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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9-쌍옥루-이남사
아버지 어머니는 어디로 갔나 어찌하야 날보려고 안와주셔요
나는 이같이 밤마다 잠못이루고 안타까이 어버이를 기다립니다
世上-세상-난 以後-이후- 오늘날까지 어머니의 가슴에도 못안겨보고
어린몸은 난의손에 길려녀와서 엄마 아빠 부른적도 한번없었네
날다이 바다에 밤이올때면 안타깝게 오시기를 기다리지만 어인일로
어머님은 아니오시누 오늘밤도 지새려고 달은 집니다-
하루라도 일찍와서 안만나주면 저의몸은 외로와서 못지냅니다
이런生角-생각-을 하면서 지낸다하면 저는 울고 울닥서 죽겠습니다
1927년, 9월 일축조선소리반 발매 sp음반-서달성 피아노 임평난 바이올린 이남사 노래로 실려있습니다
他面-타면- 피아노 서달성, 바이올린 임평남 이남사노래<명주수건>이 함꼐 실려있습니다
허나 이 音盤-음반-은 未公開-미공개-로 情報未備-정보미비- 입니다
1927년, 9월4일, 21일, 30일자 東亞日報-동아일보- 1927년, 9월7일, 11일 朝鮮日報-조선일보- 廣告-광고-----------------------에는
九月新譜-9월신보-
流行歌-유행가- 명주수건
雙玉淚-쌍옥루- 李南史-이남사- 피아노, 바이올린 伴奏-반주------------------------------라고 紹介-소개-하고 있습니다
노래가사는 1929년 발행 最新映畵小曲集-최신영화소곡집-에 실려있기도 합니다
또한 이노래는 Victor-record 발매 sp음반-映畵小貝-영화소패- 獨唱 김연실-노래-로 실려있기도 합니다
他面-타면- 童謠-동요- 獨唱-독창- 金蓮實-김연실-의<椰子樹-야자수-의 그늘>이 같이 실려있습니다
이시기 victor-record 發行-발행-歌詞紙-가사지----------------------------------에는
V49087-a 童謠-동요- 椰子樹-야자수-의 그늘 獨唱-독창- 金蓮實-김연실- 伴奏-반주- 日本-일본- 빅터 樂團악단
V49087-b 映畵小貝-영화소패- 雙玉淚-쌍옥루- 獨唱-독창- 金蓮實-김연실- 伴奏-반주- 日本-일본- 빅터 樂團-악단-------------------라 소개 하고 있습니다
이영화는 그당시 流行처럼 Columbia-record 발매 sp음반-에실어서 辯士-변사- 金永煥-김영환-설명으로 <映畵說明-영화설명->레코드로 발매되었습니다
Columbis 40046-a 映畵劇-영화극-雙玉淚-쌍옥루-一 李慶孫-이경손- 卜惠淑-복혜숙- 說明-설명- 金永煥-김영환-
Columbia-b 映畵劇-영화극- 雙玉淚-쌍옥루-二
Columbia –a 映畵劇-영화극- 雙玉淚-쌍옥루-三
Columbia-b 映畵劇-영화극- 雙玉淚-쌍옥루-四
1929년, 9월29일 東亞日報-동아일보- 1929년, 9월30일,10월4일, 10월10일자 朝鮮日報-조선일보- 廣告-광고------------------------------------------에는
映畵劇영화극- 人情悲劇-인정비극- 쌍옥루 二 枚 이경손, 복혜숙, 설명 김영환-------------------------------------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노래는 허나 日本曲 飜案-일본곡 번안-입니다
이노래는 당연히 8분의 6박자의 唱歌式 日本風-창가식 일본풍-의 요나누키음계 로 되어있습니다
1919년 少女小貝集-소녀소패집- <濱千鳥-빈천조->가 원곡입니다
<갈매기>를 말하며 홍전용태랑 작곡입니다
한국선 1927년 일축조선소리판서 채경순이 취입한 음반이 보입니다
헌데 이노래가 또한번 活用-활용-된 音盤-음반-이 發賣-발매-됩니다
1932년경 일축조선소리판서 발매한<영화노래 romance-로맨스-> a,b 가 바로 그음반인데 당시인기있던 영화주제가를 모아놓은것으로 변사 김영환씨가 영화 한대목을 설명하면
그당시 俳優-배우-겸 幕間歌手-막간가수-로 활동하던 김선초, 강석연씨가 번갈아가며 주제가를 부르는 형식으로 되있읍니다
金永煥 說明-김영환 설명------“朝鮮映畵-조선영화-여러분과 함께 모아 보고자 합니다--- 조선영화 사운드의 한장면—“-라고 說明-설명-하면
이남사씨가 아닌 강석연목소리로 쌍옥루 1절을 歌唱-가창-합니다
1932년,10월2일 東亞日報-동아일보- 10월24일 每日申報 –매일신보-일축조선소리판 廣告-광고------------------------에는
十一月新譜-11월신보-
映畵-영화-노래 一枚-1매-
김영환, 김선초, 강석연 管絃樂伴奏-관현악반주---------------라 紹介-소개-하고 있습니다
連鎖劇-연쇄극-以後-이후-<月下-월하-의盟誓-맹세-> 가 制作-제작-될 當時-당시-에는 “映畵-영화-를 制作-제작-한다”고 하는 개념의 製作會社-제작회사-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허나 劇場數-극장수- 가 늘고 觀客層-관객층-이 형성되면서 映畵 制作社-영화 제작사- 가 생긴다는 것은 當然-당연-한 현상이었습니다
이와때를 같이해서 1926년 春史 羅雲奎-춘사 나운규-의 명작<아리랑>이 나올떄까지 3년동안 7~8개의 映畵社-영화사-와 프로덕션이 연달아 생기면서 映畵製作-영화제작-은
急作-급작-스레 波及-파급-되었습니다
그것은 當然-당연-한 趨勢-추세-라도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1924년들어 釜山-부산-에서 朝鮮 kinema-조선키네마- 株式會社-주식회사- 가 처음 設立-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무렵-映畵 先驅者-영화 선구자- 이필우씨와 이구영씨는 훈정동 46번지에 高麗映畵製昨所-고려영화제작소-를 만들고 <沈淸傳-심청전->을 기획했으나 이것은 윤백남 프로덕션에서
제작하게되고 그들은 곧 다른작품을 기획하니 그것이 상기영화<雙玉淚-쌍옥루->입니다
日本-일본-의 기꾸치-국지유방-의 원작인<나의 죄>를 脚色-각색-하여 전, 후편으로 제작했습니다
이소설은 한국에서 조중환씨가 번안하여 每日申報-매일신보-에서 1912년부터 다음해까지 연재했습니다
이필우씨가 撮影-촬영-, 監督-김독-엔 이구영이 맡고 김택윤, 김소진 두 新人 俳優-신인배우-을 데뷔시킵니다
조천성, 김덕성등 新派俳優-신파배우-들이 協演-협연-했습니다 1925 년 9월 團成社-단성사-에서 開封-개봉--입니다
妓生姉妹-기생자매-의 哀話-애화- 를 다룬 通俗趣向-통속취향-의 新派物-신파물-이기도 했지만 興行的-흥행적-으로 成果-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여기는 영화소개 코너가 아니므로 줄거리는 생략합니다
990—cachusa-카추샤-의 노래-고수철
카추샤 애처롭다 離別-이별-하기 서러워 그나마 맑은 눈 풀리기전에 神明-산명-께
祝願-축원-을 라라 드리워 볼까
카추샤 애처럽다 離別-이별-하기 서러워 이저녁 왼밤을 오는눈아
來日-내일-은 들 과 산에 라라 길을 덮으게
카추샤 애처럽다 離別-이별-하기 서러워 그나마 다시만날 그떄까지
지금의 이 姿態-자태-로 라라 있어 주게나
카추샤 애처럽다 離別-이별-하기 서러워 서러운 離別-이별- 눈물 나는동안에
바람은 들을불고 라라 날은 저무네
카추샤 애처럽다 離別-이별-하기 서러워 寂寞-적막-한 넓은들을 차즘 차즘이
호올로 떠나가는 라라 來日-내일-의 갈길
上記 歌詞-상기가사-는 1916년, 4월23일 每日申報-매일신보- 실린 歌詞-가사- 입니다
이가사는 정경운편곡의<낙원창가> 이상준편곡<신유행창가> 강하형편곡<남녀병창유행창가> 강범형편곡< 이팔청춘창가집> 등 많은 노래책에 수록되있으며 조금씩 가사가 다릅니다
여기서 말하는<Cachusa-카추사->는 러시아의 大文豪-대문호- tolstoy-톨스토이-가 61살이던 1889년 집필을시작 10년후인 1899년 세상에 내보낸 小說-소설- “復活-부활-“속에 등장하는
女主人公-여주인공- 이름입니다
영화로는 1918년 이탈리아서 “부활-resurrezione-“란 題目-제목-으로 開封-개봉-합니다
이 小說-소설-이 全世界的-전세계적-으로 크게 힛트하자 일본에서도 1914년경 日本-일본- 新劇運動-신극운동-의 中心地-중심지- 였던 劇團-극단- 게이주쓰자-藝術座-예술좌-에서
演劇-연극-으로 脚-각색-하여 公演-공연-을했습니다
이것은 앙리 바타이유 가 演劇-연극-으로 脚色-각색-한 것이었고 이때도 主題歌-주제가-가 있었으나 反應-반응-이 미미했고 이를 예술좌에서 日譯-일역-해서 공연했습니다
이 演劇-연극-에上記曲-상기곡-이 日本 作曲家-일본 작곡가- 나카야마 신페이에 의하여 主題歌-주제가-로 創作-창작-되었습니다
공연으로 큰인기를끈 이곡은<復活唱歌-부활창가->로 題目-제목-지어져 1915년 音盤-음반-으로도 發賣-발매-됩니다
일본 orient-record 서 시마무호겟쓰, 소마고후 두사람이 作詞-작사-하고 나카야마 신페이가 作曲-작곡- 해서 演劇主人公-연극주인공-마쓰이 스마코 목소리로
吹入發賣-취입 발매-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1916년 演劇運動-연극운동-의 先驅者-선구자- 이기세 윤백남이 이끌던 劇團-극단- 藝星座-예성좌-에서 韓國最初-한국최초-의 飜案劇-번안극- <코르시카의 兄弟-형제->
에 이어서 公演-공연-하면서 出演俳優-출연배우-로 女裝男優-여장남우-였던 고수철이 이노래를 불러 紹介-소개-했습니다
노래 飜案者-번안자-는 분명히 알려져있지 못하지만 극단을 이끌던 이기세, 윤백남중 누군가가 韓譯歌詞-한역가사-를 지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이노래는 당시 流行-유행-의 尖端-첨단-을 알리며 다른 藝術-예술- genre-장르-인 映畵-영화-에서도 主題歌-주제가-를 만들어 부르는 流行-유행-을 낳았습니다
이 小說(소설)은 또 한국서 映畵界-영화계-에도 부름을받아서 撮影-촬영-됩니다
그리고 그영화를 “映畵說明-영화설명-“ 레코드로 再吹入-재취입-하여 發賣-발매-했습니다
Columbia-record 발매sp음반으로 a. b 說明(설명) 김조성 출연 이경손,복혜숙 등이 출연해서 목소리 연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主題歌-주제가-를 劉慶伊-유경이- 가 揷入曲形態-삽입곡형태-로 불렀습니다
辯士-변사-金肇盛 解說-김조성 해설- -----혜성이 흐른다 이른밤 검은하늘에 꽃히는 화살같이 혜성이 흐른다---------로 이 음반은 시작됩니다
1929년, 4월1일 東亞日報-동아일보- 1929년, 4월4일, 8월15일 朝鮮日報-조선일보- Columbia-record 廣告-광고----------------------에는
第 二回 新譜-제2회신보-
映畵劇-영화극- 復活<카추샤> 二枚-2매- 이경손,복혜숙 설명 김조성 노래 劉慶伊-유경이- 伴奏-반주- 朝劇 管絃樂團-조선 관현악단----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카추샤>는 演劇-연극-으로 國內-국내-에서 크게 流行-유행- 韓國最初 劇俳優-한국최초 극배우- 이월화가 新劇團體-신극단체- 土月會-토월회-에서 카추샤역을 연기하며 유명해졌고
만화가 안석주와 듀엣으로부른- “애처워라 카추샤” 라는곡이 힛트했습니다
이외도 첫번째 <눈물의여왕> 이경설, <황성옛터>의 이애리수도 “카츄사”를 演技(연기)하며 本格的(본격적)인 藝術家(예술가)로 이름이 나기시작합니다
이렇게 연극으로 크게 유행하자 映畵說明(영화화설명) 음반을 발매한 Columbia-record 서 1934년경 <劇-극- 復活-부활->음반을 sp음반 2매에 a,b 앞뒤면으로 녹음 발매합니다
소설가 咸大勳 脚色-함대훈 각색- 연출가 洪海星 指揮-홍해성 지휘-로 劇藝術硏究會員-극예술연구회원-목소리로 吹入-취입-했습니다
이무렵 columbia-record 發行-발행- 歌詞紙-가사지------------------------에는
C40604-a 劇 復活 一 톨스토이 원작 함대훈각색, 극예술연구회원 지휘 홍해성-강산-
C40604-b 劇 復活 二 톨스토이------------------------------------------------------
公爵-공작-餘---女 罪囚-여 죄수- 카추샤를 面會-면회-왔는데요
看守간수—네흐루 돕흐프 公爵-공작-이십니까? 지금막 禮拜時間-예배시간- 이되서 카추샤는 禮拜堂-예배당-에 갔는데요----------후략--------
이음반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931년, Columbia-record 서 이애리수가 발표한<復活-부활->을 흔히 上記歌謠-상기가요- remake 락 기록한곳이 있으나 두곡은 전혀다른 곡이며 이곡의 작사, 곡은 알수없습니다
시베리아 찬바람이 지구상에 떨치니 보기는 죽은듯하나 실상은 살았도다---로 시작하는곡 아시지요?
991—아리랑-a 최초 이정숙live 音盤-음반- 유경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豊年-풍년-이와요 豊年-풍년-이이 와요
이 江山-강산- 三千里-삼천리- 豊年-풍년-이 와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山川-선천-의 草木-초목-은 젊어가고
人間-인간-의 靑春-청춘-은 늙어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靑天-청천-하늘엔 별도많고
우리 살림살인 말도많다
1930, 2월 Columbia-record 발매 sp음반- 작사, 작곡미상 채동원노래로 실려 있습니다
他面-타면-에는 문수일사, 김서정작곡 채동원노래<세동무>가 같이 실려있습니다
1930년, 1월28일 東亞日報(동아일보) Columbia-record 廣告(콜롬비아 레코드 광고)-----------------------------------------------에는
第六回(제6회) 新譜(신보) 圓(원)
流行歌(유행가) 아리랑 蔡東圓 (채동원) 伴奏(반주) 콜롬비아 管絃樂(관현악)
세동무---------------------------------------------------------------------
------------------------------------------------------------------------------------------------------------------------------------라고 선전 하고 있습니다
韓國(한국)을 代表(대표)하는 民謠(민요)로 알려져 있다보니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나 映畵(영화) “아리랑”이 만들어지면서 당시 流行(유행)하고있던 <舊調-구조-아리랑>
을 編曲(편곡)해서 새로만든것입니다
당시 無聲映畵(무성영화) 背景音樂-배경음악-을 演奏-연주-하던 樂士-악사-중 누군가가 編曲-편곡-했으리라 추증됩니다
헌데 이음원은 1933년, 4월 治安妨害-치안방해-라는 總督府-총독부-의 말도안되는 一方的-일방적- 理由(이유)로 韓國(한국) 大衆歌謠(대중가요) 最初禁止曲-최초금지곡- 딱지를 받습니다
그 時期 發刊(시기 발간)된 雜誌(잡지) 三千里(삼천리)를 보면-----
어떠한 레코드가 禁止(금지)를 당하나
三千里-삼천리- 1936년, 4월호 禁止-금지-된레코드 一覽表-일람표-
年, 月, 日 理由-이유- 레코드 종류, 번호 演奏者氏名-연주자씨명-
八, 六, 三十 治安-치안- 콜롬비아 40070 蔡 東 園-채동원------------------------라 하고있습니다
1930년 1월28일 東亞日報-동아일보- Columbia-record 廣告-광고-----------------------------------------------------에는
第六回 新譜-제6회신보-
流行歌-유행가- 아리랑 채동원 伴奏-반주- 콜롬비아 管絃樂-관현악-
세동무----------------------------------------라고 紹介-소개- 히고있습니다
이곡은 1926년 나운규감독, 出演俳優-출연배우- 나운규, 이규설, 신일선, 남궁운, 주인규씨등으로 촬영된 동명영화<아리랑>주제가입니다
단성사에서 개봉시 무대한편에 설치된 뮤직박스에서 후일 韓國最初映畵主題歌-한국최초영화주제가-<落花流水-낙화유수->를 취입하는 이정숙씨가 live 이곡을 가창한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이노래가 音盤-음반-으로 처음 발매된 것은 1929년 columbia-record 서”映畵說明-영화설명-아리랑”이란 타이틀로 揷入曲形態-삽입곡형태-로 유경이가 부른것입니다
1929년, 2월26일 東亞日報-동아일보- Columbia-record 廣告-광고------------------------------------------에는
第一回 新譜-제1회신보-
映畵說明-영화설명- 鄕土悲劇-향토비극- 아리랑 二枚-2매- 成童鎬-성동호- 伴奏-반주- 朝劇 管絃樂團-조극관현악단- 光月團-광월단- 朝鮮樂部-조선악부- 노래 劉慶伊-유경이----
라고 宣傳-선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上記-상기- <채동원 음반> 에 이어서 1930년,3월 victor-record 서 sp음반으로 김연실의 목소리로 發賣(발매)되었습니다
他面-타면-에는 또한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 暗路-암로-가 함께 실려있습니다
이시기 Columbia-record 發行-발행- 歌詞紙-가사지-------------------------------------------------에는
v49071-a 映畵小唄-영화소패- 아르렁 獨唱-독창- 金蓮實-김연실- 伴奏-반주- 日本빅타 樂團-악단-
v 49071-b 映畵小唄-영화소패- 暗路 어둔길- 獨唱-독창- 金蓮實-김연실- 伴奏-반주- 日本빅타 樂團-악단-----------------라고 紹介-소개-하고 있어서 여러가지로 異彩-이채-롭습니다
우선 流行歌-유행가-를 뜻하는 流行小唄-유행소패- 란 용어서 派生(파생)된 映畵小唄-유행소패-란 색다른 용어, 그리고 聲樂家-성악가-들에게나 붙이는 呼稱-호칭-인 “獨唱-독창-“이란
待遇-대우-를 金蓮實(김연실)氏(씨)에게 하고있어서 興味-흥미-롭습니다
992—아리랑-b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는님은 十里(십리)도 못가서 발病(병)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靑天(청천)하늘에 별도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많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豊年(풍년)이 온다네 豊年(풍년)이 온다네 이 江山(강산)
三千里(삼천리) 豊年(풍년)이 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山川草木(산천초목)은 젊어가고 人間(인간)에 靑春(청춘)
은 늙어가네
上記(상기)歌詞(가사)는 1928년 博文書館(박문서관)에서 발행한<아리랑 映畵小說(영화소설)>에 실려있는 것입니다
映畵(영화)”아리랑” 主題歌(주제가)歌詞(가사)를 영화를 監督(감독)한 春史(춘사) 羅雲奎(나운규)가 直接(직접)했으리라 여러 情況(정황)이 보이나 아직 確實(확실)하게 立證(입증)되지 못했습니다
<三千里(삼천리)>紙(지)에서-------- 고향 회령서 남쪽으로부터 온 노동자들이 철로길뚝을 닦으면서 아리랑 아리랑 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는걸 듣고 서울로와서 이아리랑 노래를
찾았으나 아는이없어서 예전들은 멜로디를 생각해내서 가사를짓고 곡보는 단성사 음악대에 부탁하여 만들었다------“
해서 辯士(변사)요 黎明期(여명기) 우리가요 창작에 큰기여를 한 김영환설, 團成社(단성사) 管絃樂團(관현악단)의 副(부)樂團長耳(악단장이)요 춘사 나운규영화<風雲兒(풍운아)>
主題歌(주제가)를 창작한 林晶燁-임정엽-설, 이왕직 양악대 대장 백우용설이 난무하고
그의회고서 ---“노동자들이 부르던 예전 멜로디 를 생각해내서”에서 그의머리에 그멜로디가 이미있었고 누군가는 단지 樂譜化(악보화) 한것뿐이니 나운규가 아리랑을 창작한거나 마찬가지다
라고 주장하는 글도보입니다
노래가사도 나운규가 아리랑을 감독하기전<아르렁><아라랑타령><아리랑>등으로 불리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헌데 1910년대 발행된 잡가집에실린 가사는 나운규의 아리랑과는 아주다릅니다
<증보신구잡가>등의 노래책에 실린가사는 “아리랑 아리링 아라리요”하는부분은 같으나 뒤의”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하는부분은 영화에 맞추어 나운규가 새로 지은것으로 보인다
고 주장하는 글이 있읍니다
결론적으로 나운규의 아리랑곡조는 가야금산조의 명인 김죽파 즉 金雲仙(김운선)이 가야금병창으로 취입한 <아리랑>과 매우 흡사하고 1896년 헐버트가 채보한<아리랑> 과같은것으로 보아서
나운규가 회령서들은 곡조가 바로 이곡조다 라고 주장하는 글이있습니다
이보형 옛음악연구가는 이러한 구조아리랑이 2분의3박자 세마치에 맞고 신민요풍 인점을들어서 조선조 말에불린 신민요로 보았다합니다
영화<아리랑>이 1926년 처음 개봉된후 1950년 六二五戰爭(육이오전쟁)勃發(발발) 직전까지 상영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만큼 우리영화사에 획을그은 작품이라 할수있습니다
아리랑의 인기가 이렇게 높아지자 電氣吹入(전기취입)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實音(실음)에 더가까워진 留聲機音盤(유성기음반) 産業(산업)에서도 영화 아리랑의 내용이나 주제가를
음반으로 발매하기 시작합니다
1929년 Columbia-record 서 성동호 해설로 <영화설명 아리랑> 레코드가 발매된후 columbia-record 서 발매한 label-레이블-인 regal-record-리갈-레코드-서 1932년경 강석연이
주제가를 부른 映畵說明(영화설명 아리랑) 레코드를 또발매합니다
1934년, 6월30일 regal-record 發行(발행) 歌詞紙(가사지)---------------------------------------------------에는
C107-a 영화설명 아리랑 一(일) 성동호 노래 姜石碩燕(강석연) 伴奏(반주) 管絃樂(관현악)伴奏(반주)
C107-b 영화설명 아리랑 二(이)성동호 노래 姜石燕(강석연) 伴奏(반주) 管絃樂(관현악) 伴奏(반주)
C108-a 영화설명 아리랑 三(삼)성동호 노래-------------------------------------------------------------
C108-b영화설명 아리랑 四(사)성동호 노래-----------------------------------------------------------------------라 表記(표기) 하고있습니다
成東鎬(성동호) 解說(해설)-------살찐 田畓(전답)과 아름다운 山川(산천) 無窮花(무궁화)三千里(삼천리)에 豊年(풍년)은 왔건마는 한줄기 흘러오는 아리랑의 노래는 이 洞里(동리)의
百姓(백성)들이 풀어놓은 설움인가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靑天(청천)하늘엔 별도많고 우리네 살림살이는 말도많다----강석연 노래-----------------로 이음반은 시작합니다
993—아리랑-c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靑天(청천)하늘에 별도많고 우리네 살림살이는 말도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님은 十里(십리)도못가서 발 病(병)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내눈이 어두워 못본다면 開川(개천)을 나무래 무엇하리
上記歌詞(상기 가사)는 앞서 紹介(소개)한 1932년 regal-record 발매< 映畵說明(영화설명)아리랑>音盤(음반)에 揷入曲(삽입곡)形態(형태)로 실려있는 강석연노래 가사입니다
영화<아리랑>이 개봉된 1926년으로 부터 最初(최초) 發聲映畵(발성영화) 春香傳(춘향전)이 개봉된 1935년 까지의 한국영화는 과연 無聲映畵(무성영화) 全盛時代(전성시대)라고 할만합니다
映畵製作 篇數( 영화제작 편수)를보면 解放前篇數(해방전편수) 140여편 반을넘는 80여편이 제작되었고 이시기 생겨났다가 사라진 영화사나 프로덕션이 해방전 모든 프로덕션의 5분의4나됩니다
映畵界 動向(영화계동향)이나 生産(생산)된 작품의 내용을 보아도 그만큼 複雜(복잡)하고 重要性(중요성)을 띠고있습니다
우선 民族映畵(민족영화)의 發現(발현) 영화의 娛樂化 傾向(오락화 경향) 左翼思想(좌익사상)을 품은 일련의 傾向映畵(경향영화)가 등장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지방의 映畵製作活動-영화제작활동-과 일본인들의 영화제작활동이 本格化(본격화)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기간을 통하여 조선총독부의 映畵檢閱(영화검열)은 이제 極惡性(극악성)을 露出(노출)하기에 이르렀고 韓國映畵(한국영화)의 藝術性(예술성)은 源泉的(원천적)으로
威脅(위협) 받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1926년, 9월 團成社(단성사)에서 開封(개봉)한 “아리랑”은 춘사 나운규가 최초로 각본, 감독, 주연을 함께한 작품으로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이 제2회작품 입니다
흔히 韓國最初(한국최초)映畵(영화)로 꼽는<義理的(의리적) 仇鬪(구투)>로부터 7년후 最初(최초)의 劇映畵(극영화) <月下(월하)의 盟誓(맹세)>로치면 불과 3년만에
製作發表(제작발표)되었습니다
이영화는 오늘날까지도 한국영화사상 최대의 문제작으로 평가받고 있기도하고 爆發的(폭발적)인 문제를 안고있기도 합니다
그이유는 이영화야말로 民族(민족)의 悲哀(비애)와 불타오르는 民族精神(민족정신)을 形象化(형상화)한 民族映畵(민족영화)였다는점, 나운규가 아리랑으로 인해 그때까지의 韓國映畵(한국영화)를
높은 藝術的水準(예술적수준)으로 올려놓았다는점, 映畵人(영화인) 나운규의 여러가지 傳說的(전설적)인 문제가 거대하게 投影(투영)되었다 는 점 때문입니다
<아리랑>이전 나운규는 비록 演技力(연기력)은 인정받았다 할지라도 겨우 3편의영화에 출연한 無名俳優(무명배우)水準(수준)이었으나 “아리랑”이후 그의 藝術)天才(예술적-천재)는
疑心(의심)할 여지없는 것 이란 主張(주장)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한국영화라면 낡은패턴의 신파물이나 일본의 新派小說(신파소설) 飜譯物(번역물) 같은 것이 고작으로 여겨지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춘사의 아리랑의 發想(발상)은 분명히 뚜렷한 methodology-방법론-위에서 창작되어있는 藝術作品(예술작품) 이었음을 증명했다 할수있습니다
더나아가 하나의 巨大(거대)한 民族映畵(민족영화)이며 民族抵抗(민족저항)의 “피의 藝術(예술)”이었습니다
이는 이나라 主權(주권)과 인민의 권리와 조국의 땅을 빼앗긴 모든민족의 마음속에있는 鬱憤(울분)과 悲哀(비애)와 피끓는 忿怒(분노)와 抵抗(저항)의 심지불을 그어당기는 導火線(도화선) 이었습니다
導火線(도화선)은 마침내 dynamite-다아나마이트-를 暴發(폭발)시키고 맙니다
이러한 1926년 9월<아리랑>의 개봉은 그해 7월5일에 그누구도 認定(인정)치않는 活動寫眞(활동사진)필름 檢閱規則(검열규칙)을 제정하고 이민족의 思想(사상)과 情緖(정서)를
彈壓(탄압)하고 監視(감시)하던 總督府(총독부)의 발판밑에서 바로일어났습니다
아리랑이 개봉된 단성사 앞에는 祖國喪失(조국상실)의 민중이 雲集(운집)하여 長蛇陣(장사진)을 이루어 문짝이 부서졌고 全國(전국)坊坊曲曲(방방곡곡)의 극장마다 前無後無(전무후무)한 흥행을
紀錄(기록)했습니다
이때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두고 계속해서 劇場(극장)이없는 僻村(벽촌)에서도 상영했습니다
994—아리랑-d
民謠(민요)아리랑은 명실공히 한민족을 상징하는 “民族(민족)의노래”로서 民族(민족), 民衆(민중)의 참말<眞言(진언)>이며 共同體(공동체)로서의 民族的自我(민족적 자아)를
確認(확인)하는 노래로 자리잡고 있읍니다
이러한 아리랑의 通時的(통시적) 永續性(영속성)은 近代生活(근대생활)의 萬華鏡(만화경)으로 규정할수있습니다
아리랑은 각시대를 貫流(관류)하는 민중들의 삶의 생생한 증언이고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한발더 나아가 아리랑은 單純(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小說(소설)戱曲(희곡) 映畵(영화)등 다양한 예술장르로 擴大(확대) 再生産(재생산)되고 있습니다
말그대로 藝術(예술)의 多用化(다용화) 現像(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로생각할 때 아리랑은 韓國)藝術(한국예술)의 原型(원형)이자 基本動力(기본동력)이 되고있는것입니다
이러한 “아리랑”은 大衆歌謠(대중가요)로도 많이 불리어졌습니다
大衆歌謠(대중가요)로서 “아리랑”은 이미 1920년대부터 등장하는데 그계기가 된 것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나운규의영화 “아리랑” 주제가가로 사용하면서서 입니다다
민족영화로 평가되는는이영화 주제가로 쓰인인<本調(본조)아리랑>이 사랑을받으면서 대중가요의 아리랑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30년,2월 Columbia-record 서 발매된 채동원의 아리랑은 앞서 설명했듯이 아예 “流行歌(유행가)"라는 label-라벨-을달고 出市(출시)되었습니다
流行歌(유행가) 로서 “아리랑”이 出現(출현)한것입니다
이음원은 <종횡무진가요사991>에서 보듯이 거의 아리랑 가사를 그대로 옮겨놓고있습니다
단지 “산천의 초목은 젊어지고 인간의 청춘은 늙어간다”라는 가사만 덧입힌것입니다
다시 아리랑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서!!!
아리랑이 개봉될시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경찰과 도서실이 검열을 하고있었는데 그들은 처음 감쪽같이 속았었습니다
왜냐하면 日人會社-일인회사- 製作(제작)이요 日人名義(일인명의)로 檢閱申請(검열신청)을 했었기 때문에 무난히 上映許可(상영허가)를 했던것입니다
그러나 사건은 엉뚱한곳에서 터졌습니다
신문반쪽짜리 傳單(전단)이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名畵(명화)”라는 宣傳文(선전문)안에 곁들여 主題歌(주제가)를 넣었던 것이 發覺(발각)되었던 것입니다
1만매를 인쇄해서 北村(북촌)일대에 뿌리던중 일경에 압수되어 당시 단성사의 선전과 檢閱(검열)擔當(담당)責任者(책임자) 였던 이구영은 불려들어가 심한문초를 당하고 결국
그들의 一方的(일방적) 主張(주장)인
“主題歌(주제가)가 不穩(불온)하다”고 해서 削除(삭제)한다는 條件下(조건하)에 傳單撒布(전단살포)가 허가 되었습니다
망치와 끌을가지고 그들이 보는앞에서 주제가를 오려낸다음 이것을 뿌렸드니 그것이 오히려 民衆(민중)들을 刺戟(자극)해 總督府(총독부)의 蠻行(만행)에 逆效果(역효과)를 주게됩니다
“선전지가 검열에서 뚫렸다니 普通映畵(보통영화)가 아니구나”해서 삽시간에 소문이퍼져 개봉1회부터 관객들이 모여들어 문짝이 부서지는 초만원을 이루어서 총독부를 머쓱하게 만듭니다
이런현상 눈앞에서 보고도 檢閱官(검열관)은 束手無策(속수무책)으로 바라볼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운규의 영화<아리랑>이 前無後無(전무후무) 興行(흥행)을 기록하자 그主題歌(주제가)도 덩달아 人氣(인기)가 치솟으며 민족의 노래로 刻印(각인)됩니다
단성사에서 개봉시 동요가수 李正淑(이정숙)이 불렀습니다 물론 영화 출연배우 신일선씨도 무대서 불렀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인래가 영화의 clamax-클라이맥스-에서 불려을 때 누구한사람 눈물적 痛哭(통곡)치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만일 이영화의 前後篇(전후편) scenario-시나리오-를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작품의 theme-테마-를 가슴깊히 새길수있을 것입니다
영화에 출연했던 신일선은---영화가 끝나자 관객속에서는 감동한 나머지 우는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사람 심지어는 朝鮮獨立 萬歲(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있어서
그야말로 感動(감동)의 도가니 였다”고 證言(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영화는 우선 “고양이와 개” 라는 字幕(자막)으로 시작합니다-------중략------
붉은피를 본 shock-충격-으로 영진-나운규-는 마침내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영진은 일본순사의 포승을 받고있습니다
모두들 영진의 끔찍한 살인의 처절한 모습에 눈물을 흘리고 이때 변사의 입을통해 영진이 그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제발 울지마십시요 이몸이 三千里 江山(삼천리 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쳐버렸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지금 여기를 떠나려하고있는 이영진은 죽음의길을 가는것이아니라 更生(갱생)의길을
가는것이오니 제발눈물을 거두어 주십시요”그리고 영진은 日警(일경)에게 묶여 아리랑고개를 넘어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제가가 live 로 불리어졌습니다
“이몸이 삼천리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쳐버렸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라는 변사의 설명에서 그시기 우리민족이 처한처지를 間接的(간접적)으로나마 抗辯(항변), 表現(표현)하고있습니다
그시기 그누가있어서 일제의 暴壓(폭압)에 미치지 않았겠습니까?? 미치지않고는 견디기힘든 우리민족의 삶이였습니다
“更生(갱생) 의길을가는것이오니---“에서는 그래도 暴壓(폭압)에 屈伏(굴복)하지말고 굳세게 이겨내면 미래에는 일본도 망하고 해방이 되리라 는 희망을 영화를 만든 나운규가 우리민족에 던지는
메시지가 아니였을까 解釋(해석)해봅니다
995—아리랑-e-김연실
1930년, 3월14일 東亞日報(동아일보), 朝鮮日報(조선일보) victor-record 廣告(광고)-------------------------------------에는
49071 映畵小唄-영화소패 아리랑 獨唱(독창) 金蓮實(김연실-실) 伴奏(반주) 日本(일본)빅타樂團(악단)—라 소개 하고 있습니다
한편 그時期(시기) 發行(발행)된 victor-record-빅터레코드- 歌詞紙(가사지)------------------------------------------------에는
victor 4907-a 映畵小唄(영화소패) 아르렁 獨唱(독창) 金演實(김연실) 伴奏(반주) 日本(일본) 빅터 樂團(악단)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는님은 十里(십리)도못가서 발病(병)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靑天(청천)하늘엔 별도많고 우리네 살림사린 말도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豊年(풍년)이 온다네 豊年(풍년)이 온다네 三千里(삼천리)豊年(풍년)
이 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山川草木(산천초목)은 젊어만가고 人間(인간)에 靑春(청춘)은
늙어만 가네----------------------------------------------------------------라고 소개, 광고 하고 있습니다
俳優(배우)로서 音色(음색)이 고와서<세동무 ><暗路(암로)>등의 映畵(영화)主題歌(주제가)를 부르기도한 金蓮實氏-김연실 씨가 吹入(취입)한 映畵(영화)主題歌(주제가) <아르렁> 歌詞(가사) 입니다
1930년 3월 victor-record 서 sp음반에실어서 발매 하며 “映畵小唄(영화소패)”란 색다른 용어로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영화소패>는 일제강점기 流行歌(유행가)를 “流行小唄(유행소패)” 로 부르던데서 派生(파생)된 用語(용어)입니다
헌데 上記歌詞(상기가사)는 박문관에서 發行(발행)한<아리랑 映畵小說(영화소설)>에 실린 歌詞(가사)와 同一(동일)합니다
영화 아리랑 줄거리를 綿密(면밀)히 읽어보면-------------------------------------------
주인규<오기호>가 나운규의동생 신일선<영희>를 겁탈하려하는 급박한 순간에 때마침 그의친구 남궁운<현구>가 달려와 그들사이에 처절한 싸움이 시작되자 싸우는 두사람과
쓰러진 신일선 그리고 흥겨운 농악소리 그것이 나운규에게 幻覺(환각)을 줍니다
沙漠(사막)을 가로질러가는 일대의 商人(상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목마른 戀人(연인)들 앞에서 물을 철철 넘치게 마십니다 두연인은 한모금의 물을 隊商(대상)에게 청합니다
대상은 물을주는대신 女子(여자)를 달라고합니다 목숨대신에 두사람은 사랑을 犧牲(희생)합니다
여자는 마침내 대상의 품에 안깁니다 바로 이떄였습니다!!
幻覺(환각)을 쫓고있던 狂人(광인)나운규가 옆에있던 낫을 번쩍들어 휘두릅니다 붉은피를 쏟으면서 주인규<기호>가 쓰러집니다
붉은피를본 충격으로 나운규는 마침내 제정신으로 돌아옵니다
바로 이러한 映畵的(영화적) 設定(설정)이 나운규가 그전 國內映畵(국내영화)들과 전혀다른 映畵技法(영화기법) ----사용해서 韓國映畵(한국영화)의 藝術的水準(예술적수준)을
한단계 올려놓았다는 評價(평가)를 받는 理由(이유)입니다
이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은 하나하나가 나운규의 놀라운 現實認識(현실인식)과 분석을 바탕으로해서 形象化(형상화)되었습니다
작품의 具體的(구체적)인 연출에 있어서도 나운규는 cut back-컷백- 과 心理的(심리적) montage-몽타주-를 구사해서 “이리랑”을 온전한 方法論(방법론)위에서 다루었습니다
이러한 藝術的水準(예술적수준)은 當時(당시)로 봐서는 劃期的(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결국그는 친구 윤봉춘에게 이야기햬듯이 아리랑 각본을 쓰기전 “어느 외국영화에서 힌트를얻은것이다—“ 이로보아 한 개의 劇的(극적) situation-시추에이션-은 어느 外國映畵(외국영화)서
힌트를 얻고있을것이라 斟酌(짐작)됩니다
具體的(구체적)으로 그 外國映畵(외국영화)題目(제목)을 밝히지않았으나 그것은 패전후 독일의 전위영화인 robert wiene-로베르트 비네-의 <das kabinett des dr caligari-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이었을 可能性(가능성)이 높습니다
힌트를 얻은 대목은 幻像場面(환상장면)이며 기호에게 영진이가 낫을 휘두르는 “幻像(환상)에 의한 殺人(살인)”이라는 motive-모티브-일것입니다
이영화는 1922년 서울에서 開封(개봉)했습니다
世界映畵史(세계영화사) 를보면 나운규씨보다 걸작을 발표한 감독은 많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갖추어진 환경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졌고 외적의 점령과 엄청난 監視下(감시하)에서
이러한 작품으로 民族精神(민족정신)을 외치고 共感(공감)시킨 映畵人(영화인)은 매우드문 일입니다
\\--아리랑-
일본인 야마네도시로 의<조선1930년대 연구논문집>이라는 冊(책)에”無聲映畵(무성영화)와 아리랑” 이라는 題目下(제목하)에서
-----이영화는 植民地下(식민지하)에서 朝鮮人(조선인)들의 民族感情(민족감정)과 고민, 슬픔등을 단적으로 表現(표현)한 작품이다
이영화 끝 SCENE-신-에서 女歌手(여가수) 李貞淑(이정숙)이 아리랑 노래를 부르자마자 관객들의 흐느껴울면서 아리랑을 같이불러 大合唱(대합창)되었다
그는 이러한 apisode-에피소드-를 紹介(소개)하면서 아리랑의 가사까지 飜譯(번역)하였습니다
이영화를 보고난 관객들은 마치 義烈團員(의열단원)이 서울 어디선가에 爆彈(폭탄)을 터뜨린것 같은 衝擊(충격)과 興奮(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또한 1929년 劇團(극단) 土月會(토월회)가 土地(토지)를 빼앗긴 朝鮮人(조선인)들이 北間島(북간도)로 유랑의 길을 떠나던 當時(당시) 社會相(사회상)을그린<아리랑 고개>를 상연했다
때마침 일어난 光州學生運動(광주학생운동)사건의 支援舞臺(지원무대) 되었다고해서 朝鮮民謠(조선민요) “아리랑”에 대해 禁止令(금지령)을 내렸다
민요 아리랑에는 여러설이있고 각지방에 여러가지 아리랑이있지만 근대에있어서는 이영화에 의하여 抗日性(항일성)를 띠기시작, 조선인의 기쁨과 슬픈을 표현할 수 있는 민족의노래가
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어서 영화<아리랑>의 상영으로 이영화가 민족을 자각시키고 아리랑의 유행을 가져왔음을 알게합니다
映畵(영화) <아리랑>은 韓國映畵史上(한국영화사상) 가장 草創期(초창기)에 製作(제작)된 名作(명작) 입니다
이 작품은 1926년 朝鮮(조선)kinema production-키네마 프로덕션-의 제2회작으로 製作(제작)되었으며 scenario-시나리오-와 監督(감독)및 主演俳優(주연배우)를 혼자 겸하였던 羅雲奎(나운규)
의 監督(감독)데뷰작입니다
當時(당시)의 우리영화는 1919년 金陶山(김도산)이 劇團(극단) 新劇座(신극좌)에서 만든 무성영화 초창기 형태인 連鎖劇(연쇄극) “義理(의리)적 仇鬪(구투)” 속에 약 1000피트길이의 필름을 제작
揷入(삽입)함으로써 起点(기점)을 이루었습니다
그뒤 필름마 사용해 완전한 영화가 만들어지기는 4년후인 1923년 尹白南(윤백남)이 民衆劇團(민중극단)을 이끌고 製作(제작)한 “月下(월하)의 盟誓(맹세)” 가 最初(최초)가 됩니다
이렇게 시행착오를 겪으며 시작된 映畵史(영화사) 草創期(초창기)의 작품들은 그大部分(대부분)이 아쉽게도 외국영화의 飜案模倣物(번안모방물)이나 開化期新派物(개화기 신파물),
通俗史劇物(통속사극물)이었으며 그야말로 지금보면 유치하고 글자그대로 活動寫眞(활동사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이와 같은 우리 映畵史草創期(영화사 초창기)의 歷史的(역사적)인 背景(배경)을보면 西歐(서구)의 문물들이 밀물처럼 들어오던 開化期(개화기)였으며 痛歎(통탄)스럽게도
韓半島(한반도)가 그시기 無能-무능-한 支配層(지배층)들에 의하여 한일합방 의 비운을 당하고 일제의 무력에의하여 植民地(식민지)가 된지 10년이경과한 때였습니다
영화<아리랑>은 이러한 歷史的(역사적)社會的(사회적) 背景(배경)아래에서 제작된것임을 우선 알아야합니다
1926년, 10월1일 당시 朴承 弼(박승필)이 경영하던 團成社(단성사)에서 개봉된 “아리랑”은 그야말로 이땅의 民衆(민중)에게 一大衝擊(일대충격)을 안겨준 革命的(혁명적)인 映畵(영화)가 됩니다
이미앞서 설명드렸듯이 이영화의 줄거리에서 보듯 主人公(주인공) 나운규-영진-는 三一運動(삼일운동)때 잡혀가서 일제의 無知莫知(무지막지)한 拷問(고문)으로 精神異常(정신이상)이된
民族靑年(민족청년)입니다
그가 미워하고 죽이게되는 주인규-기호-는 日帝(일제)에 阿附(아부)하는 反民族的(반민족적)인 人物(인물)입니다
精神異常者(정신이상자)가 아니면 살수없었던 日帝時代(일제시대) 그리고 精神異常者(정신이상자)이기에 殺人行爲(살인행위)가 가능하였던 作品(작품)의 方法論(방법론)이 지금봐도 놀랍습니다
영화의 撮影(촬영)도 당시로서는 드물게 農村(농촌)의 生生 (생생)한 現場(현장)을 事實的(사실적)인 技法(기법)으로 描祀(묘사)하여 한국 realism-映畵 -리얼리즘-영화-의 濫觴(남상)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作品(작품)속에서 기호-주인규-를 殺害(살해)하게되는 대상의 幻像場面(환상장면)의 設定(설정)과 처리는 秀拔(수발)한 技法(기법)으로 크게 讚辭(찬사)를 받을만합니다
그렇지만 亦是(역시)이작품의 가장큰 感動(감동)은 作品全體(작품전체)의 主題(주제)를 抗日民族精神(항일민족정신)으로 높이고 그것을 傳統民謠(전통민요)인 아리랑과 連結(연결), 昇華(승화)
시킨것입니다
이로서 영화의 題目(제목)이자 主題(주제)였던 민요 “아리랑”은 暗澹(암담)한 時代(시대)를사는 온겨레 의 愛國歌(애국가)요 겨레의 가슴마다 民族魂(민족혼)을 불어넣는 노래로 전하여지게 됩니다
豫想(예상)대로 이영화는 개봉되자 전국의 극장에서 대단한 經濟的(경제적)인 成功(성공)을 거두었고 이영화의 영향으로 이땅의 영화제작이 활발하여지는 한편 그간의
飜案 模倣物異(번안 모방물)이나 開化期 新派物(개화기 신파물) 제작을 벗어나 民族映畵 製作(민족영화 제작)으로 면목을 일신 하여 民族映畵創造(민족영화창조)의 傳統(전통)을
쌓게하는 礎石(초석)이됩니다
996—放浪歌(방랑가)-a강석연
피식은 젊은이 눈물에젖어 落望(낙망)과 설움에 病(병)든몸으로
北極寒雪(북극한설) aurora-오로라-로 끝없이 가는 애달픈 이내가슴
누가 알거나
돋는달 지는해 바라보면서 山(산)곱고 물맑은 故鄕(고향)그리며
외로운 나그네 홀로 눈물지을 때 放浪(방랑)의 하로해도 저물어 가네
春風秋雨(춘풍추우) 덧없이가는 歲月(세월) 그동안 나의마음 늙어가고요
어여쁘던 내사랑도 시들었으니 몸도늙고 맘도늙어 절로 시드네
1931년 正月新譜(정월신보)로 Columbia-record 발매 sp음반-이규송사 강윤석 편곡 강석연 노래로 실려있습니다
他面(타면) 이규송사, 강윤석편곡 강석연노래<梧桐(오동)나무>가 함께 실려있습니다
노래 1절 導入部(도입부) ”피식은 젊은이 눈물에젖어---“에서 따온 一名(일명) <피식은 젊은이>로 불리는 이가요는 한국의 放浪歌謠(방랑가요)의 出發點(출발점)으로
初期歌謠史(초기 가요사) 의 한페이지를 차지할만합니다
이시기 作曲-작곡-과 編曲(편곡)의 槪念(개념)이 混用(혼용)되여 사용되었으므로 編曲(편곡)으로 表記(표기)된 것을 作曲(작곡)으로 解釋(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이 대중가요는 그시기 크게 流行(유행)하며 여러 歌手(가수)가 remake 에 同參(동참)합니다
1931년 tombo-record 서<피식은 젊은이>라는 제목으로 첫번째 “新派(신파)女王(여왕)” 또는 “눈물의 女王(여왕)”으로 불리던 이경설씨가 취입했습니다
他面(타면)에는<虛榮(허영)의 꿈>이 함께 실려있습니다
그녀는 진보적 演劇團體(연극단체)였던 土月會(토월회)의 團成社(단성사) 公演(공연)에서 有名(유명)한 悲劇俳優(비극배우)로 활동하며 상기<放浪歌(방랑가)>를 부르곤 했는데
이것이 레코드 관계자들의 귀에 들어가 Tombo-톰보-, chieron-시에론-, polydor-폴리돌- 등의 레코드서 吹入(취입)을 합니다
이노래는 日帝 强占下(일제강점하)에 비참해진 겨레의 運命(운명)을 정처없이 헤매이는 放浪人(방랑인)에 比喩(비유)한 노래입니다
뒤늦게사 이곡이 여러가수에 의하여 취입될정도로 유행하자 일방적인 主張(주장)인 治安妨害(치안방해)를 하는 不穩歌謠(불온가요)로 몰아서 금지곡처분을 하고맙니다
허나 이경설은 이에 굴하지않고 演劇公演(연극공연) 幕間(막간)에서 日警(일경)의 눈을피해 계속불렀습니다
그러자 日警(일경)은 禁止曲(금지곡)을 吹入(취입)하였다 하여 販賣中(판매중이)던 레코드를 모두 押守(압수)하였습니다
이로인하여 레코드회사서 레코드를 판매하지못해 이익을 내지못했다하여 아무런 보수도받지못한체 병든몸으로 치료도 돈이없어 치료도 받지 못한체 巡廻公演中(순회공연중)
日帝(일제) 侵略者(침략자)들 에대한 분한마음만 간직한체 꽃다운 청춘을 마치고 말았다합니다
1931년, 1월24일, 2월5일 東亞日報(동아일보) 1931년, 1월24일, 2월4일, 2월7일, 2월14일 자 朝鮮日報(조선일보) tombo-record 廣告( 톰보 레코드 광고)--------------------에는
電氣吹入(전기취입)
第逸回 新譜(제1회신보) 定價(정가) 金一園(금1원)
流行小曲(유행소곡) 피식은 젊은이<放浪歌(방랑가)> 이경설 伴奏(반주) 管絃樂(관현악)
流行小曲(유행소곡) 虛榮(허영)의 웃음 이경설----------------------------------
---------------------------------------------------------------------------------------------------------이라고 宣傳(선전) 하고 있습니다
流行歌(유행가)를 “流行小曲(유행소곡)” 이란 또다른 용어로 부르고있고 그무렵 音質向上(음질향상)이 이루어진 “電氣吹入(전기취입)”을 강조하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이어서 1931년 victor-record 서 後日(후일) <荒城(황성)의적>으로 有名(유명)해지는 幕間歌手(막간가수)겸 俳優(배우)인 이애리수씨가 remake 했습니다
他面(타면)에는 김서정작사, 곡 <강남제비>가 함께 실려있습니다
1935년, 2월 victor-record 發行(빅터레코드 발행) 每月 新譜紙(매월 신보지)----------------------------------------에는
總目錄(총목록)
流行歌(유행가) 新民謠(신민요)
49096 放浪歌(방랑가) 이애리수 管絃樂(관현악)伴奏(반주)
江南(강남)제비 이애리수-----------------------------------
--------------------------------------------------------------------------------------------------------라고 表記(표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大衆歌謠(대중가요) <강남제비>흔히들 강석연씨가 원창을 한것으로 알고있고 무대에서 자주 가창한 신카나리아씨도 그렇게 증언하고있으나 강석연 버전은 발견되지 않고있습니다
이어서 이경설씨가 이번에는 chieron-record-시에론레코드-서 이곡을 또 發表(발표)합니다
1933년, 4월 chieron-record 發行(시에론 레코드발행) 新譜(신보)-ckieron news시에론 뉴스-제17號(호)- 1937년, 7월 chieron news-시에론뉴스---------------------에는
二十二(이십이) 流行小曲(유행소곡) 放浪歌(방랑가) 이경설
외로운 꿈 全壽麟(전수린) ---------------------------으로 선전하고 있어서 後日(후일) <황성엣터<알뜰한 당신>등을 작곡해 有名(유명)해지는
作曲家(작곡가) 전수린씨가 歌謠生活 初期 (가요생활 초기) 歌手活動(가수활동)을 겸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어서 興味(흥미)롭습니다
다음해인 1932년 徐英姬(서영희)가 또 이가요를 chieron-record-시에론 레코드-에서 發表(발표)했습니다
他面(타면)에는 作者未詳(작자미상) <그리운벗>이 함께 보입니다
1932년, 5월28일, 6월7일 東亞日報(동아일보) chieron-record 廣告(시에론 레코드광고)----------------------------------------에는
六月新譜(6월신보)
獨唱(독창) 放浪歌(방랑가) 徐英姬(서영희) 伴奏(반주) mandolin-만도린- orchestra-오케스트라-
그리운 벗-----------------------------------------------------------------------------라고 소개 하고 있습니다
1936년에는1934년 病死(병사) 한 첫번째 <눈물의 女王(여왕)> 李景雪(이경설)이 遺作(유작)으로 polydor-record 서 이노래를 또 발표했습니다
1936년, 11월23일 每日申報(매일신보) 朝鮮日報(조선일보) polydor-record 廣告(폴리돌 레코드드 광고)-------------------------------에는
十二月(십이월) 新譜(신보)
19361 피식은 젊은이 李景雪(이경설)-------------------라고 紹介(소개)하고있습니다
한편 韓國最初(한국최초) 職業歌手(직업가수) 채규엽씨는 骨髓(골수) 親日派(친일파) 답게일본에서 長谷川一廊-장곡천 일랑-“하세가와이치로”라는 藝名(예명)으로<放浪(방랑)의 唄(패)>
라는 日本式(일본식) 題目(제목)에다 사토소노스케 가 日譯(일역) 한 歌詞(가사)로 발표했습니다
他面(타면)에는 한국계로 알려진 여가수 노리코와 듀엣으로 <아리랑>을 그것도 일본어로 취입 실었습니다
한편 어떤책에서는 이곡을 <방랑자의노래>로 개제하여 취입했다고 설명하고 있기도합니다
그리고 이후 “放浪歌(방랑가”) 가 “放浪者(방랑자)의노래” 로 改題(개제)되어 불리기 시작했다는 글도 보입니다
997—放浪歌(방랑가)b—이애리수
피식은 젊은이 눈물에젖어 落望(낙망)과 病(병)든몸으로 北極寒雪(북극한설) 오로라로
끝없이가는 애닯은 요내가슴 누가 알거나
봄동산 지는꽃 바라보면서 어여쁜 옛愛人(애인) 품속에 안겨 悲憤慘敗(비분참패) 괴롭고도
쓰린 하소연 사라진 꿈속에 失戀(실연)의 눈물
돋는달 지는해는 덧없이 가서 그동안 나의몸 늙어가고요 비내리는 여름밤과 가을아침에
못생긴 放浪者(방랑자) 죽지는 못해
상기 歌詞(가사)는 앞서 紹介(소개)드린 1930년 victor-record 서 이애리수씨가 발표한<放浪歌(방랑가)> 歌詞(가사)입니다
Waltz-rhythm 으로 進行(진행)되고 3절까지 歌唱(가창)되는 音源(음원) 은 강석연씨와 melody-멜로디-는 같으나 歌詞(가사)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이노래는 <放浪者(방랑자)의노래> 라고도 하며 그시기 獨立運動(독립운동)등 여러가지 이유로 조국을 떠난 亡命家(망명가)들의 쓰라린 放浪生活(방랑생활)을 표현한 노래로서
노래 歌詞(가사)에서 처럼 “돋는달 지는해”를 바라보면서 눈보라치는 시베리아 벌판을 헤매는 放浪者(방랑자)의 生活(생활)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피식은 젊은이”라는 副題(부제)가 붙어있기도해 그무렵 愛唱(애창)되던 亡命歌搖(망명가요) 失鄕歌(실향가) 의 代表的(대표적)인 曲-곡-이라 할수있습니다
우리 大衆歌謠史(대중가요사) 1930년대 初盤(초반)발표된 노래중에는 當時(당시) 큰 人氣(인기)를 누렸을뿐 아니라 只今(지금)까지도 끈질긴 生命力(생명력)을 維持(유지)하고있는
歌謠(가요)가 적지않습니다
채규엽의 데뷔곡인 <流浪人(유랑인)의노래>. 上記言及(상기언급)강석연의 放浪歌(방랑가) 이애리수의<荒城(황성)의 跡(적)> 고복수의<他鄕(타향)>-----등등이 그러합니다
이들노래의 話者(화자)는<他鄕(타향)>을 제외하고는 모두 故鄕(고향)을 떠나 他地(타지)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의 流行歌(유행가)의 始原(시원)과 더불어 故鄕喪失(고향상실)을 素材(소재)로 삼았던 것입니다
韓國(한국)大衆歌謠(대중가요)의 草創期(초창기)인 1930년대 初盤(초반)에 이러한 大衆歌謠(대중가요)들이 大擧(대거) 普及(보급), 流行(유행) 될수밖에 없었던 背景(배경)이 무엇일까요??
韓國歌謠史(한국가요사) 草創期(초창기) 쏟아져 나올수밖에 없었던 고향을 그리는 가요를 흔히들 “放浪歌謠(방랑가요)” 라고 부릅니다
어쩔수없이 故鄕(고향)을떠나 定處(정처)없이 떠돌며 身世(신세)를 恨歎(한탄)하는 이른바 悲歎調(비탄조)의 노래들입니다
넓은意味(의미)의 望鄕歌(망향가)라고 할수있으나 嚴格(엄격)히 分析(분석)해보면 純粹(순수) 望鄕歌(망향가)와는 性格(성격)이 조금다릅니다
이러한 大衆歌謠(대중가요)들을 流浪歌謠(유랑가요) 放浪歌謠(방랑가요)라 부를수있습니다
放浪(방랑)歌謠(가요)의 嚆矢(효시)를 上記歌謠(상기가요) “放浪歌(방랑가)”라 보는 視角(시각)이 많으나 1930년 최초의 職業歌手(직업가수)로 評價(평가)받는 채규엽이 작사,작곡하고
노래까지 부른<流浪人(유랑인)의노래>가 그보다 한해앞섭니다
허나 재미있는 것은 “流浪人-유랑인-노래”는 痕跡(흔적)이 稀微(희미)하나 요즈음도 “放浪歌(방랑가)” 가 어렵지않게 들을 수 있는 것을보면 當時(당시)에는 “流浪人(유랑인의)노래”
보다 “放浪歌(방랑가) ”가 더많이 불린 것을 알수있습니다
이로인해 評者(평자)들이 <放浪歌(방랑가)>를 “放浪歌謠(방랑가요)의 嚆矢(효시)”로 主張(주장)하는 이가 많은것일수도 있습니다
어쩃던 이시기에 放浪(방랑)이나 流浪(유랑) 이라는 題目(제목)이 들어있거나 他鄕(타향)을 떠돌며 고향을 그리는 내용을 담은 大衆歌謠(대중가요)가 流行(유행)했다는 사실은
뼈속까지 아리는 아픔응 느끼게합니다
그들을 그러한 處地(처지)로 내몬사람들은 好衣好食(호의호식)하건만 나라를 통째로 일본이 갖다바친 執權層(집권층)의 無能(무능)함이 누구도 원치않은 韓日合邦(한일합방)을
招來(초래)했고 그결과 말도안되는 土地調査事業(토지조사사업) 産米增産計劃(산미증산계획)으로 强制(강제)로 祖上代代(조상대대로) 이어받은 목숨 같은 農土(농토)를 빼앗기고
祖國(조국)을떠나 流浪(유랑, 放浪(방랑)하는 사람들을 量産(양산)했으니깐요
“放浪歌謠(방랑가요”)의 大部分(대부분)은 悲歎調(비탄조)로 一觀(일관)하고있는점이 特徵(특징)입니다만 그 理由(이유)를 너무나 잘알기에 充分(충분)히 理解(이해)가되는 部分(부분)이기도 합니다
處地(처지)가 處地(처지)인만큼 充分(충분)히 理解(이해)할수있지만 노랫말이 앞날의 希望(희망)을 전혀담아내지 못하고 敗北主義(패배주의)로 가득차있는 것은 어쩔수없이
매우失望-실망-스런 부분이라 아니할수 없습니다
上記(상기) “放浪歌(방랑가)” 도 亦是(역시) 마찬가지 일수밖에 없습니다
가사는 식은피, 눈물, 낙망, 비분, 슬픔, 북극한설 오로라, 끝없이, 가엽은, 외로운, 덧없이, 늙음, 시들음----등의 極限的(극한적) 言事-언사-로 一觀(일관)하고 있습니다
하루해가 저물때면 山川景槪(산천경개) 秀麗(수려)한 고향땅이 그립기도하지만 스스로 식어버린 피의 所有者(소유자)라고 自處(자처)하는 話者(화자)는 아무런 意慾(의욕)도없이
Aurura-오로라-가 나타나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차디찬 북국땅을 향해가고있습니다
노랫말속 話者(화자)는 “될대로 되라” 라는 마음으로---- 세상의 極限(극한)까지 가고싶은 心情(심정)을 이렇게 나타내었습니다
비록 放浪(방랑)의 人生(인생)이지만 지난 歲月(세월)을 돌이켜봅니다
덧없이 지나가는 세월속에 몸과마음은 늙어갔으며 사랑마저 시들었습니다
998—流浪人(유랑인)의 노래-채규엽
여름 저녁 시원한 바다를찾아 一葉片舟(일엽편주) 둥실 띄어라 달맞이 가자
저 달마저 내가슴의 이설움 풀까 아 나의一生(일생) 故鄕(고향)이 그립기도하다
어이여차 놀 저라 노래부르며 넓은바다 푸른물위에 定處(정처)없이도 흐르는
저 달빛따라 이몸도 함께 아 나의 이배 끝이난데 내 故鄕(고향)일까
1930년, 4월 Columbia-record 발매 sp음반- 채규엽곡, 사 채규엽노래로 실려있습니다
他面(타면)에는 서수미레사 김서정곡 채규엽노래<봄노래 부르자>가 함께 실려있습니다
1930년, 3월31일, 4월8일, 15일 東亞日報(동아일보) 朝鮮日報(조선일보) 1930년, 3월26일, 4월8일 등등 Columbia-record 廣告(광고)--------------------------에는
第七回(제7회) 新譜(신보)
新進聲樂家(신진성악가) 蔡圭燁(채규엽) 獨唱(독창)
流浪人(유랑인)의 노래
봄노래 부르자--------------------------------------라고 紹介(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廣告(광고)를 통하여 우리 大衆歌謠史(대중가요사) 草創期(초창기) 大衆歌謠(대중가요) 聲樂(성악)의 區分(구분)이 뚜렷하게 없었고 “大衆歌手(대중가수)”를
“新進聲樂家(신진성악가)”로 表記(표기)한 것은 우리 大衆歌謠界(대중가요계)에 처음 登場(등장)하는 대중가수를 待遇(대우)하는 差員(차원)에서
이루어진 廣告(광고)로 理解(이해)할수 있습니다
상기곡<流浪人(유랑인)의 노래>는 事實(사실) 크게 힛트하지 못한 大衆歌謠(대중가요)입니다
허지만 韓國歌謠史(한국가요사) 最初(최초) 職業歌手(직업가수)로 評價(평가)받은 채규엽 씨의 debt-曲(데뷔곡이)라는 意味(의미)가있습니다
그리고 1930년대를 風味(풍미)했던 放浪歌謠(방랑가요)의 出發點(출발점) 이라는 主張(주장)을 하는 評者(평자)도 存在(존재)합니다
1930년을 전후해서 우리나라 레코드 製作社(제작사)들이 本格的(본격적)으로 産業化(산업화)되어 가던시절 職業歌手(가수)로 出世街道(출세가도)를 달리던 채규엽의 존재는 평생
尊敬(존경)받지 못할 삶을 살았지만 韓國歌謠史(한국가요사)에 커다란 象徵的意味(상징적의미)를 가지고있다는점은 否認(부인)하기 힘듭니다
그가 함경남도 함흥출생이고 중학교를 원산에서 다녔음을 모기윤씨가 證言(증언)하고있어서 事實(사실)로 보입니다
어떤기록에는 일본의 중앙음악학교 성악가를 졸업 1928년경 서울에서 독창회를 가졌다는 1928년, 5월7일자 朝鮮日報(조선일보) 社會面(사회면) 記事(기사) 도 있습니다
1930년 그가 職業歌手(직업가수)로 데뷔전 1930년, 3월6일자 기사에---- 서울시내 안국동소재 槿花女高(근화여고) 음악과 專任敎授(전임교수)로 그를 초빙했다---고 실려있기도 합니다
채규엽씨가 Columbia-record 專屬(歌手(전속가수)가 된 동기는 1930년초 Columbia-콜롬비아-서울지사 自祝宴會席上(자축연회석상)에서 일본어로 일본의 속요가락<나나와부시>를
부른 것이 당시 그자리 함께있던 支店長(지점장) 핸드포드 마음에들어서 노래취입을 요청해서 이루어졌다합니다
그시절 모두 日帝治下(일제치하) 에서 그들의 暴壓(폭압)에 치를떨며 일본을 詛呪(저주)하던 우리나라 國民(국민)들이 大部分(대부분)인데 그는 어찌 韓國民謠(한국민요)도 아닌
日本俗謠(일본속요)가락을 익혔으며 그런자리에 참여 그도 韓國人(한국인)이면서 버젓이 일인들 앞에서 부를수 있었는지 그의 精神世界(정신세계)를 疑心(의심)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上記歌謠(상기가요) <流浪人(유랑인)노래> 노래속 話者(화자)는 지금 여름바다에서 뱃놀이를 즐기면서 故鄕(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遊覽船(유람선)을 띄우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달맞이를 즐기고있지만 마음은 便安(편안)하지 못합니다
저달이 서러운 나의마음을 풀어줄까 흐르는 달빛따라 끝까지가면 故鄕(고향)에 닿겠지
무슨 理由(이유)에서 話者(화자)가 고향에 갈수없는 流浪人(유랑인)의 處地(처지)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뱃놀이와 방랑이라는 一見(일견) 矛盾(모순)되는 내용을 담고있어 作品性(작품성)은
많이 떨어지지만 當時(당시) 채규엽씨는 그저 아마추어적 첫작품으로 창작한 것 일것이니 論難對象(논란대상)도 안되는 작품입니다
어찌되었던 放浪歌謠(방랑가요)는 <流浪人(유랑인) 노래> 에서 “放浪歌(방랑가)” 로 이어지면서 한층 깊이를 더해가긴 합니다
999--봄노래 부르자-채규엽
오너라 동무야 江山(강산)에 다시 때돌아 꽃피어지고 새우는 이봄을 노래하자
江山(강산)의 동무들아 모두다 몰려라 춤을추며 봄노래 부르자
오너라 동무야 소리를 높이 봄노래 부르면서 이江山(강산) 잔디밭 香氣(향기)위에
민들레 꽃을 따며 다같이 이봄을 讚美(찬미)하자 이봄이 가기전
오너라 동무야 피리를 맞춰 이노래 부르면서 엉큼성 뛰어라 씩씩하게 봄잔디 풀밭위에
다같이 뛰잔다 엉금성금 이봄이 가기전
1930년, 4월 Columbia-record 발매 sp음반-서수미래작사 김서정작곡 채규엽노래로 실려있습니다
他面(타면)에는 채규엽사, 곡 노래로<流浪人(유랑인)의 노래>가 함께 실려있습니다
이 대중가요는 1936년, 3월 上記歌謠(상기가요) 2절가사 끝부분 가사에서 借用(차용)하여 <봄을 讚美(찬미)하자>라는 제목으로 再吹入(재취입)한 음반이 발매되기도 했습니다
이곡의 作詞者(작사자) 이름은 1936년 再吹入(입) (재취)입 音盤(음반)에 表記(표기)되 있습니다
1936년, 2월21일 東亞日報(동아-일보) Columbia-record 廣告(콜롬비아 레코드 광고)-----------------------------------------에는
傑作盤(걸작반)을 網羅(망라)한 三月(삼월)新譜(신보)
<二月(이월)二十日(20일) 發賣(발매)>
追憶(추억)의 幻影(환영) 專屬(전속) 蔡圭燁(채규엽) 吹入(취입)
봄을 讚美(찬미)하자--------------------------------------라고 소개하고있습니다
그리고 이 時期(시기) Columbia-record 發行( 콜롬비아 레코드 발행) 歌詞紙(가사지)---------------------에는
C40661-a 流行歌(유행가) 追憶(추억)의 幻影(환영) 異河潤(이하윤) 作詩(작시) 江口夜詩 (강구야시) 作,編曲(작,편곡)
蔡圭燁(채규엽) 伴奏(반주) 日本(일본)콜롬비아 管絃樂團(관현악단)
C40661-b 流行歌(유행가) 봄을 讚美(찬미)하자 徐秀美禮(서수미례) 作詩(작시) 蔡圭燁(채규엽) 伴奏(반주) 바이얼린
金甲子(김갑자) 伽倻琴(가야금) 金甲順(김갑순)------------------------------------------이라고 표기 하고있어서 1930년 발매서 알수없던 작사자를 서수미례로 밝히고 있습니다
상기곡 作詞者(작사자)로 표기된 “서수미례씨”는 채규엽씨가 가수데뷔전 일본서 귀국하여 독창회를 열었을 때 1928년, 5월7일 朝鮮日報(조선일보) 신문기사-------사회면에
“제2부순서에 <애기재우는노래>를 獨唱(독창)으로 부른다”는
豫告(예고)하는 것이 있는것로 보아서 歌手(가수)로 活動(활동)을 한듯하나 이외의 紀錄(기록)은 아직까지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日本(일본) 總督府(총독부)의 暴壓(폭압)으로 인한 植民治下(식민치하)에서 하고싶은 말도 제대로못하고 괴롭고 숨막히는 心情(심정)을 하소할길없는 상황에서 가슴속에 넘치는
忿怒(분노)를 안고 살아가던 조선의 民衆(민중)은 “빼앗긴 강산에 봄이오는 것을 꿈”에나마 그리면서 이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 까닭에 建康(건강)하게 밖에 보이지 않던 이곡도 머지않아서 禁止(금지)가되고 맙니다” 라는 글이 보이나 아직 이노래가 禁止曲(금지곡)된 물증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허나 “進步的(진보적) 演劇團體(연극단체)였던 土月會(토월회) 幕間舞臺(막간무대)에 1920년대 중반 채규엽이 출연 이노래를 부르곤해서 성인들도 이노래를 즐겨 부르게되었고
이로인하여 이노래는 童心(동심)의 울타리를 벗어나 빈곤하던 藝術歌謠 (예술가요)의 공백을 메우기도 하였다----”
는 說明(설명)이 보이는데 채규엽이 幕間舞臺(막간무대)서 곡을 불렀다는 時期(시기)가 맞지않습니다
이곡은 1920년대 중반이 아니라 1930년이 되어서야 채규엽의 職業歌手(직업가수)로서 데뷔곡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곡을 작곡한 김서정은 동요<봄노래를 부르자>를 창작후 더많은 가요를 創作(창작)하리라 期待(기대)를 모았으나 無聲映畵(무성영화) <落花流水(낙화유수)> 主題歌(주제가)를
創作後(창작후) 가요보다는 영화에 主力(주력)하다 夭折(요절)하고 말았기에 더 이상 전해지는 작품이없어서 매우 아쉽습니다
그에대한 설명은 다른가요서 상세히 할것입니다
이가요는 후일 後輩歌手(후배가수) 명국환씨가<봄노래>로 제목을줄여 remake 했고 계수남씨가 再吹入(재취입)하기도 했습니다
1000—세동무-
지나간 그옛날에 푸른잔디에 꿈을꾸던 그時節(시절)이 언제이던가 西(서)녁하늘 해지고
날은 저물어 나그네의 갈길이 아득하여요
薔薇(장미)같은 내마음에 가시가 돋혀 이다지도 어린넋 시들어졌네 사랑과 굳은 盟誓(맹세)
사라진 자취 다시두번 피지못할 고운 네모양
즐거웠던 그노래도 설운눈물도 저바다 물결위에 띄어버리고 옛날의 푸른잔디 다시 그리워
黃昏(황혼)의길이나마 돌아가오리
上記)歌詞(상기가사)는 1930년 columbia-record 발매 sp음반- 문수일사 김서정곡 채동원 노래로 실린 것입니다
他面(타면)에는 <아리랑>이 채동원 노래로 함께 실려있습니다
1930년, 1월28일 東亞日報(동아일보) Columbia-record 廣告(콜롬비아 레코드 광고)--------------------------------에는
第六回(제6회) 新譜(신보)
세동무 蔡東圓(채동원) 伴奏(반주) 콜롬비아 管絃團(관현단)
아리랑-------------------------------------------------------------
----------------------------------------------------------------------------------------------------------------------라고 宣傳(선전) 하고있습니다
1928년 개봉한 영화<세동무>主題歌(주제가)로 創作(창작)되었습니다
영화 세동무는 처음제목이 三乞人(삼걸인)이었으나 총독부 검열에서 심의불과 판정으로<세동무>로 개제되었습니다
金剛(금강) cinema-키네마- 曙光(서광)cinema-키네마 합동 제1회작품으로 김영환이 감독을 맡았습니다
한국대중가요사 초창기 중요한 역할을한 그는 辯士(변사)이기도 하고 음악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화<낙화유수> 주제가를 작곡한 작곡가이기도 하니 그가 영화음악을 맡은 것은 특이한 것은 아닐것입니다
映畵興行(흥영화행)은 대단한 것은 아니나 主題歌(주제가)는 널리불려졌습니다
이영화 출연배우 중에서 복혜숙, 김연실 등은 후일 가수로도 많은 활동을 하므로 영화개봉시 주제가를 불렀을 가능성이있습니다
映畵(영화)가 開封(개봉)되었을 때 딴 無聲映畵(무성영화)와 마찬가지로 뮤직박스에서 누군가가 主題歌(주제가)를 불렀을것이나 그에대한 紀錄(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느 漁村(어촌)에서 한 處女(처녀) 영옥, 3명의 總角(총각), 그리고 영옥을 探(탐)하는 숭배사이 에서 일어나는 愛情葛藤(애증갈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곡이 맨처음실린 음반은 1929년 Columbia-record 발매 sp음반 映畵說明(영화설명) 에 劉慶伊(유경이) 의 목소리로 1절만 삽입곡 수록되있읍니다
東亞日報(동아일보) 1929년 4월1일, 朝鮮日報(조선일보) 1929년, 4월4일 8월15일 Columbia-record 廣告(콜롬비아 레코드 광고)--------------------------에는
第二回(제2회) 新譜(신보)
映畵說明(영화설명) 漁村情話(어촌정화)
세동무 二 枚(2매) 金永煥(김영환) 伴奏(반주) 潮劇 管絃樂團(조극관현악단)-------------------------라고 宣傳(선전) 하고있습니다
이시기 Columbia-record 發行(콜롬비아 레코드 발행) 歌詞紙(가사지)----------------------------------에는
Columbia-40017-a 映畵劇(영화극) 세동무 一(일) 金永煥(김영환)
Columbia-410017-b-------------------세동무 二(이)
Columbia-410017-a------------------세동무 三(삼)
Columbia-410017-b-------------------세동무 四(사)--------------------------------------라 紹介(소개) 하고있습니다
이어서 victor-record 서 1930년 김연실씨 목소리로 또발매됩니다
他面(타면)에는 김서정사,곡 김연실노래로 이정숙 원창 의<落花流水(낙화유수)>가 함께 실려있습니다
1935년, 2월victor-record 發行(발행) 每月新譜(매월신보)-------------------------에는
總目錄(총목록)
流行歌(유행가) 落花流水(낙화유수) 김연실 管絃樂(관현악)伴奏(반주)
세동무-----------------------------------------------------------------------
--------------------------------------------------------------------------------------------라 表記(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時期(시기) victor-record 發行(빅터레코드 발행) 歌詞 紙(가사지)------------------------------------------------------에는
V40082-a 映畵小敗(영화소패) 세동무 獨唱(독창) 김연실 伴奏(반주) 빅터 樂團(악단)
V40082-b 落花流水(낙화유수)-----------------------------------------------------------
---------------------------------------------------------------------------------------------------------라고 表記(표기)하고 있는바 그간”映畵 主題歌(영화주제가)를 日本式(일본식)
表記(표기)인 “映畵小敗(영화소패)”라 바꿔 表記(표기)하고 있어서 뒷맛이 씁스레합니다
聲樂家(성악가)를 紹介(소개)할때 사용하던 “獨唱(독창)”稱號(칭호)를 김연실씨에도 쓰고있어서 異彩(이채)롭긴 합니다
日蓄朝鮮(일축조선) 소리판 에서는 복혜숙씨의 목소리의<세동무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主題歌(주제가)만 실어서 발매했습니다
음반번호<K8임11>로 표기 되있고 a,b 양면에 jazz song -재즈송-이란 호칭으로 표기되있습니다
朝鮮日報(조선일보) 1930년, 7월4일, 11일 日蓄朝鮮(일축조선) 소리판 廣告(광고)------------------------------------------에는
第五回 新譜(제5회 신보)
Jazz song-재즈송- 세동무의 노래 卜惠淑 (복혜숙) 一枚(1매) 日蓄 jazz band-일축 재즈밴드----------------라 선전되 있습니다
헌데 “이글레코드 발매” 라는 紀錄(기록)도 보입니다
강석연도 1932년도 일축조선소리판에서 流行小曲(유행소곡) 장르로 발표했습니다
음반번호 <K850>로 표기되있고 1932년 正月新譜(정월신보) 입니다
東亞日報(동아일보) 1931년 12월 18일 日蓄 朝鮮(일축조선) 소리판 廣告(광고)------------------------------에는
正月(정월)新譜(신보)
流行小曲(유행소곡) 세동무 一枚(1매) 강석연 潮蓄樂團(조축악단) 伴奏(반주)-----------------로 紹介(소개) 하고 있습니다
이고은 後日(후일)같은時期(시기) 유경이, 채동원, 김연실 등과 歌手生活(가수생활)을같이한 名歌謠(명가요) <他鄕(타향)> 主人公(주인공) 고복수씨에 의하여 remake 돠어 발표되기도 합니다
1001—暗路(암로)-김연실
숲사이 사냇물 흐르는데 閑暇(한가)한 물레방아 아름다운 大自然(대자연)속에 이몸은
자랐네 내사랑아 어린몸을 이 어린몸을 부드러운 그품안에 껴안아 주세요
隱隱(은은)한달 아래 散步(산보)할제 따뜻한 그의손길 앵두 같은 그의입은 내눈에 그렸네
내사랑아 어린몸을 이 어린나를 부드러운 그품안에 껴안아 주세요
世上(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조금도 변치않고 어린넋을 당신에게 맡기려 합니다
내사랑아 어린몸을 이어린나를 부드러은 그품안에 껴안아 주세요
1929년 월 victor-record 발매 sp음반-김서정사,곡 김연실노래로 실려있습니다
他面(타면)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 <아르렁>이 김연실 노래로 함께 실려있습니다
단성영화구락부 에서 편집한<朝鮮(조선)映畵(영화)小曲(소곡)集(집)>에는 3절---당신에게 “맡기려”---부분을 “바치려”로 表記(표기)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책에는 음반에 수록된 2절과 3절사이에 下記(하기)와 같은 歌詞(가사)가 더 보입니다
--------三五夜(삼오야) 뚜렷한 저달아래 쌍쌍이노는 물새 아리따운 그노래속에 내마음
상해요 내사랑아 어린몸을 이어린몸을 부드러운 그품안에 껴안아 주세요---------
이곡은 1929년 1월 團成社(단성사)開封(개봉)한 同明映畵(동명영화) 主題歌(주제가)로 創作(창작)되었습니다
1930년, 3월14일 東亞(동아)日報(동아일보) 朝鮮日報-조선일보- victor-record 廣告(빅터 레코드 광고)--------------------------에는
49071 映畵小敗(영화소패) 暗路(암로) 어둔길 獨唱(독창) 김연실 日本(일본)빅터 관현악단 연주
49071 新民謠(신민요) 아르렁-----------------------------------------------------------------
-----------------------------------------------------------------------------------------------------------------라고 宣傳(선전) 하고있습니다
1932년 이진홍이 taihei-record 서 녹음한 음반이 발매되었고 이음반을 1935년에는<어둔길>이라는 제목으로 再發賣(재발매) 하기도 했습니다
1934년, 9월 taihei-record 發行(태평레코드 발행) 新譜紙(신보지)-------------------------------------------에는
十月(10월) 朝鮮新譜(조선신보)
8021 民謠(민요) 아리랑 李眞紅(이진홍)
8021 流行歌(유행가) 暗路(암로) ---------------------------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1935년, 10월 taihei-record 發行(태평레코드 발행) 新譜紙(신보지)-------------------------------------------------에는
8021 어둔길 이진홍-------------------------------------라 보입니다
Kapf-카프-는 1925년 박영희, 김기진, 이활, 김영팔등이 설림한 左便向(좌편향) 藝術團體(예술단체)입니다
그들은 藝術(예술)을 武器(무기)로 조선민족의 階級的(계급적)解放(해방)을 목적으로 한다는 綱領(강령)을 채택하고 대규모 문학운동을 벌여나갔습니다
강호감독의<暗路(암로)>는 카프계열의 영화였으나 興行(흥행)에 성공치 못했습니다
1920년대말 황폐된 朝鮮農村(조선농촌)과 농민의 實狀(실상)을 그린 내용으로 강호가 감독하고, 시나리오도 쓰고 출연도 했으며 박영옥, 이홍래 가 열연했습니다
晋州(진주) 남향cinema-키네마-에서 제작했습니다
晋州(진주) 名勝地(명승지)를 背景(배경)으로한 農村哀話(농촌애화)를 담았습니다
이노래는 후일 韓國(한국)大衆歌謠(대중가요)의 古典(고전) “他鄕(타향)”의 主人公(주인공) 고복수씨에 의하여 再吹入(재취입) 發賣(발매)되었습니다
성음사발매 lp음반-흘러간 옛노래- <歌謠(가요) 半世紀(반세기)> 2집에 보입니다
1002—그리운 江南(강남)-김용환, 왕수복, 윤건영
正二月(정이월) 다가고 三月(삼월)이라네 江南(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땅에도 또다시 봄이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江南(강남)에
어서가세
하늘이 푸르면 낙 일하고 별아래 모이면 노래부르니 이나라 이름이 江南(강남)
이라내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 아리랑 江南(강남)에 아서가세
그리운 저 江南(강남) 두고 못가는 三千里(삼천리)물길이 어려움인가 이발목
상한지 오래이라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江南(강남)에 어서가세
그리운 저江南(강남) 건너가려면 제비떼 뭉치듯 서로 뭉치세 상해도 발이니
가면 간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江南(강남)에 어서가세
1929년 polydor-record 발매 sp음반- 김석송사 안기영작곡 김용환, 왕수복, 윤건영 노래로 실려있습니다
他面(타면) 異河潤(이하윤 作詩(작시) 金龍換김용환-作曲(작곡), 노래 <朝鮮打令(조선타령)>이 함께 실려있습니다
제1절은 윤건영, 제2절은 왕수복, 제3절은 김용환씨 제4절은 合唱(합창)으로 불렀습니다
1934년, 5월18일 동아일보 polydor-record 廣告(폴리돌레코드 광고)--------------------------------------------에는
特別新譜(특별신보)
五月十日(오월십일)發賣(발매)
新民謠(신민요) 朝鮮打令(조선타령)
그리운 江南(강남) 金龍煥(김용환), 王壽福(왕수복), 尹建榮(윤건영) 外 合唱(외합창)
朝鮮打令(조선타령)------------------------------------------------------------------이라고 宣傳(선전)하고 있습니다
1934년, 7월 polydor-record 發行(폴리돌레코드 발행) 新譜紙(신보지)-----------------------------------------에는
大呼評(대호평)!! 民謠(민요)와 流行歌(유행가)
A 面(면) 朝鮮打令(조선타령)
B面(면) 그리운 江南(강남)------------------------------------------------라고 廣告(광고) 하고있습니다
그리고 1934년 8월 polydor-record 發行(폴리돌레코드 발행) 新譜紙(신보지)------------------------------------------------------에는
九月新譜(9월신보)
A面(면) 異河潤(이하윤)作詩(작시) 金龍換作曲(김용환작곡)<一九一三三-일구일삼삼-)>
新民謠(신민요) 朝鮮打令(조선타령) 감용환노래
B面(면) 그리운 江南(강남) 金龍煥(김용환) 外(외)------------------------------------------------라 廣告(광고)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基準(기준)으로보면 이곡은 大衆歌謠(대중가요)라기보다 歌曲(가곡)에 속하는 노래이긴하나 왠만한 大衆歌謠(대중가요) 以上(이상)으로 널리 流行(유행)한 노래이고
上記(상기)처럼 大衆歌謠(대중가요) 歌手(가수)들이 녹음한 音盤(음반)이 발매되기도 했습니다
朝鮮歌謠硏究 社 (조선가요연구사) 발행<精選(정선) 朝鮮歌謠集(조선가요집)>에서도----“그리운강남”이 本集(본집)에 실은 성질이 아니오나 특이 一般(일반)의 要求(요구)가 많기로
부득이 싣게된 것-----”이라는 事情(사정)을 밝히기도 했읍니다
上記歌謠(상기가요)가 最初(최초)로 실린 것은 1929년 刊行(간행)된<안기영직곡집 제1집>입니다
音盤(음반)에 실린 것은 1931년 Columbia-record 에 聲友會(성우회) 목소리로 녹음된것이고 1932년 作曲者(작곡자) 안기영씨 自身(자신)이 취입한 음원은 Columbia-record 발매입니다
1943년엔<봉선화>로 有名(유명)한 soprano-소프라노- 김천애씨 목소리로 victor-record 서 발매하기도 했습니다
각 音盤(음반)마다 조금씩 歌詞(가사)가 다르게 錄音(녹음)되있읍니다
1003—落花巖(낙화암)-a
泗批水(사비수) 나린물에 夕陽(석양)이 빗길제 버들꽃 날리는데 落花巖(낙화암)이란다
모르는 아해들은 피리만 불건만 맘있는 나그네의 를 끊누나 落花巖(낙화암) 落花巖(낙화암)
왜 말이없느냐
七百年(칠백년) 내려오던 夫餘城(부여성) 옛터에 봄맞은 푸른물은 예같이 푸른데 九重(구중)
의빛난 宮闕(궁궐)있 던터 어데며 萬乘(만승)의 귀하신몸 가신곳 몰라라 落花巖(낙화암)
落花巖(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
1926년 okeh-record 발매 sp음반-a,b 이광수시 야나다타다시 작곡 백화성 서상석노래로 揷入曲(삽입곡) 形態(형태)로 실려있습니다
이음반은 劇(극)음반으로 상,하 양면에 신불출 說明(설명), 단소 伴奏(반주), 오케이트리오 伴奏(반주)로 구성되있습니다
上記曲(상기곡)의 原曲(원곡)은 다커야스겟코 작사, 야나다타다시 1914년 作曲(작곡) <0의 夢(몽)>입니다
이 melody-멜로디-에 春園(춘원) 李光洙 詩(이광수의 시) <落花巖(낙화암)>을 얹어서 불렀습니다
이곡이 불리기 시작한 時點(시점)은 정확치 못하나 京城放送局(경성방송국)이 1927년, 2월 정식으로 방송시작전 試驗放送中(시험방송중) 1926년, 8월경부터 라디오에서
이미 방송한 것 을보면 1920년대 중반에는 어느정도 流行(유행) 하고 있었던것으로 보여집니다
1929년 시조사 발간 <二八靑春(이팔청춘) 唱歌(창가)集(집)>에 실린 3절로 된 歌詞(가사)입니다
사비수나리는 물 夕陽(석양)이빗길제 버들꽃 나리는데 落花巖(낙화암)이란다
모르는 아해들은 피리만 불건만 맘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끊누나 落花巖(낙화암)
落花巖(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
七百年(칠백년) 누려오던 夫餘城(부여성) 옛터에 봄만난 푸른물은 예같이 푸른데 九重(구중)
의빛난 宮闕(궁궐)있던 터 어데며 萬乘(만승)의 귀하신몸 가신곳 몰라라 落花巖(낙화암)
落花巖(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
어떤밤 불속에 曲調(곡조)소리 나더니 꽃 같은 宮女(궁녀)들이 어데로 갔느냐 주신 비단치마
가슴에 안고 사비수 깊은물에 던졌단 말이냐 落花巖(낙화암) 나화암- 왜말이 없느냐
1933년, 7월15일 東亞日報(동아일보) okeh-record 廣告 (오케이 레코드 광고)----------------------------에는
第四回 新譜(제4회신보), 八月新譜(8월신보)
七月十五日 發賣(칠월 15일발매)
Record drama-레코드 드라마- 落花巖(낙화암) 一枚(1매) 申不出(신불출)-------------------------------------------라고 劇(극)을 “record drama-레코드 드라마-“라는 새로운 呼稱(호칭)으로
宣傳(선전)하고 있습니다
헌데 1936년, 1월 1937년, 3월 ok-record 發行(오케이 레코드 발행) 新譜紙(신보지)---------------------------------에는
<二月新譜(2월신보) no34>
0發賣(발매)
一五四三(일오사삼) 史劇(사극) 落花巖(낙화암) 上下(상하)
申不出(신불출) 徐祥錫(서상석) 白華星(백화성)---------------------이라 廣告(광고) , 1933년”<record drama-레코드드라마->”라
呼稱(호칭)하던 것을 “史劇(사극)”으로 빠꿔 부르고있어서 興味(흥미)롭습니다
1004—落花巖(낙화암)-b
음반번호 okeh1543-a,b 로 1926년 okeh-record 서 劇(극)으로 발매된 음반입니다
出演(출연)해서 解說(해설)을 하는사람은 申不出(신불출)씨이고 극중노래는 백화성, 서상석씨가 부르고 있습니다
이음반에 상기 <종횡무진가요사 1003> 에서 說明(설명)하고있는 落花巖(낙화암) 노래가 극중에 불립니다
<上篇(상편)>
靑年(청년)—老人(노인)! 저 흐르는물이 白馬江(백마강)이고 이바위가 落花巖(낙화암)이지요?
老人(노인)—옳소 百濟(백제)의 꽃 같은 宮女(궁녀) 三千名(3천명)이 松竹(송죽)같은 節介(절개)를 新羅軍士(신라군사)의 손에 꺾이지 않으려고 二八靑春(이팔청춘) 고운몸을
모조리 이바위에서 강물로 던진事實(사실)은 그대도 잘 알고있겠지?
아아! 그것은 너무도 慘酷(참혹)한 일이었소 또 거룩한 史跡(사적)이었소 그것은 어쩜 百濟(백제가 망했다는 그事實(사실)보다도 더욱더 큰일이었단 말이오
그날은 하늘도 그슬퍼서 흐리고 있었소 강물소리도 목이 메어서 흘러 내리지를 못했다는 구려
아아! 그러나 歲月(세월)은 흐르고 歷史(역사)도흘러 그것도 벌써 二 千年前(2천년전) 옛날이 되고 말았구려
자! 젊은사람 이바위에 앉아 近方(근방)을 둘러보시오 그옛날 七百年(7백년) 榮華(영화)를 자랑하던 夫餘(부여)옛성터에는 봄풀이 우거진속에 발레들이 집을짓고 살고
九重宮闕(구중궁궐)있던 터에는 봄볕이 따스한때 農夫(농부)들이 한가히 밭을갈고 있단말야 하하하!
그릭 뜻깊은 이 白馬江(백마강) 사비수 흐르는물에 붉은저녁노을이 비칠때마다 寂寞公山(정막공산)을 피맺혀 울어주는 저 杜鵑(두견)새 소리만이 마음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절절하게도 끊고 있을뿐이로구려 하하하----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라 하는말은 옛사람의 시가있는 것과같이 역사는 바뀌고 사람은가고 사실은 흘렀으되 江山(강산)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단말이야
그러나 이바위에 落花巖(낙화암)이란 이름이 외롭게 남아있으면 무얼하우?
信義(신의)나 整列(정렬)이라는 것은 무엇말라죽은 것이며 節介(개) (절개)라하는 것은 뉘집아이 이름이란 말이요
자기한사람의 利慾(이욕)과 榮華(영화)를 위해서는 아침에가졌던 信義(신의)나 約束(약속)이 점심때도 못돼서 변해버리는 것이 世上-세상-사람들의 人心(인심)이라는 구려
대와 경우를 따라서는 어저께 南(남)쪽으로 흐르는 강물이 오늘은 北(북)쪽으로 흐를수 있다는 구려
그리고 세상은 그새 文明(문명)했단 말이야 開化(개화)를 했다는 구려
음!그래 요새는 시집안간 處女(처녀)아이들이 落胎(낙태)를해서 이뜻깊은 강물에다 던지고가고 그리고 어떤때는 淋疾(임질) 梅毒(매독)오른놈들이 歷史(역사)같은 강물위에다
오줌을 갈기고 가 하하하--------
<下篇(하편)>
노래가 시작됩니다----
사자수 나린물 에 夕陽(석양)이 비낄 때---
靑年-청년--老人(노인)! 지금 노인께서 하시는 말씀을듣고보니 만일 옛사람의 靈魂(영혼)이 아직까지도 이 가위에 남아있다고 하면 슬퍼서 슬퍼서 울겠습니다
老人(노인)--울다 뿐이겠소 목놓아 울게지 後世上(후세상) 사람들의 못나고 더러운 것을 바라보고도 슬퍼 歎息(탄식)을 할거란 말이요
그리고 寂寞(적막)해지는 이 江山(강산)을 바라보고도 寃痛(원통)해서 피맺혀 울거란 말이요
靑年(청년)—老人(노인) 아니 선생님 과히 슬퍼하지 마십시오 지금 선생님이 하신 뜻깊은 그말씀을 決斷(결단)코 헛되지않게 하겠습니다
노래시작-----
노래 歌詞(가사)는 앞서 이미 紹介(소개)드렸으므로 생략 합니다
1005—시들은 芳草(방초) a
이내몸은 江(강)언덕에 시들은 芳草(방초) 어여쁜 너도또한 시들은 芳草(방초)
너와나와 단두몸은 이 世上(세상)에서 꽃피어보지 못한 시들은 방초
죽든지 살든지 우리 두몸은 흐르는 물결과 다름이없어 이내몸과 그대몸은 저기
저江(강)에 작은배 船頭(선두)에서 살려하노라
시들은 풀사이로 비치어있는 강위에 고요한 밝은 저 달빛 이내몸은 일로부터 저가
저江(강)에 작은배 船頭(선두)에서 살려하노라
이내몸은 강언덕에 마른 꽃송이 애다롭게 당신의 거듭이되어 朝夕(조석)으로 말고맑은
이슬받아서 당신의 상머리를 닦으려 하네
오늘을 다살지 모르는 世上(세상) 來日(내일)을 근심하고 울지말아라 죽음도 살음도 또한
그運命(운명) 人生(인생)은 草露(초로)같다 사랑하여라
上記歌詞(상기가사)는 1929년 시조사 發刊(발간) “二八靑春(이팔청춘)唱歌集(창가집)”에 수록돤 것인데 제목아래 김산월, 도월색의 이름이 적혀있는것으로보아 1925년
그녀들 吹入音盤(취입음반) 歌詞(가사)를그대로 옮긴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무래도 朝鮮(조선)땅에 온갖 漫行(만행)을 저지러고있던 일본에대한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밖에는에 生角(생각)되어지지 않는는 1923년 關東大地震(관동대지진)후 일본 東京(동경)의
廢墟(폐허)속에서 世上(세상)을 怨望(원망)하는 厭世的(염세적)노래 “센도고우다<船頭小敗(선두소패)>”라는 노래가 크게 流行(유행)했고 이노래는 곧바로
한국에도 飜案(번안)되어<시들은 芳草(방초)> 題目(제목)으로 이땅에서도 流行(유행)되었습니다
1920년대를 넘어서면서 일본의victor-record와 日蓄(일축)등 두회사에서 한국시장을 상대로Nippon phone 조선소리판, 日東(일동) 제비표 소리판, 제비표 조선소리판, 남대문표 조선소리판,
화시-독수리-표 조선소리판---등의 라벨이 華麗(화려)했었습니다
일축조선소리판은 1925년부터 발매된 일축음반의 상표명입니다 이음반부터 일축은 음반번호체께를 k501로 다시 바꾸면서 전통음악을 대량 취입합니다
1925년, 11월8일 동아일보 Nippon phone –닙보노홍-조선소리판 廣告(광고)-------------------------------------에는
流行歌(유행가) 都月色(도월색)과 金山月(김산월)의이 부른 鴨綠江節(압록강절) 金色夜叉(금색야차).
船頭小敗(선두소패), 새하얀 후지산자락
안기영의<내 故鄕(고향)을 離別(이별)하고> <제비들은 강남에>
김인식의 <holy city-거룩한 성- > 피아노반주 아펜젤러-----------------------이 선전되 있습니다
여서서 船頭小敗(선두소패)가 바로 상기<시들은 방초>원곡 입니다
1927년, 4월 nippon phone일축조선소리판- 每月新譜(매월신보)紙(지)-------------------------------에는
留聲機(유성기) 제3년 5호
日蓄朝鮮歌 盤(일축조선가반) 總目錄(총목록)
吹奏盤(취주반) K632 시들은방초 장한몽가----------------------------------라 표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28년, 9월 每月(매월)新譜(신보)紙(지)------------------------------------------------에는
조선레코드 총목록
일축 k632-a吹奏樂(취주악) 0樂(악) 朝鮮樂團(조선악단)
일축 k632-b吹奏樂(취주악) 시드른 芳草(방초) 金色夜叉(금색야차) 朝鮮(조선)樂團(악단)----------라고 표기했습니다
이곡은 1921년 일본에서 노구치우조 작사, 나카야마 신페이 作曲(작곡)으로 藝名(예명)으로 보아 관기인듯한 도월색과 김산월이 日本流行歌(일본유행가) 4곡을
취입하며 이곡들을 번안취입했습니다
아곡이 언제 朝鮮(조선)에 流入(유입)되어 流行(유행)했는지 正確(정확)히 알수없으나 1922년 초판이 간행되고 1929년 내용이 증보되어 3판이나온 이상준편저<신유행창가>
3판에 실려있고 1924년 근화사 간행 <最新 東西 流行名曲選(최신유행명곡선)>에”선두의패” 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있는것으로보면 늦어도 1924년 무렵에는
널리불리고 있었을것이라 추정됩니다
이후 이곡은<사의찬미>의 주인공 윤심덕이 1926년 일동레코드서 1927년에는 도월색이 솔로로 일동에서 또 취입합니다
1926년, 10월18일 每日申報(매일신보) 日東蓄音機(일동축음기) 株式會社(주식회사) 廣告(광고)------------------------------------------------------------에는
尹心悳孃(윤심덕양) 의 別世(별세) 名曲集(명곡집) 賣出(매출)
나는곱지 上(상) 一枚(1매) 윤심덕 피아노 尹聖德(윤성덕)
시드른 방초 下(하)-------------------------------------------------라고 피아노반주를 동생 윤성덕이 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1927년, 7월13일 每日申報(매일신보) 日東(일동)蓄音機(축음기) 株式會社(주식회사)<nitto 제비표 조선레코드> 廣告(광고)-----------------------------------에는
第六回-제6회- 新譜發賣(신보발매) 鏞(용)
日東(일동) 名曲新譜(명곡신보)
B 146-시들은 芳草(방초) 上(상) 都月色(도월색)
長恨夢 歌-장한몽가-下(하)-------------------------------------------------------라고 광고하고 있습니다
1006—시들은방초-b
이노래가 유행을하자 taihei-record 서 이노래서 題目(제목)을 따와서<歌謠劇(가요극)> 장르의 음반을 企劃(기획) 發賣(발매)합니다
1935년, 10월 taihei-record 發行(발행) 新譜紙(신보지)----------------------------에는
<十一月(십일월)新譜(11월신보) 十一月(십일월) 特選譜(특선보)
8165 劇(극) 시들은 芳草(방초) 上(상) 下(하) 李品香作(이품향작) 朴世鳴(박세명) 申銀 鳳(신은봉) 노래 崔南鏞(최남용)
<사진 이우홍, 신은봉.>
劇(극) 시들은 芳草(방초) 映畵物語(영화물어) 박세명 신은봉-----------------------라 광고 하고있습니다
허나 實物 未公開(실물미공개)로 주제가가사 및 작곡자도 알수없습니다
1937년, 8월 taihei-record 發行(태평레코드 발행) 新譜紙(신보지)---------------------------------에는
0發賣(0발매)總目錄(총목록)
Non sense-넨샌스-, 劇(극)
8165 시들은 芳草(방초) 신은봉 박세명-------------------------라 소개 하고 있습니다
“극” ,”영화물어” ,”넌센스”등 混用(혼용)된 호칭으로 이 劇盤(극반)을 부르고있어서 混亂(혼란)스럽습니다
1935년, 10월30일 朝鮮日報(조선일보) taihei-record 廣告(태평레코드 광고)----------------------------------------------에는
十一月(십일월)新譜(신보)
劇(극)8165 시들은 芳草(방초) 上下(상하) 박세명 신은봉-------------------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荒城(황성)의 跡(적)>으로 유명한 이애리수가 1928년, 8월10일 시들은방초를 각색한<約婚(약혼)한 處女(처녀)>에서 주연을 맡았고 기록으로 확인되는 舞臺演技(무대연기) 첫번째----
운운 하는것등 으로보아 그시기 일본엔카<시드른방초>가 演劇(연극)으로 각색되어 人氣裡(인기리)에 상연되고 있음을 알수있습니다
한편 記錄上(기록상)으로 每日申報(매일신보) 에는 조선극장에서 1927년, 5월3일부터 <시드른 芳草(방초)>가 상연되었다고 보도하고있습니다
이애리수는 1919년 그녀나이 9살 때 김도산의 무대에서 데뷔한것으로 추정됩니다
데뷔후 그녀는 호수돈 여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이어 나갑니다
그리고 12살무렵 취성좌로 무대를 밟았는데 소녀역으로 출연했다고 조선일보 1930년, 1월1일자<극단의 효성>이란 제목으로 실려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입단당시 그녀는 주로 歌劇俳優(가극배우)로 활동했습니다
다시말해서 演劇幕間(연극막간)을 꾸미는 俳優(배우)였습니다
1927년무렵부터 막간무대를 취성좌에서 가요부에 두게되므로 그녀가 入團當時(입단당시) 1922년~1926년경 활동하던 幕間(막간)은 普遍的(보편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幕間(막간)을 연극보다 더 魅力的(매력적)으로 꾸미기 시작한 張本人(장본인)중의 한사람이 그녀였습니다
이 幕間(막간)은 곧 本演劇(본연극)보다 人氣(인기)가 높아지기시작 각극단은 本格的(본격적)으로 幕間(막간)을 도입하기 시작하고 이막간이 發展(발전)하여 韓國(한국) 樂劇(악극)이 됩니다
1920년 에서 1930년사이 蓄音機(기) (축음기)와 record 生産-레코드 생산-은 多樣(다양)했으나 大衆生活面(대중생활면)에서 볼 때 축음기나 레코드는 高價(고가)에 속하는 “그림속에 떡 같은
存在(존재)”였고 해서 一般庶民(일반서민)들이 대부분이던 朝鮮社會(조선사회)서 손쉽게 살수없는 상품이었습니다
여기에 着眼(착안)한 것이 찻집<茶房(다방)>에서 손님을 끌어모으기 위해서 蓄音機(축음기) , 즉 留聲機(유성기)를 들려주게 됩니다
차한잔에 5전에서 高級茶房(고급다방) 10전 좋은음악을 서비스로 들을수있고 예쁜아가씨와 대화도 나눌수있게 되었습니다
“茶房(다방)”이라는 새로운 장사 가 재미를 보게된것입니다
조금 高級(고급)스런 다방은 西洋音樂(서양음악)인 古典音樂(고전음악)을 감상할수있고 논할 수 있는 文化空間(문화공간)으로 이용되어 갔습니다
이름하여 “喫茶(끽다)와 音樂(음악) ”이라는 소위 名門茶房(명문다방)이 流行病(유행병)처럼 번져갔습니다
일본의 이런 茶房文化-다방문화-가 바다건너 서울 그리고 平壤(평양) 등지에서 都市文化(도시문화)의 하니로 유행되어 간 것은 상기곡이 국내 유행하던
1920년대 末期(말기)의 일이었습니다
1007—자라메라- 一名(일명) <鍾路(종로)네거리>
鍾路(종로)네거리에 해가 저물어 엿장사 令監(영감)님 지나가누나 가위소리 딱딱딱딱
엿목판메고 설렁설럴 다니는 늙은 엿장사 단쇠 단쇠 엿단쇠 단쇠 단쇠 엿단쇠 엿을
삽시오 은동아 복동아 자이 자 어서자고 來日(내일)만나자
약현 산모롱에 해가저물어 어정어정 돌아가는 늙은 엿장사 딱깍딱딱 딱따가딱딱 가위
소리내면서 어정어정 돌아가는 늙은 엿장사 電氣(전기)불이 들어왔네 저녁煙氣(연기)
자욱했네 來日(내일)또보세 자아자 어서자고 자아자 어서자고 來日(내일)또 가자
오늘날<鍾路(종로)네거리>로 불리고있는 이노래는 飜案歌謠(번안가요) 입니다
번안가사는 1929년 이정숙씨 음원을 따랐습니다
원곡은 日本曲(일본곡)으로 <東京町(정동정)>이고 이론서 먼저 유행했던 노래라는 것 외는 알려진 것이 별로없습니다
1929년 간행된 이상준편저 新 流行唱歌(신 유행창가) 3판에는<엿장수늙은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있는데 이책 1판이 1922년 간행되었으므로 1922년경 이미 유행하고
있었던것으로 볼수있습니다 이책 3판이 1판에다 10여곡을 추가하기는 했으나 <자라메라>경우에는<사의찬미>의 주인공 윤심덕이 이미 음반을 낸적이 있으므로 노래책 수록이
음반발매보다는 앞서는 當時(당시) 通例(통례)로보아 1판에 이미 受祿(수록)되었을 것으로 추정가능합니다
1926년, 10월 每日申報(매일신보) 日東(일동) 레코드 廣告(광고)---------------------------------------에는
尹心悳 孃(윤심덕양) 別世(별세) 名曲集 賣出(명곡집 매출)
자라메라 上(상) 一枚(1매) 尹心悳(윤심덕) 피아노반주 尹聖德(윤성덕)
어여쁜색시 下(하) ------------------------------------------------------------------------라고 宣傳(선전)하고 있습니다
이곡은 영화<아리랑> 개봉시 뮤직박스에서 주제가를 부르고 영화<낙화유수>주제가를 취입한 이정숙씨도 1929년 Columbia-record 서 발표했습니다
1929년, 4월1일 東亞日報(동아일보) 1929년, 4월4일, 15알 朝鮮日報(조선일보) Columbia-record 廣告(콜롬비아 광고)---------에는
<第 二回(제2회) 新譜(신보)>
유행가 落花流水(낙화유수) 一枚(1매) 李貞淑(이정숙) 伴奏(반주) 콜롬비아 管絃樂團(관현악단)
자라메라----------------------------------------------------------------------------------------------------------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1932년에는 윤백단이 태평레코드서 1935년에는 기린레코드서 윤홍심이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윤백단의 음반의 경우 이경호씨소장 음반에는-----------------------------
Taihei 8023 a 자라메라 윤백단----------------------------------------------------------------------------------------------라 表記(표기) 되있습니다
Tahei-record a-3208 < 不老草(불로초) 唱歌(창가)集(집)> ---------------------------------------------------------에는
태평레코드 文藝部(문예부) 作詞(작사)
鍾路(종로)네거리 에 해가 저물어 엿장수 늙은이가 있어 풀이죽었네
천천히 걸어가며 엿들 안사뇨? 시름이 하나없이 걸어가며 가위질만해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가자 어서가자 바삐 우리집에가자
가자가자 하면서 우리아해 만나기만 하면 엿을 손에 늘이면서 엿을 팔려
하노라
鍾路(종로)네거리에 해가저물어 늙은 엿장수가있어 풀이죽었네
천천히 걸어가며 엿들 안사뇨? 시름이 하나없이 걸어가며 가위질만 해------후략-----
이곡은 1967년경 성음레코드발매 lp음반-歌謠半世紀(가요 반세기)- 제5집에 봉봉 四重唱團(4중창단)목소리 remake 되어 실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가요는 同名 異曲(동명이곡) 存在(존재)해 이채롭습니다
1931년 김동환 작사 정순철작곡 채규엽노래로 Columbia-record 서 발매되었습니다
1008—江南(강남)제비
江南(강남)제비 돌아와서 봄은 왔건만 나의님은 어찌하여 못오시려냐
山(산)을넘고 물을건너 흰구름 저쪽에 달과함께 님의얼굴 솟아오려냐
금풍은 소슬하고 달은 밝은데 나를 품에안으시고 눈물뿌리며 꽃이피고
새가울면 오시마드니 임은어히 봄이온줄 모르시는지
바람부는 荒野(황야)에 외로히 건너 굳은意志(의지) 품고서 가신사랑은
나의 心腸(심장)타는 줄을 아실 양이면 임은절로 오시려나 나의품으로
흔히들 이곡을 강석연씨 原唱(원창)으로 알고있고 후일 舞臺(무대)에서 자주부른 신카나리아 씨도 證言(증언)하고있으나 강석연씨 음원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있습니다
1932년 5월 chieron-record-시에론레코드-서 김연실, 빅터 레코드서 이애리수씨가 발표했습니다
허나 시에론 김연실 음반은 未發屈(미발굴)狀態(상태)입니다
1935년, 2월 victor-record 發行(빅터레코드 발행) 每月新譜紙(매월신보지)----------------------------에는
總目錄(총목록)
流行歌(유행가), 新民謠(신민요)
v49096 江南(강남)제비
放浪歌(방랑가)-----------------------------------------------------------------------라고 이애리수 吹入(취입) <放浪歌(방랑가)>를 表記(표기)하고 있습니다
1933년 3월3일 동아일보 chieron-record 廣告(광고)------------------------------------에는
流行歌(유행가) 봄의魂(혼) 李景雪(이경설)
江南(강남)제비 姜琴子(강금자)-----------------------------라고 廣告(광고)하고 있는바 여기서 강금자씨가 강석연씨와 어떤관계인지 알수없습니다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왔건만 봄은 오지않았다----- 봄은왔는데 꽃이피지 않았거나 꽃은 피었는데 봄은 오지않았다 는 비유로 해석할수있습니다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絶世佳人(절세가인) 장소군의 불운한 삶을 이렇게 시로 표현했습니다
이가요에서 노래하고 있고 李相 和(이상화)시인의<뺴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봄은 오지않는 봄이고 뱨앗긴 들은 내땅이면서 내가 主人(주인)이 아닌 땅이었습니다”
처럼 그시기 우리는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였습니다
植民治下(식민치하) 大韓帝國(대한제국)의 봄은 봄이 아니었고 임이오지않는 봄이 어찌 봄이 었겠습니까?
곡을 만든 金0汀김서(정) 은 本名(본명) 이 김영환으로 우리나라 無聲映畵(무성영화) 時代(시대) STAR-스타 -辯士(변사)의 대명사이고 그시기 最高興行物(최고흥행물) 樂劇(악극)의
企劃演出(기획 연출)의 開拓者(개척자) 이면서 COMEDY-코미디-의 先驅者(선구자)로 불리기도 합니다
지금은 비록 日帝下(일제하) 暗黑時代(암흑시대)이나 언제인가 이 暗黑(암흑) 에서 벗어날 날을 봄으로 默示(묵시)하고 <강남제비>를 創作(창작)했으리라 믿어집니다
노랫속 “江南(강남)제비”는 3월에 왔다가 9월에 떠나가는 철새이며 福(복)을 配達(배달)하는 吉鳥(길조)입니다
흥부전에서 마음씨착한 흥부에게 보물 박씨를 물어다 주는데서 그렇게 믿고싶어합니다
곡을 창작한 김서정의 가요들은 거의모두 3박자이며 MELODY-멜로디-에는 童謠(동요) 唱歌(창가)나 民謠(민요) 같은 朝鮮(조선)의 抒情味(서정미)가 豊富(풍부)하고 技巧(기교)를
별로쓰지 않습니다
이노래들이 한용운이나 이상화의 影向(영향)이 있었는지는 접어두고라도 적어도 그時期(시기) 民衆(민중)들이 그러한 깊은뜻을담고 노래한점만은 틀림없을것입니다
1009—蕩子(탕자) 自歎歌(자탄가) 蕩子(탕자) 警戒歌(경계가)
이 風塵世上(풍진세상)을 만났으니 나의希望(희망)이 무엇인가 富貴(부귀)와 榮華(영화)를 누려으면
希望(희망)이족할까 푸른하늘 밝은달 아래 곰고이 生角(생각)하면 世上萬事(세상만사)가 또다시 꿈같구나
談笑和樂(담소화락)에 엄벙엄벙 酒色(주색)잡기에 侵犯(침범)하야 前程事業(전정사업)을 잊었으면 希望(희망)
이 족할까 半空中(반공중)에 둥근달 아래서 갈길 모르는 저 靑年(청년)아 腐敗事業(부패사업)을 改良(개량)
토록 引導(인도)하소서
나의 할바는 泰山(태산)같고 가는歲月(세월)은 살같으니 어느누가 도와주면 希望(희망)이 족할까 돋는달과
지는해가 바쁜일없거든 가지마라 前程事業(전정사업)의 前後事(전후사)를 分別(분별)키 어려워
밝고도 더밝은 이 世界(세계)를 混沌天地(혼돈천지)로 아는자야 무슨緣故(연고) 로 이때까지 꿈속에 살았나
이제부터 怨讐(원수)의 마음의 難望(난망)을 저버리고 文明(문명)의 學文(학문)을 배우기를 힘껏지어라
日帝(일제)의 暴壓(푹압)에 쌓이고쌓인 분노를 폭발시킨 1919년 삼일운동으로 우리민족의 저력을 보여줬으나 그힘을모아 우리독립으로까지 완성시킬 구심점이 없어서 결국 일제의
無慈悲(무자비)한 폭력으로 결국 未完(미완)으로 끝나버리자 이때부터 우리 民草(민초)들사이 불리기 시작한 노래입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불발로 끝나버린 삼일운동에 실망하여 자기할일들을 내팽게친체 妓生(기생)집이나 출입하고 漫醉(만취)하여 거리를 방황하는이들이 날로늘어나자 이들에게 覺性(각성)을
촉구하는 노래로 大流行(대유행)했습니다
이런곡 飜案曲(번안곡)들이 당시 新派劇團(신파극단) 幕間舞臺(막간무대)를 통하여 유행되고 韓國大衆(한국대중)들의 새로운 嗜好物(기호물)로 認識(인식)되어 레코드를 통하여
商品(상품)으로 販賣(판매)된것입니다
헌데 지금은 생뚱맞게도<希望歌(희망가)>로불리고 있습니다
처음 <蕩子自歎歌(탕자자탄가)><蕩子自歎曲(탕자자탄곡)><蕩子警戒歌(탕자경계가)><靑年警戒歌(청년경계가)>< 이 風塵歲月(풍진세월)>< 이 風塵世上(풍진세상)>
<이 風塵世上(풍진세상)을>을 등으로 1920년대 노래책, 음반에 수록되있습니다
현재까자 발간년도가 가장 앞서는 정경운 편저<낙원창가>, 왕세창편저< 이십세기신구유행창가>, 태화서관 발간<남녀명창 유행창가>, 강범형편저<이팔청춘창가> 등에모두
<蕩子 自嘆歌(탕자자탄가)>로 수록되어 있으므로 이곡 題目(제목)을 <蕩子 自嘆歌(탕자자탄가)라고 정했습니다
이곡도 어차피 飜案歌謠(번안가요)입니다
헌데 그시기 일본도 마찬가지로 외국가요를 번안해서 유행시킨점은 우리나라와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1882년 미국에서 刊行(간행)된 讚頌歌集(찬송가집) “FRANKLIN SQUARE SONG” 에 수록된 JEREMIAH INGALLS-잉갈스-가 작곡한 <WHEN WE ARRIVE AT HOME >라는였던 것이
일본에 전파되어 1890년에 刊行(간행)된 <明治(명치)唱歌(명치창가) 第五(제오)집>에 가사를 바꾸어<夢(몽)의 外(외)>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고 1910 년 일본 가미꾸라 海岸(해안)에서
突風(돌풍)을만나 배에타고있던 열두명의 中學生(중학생)이 모두 사망한 사건이발생 이를 애도하는 가마꾸라 여학교교사 미스미스즈꼬- 三刻 鍚子(삼각양자) 歌詞(가사)를얹어
韓譯(한역)으로<새하얀 부소산 봉우리>라는 제목으로 불렸습니다
이것이 엔카사들에 의하여 널리 유포되며 대대적으로 일본에서 유행 음반으로 발매됩니다
이사건이 곧 영화화되며 主題歌(주제가)로 불렸습니다
이곡이 한국으로 전파되어 <탕자자탄가>로 불린시기는 정확치못하나 삼일운동 실패후 일것이라 추정됩니다
이곡이 한국서 처음녹음된 것은 박채선, 이류색의 듀오곡입니다
일축에서 1923년 발매서 歌詞(가사)導入部(도입부) 인”---이풍진세상을 만났으니----“에서 제목으로 차용<이 風塵(풍진) 歲月(세월)>으로 지었습니다
그리고 타면에는 <사랑)歌(가)>등 몇곡을 함께 실었습니다
1920년대들어서 日本蓄音機商會 (일본축음기상회)는 영문표기 NIPPON PHONE 대신 는 “닙보노홍”이란 한글 商標名(상표명)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음반 番號體系(번호체계) )로 NK116 로 상기곡이 발매되었습니다
이 時期 發賣(시기발매)된 닙보노홍 音盤(음반)---------------------------------------------------- 에는
QKS KAB 0072
닙보노홍 K116-A 新式唱歌(신식창가) 너와나와 살게되면은 朴菜仙(박채선) 李柳色(이류색)
닙보노홍 K116-B 新式唱歌(신식창가) 이 風塵 歲月(풍진세월)---------------------------------라고 “新式唱歌-신식창가-” 라는 過渡期的(과도기적) 表現(표현)으로 表記(표기) 되있습니다
어떤기록이 박채선을 이채선으로 기록 한성권번 출신이라 하고있으나 박채선이 맞으며 그의대한 기록은 미비합니다
1010—탕자자탄가-B
1927년, 4월 日蓄(일축) 發行(발행) 每月新譜(매월신보)---------------------------------------------------에는
留聲機(유성기) 第三年(제3년) 第五號(제5호)
日蓄(일축) 朝鮮歌盤(조선가반) 總目錄(총목록)
新 流行歌(신유행가) 及(급) 日本(일본)歌曲集(가곡집)
V116-B 流行(유행) 蕩子警戒歌(탕자경계가) 이풍진 세상을-----
合唱(합창) 박채선, 이류색----------------------------------------------------------이라고 “이풍진세월”을 “蕩子警戒歌(탕자경계가)>”로 노래 題目(제목)을 다르게 表記(표기)하고 있습니다
이로보아서 이무렵 이노래를 <蕩子警戒歌(탕자경계가)>로 불렸음을 알게합니다
그리고 1928년, 9월 日蓄(일축) 發行(발행) 每月新譜(매월신보)!!
朝鮮(조선)레코드 總目錄(총목록)
일축K116-A 流行(유행) 사랑歌(가) 너와나가 살게되면---등 合唱(합창) 박채선, 이류색
일축K116-B 流行(유행) 蕩子(탕자) 警戒歌-경계가- 이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合唱(합창) 박채선, 이유색
그리고 같은 일축에서 김산월, 도월색 듀오로 또 취입하는바 이때는<이 風塵 世上(풍진세상)>이었습니다
1925년, 11월8일 東亞日報(동아일보) 닙보노홍 廣告(광고)----------------------------에는
내고향을 이별하고 안기영
제비들은 강남에----
거룩한성-HOLY CITY-김인식
伴奏(반주)아펜젤러
流行歌(유행가) 鴨綠江節(압록강절) 도월색 김산월
長恨夢歌(장한몽가)
시들은 방초
이 風塵世上(풍진세상)을---------------------------------廣告(광고)하고있습니다
그리고 時期(시기) 發賣(발매)된 닙보노홍 音盤(음반)----------------------------------------------------------------------에는
盤(반) KAB0677
닙보노홍 K547-A 新 流行歌(신유행가) 枯木歌(고목가) 시드른 방초 金山月(김산월) 都月色(도월색) 長鼓(장고) 李桂月(이계월)
닙보노홍 K547-B 新(신) 流行歌(유행가) 戀之鳥(연지조) 이풍진세상을-----------------------------------------------------------------
로 表記(표기)하고있는바 <시드른방초>를 “고목가” <이풍진세상> 을 “연지조” 라는 또다른 제목으로 소개하고 있어서 興味(흥미)롭습니다
이곡은 1926년경에도 金竹史 (김죽사) 가<이 風塵(풍진) 世上(세상)>이란 제목으로 日東(일동)레코서 발매했습니다
1927년, 7월21일 朝鮮日報(조선일보) 日東(일동)레코드 廣告(광고)-------------------------------------------에는
日東(일동) 第四回(제4회) 賣出新譜(매출신보)
唱歌(창가) 창 김죽사 이 風塵世上(풍진세상) 唱(창) 金竹史 (김죽사) 大琴(대금) 金泳根(김영근)----------------라고 표기 <창가>,<유행가>가 란 호칭이 混用(혼용)되고 있음을 알수있습니다
흔히들 이곡을 한국최초 직업가수 채규엽씨가 불렀다는 주장이있으나 이는 근거없는 주장입니다
가사를 기독교인 임모 작사설도 불명확합니다
이곡은 상기제목외에도 <日曜日歌(일요일가> <禁酒唱歌(금주창가)>로도 불렸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風塵世上(풍진세상), 富貴榮華(부귀영화), 春夢(춘몽), 談笑和樂(담소화락)이 이노랫말 話頭(화두)입니다
“風塵世上(풍진세상)” “春夢(춘몽)”이 對比(대비)을 이루고 富貴榮華(부귀영화) 와 談笑(담소)和樂(담소화락)이 生角(생각)의 연줄을 이어줍니다
當時(당시) 日本帝國主義(일본제국주의) 植民治下(식민치하) 韓國國民(한국국민)들의 삶을 어쩌면 이렇게 赤裸裸(적나라) 하게엮었을까요
流行歌(유행가)는 그시대의 理念(이념)일수 도있고 大衆(대중)들의 삶이 反映(반영)되 있기도 합니다
더러는 노래속 話者(화자)의 人生(인생)살이를 엮은 事緣(사연)일수도 있습니다
이곡은 후일 고복수, 황금심 부부가수, 명국환씨등에 의하여 REMAKE 되었습니다
SINSEGY-RECORD 발매 10인치음반-노래는 흘러40년 인생도흘러 40년—SIDE A 고복수씨 목소리로<希望歌(희망가)>로 개제되어 실려있고
성음사발매 LP음반-歌謠(가요)半世紀(반세기)-에 명국환씨 목소리로 들립니다
1011-長恨夢(장한몽)歌(가)-a
大同江 邊(대동강변) 浮碧樓(부벽루)에 散步(산보)하는 李守一(이수일)과 沈順愛(심순애)
兩人(양인)이로다
握手論情 (악수론정)하는것도 오늘뿐이요 步步行進(보보행진) 散步(산보)도 오늘뿐이다
守一(수일)이가 學校(학교)를 마칠때까지 順愛(순애)야 어찌하여 못참느냐
男便(남편)됨이 不足(부족)함이 있는 연고냐 그외에 金錢(금전)이 탐이나더냐
郎君(낭군)의 不足(부족)함은 없지마는 당신을 外國留學(외국유학) 시키려고
父母(부모)님의 말씀대로 順從(순종)하여서 김중배의 집으로 시집을 가오
順愛(순애)야 半病身(반병신)된 守一(수일)이나 이래뵈도 일개의 義氣男(의기남)이다
理想(이상)의 나의妻(처)를 돈을삼아서 留學(유학)하려 하는 내가 아니다
順愛(순애)야 반드시 내년이 오면 今日今夜(금일금야) 돋아있는 저달을 나의 피눈물로
흐리게하여 보이도록 하리로다 남아기상
Diamond-다이아몬드-에 눈이 어두어 반기어 타지마라 垂絲(수사) 四人轎(사인교)
女子(여자)는 切介(절개)가 제일이되고 金錢(금전)은 六大洲(육대주)에 돌고 도는것
惡愛(오애) 失望(실망)당한 李守一(이수일)이는 옷깃잡는 順愛(순애)를 떨쳐버리고
長恨(장한)의 피눈물이 눈가에 흘러서 西山頃月(서산경월) 저달빛이 더욱섧구나
상기가사는 장한몽가 가실린 노래책과 음반가운데 연대가 가장앞서는 정경운편저 <낙원창가> 에 수록된 가사입니다
흔히들 “이수일과 심순애”로 더유명한 이노래도 日本流行歌(일본유행가) 飜案(번안)입니다
그일본 流行歌(유행가)즉 原曲(원곡)은 1918년 발표된 <金色夜叉(금색야차)>입니다
미야지마이쿠호 와고토시운 이 공동으로 작사하고 작곡도 담당했습니다
같은제목의 小說(소설)內容(소설내용)을 노래 歌詞(가사)에 담은것인데 한국 “長恨夢歌(장한몽가 )” 도 新聞小說(신문소설) 金色夜叉(금색야차)의 飜案作(번안작) 인
조중환의<長恨夢(장한몽)> 小說內容(소설내용)을 그대로 담았습니다
1897년, 1월부터 1899년 1월까지 일본 요미우리 신문에실린 日本(最初(일본최초) 新聞小說(신문소설) <곤지끼 夜叉(야차): 金色夜叉(금색야차) >가 1919년 映畵(영화)로 만들어져
旋風的人氣(선풍적인기)를얻었습니다
헌데 이소설도 美國小說家(미국소설가) 버사클레이여사가 창작한<여자보다 약한자>라는 소설을 日譯(일역)했다는 주장이 보입니다
그리고 1913년경 新派劇(신파극)으로 등장시 1918년 상기곡이 발표되기전 學校校歌(학교교가) 를빌려서 엔카로 主題歌(주제가)를 불렀다는 主張(주장)도 보입니다
국내에선 조중환이 韓譯(한역)하여 매일신보에서 1913년 5월부터 10월까지 連載(연재)하고 그속편을 1915년, 5월25일부터 12월26일까지 또 연재했습니다
그스토리를 그대로 일본서 각색해서 만든 신파극이<長恨夢(장한몽)>입니다
이기세의 唯一團(유일단)이 일본<장한몽>을 脚色(각색)하여 1913년 이것을 新派劇(신파극)으로 국내서 상연하자 그후 여러극단서 앞다투어 공연했고 국내서도 映畵化(영화화)됩니다
일본의 elite course-엘리트코스- 登龍門(등용문)인 一高(일고) 學生(학생) 강이찌가 이수일로 그의愛人(애인)오마야가 심순애로 이들이 사랑을 다짐하는 아타미海岸(해안) 모래)沙場(사장)이
大同江邊(대동강변)으로 바뀐것 뿐입니다
한국에선 1925년 일축에서 김산월, 도월색 듀오가 ----1925년, 11월 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닙보노홍 조선소리판 광고에 <압록강절> <시드른방초>< 이풍진세상을>등과 함께 보입니다
1927년, 1월 30일, 2월4일 동아일보 日蓄 朝鮮(일축조선)소리판 廣告(광고)----------------------에는
日本(일본)소리, 유행가의 寵(총)0 도월색의 鴨綠江(압록강)노래 外(외) 일본소리판 數種(수종)--------------이라 광고 하고있습니다
1928년, 9월11일 東亞日報(동아일보) 1928년, 9월22일 朝鮮日報(조선일보) 닙보노홍 廣告(광고) ----------------------------에는
優秀品(우수품)0選(선) 流行歌(유행가) 警備歌(경비가) 도월색
鴨綠江(압록강) 부시 二 枚(2매) 김산월-----------------------------------------------------------------------------------라고 紹介(소개)하고 있읍니다
이곡은 후일 고복수 황금심 부부에 의하여 remake 됩니다
한국서 <長恨夢(장한몽)>이 최초로 이기세에 의하여 連鎖(연쇄)劇(연쇄극)으로 만들어졌을 때 마호정이 출연했고 映畵上演時(영화상연시) 뮤직박스에서 주제가를 live 로 불렀다는 글도보입니다
1012—長恨夢歌(장한몽가)-b
1918 일본서 한국의 1925년 일축레코드서 도월색, 김산월이 듀오로 부른<장한몽가> 원곡 <金色夜叉(금색야차)>가 고토시운등 2인에의하여 발표되고 한국에선 1913년 이기세의
唯一團(유일단) 의<장한몽>을 무대에 올린후 1920년 에는 이기세가 대표를 맡고있던 文藝團(문예단)에서 尾㞹紅業(미가홍업)의 원작인<長恨夢(장한몽)>을 連鎖劇(연쇄극)으로 꾸몄습니다
그전 新派劇(신파극) “長恨夢(장한몽)”은 같은 번안극<불여귀>와 함께 演劇舞臺(연극무대)에서 굉장한 성공을었는데 극장에서 울지않는 사람이 없었고 如泣如訴(여읍여소) 즉 우는듯하고
호소하는듯한 公演(공연)形態(공연-형태)를 지녔습니다
관객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新派演劇(신파연극)의 最高成工(최고성공) 기준이었으며 洗練(세련)되지않고 반복되는 이야기법에대한 知識人層(지식인층)의 嫌惡(혐오)에도 불구하고 感動(감동)을
꼬장꼬장하게 이야기해야 직성이 풀리는 新派(신파)는 서러운 며느리, 고무신 관객등 庶民(서민)을위한 藝術(예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時節(시절) 韓國(한국)의 國民(국민)들의 大部分(대부분)은 庶民(서민)들 이었습니다
이연쇄극에 출연한 馬豪政(마호정)을 우리니라 最初 女俳優(최초여배우)라 주장하는 평론가도 있습니다
이기세 문예단의 <장한몽>은 취성좌 단원들에 의하여 촬영되었으며 당시 영화와 연극이 어떻게 밀접히 결합되어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영화는 1920년, 4월24일부터 4월28일까지 상연되었습니다
이때 사용된 음악은 본래 明治維新(명치유신)때 끝까지 관군들에게 대힝하였다가 자결한 결사대를 찬양하는 것인데 톳토리순요가 채보하여 작곡한 노래를 사용했다는 글이보입니다
1926년에는 계림영화협회의 제1회작품인<長恨夢(장한몽)>이 단성사에서 공개됩니다
이작품은 이미 이기세의 문예단에서 한번 映畵化(영화화)한것으로 이경손감독, 강홍식이란 배우를 앞세워 大大的(대대적)으로 다시 제작되었습니다
강홍식은 후일Columbia-record 서 處女總角(처녀총각)이라는 대중가요를 취입하고 번안곡<유쾌한시골영감>을 발표하기도 해 有名歌手(유명가수)겸 俳優(배우)가 됩니다
이영화는 인기가높아서 Columbia-record 서 映畵劇(영화극) 音盤(음반)이 發賣(발매)되기도 합니다
그시기 콜롬비아 레코드 發賣音盤(발매음반)을-------------------------------------------------- 보면
Columbia 4004-a 映畵劇(영화극) 長恨夢(장한몽)一(일) 서월영, 복혜숙, 설명 김영환 노래 金香蘭(김향란) 短簫(단소) 김계선 伴奏(반주) 朝鮮劇場(조선극장) 管絃樂團(관현악단)
Columbia 4004-b 映畵劇(영화극) 長恨夢(장한몽)二(이)---- 三(삼), 四(사)---같은내용 생략--
------------------라고 소개하고 있읍니다만 김향란이 부른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를 누가 작사, 곡 했는지 알수없습니다
극을 잠깐 들어다 보면----
-------드리고의 세레나데가 흐릅니다
천상에 월색은 몽롱하고 대동가잠들어 잔잔한데 대때로불어오는 바람
무엇인지 애통해하는 3월 열나흘날 밤이었다
乙密臺(을밀대)를 등지고 지금그사이로 내려오는 두사람의 그림자 그는
이수일과 심순애이다
“순애씨 나는 가슴이 터진 것 같아서 아무말도 할말도없소”
““수일씨 용서해주세요”
용서가 다 무슨용서요 도대체 이번일이 아버님과 어머님이 시키신일인지
순애씨 자신도 깨닫고 한일인지 나는 그것만 들어면 그만이요----후략---
장한몽의원작<금색야차>는 19세기후반 20세기초 일본의 메이지유신시절 日本庶民(일본서민)들이 身分制(신분제)에서 벗어날무렵 新興富者(신흥부자)와 沒落(몰락)貴族(몰락귀족)간의
葛藤(갈등)이라는 당시 日本社會相(일본사회상)을 反映(반영)함으로써 일본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읍니다
이러한 原作內容(원작내용)을 끌어와 20년후 韓國的狀況(한국적상황)에 맞게 變形(변형)한 것이 장한몽입니다
當時(당시)의 朝鮮(조선)의 富裕層(부유층)은 주로 親日派(친일파)였는데 主人公(주인공) 이수일은 社會下層(사회하층)에서 誠實(성실)히 살아가는 가난한 韓國庶民(한국서민)으로 설정되있습니다
이러한 社會的(사회적)흐름을 반영한 영화는 곧 많은 人氣(인기)를 얻고 크게 成功(성공)하게됩니다’
이때부터 映畵界(영화계)에서는”大衆(대중)은 新派(신파)를 좋아한다”는 固定觀念(고정관념)이 널리 퍼져나기게 된것입니다
1013-장한몽가-c
日本歌謠(일본가요) 飜案曲(번안곡)은 김산월, 도월색 듀오에 이어서 도월색 solo-솔로- 로 또 吹入(취입)합니다
1927년, 7월13일 每日申報(매일신보) 日東(일동)레코드 廣告(광고)----------------------에는
第六回(제6회) 新譜發賣(신보발매)
日東名曲(일동명곡) 新譜(신보)
b-146 長恨夢歌(장한몽가) 下(하) 都月色(도월색)------------------------------ --------- 라고 宣傳(선전)하고있습니다
시들은 방초 上(상)
그리고 1927년, 7월14일 朝鮮日報(조선일보) 日東(일동)레코드 廣告(광고)------------------------------에는
名曲新譜(명곡신보) 發賣(발매)
第六回(제6회) 發賣新譜(발매신보)
b-146 시들은 방초 上(상)
長恨夢歌(장한몽가) 下(하) 都月色(도월색)----------------------------------------------라고 廣告(광고)하고 있습니다
regal-record c100~ 는 columbia-record에서 발매한 음반으로 처음에는 발매된지 오래된 콜롬비아 定規盤(정규반) 의 再發賣(재발매) 음반 이었읍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재발매가 아니라 新譜爲主(신보위주)로 발매하게되는데 이는 全般的(전반적)인 音盤價格(음반가격)의 下落(하락)과 관련이 있습니다
Regal-record 는 定規盤(정규반) 과 짝이되는 콜롬비아 廉價主力商品(염가주력상품)으로 모두 400종이 확인되었습니다
이音盤(음반)으로 c312 로 長恨夢(장한몽) 劇盤(극반) 이 發賣(발매)되었습니다
Kab1146
Regal c312 劇(극) 不如歸(불여귀) 金炳哲案(김병철안) 都武(도무) 李利安(이인안)
Regal c-146 劇(극) 長恨夢(장한몽)-----------------------------------------------------라고 表記(표기)되 있습니다
1936년, regal-record 發行(발행) 新譜紙(신보지------------------------------------------에는
Regal-record 二月新譜(2월신보)
ㅊ-三一二(삼일이) 劇(극) 不如歸(불여귀)
長恨夢(장한몽) 都武 (도무) 李利安(이이안)---------------------------------------------------------------이라고 廣告(광고)하고 있습니다
노래----
大同江邊(대동강변) 浮碧樓(부벽루) 散步(산보)하는 적적한 걸음 설움에 챴네
악수를 청하는 것도 오늘뿐이요 步步行進(보보행진) 散步(산보)함도 오늘뿐이라
三月十五 日(삼월 십오오 일) 밝은달은 大同江(대동강)邊(변)에 비치었다
금실은실 물결은 비단수놓인 몽롱한 달빛이 모래판까지 은세계로 비추일 때 이수일과 심순애는 힘어버는 걸음을 무겁게 옮기어 놓으며
수일—순애 病(병)은 좀 어때? 정양하러 온다는 것은 저 김중배란 놈과 만나려고 왔지?
순애—너무나 억울합니다 그런말씀은 정말이지 너무나 억울해요
우리가 평양으로 온 것을 그이가 아시고 따라온 것이 아니예요??
수일—무엇 때문에 따라왔단 말이요---- 그것봐 對答(대답)할말이 없지?
순애—그야 수일씨에게 아무말도 하지않고 이렇게온 것은 잘못이지만 그렇지만 나는 수일씨앞에
나서지 못할만한 그런 나쁜짓 한 것이 없어요 그것만은 믿어주세요-----후략----
1014--長恨夢(장한몽)歌(가)-d
<長恨夢(장한몽)> 이 新聞(신문)飜案小說(번안소설)로 시작하여 新派劇(신파극)으로 樂劇舞臺(악극무대)서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곧 映畵化(영화화)되고 한국서 新派映畵(신파영화)
始作(시작)을 알리고 繼續(계속)해서 Long run-롱런-하자 音盤界(음반계)에서도 이 好期(호기)를 놓힐리 만무합니다
해서 劇(극)盤(반)으로 映畵說明(영화설명)으로 企劃發賣(기획발매)하기시작 수많은 蛾類作(아류작)이 量産(양산)되기 시작합니다
그중에 宋影(송영)이 劇作(극작)한 新-신-長恨夢(장한몽)이 victor-record 서 발매됩니다
1938년, 4월 victor-record 發行(발행) 每月新譜(매월신보)紙(지)----------------------------------에는
靑盤(청반) 四月新譜(4월신보)
Kj—1162 劇(극) 新(신)長恨夢(장한몽) 上 下(상하)
宋影 作(송영작) 沈影(심영) 韓銀珍(한은진)-------------------라고 목소리연기 出演者(출연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38년, 3월 東亞日報(동아일보) victor-record 廣告(광고)--------------------------------------------------에는
四月新譜(4월신보)
劇(극) 新版(신판) 長恨夢(장한몽) 심영 한은진--------------------------------------------------------------------------- 라고 宣傳(선전) 하고 있습니다
허나 音盤(음반)未公開(미공개)로 內容(내용)을 알수없습니다 누구의 主題歌(주제가)를 불렸는지도----
헌데 上記音盤(상기음반) 목소리연기 出演者(출연자) “沁影(심영)”은 이번에는 p[olydor-record 서 또 <長恨夢(장한몽)>에 出演(출연)하고 있습니다
1938년, 12월13일 每日申報(매일신보) 12월14일 朝鮮日報(조선일보) 12월16일 東亞日報(동아일보) polydor-record-폴리돌 레코드- 廣告(광고)--------------------------에는
폴리돌 朝鮮(조선) 일원 十錢 盤(십전반) 第一回 新譜(제1회신보)
一月新譜(1월신보) x510
劇(극) 長恨夢(장한몽) 沁影(심영) 申銀鳳(신은봉)----------------------------라고 광고하고 있어서 그의 출연을 확인 할수있습니다
이어서 이극은 國樂界(국악계) 로도 傳播(전파)되어 그시기 國樂界(국악계) 스타 박녹주, 임방울 出演(출연)으로 唱劇化(창극화)됩니다
李孤帆(이고범) 詩(시) 姜一史(강일사) 唱劇(창극)化(창극화)로 녹음되었습니다
1938년, 6월14일 조선일보 korai-record-고라이레코드- 廣告(광고)--------------------에는
七月新譜(7월신보)
1053 唱劇(창극) 長恨夢(장한몽) 哀別(애별)편 一(일)~四(사) 박녹주 임방울------라 광고 음반 2장에실어서 발매했음을 알수있습니다
이러한 長恨夢(장한몽) 流行(유행)에 歌謠界(가요계)代父(가요계대부) 김용환씨도 同參(동참)합니다
“長恨夢(장한몽)”을 motive-모티브-로 하여<追憶(추억)의 長恨夢(장한몽)> 이란 大衆歌謠(대중가요)를 발표했습니다
大同江(대동강) 밤안개가 달빛을 안고 綾羅島(능라도)버들속에 꿈이 짙을 때 靑(청)流(류)壁(벽)
날아들며 우는 밤새는 울고간 李守一(이수일)의 넋이라 할까 아아~ 李 守一(이수일)넋이라 할까요
玉(옥)같이 맺은言約(언약) 黃金(황금)에팔고 山(산)같이 믿은이맘 거짓이랄 때 뜬世上(세상) 첫설음에
傷處(상처)를받고 울고간 李守一(이수일)은 그몇이련가 아아~ 李守一(이수일)은 그몇이나 될까
黃金(황금)에 녹이슬어 빛이 흐를 때 잃었던 옛마음이 다시 떠돌아 울면서 떠나가던 엤님의 품을
울명서 찾아가는 沈順愛(심순애)라오 아아`찾아가는 沈順愛(심순애)랍니다
1938년, 9월 polydor-record 발매 sp음반-秋夜月(추야월)작사 山田0一作曲(산전0일 작곡) 김용환, 오리엔탈 合唱團(합창단) 노래로 실려있습니다
他面-타면-에는 편월-왕평-詞(사) 김ㅇ포 作曲(작곡) 김용환노래<支那街(지나가)의 悲歌(비가)>가 함께 실려있습니다
그리고 okeh-record 발매 12131 番號(번호)로 조명안사 박시춘곡 柳鄕(유향) 노래로<追憶(추억)의 長恨夢(장한몽)>이 발표되는바
1938년, 5월경 okeh-record 서sp음반-조명암 詞(사), 박시춘 曲(곡), 沁影(심영)臺詞(대사) 劉鄕-유향-노래로 실려있고
他面(타면)에는 장세정노래<네 꼭정말로요>가 함께 실려있습니다
이곡은 후일 <허무한마음> <무작정걷고싶어>를 힛트시킨 정원씨가remale 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okeh 後半期(후반기) 黑盤 (흑반)의 직접적인 연장으로 앞서 모케이 정규반이 음반번호 “okeh 1999” 번이되자 다음 2000번 앞에 “1”자를 하나더 넣어 12001로부터 다시 시작한것입니다
오케이 後期盤(후기반)은 音盤番號(음반번호) “okeh 12001~12330” 까지 330매정도 발매되었으며 發賣時期(발매시기)는 1937년중반서 1940년중반까지 약3년간 발매했습니다
1015--長恨夢歌(장한몽가)-e
앞서 言及(언급)한 유향이 취입한<追憶(추억)의 長恨夢(장한몽)>歌詞(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달빛잠든 浮碧樓(부벽루) 붉은기둥에 기대서서 大同江(대동강)푸른물위에
타는마음 실어 타는마음 실어 보낸다
臺詞(대사)—갈가리 찢어진 사랑이란다 울고가는 順愛(순애)야 저딜이 흐렸구나
열나흘날밤 저달 黃金(황금)에 짓밟힌 守一(수일)의 피눈물 아! 追憶(추억)의
長恨夢(장한몽)이 나를 울린다
둘이만나 울던곳 春風秋雨(춘풍추우) 덧없어라 다시못올 사랑에 내눈물이 넘쳐
내눈물이 넘쳐흐른다
臺詞(대사)—목숨을 바친 사랑도 丈夫(장부)의 칼날 같은 마음은 어쩔수없다
더러운 계집아 가거라 骨髓(골수)에 맺힌 怨恨-원한-은 마디마디 綾羅島(능라도)
기슭에 잠기어 마음껏 마음껏 울어라 에이 더러운 계집아!!
다시못올 그옛날 生角(생각)할수록 눈물겨워 牡丹峯(모란봉) 푸른달빛에 옛노래를 불러
옛노래를불러 보낸다--------------------------------------------------------------------------------------------------<追憶(추억)의 長恨夢(장한몽)> 沁影(심영)臺詞(대사), 조명암사 박시춘곡 유향노래
그리고 이곡은 後日(후일) 아세아레코드발매 lp음반-세월따라 노래따라 vol2-에 정원씨 목소리로remake되어 실려있습니다
臺詞(대사)-----“守一 氏(씨) (수일씨) 守一氏(수일씨) 容恕(용서)헤주세요 제 眞情(진정)은 그게 아니예요!!”
“놓아라!! 이 더러운 계집아 김중배의 金剛石(금강석) 保釋半指(보석반지)에 눈이 어두워 사랑하는 愛人(애인)
마져 헌신짝같이 버린단 말이냐??”
“守一氏(수일씨) 守一氏(수일씨) 그건------“
아! 갈갈이 찢어진 사랑이란다 울고가는 順愛(순애)야 저달도 흐렸구나
삼월 열나흘 밤 저달은 黃金(황금)에 짓밟힌 이 守一(수일)의 피눈물인줄 알아라
1절--달빛잠든 浮碧樓(부벽루) 푸른난간에 기대서서 다시못올 내사랑
옛노래를 불러 옛노래를 불러보련다
2절--둘이만나 놀던곳 불러보아도 속절없어 大同江(대동강)푸른물위에
피눈물이 넘쳐 피눈물이 넘쳐 흐른다
臺詞(대사)----목숨을바친 사랑도 사나이 칼날 같은 마음엔 둘때가없다 에이 더러운 계집아 가거라 가거라
骨髓(골수)에맺힌 怨恨(원한)은 매디매디 綾羅島(능라도)기슭에 잠재워 마음껏 울어보련다
에이 더러운 계집아
3절--大同江(대동강) 牡丹峯(모란봉) 春風秋雨(춘풍추우)몇몇해냐 綾羅島(능라도)
모래사장 丈夫(장부)의 恨(한)을 실어 丈夫(장부)의 恨(한)을 실어보낸다-------------------------------------------------------<追憶(추억)의 長恨夢(장한몽)>조명암사 박시춘곡 정원REMAKE
그리고 이러한<長恨夢(장한몽)>大流行(대유행)에 歌謠皇帝(가요황제) 南仁樹(남인수)씨의 同參(동참)을------- 音盤界(음반계)에서 그냥두지 않았습니다
未完(미완)의 영화로 끝나버린 映畵主題歌(영화주제가) <守一(수일)의 노래>를 녹음했습니다
달빛도 우는구나 바다도 우는구나 順愛(순애)야 記憶(기억)하라 三月(삼월) 十五日(십오일)
뜬世上(세상) 黃金(황금)이란 돌고 돌건만 돈을주고 못사는게 돈을주고 못사는게 사랑인줄
알아다오
臺詞(대사)---順愛(순애)야 오늘을 잘 記憶(기억)해 둬라
來年(내년)의 오늘 來後年(내후년)의 오늘, 아니 一生(일생)을 통하여 오늘만은 잊지못할것이다
해마다 저보름달이 흐리거든 이 李守一(이수일)가 어디선가 너를 怨望(원망)하고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다오-<방수일 목소리 演技(연기), 本 映畵(본영화) 出演(출연)>
사나이 내純情(순정)을 모질게 밟아놓고 順愛(순애)야 順愛(순애)야 金剛石(금강석)이 탐이 나더냐
아무리 의지없는 수일이지만 사랑팔아 잘살자는 사랑팔아 잘살자는 李守一(이수일)은 아니었다---------------------------------<守一(수일)의노래> 臺詞(대사) 방수일반야월사 김부해곡 남인수노래
SINSEGY-RECORD 발매 SP음반-반야월사 김부해곡 남인수노래로 실려있습니다
他面(타면) <順 愛(순애)의노래> 반야월사 김부해곡 안정애목소리로 함께 실려있습니다
1016--長恨夢歌(장한몽가)f
1926년 開封映畵(개봉영화) <Eternal love of suil and sunae>로 英譯(영역)되는 <長恨夢(장한몽)>은 李慶孫 監督(이경손 감독), 제작 조일재, 각색 조일재 으로 김정숙, 주삼손,
심훈, 강홍식, 정기탁, 나운규, 남궁운, 이규설, 김명순등의 俳優(배우)들이 出演(출연)했습니다
영화를제작한 계림영화협회 제1회작품으로 1925년<沈淸傳(심청전)>으로 감독데뷔를 한 이경손의<開拓者(개척자)>에 이은 3번째 연출작입니다
小說(소설)”常綠樹(상록수)”로 유명한 심훈의 俳優(배우)데뷔작 이기도 합니다
이영화에서는 李守一(이수일)과 沈順愛(심순애)의 悲劇的(비극적)사랑을 그리면서 物質的價値(물질적가치)보다도 더 所重(소중)한 것은 사랑임을 逆說(역설)하고 있읍니다
곤지키야사<金色夜叉(금색야차)>는 “돈에 환장한 귀신”이란 뜻으로 사랑보다 돈을 選擇(선택)한 順愛(순애) 에대한 守 一(수일)의 詛呪(저주)에찬 名臺詞(명대사)를 제목으로 내세운것입니다
“順愛(순애) 야 김중배의 다이아반지가 그렇게도 탐이나드란 말이냐?
놔라 놓치않으면 이찌까다비로 네 가슴팍을 꽉차버릴것이다
만일 내년이밤 내명년이밤 저달이 오늘같이 흐리거든 이수일이가
어디에선가 순애너를 怨望(원망)하고 오늘같이 우는줄이나 알으라”
1926년, 2월28일자 東亞日報(동아일보)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계림영화사는 조일재의 주재로 지금 영화계에서 저명한 영화배우들을 망라하여 조선영화제작에 노력중 제1회작품으로 일본의 원작 金色夜叉(금색야차)를 번안하여 각색과 감독은 사께의
일인자로 칭찬받는 이경손씨가 하였으며 주삼손, 김정숙양이 주연했고 정기탁, 강홍식, 나운규, 남궁운, 이규설군과 김명순양등이 조연니시카와 히데오군이 촬영하였다---“
그리고 東亞日報(동아일보) 1928년, 8월1일자 에보면-------
長恨夢(장한몽)을 監督(감독)한 이경손의글 <무성영화시대의 자전>에 보면 ” 主人公(주인공) 李守一 役(이수일역)에는 부산에서 올라온 주삼손이었으나 撮影途中(촬영도중) 주삼순이 행방을
감추고 中途下車(중도하차) 하는바람에 代打(대타)로 기용된 것이 作家(작가) 심훈”이며 羅雲奎出演說(나운규 출연설)은 根據(근거)없는것으로 밝히고있다
守一役(“수일”역)으로 주삼손 代打(대타)로 俳優debut-배우데뷔-한 심훈은 當時(당시)22살이었으며 朝鮮日報 記者(조선일보 기자)로 廣告(광고)에는“심대섭” 으로 나와있습니다
그는 長恨夢(장한몽)을 開封(개봉)하던 해인 1926년, 12월 일본에 건너가 닛가쯔 撮影所(촬영소)에서 무라다 노마루 監督(감독)에게서 演出法(연출법)을 배우고 이 映畵出演後(영화출연후)
自身(자신)이 直接脚本(직접각본)을 쓴<먼동이틀떄>로 監督debut-감독데뷔-합니다
沈順愛(심순애) 役(역)의 김정숙은 이영화에 출연한 정기탁의 同居女(동거녀)로 알러져있습니다
“李守一이수일-과 沈順愛(심순애)” 이야기는 이기세의 1920년 連鎖劇-연쇄극- 長恨夢(장한몽) 이 있었고 上記言及(상기언급)이경손감독의 長恨夢(장한몽), 以後(이후) 이구영감독의
<守一(수일) 과 順愛(순애)>가 있습니다
“登場人物(등장인물)”을 映畵題目(영화제목)으로 내세운 이작품에는 윤봉춘씨가 “김중배” 役(역)을맡았고 김연실, 이경선, 주삼손 박제행등이 출연
廣告(광고)에보면 配役(배역)맞추기 懸賞投票(현상투표)를 실시하면서 先着順(선착순) 500명에게 謝恩品人(사은품인) 조미료를 증정한다는 내용과 촬영기사 이명우가 現場(현장)에 레일을깔아
移動車(이동차)를 前進後退(전진후퇴)시키면서 촬영한 우리 映畵最初(영화최초) 移動撮影(이동촬영)을 시도한 작품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931년, 3월5일 每日申報(매일신보) 報道(보도)입니다
이영화 이구영의의 <수일과순애>는 1965년 김달웅감독이 remake 했습니다
主人公(주인공) 李守一(이수일)은 일찍이 父母(부모)를 여의었고 아버지의 親舊(친구)인 심택의 집에서 자라 고등학교까지 마친뒤 沈順愛(심순애) 와 結婚(결혼)을 約束(약속)합니다
그런 어느正月(정월) 보름날 심순애는 김소사의 집으로 윷놀이를 갔다가 거기에서 大富豪(대부호)의아들 김중배를 만납니다
심순애에게 魅了(매료)된 김중배는 diamond-다이아몬드-와 物質攻勢(물질공세)로 그녀를 誘惑(유혹)하였고 심순애의 마음은 점점 이수일로부터 멀어져갑니다
이사실을 알게된 이수일은 달빛어린 大同江(대동강)가 浮碧樓(부벽루)에서 심순애를 달래보고 꾸짖어도 보았으나 한범 물질에 눈이어두어진 여자의 마음을 돌릴수는 없었습니다
鬱憤(울분)과 墮落(타락)끝에 高利貸金業者(고리대금업자) 김정연의 書記(서기)가된 이수일은 김정연의 죽음과함께 많은 遺産(유산) 받게됩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自身(자신)의 過誤(과오)를 뉘우친 심순애는 대동강에 投身自殺(투신자살)하려다 수일의친구 백낙관에게 救出(구출)됩니다
결국 두사람은 백낙관의 끈질긴 說得(설득)으로 다시 결합하여 새출발을 하게됩니다
이수일 심순애의 悲戀(비련)을 그린 이작품은 물질적가치에 대항할 수 있는 사랑의힘을 그주제로 하고있고 순한국적배경과 유형으로 개작되어 수많은 개화기의 독자를얻은 통속번안소설로
新聞連載小說(신문연재소설)에 적지않은 영향을준 작품입니다
특히 당시에 크게유행하였던 新小說(신소설)과 古小說(고소설)을 壓倒(압도)하고 소설과 연극으로 新文學最初(신문학최초)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던점은 뒷맛을 씁쓰레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이작품은 新小說退潮(신소설퇴조)와 함께 이후 通俗的(통속적) 愛情小說(애정소설)의 등장을 재촉하였으며 연극에서도 이후 新派劇(신파극)의 代名詞(대명사)가 될정도로
그 波及效果(파급효과)가 컸던작품임은 分明(분명)합니다
1017--내 故鄕(고향)을 離別(이별)하고-a 안기영
내 故鄕(고향)을 離別(이별)하고 他鄕(타향)에와서 寂寂(적적)한밤 홀로앉아서
生角(생각)을하니 답답한마음 아아~ 뉘가 慰勞(위로)해
우리집에서 머지않아 조금나가면 작은시내 졸졸흐르며 어린 동생들 놀던 모양
아아~눈에 암암해
내 故鄕(고향)을 떠나올 때 내 어머님이 門(문)앞에서 눈물 흘리며 잘다녀오라
하시던 말씀 아아~귀에 쟁쟁해
中天(중천)으로 날아가는 저 기럭떼야 너가는길은 그리 바쁘냐 나의 懷抱(회포)를
宇(우)리 父母(부모)님께 아아~ 전해줄쏘냐
1925년 11월8일자 東亞日報(동아일보) 납보노홍 조선소리판 廣告(광고)----------------------에는
내 故鄕(고향)을 離別(이별)하고 안기영
제비들은 江南(강남)에
거룩한성-holy city- 김인식 piano伴奏(반주) 아펜젤러
鴨綠江(압록강)節(절)
長恨夢(장한몽)歌(가) 시들은 芳草(방초
이 風塵 世上(풍진세상) 都月色(도월색) 金山月(김산월)----------------------------라고 광고하고 있습니다
東亞日報(동아일보) 11월8일 일축조선소리판 廣告(광고)-------------------------에는
東洋第一(동양제일)인 日蓄商會(일축상회) 優秀(우수)한 月(월)新譜 完城(신보완성) 大放賣(대방매)
내 故鄕(고향)을 離別(이별)하고 farewell to home
제비들은 江南(강남)에- when the swallow homeward fry- 안기영 piano 伴奏(반주)----- --------------------------------------- 라 宣傳(선전) 히고있습니다
1925년 11월 닙보노홍 發行(발행) 歌詞紙(가사지)--------------------------에는
자미스러운 일축소리판 들어보십시요<사진, 안기영> 일축조선소리판 일본축음기상회
우리 조선에 유성기소리판 이생겨는 제가 벌써 십유년이 되였습니다마는 소리판에 에 들어있는 사실을 쓰는일이 없어요
항상 유감이 생각하여 처음으로 新進(신진)聲樂家(성악가) 安基永氏 (안기영씨)에 부탁하여 소리사설을 인새허였사오니 우리
일축소리판을 사랑하시고 잘 보시기물바라나이다----후략-----------------------라는 인사말씀이 실려있습니다
1927년,4월 發行(발행) 日蓄朝鮮(일축조선) 소리판 每月新譜紙(매월신보지)-------------------------------------에는
留聲機(유성기) 第三年(제3년) 第五號(제5호)
日蓄(일축) 朝鮮歌盤(조선가반) 總目錄(총목록)
唱歌(창가) 童謠(동요) k547 제비들은 江南(강남)에 安基永(안기영)
내 故鄕(고향)을 離別(이별)하고 安基永(안기영)--------------------------------------------------------------이라 宣傳(선전) 하고있습니다
1928년, 9월 發行(발행) 日蓄朝鮮(일축조선) 소리판 每月新譜紙(매월신지)---------------------------------------에는
朝鮮(조선)레코드總目錄(총목록)
일축 k548-a 望鄕歌(망향가) 故鄕(고향)을 離別(이별)하고 피아노 伴奏(반주) 아펜젤러 獨唱(독창) 安基永(안기영)
일축 k548-b 제비들은 江南(강남)에 피아노반주 아펜젤러 獨唱(독창)---------------------------------------------라고 廣告(광고) 하고있습니다
1018—내 故鄕(고향)을 離別(이별)하고—b
春史(춘사) 羅雲奎(나운규)가 영화 <豆滿江(두만강)을건너서>를 완성 총독부에 심의를 요청했으나 제목이 民族魂(민족혼)을 刺戟(자극)할우려가있다고 심의를 내주지않자 우미관
꼭대기에 올라가 항의끝에
제목을<사랑을 찾아서>로 改題條件(개제조건)으로 심의가 통과되었는데 이영화에<내 故鄕(고향)을 離別(이별)하고>멜로디가 사용되었습니다
下記內容 (하기내용)은---- <豆滿江(두만강)을 건너서> 映畵說明(영화설명) 레코드에서 이노래가 사용된 부분입니다---
---------------우리에게도 어머니의 나라가 있다마는 간곳마다 쫓기는 우리의 身世(신세) 오~ 이제는
어디를가야 옳다는 말인가
정든故鄕(고향)과 사랑하는 兄弟(형제)를 멀리두고 바람차고 눈나리는 數千里(수천리) 他官(타관)에서
定處(정처)없이 漂流(표류)하는 우리들의 목숨도 이것이 마지막 일런지도 모른다
자! 사랑하는 동지들아 우리가 만일 이벌판에서 죽는다한들 葬禮式(장례식)인들 누가 지내주겠느냐
언제든지 한번은 죽고야말 사람들이니 그러면 우리들이 미리 여기에서 산 葬禮式(장례식)이나 지내어두자
동수의 말이끝나자 그들은 손톱을깎아 한곳에 묻어놓고 동지 일곱사람의 산 葬禮式(장례식)은 凄凉(처량)한
나팔소리에 거행이 된다
바로 이부분에서 나팔로<내 故鄕(고향)을 離別(이별)하고>가 연주 됩니다
이영화<사랑을 찾아서>는 원래<豆滿江(두만강)을 찾아서> 라는 題目(제목)으로 만들어졌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어쩄던 이영화는 日帝(일제)의 檢閱(검열)에 의하여 제목과 내용이 바뀐작품으로 알려져있습니다
經濟的(경제적) 窮乏(궁핍)과 일제의 彈壓(탄압)에 못견디어 北間島(북간도)로 넘어간 인물들이 日本警察(일본경찰)
에의해 獨立軍(독립군)으로 착각되어 誤認射擊(오인사격)끝에 모두죽는다는 悲劇(비극)의 結末(결말)을 보여주는 이작품은 檢閱(검열)로인해
원래의 이야기가 많이 歪曲(왜곡)된것으로 추측됩니다
여기 無聲映畵(무성영화) 臺本(대본)에도 日警(일경)에의한 죽음이라는 부분은 삭제되고 馬賊(마적)들과 대결로 바뀌어있음을 알수있습니다
이대본에는 그저 “滿洲(만주)地方(지방) 游移民(유이민)의 삶이 悲劇的(비극적)으로 묘사된 정도”로 抵抗性(저항성)이 縮小(축소)되어있습니다
歪曲(왜곡)되기전 각본, 기획. 편집 나운규 출연 나운규, 이금용, 전옥, 1928년 나운규프로덕션 작입니다
<豆滿江(두만강)을건너서>는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의 經營主(경영주)였던 요도가 출자를 했습니다
그는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이 없어진후에도 나운규에대해 신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운규는 이영화를 촬영시 박승필로부터 제작비에 구애를 받지않는다는 조건으로 전staff-스태프-와
Guest-게스트-를 引率(인솔)하고 2천리길의 豆滿江邊(두만강변)으로 location-로케이션-을 떠나 이영화를 촬영했습니다
이작품은 나운규의 初期(초기) 또하나의 代表作(대표작)이었는데 中國(중국)쪽 國境(국경)에 흐르는 豆滿江(두만강)을 背景(배경)으로 日帝(일제)에의해 나라를 빼앗긴
朝鮮民族(조선민족)의 悲憤(비분)을-과 억울함을 莊嚴(장엄)하게 그려낸 大作(대작)이 었습니다
장대한 14권짜리 이대작은 1928년 4월 朝鮮劇場(조선극장)에서 개봉해서 힛트했습니다
촬영시 나운규가 故鄕(고향)사람 들을불러 엑스트라로 썼다는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撮影(촬영)은 이창용이었습니다
허나 上記(상기) 說明(상기설명) “大作(대작) 이야기”는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일제의 악랄한 검열로 내용이 왜곡되고 잘려나갔다는 기록있는바 대작이이기와는 많이 틀립니다
내용이 왜곡되고 많은 분량필름이 삭제된 영화가 그연유를 모르는 관객들에게 크게힛트했다는 說明(설명)은 無理(무리)해보입니다
이영화는 곧 regal-record 에의하여 “映畵說明(영화설명)” 제목의 레코드화되어 발매됩니다
1934년, 6월, 1935년, 8월 regal-record 발행 新譜紙(신보지)--------------------------------에는
第一回(제1회) 七月新譜(7월신보), 八月新譜(8월신보)
c-一三九(일삼구) 映畵說明(영화설명) 사랑을 찾아서 上(상) 下(하) 一枚(1매) 成東鎬(성동호)---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상기곡<내고향을 이별하고>의 작곡자는 정사인씨입니다
1019-내 故鄕(고향)을 離別(이별)하고-c
상기곡을 창작한 정사인씨는 짐은 國樂界(국악계)에서<太平歌(태평가)>로 口傳民謠(구전민요)로 부르고있는민요를 實在(실재)로 創作(창작)했습니다
그러하니 이곡은 口傳民謠(구전민요)가 아닌 作詞作曲(작사작곡) 처음부른 歌手(가수)를 다 알수있는 新民謠(신민요)입니다
1935년 polydor-record 서 江南月(강남월)作詞(작사) 鄭士仁( (정사인)作曲(작곡) 鮮于一 鮮 (선우일선)이 부른<太平宴(태평연)>이 原曲(원곡)입니다
1935년, 11월20일 每日申報(매일신보) 1935년, 11월21일 東亞日報(동아일보) 1935년, 11월22일 朝鮮日報(조선일보) polydor-record 廣告(폴리돌광고)----------------에는
十一月新譜(십일월신보) 大發賣(대발매)
Record-레코드- 의 最高峯(최고봉)
19229 新民謠(신민요) 太平宴(태평연) 江南月(강남월) 作詞(작사) 鄭 士仁 作曲(정사인 작곡) 鮮于一鮮(선우일선)
가을의 노래 金正鎬 作詞(김정호 작사) 金冕均(김면균) 作曲(작곡)---------------------------------------라고 廣告(광고) 하고있습니다
정사인은 1881년 서울에서 태어나 1958년 他界(타계)했읍니다
19살때인 1899년 현대의 軍樂隊(군악대)인 曲號隊(곡호대)에 입대했다가 다음해 시위연대 군악대가 창립되자 이곳에 선발되어 1901년부터 軍樂隊長(군악대장)으로 招聘(초빙)된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 로부터 flute-플루트-연주법과 西洋音樂(서양음악)技法(기법)을 등을 공부했습니다
1907년 日本統監府(일본통감부)의 劃策(획책)으로 군악대가 개편되어 군내부소속 帝室音樂隊(제실음악대)로 弱體化(약체화)되는 과정에서 軍樂隊(군악대)를 떠납니다
그는 이미 각종 敎育機關(교육기관)에서 獻身(헌신)하고 있었습니다
1905년 皇城新聞(황성신문) 기사란에서 정사인이 우리 民俗曲(민속곡)을 洋樂器(양악기)로 반주하여 경성고아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消息(소식)을 싣고있습니다
그의나이 35살때부터 개성에있는 松都高普(송도고보)에서 25년간 音樂敎師(음악교사)로 생활하면서 marching band-管樂隊養成(관악대양성)과 연주에 힘을쏟았습니다
이때 관악곡-行進曲(행진곡)-<추풍><돌진><대한혼>등을 作曲演奏(작곡연주)했습니다
1916년 그는 송도고보 學生 band-학생 밴드-부를 동원<대한의혼>을 연주하며 開城市內(개성시내)를 행진했던일로해서 倭警(왜경)에게 잡혀가 두달동안 獄苦(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이무렵 鄭士 仁(정사인) 은<내 故鄕(고향)을 離別(이별)하고>를 完成(완성)했습니다
이곡은 六二五 事變前(육이오 사변전)까지 葬送曲(장송곡)으로 널리연주되었고 특히 1948년 안두희에 의하여 말도안되는 銃殺(총살)로 세상을떠난 백범 김구 獨立鬪士(독립투사)의
葬禮式(장례식)때도 이곡이 葬送曲(장송곡)으로 연주되었습니다
정사인은 말년에 서울 京電(경전)과 철도국등의 管樂隊(관악대)를 지도했으며 日帝末期(일제말기)에는 홍난파와함께 京城放送局(경성방송국) 管絃樂團(관현악단)에서 연주생활도 했습니다
상기곡외에도 “高馬夫(고마부)라는 예명으로 民謠風(민요풍)인 韓國傳統的(한국전통적)인 曲(곡)을 작곡했다”는 주장이있으나 좀더 정밀한 조사가 필요해보입니다
1930년대중반까지 심심찮게 “정사인”, “고마부” 라는 作家名(작가명)을 레코드에서 찾아볼수있으나------
<내고향을 이별하고>는 1920년대이후 滿洲(만주)일대에서 활약하던 獨立軍(독립군)들이 많이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이를 반영한것이 앞서 설명드린 나운규영화<豆滿江(두만강)을 건너서>에서 나팔로 연주한 scene-신-입니다
곡명을 <내고향을 이별하고>가 아닌 “思鄕歌(사향가)”라 했는데 현재 북한에서 발행하는 朝鮮名歌曲集(조선명가곡곡집) 103곡중 5번째로 이노래가 실려있는바 作詞(작사),
作曲者(작곡자)는 밝히지않고 3절로되있는데 3절가사는 새로작사한 것입니다
---大同江(대동강)물 아름다운 萬景臺(만경대)의봄 꿈결에도 잊을수없네 그리운 山川(산천)
光復(광복)의그날 아아~ 돌아가리라------------------------라고 되있습니다
현재 평양에서 발매하고있는 레코드<조선음악산집>에는 상중하 3매로 6면으로 구성되있는데 중편 음반 baus에 사향가가 수록되있는데 이곡melody-멜로디-가<내고향을 이별하고>이다
1,2절로되있는데 歌詞內容 (가사내용)을 전부 改作(개작)해버려 원곡의 情趣(정취)를 찾아볼수없습니다
내 故鄕(고향)은 千里(천리)런가 千萬里(천만리)런가 진달래꽃 香氣(향기)를 담아
돌아가는 날 총잡은 마음 아아~ 설레인다오
大同江(대동강)물 아름다운 萬景臺(만경대)의봄 꿈결에도 잊을수없네
가슴태우며 총잡은 마음 아~ 돌아가리라
평양에서도 이노래의 작가를 밝히지 않고있으며 唯一思想(유일사상)讚揚(찬양)과 共産黨(공산당)에 충성하는 目的歌謠(목적가요) 一邊倒(일변도)인 풍토에서
異例的(이례적)으로 이노래만은 愛唱(애창)한다 합니다
1020—死(사)의 讚美(찬미)-a-尹心悳(윤심덕)
廣漠(광막)한 荒野(황야)에 달리는 人生(인생)아 너의 가는곳 그어데냐
쓸쓸한 世上(세상) 險惡(험악)한 苦海(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가느냐
눈물로된 이世上(세상)에 나죽으면 그만일까 幸福(행복)찾는 人生(인생)들아
너찾는 것 설움
웃는 저꽃과 우는 저새들이 그運命(운명)니 모두 다같구나 삶에 熱中(열중)한
可憐(가련)한 人生(인생)아 너는 칼위에 춤추는 者(자)로다
눈물로된 이世上(세상)에 나죽으면 그만일까 幸福(행복)찾는 人生(인생)들아
너찾는 것 설움
虛榮(허영)에바져 날뛰는 人生(인생)아 너 속혔음을 네가 아느냐 世上(세상)
의것은 너에게 虛無(허무)니 너죽은 後(후)에 모두다 없도다
눈물로된 이世上(세상)에 나죽으면 그만일까 幸福(행복)찾는 人生(인생)들아
너찾는 것 설움
1926년 日東(일동)레코드 sp음반-윤심덕가사 ivanovici-이바노비치-작곡 윤심덕노래로 실려있습니다
他面(타면) <復活(부활)의기쁨>이 윤심덕의 목소리로 함께 실려있습니다
日東蓄音器(일동축음기)에서 발매한 韓國音盤(한국음반) 中(중) 唯一(유일)하게 이회사 일본음반 番號體系(번호체계)로 발매된 것은 尹心悳(윤심덕)의 <死-사-의讚美(찬미)>뿐입니다
그녀의 突變(돌변)한 死亡(사망)으로 社會的(사회적)인 物議(물의)가 일어나자 火急(화급)히 발매하는 과정에서 일본음반 번호체계로 편입된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당시 발매된 레코드 盤(반)-------------------------------------에는
盤(반)kab 0920
Nitto record 2249-a 決死(결사)0 獨唱(독창) 死(사)-0讚美(찬미) 尹心悳(윤심덕)
Nitto record 2249-b 獨唱(독창) 生(생)----- 尹心悳(윤심덕)---------------------라고 표기되있습니다
그리고 그무렵 發行(발행)된 歌詞紙(가사지)---------------------------------------------에는
제비표2249-a 死-사-의 讚美(찬미) 獨唱(독창) 尹心悳(윤심덕) 伴奏(반주) 尹聖德(윤성덕)
제비표 2249-b 復活(부활)의 기쁨 獨唱(독창) 尹心悳(윤심덕) 伴奏(반주) 尹(聖德(윤성덕)
尹心悳孃(윤심덕양) 의 決死(결사)의 絶唱(절창)<死(사) 讚美(찬미)>를 最後(최후)로 부르고 蒼海(창해)에 몸을던진 朝鮮唯一(조선유일)의 soprano-소프라노- 名歌手(명가수)
古 尹心德(고 윤심덕)
大阪市(대판시) 住吉(주길) 日東蓄音器(일동축음기)株式會社(주식회사)------------------라고 表記(표기)하고 있습니다
헌데 <死-사-의 讚美(찬미)> 가사는 음반과 가사지 모두 3절로 되어있으나 1926년, 8월13일자 朝鮮日報(조선일보) 每日申報(매일신보)에는 下記(하기)와 같은 4,5절가사가 함께
收祿(수록)되있기도 합니다
이 歌詞(가사)의 出處(출처)는 아직알수 없습니다
잘살고 못되고 刹那(찰나)의 것이니훔훔한 暗礁(암초)는 가까이 오도다
이래도 일생 저래도 한世上(세상) 돈도 名譽(명예)도 내님도 다 싫다--후렴생략-
살수록 괴롭고 살수록 험하니 한각 바람은 平和(평화)의죽음 내가 世上(세상)
에 이몸을 감출 때 괴로움도 쓰림도 사라져 버린다—후렴생략—
1021—死(사)의 讚美(찬미)-b 尹心悳(윤심덕)
이기세씨는 韓國大衆演藝界(한국대중연예계)에 여러가지 業績(업적)을 남긴 결코 잊어서는 안될 演藝人(연예인)입니다
그는 開城出身(개성출신)으로 윤백남과는 동경 고등상업학교 동문입니다
일본에서 신파극의 거두 시스마문하에서 연극수업을한후 귀국 개성에서 개성좌라는 극장을짓고 唯一團(유일단)을 조직 이극단에서 연출과 레퍼토리산정, 무대장치, 분장, 선전,간판제작,
입장권인쇄등 모든일을 혼자서 꾸려나갔습니다
1916년 그는 윤백남과함께 조직한극단 예성좌에서 톨스토이의 <부활>을 상연합니다 일본의 번안극<부활>을 다시 우리말로 재번안했습니다
1913년 일본의 金色夜叉(금색야차)를 번안한 소설 長恨夢(장한몽)이 신문에 연재되 인기를끌자 1913년 유일단을 이끌고있던그는 이를 新派劇(신파극)으로 脚色(각색) 무대에 올리고
이극이 樂劇(악극)舞臺(악극무대)서 크게 流行(유행)하자 1920년 이번엔 문예단을이끌고 신극운동의 선구자역활을 하다가 이를 連鎖(연쇄)劇(연쇄극)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1925년이후 레코드제작의 開拓者(개척자)로도 活動(활동)합니다
그는 오사카-大阪(대판)의 日東일동-레코드사와 손잡고 우리민속음악과 판소리의 대가 명창인 이동백등을 취입시켰으며 1926년 윤심덕을 일본에보내<死(사)의 讚美(찬미)>를 남기게 함으로써
우리 歌謠史(가요사) 의 分岐點(분기점)을 만든 張本人(장본인)이 되기도합니다
윤심덕은 처음 이기세에게 大衆歌謠 吹入(대중가요 취입)을 勸誘(권유)받았을때는 頑剛(완강)히 거부하며 “성악을공부한사람이 유행가를 취입할수없다” 했습니다
허나 동생 윤성기의 유학비로 고민하게되고 결국 장안의 갑부 이용문의 도움을 받개되 스캔들이나자 만주 하얼빈으로 도피하고 1925년 다시귀국 극단 土月會(토월회)舞臺(토월회무대)에서나
演劇俳優(연극배우)로서의 反應(반응)은 別無神通(별무신통)했다합니다
그즈음 일본유학서 돌아온 김우진과의 무대에서며 또다시 사랑에 불타게 되나 現實(현실)은 이들의 달콤한 생활을 容恕(용서)하지 않읍니다
이에 사랑의 歷程(역정)에 고민하며 연극무대를 떠나게되고 무대를 떠난건 배우로서 큰반응을 받지못한것도 무대를 떠난 이유였을것입니다
이무렵 이기세의 여러가지 충고와 물질적인도움 즉 일본가서 레코드를 취입한다는 조건으로 일금 5백원을 받고야 맙니다
이것이 悲劇(비극)의 始發點(시발점)입니다
1926년, 7월중순 당시 이기세는 일동레코드 暑鬱支社長(지사장)즉, 京城出張所長(경성출장소장)을 맡고있었고 윤심덕의 藝道(예도)를 위한 재출발을위해 레코드취입을 알선합니다
그녀는 극작가 김우진과 현해탄에서 同伴情死(동반정사) 했고 이로인하여 온세상사람은 놀라게되고 그녀의 遺作(유작) <사의찬미>는 그녀의 犧牲(희생)을 바탕으로 無慈悲(무자비) 하게도
1930년대까지도 베스트셀러가됩니다
이레코드에 힘입어 1930년대 歌謠(가요)는 “레코드産業(산업)”으로까지 發展(발전)하게됩니다
偶然(우연)의 一致(일치)인지 몰라도 이기세는 이땅의 record 産業-레코드산업-을 繁昌(번창)케한 張本人(장본인)이 된셈입니다
허나 이는 善意(선의)로 할 수 있는얘기이고 그시기 레코드산업이라는게 한국의것이아닌 일본인들의 것이었고 그를 구슬려 죽음의 死地(사지)로 몬 것이 이기세임도 알아야합니다
이노래로 말미암아 서민들까지 논팔고 밭팔아서 이음반을 구매함으로써 일본음반사들만 배부르게 했다는점을 잊어서는 안될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이노래는 신나라레코드 에서 복각발매해 또한번 연예가에서 화재를 불러일어켰습니다
한국레코드사를 들출때마다 심심치않게 윤심덕의 짧은 인생여정이 새로운 억측과 신화로 거론되왔읍니다
현재 서울음대에 소장되있기도한 레코드<사의찬미>는 루마니아 작곡가로 수도 부쿠레슈티시의 軍樂隊長(군악대장)이던 ivanovici losif-이바노비치 작곡<다뉴브의 잔물결>導入部(도입부)
을 借用(차용)한 melody-멜로디-에 윤심덕 자신이 작사한 歌詞(가사)로된 노래입니다
노래 伴奏(반주)는 그녀의 여동생 尹聖德(윤성덕)이 맡았으며 發聲(발성)은 歌曲(가곡)을 부르는 唱法(창법)으로 rhythm-리듬-도 원래 3박자인 것을 4박자로 變形(변형)시켜
哀切(애절)한 雰圍氣(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결국 그녀의 遺作(유작)이 되어버린 歌詞亦是(가사 역시) 다분히 厭世的(염세적)인 人生無常(인생무상)을 읊조리고 있습니다
速斷(속단)하기는 어렵지만 윤심덕의 짧은삶과 藝術(예술)은 그녀의 愛人(애인)이던 金祐鎭(김우진)과의 사랑의 歷程(역정) 8년 歲月-세월-속에서 결국 解決(해결)의 場(장) 이 죽음으로
幕(막)을내려야했던 遺書(유서) 같은 노래말이었습니다
1022—死(사)의 讚美(찬미) –c
1926년, 7월 下旬(하순) 京城(경성)驛(역) 뜨거운 한여름의 무더위를 어둠이 거둬갈무렵 오사카 行(행) 汽車票(기차표)1장과 構內(구내) 入場券(입장권) 석장을산 다음
改札口(개찰구)를 빠져나가는 일행중 洋裝美人(양장미인)은 일본으로 노래를 취입하려가는 soparano-소프라노-윤심덕이었고 세사나이는 당시 日東 蓄音器(일동축음기)會社(회사)
京城出張所所長(경성출장소 소장)이며
그녀취입을 알선한 이기세< 演劇界先驅者(연극계선구자)의 한사람> 동아일보사 기자 男相一(남상일), 기자겸 극작가이며 작사가이던 이서구씨였습니다
“尹孃(윤양) 선물 안사오면 안돼요”
이서구의 웃음을 머금은 多情(다정)스러운 餞別辭(전별사)
“비싼걸 부탁할생각은없어 그저 넥타이 하나라도 좋아요”
이런 이서구의말에
“죽어도 사와야 해요?”
이렇게 윤심덕은 되물었습니다
두사람의 대화는 이것이 마지막이 되고말았습니다
떠나는 列車(열차)에 몸을실은 윤심덕에게
“吹入(취입) 잘해야돼 마이크 무서워하지말고 實力發揮(실력발휘)하란 말이야”
이서구에게 듣기도 섬뜻한 유언을 남긴 윤심덕의 말은 마치 못듣기라도 한듯 움직이는 열차를 따라가며 마지막부탁을 잊지않는 이기셰였습니다
자기가 지금 한사람의여자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건 전혀 눈치채지못한 人間(인간)의 無能(무능)함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마이크를 무서워하지말라고 강조한 이기세의 격려의말은 의미심장한 것이었습니다
그시기 1925년도까지 레코드취입방식은 吐手(토수)에다 소리를 불어넣어 음의파장을 기록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카본 마이크로폰이 만들어지면서 소리의 증폭작용과 보다 양질의소리를 녹음할수있었읍나다
소위 “電氣吹入(전기취입)”이라는 문구가 大書特筆(대서특필) 되던때였습니다
일본에서 이방법이 도입된 것이 1925년에서 26년사이였습니다
1926년 8월5일자 東亞日報(동아일보)를 들고 요란스럽게 이기세사무실로 뛰어든 남상일기자는 놀라는 이기세에게 이신문 社會面記事(사회면기사)를 펼쳐보였습니다
<玄海灘激浪中(현해탄 격랑중)에 靑春男女 情死(청춘남녀 정사)>---
라는 特號記事(특호기사)가 눈길을 끌게했습니다
“극작가와음악가가 한떨기꽃이되야 世上是非(세상시비) 버려두고 끝없는 물나라로”
“尹孃(윤양) 은 音樂家(음악가) 金氏(김씨)는 劇作家(극작가). 백만장자 김씨의 最近 來歷(내력) 尹心悳(윤심덕)의 來歷(내력)”----이라는 문구와함께 두사람의 사진도 실려있었습니다
또한줄 中間題目(중간제목)으로”예술에 공감되야 8년전 사랑의싹 情死(정사)에이른 兩人(양인)의 관계”라 씌여있고 그난에 자세한 기사가 실려있습니다
“나의 0今(0금) 의 생활은 전부가 非人間的 思想(비인간적사상)을 直言(직언)한 便紙(편지)”라는 中間題目(중간제목)등 그야말로 特種記事(특종기사)의 眞面目(진면목)을 보여주는
기사였습니다
記事(기사)끝부분을 보면 반생을찬미하는 尹孃(윤양) 의 蓄音歌盤(축음가반)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肉身(육신)은 어디메로 외로운 淸歌妙曲(청가묘곡) “이라는 記事(기사)란에는 그녀가 취입해놓은 곡목소개가 있습니다
1024—死(사)의 讚美(찬미)—d
聲樂家(성악가)로 유명한 윤심덕양이 한번 저승의길을 떠났으며 그의 姿態(자태)를 다시는 演壇上(연단상)에서 보일수없으며 청중으로 迷惑(미혹)케하던 그녀의 音聲(음성)을
들을 수가 없으되 그녀는 일찍이 일본축음기 회사의 초청을받아<어여쁜 색시>< 메기의추억><나와너><아 그것이 사람인가><어머니가 부르신다><망향가>
<방끗웃는 月季花(월계화)>등 여러가지 노래를 레코드에
불어넣었으며 이번 죽음의길을 밟으려 일본에 갔을떄도 십여종을 불어넣었다는데 아직 세상에 나타나지않은 그레코드중에는 과연 무슨유언이 나타있을련지? 윤심덕은 다시 볼수없으되
그녀의 남겨논 목소리는 영구히 세상에 돌아다닐 것이다
헌데 이곡들은 1926년, 10월18일 每日申報(매일신보) 日東(일동)레코드 廣告(광고)--------------------------------------------------를 보면
尹心悳孃(윤심덕양) 別世(별세) 名曲集(별세명곡집) 賣出(매출)
日(일) 東(동) 蓄音器(축음기)會社(회사) 專屬(전속)聲樂家(성악가)요 조선에 다만 하나밖에없는 소ㅡ라노의 名歌手(명가수) 故(고) 尹心悳(윤심덕) 孃(양)은 苦海(고해)의00함을 悲觀(비관)하고
ㅇ세의 最後(최후)의 선물로 자기가 平素(평소)즐겨하든 得意(득의)의 명곡 二十種(20종)을 제비標(표) 레코드에 吹入(취입)하곺 지난 8월사잉 미명에 자기의 愛人(애인)과같아 大海(대해)에
몸을을던져 永世(영세)에 돌이오지 못한길을 떠났습니다
0사는 저번에 그중 最終(최종)으로 吹入(취입)한<死-사-의讚美(찬미)>를 臨時(임시)로 발매하야 거의 全國的(전국적)으로 熱狂的(열광적)인 歡迎(환영)을받고 이번에는 그의작품 전부
十三 枚(13매) 를一(일)回(회)에 한하여 江湖(강호) 레코드판에 期待(기대)에 應(응)하고자 합니다
들어십시요 비록 平凡(평범)한 曲調(곡조)에라도 句節(구절)마다 흐르는 눈물의 소리를
<尹心悳(윤심덕)寫眞(사진)>
思友 (사우) 上(상)
더늅강 下(하)----------------------------------------------------------------------라고 廣告(광고)하며 發賣(발매)하고 있습니다
이광고 실린곡은 <파우스트노엘>< 푸른갈닐라><산타크로스><산타루치아><옛꿈><기러기><空中有聲(공중유성)><김치깍두기><紫 悲(자비) 하신 예수><平安(평안)이 쉬나><꾀꼬리>
<언제돌아오나><떼아부르?><追憶(추억)><꽃과벌><봄나비><자라메라>,어여쁜색시><나를 부르신다><빼떠나간다><나는곱지><시드른방초>-----등입니다
헌데 상기곡중<어여쁜각시> <방긋웃는 월계꽃><메기의추억>등이 이미 1926년, 2월6일 매일신보광고에
제비표 日 東(일동)레코드 第二回(제2회) 賣出目錄(매출목록)
洋曲獨唱-양곡독창- 어여쁜 각시 上(상) 尹心德(윤심덕) 伴奏(반주) 尹聖德(윤성덕)
방끗웃은 月桂(월계)꽃 下(하)-------------------------------------------라 실려있는바 吹入時期(취입시기)에 混亂惹起(혼란야기)입니다
2월6일은 윤심덕이 상기곡들을 취입전이기 때문입니다
<메기의 追憶(추억)>도 <사랑스런 클레멘타인> 과 함께 같은날 발매기록이 있는바 이도 알수없는 기록입니다
이곡들은 7월하순 일본으로 취입하려갔을때 때 취입한 10여곡에 포힘된 곡들입니다
8월1일 취입예정에 없던<死(사의)讚美(찬미)>를 취입 이곡이 몇일후 현해탄정사를 예언이라도 한듯하여 온세상을 들끓게해 일본 음반계의 배만불려주는 결과만낳게 합니다
1926년, 7월 죽음을 결심한 윤심덕은 김우진을 먼저 동경으로 떠나보냅니다
일동레코드사의 노래취입을위해 윤심덕은 7월하순 대판에있는 강서여관에 묵으면서 3일동안에걸쳐 예정했던 노래의 취입을 모두마칩니다
그리고 예정에없던<사의찬미>녹음을 요구해 성사시킨후 그녀의 취입곡의 피아노반주를 해준 동생윤성덕을 유학보내기위해 요코하마로 가서 동생을 미국행배에 승선시킵니다
윤심덕이 김우진과함께 시모노세키에서 관부연락선 덕수환을탄 것은 8월3일밤 이었습니다
8월4일 오전4시경 1등선실의 방문이 열려있는 것을 발견한 객실보이가 무심코 선실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고 선실이 텅비어있는걸 확인 황급하게 선장에게보고
선장은 航海士(항해사) 와함께 갑판등을 수색, 살피던중 이들의 2통의유서를 발견합니다
이는 객실보이에게 남긴것이었고”—우리소지품을 서울가족에게 보내달라---“는 간단한 전언이 었습니다
다른 한통은 그의동생 김익진에게 보내는 유서였고”여자의 사랑앞에 만사가 사라졌다 자녀교육만은 네가책임져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두남녀의 시체라도 찾아보려고 대마도부근을 몇번 선회해보았으나 수포였고 선장은 곧바로 부산항에 타전했습니다
온세상이 이들의 정사사건으로 시끄러울 때 서울에있는 일동레코드 경성지점장인 이기세앞으로 윤심덕의 유작레코드가 도착합니다
윤심덕의<사의찬미>를 들어본 이기세는 또한번 충격으로 말문이 막혀버립니다
그는 그의 끈질긴 설득으로 윤심덕이 죽음의길로 들어선 것을 의식이나 했는지 궁금해집니다
女性解放(여성해방)과 自由戀愛(자유연애)를 몸소 실천했던 윤심덕은 완고한 舊習(家庭(구습가정)의 완고한 윤리관을 파괴한 張本人(장본인)이기도 했지만 旣成觀念(기성관념)에 항거했던
첫번째 제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유작 “사의찬미”는 30년대를 향해 이땅의 레코드문화발전에 촉진제가되었다는 시대적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는 보기좋은 글도보입니다
헌데 8월5일 釜山支局電報-부산지국전보-에 의한 東亞日報記事(동아일보기사)를 보면
앞서 <종횡무진가요사 1022 >설명한 남상일기자가 이기세에게 보여준 기사입니다------
-----------지난오후11시 시모노세키-下關(하관)-을출발 부산을 향한 관부여객선 덕수환이 오전4시경 대마도앞 바다를 통과할즈음 양장을한 여성1명과 중년신사1명이 서로껴안고
갚판에서돌연 몸을던져 자살했다
곧바로 배를정지시키고 부근을 수색했으나 그들의 행방을 찾지못했니다
선객명부에는 남자 전남목포부 김대선 여자 경성부 서대문 정3정목 윤수산 이라고 되있으나 이는 본명이아니며 남자는 김우진, 여자는 윤심덕 이었다------- 라고 되있습니다
1025—死-사-讚美(찬미)-e
1926년, 8월5일 當時(당시) 夕刊(석간)이었던 東亞日報(동아일보)는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釜關連絡船(부관연락선)에서 尹心德 (윤심덕)과 金祐鎭(김우진)이 동반 投身自殺(투신자살)
했다는 消息(소식)을 特種(특종)으로 내보냈습니다
--玄海灘(현해탄)(의)激浪(격랑)속에 靑春男女(청춘남녀) 情死(정사)—라는 제목의 記事(기사)였습니다
尹心德(윤심덕)은 朝鮮最初(조선최초)의 soprano-소프라노-로 거의1世代(세대) 女性留學派(여성유학파), 특히 音樂界(음악계) 에서는 거의최초의 一世代-1세대- 留學派(유학파)
할수있는 女性(여성)이었습니다
波瀾萬丈(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녀는 그時期 流行(시기유행)이던 新女性(신여성)으로서 西歐(서구)의 潮流(조류)이던 自由戀愛論者(자유연애론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世間(세간)에
많이 오르내리는 有名(유명)한 人物(인물)일수밖예 없었습니다
그녀와함게 投身(투신)한 김우진은 와세다영문과에 다니던 유학생으로 목포갑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家門(가문)을 이어 집안을 관리할 생각은 않고 연극에 바진 演出家(연출가)였는데 이미 결혼까지한 有婦男(유부남) 이었습니다
이렇게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文化(문화) elite-엘리트-인 두사람이 玄海灘(현해탄)에서 同伴自殺(동반자자살)을 한 사건은 우리문화사 100년을 통하여 이보다 더큰 scandal-스캔들-은
없을정도로 衝擊的(충격적)인 것일수밖예 없었습니다
그시기 家父長的(가부장적) 儒敎哲學-유교철학이 朝鮮(조선)을 억누르고 있어서 그러한 事態(사태)를 너거러히 받아드릴 餘裕(여유)가없던 時代(시대)여서 더욱그렇습니다
當時(당시) 日本(일본)에는 아리시마 다케오라는 小說家(소설가)가 만들어낸 情死風潮(정사풍조) 만연했습니다
그이전부터 일본 知識人(지식인)사이에서는 “情死(정사”)가 중요한 文化cord-문화코드- 하나로 浮刻(부각)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情死(정사)”는 또다른 近代日本(근대일본)의 風景(풍경)이었습니다
父母(부모)가 골라주는대로 선을보고 結婚-결혼-하는대신 靑春男女(청춘남녀)가 자기들기리 알아서 自由戀愛(자유연애)를 하기시작 했습니다
당연히 예상되었듯이 父母(부모)들이 子息(자식)들의 選擇(선택)을 곱게 받아드릴리 없었습니다
자신들은 그렇게 결혼하지 않았고 부모들이 시키는대로 사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줄 알고 살아왔으니깐요
그러자 과도기적 부작용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 결혼을 할수없는 戀人(연인)들이 同伴自殺(동반자살)을 하는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걸<情死(정사)>라고 불렀습니다
이 風潮(풍조)에 불을 지른 것이 바로 아리시마 다케오였습니다
그自身(자신)이 記者(기자)이자 有夫女(유부녀)인 여자랑 이룰수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다가 同伴自殺(동반자살)해 버린것입니다
당시는 情死(정사)는 romanticism-로맨티시즘-의 極致(극치) 였습니다
젊은世代(세대)들은 이 새롭고 刺戟的(자극적)인 戀愛傾向(연애경향)에 熱狂的反應(열광적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文化的雰圍氣(문화적분위기)에서만 서른도안된 植民地朝鮮(식민지조선)의 藝術 elite-예술 엘리트- 두사람의 情死事件(정사사건)에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눈에선합니다
실제로 식민지조선은 물론 일본에서도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때도 자살은 그렇게 드문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신문을보면 明月館 妓生-명월관기생-이 우물에 바져죽었다는 기사가 심심치않게 登場(등장)했으니 왠만한 自殺news-자살뉴스-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왠만한 事件事故(사건사고) 눈하나 깜짝하지 않을만큼 無感覺(무감각)해진 것을 생각하면 되겠기에 씁쓰레합니다
그런데 윤심덕과 김우진의 自殺事件(자살사건)은 보기에 따라서는 사안이 완전히 다를수도 있습니다
가난한 植民地(식민지)朝鮮(식민지조선)에서 사람들이 어쩔수없이 선망하는 elite-엘리트-일수밖에없는 男女(남녀)가 同伴自殺(동반자살)을 했는데 한명은 有婦男(유부남)이고
또한명은 自由戀愛論者(자유연애론자) 였습니다
거기다가 두사람은 音樂(음악)과 演劇(연극)分野(분야)에서 囑望(촉망)받는 代表走者(대표주자)
이런 부러운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이 同伴自殺 特報(동반자살 특보)가 아직까지 연약하기 이를데업었던 植民地朝鮮(식민지조선)의 文化界(문화계)에 던진 波紋(파문)은 말할 수 없이
클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事件(사건)은 그것으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026—死(사)의 讚美(찬미)--f
죽음자체만 으로도 장안의 술집 按酒(안주)로 수없이 膾炙(회자)될판인데 그로부터 약보름뒤에 윤심덕이 죽기전에 취입한 音盤(음반)이 世上(세상)에 나타났습니다
音盤題目(음반제목)은 <死義-사-의)讚美(찬미)>!! dramatic-드라마틱-해도 너무 dramatic-드라마틱- 하지않습니까??
마치 누군가가 音盤弘報(음반홍보)를 위하여 同伴自殺(동반자살)을 企劃(기획)한것처럼-------!!!
이는결국 自殺(자살)을 念頭(염두)에둔 윤심덕이 죽음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른뒤에 자살을 實行(실행)에 옮겼으며 “그녀가 죽자마자 음반이 나왔음”을 意味(의미)합니다
마치 짜맞춘것처럼 完璧(완벽)한 scenario-시나리오-입니다
이대목에서 韓半島(한반도)特有(특유)의 묻지마 shopping쇼핑-의 狂亂(광란)이 시작됩니다
尹心悳(윤심덕)이 죽기전남긴<死-사의 讚美(찬미)>를 안사고는 못배기는것입니다
도대체 무슨노래인지 궁금해서 어떻게 안살수가 있겠는는가? 허나 留聲機板(유성기판) 만사면 뭐하나? 그걸틀 留聲機(유성기)가 있어야지??
音盤(음반)이란 물건은 1907년경 國內紹介(국내소개)되었으나 庶民(서민)들은 접할수없었습니다
소프트웨어인 音盤(음반)도 그렇지만 하드웨어인 留聲機(유성기)는 어지간한 집에서는 엄두를내기 힘든가격이었습니다
그러니 유성기, 음반은 아주 富有(부유)한 일본인들, 일본에 나라를 팔어먹고 빌붙어살던 親日派(친일파)들 그리고 妓生(기생)들 에게서나 찾아볼수있는 高價品(고가품)이었습니다
헌데 <사의찬미>의에얽힌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過大包藏(과대포장)되어 나돌면서 너도나도 논밭팔아서 사고자애썼고 돈깨나있는 사람들은 미친듯이 사들였습니다
식민지조선땅에 留聲機狂風(유성기광풍)이 일었고 留聲機(유성기)收入社(수입사)는 연일” 留聲機(유성기) 一時品切(일시품절)” 안내문을 붙여놓기 바빴습니다
善意(선의)로 解釋(해석)하면 “그들의 동반자살이 植民地朝鮮(식민지조선)땅에 “音盤産業(음반산업)”이라는 새로운형태의 市場(시장)을열었다” 할수있으나 結局(결국)은 그 音盤産業(음반산업)의
主人(주인)은 日本人(일본인)들이고 結局(결국)은 그들의 배만불려준 셈이다 할수있습니다
이곡의 melody-멜로디-는 ivanovici-이바노비치-의 waltz-왈츠-曲(곡<)donau wellen-도나우강의 잔물결-> 일부를 차용했음은 이미 설명드렸는바 한국에서<死-사-의)讚美(찬미)>라는
elegy-엘레지-에 사용되었으나 西洋(서양)에서 正反對(정반대)로 <anniversary song-기념의노래->로 불려져 興味(흥미)롭습니다
世界映畵史(세계영화사) 의 첫번째 有聲映畵(유성영화)인< jazz singer-재즈싱어->서 주연을 맡은 當時(당시) 2류 배우였던 al jolson-알존슨이-이영화의 대힛트로 유명해지자
그의 一代記(일대기)를 그린 영화<jolson story-졸슨스토리>가 제작되었을 때 1946년경 알졸슨자신이 saul chaplin-소울 채플린-과함께 작사,
작곡한 主題歌(주제가)” anniversary song-기념의노래-“를 발표하는바 原曲(원곡)은 donau wellen 입니다 결국이곡을 편곡해서 불렀습니다
영화속 졸슨 父母(부모)의 結婚記念日(결혼기념일) 場面(장면)에서 사용돼 好評(호평)을 받았고 졸슨의 레코드는 밀리언셀러가 되었습니다
래리 스파크가 졸슨으로 분장한 이영화는 1947년공개 되었는데 속편도 제작되< 졸슨 다시 노래하다>도 공개되었습니다
카니프란시스, bing Crosby-빙크로스비- 미치밀러 합창단 근년에는 탐존스가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노래는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가수들이 remake 하고있습니다
정씨스터즈 최양숙, 이현, 이미자씨 버전이 보입니다
廣漠(광막)한 荒野(황야)를 달리는 人生(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이래도 한世上(세상) 저래도 한世上(세상) 돈도 名譽(명예)도 다싫다
綠水靑山(녹수청산)은 변함이없건만 우리 人生(인생)은 나날이 변했다
이래도 한 世上(세상) 저래도 한 世上(세상) 돈도 名譽(명예)도 다싫다
성음레코드발매 lp음반-歌謠(가요)半世紀(반세기) 제1집-에 정씨스터즈 목소리로 실려있습니다
歌詞(가사)가 大幅改詞(대폭개사) 되있습니다
崔良叔氏(최양숙씨) version-버전-은----------------------------歌詞(가사)는 同一(동일)합니다
Daedo-record 발매 lp음반-꽃피우는 아이-side b맨밑에 <死(사)의 讚美(찬미)>가 보입니다
<잘있어요> <똑같애>의 이현씨가 부른 것은----- 亦是(역시) 歌詞(가사)는 같습니다
Oasis-record 발매 lp음반-똑같애-에 보입니다
이미자씨 버전은 여러 音盤(음반)에서 보입니다
1027--死(사)의 讚美(찬미)-g
1930년대 末(말) 어느新聞(신문)에서 또 하나의 news-뉴스-가 社會面(사회면)을 粧飾(장식)했습니다
”死(사)의 讚美(찬미)”의 主人公(주인공) 김우진과 윤심덕이 이태리에서 그들의 餘生(여생)을 즐기며 살고있다는 두사람의 生存說(생존설) 이었습니다
이들의 이름은 김수산, 윤수산 이라고 했습니다
玄海灘(현해탄)에서 情死(정사)는 假裝(가장)이었고 그들은 사랑의 보금자리를 찾아 멀리 유럽으로 逃避(도피)했다는 shocking-쇼킹-한 記事(기사)였습니다
마치 萬愚節(만우절)에 장나꾸러기가 만들어낸듯한 虛無孟浪(허무맹랑)한 이야기의 한토막 같았습니다
정말 만우절의 한토막처럼 大衆(대중)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갈 즈음 이들의 사랑의 보금자리를 직접 보고돌아온 한구사람이 있다는 浪說(낭설)이 한때 떠돌기도 했습니다
항상 素材(소재)거리에 목말라하는 映畵界(영화계)에서 이좋은 호기를 놓칠리 만무합니다
1969년경”神秘(신비)에쌓인 情死事件(정사사건)” “開化期(개화기)에 있어 새로운 思潮(사조)의 犧牲者(희생자)” ”自由戀愛(자유연애)를 謳歌(구가) 죽음을 超越(초월)한 永遠(영원)한 사랑”
등의 宣傳文句(선전문구)를 내걸고 국산영화<死(사)의 讚美(찬미)>가 제작됩니다
小說家(소설가) 趙欣坡(조흔파) 원작, 劉漢撤(유한철) 脚色(각색) 安賢哲(안현철) 監督(감독)이었습니다
女主人公(여주인공) 尹心德役(윤심덕역)에는 눈빛연기로 최고인기를 누리던 文姬(문희)씨가 casting-케스팅- 되었고 상대역엔 新星一(신성일)씨가 출연했읍니다
이영화에서 여주인공 윤신덕은 노래 6곡을 부르는데 lip sync-립싱크-로 숙명여자대학 재직중의 soprano소프라노- 黃聖子(황성자)씨가 불렀습니다
映畵全篇(영화전편) 音樂擔當(음악담당)은 <빨간마후라><푸른언덕><꽃중의꽃>의 創作者(창작자)황문평씨가 담담했습니다
男子役(남자역) 이부르는 노래는 韓 相 一(한상일)씨가 불렀습니다
6곡중의 한곡인<바다가 멀댜해도>는 황문평작시 작곡으로 황성자씨가 불렀습니다
바다가 멀다해도 어찌 우리사이 굳은사랑 막으리요 굳게맺은 사랑의 言約(언약)
봄바람에 싹이트고 빗소리에 흐느끼며 잎지는 가을에 몸부림쳐도 어둠에잠긴
끝없는 바다 내사랑 간직한 마음인양 그이름 부르며 애태워 부르며 希望(희망)
찬 새벽길을 기다려 봅니다
바다가 깊다해도 어찌 우리사이 그누가 막으리요 깊게삭인 사랑의 盟誓(맹세)
비바람에 꽃이지고 가을바람 잎이지며 눈보라 朔風(삭풍)에 몸부림쳐도 水平線(수평선)
너머 끝없는 바다 그이름 부르며 애태워 부르며 追憶(추억)의 黃昏(황혼)길을 다시 걸어봅니다
主人公(주인공) 尹心悳(윤심덕)니 동경음악학교 卒業音樂會(졸업음악회) 場面(장면)에서 sopano-소프라노-황성자씨가 립싱크로 부르는 신을 문희씨가 연기했습니다
이러한 촬영수법을 playback-플레이빽-이라 합니다
1991년 또한번 <死-사- 의讚美(찬미)>가 映畵化(영화화)됩니다
이번엔 김호선감독 이 메카폰을잡고 임유순 脚本(각본), 윤심덕역에 장미희씨 김우진역에 夭折俳優(요절배우) 임성민씨 홍난파역에 이경영씨 동생 윤성덕역에 김혜리씨 홍해성역에 조민기씨
김우진 부친역에 元老俳優(원로배우) 강계식씨 그時期(시기) 名物(명물) 辯士(변사)役(역)에 주호성씨----등등이 熱演(열연)했습니다
비교적 興行(흥행)에成功(성공)했고 “時代的考證(시대적고증)에 많은 노력을 한 痕跡(흔적)이 보인다”는 好評(호평)을받았습니다
황문평씨가 담당했던 음악은 신병하씨가 담당했읍니다
이소재를 放送界(방송계)에서도 觀心(관심)을 가지는건 너무도 當然(당연)한일
Tv drama-티브이 드라마-로 “사의찬미”가 방영된건 2018년 11월27일부터 12월4일까지 sbs-tv 에서였습니다
요즘 演技派 俳優(연기파배우)로 有名稅(유명세)가 높아진 신혜선이 윤심덕을 이종석이 김우진 역을 맡았읍니다
<Romance-로맨스 短幕劇(단막극)>이란 드라마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1028—梧桐(오동)나무-a—강석연
梧桐(오동)나무 열두대속에 神仙仙女-신선선녀-가 下降(하강)을 하네
에라 이것이 離別(이별)이란다 에라 이것이 설움이라오
山神靈(산신령) 까마귀는 까욱까욱하는데 정든님 病患(병환)은 점점
깊어가네 에라 이것이 눈물이란다 에라 이것이 설움이라오
紅桃白桃-홍도백도- 우거진곳에 處女總角-처녀총각-이 넘나드네
에라 이것이 사랑이란다 에라 이것이 서러움 이라오
어서가자 울지를 마라 白頭山(백두산)허리에 해 저물어가네
에라 이것이 離別(이별)이란다 에라 이것이 설움이라오
錦繡江山(금수강산)은 다 어데가고요 荒漠(황막)한 廣野(광야)
가 왠일인가 에라 이것이怨恨(원한)이란다 에라 이것이 설움이라오
1931년 正月新譜(정월신보)로 Columbia-record 발매 sp음반-이규송사 강윤석편곡 강석연노래로 실려있습니다
他面(타면) 이규송사 강윤석편곡 강석연<放浪歌(방랑가)>가 함께 실려있습니다
1931년, 1월17일 東亞日報(동아일보) Columbia-record 廣告(광고)-------------------------------------에는
流行小曲(유행소곡) 梧桐(오동)나무 一枚(1매) 姜石鳶(강석연)
放浪歌(방랑가)------------------------------라고 거의 紹介(소개)水準(수준)의 광고를 하고있습니다
허나 이곡은 크게 流行(유행)해 여러가수의 音盤發賣(음반발매)로 이어집니다
강석연발표후 조금후 1931년 victor-record 서 이애리수씨가 발표합니다
그有名(유명)한 <江南(강남)제비><放浪歌(방랑가)>보다 번호가<49096> 1번빨리 발매했습니다
그무렵 victor-record 서 發行(발행)한 歌詞紙(가사지)------------------------------에는
V49095-a 流行小曲(유행소곡) café-카페-의노래 獨唱(독창) 李愛利秀(이애리수수) 伴奏(반주) 빅터 管絃樂團(관현악단)
V4905-b 流行歌(유행가) 梧桐(오동)나무 獨唱(독창) 李愛 利秀(이애리수) 伴奏(반주) 빅터 管絃樂團(관현악단)------------------------------라고 표기하고있습니다
그리고 victor-record 發行(발행) 每月新譜紙(매월신보지)??
總目錄(총목록) 1935년, 2월
유행가 café카페-의노래 이애리수 管絃樂團(관현악단)
梧桐(오동)나무-----------------------------------------------------라 소개 하고있습니다
1932년도 에는 Polydor-record 에서는 金雲 仙(김운선)이 伽倻琴竝唱(가야금병창)으로 이곡을 吹入發賣(취입발매)합니다
1933년, 3월21일 東亞日報(동아일보) polydor-record 폴리돌레코드 廣告(광고)----------------------에는
流行歌 傑作集(유행가 걸작집)
二八歌(이팔가) 梧桐(오동)나무 金雲仙(김운선)
아리랑 伽倻琴竝唱(가야금병창)------------------------라고 廣告(광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33년 polydor-record 發行(발행) 新譜紙(신보지), 1934년, 8월, 1934년, 9월 1934년, 10월 1935년,7월 1935년 8월 新譜(紙(신보지)-------------------------에는
朝鮮(조선)盤(반) 九月新譜(9월신보)
0發賣(발매)總 目錄(총목록)
一 九0七(일구0칠) 二八歌(이팔가) 梧桐(오동)나무 金雲 仙(김운선) 伽倻琴竝唱(가야금병창)
아리랑----------------------------이라고 宣傳(선전) 되있읍니다
그리고!!! 이시기 발행된 歌詞紙(가사지)에는 杖鼓(장고)를 金昌善(김창선)이 擔當(담당)하고있음을 알수있니다
1029-梧桐(오동)나무-b
1933년도에는 “눈물의 女王(여왕)”칭호를 받던 全玉(전옥)이 후지다마사토 日譯(일역)으로 기리노키 <梧-오-의木(목)>이란 일본어 제목을붙여 일본 polydor-record서 발표하는
珍風景(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시기 보통 日本歌謠(일본가요)가 韓國語(한국어)로 飜案(번안)되 불리는게 流行(유행)이었는데 朝鮮(조선)노래가 日譯(일역)되 불렸으니 지금으로서도 興味(흥미)롭습니다
1935년에는taihei-record 서 강석연과 최남용이 듀엣으로 취입한 음반을 발매해 人氣(인기)의 絶頂(절정)을 보입니다
그시기 taihei-record 서發賣(발매)된 音盤(음반)-------------------을보면
盤(반)kab1202
Taihei c8175-a民謠(민요) 梧桐(오동)나무 崔南鏞(최남용), 姜石燕(강석연)
Taihei c8175-b 民謠(민요) 아리랑-------------------------------------------라고 表記(표기)되 있습니다
비록 이곡을<流行小曲(유행소곡)>이라고 곡종명을 소개하고있으나 新民謠(신민요)의 面貌(면모)를 充分(충분)히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곡은 우리 大衆歌謠(대중가요)사 “新民謠(신민요)”라는 곡종명을 달고 거의 처음으로 등장하고 1931년, 3월 columbia-record 3월발발매 “홍난파작, 신민요로로는 처음발표
노래 중앙보육학교의 이경숙, 서금영, 최명숙노래”로 紹介(소개)된 <방아찧는 색시의노래> 以前(이전)의 新民謠(신민요)로 再照明(재조명) 되어야 합니다
당시 이서구는 “오동나무”를 民謠(민요)로 紹介(소개)하면서 이곡이 배구자의 무용이 발표된후로 크게유행하였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1932년, 8월호 <三千里(삼천리)>紙(지)”조선의유행가”라는 기사에서 입니다
이노래를 再照明(재조명) 해야할 이유는 그노랫말이 1930년대중반 한창 인기를 얻었던 신민요와는 다른모습을 띠고있기때문입니다
그시기 신민요는 대체로 充足意識(충족의식)을 드러낸 것이 많았읍니다 그에반해서 이노래는 現實(현실)을 설움, 이별, 눈물이라 規定(규정)함으로써 比較的(비교적) 正確(정확)한
現實認識(현실인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4절에서 ”白頭山(백두산)허리에 해 저물어가네”라는 표현은 백두산으로 表象(표상)되는 祖國(조국)에 어두움이 깃들어 있음을 描寫(묘사) 한것으로 볼수있습니다
이와 같은 現實認識(현실인식)은 5절에서도 계속됩니다
“錦繡江山(금수강산)은 다어디가고요 荒漠(황막)한 荒野(황야)가 왠일인가”라고하여 國土국토-를喪失-상실-한 현실을 반영하고 그러한 현실을 怨恨(원한)과 설움으로 規定(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민요 초기의 모습은 이전의 민요가 지니고있던 정신적인 측면까지 계승하여 정확한 현실인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특장적입니다
이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신민요창작은 일본자본에의여 설립된 일본 음반회사에 의해 고용된 우리 가요인들이 창작했다는 한계가있고 한국에서 일본레코드 자본이 들어와 처음 판소리등
한국전통 음악을 녹음 판매하고 이어서 민요를 녹음판매했으나 1930년대중후반 그소재가 고갈이되자 음반판매가 부진해지자 일본 레코드회사는 먼저 일본서 시작된 신민요운동을 한국에도적용
한국색깔의 신민요창작을 한국 가요인들에게 의뢰 녹음하기 시작했고 그창작물의 경제적이익은 결국은 이는 일본 레코드회사 호주머니로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新民謠創作運動(신민요창작운동)은 앞서 일본서전개된 新民謠運動(신민요운동)에 의햐여 觸發(촉발)되었으리라 하는 글이 보입니다
신민요라는 말은 1930년대초 당시 <진주라천리길>의 작곡가 이면상이 민요조의 노래를 창작 레코드취입에 넘기면서 “民謠(민요)”라고 했는데 그때 동료작가들이”이것이 어찌 民謠(민요)
인가? 이노래는 이면상 자네의 創作物(창작물)이 아닌가?” 하자그러자 이면상은 새新(신)자를 첨부하여 新民謠(신민요)라고 하는 것이 어떤까??”하니
대부분 작가들이 모두 “그것이 좋겠다”하였습니다
그이후로 후일 “新民謠王國(신민요왕국)_ 되는 polydor-record 에서는 신민요장르를 곡앞에 붙이기 시작했고 다른회사들도 이것을 본따 민요조의 노래에<新民謠(신민요)>라는 장르이름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헌데polydor-record 에서는 1934년, 6월신보 김억사 이면상곡<꽃을잡고>라는곡을 신민요 첫작품으로 광고하려 했습니다
허나 이사실을안 이면상은 한사코 反對(반대)하면서 1934년 2월 okeh-record 창립1주년 기념특별호 신불출사 문호월곡 박부용의<노들강변>을 신민요의 첫작품으로 보아야 옳다했습니다
신민요는 민족음악에 바탕을두고 현대적감각에 맞게새로창작된 민요이므로 민요로서 예술적품격을 갖추어야 하기때문이었습니다
이면상의 이러한 제의에 音團(음단)에서느는 이곡을 신민요 첫작품으로 보는데 견해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1030—젊은이의 노래-강석연
젊은이의 노래는 마음의하소 흘러가는 물결에 靑春(청춘)을싣고 나루마다
반기는 사랑을 찾어 俗節(속절)없는 離別(이별)의노래 부르네
草綠(초록) 바다 물결도 곱게잠들고 燈(등)불없는 거리에 밤도깊은데
님 그리워 헤매는 애달픈 身世(신세) 젊은이의 노래도 얼어 떨린다
首陽(수양)버들 가지로 靑春(청춘)을묶고 나부끼는 마음에 믿음을실어
젊은이의 노래를 장단삼아서 어기여차 배저어 떠나간다네
1931년 Columbia-record 발매 sp음반-이서구사, 이광준곡 강석연노래로 실려있습니다
他面(타면) 碧吾(벽오)작사 姜潤錫(강윤석)作曲(작곡) 강석연 노래<浿水-패수- 哀想曲(애상곡)>이 함께 실려있습니다
<패수의애상곡>는 音盤(음반)에는 作家(작가)가 表記(표기)되있지 않으나 1931년, 11월 <정선가요집>에 작가명이 표기되있어서 이를 따랐습니다
이곡은 1930년, 11月(월)開封(개봉)한 同名映畵主題歌(동명영화주제가) 입니다
1931년, 4월23일 東亞日報(동아일보) Columbia-record 廣告(콜롬비아 광고)---------------------------에는
五月新譜(5월신보)
流行小曲(유행소곡) 젊은이의 노래 Columbia 文藝部作(문예부작) 一枚(1매) 姜石燕(강석연) 伴奏(반주) 콜롬비아 管絃樂團(관현악단)
敗數(패수)의 哀想曲(애상곡)-----------------------------------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朝鮮劇場(조선극장) 映畵部(영화부), 中央(중앙) kinema-키네마-합동 제1회작품으로 김영환은<젊은이의노래>를 제작했습니다
1930년 1월5일부터 1월11일까지<다른기록에는 11월개봉도 존재합니다> 조선극장에서 상영하였던 이작품도그간 그가 관여했던 작품과 마찬가지로 동명의 제목으로
“映畵說明(영화설명)”을 留聲機音盤(유성기음반)에 吹入(취입)했습니다
主題歌(주제가)는 映畵(영화)에서와는달리 石金星(석금성)이 吹入(취입)했습니다
그당시 發賣(발매)한 音盤(음반)에보면--------------------------------
Regal c158-a 映畵說明(영화설명) 젊은이의노래 上(상) 金永煥(김영환) 노래 石金星(석금성) 管絃樂(관현악)伴奏(관현악반주)
Regal c158-b 映畵說明(영화설명) 젊은이의 노래 下(하) 金永煥(김영환) 노래 石金星(석금성) 管絃樂伴奏(관현악반주)---------------라고 表記(표기) 되있습니다
철수와 영애는 깊이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허나 사랑에는 항상 방해꾼이 있기마련입니다
그녀의 오라비 영식은 부잣집아들 궁목에게 시집을 보내려합니다
父母(부모)조차도 영애를 설득하여 궁목에게 그녀를 주고자합니다
허나 영애의 철수에대한 사랑은 깊어만갑니다
이에 오라비 영식이 음모를 꾸밉니다
영애의 철수에대해 絶交便紙(절교편지)를 거짓으로쓰고 영애는 半信半疑(반신반의)합니다
궁목도 가만있지않습니다 하인들을 풀어서 철수의 눈을 멀게하려는 陰謀(음모)를 꾸미고 實行(실행)에 옮깁니다
이에 철수는 영애를 誤解(오해)하게됩니다
하지만 영애는 철수에게 진실로서 이음모의 전모를밝히고 눈이먼 철수의 눈이되어줍니다
석금성의 주제가는 이음반에서 두번사용됩니다
처음 김영환의 배경설명이 끝난후”---젊은이의 놰는 마음의하소 꿈길에 청춘을싣고
나루마다 반기는 사랑을찾아 속절없이 이별의 노래부르네---“
젊은이의 離別(이별)을 豫見(예견)하는듯한 가사가 全般的(전반적)인 영화의 뒷이야기를 지시해줍니다
이후 궁목의 凶計(흉계)에빠져 葛藤(갈등)을 빗고있는 장면에서 다시 “젊은이의노래”가 흐릅니다
“--草綠(초록)바다 물결도 곱게잠들고 등불없는 거리에 밤도깊은데 님그리워
헤매는 애닯은 身世(신세) 젊은이의 노래도 얼려떨린다—“
초록바다의 고요함으로 아마뒤에 있을 幸福(행복)한 結末(결말)을 豫見(예견)하는듯한 인상을줍니다
1031—芳娥打令(방아타령)—姜石燕(강석연)
돌밭에 海棠花(해당화)빨갛게 필 때 우리네 가슴도 빨갛게 탄다 이 江山(강산) 좋은江山(강산)
떠나지말자 하늘에 뜬구름 달두고간다 에헤야 좋구나 방아로구나 이 江山(강산) 좋은江山(강산)
떠나지 말자
앞내 江邊(강변) 수양버들 누가 심었나 바람불제 가루오루 서로얽힌다 같은방아 발짓하는 우리들도
강바람에 서로얽힌 두가닥 버들 에헤야 좋구나 방아로구나 이 江山(강산) 좋은江山(강산) 떠나지 말자
발짓방아 찔때마다 汽車(기차)는 우루루 눈물로 世上(세상)보낸 저늙은 내외 흰머리 쓰다듬으며 방아방아
찧는다 옛날에 사랑턴 방앗간에서 에헤라 좋구나 방아로구나
1932년 victor-record 발매 sp음반-김동환사 안기영작곡 강석연노래로 실려있습니다
1931년 11월개봉한 同名映畵(동명영화) 主題歌(주제가)입니다
1931년, 11월6일부터 10일까지 團成社(단성사)에서 映畵(영화)<방아타령>이 상영되었습니다
헌데 이곡은 1933년, 12월 總督府(총독부)의 一方的(일방적)인 主張(주장)인 治安妨害(치안방해) 라는 이유로 禁止曲-금지곡-이 됩니다
三千里(삼천리)紙(지) 1936년, 4월호< 금지된레코드 一覽表(일람표)>에 실려있습니다
李雲芳(이운방)원작에 이구영 脚色(각색)으로 金商鎭(김상진)감독이 新興(신흥)프로덕션 제1회작품으로 제작했습니다
金素英(김소영)과 金鮮英(김선영)이 이映畵(영화)로 俳優(배우) 데뷔를했습니다
音樂擔當(음악담당)은 主題歌作曲(주제가 작곡)을 하기도 한 安基永(안기영) 이 맡았습니다
이<방아타령>은 映畵(영화)主題歌(주제가)로 使用(사용)하기전 안기영이 편곡한 <芳娥打令(방아타령)>은 留聲機(유성기)音盤(유성기음반)에 그가 교수로 근무하던 이화여전학생들의
合唱(합창)으로 吹入(취입)했었읍니다
西洋音樂(서양음악)의 和聲(화성)에 맞추어 民謠(민요)를 編曲(편곡)한것입니다
이상준편곡<조선속요집>에서 그旋律(선율)을 西洋(서양)五線普(5선보) 로 採普(채보)한 것 차원을 뛰어넘는 進化(진화)를 한것입니다
그리하여 콜롬비아레코드에서 <조선민요제1집>이라는 타이틀로 발매되었습니다
허나 이를두고 당시 많은 비난에 접하게됩니다
“名色(명색)이 최고학벌의 女學生(여학생)들을 券番妓生(권번기생)들이나 하는는 노래를 시켰다”는 거였읍니다
영화에서는 영화를위해 노래가사를 새로쓰고 旋律(선율)을 새로 編曲(편곡)했습니다
평화로운 옥정리라는 조그만마을에 결혼을앞둔 芳釗(방쇠)와 姮娥(항아)는 방앗간에서 사랑을 속삭입니다
暴政(폭정)에의해서 불평한 무리들과 인민, 官兵(관병)이 衝突(충돌)하여 평화롭던 마을은 폐허가되고 두사람은 헤어지게됩니다
방쇠는 항아와 헤어지고 자산의 사랑을 잃은 것을 소위 名門世家(명문세가)라는 사람으로 설정하고 원수를 갚기위해 떠납니다
그는 憂國之士(우국지사)를 가장하고 활동하다 유형되어 30년세월이흘러 청춘이 가버렸습니다
후일 옛고향을찾은 방쇠는 항아를 다시만납니다
이영화도victor-record 서 映畵說明(영화설명) record化-레코드화-되어서 發賣(발매)됩니다
그시기 發賣(발매)된 victor-record 音盤(음반)을------------------------------------------------보면
盤(반)kab 1299
Victor 49099-a 映畵說明(영화설명) 芳娥 打令(방아타령) 上(상) 說明(설명) 徐相弼(서상필) 管絃樂(관현악)伴奏(반주)
Victor 49099-b------------------------------------------------------------------------------------管絃樂(관현악)伴奏(반주)
라고 表記(표기) 되있습니다
그리고 victor-record 發行(발행) 歌詞紙(가사지)---------------------------------------------------에는
V49099-a 映畵說明(영화설명) 芳娥打令(방아타령) 上(상) 新興(신흥)프로덕션 特作映畵(특작영화) 說明(설명) 徐相弼(서상필) 獨唱(독창) 姜石燕(강석연) 管絃樂(관현악)伴奏(반주)
V49099-b 映畵說明(영화설명)--------------------------------------------------------------------------------------------------------------------------------------------------------------------라 紹介(소개)해
강석연을 獨唱(독창)이라 表記(표기)하고있어서 異彩(이채)롭습니다
上記言及(상기언급) <映畵說明(영화설명)> 레코드서 主題歌(주제가)가 흐르는 場面(장면)을 잠깐 소개드립니다
아!아! 손목을 마주잡고 같이울고 같이웃던 동지들도 가을의 落葉(낙엽)같이 無人孤島(무인고도)에 외로운 魂靈(혼령)이 되었으니
사십여제 긴세월에 병든몸이 무슨면목으로 故鄕(고향)에 돌아가나
병든몸 아픈다리 힘없이끌고서 故鄕山川(고향산천) 찾아드니 금풍은 소슬하고 가을은 깊었는데
들려오는 노래소리 丈夫(장부)의 鐵石肝腸(철석간장) 이 하염없이 녹아든다
노래----돌밖에 해당화 빨갛게필 때 우리네 가슴도 빨갛게핀다----후략—
1032—荒城(황성)의 跡(적) –a이애리수
이 大衆歌謠(대중가요)는 아직까지도 創作(창작)된 時期(시기) 첫번째 불린 舞臺(무대) 創作者(창작자)가 歌謠創作時(가요창작시) 속했던 樂團(악단)등에 대한
明快(명쾌)한 正答(정답)이 없습니다
荒城(황성)옛터에 밤이되니 月色(월색)만 고요해 廢墟(폐허)의 설운 懷抱(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이뤄 구슬픈 벌레소래에 말없이 눈물져요
城(성)은 허물어저 빈터인데 芳草(방초)만 푸르러 世上(세상)의 虛無(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아 가없다 이내몸은 그무엇 찾으려 덧없는 꿈의거리를 헤매어있노라
나는 가리라 끌이없이 이발길 닫는곳 산을넘고 물을건너 定處(정처)가 없이도 아~아 한없는 이
心思(사) (심사)를 가슴속깊이 품고 이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있거라
1932년 4월 victor-record 발매 sp음반-왕평사 전수린곡 이애리수노래로 실려있습니다
他面(타면) 왕평사 전수린작곡 이애리수노래<異國(이국)의 하늘>이 함께 실려있습니다
이무렵 發行(발행)된 victor-record 歌詞紙(가사지)--------------------------------------에는
V49125-a 抒情小曲(서정소곡) 荒城(황성)의 跡(적) 빅타 文藝部(문예부)編曲(편곡) 獨唱(독창) 李愛利秀(이애리수) 管絃樂團(관현악단) 伴奏(반주)
V49125-b 抒情小曲(서정소곡) 異國(이국)의 하늘 빅터 文藝部(문예부)編曲(편곡) 獨唱(독창) 李愛利秀(이애리수) 管絃樂團(관현악단) 伴奏(반주)-----라고 紹介(소개)하고있고
곡 創作者(창작자)를 文藝部(문예부)로 表記(표기)하고 있어서 混亂(혼란)스럽읍니다
이곡이 音盤(음반)으로 처음발매된 것이 1932년이지만 이미 그전 창작되어서 幕間舞臺(막간무대)등 공연을통하여 널리불려지고 있었다는 주장이있으나 이를 立證(입증)할만한
證據(증거)가 확인되지 못햐고있습니다
허나 物證(물증)은 曲(곡)을 創作(창작)한 전수린씨 回告(회고)입니다
이를 믿지못하고 認定(인정)하지않는다면 證據(증거)를 찾을수없습니다
이곡이 발표되고 얼마후 尹白丹(윤백단)의 노래가 발매됩니다
1934년, 9월 1935년 10월 taihei-record 태평레코드發賣(발매) 新譜紙(신보지)에는-----------------------------
<十月(십월)朝鮮新譜(조선신보>) 0發賣(발매)
八0一五(8015) 新民謠(신민요) 秋夜月(추야월) 尹白丹(단) (윤백단) 伴奏(반주) 太平(태평) 管絃樂團(관현악단)
荒城(황성)의 跡(적)-------------------------------------------------------------------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33년에는 1대 “눈물의 女王(여왕)” 으로불리는 이경설의노래가<古城(고성)의밤>이란 제목으로 발표됩니다
1933년, 3월17일 東亞日報(동아일보) polydor-record- 폴리돌레코드- 廣告(광고)------------------에는
三月(삼월)新譜(신보)
流行小曲(유행소곡) 古城(고성)의밤 李景雪(이경설)
옛故鄕(고향)터 李景 雪(이경설)
天才的(천재적) 0感的(0감적) 美音(미음)을가진 이경설이 流行小曲(유행소곡)<고성의밤>의 特性(특성)을 가장 잘나타내었다--------라 宣傳(선전) 하고 있습니다
1933년 polydor-record 發行(발행) 新譜紙(신보지)------------------------------------에는
朝鮮(조선)盤(반) 九月新譜(9월신보)
一 九0五二(19052) 古城(고성)의밤 이경설 반주 포리도루 관현악단
옛故鄕(고향)터 이경설 伴奏(반주) 포리도루mandolin-만들린- 俱樂部(구락부)-------------------------------------------------라고 紹介(소개) 곡을 mandolin-만돌린- 樂器(악기)로 伴奏(반주)했음
을 알리고 있습니다
1033—荒城(황성)의 跡(적)-b
이경설이 이애리수가<荒城(황성)의 跡(적)>으로 原唱(원창)한 노래를 다음해<古城(고성)의밤>으로 改題(개제)해서 불렀으나 1934년 6월에 總督府(총독부)에 의하여 말도안되는
治安妨害(치안방해)를 理由(이유)로 禁止曲(금지곡) 處分(처분)을 받습니다
그리고 音盤(음반)을 押守(압수)당합니다
이애리수가 吹入(취입)한 音盤(음반)은 1938년 빅터kj1169 로 再發賣(재발매) 되었습니다
1938년 發賣(발매)된 音盤(음반)--------------------------------------------------에는
盤(반) kab 0620
Victor kj1169-a 유행가 고요한장안 李賢卿(이현경)작사 全壽麟(전수린)작곡 이애리수 伴奏(반주) 日本(일본)빅터管絃樂團(관현악단)
Victor kj1169-b 流行歌(유행가) 荒城(황성)의 跡(적) 王平(왕평)작시 全壽麟(전수린)작곡 이애리수 伴奏(반주) 일본빅터 管絃樂團(관현악단)---------------라고 表記(표기) 이음반에서 1932년
文藝部(문예부)로 되있던 創作(창작)진을 作詞(작사)作曲(작곡)을 表記(표기)하고 있습니다
전수린이 창작한 가락은 4분의 3박자이며 32小節(소절)로 구성된 歌謠形式(가요형식)을 갖추고있고 創作歌謠- 창작가요-로서는 처음으로 단음계 오리지널c 短調(단조)를 구사하였다는
韓國(한국)歌謠(한국가요)의 草創期的(초창기적) 큰意味(의미)를 부여할수있읍니다
<荒城(황성)의 跡(적)>을 創作(창작)한 전수린의 回告(회고)에의하면 그의나이 22살 1929년 한국나이로 치면 1930년 이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처음 무용가 조택원소개로 동반예술단에 입단했으나 1924년 창단된 이예술단은 4년후 해산하고 1930년경 지두환이 단장인 巡廻劇團(순회극단)劇硏舍(극연사)가 開城公演(개성공연)을
마치던 어느닐밤 전수린과 왕평은 달빛도 처량한 滿月臺(만월대)에서 高麗社稷 –고려사직- 500년의 興亡盛衰(흥망성쇠)를 새삼느끼는듯 했습니다
이들一行(일행)은 만주일대에서 신의주, 평양까지 공연을 마치고 경기도 개성을거쳐 황해도를 바라보는 溫泉地(온천지) 배천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劇硏舍(극연사)는 當時(당시) 演藝團體(연예단체)中(중)에서도 一流(일류)멤버를 團員(단원)으로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舞臺監督(무대감독)겸 作詞家(작사가) 인 왕평을 비롯하여 作曲家(작곡가)겸 바이올린奏者(주자) 전수린 작곡가로서 김교성, 俳優(배우)로는 훗날의 作曲家(작곡가) 전기현 俳優(배우)겸
歌手(가수) 이애리수 등이 중요 構成員(구성원)이었습니다
개성에서 공연을 마친 왕평과 전수린 두사람은 高麗(고려)의 榮華(영화)를 되새기며 달빛쏟아지는 滿月臺(만월대) 옛터를 찾아갔습니다
개성은 옛날에는 송도 라고 불렀던 高麗(고려)의 도읍이며 전수린에게느는 故鄕(고향)이기도 했습니다달빛에 환히빛나는 王城(왕성)의옛터는 풀이 茂盛(무성)하게 자라서 廢墟(폐허)가
되있었고 벌레소리만 쓸쓸하게 울려퍼질뿐 이었습니다
전수린은 이때 光景(광경)을”내민족이 日帝(일제)의 植民地 統治下(식민지 통치하)에서 괴로워하고있을 때 이곳에서 榮華(영화)를 누렸던 옛날을 回想(회상)하며 말없이 여관으로 돌아왔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 公演(공연)은 할수없게되고 우리는 며찰동안 굶주린 나날을 보내야했습니다
이때 이곡의 樂想(악상)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라고 述懷(술회)했습니다
비나리는 旅人宿(여인숙)에서 滿月臺(만월대)의 밤을 回想(회상)한 전수린은 바이올린을 들어 그느낌을 卽興的(즉흥적)으로 연주하고 melody-멜로디-를 가까이에 있던 五線紙(오선지)에
옮겨놓았습니다
“백산온천 어느 旅館房(여관방)애서 비를피해 쉬고있을 때 故鄕(고향)인 松島(송도)의 옛성터의 無常(무상)함이 떠올라 歷史(역사)의 虛無(허무)한 感情(감정)을 바이올린에실어
卽興(즉흥)으로 연주를해보고 곧바로 五線紙(오선지)에 melody-멜로디-를 스케치했읍니다”----라고 설명하는 글도 보입니다
이러한 감정을 전해들은 왕평은 곧바로<荒城(황성)의 跡(적)>이라는 題目(제목)으로 가사를썼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를 그해가을 그들은 團成社(단성사)에서 劇團(극단)聚星座(취성좌)의 公演舞臺(공연무대)에 섰는데---- 1927년부터 歌謠部(가요부)를두고 幕間 show-막간쇼-
形態(형태)의 舞臺公演(무대공연)을 시작한 취성좌 幕間舞臺(막간무대) 이애리수에게 부르게했습니다
헌데 어떤 연극역사 전문가는 ----“조선연극사가 발족한후에는 취성좌는 사라졌으므로 조선연극사에서 만든 노래를 취성좌에서 부를수는 없다
따라서 1930년 조선연극사에서 부르든지 1929년 취성좌에서 부르든지 해야한다
가을을 9월~11월경으로 치면 1930년 조선연극사는 이 3개월 단성사 공연을 하지못했다
1931년 이애리수가 연극시장으로 이적함으로써 조선연극사의 가을은 1930년 이때뿐이다
반면 취성좌의 9월~11월 단성사를 독점하던 시기였다 상황을 조합해볼 때 황성의적은 1929년 취성좌가을무대서 이애리수에 의하여 불려졌다는 것이 설득력이있다” 했습니다
客席(객석)에 앉아있던 觀客(관객)의 눈은 눈물로 가득찼고 興奮(흥분)한 관객은 발을 구르기도 했습니다
객석에서는 絶望的(절망적)일 정도로 애닯은 이노래에 관객은 亡國(망국)의슬픔을 뼈저리게 느꼈고 가락에 心醉(심취)되어 발을구르며 앙코를 청하며 흥분했고 극장의
臨席警官-임석경관-은 警笛(경적)을 울리며 막을내리도록 호통을쳤습니다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는 이러한 <荒城(황성)의 跡(적) >狂風(광풍)에 危機意識(위기의식)을 느꼈을것이고 民族(민족)으로서 自覺(자각)을 煽動(선동)할 우려가있다고
이노래를 禁止(금지)시켰다합니다
전수린과 왕평은 鍾路警察署(종로경찰서)에서 取調(취조)를 받고 留置場(유치장)의 차거운 마루바닥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總督府(총독부)는 또한 이노래를 부르는 朝鮮人(조선인)을 發見卽時(발견즉시) 審問(심문)하고 取調(취조)했습니다
大邱(대구)의 어떤 보통학교에서는 音樂時間(음악시간)에 이노래를 가르친 音樂敎師(음악교사)가 敎職(교직)에서쫓겨난일도 있었다합니다
그러나 이곡은 여전히 끈질지게 불렀고 이애리수는 民族(민족)의 戀人(연인)이라 불리며 조선최초의 star singer-스타가수-로서 人氣(인기)를 누렸습니다
日人(일인)들조차도 朝鮮國民(조선국민)들에겐 禁止曲處分(금지곡처분)을 내리고는 자기들은 “朝鮮(조선)의 selenade-세레나데-“라며 콧노래로 흥얼거렸다 합니다
이때부터 이애리수가 舞臺(무대)에서 이노래를 부르면 觀客(관객)도 함께 불렀고 삽시간에 全國(전국)坊坊曲曲(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습니다
1034—荒城(황성)의 跡(적)-c
이곡을 수십번 불러야했던 이애리수가 한번은 가슴에 밀려드는 亡國(망국)의설움을 선율에담아 부르면서 치밀어오르는 嗚咽(오열)을 참지못하고 3절대목엣 그만 목이메어 노래를 中斷(중단)
하고말았습니다 舞臺歌手(무대가수)로서 이것은 큰失手(실수)가 아닐수 없었읍니디
그래서 그녀는 慣例(관례)대로 觀客(관객)들에게 거듭 허리굽혀 人事(인사)하며 諒解(양해)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客席(객석)에서는 오히려 暴風(폭풍) 같은 박수가터져 나왔고 再請(재청)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연달았습니다
이에 이애리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노래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順調(순조)롭게 흐르던 선율은 어는듯 흐느끼면서 3절에와서는 또다시 노래半(반) 울음半(반) 이 되고맙니다
“나는 가리로다 이발길 닿는곳 산을넘고 물을 거너서 定處(정처)가없이도 아~괴로운 이심사를 가슴속깊이 품고 이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있거라”
노래를 부르는 singer–가수-도 노래를듣는 觀客(관객)들도 눈물을 걷잡지못하였고 떠나갈듯한 박수속에 다시 再請(재청)이 要求(요구)되었습니다
이때 紹介者(소개자)가 나와 연극의 다음 幕(막)이열리니 조용하기를 부탁하였으나 觀客(관객)들의 거듭되는 再請要求(재청요구)에 이애리수는 다시나와 노래를 부르지않으면 인되었습니다
이는 그간쌓이고 쌓였던 울분에 어느한곳에 하소연 할길없던 朝鮮民衆(조선민중)들이 “울고싶은대 뺨때려준격”으로 그야말로 이애리수씨와 관객의마음이 一心同體(일심동체)가된
현상이 아닐수없습니다
이 所聞(소문)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자 사람들은 演劇公演(연극공연)보다 이애리수의 노래를듣기위해 劇場(극장)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공연을하는 극장마다 항상 超滿員(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이때부터 <荒城(황성)의 跡(적)>은 民間(민간)에 急速度(급속도)로 유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일제 총독부 학무국은 검열계는 사람들을 悲嘆(비탄)에젖게한다는 理由(이유)로 禁止曲處分(금지곡처분)을 내리고 못부르게 彈壓(탄압)을했습니다
이노래는 또 그시기 歌謠(皇帝(가요황제)로 군림하던 南仁樹 氏(남인수씨)도 愛唱(애창)하는곡으로 有名(유명)하고 그가 大衆歌手(대중가수)의 무거운짐을 내려놓고 짧았던
삶을 마무리할 때 그의 戀人(연인)이었던 李(이) 蘭影氏(이난영씨)의
무릎위에서 이노래를 불러달라고 하며 눈을감았다해서 流行(유행)에 불을 당겼습니다
헌데 이音原(음원) 은 最初形態(최초형태)는 물론 最初(최초)로실렸던 音盤(음반)도 밝혀내지 못하고있습니다
다만 Jigu-record 발매lp음반-남인수스테레오일대작-side b 타이틀곡으로 실려있습니다
歌謠界(가요계) “八方美人(팔방미인)”으로 통하는 김용만씨도 이곡을 吹入(취입)했습니다
Sinsegy-record발매 sp음반에 이영숙씨의<江南(강남)달>과 함께 실어서 發表(발표)했습니다
이어서 10이치, lp음반으로 再收錄(재수록) 發賣(발매)했습니다
그외도 배호, 이현, 김정호, 이수미, 신카나리아, 윤복희, 이미자, 명국환씨등의 버전도 보입니다
배호씨버전은 아세아레코드발매 lp음반-배호, 강소희 힛트앨범-에 실려있고 臺詞(대사)가 삽입된 버전은 대도레코드발매 lp음반- <노래는 세월따라>제1집, 아세아레코드발매
lp음반-세월따라노래따라 1집에 聲優(성우)고은정씨 臺詞(대사)로 각각 실려있습니다
명국환씨 버전은 성음사발매 lp음반-歌謠(가요)半世紀(반세기)-에서 들을수 있습니다
Jigu-record 발매lp음반-윤복희열창에서 윤복희씨 버전은 들을수있읍니다
성음레코드발매 lp음반- 그리운노래들-에서 이수미씨 버전은 감상이 가능합니다
Jigu-record 발매 lp음반-스테레오일대작-에서 신카나리아씨 버전이 실려있습니다
Jigu-record 발매 lp음반-이미자옛노래 골든앨범-등 여러앨범서 이미자씨 음원이 들려옵니다
이현씨 버전은 jigu-record 발매 lp음반-한국가요반세기 작가동지회 창립기념- 에 실려있읍니다
김정호씨 버전은 Universal-record 발매 lp음반-김정호옛노래모음-에서 볼수있습니다
1035--荒城(황성)의 跡(적)-d
韓國大衆歌謠史(한국대중가요사) 1920년대는 여러가지 條件(조건)으로보아서 아직 朝鮮的(조선적)인 歌謠(가요)를 創作(창작)할만한 力量(역량)이 不足(부족) 주로 일본엔카를 飜案(번안)한곡이
發賣(발매)될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30년대초 “荒城(황성)의 跡(적)”이 elegy-엘레지의 大家(대가) 전수린에 의하여 創作(창작)되어 大衆(대중)의 人氣(인기)를 얻으면서 本格的(본격적)인 意味(의미)의 朝鮮的(조선적)인
大衆歌謠(대중가요)의 時代(시대)가 열리게됩니다
그런데 이가요가 人氣(인기)를 얻기전까지는 (우)리 大衆歌謠(대중가요)에대한 展望(전망)은 그리밝지 않아던것으로 보여집니다
三千里(삼천리) 紙(지) 1936년, 11월호에 의하면-----지금으로부터 6년전봄 처음으로 朝鮮流行歌(조선유행가)를여러장 日本(일본) 內地人(내지인)의 監督(감독)으로 취입하였다
그러나 실패를보게된 victor 蓄音器會社(빅터 축음기회사)에서는 그失敗(실패)의 原因(원인)이 오로지 조선말을 모르는 日本(일본) 內地人(내지인)이 吹入監督(취입감독)하였기 때문임을
理解(이해)하지못하고 朝鮮(조선)은 아직 文化程度(문화정도)가 低級(저급)하며 朝鮮(조선)말은 record 吹入-레코드취입-에 適當(적당)하지 못하다는 그릇된 速斷(속단)으로
朝鮮(조선)流行歌(조선유행가)는 다시 吹入(취입)하려고 하지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마음 끝없이 섭섭하게 하였으며 激奮(격분)케 하였던것입니다
그래서 일본빅타축음기회사사장과 여러 번 상의한결과 3년이지난 1931년이른봄에야 다시 朝鮮流行歌(조선유행가)를 취입하여보기로 한것입니다
이번에 또 失敗(실패)하면 朝鮮流行歌(조선유행가)는 永永(영영)失敗(영영실패)이다
어찌하든 이번에는 훌륭한 歌手(가수)를 發見(발견)하여 一般大衆(일반대중) 의 熱狂(열광)的(적) 激讚(격찬)을 받을 傑作(걸작)을 내지않으면 안되겠다고 깊히 마음먹은 나는
좋은 歌手(가수) 찾기에 苦心(고심)을 하였으며 그런가수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읍니다---------라고 조선초기 演藝先覺者(연예선각자)요 당시 victor-record 文藝部長(문예부장)이었던
이기세씨는 回告(회고) 하고있습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선각자 이기세는 朝鮮流行歌音盤(조선유행가음반)의 失敗原因(실패원인)을 韓國文化水準儀(한국문화수준수준)의 低級(저급)에서 찾았지만 日本內地人(일본내지인)의
生角(생각)이 옳지않다고 指摘(지적)하고 있습니다
위의 引用文(인용문)을 紹介(소개)하는 重要理由(중요이유)는 二十世紀前半期(이십세기전반기)의 大衆歌謠(대중가요)가 徹底(철저)하게 經濟原理(경제원리)를 따랐다는 것을 端的(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때문입니다
日本音盤社(일본음반사)에서 朝鮮流行歌(조선유행가)를 吹入(취입)하지 않았던 것은 한마디로 商業性(상업성)이 없다고 判斷(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기세는 朝鮮(조선)流行歌(유행가)를 吹入(취입)하고픈 所望(소망)을 버리지 않았으며 結局(결국)에는 빅터사장을 說得(설득)하여 조선유행가를 취입할 機會(기회)를 다시얻은것입니다
이번에도 失敗(실패)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줄모른다는 絶對絶命(절대절명)의 時期(시기)에 이애리수를 發掘(발굴)하게되고 “荒城(황성)의 跡(적)”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미 音盤化(음반화)되기전부터 公演舞臺(공연무대)에서 朝鮮觀客(조선관객)들을 수없이 울렸던 이가요는 큰 成功(성공)을 거두게됩니다
“荒城(황성)의 跡(적) ”에서 觸發(촉발)된 大衆歌謠(대중가요)에대한 關心(관심)은 곧 大衆歌謠(대중가요)의 全盛時代(전성시대)를 여는데 큰몫을 합니다
---이애리수가 吹入發表(취입발표)한 이 名品歌謠(명품가요)는 京鄕(경향)을 물론하고 새로운 shock-쇼크-를 주어 坊坊曲曲(방방곡곡) 靑春男女(청춘남녀)의 입에서 입으로 流行(유행)하게 됩니다
’채규엽, 강석연, 이애리수, 이정숙 등 몇사람 아되는 record singer-레코드가수-의 需要(수요)가 늘고 創作者(창작자)가 一家(일가)를이루게되자 會社側(회사측)에서도 이 方面(방면)에
새로운 主力(주력)을 게을리하지 않게됩니다--------이상은 1938년, 3월 四海公論(사해공론)의 이하윤의<朝鮮(조선)流行歌(유행가)의 變遷(변천)>에 실린 글입니다
----Vicror-빅터-의 microphone-마이크로폰-을 통해 이애리수의 그 비단결같이 아름다운 melody-멜로디-가 三千里(삼천리) 거리거리에서 흩어지고 朝鮮(조선) record fan-조선 레코드 팬-들의
熱狂的激讚(열광적 격찬)은 실로 눈물겨웠던 것입니다
그販賣枚數(판매매수)의 놀라운 數字(수자)는 victor 會社-빅터회사-에서 朝鮮record-조선 레코드-레코드 취입을 놀랍게 激增(격증)하게 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여러회사에서
朝鮮(조선)流行歌(조선유행가) 吹入(취입)을 始作(시작)하게 한것입니다
이로써 나니와부시와 오륙고부시와 같은 種類(종류)의 레코드소리만 들리던 三千里(삼천리) 坊坊曲曲(방방곡곡)에는 朝鮮情操(조선정조)를 자아내는 朝鮮流行歌(조선유행가)의
노랫소리가 많아져가니 각 레코드회사의 歌手(가수) 爭奪戰(쟁탈전)은 激甚(격심)해지기 始作(시작)하였던 것입니다----------
以上(이상) 은 <三千里(삼천리)> 1936년 11월호 이기세의 “名歌手(명가수)를 어떻게 發見(발견)하였던가” 에서 引用(인용)하였습니다
이노래가 成功(성공)한 要因(요인)은 여러가지 로 說明(설명)할수 있겠으나 歌詞(가사)와 曲調(곡조)에서 배어나는 슬픈情操(정조) 가 當時(당시)의 時代雰圍氣(시대분위기)와 잘맞아 떨어진것도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수있습니다
社會的(사회적)危機意識(위기의식)을 느낀 特定集團(특정집단)은 이에대한 修辭學的(수사학적) 大衆(대중)으로서 特(특)히 抒情詩(서정시) 장르를 선택하는 傾向(경향)이 있다고합니다
1931년 發生(발생)했던 滿洲事變(만주사변)은 社會的(사회적)인 不安意識(불안의식)을 助長(조장)하는데 一助(일조)하였고 이러한 雰圍氣(분위기)에서 “황성의적”의 出現(출현)은 당시
時代的雰圍氣(시대적분위기)와 一部(일부) 相應(상응)하는 側面(측면)이 있었을것이라는 주장이 보입니다
게다가 이곡은 音樂理論的(음악이론적)으로 4,7 음이 빠진 단음계를 사용하면서도 우리나라의 傳統的(전통적)인 박자라고 할 수 있는 3박자를 사용하고있는데 이또한 이곡이 當代人(당대인)들
에게 親熟(친숙)하)게 다가갈수 있게한 要因(요인)입니다
1036--荒城(황성)의 跡(적)-e
이노래의 曲調(곡조)는 일본엔카의 影響(영향)을 받은것으로 認識(인식)되고 있습니다
“荒城(황성)의 跡(적)”을 비롯해서 미야코부시 音階(음계)로 이루어진 trot-트로트-가 日本帝國主義(일본제국주의)의 暴行時代(폭행시대)에 日本民族(일본민족)이 確立(확립)한
音階(음계)에의해 만들어진 노래라면서 大部分(대부분)의 trot-트로트-를 否定的(부정적)으로 評價(평가)하였읍니다<노등은의 여명의노래> 에서
日本(일본)의 傳統的(전통적)인 박자가 2박자임에 반하여 우리의 傳統的(전통적)인 박자는 3박자인데 “황성의적”에서 3박자를 사용한 것은 意識的(의식적)이든 無意識的(무의식적)이든간에
이미 trot-트로트- 가 우리것과의 接木(접목)을 試圖(시도)하였음을 意味(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적어도 우리나라가 盲目的(맹목적)으로 日本流行歌(일본유행가)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고 할수있다” 는 主張(주장)이 보입니다
이는 노랫말을 살펴보면 더욱 分明(분명)해집니다
王平(왕평)작사한 이곡은 定處(정처)없이 헤매는 나그네의 心思(심사)를그리고 있습니다
1절의 “荒城(황성)의跡(적) ”은 高麗(고려)의 首都(수도)인 開城(개성)의 滿月臺(만월대)를 指稱(지칭)하는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쉽사리 斷定(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는 이러한 일화와 관련된 史料(사료)를 찾지못했기 때문이라고 主張(주장)하는 글도보입니다
“荒城(황성)의跡(적)”이 具體的(구체적)으로 어디를 指稱(지칭)하든 중요한 것은 지금 그곳은 廢墟(폐허)가되어 달빛만 고요하게 비추는곳이라는 점입니다
廢墟(폐허)가된 그곳에서 詩的(話者(시적화자)는 외로움과 虛無感(허무감)을 느끼며 고달픈 나그네가 되어버린 自己自身(자기자신)에게 憐憫(연민)의 情(정)을 느낍니다
그러다가 결국 詩的(話者(시적화자)는 한없는 心思(심사)를 가슴에품고 定處(정처)없이 발길닿는곳으로 가겠다며 옛터에 作別(작별)을 고합니다
이노래에 등장하는 나그네로서의 詩的話者(시적화자)는 當時(당시) 一般大衆(일반대중)의 모습을 表象(표상)한다고 할수있습니다
日帝(일제) 植民地時期(식민지 시기)에 나라와 故鄕(고향)을 잃은채 滿洲(만주)와 北間島(북간도)로 어쩔수없이 移住(이주)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이노래는 自身(자신)의 마음을
代辯(대변)해주는 노래로 들렸을것입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이가요가 가 發表(발표)되자 그토록 熱狂(열광)하였고 이곡이 劇場(극장)에서 울려퍼지면 觀客(관객)들이 눈물까지 흘렸던 것입니다
이노래에 대해 “이미 오래전에 끝나버린 옛王朝(왕조)에대한 話者(화자)의 執着(집착)은 그 그리움을 해결할 아무런 行動(행동)도 할수없기 때문에 눈물과 痛哭(통곡)으로 끝날수밖에 없다” 고
評(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종의 medievalism-中世趣味(중세취미)라 할 수 있는 옛것에대한 憧憬(동경)은 現實(현실)에대한 不滿(불만)의 衝動(충동)에서 出發(출발)한것으로서 現實(현실)을 不定(부정)하고
그葛藤(갈등)의 解消方式(해소방식)으로 다른대상을 志向(지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觀点(관점)에 따라서는 다르기는 하겠지만 詩的話者(시적화자)가 옛것을 그리워한다는것으 自體(자체)를 이미 現實(현실)을 克復(극복)하기위한 노력으로 評價(평가)할수있습니다”-------라
主張(주장)하며 反論(반론) 하는 글도 있습니다
------더구나 이곡에서의 시적화자는 단순한 옛것에대한 그리움에 빠져서 눈물과 통곡으로 일관하는 것이 아니라 옛터에 작별을고하고 발길닿는대로 가겠다며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훌훌털어버리고 떠나는 詩的話者(시적화자)의 모습에서 오히려 達觀(달관)의 情緖(정서)마저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當代大衆(당대대중)의 마음을 代辯(대변)하는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곡이 폭넓게 人氣(인기)를 얻었습니다------라고 덧붙이며 反論(반론)합니다
---이처럼 이곡은 韓國人(한국인)이 韓國語(한국어)로 作詞(작사)한 노래로 當時(당시)의 時代的狀況(시대적상황)과 照應(조응)하는 當代人(당대인)의 情緖(정서)를 反映(반영)하고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랫말에 드러나는 정서를 관과한채 이곡이 사용한 음계가 일본엔카의 음계와 類似(유사)하다며 이노래가 지니고있는 意味(의미)와 價値(가치)를 全的(전적)으로 부정하는건
곤란하다-----라고 主張(주장)하는 글도 보입니다
요컨데 일부 트로트가 지니고있는 곡조가 단지 일본 엔카의 곡조와 유사하다고 트로트의 正體性(정체성)을 문제삼는 것은 說得力(설득력)이 얻기 어렵다
트로트의 作詞者(작사자)가 거의 大部分(대부분) 한국인 이었다는 事實(사실)을 勘案(감안)할 때 트로트의 노랫말에는 어쩔수없이 韓國人(한국인)의 정서가 反映(반영)되기 마련이기에----
실상 情緖(정서)라는 것은 쉽게 移植(이식)할수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大衆歌謠(대중가요)는 基本的(기본적)으로 商業論理(상업논리)의 支配(지배)를받았기에 잘팔리는 음반을 만들수밖에없었고 결국 잘팔리는 음반은
當代人(당대인)의 呼應(호응)을 많이 받은것이고 호응이란 强要(강요)나
强勸(강권)으로 이루어질수없기에 노래가 어떤식으로든지 자신의 마음에 感應(감응)을 불러일어킬 때 대중은 그노래를 選好(선호)하게 되는것입니다
1037—復活(부활)-李愛利秀(이애리수)
Siberia-시베리아- 찬바람이 地球上(지구상)에 떨치니 거리는 죽은듯하나 實狀(실상)은
살았도다 버러지는 땅에서 들썩뜰썩하면서 陽春佳節(양춘가절) 기다리면서 나오기를
힘쓰네
춤을추네 춤을추네 나풀나풀 춤을추네 白花(백화)가 피어 우거진 봄동산 저 峰(봉)첩들
復活歌(부활가)를 부르면서 香氣(향기)롬을 맡으라고 끼쁨으로 춤을추면서 향아로 시나라든다
1931년, 4월Columbia-record 발매 sp음반-作詞, 作曲 未詳(작사, 작곡 미상) 이애리수노래 로 실려있습니다
他面(타면) 이규송작사 고목청엽작곡 이애리노래<venice-베니스-의노래>가 함께 실려있습니다
1931년, 3월21일 동아일보 Columbia-record 廣告(콜롬비아 레코드 광고)---------------------------------에는
四月新譜(4월신보)
復活(부활) 一枚(1매) 이에리스 管絃樂(관현악)伴奏(반주)
Venice-베니스의 노래-----------------------------------라고 紹介(소개)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이노래를 女裝男優(여장남우)고수철이 飜案(번안)해부른 나카야마신페이 작곡의 “復活唱歌(부활창가)”의 飜案(번안)으로 記錄(기록)하고 있으나 전혀다른곡입니다
Columbia-record 서 發賣(발매)한 音盤(음반)-------------------------------------------------------------------------에는
盤(반)kaa0458
Columbia 40162-a 流行小曲(유행소곡) 復活(부활) 이애리스 管絃樂(관현악)伴奏(반주)
Columbia 40162-b 流行小曲(유행소곡) 베니스-venice-의 노래 이애리스 管絃樂(관현악)伴奏(반주)—라고 表記(표기)하고 있는바 이애리수를 이애리스 라는 日本式(일본식)이름으로
紹介(소개)하고있어서 忿怒(분노)를 느끼게 합니다
이곡을 가창한 이애리수씨는 본명이 李普全(이보전)으로 무엇보다고 韓國大衆歌謠(한국대중가요)의 古典(고전)<荒城(황성)의 跡(적)>을 부른 가수로 유명하지만 노래못지않게 연기에도
才能(재능)이 있었습니다
취성좌에서 舞臺(무대)를 밟은후 入團當時(입단당시)는 幕間歌手(막간가수)로 활동하여 幕間舞臺(막간무대) 活性化(활성화)에 이바지하고 1929년, 7월9일 그녀를 예술로 이끌은
외삼촌 喜劇俳優(희극배우) 전경희와함께 幕間陣容(막간진용)에 이름을 올리고있습니다
그녀가 舞臺演技(무대연기)가 記錄上(가록상)으로 처음확인은 1929년 幕間陣容(막간진용) 記錄(기록)보다 1년전 1928년 8월10일 공연이고 여기서 그시기 유행하던 일본엔카 <시들은방초>
를 脚色(각색)한 <約婚(약혼)한 處女(처녀)>의 主演(주연)을 맡았습니다
歲月(세월)이흘러 1929년 8월5일부터 공연한 復活(부활) 일명 “카추샤”를 취성좌가 공연시 그녀가 역을맡아서 큰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는 1931년, 6월23일 동아일보<다시피련는 화형>이라는 기사에서 보입니다
헌데 이 <부활>의 原作(원작)이 무엇이고 主題歌(주제가)는 무엇인지 알수없으나 이때 <카추샤>공연이 상기가요 “부활”과 관련이 있을수있습니다
이때공연서 主題歌(주제가)를 불렀고 그곡을 record 化-레코드화-했을 可能性(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復活(부활)은 共産主義國家(공산주의 국가)로 흔히들 기억하고있는 소련이 건국되기이전 러시아작가로 大文豪(대문호)로 추앙받는 톨스토이가 쓴 장편소설을 말함이고
이를 新派劇(신파극)으로 만들어 공연했고 이는 일본서시작한 것을 한국서 각색공연했고 이월화가 토월회에서 공연할때만해도 일본번안물이었으나 이애리수가 1929년 취성좌서
공연시 原作(원작)은 알수없습니다
헌데 이월화가 公演(공연)하기도 한 日本新派劇(일본신파극)을 脚色(각색) 카츄사를 공연시 이신파극에 이애리수가 출연했다는 주장이있으나 이는 섣부른 판단입니다
왜나면 이애리수가 취입한가요 <復活(부활)>은 이시기 “카츄사” 主題歌(주제가) 와는 전혀다른 곡이기 때문입니다
이애리수가 부른<부활>은 신파극을 대중가요로 parody-패러-한 노래 라는 주장이 보이나 아직은 明快(명쾌)하지 못합니다
소설속에서 여주인공 카추샤는 殺人罪(살인죄) 判決(판결)을받고 시베리아로 流刑(유형)을 떠나고 남자주인공 네플류도프가 그녀를 墮落(타락)시킨 罪意識(죄의식)으로 다시
그녀를따라 시베리아로 나서는 內容(내용)으로 “사랑의 復活(부활)”을 序詞(서사)한 내용입니다
이노래의 核心小節(핵심소절)”거리는 죽은듯하나 實狀(실상)은 살았도다”입니다
노래가 發表(발표)된 1931년 우리니라 大韓帝國(대한제국)은 主權(주권)을 잃은 허수아비 國家(국가)였습니다
日本 帝國主義(일본제국주의)의 植民地恥辱(식민지치욕)의 生活(생활) 20년 우리민족에대한 수탈도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漸增(점증)했습니다
“---------노랫말 1절중에 “버러지”는 벌레인데 속내는 우리의 民草(민초)들을 隱喩(은유)한것이라 언땅가죽 밑에서 抵抗(저항)의 底力(저력)을 들썩거리며 陽春佳節(양춘가절)에 피어날
꽃처럼 民族解放(민족해방)을위해 힘씀을 適時(적시)했다
백화, 향기롬,,춤 등으로 希望(희망)의 message-메시지-를 전하면서 植民時代(식민시대) 민족의 저력을 융합한 면에서 노래<부활>의 가치는 더해진다--------“ 라고 이노래를
解釋(해석)하는 글도 보입니다
1038—고요한 長安(장안)-이애리수
仁王山(인왕산) 허리에 소쩍새울고 漢江水(한강수) 맑은물에 櫓(노) 소리난다
南山(남산)의 松林(송림)은 나놀던 터요 春塘臺(춘당대) 푸른잔디 님 자취로세
님잃은 젊은이 애달파마소 저새가 울고가면 달이 떠온다
고요한 달빛에 잠들은 長安(장안) 그리운 님의 품에안겨 지이다
1932년 victor-record 발매 sp음반- 이현경사, 전수린곡 이애리수노래로 실려있습니다
他面(타면) 이현경작사 김교성작곡 강석연의 <迎客(영객)>과 함께 실려있습니다
1932년, 7월30일, 8월10일 東亞日報(동아일보) victor-record 廣告(빅터 레코드 광고)-----------------------------------------------에는
特別(특별)新譜(특별신보)
抒情小曲(서정소곡) 迎客(영객) 李賢卿(이현경) 作詞(작사) 金敎 聲(김교성) 作曲(작곡) 강석연 管絃樂(관현악)伴奏(반주)
抒情小曲(서정소곡) 고요한 長安(장안) 李賢卿(이현경 )作詞(작사) 전수린곡 이애리수 管絃樂(관현악)伴奏(반주)---------------------라고 紹介(소개)하고 있습니다
1935년, 2월 victor-record 發行(빅터 레코드 발행) 每月新譜(매월신보)------------------------------------------------------------에는
總目錄(총목록)
流行歌(유행가), 新民謠(신민요)
49154 迎客(영객) 이현경사 김교성곡 강석연
고요한 長安(장안) 이현경사 전수린곡 이애리수-------------------------라 表記(표기)하고 있습니다
헌데 이노래를 취입하려 일본에갔을 때 일본의 유명한 詩人(시인) 사이조 야소-西傑 八十(서걸팔십)-이듣고 朝鮮(조선)의 詩情(시정)을 짙게표현한데 感激(감격)했다고 합니다
그는 즉석에서 日本語(일본어)歌詞(가사)를 붙이고<怨情(원정)>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원망스런정>이 일본어판으로 발매됨에따라 이애리수는 “리아시스” 라는 일본식 예명으로 日本歌謠界(일본가요계)에 自然(자연)히 登場(등장)하게됩니다
日帝强占下(일제강점하) 온통 日本歌謠(일본가요)의 飜案曲(번안곡) 판을치던시기 植民地歌手(식민지가수) 이애리수의 노래가--- 비록 日本語(일본어)로 취입했지만 일본에서 韓國歌謠(한국가요)가---
發表(발표)되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전수린의 創作力(창작력)이 國內(국내)를 넘어서 日本(일본)에서도 認定(인정)받았다는 證據(증거)입니다
일본 victor-record 서 1931년 10월 발매된 이곡은 사이조 야소작사 김교성작곡의<그리운 연기>와 함께 실려서 발표되었습니다
日語歌詞(일어가사)를 韓國語(한국어)로 飜案(번안)한 歌詞(가사)입니다
버들에 실이 있다한들 가는봄을 묶을수 없다네
나비가 꽃을 좋아한들 흩날리는 꽃을 어찌하리
버들은 버들 나비는 나비 뜬世上(세상) 꿈의 怨情(원정)
나에게 정이 있다한들 가는님을 내 어찌하리
이곡은 이후 두번이나 輕音樂(경음악)으로 편곡되어 발매되었고 이애리수는 이난영, 김천애, 김용환씨들도 공연했던 히바야 공회당에서 리싸이틀을 열정도로 인기를 누렸습니다
韓國(한국)서는 victor kj1169 로 1938년 再發賣(재발매)되기도 했습니다
그 時期(시기) victor-record 서 發賣(발매)된 音盤(음반) -1169 -----------------------------------------------------------에는
盤(반)kab 0620
Victor kj-1169-a 流行歌(유행가) 고요한 長安(장안) 이현경작사, 전수린작곡 이애리수 伴奏(반주) 일본 빅터 管絃樂團(관현악단)
Victor kj-1169-b 유행가 荒城(황성)의 跡(적) 왕평사 전수린곡 이애리수 伴奏(반주) 일본 빅터 管絃樂團(관현악단)--------------라 표기하고 있어서 <荒城(황성)의 跡(적)>도
再發賣(재발매) 되었음을 알게합니다
노랫속 <長安(장안)>은 서울 한양이고 인왕산과 한강을 대비해 님을잃은 젊은이의 비탄과 할말을 가슴에 머금은 사연을 읊었습니다
仁王山(인왕산)은 서울 종로구와 서대문구 弘濟洞(홍제동)의 경계에 있는 산입니다
이름이 붙여진 것은 仁王寺 (인왕사)라는 佛敎寺刹(불교사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長安(장안)”은 중국의 古都(고도)로 산시성의 省都(성도) 시안시이고 이곳은 한왕조시기 장안으로 명명했습니다
인류최초의 다문화국가였던 唐(당)왕조에는 장안은 대제국수도로서 세계최대규모의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보통 “長安(장안)의 話題(화제)거리”라는 말을할 때 그장안이 바로이곳입니다
<고요한장안>의 作詞者(작사자) 이현경은 victor-record-빅터레코드- 文藝部長(문예부장)뿐만 아니라 日本(일본) 新派劇(신파극) <카츄사>를 한국무대에 올리고 윤심덕을
설득 일본으로 보내<死-사-의 讚美(찬미)>를 남기게하고 長恨夢(장한몽)을 飜案(번안) 무대에 올리리고 이극이 인기를 끌자 連鎖(연쇄)劇(연쇄극)으로 만들기도 한 韓國(한국)의 草創期(초창기)
演藝界(연예계) 先覺者(선각자)입니다
이곡은 후일<한강><전화통신>의 심연옥씨가 remake 해서 발표했습니다
1039—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채규엽
술이야 눈물일까 한숨 이련가 이마음의 답답을 버릴 곳장이
오래인 그옛적에 그사람으로 밤이면 꿈에서 간절했어라
이술은 눈물이냐 긴한숨이냐 구슬프다 사랑의 버릴곳이여
記憶(기억)도 사라진듯 그이로하여 못잊겠단 마음을 어쩌면 좋을까
1932년, 2월 Columbia-record 발매 sp음반-作詞未詳(작사미상) 고가마사오 작곡 채규엽노래로 실려있습니다
他面(타면) 작사 고가마사오작곡 채규엽노래< 希望(희망)의 고개로>가 함께 실려있습니다
마치 李箱(이상)의 烏瞰圖(오감도)처럼----- 作家(작가)를 알수없는 難解(난해)한 飜案歌詞(번안가사)로 된 노래입니다
그시기 Columbia-record-콜롬비아 레코드- 서 發賣(발매)한 音盤(음반)-----------------------------------------------에는
盤(반)kab 1501
Columbia 40300-a 流行小曲(유행소곡) 술은 눈물일가 한숨이랄가 古賀政男(고하정남) 作曲(작곡) 蔡奎燁(채규엽)
伴奏(반주) 바이올린, 첼로, 기타, 우쿠레레
Columbia 40300-b 流行小曲(유행소곡) 希望(희망)의 고개로 古賀政男(고하정남) 作曲(작곡) 蔡奎燁(채규엽)
明治大學(명치대학) 만돌린 오케스트라 伴奏(반주)------------------------------------------------------------------라고 表記(표기)하고 있습니다
이곡은 飜案曲(번안곡)으로 원곡은 <사케와 나미다카 다메이키카>로 1931년 다카하시가쿠타로 作詞(작사), 일본 엔카의 대부로 추앙받는 古賀政男(고하정남)작곡으로 當時(당시)
동경음악학교 在學生(재학생)이던 후지야마 이찌로가 불러서 日本流行歌(일본유행가)의 新紀元(신기원)을 이룬 곡이었습니다
그당시 음악학교출신 聲樂家(성악가)가 流行歌(유행가)를 불렀다고 학교에서 退學(퇴학)시켜야한다는 소동을 빚기도한 노래입니다
이곡의 힛트로 채규엽은 職業歌手(직업가수)로 確固不動(확고부동)한 위치에 서게됩니다
곡이 발매된 시기 우리나라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主權(주권)이없는 나라가 나라일수는 없습니다
-“-----빼앗긴 들판에 서있는 사람들 그래서 노래의 가락도 歌詞(가사)도 大韓海峽(대한해협)을 건너오는 것이 많았고 當時(당시)는 그것이 現在(현재)였습니다
이노래는 melody-멜로디-가 흐느적거리는 것이 魅力(매력)입니다
물에젖은 홑이불이 빨래줄에 걸린상태로 이리저리 휘적거리는듯항 곡조입니다
키큰나무 줄기를타고 오르던 단풍든 담쟁이덩굴이 휘늘어져 바람결에 흩날리는듯한 視覺(시각)을 연상할 수 있는 깊은가을속 같은 感興(감흥)도 멋이다
우리말로 들을때와 일본말로들을때의 감흥은 사뭇다르다-------“라고 이노래를 분석히는 글도 보입니다
上記(상기) 大衆歌謠(대중가요)의 素材(소재)인 술은 언제부터 인간의 벗노릇을 했을까요??
술은 눈물도되고 한숨도되고 또 그한숨과 눈물을 합친 시름을 견뎌내게 해주는데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醉(취)하라 언제나 너희는 취해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거기에있다 唯一(유일)
의 問題(문제)다”라고 說破(설파) 하면서 술을 禮讚(예찬)했습니다
이술이 大衆歌謠(대중가요)의 歌詞(가사)와 melody-멜로디-에 얽혔습니다
그렇담 上記歌謠(상기가요)의 素材(소재) “술”은 詩人(시인)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요??
金素月(김소월)의 詩(시)에”---술은 물이외다 물이 술이외다 술과물은 四寸(사촌)이외다 헌데 물을 마시면 精神(정신)을깨우치지만 술을 마시면 몸도 정신도 다 태웁니다
술마시면 醉(취)케하는 多情(다정)한술 좋은 일에도 풀무가되고 언짢은 일에도 매듭진 맘을풀어주는 시원한 술
나의 血管(혈관)속에 있을떄 술은 나외다 되어가는 일에 부채질하고 안되어가는 일에도 부채질 합니다 그대여 그러면 우리한잔듭세
우리 이일에 일이되어 가도록 마시니 괜찮을걸세 歌手(가수)의 술은 눈물과 한숨 詩人(시인)의 술은 풀무와 부채인가 보다----라 하고있습니다
1040—老乭江邊(노돌강변)<노들강변>-a 박부용
노들江邊(강변)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 無情歲月(무정세월) 한허리를 칭칭동여 매여나 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목믿어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노들江邊(강변) 白沙場(백사장) 모래마다 밟은자죽 萬古風霜(만고풍상) 비바람에 몇번이나 지어갔나
에헤요~白沙場(백사장) 못 미드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노들江邊(강변) 푸른물 네가 무슨 망녕으로 才子佳人(재자가인) 아까운몸 몇몇이나 데려갔나
에헤요! 네가 眞情(진정)마음을돌려 이 世上(세상)쌓인 恨(한)이나 두둥실 싣구서 가거라
1934년, 2월 創立(창립) 一週年 紀念(1주년기념) 特別號(특별호) okeh-record 발매 sp음반- 산불출사 문호월곡 박부용노래 로 실려있습니다
他面(타면) okeh 文藝部(문예부)編曲(편곡) 新 哀怨曲(신애원곡) 이 박부용노래로 함께 실려있습니다
1934년, 1월22일 동아일보 okeh-record 廣告(오케이 레코드 광고)-----------------------------------------에는
二月(이월)新譜(신보) 一月 二十一發賣(일월 이십일 발매)
創立一週年紀念(창립 1주년 기념기념) 特別號(특별호)
一六 一九(일육일구) 新民謠(신민요) 노들 江邊(강변) 朴芙蓉(박부용)
新哀怨 曲(신애원곡)------------------------------------라고 광고하고 있습니다
1938년, 12월28일 東亞日報(동아일보), 12월 29일 每日申報(매일신보), 12월30일 朝鮮日報-조선일보- okeh 廣告(오케이 광고)-------------------------에는
힛트 傑作集(걸작집))
新民謠(신민요) 노들江邊(강변) 朴 芙 蓉(박부용)-----------------------------이라고 紹介水準儀-소개수준-의 광고를 하고있으나 “傑作集(걸작집)”이란 단어 含蓄(함축)된
의미를 잘 解釋(해석)하면 되겠습니다
세월이 흘러 1943년 2월 okeh-record 發行(발행) 每月新譜(매월신보)--------------------------------------에는
本月 新譜及(본월 신보급) 特選目錄(특선목록)
1619 노들江邊(강변) 박부용
新 哀怨曲(신 애원곡) ---------------------------------------------------------------------------------라고 表記(표기)하고 있습니다
1934년, 1월20일 okeh-record 發行(오케이레코드 발행) 歌詞紙(가사지)-------------------------------------------에는
Okeh 1619-a 新民謠(신민요) 노들江邊(강변) 申不出 作詩(신불출 작시) 文湖月 作曲(문호월 작곡) 伴奏(반주) okeh 朝洋交響樂團(선양교향악단)
Okeh 16190-b 民謠(민요) 신 哀怨(애원)曲(곡) okeh文藝部(오케이문예부) 朴芙蓉(박부용) 반주 okeh 鮮洋交響樂團(선양교향악단)
昭和(소화) 九(구) 年(년) 一月(일월) 二十 日(일) (이십일) 發行(발행)----------------------------라고 표기하고 있는바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점은 <<문호월이 작곡해 作曲者(작곡자)가 明記(명기)된 “노들강변”은 新民謠(신민요)로 “신애원곡”은 민요를 편곡했음에도 “民謠(민요)”로 表記(표기)한점입니다>>
그리고 반주부분에서 “朝洋(조양)” 고향악단이라 해서 조선악기와 서양악기로 合同(합동)演奏家(합동연주)가 이루어졌음을 알리고 있음을 알수있습니다
이곡은 크게힛트하고 1940년 okeh 20042 번으로 再發賣(재매)됩니다
그痕跡(흔적)이 下記(하기)에서 確認(확인)됩니다
1942년 6월 Okeh 每月新譜(매월신보)-------------------------------------------------------------------에는
0發賣(발매) 0目(목)
西道雜歌(서도잡가) 京畿雜歌(경기잡가)
20042 노들강변 박부용--------------------------라 紹介(소개)해 新民謠(신민요)가 아닌 雜歌(잡가)로 소개하는점이 特異(특이)합니다
1041-노들강변-b
上記 民謠(상기민요) <노들강변>은 1930년경 이철씨가 okeh-record 창립을 염두에두고 이미 창립된 딴회사에 시험삼아 의뢰하여 제작해본 것으로
1932년 okeh-record 의 創設(창설)이 宣布(선포)되고
1933년에 이곡을 朴芙蓉(박부용) 목소리로 再吹入(재취입)합니다
그리고 이음반을 레코드상점에 넘기면서 이노래가 신민요의 첫작품이며 自社(자사)의 창립과 더불어 내놓는 첫취입곡 이기떼문에 그의의가 자못크다고 강조하고 계속늘어나는
需要者(수요자)들의 요구에따라 再版(재판)을 제작한다고 廣告(광고)도 하고있습니다
이 再版(재판)은 1940년 發賣(발매)가 이루어집니다
<노들강변>을 발표한 박부용 그녀는 이미 okeh-record 서 音盤(음반)을 發表(발표)하고 있았습니다
“부드럽고 韻致(운치)있는 이가락은 江邊(강변)의 봄버들을 두고 덧없이 가는 無情(무정)한 歲月(세월)을 慨歎(개탄)하는 內容(내용)으로 노들강 물결에 나라없는 민족의 설움
을 싣고가라고 哀怨(애원)하는 當時(당시)우리민족의 渴望(갈망)도 함께담고있다”고 평가하는 글도 보입니다
Okeh-record 발매 첫번째 음반은 okeh 1500으로 여기에 박부용 이름이 보입니다
1933년 2월발매 “寧邊歌(영변가)”音盤(음반)--------------------------------------------------------------에는
盤(반)kab 1133
Okeh 1500 西道雜歌(서도잡가) 寧邊歌(영변가) 上(상) 朴芙蓉(박부용) 哄小月(홍소월) 杖鼓 (장고) 崔小玉(최소옥)
西道雜歌(서도잡가) 寧邊歌(영변가) 下(하)-------------------------------------------------------------------라고 表記(표기)하고 있어서 okeh-record 도 기존 레코드사
와같이 처음 發賣音盤(발매음반)을 民謠(민요)로부터 시작했음 알수있습니다
그리고 1934년 회사창립 1주년에 紀念作(기념작)으로 이곡<노들강변>을 발매했습니다
이미 okh-record 서민요를 발표해 그녀의 노래실력을 익히 알고있어서 <노들강변>을 그녀에게 취입시켰 으리라 믿어집니다
그전에 이철씨는 전속가수 섭외를위해 오사카까지 왔다가 레코드특약점 주인의소개로 이난영씨를 소개받고 그녀를 찾았으나 행방불명 낙심하여 돌아가는 도중 자동차안에서 힘없이
걸어가는 그녀를 그야말로 運命的(운명적)으로 발견 專屬歌手(전속가수)로 발탁합니다
“노들강변” 이 名品 新民謠(명품 신민요)는 누구나 쉽게느껴 알수있는 通俗性(통속성)과 함께 陽山道(양산도)가락으로 이어지는 旋律調性(선율조성)은 獨特(독특)한 民族的(민족적)
情緖(정서)를 풍깁니다
“더욱이 3절가사는 나라잃은 우리겨레의 수난과 이모든불행의 근원인 일제의 조선감점을 반대하는 반항의 감정이 흐르고있다”고 주장하는 북서 발행한 책에 보입니다
너무 飛躍的(비약적)이고 一方的(일방적)인 主張(주장)일까요??
이주장은-----3절가사 中(중)----“才子佳人(재자가인) 아까운몸 몇몇이나 데려갔나?” 한 詩語(시어)를 통해 알수있는것처럼 당시 愛國者(애국자), 獨立鬪士(독립투사)들을
逮捕(체포)히여 노들나루를 건너간 日帝(일제)侵略者(침략자)들에 대한 抗拒(항거)를 隱喩的(은유적)으로 깔고있는것이다----라고 잇고있습니다
문호월이 노들강변을 창작시 漢江(한강)의 노들나루를 대상으로 했지만 사람들은 흔히 어노래를 낫버들<노들>이많은 강변을 염두에두고 부르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漢江(한강)의 노량진나루를 “노들나루” 라고 하였으며 황초령에서 고토<황초리>를 감돌아 흐르는 버들防川(방천)의 장진강유역을 “노들강변” “노들갯변” 이라 했습니다
“노들”이란 地名(지명)을 말하기도 하지만 이젠 우리들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古語(고어) “낫버들”의 준말 이기도 합니다
“낫버들”이란 老陽(노양)나무나 垂楊(수양)나무같이 큰 버드나무가 아니라 낫으로 베기적당한 버들을 이르는 말입니다 바구니와 키를비롯한 생활용품을 만드는 데 이용되었습니다
이렇게보면 노들강변이란 낫버들이많은 강변을 이르는 말일수도 있습니다
1042-노들강변-c
上記(상기) 新民謠 傑作(신민요 걸작)이 창작되던 1930년경 漢江(한강)의 노들나루는 사랑하는 男便(남편)과 離別(이별)하는 女人(여인)들의 凄絶(처절)하고 구슬픈
울음소리가 그칠줄 몰랐던 눈물의 나루였으며 苛酷(가혹)한 日帝警察(일제경찰)이 愛國者(애국자)들을 逮捕(체포)하여 간 憤怒(분노)와 怨恨(원한)의 나루였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노들강변>을 부르노라면, 춤가락이 흘러나오는 興(흥)겨운 旋律(선율)속에서 어딘가 모르게 설움에 겨웠던 우리 民族(민족)의 悲哀(비애)가
(隱隱(은은))히 느껴지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태어날 때부터 富有(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世代(세대)는 다를수도 있겠지만요
노들江(강)의 悠久(유구)한 흐름과 봄버들에 抒情的(서정적)기초를두고 平凡(평범)하고 素朴(소박)한 우리의 生活感情(생활감정)을 素材(소재)魯(로)하면서도 그것을 韻致(운치)
있게 藝術的(예술적)으로 昇華(승화)시킨 점은 신민요<노들강변>의 長點(장점)이라 할수있습니다
그런데 이노래가 創作(창작)하는데는 작곡가 문호월의 남다른 苦心(고심)과 愛着(애착)이 담겨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1930년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愛國的(애국적)인 가요와 춤가락에 神經 (신경)을 곤두세우며 彈壓(탄압)하였습니다
일제 총독부 학무국은 조선에 총독부가 설립된지 20여년이 지났으니 조선사람들은 일선일체의 정신으로 日本歌謠(일본가요) 몇곡씩은 부를줄 알아야 한다고 力說(역설)하면서
우선 朝鮮(조선)의歌手(가수)부터 일본노래를 부르는데 앞장설것을 慫慂(종용)했습니다
이에 激忿(격분)한 문호월은 나라잃은 亡國(망국)의 설움을 痛歎(통탄)하면서 가슴에 사무치는 설움을 참지못하여 鬱憤(울분)에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에 입학하였다가 學費(학비)때문에 집에돌아와 舞踊創作(무용창작)의 뜻을품고있던 옥명화가 문호월을 찾아와 日帝(일제)의 彈壓(탄압)速(속)에서
우리 춤가락을 지키기위하여 民族的(민족적)인 춤가락을 살리면서도 現代的感覺(현대적 감각)에 맞는 舞踊曲(무용곡)을을 창작해줄 것을 의뢰하였습니다
작곡가인 문호월은 그의 付託(부탁)을 受諾(수락)하였지만 막상 곡을쓰려니 좀처럼 좋은 樂想(악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 번곡을쓰고자 努力(노력)하였지만 舞踊曲(무용곡)이 될만한 神通(신통)한 旋律(선율)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樂想(악상)을 떠올리기 위하여 思索(사색)과 探究(탐구) 에 몰두하던 어느날 그의 親舊(친구)의 病問安(병문안)을 갔던길에 신불출과 함께 노들나루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노를젓고있는 沙工(사공)의 노랫소리에 어울려 처절썩 기슭을치며 흘러가는 물결위에 칭칭늘어진 봄버들이 한폭의 그림처럼 水面(수면)위에 비껴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살길을찾아 머나먼 北關(북관)땅으로 아무 期約(기약)도없이 定處(정처)도없이 떠나가는 男便(남편)을 배웅하면서 흐느껴우는 젊은 女人(여인)의 모습도 볼수있었습니다
이러한 평범한 조선땅의 한곳 漢江(한강)의 노들나루 모습에 보통사람들이었으면 그저 無心(무심)코 지나쳤을 일인데 平素(평소) 韓國民謠的(한국민요적) 가락에 뛰어난
감각을 지닌 문호월에게는 이러한 風景(풍경)이 그냥지나쳐 버릴 瞬間(순간)은 이었기에 그의 作家意識(작가의식)을 높이 살수있습니다
한국의 解放(해방)前(전) 歌謠人(가요인)들 중에는 이러한 作家(작가)意識(작가의식)을 所有(소유)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것을본 문호월의 머리에 언뜻 두가지 樂想(악상)이 떠올랐습니다
두가지 樂想中(악상중)에 어느것을 골라잡아야 할것인가?
헌데 生角(생각)할수록 女人(여인)의 슬픔이 물결을타고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저여인의 슬픔을 그대로 五線紙(오선지)에 적어볼까?
아니다 여인의 슬픔은 곧 나라잃은 民族(민족)의 슬픔인데 그것을 旋律(선율)로 적어보아야 悲歎調(비탄조)에 머물고 음악으로서
藝術的昇華(예술적승화)는 어려울것이 아닌가?
나의노래는 이런 悲嘆(비탄)을 이겨내는 겨레의 愛唱曲(애창곡)이어야 한다
만일 이순간 문호월씨가 그간 elegy-곡을 창작하는데 능력이 뛰어난 작곡가였으면 어떤노래가 창작되었을까 문득 궁금해집니다
그리하여 그는 칭칭늘어진 봄버들에 抒情的基礎(서정적기초)를두고 흥겨운선율과 춤가락으로 우리민족이 당하고있는 수난과 슬픔을 이겨내리라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生角(생각) 이런 決心(결심)을 하는동안 배는 어느덧 강기슭의 船着場(선착장)에 닿았습니다
문호월은 배에서 내리기가 바쁘게 어는 목노酒店(주점)으로 들어갔습니다
한편 곁에있던 신불출도 평소답지않은 그의모습에 분명 악상을 떠올렸을것이라는 같은 연예인으로 감지했을것입니다
담뱃불에타고 그을린 낡은 상을놓고 신불출과 마주앉은 문호월은 알차고 구성진 旋律(선율)을 적어나갔고 신불출은 선율에맞춰 가사를 다듬어 나갔습니다
이렇게해서 탄생한 곡이 우리들이 작자도 모르는체 부르는 “노들강변”입니다
1043—노들강변-d
아마도 보통때였으면 그날 目擊(목격)한 女人(여인)의슬픈을 그대로 선율로 옮겨적었을것입니다
그러나 문호월은 그것을 애써피하고 흥겹고 운치있는 선율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한것입니다
흥겨울때는 흥에겨워 이노래를 부르게되고 쓸쓸한 感傷(감상)에 젖을때는 또 그런대로 이노래를 부르게되는 것은 그속에 女人(여인)의슬픔과 나라잃은 국민들의 설움이
지울래야 지울수없는 痕跡(흔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일것입니다
“노들강변”의 <노들>은 말이 약간바뀌어 漢字(한자)로 쓸때는 老乭(노돌)이라고 하는데 서울의 노량진을 가리킵니다
노들江邊(강변) 이란 그일대 漢江(한강)의 江邊(강변)이며 수십년전까지 하여도 閑暇(한가)로운 뱃놀이가 繁盛(번성)했다고 합니다
이곡은 발표되자 곧 全國(전국) 坊坊曲曲(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고<도라지><양산도><천안삼거리><아리랑>과 함께 5대 京畿民謠(경기민요)로 영원히남는 명곡이 됩니다
선우일선의 데뷔곡<꽃을잡고>가 哀想感(애상감)을 表出(표출) 한 新民謠(신민요)라면 <노들강변>은 虛無感(허무감)을 表出(표출)하고있는 新民謠(신민요)로 주목할만합니다이신민요는
發表當時(발표당시)에도 재판을 豫告(예고)할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을뿐아니라 오늘날에도 옛가요 마니어가 아님 新民謠(신민요)가 아닌 民謠(민요)로 認識(인식)할정도로
土着化(토착화)에 成功(성공)한 노래입니다
古風(고풍)스러운 가사를 만든이는 그당시 意識(의식)있는 漫談家(만담가)로 인기를 누렸던 申不出(신불출)씨임을 아는이 그렇게 많지못합니다
이노래를 취입한 券番出身(권번출신) 가수인 박부용은 民謠唱法(민요창법)를 구사해서 불렀는데 그 때문에 창법에 있엇도 이 新民謠(신민요)는 傳統歌謠(전통가요)인 민요와 거의 구별되지 않습니다
실재로 그녀는 이곡 吹入前後(취입전후)에도 民謠(민요)와 雜歌(잡가)도 많이 취입하였는데 그녀가 民謠(민요)와 雜歌(잡가)에서 구사한 傳統唱法(전통창법)이
<노들강변에 그대로 이어졌다고 볼수있습니다
당시 大衆(대중)들은 “노들강변”에서 사용한 傳統唱法(전통창법) 때문에 親熟(친숙)하게 여겨 이것이 當代(당대) 인기를얻는 한要因(요인)으로 분명 작용했을것입니다
이 명품 신민요는 恨(한)많고 괴로움많은 詩的話者(시적화자)가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떠올린 이런저런 生角(생각)을 읊고있습니다
삶이 고단하고 팍팍하게 느껴질 때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강물은 많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강물이 흐르는것처럼 인생도 그렇게 어디론가 흘러가겠지만 강물의 悠久性(유구성) 과는 對照的(대조적)으로 인생의 有限性(유한성) 은 人生(인생)의 無常(무상)함을 말해주기도하고 삶을더
觀照的(관조적)으로 바라보게 해줍니다
<노들강변>의 詩的話者(시적화자)도 그와 같은 事實(사실)을 토로 하고있습니다
이곡은 전통가요인 민요의 창법을 계승하고 있을뿐아니라 內容(내용)과 型式(형식)에 있었도 그것을 繼承(계승)하고있습니다
留聲機音盤(유성기음반) 歌詞紙(가사지)에 京畿雜歌(경기잡가)로 표기된 “박연폭포” 2절에”無情歲月(무정세월)아 가지마라 長安(장안)의 豪傑(호걸) 다 늙는다”라는 句節(구절)은 노들강변
의1절의”無情歲月(무정세월) 한회리를 칭칭동여 매여나 볼까”와 거의 恰似(흡사)합니다
또한 두작품모두 餘音(여음)을 사용하고 있다는는 점에서 共通的(공통적)입니다
다만 노들강변서 여음이 중간여음으로 反轉(반전)의 機能(기능)을 하는반면 박연폭포의 여음은 助興句(조흥구)로서의 구실을 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처럼 노들강변은 전통가요와 유사하면서도 이와는 구분되는 새로운모습 역시 드러내고 있는데 곡의 主題(주제)에서 그런점을 發見(발견)할수있습니다
박연폭포가 그내용면에서 人生(인생)의 無常(무상)함과 고단한삶에대한 토로에 一貫(일관)하고 있는데 반해 노들강변은 박연폭포와 마찬가지로 基本的(기본적)으로 삶에대한 虛無感(허무감)을
表出(표출)하고 있지만 虛無(허무)와 挫折(좌절)에서 그치지 않음을 3절가사 ”네가 眞情(진정) 마음을 돌려서 이세상 쌓인 恨(한)이나 두둥실 싣고서 가거라”에서 확인할수있습니다
이 표현에서 詩的話者(시적화자)의 克服意志(극복의지)를 엿볼수있는것이고 이러한 表現(표현)이 이 新民謠(신민요)가 名品(명품)이란 平價(평가)를듣는 理由(이유)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곡은 險難(험난)한 世上(세상)에 꼿꼿하게 正面(정면)으로 對決(대결)하기보다는 버드나무처럼 능청거리면서 삶의 괴로움조차 虛無(허무)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며 그限界(한계)를 指摘(지적)한 글도 있습니다
이상은 이노래의 誕生背景(탄생배경)을 전혀모르는 음악평론가의 이곡해설입니다
1044—능수버들-선우일선
천안도 삼거리 늘어진 버들은 봄바람 잡고서 하소나하지
寂寞(적막)힌 빈방에 외로운 아몸 그누를 잡고서 이설움
알리랴
삼수나 갑산길 멀고나 멀어도 가고만 보면은 別有(별유)나
천지 날두고 가신님 野俗(야속)은해도 다시나 올때면 有情(유정)
도 허더라
바람아 狂風(광풍)아 불지를 말아라 능수나 버들이 꺾어나진다
능수나 버들이 꺾어나 지면 이봄도 서러워 흘러나 가리
1936년, 6월 polydor-record 발매 sp음반-왕평작사 김교성작곡 선우일선노래로 실려이있습니다
他面(타면)에는 김교성작곡 선우일선의<피리소리>가 함께 실려있습니다
1936년, 5월24일 東亞日報(동아일보) polydor-record 廣告(폴리돌 레코드 광고)------------------------에는
新民謠(신민요) 능수버들 鮮于一扇(선우일선)
피리소리----------------------------------라고 豫想外-예상외- 로 消極的(소극적) 선전을 하고있습니다
1936년, 6월 polydor-record 發行(폴리돌레코드 발행) 新譜紙(신보지)----------------------------------------에는
七月(칠월)新譜(신보)
新民謠(신민요)의 二大 傑作(2대걸작) !!
능수버들
피리소리 <寫眞(사진) 鮮于一扇(선우일선)-----------------------------------------------라고 역시 華麗(화려)한 文句(문구)없이 선전하고 있습니다
이외도1936년, 9월, 10월 廣告(광고)도 보입니다
헌데 이 신민요는 1939년 polydorx524로 再發賣(재발매)되고 上記廣告(상기광고) 의 水位(수위)와 對照的(대조적)입니다
1939년,,2월25일 동아일보 polydor-record 廣告(폴리돌레코드 광고)-------------------------------------에는
三月新譜(3월신보) 朝鮮(조선) 일원 十錢譜(10전보) 第三回(제3회) 發賣(발매)
x-524 新民謠(신민요) 處女祭(처녀제) 鮮于一 鮮(선우일선)
능수버들---------------------------------------------라고 광고하고 있어서 <처녀제> 라는 가요가 이시기 再發賣(재발매)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왜나면 <處女祭(처녀제)> 는 1935년 9월 첫발매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곡을 발표한 鮮于 一扇(선우일선)은 polydor-record 가 民謠王國(민요왕국)을 構築(구축)하는데 一等功臣(일등공신)역할을 한 歌手(가수)입니다
1934년 포리돌레코드서데뷔해 6월경<꽃을잡고>를 노래하여 一躍(일약) star singer-스타가수-가 됩니다
그녀는 最初(최초) 券番出身歌手(권번출신 가수)로 평가받는 왕수복과 함께 기성권번에 소속되있던 妓生(기생)이었고 가수가 된후에도 계속 권번에 적을두고 있었습니다
왕평이 歌手涉外(가수섭외)를하려 平壤(평양)에 왔다가 선우일선 소문을듣고 그녀가 속해있던 기성권번을 직접찾아 확인후 가수로 전격 스카우트했다는 後日談(후일담)이 있습니다
1926년 설립된 3년제 평양기생학교 3기였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하늘구름을 가르고 내려오는 玉-옥-구슬소리다 중국 장가계 산속의 翡翠(비취), 보봉호의 仙女(선녀)들 목소리를 닮았다는 다소 誇張(과장)된 글도보입니다
人品(인품)은 온화하고 목소리는 비단결같으며 옥을 굴리는듯 윤기가 있었습니다
세박자 rhythm-리듬-을 타고 民謠(민요) <天安(천안) 삼거리>를 現代的(현대적)으로 編曲(편곡)한 이곡은 韓國的(한국적)인 情趣(정취)를 자아내고 있으며 곡을 創作(창작)한
韓國(한국)大衆歌謠(대중가요)의 先驅者(선구자) 金敎聲氏(김교성씨)의 孤高(고고)한 人生(인생)과도 相通(상통)하고 있습니다
그는 朝鮮歌謠曲(조선 가요곡) 歷史(역사) 草創期(초창기)부터 歌謠界(가요계)에 投身(투신)한 作曲家(작곡가)입니다
일찍부터 映畵管(영화관)악사로 無聲映畵(무성영화) 背景音樂(배경음악)을 클라리넷으로 연주하고 있었고 이러한 演奏者(연주자)들중 여러명이 作曲家(작곡가)로 變身(변신)합니다
歌謠(가요)作曲家(작곡가)로 變身後(변신후)에는 新民謠 風(신민요풍) 가요에서 特技(특기)를 발휘했습니다
上記歌謠(상기가요) <능수버들>이 그의 代表曲中(대표곡중) 代表(대표)曲(대표곡)입니다
1045—꽃을잡고-A -鮮于一扇(선우일선)
하늘하늘 봄바람에 꽃이피면 다시 못잊을 지난 그엣날
자난 歲月(세월)구름이라 잊자건만 잊을길없는 설운 이내맘
꽃을따며 놀던 것이 어제련만 그님은 가고 나만 외로이
1934년 6월 polydor-record 발매 sp음반-김안서작사 이면상작곡 선우일선 노래로 실려 있습니다
他面(타면) 왕평사 김범진작곡 崔昌仙(최창선) <못오시나요>가 함께 실려있습니다
1934년, 5월30일 polydor-record 廣告(폴리돌레코드 광고)-----------------------------------에는
六月新譜(6월신보)
新民謠(신민요) 꽃을잡고 鮮于一 扇(선우일선)
流行歌(유행가) 못오시나----------------------------------------------------라 소개하고있으며 최창선이 선우일선의 본명임을 알게합니다
음반에는 최창선으로 표기했으나 동아일보 광고에는 선우일선과 같이 광고하고있기에 확인됩니다
만일 최창선 선우일선이 각기 다른가수였음 최창선이라 따로 표기했쓸 터이기에---
이는 그무렵 發行(발행)한 polydor-record 歌詞紙(가사지)에서도 확인됩니다
Polydor 19137-a 新民謠(신민요) 꽃을잡고 金岸曙詞(김안서 사) 李冕相作曲(이면상 작곡) 獨唱(독창) 鮮于一 扇-선우일선- 伴奏(반주) 포리도루 調和樂團(조화악단)
Polydor 19137-b 流行歌(유행가) 못오시나요 王平 詞(왕평 사) 金範晋(김범진) 作曲(작곡) 獨唱(독창) 崔昌仙(최창선) 伴奏(반주) 포리도루 管絃樂團(관현악단)—----------------라고
表記(표기)하고 있어서 “調和樂團(조화악단)” 이란 新 呼稱(신호칭)이 눈길을 끌고있습니다
이노래가 發表後(발표후) 곧 이곡이 人氣上乘(인기상승) 되었음이 아래광고에서 確認(확인)됩니다
1934년, 7월 polydor-record 發行(폴리돌 레코드발행) 新譜紙(신보지)---------------------------------------에는
大呼評(대호평) !! 民謠(민요) 와 流行歌(유행가) 꽃을잡고 鮮于一 扇(선우일선)
B面(면) 못오시나요 崔 昌 仙(최창선)----------------------------이라고 선전되 있습니다 “大呼評(대호평)”이란 文句(문구)를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더재미있는 廣告(광고)도 있습니다
“꽃을잡고”音盤發賣(음반발매) 2년이 지난 1936년, 1월24일 자 東亞日報(동아일보) polydor-record 廣告(폴리돌 레코드 광고)--------------------------에는
品切盤 入荷(품절반 입하)
一九一三七(19137) 꽃을잡고 鮮于一 扇(선우일선)----------------------라고 宣傳(선전)되있어서 이음반이 品切(품절)이 될정도로 販賣高(판매고)가 높았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朝鮮歌謠(조선가요) 黃金期(황금기)는 日本歌謠(일본가요) 黃金時代(황금시대)의 人氣曲(인기곡이) 日本語(일본어)와 朝鮮語(조선어) 兩(양)쪽으로 흘러들어 오는가운데서
同時竝行的(동시 병행적)으로 形成(형성)되어 갔습니다
이시기에는 star singer-스타가수-나 作家(작가)가 登場(등장)하여 오늘날에도 계속 불리고있는 人氣(인기)곡이 次例(차례)로 發表(발표)되었습니다
그와함께 조선레코드의 販路(판로)는 滿洲(만주) 日本(일본)으로 확대 되어갔습니다
流行歌(유행가)가 一定(일정)한 社會的地位(사회적지위)를 차지하고 레코드 販賣量(판매량)이 擴大(확대)됨에따라 歌手(가수)의 狀況- 상황-도 변해갑니다
각 레코드회사는 레코드 販賣量(판매량) 擴大(확대)에따라 그레코드에 노래를 취입 할 새로운가수를 確保(확보)하기 위하여 血眼(혈안)이되어 scout-스카우트-에 분주해집니다
Polydor-record 도 역시 다른레코드사와 다를바 없었습니다
그시기 문예부장이던 왕평은 朝鮮演劇舍(조선연극사)에서 脚本(각본)을쓰던중 polydor-recor 가 朝鮮(조선)에 進出(진출)하자 1932년 9월 朝鮮盤(조선반)을 발매하기전
文藝部長(문예부장)으로 취입하고 가수 스카웃에 관여하기시작 앞선란서 言及(언급)했듯이 선우일선을 가수의길로 이끕니다
선우일선은 평안남도 대동군 용성출생으로 출생년도는 1918년, 1919년 明快(명쾌)하지 못합니다
12살무렵 평양공회당에서 열린 동아일보지국 가요콩쿠르에서<권학가>를 불러서 1위를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계기로 1930년 평양가무양성소에 들어가 李 珊瑚珠(이산호주)의 지도아래 음악공부를 했습니다
最初(최초)의 妓生歌手(기생가수) 왕수복과는 같은 平壤(평양) 箕城券番(기성권번) 소속되있던 기생이었습니다
1046—꽃을잡고-b
이란의 主人公(주인공) 鮮于一 扇 (선우일선)은 곡을 취입후 다음해 인 1935년, 3월28일 京城放送局(경성방송국)에 출연할정도로 人氣(인기)가 暴發(폭발)했고 이실황은 日本(일본)
全國(일본전국)에 中繼放送(중계방송)이 될정도 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京城日報(경성일보) 豫告記事(예고기사) 에는---------
鮮于一扇孃(선우일선 양) 은 平壤(평양)사람 新民謠(신민요)歌手(가수)로서 全鮮(전선)에 壓倒的人氣(압도적 인기)를 한몸에 지닌 芳年(방년) 17세 美人(미인) 일본 폴리돌 전속---이락
紹介(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날 放送(방송)에서 그녀는 上記曲(상기곡)<꽃을잡고><無情歲月(무정세월)><숲사이 물레방아><遠浦歸範(원포귀범)><그리운 아리랑><남포의 追憶(추억)>등을 불렀습니다
이중에서 <남포의추억>은 영화”바다여 말하라” 主題歌(주제가)입니다
이 映畵(영화)主題歌(주제가)는 1935년, 1월경 發賣(발매)되었습니다
<꽃을잡고>는 polydor-record 에서 특별히 관심을갖고 음반을기획 녹음했습니다
기록상으로 polydor-record 첫음반은 1932년, 9월 10월신보로 西道雜歌(서도잡가) “愁心歌(수심가)”, “역금 愁心歌(수심가)”를 李暎山紅(이영산홍),金玉葉(김옥엽) 듀오 목소리로
吹入(취입) 發賣(발매)했읍니다
음반번호 p 19001 입니다 현재 이음반쳬계 는 1938년 5월발매 polydor 19476 이 발굴되 총 476매가 확인됩니다
“꽃을잡고” 는 當代(당대)에 詩人(시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던 김억이 작사를 하고 수준있는 창작력을 소유한 이면상이 작곡을 담당했습니다
원래 4절로 이루어졌는데 그시기 sp 재생시간이 3분40초 정도여서 녹음시간상 미취입상태로 남았습니다
未 吹入(미취입) 歌詞(가사) -------生角(생각)사록 맘이 설어 아니우랴 안알수없어 꽃만 따노라
當時(당시)에 天文學的(천문학적) 數字(수자)인 약 五萬枚(5만매)가 팔렸다는 誇張(과장)된 說(설)이있을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노래는 鮮于一 扇 (선우일선)을 一躍(일약) 名歌手(명가수)로 認識(인식)시키는데 一助(일조)를 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녀는<死(사)의 讚美(찬미)>를 부른 尹心悳(윤심덕)이래 슬픔의가수로 첫손가락에 뽑혔는데 1935년 <三千里(삼천리)>지 6월호 에서----그녀또한 자신이 부른노래중에서
데뷔곡이기도한 상기곡을 가장좋아한다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민요는 이닌영의<봄맞이>강홍식의<풍년맞이>등의 다른 신민요와는 그音樂的(음악적) 質感(질감)과 김안서가 작사한 歌詞(가사)의 內容(내용)이 전혀다릅니다
신민요 특징중의 하나인 기쁨과 흥겨움의 정서를 표현하였던 것과달리 이곡에서는 임을잃은 감정에서 비롯한 哀想感(애상감)이 물씬 풍기고 있습니다
이노래에서 詩的話者(시적화자)가 있는 空間(공간)은 꽃이핀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런데 곷은 아름다움의 象徵(상징)인 同時(동시)에 지난 추억을 回想(회상)하는 媒介體(매개체)이며 현재 시적화자에게 서러움을 불러일으키는 동인이기도 합니다
꽃이피자 시적화자는 지난날 임과함께 꽃을따며 놀던 일을 回想(회상)힙니다
그런데 꽃의 아름다움과 對照的(대조적)으로 임이없는 자신의 身世(신세)를 생각하면 할수록 서러워 시적화자는 꽃을 따는것으로 그서러움을 달랩니다
이처럼<꽃을잡고>는 “임의 不在(부재)”라는 상황에서 임과의 追憶(추억)을 回想(회상)하면서 詩的話者(시적화자)가 눈물을 흘리는 내용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이노래가 表出(표출)하는 정서를 좀더 具體的(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三千里(삼천리)>지 1935년, 11월호에 실린 金岸曙(김안서)의 作詞經緯(작사경위)를 살펴봅니다
---어느늦은 봄날이외다 꽃잎은 하염없이 떨어지고 한각되아 푸른봄만이 뜨거운 여름을 기다릴 때 이외다----------생략-------
이리하여 지나간 옛일을 돌아볼때의 서러운 心情(심정)은 누구라서 가엾다 하지않을수 있습니까?
그러한 生角(생각)을 가졌는지라 노래같은 것을 하나 지어보고 싶었습니다---생략-------
詩(시)가아니요 歌詞(가사)로지었던 것을 이면상씨가 와서보고 재미있다면서 가져갔습니다
가져다가 作曲(작곡)한 것이 지금말하는”꽃을잡고”. 외다
1047-꽃을잡고-C
“꽃을잡고” 작사자 김안서-金億(김억)은 어느늦은 봄날에 하염없이 떨어지는 꽃잎을보고 있자니 서러운 生角(생각)이 들어서 그마음을”꽃을잡고”에 옮겼다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노래로 만들생각으로 “꽃을잡고” 짓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의식있는 작곡가 이면상이 재미있다며 가져가서는 작곡을해서 권번출신가수 선우일선의 데뷔곡으로 취입시키는 冒險(모험)을 敢行(감행)합니다
그것은 旣存(기존)의 新民謠(신민요)와는 音樂的(음악적) 質感(질감) 이 다른 가요를 創作(창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金岸曙(김안서)의 歌詞(가사) 도 內容(내용)이 旣存歌謠(기존가요)와는 달랐기에 이면상도 이러한 冒險(모험)을 헀을것입니다
그래야 金岸曙(김안서)의 歌詞(가사)에 어울릴테니깐요
이는 그가사를보고 “재미있다”고 말한것에서 斟酌(짐작)할수있습니다
김안서는 그가지은 가사로 만들어진 이가요가 그렇게 유행할것이라고 豫想(예상)하지 못했다합니다
그러면서 김억은 朝鮮(조선)의 情操(정조)를 발휘할 수 있는 品價(품가)높은 선우일서의 목소리가 <꽃을잡고>를 유행시키는데 一助(일조)하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또—-------“그러나 偶然(우연)히 그렇게 되여 세상에 알리게 된것이외다
선우일선의 아름다운 목에다 그노래가 읊어지고보니 나로서는 그것을 들을때는 無心(무심)히 지낼수가 없습니다
재미있다는 生角(생각)을 禁(금)할수없단 것이외다
노래가 그렇거니와 이면상씨의 그러한 작곡에다 선우일선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없었던들 나의 우스운노래가 그렇게 유행되리라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선우일선의 노래는 普通流行歌(보통유행가)로만 볼것이 아니라 朝鮮(조선)의 情操(정조)를 發揮(발휘)하는 우리 朝鮮民謠(조선민요)를 노래할 品價(품가)높은 목청이외다
누구누구하여도 조선민요로서 鮮于一 扇 (선우일선)의 목청이 아니고는 도저히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외다”-------라고 <三千里(삼천리)>紙(지) 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선우일선의”꽃을잡고”는 唱法(창법)이나 曲 雰圍氣(곡 분위기)가 旣存 新民謠(기존 신민요)와 “색다름”이 노래의 作品性(작품성) 나 歌詞(가사)의 完成度(완성도)
선우일선의 曲解釋力(곡 해석력) 를 떠나서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충분했습니다
당시 인기가수로 활약했던 최남용은 <꽃을잡고>를 들었을 때 느낌을 三千里(삼천리) 1938년, 8월호에 밝히고 있기도 합니다
---“ 아! 참 “꽃을잡고”였어요
아니 거리를 지나는데 樂器店(악기점) 擴聲(확성) 畜音機(축음기)에서 그노래가 나오는데 어떻게 좋았는지 몰라요
生前(생전)듣지못하던 소리길래 누군가 궁금해 하였더니 차차 여러군데서 말을들으니 평양서 올라온 新進(신진) 가수로 인물 잘나고 노래잘한다는 소문이 굉장했죠----“
이글을 통해서도 <꽃을잡고>가 당시 대중들에게 어느정도의 反響(반향)을 불러일어켰는지 짐작할수 있습니다
신민요는 당시 다양한 양식으로 시도되고 실험되었는데 요구가 충족된 상태에서 배태되는 정서를 담고잇는 것으로 대체로기쁘고 흥겨운 세계를 그리고있는것과 요구가 좌절되어
결핍된 상황에서 기본적으로 슬픔을 견지하고있는 노래가 그것입니다
헌데 이곡은 充足意識(충족의식)을 표출하고있는 일련의 신민요와는 다른 정서를 드러내고 있어서 주목됩니다
土俗的(토속적)인 詩語(시어) 의 사용이나 後斂(후렴)의 차용과 같은 신민요의 특징이 거의 드러나지 않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곡이 당시에 新民謠(신민요)로 認識(인식)되었다는 것은 왜일까요??
1048—꽃을잡고-D
土俗民謠(토속민요)와 다르면서도 民謠的質感(민요적 질감) 이 느껴지는 것은 旋律(선율)과 民謠(민요)의 情操(정조)를 繼承(계승)한듯한 선우일선의 哀傷的(애상적)인 목소리가
이곡을 新民謠(신민요)로 規定(규정)시킨 요소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면상의 뛰어난 창작력과 선우일선 독창적 창법이 유행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설명입니다
김안서의 지적처럼 선우일선의 목소리는 當時(당시) “朝鮮情操(조선정조)를 발휘하여 朝鮮民謠(조선민요)를 노래할 수 있는 品價(품가)높은목소리” 로 評價(평가) 받았단 말입니다
사실상 民謠的(민요적)인 목소리를 科學的(과학적)인 잣대로 정의내리기는 不可能(불가능)하나 중요한 것은 當代(당대)사람들이 선우일선의 목소리를 朝鮮民謠(조선민요) 情操(정조)를
드러내는 목소리로 認定(인정)했다는 점입니다
마치 JAZZ SINGER 빌리홀리데이 목소리를 當代(당대)의 美國人(미국인)들이 가장 美國的(미국적)인 목소리로 인정했듯이----
이렇게 규정한데는 우선 그녀가 妓生出身歌手(기생출신가수)로 “妓生歌手(기생가수)들이 傳統的(전통적)인 唱法(창법)과 雰圍氣(분위기)를알고 傳播(전파)하는 사람들”로 認識(인식)되곤
했고 그건 事實(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 朝鮮情操(조선정조)를 그당시는 주로 哀傷的(애상적적)인 情操(정조)를 의미하는 경향이 많았고 <꽃을잡고>를 들어보면 그녀의 창법이 土俗的(토속적)인 民謠(민요)나
雜歌(잡가)를 부르는 唱法(창법)과 다르다는 것을 알수있고 그녀는 技巧(기교)를 배제한채 높은음을 假聲(가성)으로 處理(처리)함으로써 感情(감정)의 節制(절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점으로 인하여 당대인들은 선우일선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슬픔을 “民謠的(민요적)인 實體(실체)”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旣存歌手(기존가수)와 색다름은 곡을창작한 이면상의 색다른 發想(발상)에 의해 吹入前(취입전) 練習課程(연습과정) 에서 선우일선에게 전해져 唱法(창법)등에 영향을 끼쳤을것입니다
허나 무엇보다도 임의부재에서 생기는 情緖(정서)라는 우리민족의 普遍的(보편적)인 정서를 表出(표출)하고 있기때문일것입니다
이와 같은 정서가 민요적인 이면상의 선율과 선우일선의 목소리와 만나면서 TROT-트로트- 와는 또다른 質感(질감)을 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시에<꽃을잡고>가 그토록 유행했던 이유가 될것입니다
1934년, 9월19일 東亞日報(동아일보) PPLYDOR-RECORD 廣告(폴리돌 레코드 광고), 9월21일 朝鮮日報(조선일일보) 廣告(광고)--------------------에는
名優(명우) 李景雪 孃(이경설 양) 永眠追憶盤(영면 추억반)
19137 新民謠(신민요) 꽃을잡고 鮮于一 扇(선우일선)
마음으로 名優(명우)의 永眠(영면)을서러워 합니다------------------------라고 廣告(광고) 하고있습니다
<꽃을잡고>는 POLYDOR-RECORD 발매 傑作(걸작)集(집) <追憶(추억)의노래> 上(상) 에 첫번째 노래로 불립니다
P19386-A 傑作集(걸작집) 追憶(추억)의노래 上(상) 獨唱(독창) 鮮于一 扇(선우일선) 臺詞(대사) 王平(왕평) 全玉(전옥)
伴奏(반주) 日本(일본) POLYDOR 폴리돌 管絃樂團(관현악단)
피는꽃 바라보며 웃던때가 언제이며
지는 잎 밟으며 울던때는 언젠가
마음에 피는꽃을 남이알까 감추며
靑春(청춘)을 속삭이던 그리운 時節(시절)
뜰아래 피는꽃을 한가지씩 꺾어들고
고요히 불러주전 追憶(추억)의노래
獨唱(독창) 鮮于一 扇(선우일선) 꽃을잡고 1절------ 하늘하늘 봄바람이 꽃이피면 다시 못잊을 그옛날
POLYDOR-RECORD 發行(발행) 1934년, 9월 十月(십월) 特別新譜(특별신보), 1934년, 10월 十一月(십일월) 新譜(신보)-----------에는
一 九一三七(19137) 꽃을잡고 鮮于一扇(선우일선)
못오시나요 崔昌仙(최창선)-------------------이라고 廣告(광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崔 昌仙(최창선)은 다른사람이 아닌 鮮于一扇(선우일선) 의 本名(본명)입니다
1049—朝鮮八景歌(조선팔경가) a
에~金剛山(금강산) 一萬二千 峰 (일만이천봉) 峰(봉)마다 奇巖(기암)이요 漢拏山(한라산)높아높이
俗世(속세)를 떠났구나 에헤라 좋구나 좋다 지화자 좋구나 좋다 名勝(명승)의 이 江山(강산)아
자랑 이로구나
에~石窟庵(석굴암) 아침景(경)은 못보면 恨(한)이되고 海雲臺(해운대) 저녁달은 볼수록 유정해라
에헤라 좋구나 좋다 지화자 좋구나 좋다 名勝(명승)의 이 江山(강산)아 자랑 이로구나
에~캠프의 赴戰高原(부전고원) 여름의 樂園(낙원)이요 平壤(평양)은 錦繡江山(금수강산) 靑春(청춘)
의 王國(왕국)이라 에헤라 좋구나 좋다 지화자 좋구나 좋다 名勝(명승)의 이 江山(강산)아 자랑이로구나
에~ 白頭山(백두산) 天池(천지)가엔 仙女(선녀)의 꿈이짙고 鴨綠江(압록강) 여울에는 뗏목이 景(경)이로다
에헤라 좋구나 좋다 지화자 좋구나 좋다 名勝(명승)의 이江山(강산)이 자랑이로구나
1936년 POLYDOR-RECORD 발매 新春特別新譜(신춘특별신보)로 片月作詞(편월작사) 邢奭基 作曲(형석기 작곡) 선우일선 노래로 실려있습니다
他面(타면) 王平(왕평) 改詞(개사) 金敎聲(김교성) 編曲(편곡) 선우일선 노래<新(신)닐리리>가 함께 실려있읍닉다
1936년, 6월 POLYDOR-RECORD 發行(발행) 新譜紙(신보지)--------------------------------에는
七月新譜(7월신보) 0發賣(발매)
19290 신 닐릴리 鮮于一 扇(선우일선)
朝鮮八景歌(조선8경가)
新民謠(신민요)의 二大傑作盤(2대걸작반) 朝鮮(조선)八景(팔경)歌(가)
新(신) 닐니리 寫眞(사진) 金敎聲(김교성)------------------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이노래는 1939년 1월 폴리돌x 502 로 再發賣(재발매) 되었습니다
이무렵 polydor-record 發行(폴리돌 레코드 발행) 歌詞紙(가사지)----------------------------------에는
Polydor x502-a 新民謠(신민요) 朝鮮八景歌(조선8경가) 片月作詞(편월작사) 邢奭基 作曲(형석기 작곡) 鮮于一扇(선우일선) 伴奏(반주) 日本(일본) 포리도루 管絃樂團(관현악단)
Ploydor x502-b 新民謠(신민요) 千里夢(천리몽) 劉漢作詞(유한작사) 金敎聲 作曲(김교성 작곡)) 李花子(이화자) 伴奏(반주) 日本(일본) 포리도루 管絃樂團(관현악단)------------라 表記(표기)하고
있습니다
<朝鮮八景歌(조선팔경가)> 再發賣時(재발매시) 이화자의 노래 <千里夢(천리몽)>과 함께 실려있음을 알수있께 합니다
어느기록에는 이곡이 1939년 1월 재발매시<朝鮮八景(조선팔경)>으로 제목이 개제되었다고 허나 그렇지않읍니디
상기 歌詞紙(가사지)에는 여전히 <朝鮮八景歌(조선팔경가)>로 表記(표기)되있습니다
곡을 創作(창작)힌 作曲家(작곡가)邢奭基(형석기)씨가 한해여름을 慶州(경주)에서 보냈을 때 石窟庵(석굴암)의 아침 景觀(경관)에 感動(감동)하여 얻은 曲想(곡상)으로 流行歌調(유행가조)
를 意識(의식)하여 4분의2박자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解放後(해방후)에는<大韓八景(대한팔경)>으로 개제하여 황금심, 김세레나, 박재란, 하춘화씨등이 remake 했습니다
성음레코드발매 lp音盤(음반) 歌謠(가요)半世紀(반세기)-에 박재란씨 버전이 들립니다
어찌보면 八景(팔경)이란 말은 우리귀에 익숙한 句節(구절)입니다
<關東 八景(관동팔경)><丹陽八景(단양팔경)><關西八景(관서팔경)><平壤八景(평양팔경)<北村八景(북촌팔경)>등등 우리 祖上(조상)들이 붙여놓은 全國(전국)혹은 地域單位(지역단위)
의 名勝(명승)은 여덟개로 많이 묶었습니다
1930년대중반 jodk 京城放送局(경성방송국)에서 朝鮮(조선) 全地域(전지역)을 대상으로 빼어난 景勝地(경승지)를 추천하도록해 이들중 여덟곳을 택해서 지은노래가 “朝鮮八景歌조선팔경가)“
라고 記錄(기록)한 글도보입니다
1050--朝鮮八景歌(조선팔경가)-b
조선팔경가 노래속의 八景(8경)은 北韓地域 (북한지역)”金剛山(금강산) 一萬二千峰(일만이천봉)” ”赴戰高原(부전고원)” “平壤(평양) 錦繡江山(금수강산)” “白頭山(백두산) 天池(천지)” “鴨綠江(압록강)
여울” 등 5곳이고 南韓地域(남한지역) “漢拏山(한라산)” “石窟庵(석굴암) 아침景(경)” “ 海雲臺(해운대) 저녁달”등 3곳입니다
이중에서 특히 咸鏡南道(함경남도) 赴戰高原(부전고원)은 여름의 樂園(낙원)이고 平壤(평양)의 錦繡江山(금수강산)인 牡丹峯(모란봉) 乙密臺(을밀대)는 靑春男女(청춘남녀)의 王國(왕국)이라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노래는 解放政局(해방정국)과 六二五戰爭(육이오전쟁)을 거친후 南北韓(남북한)이 尖銳(첨예)한 ideologie-이데올로기- 競爭(경쟁)을 벌일시 북한에서는 이러한 大衆歌謠(대중가요)마저
體制宣傳(체제선전)에 活用(활용)키위하여 노래속 南韓(남한) 名勝地(명승지)는 削除(삭제)하고 온통 北漢 地域(북한지역)역 名勝地(명승지)로 어거지로 끼워맞춰 불렀습니다
한편 남한에서도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中國地名(중국지명)이 많이 등장하던 것이 사라진것과 비슷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는 육이오당시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통일의꿈이 물거품이된 중공 인민의용군의 抗美援潮(항미원조)의영향이 크다 할수있습니다
이곡이 해방후 황금심씨에 의하여 remake 되었을때<大韓八景(대한팔경)>으로 改題(개제)되었습니다
1950년대중반 king star-record 서 sp음반으로<三多島(삼다도) 消息(소식)>과 함께 발표되었습니다
후면곡<三多島(삼다도)消息(소식)>은 3번째 취입으로 작곡가 박시춘이 피난지 제주도에서 유호씨와 육군 제1훈련소 군예대장으로 근무시 <제1훈련소가>등과함께 작곡한 노래로
”이곳에서 노래한곡 남기고가자”며 유호씨를 설득 가사를 쓰도록 의뢰했습니다
그리고 1951년경 군예대장직을 유호씨에게 떠맞기고 대구orient-record 로 복귀해 이곡을 같이소속되있던 황정자씨에게 처음취입시켰으나 弘報不足(홍보부족)으로 불발하자 1954년 부산에서
손영준과 김흥산이 차린 stat-record 서 이번에는 황금심씨에게 remake 를 시킵니다
1954년, 7월4일자 新聞廣告(신문광고) 에 제1회신보로 신세영의<바로그날밤> 이예성의<戰線(전선)小夜曲(소야곡)>박단마의<shoeshine-boy-슈사인보이>등과 함께 광고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king star-record 서 star-record 서 녹음했던<三多島(삼다도)消息(소식)>을 또취입합니다
全體的(전체적)으로 3번째 황금심씨는 두번째 吹入(취입)입니다
朝鮮八景歌(조선팔경가) 창작에 깃든 이야기인 작곡가 이면상이 생전남긴 <가요와 더불어 60년>중’잊을 수 없는 그날밤”을 소개합니다
日帝(일제)의 歌謠彈壓(가요탄압)이 極甚(극심)해지던 1935년경 작곡가 邢奭基(형석기)가 朝鮮八景歌(조선팔경가) 礎稿(초고)를 써가지고 나에게 도움을 求(구)엿습니다
우리는 그때 매우가깝게 지냈는데 서로 作品(작품)을 創作(창작)하면서 意見(의견)을받아 고치곤 했는데 그가 찾아온 것은 이른 저녁이었는데 旋律(선율)을 더듬어보니 新通(신통)치 않았습니다
우리는 마주앉아 밤이 깊도록 이런상을 잡아볼까 저런상을 잡아볼까 하면서 여러곡을 써보았지만 하나도 맘에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忍耐心(인내심)을 발휘하여 苦心(고심)끝에 드디어 韻致(운치)있는 旋律(선율)을 뽑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祖國(조국)의 아름다운 三千里江山(삼천리강산)을 노래한 조선팔경가는 完成(완성)되었지만 그날밤 난처한일이 생겼습니다
咸興市(함흥시) 덕산 산골에서 가난한 火田農(화전농)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겨우 私立學校(사립학교) 4학년을 마치던해에 어머님이 病患(병환)으로 世上(세상)을 떠났습니다
그후 나는 家門(가문)의 風習(풍습)대로 어머님이 돌아가신날이면 간단히 食盤(식반)을 차려놓고 祭祀(제사)를 지내곤 하였는데 바로그날이 제삿날 이었습니다
그런데 형석기씨와 마주앉아 창작에 여념이없다보니 祭祀(제사)에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었을 때 아내가 부엌에서 食盤(식반)을 차려가지고 올라왔습니다
아내는 우리가 곡을 다듬기에 골몰하는 것을 보고 조심히 상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를 까마득이 모르는 그들이 노래를 完成(완성)하고보니 상곁에 한되들이 술병까지 놓여있었습니다
해서 “온밤 창작하느라고 수고하였는데 親舊(친구)과 한잔하라는 酒案床(주안상)인 게다” 하라고 꿈도야무지게 着角(착각)을하고는 형석기와 마주앉으니 노래를 완성한김에 술이아니라
기쁨을 마시는 기분이었습니다
비록 형석기의 작품이었지만 자기작품을 완성한듯 기뻤습니다
그런데 빈병을 내려놓으려 할 때 아내가 다시올라오더니”祭祀(제사)를 지내긴 지냈소?” 라며 조용히 물었습니다
“뭐 祭祀(제사)?”
나는 그제사 그날이 어머니의 제사라는 生角(생각)이 났습니다
“아니 그걸 이제사 말하우?”
“어제 아침에 말헀는데 그사이 잊어먹었어요??”
“그런걸 난-----이걸어쩐다?’
“상위에다 밥한그릇만 놓은걸 보면몰라요? 손님이 오셨는데 그럴 여자가 어딨어요?”
그날 이면상은 아내보기가 무척 미안했습니다
어머니의 祭祀(제사)도 까먹은 子息(자식)이되었으니 부끄러운 일이 이닐수 없었습니다
하는수없이 술이나 부어놓고 절이나 하자했으나 술이 없다는 아내 대답이었습니다
“새벽3시가 넘었으니 받아올수도 없고----“
아내가 난처해하자 형석기는 너무나도 미안해서 몸둘바를 몰라했습니다
“여보 오늘밤 명곡을 뽑아냈지 않소 그야말의 朝鮮(조선)의 名曲(명곡)이요!! 그걸 어머님이 아시면 대단히 기뻐할것이요!!”
“그러구말구요 틀림없이 그러실것입니다”
눈치빠른 아내가 이렇게 맞장구를 치자 그들은 상위에 술대신<朝鮮八景歌(조선 팔경가)> 樂譜(악보)를 올려놓고 절을했습니다
그때로부터 아득한 歲月(세월)이 흘렀건만 나에게는 지금도 형석기의 그곡을 완성하던 그날반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1051—豊年(풍년)맞이- 강홍식, 조금자 노래
山(산)에들에 五穀(오곡)이 가득히 차니 洞里(동리)洞里(동리) 즐거워 웃음 이로구나
북을펴라 뛰놀자 기쁨의 時節(시절) 坊坊曲曲(방방곡곡) 三千里(삼천리) 豊年(풍년)
이로다 북을쳐라 두두둥실 두리두리둥실 穀(곡)석단은 하나둘 많기도하다
노적가리 쌓여서 山(산)을 이루니 땀방울도 한해엔 玉(옥)이 되누나 북을쳐라
뛰놀자 기쁨의 時節(시절) 이집 저집 마당엔 도리깨소리 북을쳐라 두두둥실
두리두리둥실 穀(곡)석단은 많기도하다
아침저녁 떡치는 氣運(기운)찬소리 激昻歌(격앙가)도 꿈속에 옛노래로다
북을쳐라 뛰놀자 기쁨의 時節(시절) 豊年(풍년)맞이 三千里(삼천리) 춤이로구나
북을쳐라 두두둥실 두리두리둥실 穀(곡)석단은 많기도하다
1934년, 12월 Columbia-record 발매 sp音盤(음반)-유도순작사 전기현작곡 강홍식, 조금자 듀엣노래
他面(타면) 유도순사, 전기현곡 강홍식의<朝鮮 打令(조선타령)>이 함께 실려있습니다
當時(당시) Columbia-record 發行(콜럼비아 레코드발행) 歌詞紙(가사지)--------------------------------------------------에는
C40565-a 新民謠(신민요) 朝鮮打令(조선타령) 劉道順 作詞(유도순 작사) 全基玹 作曲(전기현 작곡) 與山貞吉 編曲(편곡) (여산정길 편곡) 姜弘植(강홍식) 콜롬비아 女子合唱團(여자합창단)
伴奏(반주) 콜롬비아 管絃樂團(관현악단)
C40565-b 新民謠(신민요) 豊年(풍년)맞이 劉道順 作詞(유도순 작사) 全基玹 作曲(전기현 작곡) 與山貞吉 編曲 (여산정길 편곡) 姜弘植(강홍식) 趙錦子(조금자) 伴奏(반주) 콜롬비아 管絃樂團(관현악단)
--------------------------------------------------------------------------------라고 表記(표기)되있는바 강홍식과 듀엣으로 가창하고있는 조금자씨는 1934년 Columbia-record 주최 全鮮(전선) 9도시 콩쿠르대회 본선에서 정일경에 이어서 2위로 입선해서 專屬歌手(전속가수)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윤극영이 주관한 다이아회에서 노래를하고 중앙보육학교 졸업후 평북 강계에있는 유치원에 취직했으나 콩쿠르대회 선전문구를 보고 응모해 2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녀는 1934년 3월13일 정일경과 함께 京城放送局(경성방송국)에 출연했습니다
당일선전된 광고에는---“當選(당선) 名歌姬(명가희) 豪華版(호화판) 人氣(인기) 白熱化(백열화)”로 선전되고 그날밤 <冬柏(동백)꽃>< 離別(이별)서러워>를불렀습니다
이어서 4월22일에는 콜롬비아레코드 當選歌手(당선가수) 들은 동이일보주최 本社懸賞(본사현상)當選歌發表(당선가발표) 音樂大會(음악대회) 에 콜롬비아 전속가수들과 함께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流行歌歌手(유행가가수)로 발을 내디디었으나”表面上(표면상)의 華麗(화려)함뒤에 숨겨져있는 誘惑(유혹)의 時間(시간) 때문에 便安(편안)한 생활을 할수없다”는 이유로 가수를 그만두고
幼稚園(유치원)으로 돌아갔습니다
1938년, 1월4일 東亞日報(동아일보) <藝術部分(예술부분)의 異彩(이채)들>에 확인됩니다
그녀는 후일 小說家(소설가) 김영수와 결혼을 했습니다
1934년, 12월23일 東亞日報(동아일보) Columbia-record 廣告(콜롬비아 레코드 광고)------------------------------에는
半島(반도)를 振動(진동)시키는 朝鮮打令(조선타령) 姜弘植(강홍식) 즐겁다 조선을 축복하세
1936년, 6월 Columbia-record 發行(발행) 每月新譜(매월신보)-------------------------------------------------------에는
專屬作曲家(전속작곡가) 의 0發賣傑作盤(0발매걸작반)!!
全基玹氏(전기현씨) 傑作-걸작-레코드
40568 豊年(풍년)맞이
朝鮮打令(조선타령)
寫眞(사진) 全基玹(전기현)---------------------------------------------------------------- 라고 廣告(광고)하고 있어서 發賣後(발매후) 2년의 歲月(세월)이 흐른후 人氣(인기)가 上昇(상승)하고
있음을 感知(감지)하게 합니다
1052—豊年(풍년)맞이-b
上記曲(상기곡) 豊年(풍년)맞이는 제목에도 들어있듯이 豊年(풍년)의 기븜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노래의 詩語(시어)를보면 當時(당시)의 trpt-트로트-나 jazz song-재즈송-과는 달리 土俗的(토속적)인 詩語(시어)가 많이 쓰이고있음을 알수있습니다
“五穀(오곡)” “坊坊曲曲(방방곡곡)” “洞里(동리)洞里(동리)” “노적가리” “도리깨” 와 같은 疊語(첩어)의 使用(사용)은 작품의 rhythm感-리듬감-을 더해줍니다
이러한 疊語(첩어)는 “두두둥실” “두리두리둥”과 같은 북소리와 만나서 作品(작품)의 rhythm感(리듬감) 뿐만 아니라 聽覺的(청각적)인 즐거움까지 膳賜(선사)하기도 합니다
“豊年(풍년)맞이”는 노랫말과 旋律(선율)모두에서 興(흥)겨움과 웃음을 誘發(유발)시킵니다
그런데 이곡에서 드러나는 웃음은 漫搖(만요)의 웃음과는 다른 次元(차원)의 웃음이라 할수있습니다
즉 諧謔(해학)과 諷刺(풍자)를 통한 웃음이 아니라 즐거움과 기쁨으로 넘쳐나는 웃음인 것입니다
“豊年(풍년)맞이”에서 드러나는 기쁨과 興(흥)겨움의 情緖(정서) 이미 民謠(민요) 豊年歌(풍년가)에서 느낄수있는 情緖(정서)와 거의一致(일치)합니다
고로 新民謠(신민요) “豊年(풍년)맞이” 에서 처럼 豊年(풍년)을 素材(소재)로한 노래는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口傳民謠(구전민요)
豊年歌(풍년가)에서 그痕跡(흔적)을 찾을수있습니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新民謠(신민요)中(중)에서 豊年(풍년)을 主題(주제)로한 노래는 많이 볼수있습니다
上記(상기)曲(상기곡) “豊年(풍년)맞이”와 同名異曲(동명이곡)인 金敎聲作(김교성작) 全玉(전옥)노래, 문호월곡 고복수, 이은파노래<豊年頌(풍년송)>, 임명학곡 이규남노래<豊年歌(풍년가)>,
손목인곡 이해연노래<아리랑 豊年(풍년)> 김교성곡 진방남노래<돈 豊年(풍년) 쌀 豊年(풍년)>이기영작곡 이은파, 최남용노래<豊年打令(풍년타령). 김면균곡 선우일선노래<豊年(풍년)맞이>
김준영곡 강홍식노래<新(신)農夫歌(농부가)>---등등 많이 있습니다
口傳民謠(구전민요) “豊年歌(풍년가)”와 “豊年(풍년)맞이”를 포함하여 풍년을 주제로한 다른 신민요들은 대체로 풍년을 맞이한 기쁨과 充足感(충족감)만 보여줄뿐 詩的話者(시적화자)의
葛藤(갈등)이나 煩悶(번민)은 거의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事實上(사실상)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라는 時代的狀況(시대적상황)과 豊年(풍년)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니 正確(정확)히 얘기해서 어울리지않는 게아니라 豊年(풍년)은 事實(사실)이 아닙니다
觀念的(관념적)으로볼 때 日帝强点期(일제강점기)는 豊年(풍년)보다는 凶年(흉년)이 더어울리는 時代(시대)인것입니다
설사 豊年(풍년)이 들었다해도 일제의 무자비한 收奪(수탈)로 우리民族(민족)에겐 豊年(풍년)일수가 결코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에 이토록 豊年(풍년)의기쁨을 그리고있는 新民謠(신민요)가 상당수 登場(등장)한 것을 어떻게 理解(이해)해야 할까요??
일단 풍년의기쁨을 노래한 신민요는 民謠(민요) 豊年歌(풍년가)의 주제를 繼承(계승)한것이라 할수있을것입니다
즉 앞서 言及(언급)했듯이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갑자기 出現(출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민요가 민요를 계승하는 가운데 풍년을 주제로한 민요가 신민요로 거듭난것입니다
“豊年(풍년)맞이”는 口傳民謠(구전민요) 豊年歌(풍년가)의 主題(주제)만을 계승한 것이 아닙니다
土俗的(토속적)인 詩語(시어)와와 疊語(첩어)의 使用(사용) 後染(후렴)의 活用(활용)과 같은 民謠(민요)의 型式(형식)도 계승했습니다
이렇게 주제와 형식에서 傳統(전통)을계승한 신민요는 더나아가 민요의 語法(어법)마저 이어받습니다
---“實現(실현)되기를 希望(희망)하는 結果(결과)를 미리 行動(행동)이나 말로 나내면 希望(희망)의 實現(실현)이 可能(가능)하다고믿는 呪術(주술)의 基本的(기본적)인 원리에서나온 發話(발화)”
의 語法(어법)마저 繼承(계승)한것입니다
이는 一種(일종)의 “選擇(선택)된 未來(미래)”로서의 意味(의미)를 지니며 이미 國土禮讚(국토예찬)을 主題(주제)로한 新民謠(신민요)에서 확인한 사실입니다
이처럼 先取(선취)된 未來(미래)를 통해 간절한 所望(소망)을 표현하는 技法(기법)은 수많은 民謠(민요)에서 이미 그淵源(연원)을 찾을수있을 뿐만아니라 “서동요” 같은 鄕歌(향가)에서도
그일단을 엿볼수있습니다
서동이 소망하는바를 이루기위하여 그러한내용을 이미 이루어진것처럼 노래에담아 流布(유포)시켰고 그를통해 자신의 所望(소망)대로 善花公主(선화공주)와 結婚(결혼)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로보아 <豊年(풍년)맞이>도 先取(선취)된 未來(미래)를통해 所望(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語法(어법)을 繼承(계승)했고 新民謠(신민요)가 口傳民謠(구전민요)의 形式(형식)과
內容(내용)을 借用(차용)하면서 自然(자연)스레 繼承(계승)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口傳民謠(구전민요)를 통하여 이러한 傳統語法(전통어법)에 익숙해졌던 新民謠(신민요) 生産者(생산자)나 需用者(수용자)들도 拒否感(거부감)없이 받아드렸다고 보여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豊年(풍년)의기쁨”이 어울린다고 볼수는 없습니다 그시기 갈등이나 번민이 없었을리 없었으니깐요
다만 一年內內(일년내내) 계속되는 고통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동안만이라도 그고통에서 벗어나고 픈 所望(소망)을 노래한것일테고 穩全(온전)한 나라에서 보면 결코 豊年(풍년)일리없는
現實(현실)이지만 그렇게라도 抑止假定(억지가정)이라도
해서 살아남아야 했기에--- 이러한 事情(사정)을 너무나 잘아는 新民謠(신민요)創作者(창작자)나 需用者(수용자)나 거짓인줄알지만 呪術(주술)이라고 걸어서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1053—朝鮮打令(조선타령)-a
아`~ 白頭山(백두산) 솟아소 精氣(정기)를 뻗치니 三千里(삼천리) 山野(산야) 기름이 졌네
에라좋아 얼수 에라 좋아라 五大江(5대강) 十大山(10대산) 널린 곳에서 二千萬(2천만)
百姓(백성)이 잘도나 사네 즐겁다 朝鮮(조선)을 祝福(축복)을 하세
아` 田畓(전답)에 五穀(오곡)이 金波(금파)지으니 三千里(삼천리)山野(산야) 춤속에 뛰네
에라좋아 얼수 에라 좋아라 金剛山(금강산) 妙香山(묘향산) 山(산)과 山(산)들은 奇花(기화)
라 妖草(요초)라 비단을 피네 즐겁다 朝鮮(조선)을 祝福(축복)하네
아` 文物(문물)이 燦爛(찬란)히 꽃같이 폈으니 三千里(삼천리) 山野(산야) 노래에 차네
에라 좋아 얼수 에라 좋아라 鴨綠江(압록강) 豆滿江(두만강) 江(강)과 江(강)들은 金魚(금어)라
銀魚(은어) 玉流(옥류)를 짓네 즐겁다 朝鮮(조선)을 祝福(축복)을 하세
아~뛰어난 人物(인물)이 수많이 났으니 三千里(삼천리) 山野(산야) 살아서 뛰네
에라좋아 얼수 에라 좋아라 英雄(영웅)과 豪傑(호걸)에 文章(문장)이 나니 말한과 행함이 힘있게
사네 즐겁다 朝鮮(조선)을 祝福(축복)하세
全體(전체) 4절로 이루어진 이곡은 유도순이 가사를쓰고 여기에 전기현이 이른바 男性(남성)的(적)이고 우렁찬 曲調(곡조)를 붙인것이다
上記(상기) 新民謠(신민요)”朝鮮打令(조선타령)” 은 앞란서 紹介(소개)드린<豊年(풍년)맞이> 他面(타면)에 실려있는 곡입니다
曲곡이 發賣(발매)된지 4개월이지난 1935년 4월4일자 東亞日報(동아일보) Columbia-record 發行 廣告(콜롬비아 레코드발행 광고)---------------------에는
半島(반도)를 振動(진동)시키는 40565 新民謠(신민요) 朝鮮打令(조선타령) 姜弘植(강홍식)-----------------------이라고 宣傳(선전)하고있어서 上記(상기) 新民謠(신민요)의 人氣(인기)가
上昇(상승)하고 있음을 알게합니다
<朝鮮打令(조선타령)>을 창작한 전기현은 이노래의 作曲背景(작곡배경)을 1935년, 11월호”三千里(삼천리)’紙(지)” 다음과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朝鮮打令(조선타령)이 詩人(시인) 유도순씨의 力作(역작)인데 그야말로 遺憾 (유감)없이 朝鮮(조선)의 精氣(정기)를그린 그의 一生一代(일생일대) 傑作(걸작)이외다
이노래는 우리 三千里 半島(삼천리 반도) 江山(강산)에 幸福(행복)을 祝願(축원)한 노래입니다
白頭山(백두산)에서 精氣(정기)가 뻗쳐 남쪽끝의 濟州島(제주도) 漢拏山(한라산)가지 三千里江山(삼천리강산)은 비단폭을 드리운듯 기름진 錦繡江山(금수강산)은 世界(세계)에 자랑인
아름다운 東山(동산)이외다
이것을 우리가 차지하고 있으면서 우리의것을 우리가 슬000사람 인것입니다
그래서 시인 유도순씨가 지은것으로 그노래가 活氣(활기)있게 작사되었는데 여기에 꼭들어맞는 姜弘植(강홍식)씨가 그우렁차고 活氣(활기)있고 男性的(남성적)인 목소리에다
조금이라도 남에게 오직 칭찬받겠다는 그 목젖창을 내인것없는 아주 씩씩한 남자의 노래를 遺憾(유감)없이 發揮(발휘)한 名曲絶唱(명곡절창)인데 “이것이 나오자 半島(반도)가
振動(진동)해버렸습니다”
이부분은 上記(상기) 1935년, 4월4일자 東亞日報(동아일보) 廣告(광고)에서도 접할 수 있는 말입니다
지금 市內(시내) 모 女學校(여학교)에서도 배우고있는 것은 流行歌(유행가)로서 강홍식씨의”朝鮮打令(조선타령)” 뿐일것입니다
그 句節(구절) 句節(구절) 마디마디 넘어갈때에 어깨춤이 절로나며 우렁찬 목소리로 靑山流水(청산유수)와같이 시원시원하게 부른노래는 과연 힘을주고 蘇生(소생)을줄 노래의 하나입니다
여기에 그作詞(작사)를 보아도 알것입니다
1054--朝鮮打令(조선타령)-b
新民謠(신민요)”朝鮮打令(조선타령)”은 앞선 전기현의 回告(회고)에서도 언급했듯이 시인 유도순이 三千里江山(삼천리강산)의 幸福(행복)을 祝願(축원)하기위해 지은 노래입니다
유도순이 白頭山(백두산)에서 漢拏山(한라산)까지 三千里(삼천리)半島(반도) 江山(강산)의 아름다움을 活氣(활기)있게 作詞(작사) 하였으며 여기에 姜弘植(강홍식)의 우렁찬 목소리까지
곁들여져 매우 씩씩하게 들리는 노래입니다
이곡이 나오자 半島(반도)가 振動(진동)할정도로 人氣(인기)가있었고 市內(시내)의 모여학교에서는 이노래를 배우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이곡은 純粹(순수)하게 朝鮮國土(조선국토)에 대한 讚揚(찬양)이라는 目的(목적)으로 창작된 노래라 할수있습니다
게다가 이노래는 曲調面(곡조면)에서도 民謠(민요)의 傳統(전통)을 繼承(계승)하고있어서 당시에 우리것을 渴望(갈망)하던 大衆(대중)의 慾求(욕구)를 어느정도 채워줄수
있었던것으로 보입니다
특이 白頭山(백두산) 金剛山(금강산) 妙香山(묘향산) 鴨綠江(압록강) 豆滿江(두만강) 등 具體的(구체적)인 山(산)과 江(강)이름을 詩語(시어)로 活用(활용)한 것은 注目(주목)됩니다
事實性(사실성)과 現場性(현장성)을 康調(강조)하기위한 장치로서 實際地名(실제지명)을 사용하는 것은 交換唱(교환창) 모내기노래와 같은 민요에서 이미 사용하던 기법입니다
그런데 “朝鮮打令(조선타령)”을 비롯한 國土禮讚(국토예찬)을 주제로한 大部分(대부분)의 新民謠(신민요)가 實際地名(실제지명)을 詩語(시어)로 活用(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현상이 신민요만의 특징은 아니고 그시기 toot-트로트-에서도 같은 현상이 존재했습니다
신민요에서 실제지명을 활용하고있는 것은 單純(단순)히 事實性(사실성)과 現場性(현장성) 康調(강조)를넘어서 特殊(특수)한 意味(의미)를 지닙니다
白頭山(백두산)과 같은 具體的(구체적)인 地名(지명)은 한국인에게만 特殊(특수)한 文化cord-문화코드-이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일본인이 백두산을 언급할때와 한국인이 백두산을 거론할때는 분명히 그의미가 달라질수밖에 없습니다
日本人(일본인)에 있어서는 白頭山(백두산)은 그저 수많은 산중의하나 일뿐이나 우리리나라 사람들에겐 民族的(민족적)인 精氣(정기)가 서려있는 韓國第一(한국제일)의 山-산-인것입니다
헌데 이곡이 發表(발표)된 時期(시기)에는 國權(국권)을 喪失(상실)하고 白頭山(백두산)마저 빼앗겨버린 悲劇的狀況(비극적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상황에서 불러보는 白頭山(백두산)은 當代人(당대인)들에게 가슴 아프면서도 情感(정감)어린 대상으로 다가올여지가 充分(충분)히 있는것입니다
當時(당시)의 大衆(대중)은 적어도 조선타령을 부르는 동안만은 마음껏 우리나라의 산과강이름을 불러볼수있엇고 이러한 理由(이유)로 국토예찬의주제를 단고있는 노래가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내내 持續的(지속적)인 人氣(인기)를 얻을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34년 12월 이곡이 發賣(발매)되었을 때 最初(최초)의 大衆舞踊(대중무용) 레코드 라고 되있고 많은 販賣高(판매고)를 올렸습니다
“朝鮮打令-조선타령-“각절은 獨立-독립-된形式-형식-을 이루고 있어서 각절사이의 聯關性(연관성)은 크지않으나 “國土(국토)를禮讚(예찬)한다”는 次元(차원)에서 統一(통일)된 主題(주제)를
드러내고있는 노래입니다
그러면 조선타령에서 “朝鮮(조선)을 祝福(축복)하세”와 같은 表現(표현)이 무엇을 意味(의미)하는지 檢討(검토)할 必要(필요) 가있습니다
決論的(결론적)으로 말해서 앞선란의<풍년맞이>에서 言及(언급)한 것처럼 이노래도 一種(일종)의 先取(선취)된 未來(미래)를 담고있는 곡으로 볼수있습니다
비록 現在形(현재형)으로 內容(내용)이 진행되고 있으나 이는 話者(화자)의 바램과 所望(소망)을 담고있는것으로 볼수있습니다
이점은 作曲者(작곡자)인 전기현이 朝鮮打令(조선타령)을 가리켜 “三千里(삼천리)半島(반도) 江山(강산)의 幸福(행복)을 祝願(축원)한 노래” 라고 言及(언급)한 대목에서도 確認(확인)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타령에서 사용하고있는 現在形(현재형)의 어법은 앞으로 그렇게되기를 바라는마음을 이미 그렇게 된것처럼 현재형으로 읊어서 소망의 懇切(간절)함을 强調(강조)한것으로 이해됩니다
4절에서는 이와 같은 소망이 더욱더 具體的(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뛰어난 人物(인물)이 수많이 나왔으니 三千里(삼천리)山野(산야)가 살아서 뛰네”와”英雄(영웅)과 豪傑(호걸)이 紋章(문장) 에나서 말과행함이 힘있게사네”는 뛰어난 인물이 많이니와서
三千里江山(삼천리강산)이 살아서뛰고 英雄(영웅)과 豪傑(호걸)이 紋章(문장)에나서 말과행동을하는데 있어서도 힘있게 하였으면 좋겠다는 念願(염원) 꼭 그렇게 되리라는 意志(의지)의
反映(반영) 이라 할수있습니다
“微微(미미)하게나마 民族主義的(민족주의적) 의식을 內包(내포)하고있으나 “三千里山野 (삼천리산야)에 기름이졌네” 라고 하였을 때 當時(당시) 植民地(식민지) 百姓(백성)들의 現實(현실)이
어떠했는가에대한 反省的(반성적)인 苦惱(고뇌)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서 一方的(일방적)인 禮讚(예찬)과 祝福(축복)은 당대 大衆的(대중적)現實(현실) 과 情緖(정서)의 歪曲(왜곡)에 불과하다”
는 이 歌謠(가요)를 批判(비판)하는 글도 있습니다
1055—봄맞이-a 이난영
얼음이 풀려서 물우에흐르니 흐르는 물우에 겨울이간다
어야 드야 어허으리 노를저으라 봄맞이 가자
냇가에 수양버들 실실이 늘어저 흐르는 물우에 봄便紙(편지)
쓴다 어야 드 야 어허으리 돗을 감어라 봄맞이 가자
제비한쌍 물차고 날아와 어서 가보랜다 니계신곳에
어야 드야 어허의 노를 달여라 봄맞이 가자
1934년,2월 okeh-record 발매 sp음반-윤석중시 문호월곡 이난영노래로 실려있습니다
他面(타면) 김능인사 김준영곡 이난영노래<사랑의고개>가 함께 실려있습니다
이詩(시) 는 兒童文學家(아동문학가) 尹石重 氏(윤석중씨) 作品(작품)입니다
1933년, 3월23일자 東亞日報(동아일보)紙面(지면)에 民謠(민요)로 소개되있는바 record化(레코드 화)했을때는 가사를 약간 바꾸어 사용했습니다
이곡은 “노들강변” 과 거의同時(동시) 發賣(발매)되었는데< 봄맞이는 1618 노들강변은 1619> 노들강변이 3박자로된 朝鮮(조선)民謠調(민요조)인데 반해 4분의2박자이며
rhythm 構成(리듬구성)이 日本風(일본풍)입니다
그 때문에 流行歌(유행가)라 表記(표기)했을것입니다
1934년, 1월22일 okeh-record 廣告(오케이 레코드 광고)--------------------------------------에는
二月新譜(2월신보) 一月二十(1월20일)發賣(발매)
創立(창립) 一週年記念(1주년기념) 特別(특별)號(호)
1618 流行歌(유행가) 봄맞이 獨唱(독창) 李蘭影(이난영)
사랑의 고개----------------------------------라고 表記(표기)되있어서 “봄맞이”를 新民謠(신민요)가아닌 流行歌(유행가)로 紹介(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시기 신민요는 쉽게 얘기해서 日本(일본) record資本-레코드자본-이 한국에들어와 처음 民謠(민요) 판소리등 朝鮮國民(조선국민)들의 입맛에맞는 素材(소재)를 錄音(녹음) 音盤化(음반화) 해서
營業(영업)을했고 1930년대 중후반 레코드화할 素材(소재)가 고갈해 販賣-판매-가 不振(부진)하자 日本(일본)서 먼저시작한 新民謠(신민요)를 한국 作曲家(작곡가)에게 의뢰하여
새롭게 音盤化(음반화) 해서 販賣(판매)하기 시작합니다
新民謠(신민요)는 自生的(자생적)인 大衆歌謠(대중가요)로 積極的(적극적)인 자리매김이 가능한 갈래입니다
基本的(기본적)으로 民謠(민요)를 念頭(염두)에두고 만들어진 갈래이기 때문에 民謠(민요)瓦(와) 類似(유사)한 側面(측면)이많습니다
물론 신민요가 曲調(곡조)의 側面(측면)에서는 西洋大衆音樂(서양 대중음악)과 日本大衆音樂(일본대중음악)의 影向(영향)을 받은부분이 있는건 事實(사실)이나 新民謠(신민요)의 企劃(기획)은
어디까지나 民謠(민요)의 現代化(현대화) 내지는 民謠(민요)의 大衆化(대중화) 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大衆化(대중화)된 結果物(결과물)인 音盤販賣 代金(음반판매대금)이 누구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느냐입니다
當代(당대)에도 新民謠(신민요) 企劃(기획)이 “민요의 現代化(현대화) 民謠(민요)의 大衆化(대중화) ” 라는---- 그와 같은 認識(인식)에서 新民謠(신민요)가 創作(창작)되었습니다
그 課程(과정) 에서 新民謠(신민요)는 欲求(욕구)가 충족된 기쁘고 흥겨운 世界(세계), 慾求(욕구)가 挫折(좌절)되어 결핍된 상황에서 슬픔을 간직한 노래로 크게 나누어 질수있습니다
<봄맞이>는 앞서 언급한 앞선설명 부분의 充足意識(충족의식)을 表出(표출)하고있는 신민요에 속한다 할수있습니다
이곡은 봄맞이의 즐거움과 기쁨을 全體的(전체적)으로 밝게그리고 있습니다
이곡을 작사한 윤석중씨는 주로 童謠創作(동요창작)에 專念(전념)한 童謠作家(동요작가)인바 “봄맞이”에서도 童謠(동요)에 등장하는 世上(세상)처럼 말고 平和(평화)로운 世界(세계)가 보입니다
이곡에서는 얼음이 풀려서 물우에 흐르고 냇가에 수양버들이 실실이 늘어져서 겨울이가는 平和(평화)로운 공간이 그러져있습니다
아러한 世界(세계)는 모든 것이 順理(순리)대로 잘돌아가는 세계로 自然(자연)의 規則(규칙)과 常道(상도)가 지켜지는 세계라 할수있습니다
게다가 제비한쌍이 물을차고 날아오르는 力動的(역동적)이면서도 希望(희망)찬 光景(광경)이 演出(연출)되고 있습니다
물을차고 오른 제비는”님이 계신곳으로 어서가보라”며 詩的話者(시적화자)에게 말을 건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새가 사람에게 말을 건내는 것은 자연과 사람이 共存(공존)하고 同化(동화)하는 것을 意味(의미)한다고 볼수있습니다
이러한 情緖(정서)는 民謠(민요)를 부르는 共同體文化(동동체문화)에서 胚胎(배태)되는 情緖(정서)에 가깝습니다
1056— 봄맞이-b
一例(일례)로 交換唱(교환창)으로 불리던 “모내기노래” 中(중)에는 다음과같이 自然(자연)을 人間(인간)처럼 인식하여 말을 건내는 노래도 있습니다
모야 모야 노랑모야 니 언제커서 열매열래
이달크고 훗달가면 七八月(칠팔월)에 열매 열지
새야새야 청조새야 니 어데자고 이제오노
洛東江(낙동강) 七百里(7백리) 수풀속에 숲속에서 자고오네
교환창은 先唱者(선창자)와 後唱者(후창자)가 意味(의미)있는말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노래가 展開(전개)되는데 첫번째 노래에서 선창자는”모”를 擬人化(의인화)하여 모에게
“언제클것이냐” 묻고있습니다
그러자 후창자는 바로 “모” 自身(자신)이되어 “七八月(칠팔월)에 열매를 맺을것”이라 對答(대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이작품들은 모두 자연을 사람으로 擬人化(의인화)하여 자연과 인간이 말을 서로주고받는 것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自然(자연)科(과)人間(인간)이 말을 주고받을수있다는 생각은 사람뿐만아니라 도는 生命體(생명체)와더불어 살아가고자하는 包括的(포괄적)인 의미의 共同體文化(공동체문화)에서만
可能(가능)한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認識(인식)을 自然主義(자연주의)를 바탕으로한 共同體意識(공동체의식) 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신민요 봄맞이는 앞서 모내기노래에서 확인하였던 自然主義(자연주의)를 바탕으로한 共同體意識(공동체의식)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수있습니다
이곡이 보여주는 共同體意識(공동체의식)은 자연과 인간의 境界(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에서만 그치는것이아니라 이곡에서 推究(추구)하는 世界(세계)가 혼자만의 逃避的(도피적)이고
隱遁的(은둔적)인 世界(세계)가아니라”노를저으라””돛을감아라” ”노를달아라”와 같은 命令形 語尾(명령형 어미)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봄맞이”의 詩的話者(시적화자)는 “봄맞이가자” 라는 請誘形語尾(청유형 어미)를 사용하여 노래를 끝맺고있습니다
이곡 “봄맞이”의 시적화자는 앞서 언급했듯이 命令形語尾(명령형 어미)를 사용하여 상대로 하여금 어떤행동을 促求(촉구)하고 詩的聽者(시적청자)내지 노래를듣는 聽者(청자)에게 함께
봄맞이하러 가자고 청하는데 이러한 모습이 ‘共同體意識(공동체의식)의 發露(발로)”라고 할수있습니다
시적화자는 혼자서 봄맞이를 가는것이아닌 노래를듣는 모든사람들에게 봄맞이를 가자고 청하는데 여기서 <봄맞이>라는 新民謠(신민요)의 共同體意識(공동체의식)이 드러나는것입니다
고로 이노래를 들어면 즐거워지는 理由(이유)는 바로 이런점에서 起因(기인)하는바가 크다할수있습니다
이노래의 가사중”어야드야 어허으리” 와 같은 中間餘音(중간여음)은 “어기여 디여라”와 같은 뱃노래의 後斂(후렴)을 변형시킨것으로 볼수있습니다
이와 같은 餘音(여음)의活用(활용)은 노래에 rhythm憾-리듬감-을을 더해줄뿐만 아니라 音聲象徵(음성상징)을 통해 聽覺的(청각적)인 즐거움을 전해줍니다
“봄맞이” 창작자 문호월씨는 <三千里(삼천리)>紙(지) 1935년, 11월호에서 創作經緯(창작경위)를 밝히고 있습니다
-----‘봄맞이”를 尹石重 氏(윤석중씨) 에게서 볼 때 그노래가 참좋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봄의 氣分(기분)으로 노래하며 蘇生(소생)의 東山(동산)이 되려고하여 한껏 興(흥)에겨울 때 마침 이난영씨를 불러 연습시켜보니 목소리가 맞을듯하여서 아주 봄동산에
파묻힌 기분으로 듣고 또 그妙曲(묘곡)을 생각하면서 興奮(흥분)된때 그냥 작곡한 것이 오히려 이틀사흘가면서 작곡한것보다 더人氣(인기)를 끌었구먼요
무엇이든지 그氣分(기분)에서 우러나와야 하는법인가 봅니다
-----중략---------윤석중씨가 지은 이곡은 그야말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밑에서 푸릇푸릇 돋아오르는 작은꽃과 종달수는 봄동산을 그린것으로 묵은금ㄴ심 사라지고 甘美輕快(감미경쾌)
한 melody-멜로디-를 그냥넣은것인데 李蘭影(이난영) 의 노래는 어리고 연합니다
그리고 영리함이 맺힌 노래로서 마치 옥구슬을 굴리는듯, 자연스러운 美音玉聲(미음옥성)이외다
첫째 이노래를 들을 때 누구나 봄에 醉-취-한듯 興(흥)이나고 힘이나고 기뻐집니다
이런소리는 우리 敎育界(교육계)에도 좋다고해서 童劇(동극)에도 이난영의 목소리는 아주적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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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요이야기가 좀긴감이 드는데 좋아하는 노래만 선택하여 보시면 시간절약이 될듯합니다
생각보다 호응이 적군요
날씨탓이라 하기엔 너무아쉽군요
더많은 호응바랍니다!!!
한국가요사 초창기 명곡들 탄생배경설명입니다
다읽고나서는 방문흔적을 댓글로 표시해 주시길---!!!
가요이야기 모처럼 와서 봤는데...
한 참 긴 글을 올려주셨는데 일단 글이 기니까...
읽어면서도 윗 내용이 생각이 안 납니다..
이렇게 글이 길면은 한 번 본 회원들은 의례 이 사람이 글을 올린건 길고
이해가 잘 안되니 잘 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으론 짤게 자주 올려 보시면 어떨가 생각합니다..
긴 글 올려 주셔서 수고 하셨습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짧게 올리도록 노력하곘읍니다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