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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자료 스크랩 내 고향 창녕 1 - 화왕산과 관룡사
이장희 추천 0 조회 95 14.10.28 13: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내 고향 창녕 1 - 화왕산과 관룡사

 

 

개교기념일날인 10월 4일 직원들과 창녕 화왕산 등산을 다녀 왔다. 희망자에 한해 신청을 받아 당일 날씨에 따라 산행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날이 아주 맑고 가시거리가 좋으면 신불산 억새나 제약산 사자평 억새와 물매화를 보러 갈 것이고 중간 정도이면 관롱사와 화왕산 억새를, 그리고 날씨가 좋지 않을 시에는 가까운 승학산에 갈 예정이었다.

마침 날씨가 그런대로 좋은 편이어서 화왕산으로 정하고 떠났다. 처음 예정 인원보다 적게 참여한 총 8명이다. 교감선생님의 9인승 승용차로 다 함께 갈 수가 있어 차 한 대로 오순도순 떠났다. 마산을 지나 구마고속도로로 접어들자 창녕의 화왕산과 영산의 영축산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한 선생님이 요즈음 정치권에서 창녕사람들이 대단한데 풍수하고 관련이 있는지를 물어본다. 풍수를 몰라도 보시다시피 아름답지 않는가라고 대답했다. 그러니 다들 수긍을 하였다.

곧장 남지를 지나 영산IC로 나왔다. 화왕산에서 시작하여 영축산, 함박산을 지나 부곡온천 뒷산의 산맥과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과 맞닿는 지역이 창녕군이다. 전형적인 배산임수를 형성한 곳이다. 앞쪽은 넓은 들판과 낙동강이 있어 물자가 풍부하고 뒤쪽은 산이 높아 외적을 방어하기에 아주 적합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다. 창녕은 제2의 경주라고 불릴 정도로 문화재가 많다. 국보 2, 보물 9, 사적 5, 중요민속자료 2, 중요무형문화재 2, 유형문화재 21, 기념물 9, 민속자료 1, 문화재자료 39점 등이다.

영산면에 도착하여, 내가 다녔던 영산중학교가 저곳이라고 가르쳐 주고는 곧장 관룡사로 향했다. 영산면에서 유명한 연지와 만연교는 돌아오는 길에 보기로 하였다.관룡사 가는 길목도 고려말에 유명한 신돈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경상남도에서 수량이 가장 풍부하다는 옥천못을 지나 관룡사 입구에 도착하였다.

 

 

 

 

관룡사 입구에는 석장승 두 기가 있다. 관룡사로 가는 오솔길 양쪽에 서 있는 한 쌍의 돌장승이다. 사찰 입구에 두는 장승은 절의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과 더불어 잡귀의 출입을 막고, 풍수지리적으로 허한 곳의 기운을 불어 넣는 비보의 기능을 한다. 이곳의 장승은 사찰의 경계표시와 수문장의 역할과 함께 마을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수호신이 되고 있다. 이 석장승은 남다른 사연이 있다. 태풍 매미로 인해 계곡으로 떠내려간 것을 도둑이 훔쳐갔다. 다행히 충남 홍성 채석장에서 찾아왔다고 한다.

 

 

 

다시 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앙증맞은 돌문이 나온다. 관룡사에는 일주문이 따로 없어 바로 이 돌문이 일주문인 셈이다. 이 돌문이야말로 가장 소박한 맛을 지닌 일주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게 소박한 일주문을 이 곳 외에서는 본 적이 없다.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이 나온다. 천왕문에는 화왕산 관룡사(火旺山 觀龍寺)라는 편액이 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불이 왕한 산에서 용을 본 절이라는 의미다. 전설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제자와 함께 이곳에서 100일 기도를 드릴 때 오색채운이 영롱한 하늘을 향해 화왕산(火旺山)으로부터 9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절 이름은 관룡사, 산 이름은 구룡산이라 했다고 한다.

화왕산을 우포늪에서 보면 불꽃처럼 타오르는 모습으로 보인다. 이는 주역에서 말하는 화수미제와 수화기제가 서로 상응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우포늪의 낙동강 물과 화왕산의 불은 농경사회에 있어 가뭄과 홍수를 조절하여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로 화왕산에서 기우제를 지내거나 억새를 태우는 행사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관룡사는 지금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창녕군지(昌寧郡誌)에 따르면, 583년 증법국사(證法國師)가 초창하여 신라의 8대사찰로서 원효대사가 제자 1천여 명과 더불어 화엄경을 설법한 도량이었다고 한다.

천왕문에 들어서면 원음각이라 이름 붙인 종루가 나오고 맞은편에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은 주변의 경관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다. 정말 명당자리에 앉아 있다. 대웅전은 1965년 해체 복원공사 때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어 1401년(태종 1) 창건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7년(광해군 9) 재건했으며, 1749년(영조 25)에 다시 중창했다. 대웅전은 보물 제2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 대웅전은 기도발이 아주 쎈 곳이어서 기도를 하면 반드시 들어주시니 절하고 나오라고 일러 주었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아뿔사 그러고 보니 오늘 따라온 면면들이 다 교회 다니는 분들이 주류를 이룬 것이다. 평소에 열심히 따라다니던 보살님들은 오늘 따라 아무도 안 온 것이다.

 

 

 

 

 

 

 

관룡사 경내에는 보물 3점이 있다. 보물 제146호인 약사전(藥師殿)과 약사전 안에 있는 보물 제519호인 석불좌상이다. 그리고 약사전 앞뜰에는 조그만 3층 석탑이 있다. 이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된 3층 석탑이다. 이 탑은 신라 양식이 많이 남아있는 고려탑이다. 고려탑과 약사전 그리고 그 안의 석불좌상은 절집이라기보다는 가정집 마당에 놓여 있는 정원 같은 느낌이다.

특히 약사전은 한 칸으로된 아주 작은 건물이다. 또한 주심포계 맛배지붕으로 조선 초기의 건물로 보인다. 이는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이나 영주 부석사의 조사당과 같이 기둥이 배흘림기둥이다. 또한 영암 도갑사 해탈문(국보 제50호), 순천 송광사 국사전(국보 제56호)과도 많이 닮아 있다. 아마 1401년(태종 1)에 대웅전과 같이 지은 건물로서 화재에 살아남은 건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에 더해  약사전은 절집 뒷벽에 수채화로 된 산수벽화가 네 폭이 그려져 있고, 내부 벽에도 산수, 정물, 불화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들 또한 소박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개인적으로는 관룡사에서 이곳을 가장 사랑한다. 그리고 석조여래좌상 뒤로 53불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53불이 그려진 대표적인 절이 금강산 유점사라고 한다.

발길을 돌려 명부전 옆으로 향하면 뒤쪽으로 오솔길이 나 있다.

 

 

이 길이 바로 우리나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용선대로 가는 길이다. 용선대 가는 길은 소나무 숲과 어우러진 관룡사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그러나 조금은 오르막이라 힘이 든다.

700m 정도 오르고 나면 용선대가 나타난다.

 

 

 

 

용선대에 오르니 마침 스카이라이프 방송에서 촬영을 하고 있다. 나에게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평소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지만 우리선생님들의 한결같은 요청으로 응할 수 밖에 없었다. 11월 첫 월요일날 방영된다고 한다.

PD가 용선대에 대한 설명을 하라고 한다.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을 했다. 불교적인 면과 풍수적인 면으로 설명을 하였다. 갑자기 설명을 하라기에 당황은 되지만 기억을 더듬어서 인터뷰에 응했다. 대충 이러하다.

 

반야용선은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향하는 배다. 이곳의 반야용선은 이 세상의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서방극락정토로 항해하고 있는 뱃머리에 부처님이 앉아 계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실례로 반야용선은 양산 통도사 극락보전 벽에도 배가 잘 그려져 있다. 그러나 풍수적으로 보면 부처님이 앉아 있는 좌향이 잘못 앉아 있다. 신라하대에 도선의 풍수에 의하면 이곳 역시 비보 차원에서 불상이 세워졌다고 볼 때 기가 허한 곳 즉 기가 빠져 나가기 쉬운 곳에 부처님을 세워 기를 보호하고 응축시켜야만 복을 많이 받는다. 따라서 화왕산 주봉이 주산이고 구룡산이 좌청룡이며 화왕산 배바위에서 흘러 내러온 용맥이 우백호이고 안산인 남 주작은 영축산이다. 그래서 풍수적인 측면에서는 부처님이 마을과 영축산을 바라보고 서 있어야 정방향이 되는데 관룡사 절쪽과 구룡산을 바라보고 서 있다. 이는 누군가가 부처님을 돌려 놓았거나 아니면 바위의 생김새가 절쪽이 뱃머리처럼 생겨 이 바위가 바로 반야용선이라고 생각되어 뱃머리를 향하도록 부처님을 앉혔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대충 설명을 마쳤다. 갑작스런 인터뷰라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용선대 부처님의 정식이름은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295호)이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인 722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대좌 한쪽에서 세 줄에 걸쳐 '開元十../月卄五../'개원'(開元)은 당 현종 때 사용한 연호로 개원 10년은 722년이다. 신라 성덕왕 재위 21년째가 된다. 다만 그 아래 글자들은 이미 깨져 나갔으니, '開元十' 아래에는 '開元十' 이후 '開元十九'(731)라는 글자가 올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 뒤에는 햇수를 의미하는 '年'이나, 이 무렵에 年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載'라는 글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722년에서 731년 사이에 만들어졌음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이는 도선 선사(827-898)가 태어나가 100년 전이다. 따라서 지금의 부처님이 앉아 있는 방향이 오히려 정방향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우리 일행은 경치가 좋은 이곳에서 갖고 온 도시락을 맛있게 먹고는 다시 화왕산으로 향했다. 등산로 주변에 출입금지 표지판이 곳곳에 있다. 지금 송이버섯이 나는 철이라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안내문이다. 그런데 그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송이는 볼 수가 없었다. 우리 일행의 체력을 배려해서 산 정상으로 가지 않고 사이 길로 안내를 했다. 이 길은 봄이면 진달래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는 곳이다. 그리고 가을이면 운 좋게 송이를 구경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길이 끝날 때까지 송이 냄새를 맡지 못하였다.

 

 

 

 

 

 

갈림길을 지나 고개를 넘자 멀리 화왕산 억새평원과 성벽이 보이고 가까이에 드라마 동의보감을 촬영한 세트장이 나왔다. 세트장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산행을 계속하였다. 화왕산성 동문에 도착했다.

화왕산성은 사적 제6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법 웅장하게 돌로 축조했는데 둘레는 약 2.7km이다. 해발 757m의 화왕산을 등지고 남쪽 봉우리와의 사이에 넓은 안부(鞍部)를 둘러싼 산정식(山頂式) 산성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둘레가 1,127보이고 그 안에 9개의 샘과 3개의 못, 그리고 군창(軍倉)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성의 축조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산성 인근에서 창녕진흥왕순수비가 발견된 점으로 보아 가야 시기로 추정된다. 그 이후의 기록은 없으나 1410년(태종 10)의 산성 수축기록에 화왕산성이 보이고 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 곽재우(郭再祐)가 이 성을 거점으로 커다란 전공을 세웠는데, 이때 성곽이 크게 수축(修築)되었고 임진왜란 후에도 중수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동문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창녕막걸리와 도토리묵이다. 막걸리 두 통과 도토리묵을 주문했다. 땀 흘리고 산행을 했으니 막걸리 한 잔과 도토리묵을 얼마나 먹고 싶었겠는가!

다들 내 눈치를 본다. 추석 연후 이후에 1년간 주님과 이별하겠다고 부장회의에서 선포를 했기 때문이다. 살아오면서 등산과 마라톤은 술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 한다고 광고하고 다녔지만 1년 간의 금주를 선언한 마당에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참으니 또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릴 적에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나는 창녕조씨 득성에 관한 이야기이고 하나는 홍의장군에 관한 이야기이다.

 

화왕산 밑 마을에서 이 동내 가장 아름다운 처녀의 방에 밤마다 도포를 입고 잘생긴 양반 총각이 남몰래 들어와서 처녀와 사랑을 나누고는 닭이 울기 전에 떠났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이를 궁금하게 여긴 처녀는 하루는 선비의 도포자락에 바늘을 꿰어 실을 풀었다. 날이 새자 이 처녀는 풀어진 실을 따라 갔는데 실의 방향은 화왕산 정상을 지나 연못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 연못에는 커다란 조개가 입을 쩍 벌린 상태로 죽어 있었다. 조개 속살에 바늘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이 처녀는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성을 조개의 조자를 따서 조씨라고 지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조씨 성을 가진 친구들을 조개새끼라고 놀린 기억이 난다. 그런데 창녕 현읍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 제26대 진평왕때 경주 이씨 한림학사 이광옥(李光玉)의 집안에 예향(禮香)이라는 딸이 있었다. 미모가 아름답고 범절이 특출하였으나 어려서부터 병이 있어 고생하고 있었다. 당시의 명의를 찾아 병을 고치려고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여 온 집안이 근심과 절망에 싸여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선인이 찾아와 말하기를 "창녕에는 화왕산이 있고 화왕산에는 신령스런 연못이 있는데 예부터 영험이 있기로 이름이 있습니다. 그 연못에 가서 목욕을 하고 성심으로 기도하면 병이 완쾌될 것이요."라고 말하였다.

이광옥의 집안에서는 그의 말을 좇아 길일을 택하여 그 연못에 가서 목욕을 하고 기도를 올리게 하였다. 예향이 그 연못에 가서 목욕을 하고 성심으로 기도를 하는데, 별안간 못 주위로부터 앞을 가릴 수 없이 안개가 자욱하여 오고갈 길을 잃었다. 얼마 후 안개가 걷히고 정신을 차려보니 예향이 연못에서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화왕산에서 돌아온 예향은 병이 씻은 듯이 완쾌되었는데, 태기가 있어 남자아기를 낳았다. 그 아이는 미모가 수려하고 총명하였으며, 겨드랑 밑에 조(曺)자가 뚜렷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하룻밤 꿈에 한 장부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화왕산 연못의 용의 아들로 이름을 옥결(玉訣)이며 그대가 낳은 아이의 아버지이다. 아이를 잘 기르면 후에 공후(公候: 한 지방을 맡아 다스리는 제후)가 될 것이며, 그렇지 못한다 하여도 경상(卿相 : 조선시대 판서, 지금의 장관)은 될 것이며, 자손이 만세토록 번성 할 것이다." 하고는 사라졌다. 예향은 너무나 특이한지라 이 사실을 그의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고했다. 한림학사 이광옥이 이 사실을 진평왕에게 아뢰니 임금이 겨드랑 밑에 있는 조(曺)자로 성을 하사하고, 용의 아들이라 계룡(繼龍)이라 이름하니 이분이 창녕조씨의 시조(曺繼龍)이다.

시조 조계룡은 장성하여 진평왕의 부마가 되었고, 한번은 동래에 왜구가 침범해 왔을 때 진격해 들어가니, 왜구들이 "조공은 천인(天人)이시다." 하고는 스스로 군사를 거두어 물러갔다. 벼슬이 태사(太師)에 올라 왕실의 스승이 되었으며, 창성부원군에 봉해졌다고 전해진다. 창녕 조씨 중 뛰어난 학자분이 있다. 바로 퇴계선생과 쌍벽인 남명 조식선생이 바로 창녕 조씨다.

 

다음은 홍의장군 이야기이다. 홍의장군은 임진왜란 때 화왕산에서 처음에는 대승을 거둔다. 가장 큰 이유는 화왕산의 지세를 이용한 것이다. 화왕산은 창녕읍쪽에서 올라가면 아주 가팔라서 왜군들이 올라오면 바로 돌을 굴리거나 화살로 쏘기에 아주 적합하다. 따라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이때 왜장은 퇴각하여 고을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왜장은 고을의 기생집에 자주 드나들어 한 기생과 정분이 쌓였다. 이 기생에게 화왕산을 정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기생이 말하기를 화왕산은 서쪽은 높고 동쪽은 지세가 낮아 옥천으로 들어가 관룡사가 있는 골짜기로 가면 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책을 일러주었다.

그 다음날 왜장이 기생이 일러준 대로 시행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홍의장군은 대패를 했다. 그런데 기생이 왜장에게 화왕산의 지세를 알려준 것은 까닭이 있었다. 이유인즉 평소에 홍의장군을 흠모하던 이 기생은 홍의 장군에게 사랑을 나누기를 간절히 애원을 했다. 그런데 홍의장군은 워낙 도학군자여서 매번 거절을 한 것이다. 이에 앙심을 품은 기생이 왜장에게 화왕산성의 결함을 알려주어 홍의장군이 대패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어린 심정으로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기생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나이에 생각해보니 기생의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아무리 노루장화라도 여인의 가슴에 한이 쌓이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 일행은 연못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연못 입구에는 억새가 아닌 갈대가 자란다. 화왕산 억새제가 맞는지 화왕산 갈대제가 맞는지를 질문을 하니 아무도 답변을 하지 못한다. 몇 년 전 억새를 태우다가 화마에 많은 인명이 희생이 되어 화왕산 억새를 태우는 행사를 영원히 취소한다고 창녕군청은 밝힌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당시 화왕산 행사의 이름은 화왕산 갈대제였다. 바로 이 연못 근처에만 갈대가 자라고 나머지는 억새가 자라기 때문이 귀한 갈대를 더 높이 사 화왕산 갈대제가 된 것이다.

옛 기록에는 정상에 3개의 연못과 9개의 샘이 있다고 되어 있다. 지금도 분명한 것은 연못 3개는 있다. 새롭게 연못을 고치지 않았을 때에는 자연 그대로여서 아주 운치가 있었는데 인공이 들어 경관을 망친 느낌이 든다.

우리 일행은 서문에 도착했다. 서문에 올라서니 가시거리가 조금 시원찮았지만 그런대로 구별은 되었다. 멀리 우포늪이 보인다. 그리고 우포늪 끝자락에 낙동강도 보인다. 우포늪과 낙동강이 맞닿은 곳이 내가 태어난 곳이다.

이젠 하산을 할 때다. 햇빛에 반짝이는 억새를 뒤에 두고서 우리 일행은 관룡사 입구에 있는 음식점에서 이 지방의 특산물인 송이밥을 맛있게 먹고는 부곡온천 원탕에서 피로를 말끔히 씻고는 오늘 일정을 마쳤다. 부곡 온천물이 다들 너무 좋다고 한다.

 

여행기를 여러 편 쓰면서 언젠가는 내 고향 창녕 이야기를 쓰리라 마음 먹었다. 하지만 그게 쉽게 되지는 않았다. 고향은 너무 가깝고 친밀해서 마치 가족의 이야기를 쓰기 어렵듯이 쉽지는 않았다.

가족처럼 지내는 우리 학교 선생님들과 내가 어릴 때 자란 고향산천을 함께 돌아보니 마음이 뿌듯했다. 이 뿌듯한 마음이 가시기 전에 글을 쓰리라 마음을 먹고 내 고향 창녕 이야기 1편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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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 임재범

가을잎 찬바람에
흩어져 날리면
캠퍼스 잔디 위엔
또 다시 황금물결

잊을 수 없는 얼굴
얼굴 얼굴 얼굴들

우우우우 꽃이 지네
우우우우 가을이 가네

하늘엔 조각구름
무정한 세월이여

꽃잎이 떨어지면
젊음도 곧 가겠지

머물 수 없는 시절
시절 시절 우리들의 시절

우우우우 세월이 가네
우우우우 젊음도 가네

우우우우 꽃이 지네
우우우우 가을이 가네

우우우우 세월이 가네
우우우우 젊음도 가네
가사 출처 : Daum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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