 없었거나 핵개발이 실패하여 나치독일이 먼저 원폭에 성공해서 호전적인 히틀러가 런던이나 뉴욕에 핵을 투하했다면 지금의 국제질서는 상상하기도 싫지만 완전히 다른 모습의 세상이 되어있을 것이다. 나치의 원폭개발 저지를 위한 연합국의 정보전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세기적 정보활동이라 할 수 있겠다.
과학자들이 나치원폭 개발을 막기 위해 비밀정보 활동도 마다하지 않는 등 능동적으로 나선 것도 높이 평가되어야하며 인류의 위기 앞에서 거리낌 없이 적극적으로 나선 용기는 진정한 지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영화는 미국이 성공한 핵개발로 전쟁은 끝냈으나 이로 인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간적으로 고뇌하는 오펜하이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일본은 핵에 대한 민감한 국민들의 정서 때문에 이 영화를 상영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해리트루먼대통령을 만난 오펜하이머는 원폭 피해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부담을 느끼며 내손에 피를 묻혔다고 말한다. 트루먼대통령은 내가 승인했고 내가 명령 했으므로 피는 내손에 묻혔다고 오펜하이머의 마음의 짐을 덜어 주려고 한다. 오펜하이머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인명피해를 줄이기 위해 핵무기개발을 제한할 것을 건의했지만 트루먼은 오히려 더 센 핵무기의 개발을 하려고 한다. 수소폭탄개발을 지지하는 에드워드텔러와의 대립과 동료들의 배신과 공산주의자라는 모함으로 인해 오펜하이머는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다. 노벨상후보에 세 번이나 올라도 상을 받지는 못했다. 세계는 본격적 핵무기개발에 돌입하고 인명살상을 막기 위해 그는 핵무기를 반대하는 입장이 된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같이 진행한 그의 동료 18명이 노벨상을 수상했다.1963년 린든 B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엔리코페르미 상을 받고 그는 명예를 회복했다. 배우 킬리언머피는 다양한 감정표현을 섬세하게 연기했고 많이 닮은 얼굴로 1967년 세상을 떠난 오펜하이머를 재현했다. 크리스토퍼놀란 감독은 영화사상 처음으로 흑백아이맥스필름을 도입했으며 주인공이 핵무기개발에 대한 죄책감으로 핵무기로 인해 거대한 버섯구름이 밤하늘에 퍼지면서 전 세계를 뒤덮는 환영을 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컴퓨터그래픽 없이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우리 머리위에 있는 북한의 핵은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을까. 풀기 힘든 어려운 숙제다. 핵 없는 세상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은 우리에게 정녕 오지 않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