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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가는 부산의 역사자료
♠♠♠ 조선시대 부산의 대일교섭 역사자료 ♠♠♠
1. 부산포왜관
왜관은 일본사절과 상인이 조선에서 외교와 무역을 하였던 곳이다.
조선이 개국한 직후에는 일본 배들이 마음대로 조선의 각 포구에 정박하였다.
이는 조선측의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는 것은 물론, 왜구가 사라지지 않은 터라 국가 안위가 염려되어
1407년(태종 7)에 처음 제포와 부산포에 왜관을 만들고, 1426년(세조 8)에 염포에도 왜관을 만들어
이곳으로만 일본 배들이 입항하도록 하였다.
일본사절도 왜관에 입항하여 잠시 머물다 서울로 올라갔고 무역상인들도 왜관에서만 거래를 하였다.
부산포왜관은 현 자성대공원에서 멀지 않은 지금의 부산진 시장 주변으로 당시 그 주변에는 담을 쌓아 조선사람과 자유로운 접촉을 막고, 일본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왜관에 왔던 일본사람은 거의 대마도
사람으로 무역상인, 어부가 대부분이고 생계가 어려워 왜관에 이주해와서 일본인을 상대로 작은 가게를
하던 상인도 있었다.
한편, 일본인의 왜관에 머무는 기간이 점점 늘어나고, 거주하는 사람도 증가하여 1494년(성종 25)
당시 부산포왜관에 거주하였던 일본인은 127가구에 453명 정도였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항거왜인
(恒居倭人)이라고 불렀는데 그 수가 점점 늘어나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였고, 왜관을 중심으로
일본인 마을을 이루기도 하였다.
왜관에는 관사(館舍)와 무역품을 보관할 창고는 물론 일본인이 거주하는 초가집이 밀집해 있었고
왜관 주변에 토지를 경작하기도 했다. 1407년 왜관이 만들어진 이래 1544년(중종 39)「사량진왜변」
으로 다른 곳의 왜관은 폐쇄되었고 유일하게 부산포왜관만이 조선 안의 단일왜관이 되었다가 이마저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2. 절영도 임시왜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이후 1609년(광해군 원년)에 일본의 요구로「을유약조(乙酉約條)」의
체결로 양국관계가 정상화 되어갔다. 또한 외교교섭이 논의되던 때인 1607년(선조 40)에 두모포
왜관이 설립될 때까지 강화교섭을 위해 온 일본사신들은 부산 절영도에 임시로 설치된 절영도가왜관
(絶影島假倭館)에 숙박하였다.
『선조실록』에는 당시의 부산의 왜관 사정을 설명하는 내용과 경운(慶雲)의『해차록』의 1607년
(선조 40) 2월 19일 기록 등을 종합하여 보면, 절영도에 설치된 임시왜관의 존속기간은 대체로
1603년(선조 36)으로부터 1607년(선조 40)에 걸친 전후 5년간으로 생각되며, 그 위치는 오늘날의
한진중공업 자리 또는 대평포매립지 일대로 추정하고 있으나, 학자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3. 두모포왜관
왜관은 일본사절과 상인이 조선에서 외교와 무역을 하였던 곳이다.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무역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건너와야
했다. 따라서 조선은 포구를 지정하여 일본인들의 거주와 상행위를 허용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제포(현 웅천), 부산포(현 부산), 염포(현 울산) 세 곳에 왜관이 있었고 허가없이 일본인과 조선인이 자유롭게 출입하는 것을 통제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이전의 왜관은 폐쇄되고 일본사절이 서울로 올라가 조선국왕을 알현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그후 일본과 국교가 재개되면서 조선은 1607년(선조 40) 부산포 한 곳에만 왜관을 지어 외교와 무역을 허락하였는데 이때 만들어진 것이 두모포왜관이다.
두모포왜관은 현재 동구 수정시장을 중심으로 약 1만평의 땅에 자리잡았는데 왜관 동문 밖에는 좌천(佐川)이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왜관의 동쪽은 바다에 접해있고 서, 남, 북쪽은 담을 쌓아 왜관의 경계로 삼았다. 지금 두모포왜관이 있었던 주변을 구관(舊館)이라고 부르는데 이 지명은 1678년(숙종 4) 새로 만든 초량왜관을 새로운 왜관 즉 신관(新館)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그런데 두모포왜관은 부지가 좁고, 수심이 얕을 뿐만 아니라, 남풍을 직접 받아 대형 무역선과 각종 배들이 정박하기에 부적합하였고, 부산진성 등 조선의 군사시설과 가까워 국가기밀이 누출될 위험도 따랐다. 따라서 이관(移館) 논의가 자주 대두되었고 마침내 1678년 초량왜관으로 그 기능을 넘겨주게 되었다.
4. 초량왜관
조선과 일본의 양국관계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특히, 일본사절 활동은 철저히 통제되어 서울에 있던 동평관(東平館 : 일본사신들이 머무는 곳)은 폐쇄되고 부산의 왜관만이 대일교섭의 유일한 창구로 자리잡게 되었다. 임진왜란 후 조선정부는 계속된 일본정부의 강화요청을 받아들여 두모포왜관(豆毛浦倭館 : 1607∼1678, 현 동구 수정시장 일대)을 세워 일본의 교역을 허락하였다. 그후 양국의 선린우호관계가 안정적으로 확대되자, 1678년(숙종 4)에는 그 규모를 확대하여 초량왜관(草梁倭館 : 1678∼1876, 현 용두산과 복병산 일대)을 세웠다.
임진왜란 후 부산이 대일교섭의 유일한 창구가 되자, 일본사신들은 부산포에 도착하여 먼저 초량객사(草梁客舍 : 조선 임금의 전폐를 모셔놓은 곳)에서 예를 올리고 예물을 증정하였다. 이어서 연향대청으로 자리를 옮겨 동래부산과 일본사신이 공식적인 서계(書契 : 외교문서)를 교환하고, 동래부사의 환영연을 받은 뒤 일본사신 일행은 북문을 통하여 초량왜관으로 들어가 머물렀다.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연향대청은 1876년 초량왜관이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바뀌면서 철거되고, 그 자리에 제1소학교가 세워졌다가 현재 광일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 대청동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5. 연향대청
연향대청은 17∼19세기 양국간의 선린우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설물로 당시 규모는 연향대청 18칸, 헐소(歇所 : 일본사신들이 잠시 머물던 곳) 2칸, 헐청(歇廳) 2칸, 남문 3칸, 북문 1칸, 공수간(公須間 : 연향대청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던 곳) 17칸으로 1653년 동래부사 임의백이 처음 세웠다. 1868년 동래부사 이항이 중창하고, 1709년 동래부산 권이진이 거듭 중창하였는데, 그 위치는 초량왜관 북쪽 담장 밖에 있고 동래부의 남쪽 30리에 있었다.
6. 영가대
영가대는 일본에 파견되었던 통신사행(通信使行)과 관련이 깊은 부산의 명소였다. 1614년(광해군 6) 경상도 순찰사 권반(權盼)은 당시 부산진성 근처의 해안이 얕고 좁아 새로 선착장을 만들었다. 이때 바다에서 퍼 올린 흙이 쌓여 작은 언덕이 생겼고 이곳에 나무를 심고 정자를 만들었다.
1617년(광해군 9)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던 오윤겸(吳允謙)이 처음 영가대에서 일본으로 출발한 이후 통신사행은 줄곧 이곳에서 출발하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1624년(인조 2) 선위사 이민구(李敏求)가 일본 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부산에 파견되었다가 이 정자를 보고 권반의 고향 안동의 옛 이름인 영가(永嘉)를 따서 영가대라고 이름 지었다.
통신사행은 조선후기 한일관계를 밝혀주는 평화사절로,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파견된 것은 1636년부터 1811년까지 총 9차례였고 이때 조선국왕의 국서를 가지고 일본 막부(幕府)가 있는 에도(현 東京)에 파견되었는데 주된 파견목적은 새로운 막부장군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통신사행은 왕복 8개월 정도가 걸리는 긴 여정이었고 또 거친 대한해협을 건너가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다. 따라서 통신사행은 출발하기 전에 영가대에서 안전 항해와 무사 귀환을 비는 해신제(海神祭)를 올렸다. 영가대는 1906년 경부선의 개통으로 양분되고 일제 강점기 부산의 대지주였던 오이께(大池忠助)의 별장인 능풍장으로 옮겨졌다가 그후 도시화 과정에서 그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7. 초량객사
조선과 일본의 양국관계는 임진왜란(1592∼1592)을 전후하여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특히, 일본사절의 활동은 철저히 통제되어 서울에 있던 동평관(東平館 : 일본사신이 머물던 곳)은 폐쇄되고, 부산의 왜관만이 대일교섭의 유일한 창구로 자리잡게 되었다. 객사(客舍)란 역대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 두고, 지방관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숙배를 올리던 곳이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초량객사의 규모는 정청(正廳 : 국왕의 전패를 모신 곳), 동서헌(東西軒) 44칸, 중문(中門) 3칸, 좌우익랑(左右翼廊) 2칸, 외삼문(外三門) 3칸으로 1676년 동래부사 이복(李馥)이 처음 세웠다. 그후 1734년 동래부사 최명상(崔命相)이 중창하고, 1825년 동래부사 이항(李沆)이 외삼문을 개건, 1873년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이 중수하였는데, 그 위치는 초량왜관(草梁倭館 : 1678∼1876, 현 용두산 일대) 북쪽 담장 밖 동래부(東萊府)의 남쪽 27리에 있었다.
이곳에 있었던 초량객사는 일본사신들이 부산에 도착하면 맨 먼저 접위관(接慰官)의 안내를 받아 역대 국왕의 전패에 숙배를 올리고 예물을 증정하는 등 숙배식(肅拜式)의 모든 절차가 이곳에서 행해졌다. 숙배식이 끝나면 동래부사와 일본사신은 연향대청(宴享大廳 : 현 광일초등학교 자리)으로 옮겨 서계(書契 : 외교문서)를 교환하고, 환영연을 마친 뒤 일본사신 일행은 초량왜관으로 들어가 머물렀다.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초량객사는 1895년 사립 개성학교(開成學校)가 세워졌다가 그후 부산공립보통학교(釜山公立普通學校)로 바뀌었다. 현재는 봉래초등학교(蓬萊初等學校)가 자리잡고 있다.
8. 표민수수소
1678년 용두산 부근으로 이건한 초량왜관이 있을 때 지금의 우암동에는 바다에서 표류하던 외국사람들을 수용하였던 표민수수소(漂民授受所)가 있었다. 이 표민은 일본인이 일본 본토 또는 대마도 가까이 바다에서 항해를 하거나 고기잡이를 하다가 표류하여 조선근해에 표착하거나 우리선박에 의해 구조된 사람을 말한다.
그러한 일본인은 표왜(漂倭)라고도 했는데, 그 같은 표왜 중 대마도 표왜는 표착 또는 구조된 자리에서 조선관리의 검문을 받은 뒤 부산왜관에 인계되었다. 이들이 왜관에 인계되지만 먹고 입는 식량과 음식은 동래부에서 규정에 따라 지급되었다.
경상우도에 표왜가 있을 때는 거제에 있는 옥포만호에 소속된 통역관이 현지에 나가서 검문한 뒤에 다대포첨사영까지 데리고 오면 초량왜관에 거류하는 일본인 통역이 다대포로 나와 만나본 뒤 그 표왜를 해로를 거쳐 우암포에 인도 수용하였다. 그리고 전라·강원도 지방의 표왜는 중앙에서 문정관(問情官)을 보내어 검문하거나, 해당 도의 통역관이 검문한 뒤 동래의 우암포까지 압송하여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수용하였다.
반면에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근해나 대마도에 표도(漂到)하였을 때는 대마도를 거쳐 왜관으로 오고, 왜관에서 우암포의 표민수수소에 인계되었다고 한다.
♠♠♠ 구한말-일제강점기 이전의 역사자료 ♠♠♠
1. 사직단
사직단(社稷壇)이라 할 때의 사(社)는 토신이고 직(稷)은 곡신으로서 임금을 비롯하여 지방 수령이 토신과 곡신에게 제사를 드려 나라와 지방의 풍요와 안녕을 비는 곳인 사당을 말한다.『동래부지(1740)』에는 사묘를 밝힌 자료를 살펴보면, "사직정당 1간, 재실 5간으로 경진년(庚辰年, 1640년 : 인조 18)에 부사 정호서가 세웠다. 현종 임자년에 부사 이하(李夏)가 중창하고, 숙종 기축년에 부사 권이진(權以鎭)이 부(府의) 서쪽 5리에 이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709년에 이건된 사직단이 사직동에 있어 동래지역의 수령은 동래지역의 풍요와 안녕을 위해 사직단에서 제사를 올렸다. 그러나 그 제단은 일제 강점기에 허물어져 지금은 주택가로 변하였다. 광복 이후 여고리·석사리를 합하여 지난날의 사직3동 산신당이 사당형식으로 되어 남아있다.
2. 삼세조창
조창(漕倉)이란 각 지역에서 거두어들인 조세곡물을 모아두는 곳으로 이곳에 보관해 두었던 곡물을 해로나 강을 따라 운송하는 것을 조운이라 했다. 이 조창제도는 고려시대부터 있어 온 것인데 조선시대 초기의 김해 불암창은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아 조선 초기 경에 필요에 따라 창설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 당시의 낙동강 본류는 불암동 동쪽을 지나는 오늘의 서낙동강쪽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낙동강 본류가 되는 낙동강의 흐름이 서낙동강 보다 커지고 수운의 요지가 동 낙동강 쪽으로 바뀌어감에 따라 구포에 조창이 생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구포에 조창이 생긴 것은 1682년으로 이를 남창(南倉)이라 했다. 이 남창을 삼세조창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삼세(三稅)를 받아서 서울(당시 한양)로 싣고 간다고 그리 말한 것이다.
삼세란 전지(田地)에 대해 내는 전세(田稅), 공물세(貢物稅)인 대동세(大同稅), 그리고 병역 또는 노역의 의무에 대해 내는 호포(戶布)와 군포(軍布)를 말한다. 구포에 있었던 삼세조창을 감동진(甘洞津) 삼세조창 또는 감동진 조창이라고도 했다. 감동진이란 구포나루터를 감동진이라 했기 때문이다.
3. 부산감리서
1883년 8월 19일 인천·원산·부산 등 3개 개항장에 외교·통상업무량이 늘어나자 전문적으로 사무를 처리할 기구로 감리(監理)를 두게 되었는데, 부산의 감리는 동래부사가 겸임하였다. 이후 계속하여 업무가 폭증하자 1890년 독립된 사무처리를 위해 독립관서인 감리서(監理署)가 설치되었다.
이 감리서에는 4명의 서기관과 1명의 방판(幇辦)을 두었다. 그러나 이 감리서는 동래부와 업무로 자주 마찰이 생겨 1895년에 일시 폐지되었다가 이듬해인 1896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다시 설치될 때의 감리서는 영주동에 있는 봉래초등학교 부근에 있었다.
4. 부산해관
부산이 개항(1876)되자 일본상인들은 물품에 대한 관세도 없이 마구 상품을 싣고와서 판매하였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1878년 9월(당시 동래부사는 윤치화) 오늘날의 수정동에 있었던 두모포에 임시해관(지금의 세관)을 설치하였다. 그와 함께 일본측에 공문을 보내어 통상이 있으면 수출입세의 징수가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알리고, 일본에서 들어오는 상품에 대해 세금을 징수하였다. 이에 일본측은 일본공사 화방의질(花房義質)을 부산으로 보내어 담판케 했으나, 동래부사 윤치화는 이에 굴하지 않는 등 행패를 부렸다. 그러자 일본측은 수병 150명을 두모포에 상륙시켜 무력시위를 했다. 이에 동래부사는 이 사실을 정부에 보고했고, 이에 정부는 당분간 세금징수 중지하라는 훈령을 11월에 내려 보내었다. 그 훈령은 양국간의 충돌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후 해관은 폐지되었다가 1883년 11월 오늘날 부산경남본부세관이 있는 터에 부산해관을 설치하여 업무를 개시하였다. 오늘날의 부산경남본부세관의 전신이다.
♠♠♠ 일제강점기 때의 역사자료 ♠♠♠
1. 동래일성관 터
일제에 의해 1910년 강점됨에 따라 항일운동이 전국적으로 불길처럼 일어났다. 당시 부산지역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특히, 항일운동이 가장 강렬하게 진행되었던 곳은 동래지역으로 그 중심지는 일성관(日成館, 東萊靑年會館, 지금은 도로개설로 철거)으로 항일운동의 본거지였다. 동래청년회관 이전에는 동래기영회(1846. 3 설립)에서 관장하던 삼락제(서당)으로 중등과정인 한문과 신학문 등 항일민족 자주의식을 가르치던 민족교육 기관이었다. 당시 동래고보 졸업생이던 곽상훈(국회의장 역임)이 동래기영회에 사정하여 동래청년회관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동래청년회관에는 신간회부산지회(1927. 6. 28 창립), 근우회, 청년동맹, 소년동맹 등의 단체가 입주하여 활동하였다. 점차 단체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회관이 비좁고 불편하여 좀더 큰 회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동래청년회관측에서는 건물 신축을 위해 모금운동을 통하여 기금을 모으기로 하고 전국 각지의 지방유지들을 방문하는 등 1년여간의 모금 결과 어느 정도 기금이 확보되어 새로운 회관을 신축할 수 있었다. 4년여의 고생 끝에 일성관이라 이름을 붙여 1933년 10월 준공하였다. 그러나 낙성식을 거행하는 날 일성관 정문에는 일본순사들이 들이닥쳐서 붉은 사상의 온상이라며 출입을 금지시켜 낙성식을 거행할 수가 없었다. 당시 일성관(東萊靑年會館)을 중심으로 전개된 대표적인 단체결성과 항일운동은 다음과 같다.
1919년 3월 13일 동래고보의 3.1운동, 1925년 부산청년회 결성, 1927년 6월 28일 신간회부산지회 창립 총회를 동래청년회관에서 거행,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 때 신간회 동래청년회 소년부 회원인 동래고보 4학년생인 문재순외 7명이 주동이 된 동래고보 연대맹휴, 1929년 일제의 신간회 해산에 항의하여 동래고보 4학년생들의 맹휴, 1930년 1월 7일 부산 2상(현 부산상업고등학교) 학생운동으로 문길환 장남현 등이 동래청년회관의 등사기를 이용하여 유인물을 만들기도 했다.
이 밖에도 부산 동래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항일운동은 일성관(東萊靑年會館)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많은 독립운동이 이루어진 곳으로 그 정신을 기리고자 동래구에서는 동래만세거리로 지정하였다. 일성관 건물은 광복이후 시립도서관 동래분관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97년 도로확장으로 철거되어 사라져 버렸고, 옛터에는 동사무소 건물이 들어서 있다.
2. 동래기생조합
조선시대 동래부에 관기를 둔 것은 다른 지방의 관기와는 달리 의주의 관기처럼 외교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의주의 관기는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접대하기 위함이고, 동래의 관기는 일본에서 오는 사신들을 접대하기 위해서였다. 이들 사신들은 각자 자기 나라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고, 그 사신을 맞는 쪽 또한 자국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사이의 대화의 경색과 분위기 변화를 위해서는 부드러운 풍류와 춤들이 곁들일 만했다.
더욱이 동래부사에게는 임란 이후 일본과의 외교문제를 전담하고 있었다. 왜관 밖에 있었던 연향대청(宴享大廳)이 그 일을 맡아하는 곳이었다. 연향에서는 관기들의 기악연주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동래부예속 관기들이 자유의 몸이 되면서 그 기생들이 기악과 춤과 예절을 닦던 교방(敎坊)이 없어졌다. 교방에서 풀려난 기생들이 자치적으로 조직한 것이 동래기생조합(1910년)이었다.
이 기생조합은 동기들에게 가무(歌舞)를 가르치고, 자기 자신들이 닦은 가무를 연회자리에서 베푸는 일이었다. 1912년에 동래예기조합(東萊藝妓組合)으로 이름을 바뀌어 오늘날 명륜동인 동래세무서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명륜동에 있던 기생조합은 중일전쟁 중에 온천장의 여관업자들의 요청으로 오늘날의 온천동 210번지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무렵 법인조직으로 변경하였다.
그 기생들의 집합체를 기생조합 또는 예기조합이라 하였으나, 통칭 권번조합이라 했다. 5.16군사 쿠데타 이후 국악원(國樂院)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는 쇠퇴해 가는 우리국악을 살리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1970년에는 동래국악원이라 하게 되고, 그 이후 동래국악진흥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러한 이름 아래에서도 여인들은 지난날의 기생조합이나 예기조합의 그때처럼 연회자리에 한복을 차려입고 북과 가야금을 가지고 나갔다. 그 명맥을 이어오던 동래기생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다.
3. 봉래관
부산 개항 이후 일본인들은 동래온천장에 욕탕을 가진 여관을 설립을 통해 그들의 위락 휴양지로 삼으려고 갖은 술책을 썼다. 일본인이 가장 먼저 여관업을 개업한 사람이 팔두사(八頭司)라는 사람의 팔두사여관이었다. 그 뒤인 1903년경에는 일본인 전용의 목욕겸 여관으로서 광월루(光月樓)가 생기고, 1907년 8월에는 오늘날의 동래관광호텔 뒤인 허심청 자리에 풍전복태랑(豊田福太郞)이란 일본인이 봉래관(蓬萊館)을 지었다.
이 봉래관은 증축 확장되어 1920년대 초에는 객실 35, 대방 20, 욕탕 5개를 두고 본관 뒤쪽에는 한국관 온돌부 1동을 세웠다. 1923년경부터는 조선주재 일본주둔군이 늦가을에서 다음 해 봄까지 봉래관 구내에서 전지요양도 했다. 이 봉래관은 앞의 내 2천여평을 매축하여 정원을 만들고 정원 안에 다시 수백평의 양어지를 파서 배를 띄우고 낚시질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구장 같은 오락시설까지 하여 휴양 손님의 기호를 맞추었다.
그 규모는 하나의 소공원과 같은 것으로 당시로서는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큰 여관이었다. 그후 1936년 1월 봉래관 본관이 불에 모두 타고 본관 뒤의 온돌의 한국관인 별관만 남아 있었다. 봉래관 본관이 불탄 뒤 주인 풍전은 토지와 남은 건물을 일본인 고전(高田)이란 사람에 팔고 봉래관 서쪽에 백록관(白鹿館)을 신축하였다.
봉래관 터는 광복을 볼 때까지 재건을 못하고 한국관만 쓸쓸하게 남아 있었다. 광복 이후 적산터가 되어 귀속재산으로 불하된 뒤 소유주가 여러 차례 바뀌었다가 현재는 동래관광호텔과 허심청의 주차장이 되어 있다.
4. 부산감옥소 터
오늘날의 동대신동의 삼익아파트 자리는 부산형무소자리가 되는데, 일본군의 수비대가 1896년 9월부터 들어서서 연병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부산감옥소가 들어선 것은 1909년 10월 21일의 일이었다.
그 부산감옥소는 1923년 4월 1일 부산형무소로 이름이 바뀌고, 1962년 11월 23일에는 부산교도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부산교도소는 1973년 11월 23일 지금의 주례동으로 건물을 지어 옮겨가면서 부산구치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 부산감옥과는 달리 광복 후인 1947년 1월 8일에는 동대신동 2가 75번지에 부산소년원이 개원되었다. 주택지에 자리잡은 소년원은 주위 주택가에서 이전을 끈질기게 요구해 오고 당국 또한 그 타당성을 인정하여 1970년 3월 12일 오륜대 수원지 이웃의 조용한 자리로 이전을 하였다.
5. 봉래권번
지금은 자취조차 사라져 없어졌지만 영주동 52번지 부근에는 기생조합인 봉래권번(蓬萊券番)이 1922년 12월에 생겼다. 이는 기차의 시종착지(옛 부산역으로 오늘날 부산경남본부세관 건너편 부산역 소화물 취급소 자리)로 흥성했던 초량에서 객주(일종의 도매업 및 무역업자)들이 1915년에 형성한 것을 영주동으로 옮겨온 것이다.
당시의 기생은 대구·진주·동래에서 온 기생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당시 영주동에 있었던 영선관(瀛仙館, 1925년)·영춘관(瀛春館, 1936년) 등 한국요리집과 초량의 봉래각(蓬萊閣, 1933년)·흥안각(興安閣, 1938년) 같은 중국요리집으로 가서 기악(器樂)과 노래 및 춤으로 여흥을 풀어주었다. 봉래권번이 한창 번창한 1939년 무렵은 조합원 수가 70명이 넘었다고 한다.
봉래권번이 번창하자 1940년 평양과 서울쪽의 기생들이 부산으로 내려와 초량동 579번지에 초량권번을 차려 그 회원이 30여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초량권번 기생의 장기는 우리나라 유행가였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4년 3월 12일 일제는 전국 예기(藝妓)영업 폐지령을 공포하자 문을 닫게 되었다.
6. 백제병원과 옛 봉래각
초량동의 부산역에서 중앙로를 건너 텍사스거리로 가는 오른쪽 모서리에 지금도 5층 벽돌집으로 뼈대만 남아 앙상한 2층 건물로서 갖가지 영업을 하는 옛 봉래각(초량동 467)이란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최용해가 1930년 병원으로 신축하여 백제병원이라 부르는 집이다. 그 당시만 해도 개인 소유의 건물로는 가장 컸다.
건물을 세운 최용해는 김해 명지 태생으로 일본망산 경학전문학교를 나와 일본여자와 결혼한 사람이었다. 그는 부산에서 개인으로 종합병원을 처음 열었다. 의료진도 독일인, 일본인들까지 초빙해서 당시의 부립병원, 철도병원을 능가할 정도였다. 병원은 날로 번창했다.
그러나 건물을 지을 때의 빚이 있는 그 위에 병원운영의 지출이 과중했다. 그런 그 위에 행려병 사망자로써 인체표본을 만들어 병원 5층에 둔 것을 인륜으로써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비방을 받자 내진객이 급격히 줄어들어 마침내는 병원을 빚에 넘기고 1932년 야간도주를 하다시피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백제병원은 그 뒤 봉래각이란 중국요리점이 되었는데 봉래각 주인 양모민(楊牟民)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이 가열해지자 1942년 집을 철창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인 아카즈키 부대가 접수하여 장교숙소로 사용했다.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일본군이 물러나고 광복을 보자 우리의 치안대 사무실이 되었다. 한국전쟁 후에는 개인에 불하되어 신세계예식장이 되었는데 1972년 뜻하지 않은 화재로 건물 내부는 불타고 외부만 남게 되었다.
7. 아미화장장 터
개항 이후 일본인들은 오늘날의 중구와 서구를 중심으로 정착하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부산 각처에 흩어져 있던 공동묘지를 그 무렵은 외진 곳이라 할 수 있는 오늘날의 아미동 아미산으로 옮기고 영도·부산진·아미산·대신리(현 대신동)에 있던 화장장을 1909년 아미산의 아미동으로 옮겼다.
화장장을 한 곳으로 정하자 장례행렬이 날마다 줄을 잇고 화장장에서는 유족들의 곡성이 계속되면서 불에 타는 시체의 악취가 온 마을에 풍겼다. 그래서 아미동이라 하면 화장막을 연상케 하여 마을의 발전에도 큰 지장을 가져왔다. 그런 연유로 1957년 화장장을 그 당시로는 변두리였던 오늘날의 부산진구의 당감동으로 옮겼다. 그로부터 아미동은 길이 넓어지면서 발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8. 전차종점 터
부산에는 부산진과 동래 남문간 경편철도 부설을 위해1909년 6월 29일 부산진∼동래 남문간 경편궤도 부설권을 허가받아 1909년 11월 궤도공사가 준공되어 동년 12월 2일 영업을 개시하였다. 1912. 4월 20일 부산진∼동래 남문간 경편철도 개량과 1915년 10월 31일 부산진∼초량간 경편철도가 연장 개통되면서, 동년 11월 1일 경편열차와 전차가 겸용되면서 본격적인 전차 운행이 시작되었다.
1916년 9월 22일 대청정선(부산역∼부산우편국∼대청동∼보수동∼토성동)이 부설되었고, 1917년 12월 19일 장수통선(부산우편국∼광복동∼토성동 한전 앞)이 개통 운행하게 되었다. 1920년 대신동에 공설운동장이 개장되고, 그 시설이 점차 확충되는데 따라 운동장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래서 1928년 9월 대신정선(도청∼부용동∼운동장)이 연장 개통하여 운행하였다. 1935년 2월 목도(영도)선(대교통∼영도대교∼남항동시장)이 복선으로 연장 개통되면서 영도다리를 지나 영도 남항동시장까지 운행되었다. 1936년에는 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 남쪽의 동대신동 3가 173번지 자리가 전차종점이 되면서 차고가 되었다. 그러니 시내를 누비던 전차는 모두 운동장 앞의 종점 차고로 모여들었다. 구덕운동장 앞 차고에 모였던 40여대의 전차는 새벽이면 이 종점에서 출발했다. 지금은 옛 종점 터에 표시석이 세워져있다.
말하자면 종점이자 시발점이었다. 전차의 정비도 이곳에서 했다. 그러나 부산의 인구는 불어나고 도로는 비좁았다. 도로 한 가운데도 전차가 지나니 일반 차량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였고, 교통사고도 잦았다. 1968년 5월 20일 전차운행을 폐지하고 전체궤도를 철거함으로써. 자동차 운행만의 도로로 바꾼 것이다. 당시 운행하였던 전차의 실물이 동대신동 동아대학교에 전시되어 있다.
9. 초량 명태고방
동구 초량동의 부산역 건너편 중국인 화교학교로 통하는 옛 봉래각 북쪽 붉은 벽돌로 된 창고가 있었는데 이건물이 북선(北鮮)에서 해산물을 가져온다고 해서 북선창고(北鮮倉庫)라 한 명태고방(창고)이 있었다. 이 창고는 1910년 세워진 건물로 당시에는 함경도의 특산물인 명태를 비롯하여 해산물을 선박을 통해 부산항으로 운송하여 와서 경부선 철도를 이용하여 경상·충청도 지방으로 보급하였다.
부산상인 정치국(鄭致國)을 중심으로 부산 최초로 1천여평이 되는 창고를 지금의 초량동 393-1번지에 해산물 보관 창고를 세운 것이 명태고방이다. 그러다 1914년 8월 서울~원산간 경원철도가 부설되면서 명태를 비롯한 해산물은 서울지방으로 직접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부산에서 북선창고를 중심으로 도매업(= 객주)을 하던 일부 사람들이 원산으로 가서 창고를 세워 북선창고라 하면서 부산의 북선창고는 남선창고(南鮮倉庫)라 이름을 고쳤다. 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이 창고에는 명태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어 삼남지방으로 보급되었고 한다.
초량의 객주들은 돈만 번 것이 아니라, 객주조합 장학회를 조직 운영하여 1905년 초량사립상업학교(광복 후 경남공고로 재발족)를 설립하여 그 운영비를 충당하였다. 이 학교의 교장은 역대 객주조합장이, 학교운영과 행정은 교감이 담당하였다 한다. 남선창고는 광복 전 동래에 사는 개인에게 넘어간 이후에도 각종 창고로 이용되고 있으며, 지금도 가정 잡화물을 위탁 보관하는 창고로 계속 사용되고 있다.
10. 동래부 읍내장(동래공설시장)
동래구 복천동 229번지 일대에 걸쳐 위치하고 있는 부산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의 하나로 조선시대 읍내장(2, 7일)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동래지역의 장시(場市)에 대한 기록은 영조 46년(1770년)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시장이 형성된 것은 그 이전부터라고 생각되며, 동래부 읍내장은 동래 관아의 관문밖에 있었다 한다.
구포장(3, 8일), 좌수영장(5, 10일), 부산장(4, 9일), 독지장(1, 6일)과 함께 5일장 체계를 이루었다. 『임원경제지』를 통해서 당시 거래되었던 물품을 보면 쌀, 콩, 면포, 마포, 비단, 청어, 북어, 대구, 해삼, 식기, 종이 등 많은 물품이 거래되었다 한다. 읍내장은 조선 초기에는 해산물이 중심이었으나, 1901년에는 중국의 목면, 모시, 쌀, 콩 등 농산물 중심으로 그 기능을 바뀌어 갔다. 일제강점기 때인 1924년 1호 공설시장으로 지정 받아 수안동, 복천동, 명륜동의 3개동에 걸쳐 매월 2, 6일에 개시되었으며, 곡류, 어류, 채소, 땔감 등을 취급하여 하루 거래량이 약 4,000원, 출시 상인은 1,000여명이고, 구매자수는 4,000여명으로 이 일대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930년에는 동래교보의 공터에 노점형태로 있다가 1937년 총 부지면적 2,434평의 동래공설시장으로 승격되면서 향토적 색채를 담은 시장은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1955년에는 부산공설시장으로 승격되었다가 1966년12월 22일 대화재로 시장이 전소되었고, 1969년 사단법인 『동래시장상인조합』으로 허가를 받은 후 소실된 건물의 복구를 하여 1970년 8월 6일 현재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 준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지 1,000평에 건평 2,000평 규모의 2층 건물로 되어 있다. 1996년 현재는 사단법인 『동래시장번영회』로 등록되어 있다.
지금은 시장 주위에 문화재가 산재하여 있어 노후화된 건물을 재건축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시정이다. 따라서 재래시장의 주변에는 대형 백화점과 메가마트 등 대형 쇼핑센터 신설로 상권경쟁에 있어서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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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