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여자경찰서
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우리나라에 여성과 어린이 분야만을 별도로 전담하던 ‘여자경찰서’가 존재했던 시기가 있었다. 처음 등장한 것은 1946년 5월 여순경이 철도역에 배치되면서였고, 이듬해 5월 서울·부산·대구·인천에 여자경찰서가 연이어 창설됐는데 주로 인구 집중이 높았던 서울(144만6천19명), 부산(47만3천619명), 대구(31만3천705명), 인천(26만5천769명)을 중심으로 설치됐다.
그러나 1957년 7월 각 시도 경찰국 보안과 내 여경계로 여자경찰이 재배치되면서 일반경찰서와 관할이 중복된다는 이유 등으로 11년 만에 여자경찰서는 폐지됐다. 하지만 광복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더구나 성차별과 여성 해방, 여성권익 신장 개념이 제대로 서지 않았던 시기에 이미 여성과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해 여자경찰서가 있었다는 점은 획기적인 일이며 의미가 매우 크다.
여자경찰이 형성되고 여자경찰서가 설치된 시기는 군정이 실시된 지 1년이 지나는 시점으로 당시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 증가, 여성들의 빈번한 자살과 유기 아동의 증가, 가정 내 폭력 문제, 공창제 문제, 풍기 문제, 걸인 문제 등이 큰 사회적 이슈가 됐다. 특히 광복 후 혼란기에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아동의 문제가 별다른 대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빈번해지자 그 자구책의 일환으로 시행됐던 것이다. 당시 여자경찰의 자격 조건으로 연령은 25세부터 45세까지며 중등학교 3년 이상 수료자, 건강하고 쾌활한 성격을 소유한 자로 도덕심이 높고 정치 정당과는 관련이 없어야만 했으며 기혼여성은 남편의 승낙서가 필요했다.
여자경찰의 활동은 밀매춘 여성을 단속하고 조사·관리하는 업무 수행, 여성 계몽과 구호업무 수행, 여경들의 위생강습 활동과 남자경찰관의 수사 활동이나 여러 다른 업무였다. 여성 계몽은 미신 타파, 문맹 퇴치(한글 강습), 구정과세(舊正過歲) 철폐 같은 생활개선운동의 캠페인 및 단속이 주된 활동이었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했던 활동은 밀매춘 여성의 단속·조사 관리 업무였다. 여기에 미군정기 경찰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좌익 제거를 통해 남한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는 일이었는데, 그러한 전반적인 경찰 활동의 목표에 여자경찰의 임무도 포함됐다.
인천의 경우 여자경찰서가 1947년 5월 중구 선화동에서 출발했다가 1950년 중앙동으로 이전했는데, 현재 그 터(신포로23번길 49)에는 2019년 세웠던 제2대 인천여자경찰서장 전창신(1901~1985)경감 관련 표지석이 자리한다. 그는 제1기 여자경찰간부로 임용돼 1950년 11월 2대 인천여자경찰서장으로 부임했고, 1951년 10월 퇴직하기까지 여성 피해자와 피난민 등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힘썼던 인물이다.
1901년 함경북도 만찬군에서 태어난 전창신 경감은 1919년 3월 함흥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8개월간 옥고를 치른 열혈 여성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특히 지역 내 ‘애육원’이란 고아원을 설립해 전쟁고아와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을 돕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경찰에 투신하게 된 이유를 "평생을 식민지 경찰에게 괴로움을 당한 사람이라 민주경찰로서 국민의 충복이 되자는 간절한 희망으로 경찰에 지원했다"고 했는데, 독립운동의 연장선에서 어지러운 사회를 구제하고자 했던 기개가 컸던 여성이라 할 수 있다. 전창신 경감은 1992년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다.
창설 당시 경찰 총정원은 2만7천600명, 각 도 일선 경찰서에 배치됐던 여자경찰 정원이 500명으로 비율은 1.8%였다. 70여 년이 지난 현재 경찰 인구는 별정직, 일반직, 기능직, 계약직 공무원과 전경, 의경 및 해양경찰을 제외하고 12만8천985명(2021년 기준)으로 그 중 여성 경찰은 13%인 1만6천409명을 조금 웃도는 정도다.
세월의 흐름 속에 여성 경찰의 수적 증가와 변화 등을 느낄 수는 있지만 오늘날 과연 70여 년 전 여성 관련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해법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궁구(窮究)해 볼 과제가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