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의 손 안에서
강혜련 헬레나 광주 쌍촌동 천상의 모후 Co. 단장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의 세례성사는 의외였다. 집안일엔 나 몰라라 하시던 분이 천주교를 다니시다니, 덕분에 우리 가족은 나를 비롯하여 남동생 두 명이 유아 세례를 받았다. 곡성성당에서 꾸르실료까지 다녀오신 아버지는 우리에게 신앙을 가장 큰 유산으로 주셨다.
10살에 유아 세례받고 소년 레지오에 입단하여 성모님의 아름다운 성상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나는 광주에 유학 와서 어렵고 힘들 때마다 거주지인 계림동성당에서 위안을 얻고 평화를 갈구했다. 사춘기로 방황하는 시기에 나를 붙잡아 주신 성모님! “너는 내 딸이다.” 위로해주시는 그분께 매달렸다. 수녀원에 입회하려 고등학교 졸업 후 까리따스수녀원을 이웃집 드나들듯 하였으나 수도 성소가 없었던 것인지 수도자의 길은 가지 못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엔 어르신들 레지오 팀에 입단하여 서기로 결혼 전까지 활동하였다. 어르신팀에서 활동한 덕분에 표창장도 받았다. 내게는 레지오 단원으로 살아가는 게 너무나 당연한 삶이었다. 결혼 후 쌍촌동성당에서 42년을 서기로 단장으로, 꾸리아 서기, 꾸리아 단장, 꼬미씨움 부단장, 꼬미씨움 단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레지오 단원으로서 봉사에 임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엠마우스 보호 작업장에서 초 만들기와 사랑의 집에서 점심 봉사, 빨래 봉사, 백선 바오로 집에서 아이들 목욕 봉사를 주 1회 활동하다 은퇴 후 자영업을 하는 남편의 도움 요청에 이 모든 봉사활동을 중지한다는 게 실감 나지 않고 마음이 아팠다. 당시 같이 활동했던 단원들은 지금도 만나면 그때가 좋았다며 그 시간들을 보람되게 기억한다.
봉사활동을 접은 것이 못내 아쉬워 회사 앞 요한병원에 들러 2시간 정도 봉사하고 싶다고 상담 신청하여 어르신 주간보호 센터에서 퇴근길에 들러 봉사하는 시간은 주님이 주신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마침 호스피스 교육이 있다기에 교육을 받고 호스피스 봉사와 겸하여 주 2회 기쁨 가득한 봉사의 시간을 보내다 코로나19가 발길을 멈추게 하였다.
레지오 단원으로 봉사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해
친정엄마의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심장판막 수술과 장 괴사, 허리 수술, 팔목 골절 등 응급실에서 등받이 없는 의자에 의지하여 날밤을 꼬박 새우는 날들이 여러 차례, 그럴 때마다 간호는 내 몫이었다. 3남 1녀 중 딸인 내게는 버겁고 힘든 나날이었다. 엄마의 첫 발병시기에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여 병원 간이침대에서 간호와 공부를 겸하며, 출석 수업이 있는 날이면 내 몸이 두 개쯤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년 6개월 만에 방송대 졸업은 배움을 갈망하였던 내게 크나큰 결실이었다. 덕분에 문예지에 등단도 하고, 작은 시인이 되었다.
엄마의 13번 수술을 거치며 병간호에 지치고 힘든 상황에서 남편 요한 보스코의 위로와 도움으로 엄마는 병환 중에서도 감사하는 시간을 보내셨다. 하지만 고관절 수술 후 거동이 어려우셔서 요양병원에 입원하시어, 병원 침대에서 문 쪽만 바라보며 “우리 딸 언제 온다요?”하며 애타게 기다리시기를 반복하셨다. 아들들은 바쁘니까 못 오는 게 당연하고 오로지 딸 내외만 기다리시다가 엄마 좋아하는 음식 양손에 무겁게 들고 가면 “왜 이제사 오느냐?”고 핀잔으로 서운함을 대신하셨다.
병원에서 월 1회 병자영성체를 하시는 게 엄마에게 신자로서 유일한 신앙생활이고 다시 걸어서 집에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었다. 신부님 오신다고 말씀드리면 옷 매무새를 단정하게 하시며 예수님 모시는 마음의 준비를 잘하셨다. 3번의 폐렴으로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신부님께 병자성사를 부탁드려 병자성사를 받으시고 고요히 삶을 마치고 주님 곁에 가셨다. 엄마의 보호자로 늘 어깨가 아프고 온몸이 지쳐 힘들었지만 레지오와 봉사활동은 내게 큰 버팀목이 되고 활력소가 되어주었다.
성모님을 따르면 길잃지 않고
성모님을 부르면 실망치 않네
성모님을 생각하니 헤매지 않고
성모님이 붙드시니 떨어질리 없네
성모님이 감싸면 두렵지 않고
성모님이 이끄시니 지치지 않아
성모님의 도움으로 목표에 이르네.<성 베르나르도>
레지오 수첩 맨 앞부분에 수록된 성 베르나도 성인의 ‘총사령관이신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를 생각하며 내가 레지오 단원이 아니었다면, 또한 주일만 지키는 신자였다면,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게 가능했을까? 워낙 내향적인 성격이었던 내가 지금의 밝은 모습으로 바뀐 것도 레지오 활동 덕분이다. 나를 내려놓고 상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외향적인 성격으로 바뀐 나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다.
전입 교우와 냉담 교우는 나의 활동 대상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듯 바오로 딸 카페에서 차 봉사할 기회가 왔고, 재개된 호스피스 봉사도 도움
요청이 있어 감사하며 임하고 있다.
토요일까지 근무하는 직장에 다니게 되어 토요일에 실시하는 레지오 교육에 참석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시간이 허락하는 한 성모님이 부르시는 곳에 머무르며 레지오 단원으로서 모범이 되는 신앙인이 되려고 한다.
냉담자에게 더 따뜻하게 다가가는 성모님의 딸이 되겠다 다짐해 본다. 코로나19로 많은 분들이 집에서 평화방송으로 미사를 대신한다는 말씀을 들으면 성체의 중요성을 꼭 알려드리고 다시 정상적인 신앙생활로 돌아오시길 기도와 대화로 권유하고 있는데, 편안함에 이미 젖어있어 회두가 어렵다. 냉담교우가 많아지니 더불어 레지오 단원 감소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꼬미씨움 단장으로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
전입 교우와 냉담 교우는 나의 활동 대상자이자 기도 대상자이다. 유일하게 나 자신을 위해 드리는 기도는 주님이 부르실 때 “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가기를 소망한다.
자신의 건강 체크와 수혈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헌혈도 114회 하여 헌혈증서도 이웃에게 제공하였다. 69세까지 헌혈이 가능하다니 앞으로도 헌혈 봉사가 한참 남아 있어 매우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