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하이데거 박사도 많고 독일 유학파도 많다. 그리고 놀라운 게 서양철학 책 중 제일 많이 팔린 책이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존재와 시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니체와 하이데거에 관심이 많다. 특히 존재라는 말은 기독교인들에게 神의 다른 말로 읽힌다. 또 하이데거 전공자들 역시 그런 식으로 해설한다. 동양철학에서 노자 해설서가 엄청나게 팔리고 개나 소나 해석에 참여하였다. 사이비철학자 김용옥 역시 노자강의를 했고 전공자들로부터 엄청난 비판에 시달렸다. 한국인이 유독 노자를 좋아하는 이유가 조사선 때문이고 조사선이 불교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세뇌당해 왔기 때문이다. 조사선의 궁극이 無의 깨달음이고 그 無는 노자의 철학이니 무의식 중에 친숙해진 노자를 읽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노자를 읽어도 이해가 안 된다는 사람들은 조사선의 시각에서 본 노자와 도교의 시각에서 본 노자, 위진현학에서 본 노자, 황로학에서 본 노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노자사상이 장자에서 어떻게 변모하고 장자를 거친 노자가 전국시대 황로학(노자를 신격화)에서 신선 사상을 만들면 그 신선사상은 도교가 되고 또 조사선으로 간다. 황로학의 신선사상과 위진현학의 무(형이상학적 실체)가 결합하면 조사선이 탄생한다. 진인이다. 유마경의 무아설을 가지고 축도생이 진아를 만들자 조사선의 종지가 된다. 육조혜능은 금강경을 조작하여 無를 반야로 해석한 승조의 철학과 축도생을 계승 중국판 부처 살아있는 생불이라는 사기를 쳤고 엄밀히 조사선의 시조가 되었다. 조사선의 소의경전 금강경을 필자가 재해석하고 해체한 이유다. 금강경 번역이 오류와 엉터리라는 것을 증명하였다(불교학방 참고).
뜬굼없이 웬 조사선이냐는 분도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 철학은 노자의 무 구체적으로 조사선의 무와 통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국무총리를 가장 많이 역임한 고건 전 총리의 아버지 고형곤은 경성제국대학 철학과 출신 서울대 교수다. 그는 80세 나이인 1970년 후반에 "선의 세계"라는 책을 발표했다. 평생을 훗썰 하이데거를 연구한 후 일제강점기에 유행했던 동서비교철학에 매진 그 결과물을 내놓았다. 조사선의 철학이 훗썰 하이데거의 실존철학과 같다는 내용이다. 이 책은 인문학 교수들과 박사들에게 아주 충격적인 책이었다. 지금도 이 책을 능가하는 한국인이 쓴 비교철학은 국내에 없다. 이 책은 서양철학에 대한 통찰 그중 훗썰 하이데거의 이해를 전제하고 나서 조사선 철학에 대한 이해를 전제해야 독서가 가능하다. 독일어 단어와 훗썰과 하이데거의 전문용어와 조사선의 화두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가능하다. 필자는 고등학교 때 훗썰 하이데거 번역서를 읽고 실존철학을 단번에 이해했고 1980년 후반 조사선에 입문 조사선의 시각에서 본 불교를 마스터했다. 1990년 초반 "선의 세계"를 구입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독일어 한문이 난무하는 이 책은 철학과 교수들도 난색을 표하는 책이었었다. 훗썰로 박사학위를 받은 전영갑 학장이 대학시절 필자 발표와 그가 강의한 "독일 관념론" 수업에서 사람들 앞에서 박사인 자기를 능가하고 자신도 배울 것이 있는 친구라고 극찬을 했었고 30대의 필자에게 교수자리를 보장하며 철학박사를 받기를 권했던 인물이다. 30대의 필자에게 한말이 자기 평생 대학생이 교수를 능가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고 재능이 너무 아깝다고 했다. 니체나 하이데거 같은 인물로 비친 것이다. 대학 3학년 발표 때 헤겔 사상이 20세기 철학자 훗썰과 하이데거 하르트만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증명하고, 현상학의 개념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정의하였다. 그중 제알 충격적이었던 것은 신칸트 철학자 하르트만의 "칸트 물자체(物自體)"의 개념에 대한 재해석을 필자가 이해하기 쉽게 해설한 것이다. 그가 박사논문을 하르트만으로 쓰려고 10년간 고민한 난제를 단번에 해석한 것이다. 필자의 발표회에서 나름 천재라고 자부하는 20 후반 경제학과 학생의 예리한 질문 '칸트의 물자체와 하르트만의 물자체가 어떻게 다르냐냐에 대해 필자는 이렇게 답했다.
『칸트는 물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 하르트만은 부분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
전영갑 학장의 10년 난제가 풀렸다. 충격을 받은 그는 결국 석사논문의 연장으로 훗썰로 박사를 받았다. 그래도 그는 교수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고 학생들에게 자신도 몰랐던 난제를 필자가 풀었다고 말하고 자기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보여준 강의였다고 극찬을 하였다. 필자가 본 교수 중 유일하게 학자로서의 인격을 갖춘 분이었다.
각설하고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국내 하이데거 해설서들 중 제대로 된 책이 없어서다. 하이데거를 쉽게 간단 명료하게 풀어낸 책이 전무하다. 하이데거 " 존재와 시간"을 직접 읽느니만 못한 해설서들이 대부분이다. 너무 현학적이고 어렵다. 지엽말단적이고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말장난만 가득이다. 정부 지원금과 상까지 받았다는 해설서들 역시 똑같다. 전부 "존재와 시간"에서 나오는 용어 해석에 미쳐서 날뛴다. 모든 책들이 용어 자체에서 벽에 부딪힌 것이다. 이거 뭐 푸앙카레의 난제인양 호들갑이다. ㅎㅎ 해서 필자가 글을 쓴다.
* 존재는 무엇이고 시간은 무엇이가?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 이율배반의 변증법을 통해 형이상학적 실체(신 천사 영혼 우주의 기원 등등)가 이율배반에 해당한다고 증명하였다. 이율배반은 이 시각에선 이게 옳고 저 시각에서는 저게 옳다는 결론 이 나오는 양비론적 시각을 지칭한다. 즉 신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있다고 해도 맞고 없다고 해도 맞다. 해서 이율배반이다. 논리학에서 오류라고 판단한다. 이성을 사용한 인식은 수학의 공리처럼 명석 판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리가 되지 못한다면 학문이 아니고 미신이다. 좋게 판단하면 소설이나 신화다. 칸트는 천년 이상 이어온 神은 이성적 존재이며 로고스 자체라는 이성신학을 종식시키고 종교세계를 이성의 세계에서 분리 해체 시켰다. 성경 창세기에 "태초애 로고스가 있었다"라고 나온다. 그 로고스가 칸트를 통해 해체되어 신화의 영역으로 떨어진 것이다. 로고스는 반드시 이성과 관련된 것인데 이성의 영역에서 퇴락한 것이다. 하이데거가 퇴락이라는 용어를 즐겨 쓴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성경은 잘못 써졌던가? 이율배반은 로고스가 아니잖아? 유럽의 신학자들과 지성인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칸트는 자신의 책이 "코페르니쿠스의 전회"라고 자부하였다. 천동설을 무너뜨린 그처럼 자신도 이천 년 가까이 지배해 온 이성신학(교부철학 등)을 무너뜨렸다고 자부했고 사실 그러했다. 칸트 이후 무신론이 20세기 중반까지 지구를 지배했다. 칸트에 반발한 인물이 헤겔이었고 낭만주의였다. 노발리스 등은 예술을 통해 신과 만난다고 주장하였다. 신학자들에겐 죽을 맛이다. 예술가가 성직자가 되는 상황이다. 신학고등학교를 다니던 하이데거는 필수과목인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통해 최초의 철학을 공부한다. 유럽철학과 이성신학의 최초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다. 천재인 그는 대단한 영감을 느끼고 성직자의 길을 버리고 철학자의 길로 가기 위해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당대 최고 철학자 훗썰의 제자로 들어가 훗썰 현상학을 학습한 후 "존재와 시간"을 통해 해석학을 창시한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와 존재와 시간은 무엇인가? 존재는 Sein(자인)의 일본번역이다. Zeit(자이트)는 시간이다. 이 번역은 좋은 번역이다. 근데 문제는 한국어를 비롯한 우랄알타이어에서 Sein(자인) 동사는 잘 쓰이지 않는다. 해서 한국인들은 하이데거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이해를 못 한 것이다. 명문장을 가진 천재 하이데거의 현란한 언어가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것은 우랄알타이어의 한계이자 숙명이다. Sein(자인)은 영어로 Being이다. 즉 be 동사의 명사형이다. 있다 이다. 정확히 Sein(자인)은 있음이다. 존재와 시간은 있음과 시간이다. 존재의 실체는 다음과 같다.
나는 대학생이다 (Ich sein Student)
Ich bin Student.
너는 대학생이다 (Du sein Student)
Du bist Student.
그/그녀는 대학생이다 (Er/Sie sein Student)
Er/Sie ist Student.
우리는 대학생이다 (Wir sein Student)
Wir sind Student.
너희들은 대학생이다 (Ihr sein Student)
Ihr seid Student.
그들은 대학생이다 (Sie sein Student)
Sie sind Studenten.
이 문장들을 잘 보면 괄호 안에 존재가 있다. Sein(자인)이다. 모든 언어는 그 근본에 Sein(자인)이 있고 이 Sein(자인)이 곧 신을 비롯한 형이상학적 실체로 규정되어 왔다. 그럼 우리는 일상언어에서 암묵적으로 Sein(자인)을 인지하고 인정하고 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생활세계다. 즉 Sein(자인)을 사용하는 세상이다. Sein(자인)을 소비하는 각 개인들은 존재자(seiende)다. 실체의 의미로 사용되는 존재자를 하이데거는 " Sein(자인)을 사용하는 자 seiende로 정의한다. 실체나 존재는 결국 Sein(자인)을 사용하는 자 seiende가 된다. seiende자이엔데는 자인동사를 상용하는 자다. 자인동사를 사묭하니 존재자는 지금 현재 실존한다. 존재를 동사로 사묭하니까 존재자의 존재이며 실존이다. 존재와 존재자는 다시 결합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존재나 존재자를 일상에서 사용하고 무의식 중에 인정하고 있다. 존재자는 사전적으로 다음과 같다.
『존재자(存在者, 영어: entity)란 그 자체로서 실존하는 무언가다. 이때 실존이란 주관적일 수도 있고 객관적일 수도 있으며, 현실적일 수도 있고 잠재적일 수도 있으며, 구체적일 수도 있고 추상적일 수도 있으며, 물리적일 수도 있고 비물리적일 수도 있다. 굳이 물질적으로 실존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
Sein(자인) 동사를 사용하는 인간은 결국 신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이렇게 하이데거는 간단하게 칸트의 실패를 만회한다. 신은 이율배반이 아니다. 일상 언어세계에서 실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이데거 말한 세계는 언어의 세계다.
하이데거는 데카르트의 격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에서 sum(be 동사 sein자인동사)가 중요하다고 나름 코페르니쿠스의 전회를 시도한다. sum(be 동사 sein자인동사)가 있기에 생각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라고 멋을 부리지만 이 말은 나는 be동사를 사용하여 생각하고 글을 쓴다라는 말이 된다. 오직 be 동사만 있다가 된다.
*시간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존재는 역사성을 가진다고 한다. 그 역사성은 시간이다. 그 시간은 언어세계의 시간이다. 인도 유럽어족은 문법이 유사하다. 언어에서 시간은 다음으로 분류된다.
1. 현재형
2. 과거형
3. 미래형
4. 수동태 능동태
5. 현재완료 과거완료 미래완료
현재시제는 과학적 사실, 불변의 진리, 반복되는 습관의 일을 나타내는 시제로 사용됩니다.
과거시제는 명확한 과거시점에 일어난 일, 역사적 사실을 말할 때 사용됩니다.
현재완료 시제는 과거~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거나 or 과거의 일이 지금 막 끝난 경우 등 한 시제에 국한되지 않은 시제입니다.
언어의 문장과 시제를 통해 모든 학문과 삶이 정의된다. 세계는 언어 세계다. 모든 진리가 언어에 담겨 있다. 시제를 통해 시간성과 역사성이 증명된다. 역사가 미래에 선점해 있다는 하이데거의 수수께끼는 미래형과 미래완료를 의미한다. 그는 철저히 언어학에 매몰되어 철학을 논한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언어학이 발달한다. 하이데거는 언어학에서 힌트를 얻어 해석학을 만들고 "존재와 시간"을 저술하였다. 헤겔이 다윈 등이 발전시킨 당대 생물학에서 영향을 받아 변증법을 만든 것처럼 그는 언어학을 자기 맘대로 재단하여 존재와 시간을 만든 것이다. 연구자들이 이 점을 간과하고 종래의 철학적 사유 즉 플라톤부터 칸트 헤겔을 관통하는 변증법적 시각에서 하이데거를 보고 해석하니 좃나 어렵고 힘든 것이다. 플라톤의 변증법은 일본 학자들이 헤겔 변증법과 구분하려고 산파술=변증론으로 번역하는데 다 같은 용어 변증법이다. 같은 용어 변증법인데 플라톤은 이데아를 증명하고, 아퀴나스는 신을 증명하고, 칸트는 신이 없음을 증명하고, 헤겔은 절대정신을 증명하고, 마르크스는 인민과 노동을 증명하였다. 하이데거는 변증법을 버리고 언어의 세계가 곧 신의 세계임을 증명하려 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
성경책 불경책이 영원성을 가지는 것은 언어의 세계(문법)가 불변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 불변성을 가지고 실제 물질적 현실 세계와 언어의 세계(가상세계)를 결합하려고 시도하였다. 하이데거는 언어라는 가상세계가 물질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한다고 보았다. 언어로 교육 받은 엘리트들이 세상을 다스리고 언어로 만든 학문이 문명을 건설하기 때문에 언어라는 가상세계가 물질세계를 지배한다고 본 것이다. 사실은 물질세계에 대한 연구로 인해 과학 학문이 발전하고 이루어졌음을 간과한 근세적 사유다. 이 때문에 수많은 연구자들이 대굴빡을 싸맨 것이다. 필자가 본 한국 철학자 교수 박사들은 죄다 이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 전 서울대 교수 소광희와 그제자 배학수는 존재와 시간은 미완성의 저작으로 본다. "전통적 존재론의 한 해체작업으로서의 하이데거의 칸트해석" 그 주제로 서울대 인문대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되어 박사를 받은 이가 배학수다. 이 둘의 생각은 새로운 형이상학을 만들고자 한 시도가 미완성으로 끝났다고 본다. 필자는 아예 실패했다고 본다. 전통적 존재론은 칸트에서 끝났고 하이데거는 언어학을 통해 부활을 시도하려 했다. 이 작업을 그는 해석학이라고 불렀다. 해석학은 중세 교부철학에서 신의 계시를 어떻게 이성적 합리적으로 해석해서 실천할 것인가라는 과제로 만든 것이다. 신의 계시를 무당이나 예언자의 신통력에 의존하지 않는 보편타당한 학문을 만들고자 한 시도 이다. 하이데거의 야망은 새로운 신학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 도구가 언어학이었다. 이점에서 소광희와 배학수 필생의 공부는 물거품으로 끝났다. 그리고 하이데거도 1969년 "철학의 종말과 사유의 과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국내 번역되지 않은 걸로 안다.
<https://cafe.daum.net/Wahrheit/LZeu/45 >
제목이 암시하듯 1969년 철학은 종말을 고했다. 1990년 초에 아서 단토는 "예술의 종말 이후"를 발표했는데 헤겔학자인 아서 단토는 예술의 종말 이후 종교가 종말하고 그다음 철학의 왕국이 건설된다는 헤겔 "정신현상학"의 도식을 따르려고 했고 철학의 왕국이 예술을 통해 도래할 것을 기대했지만 철 지난 19세기 사상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19세기부터 발달한 언어학은 20세기초 완성되었다. 언어학의 완성으로 모든 언어는 문의 5 형식으로 분류된다.
1형식 = I am 나는 존재한다.
2형식 = I am a boy
3형식 = I am a student. He is hungry.
4형식 = I have a dictionary. She knows the fact.
5형식 = We call him Hong gil-dong. I made my son a dentist.
모든 문장은 이 5형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근데 여기서 제일 근본은 무엇인가? I am 나는 존재한다이다. 모든 사유와 문장은 I am 나는 존재한다를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해서 하이데거는 칸트를 흉내 내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에서 사유하는 주체를 존재라는 주체로 변형하여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한 것이다(데카르트가 천동설이 되고 하이데거는 지동설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존재문제는 플라톤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는 철학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2천년 전의 미라를 언어학이라는 주술로 불러낸다). 내가 존재한다면 이 나는 독존이다. I am 나는 존재한다라는 문장에서 I(나)는 그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존재한다. 즉 아트만이다. 진아(眞我)다. 중국어에서 워 짜이(我在)라는 말이 있다. 여기 있어요라는 뜻인데 정확히 我存在(나는 존재한다)라는 뜻이다. 중국어는 유럽어와 어순이 동일하다. 인도 중국 유럽어는 어순이 유사하다. 조사선에서 진아의 발견은 워 짜이(我在)라는 문장의 근본 1 형식에 근거한다. 하이데거는 "우리는 늘 어떤 존재에 속해있다. 존재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존재한다의 원문은 역시 Sein이다. 이 말은 "우리는 항상 Sein동사를 사용하며 산다. Sein 동사를 활용하고 사용할 때 우리는 Sein이다."라는 말이다.
우랄알타이어에는 존재가 없다. 자 출석을 부를 때 인도 유럽어와 중국어의 대답을 보자.
선생님 : 이준석.타일러. 손오공. 하이데거.
이준석 : 예....여기요.
타일러 : Yes. I am. (나는 존재한다)= 예....여기요
손오공 : 我在( 나는 존재한다)= 예....여기요
하이데거 : Ich bin.(나는 존재한다)= 예....여기요
" 예 여기요"는 대답이며 나타난 현상이나. 그 속에 은폐된 존재는 I'm. Ich bin. 나는 존재한다 이다. 현현하는 현상이 대답하는 말이고 그 대답에 은폐된 존재가 I'm. Ich bin.이다. 하이대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은폐"는 바로 이거다. Ich bin이 "예 여기요"라는 응답이 되었을때 존재는 내던져진다(기투성). .현상이 존재를 은폐한 것이며, 존재는 은폐된 것이다. 능동태와 수동태다. 현상학은 드러난 대답 "예 여기요" 속에 은폐된 IIch bin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본질직관이다. "예 여기요 "의 본질 존재가 Ich bin 임을 찾아내는 것이 해석이며 해석학이다.
항상 신과 더불어 하는 존재 개념이 표의 문자에 상주한다. 진아와 신이 이들 언어에 근본이다. 하이데거의 사유와 해석학은 여기서 출발한다. 한국어는 주어 개념과 동사 개념이 약하다. 형용사나 부사가 가장 화려하게 많다. 그래서 예술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다. 우랄알타이어는 자연 친화적 언어다. "사냥을 한다...공부를 한다. 밥 먹으러 간다"라는 문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목적어와 대상이다. 주어는 너 나 우리 그들 누구도 될 수있다. 주체 주어가 한국어에는 중요하지 않다. 그 상황에 따라 주체가 너 나 그들 그녀 등등으로 자리 잡는다. 불변의 주어 주체가 없다. 주변 환경에 따라 누구나 주어 주체가 될 수있다. 즉 진아(아트만)는 성립 될 수 없는 언어다. 해서 조사선의 진아(아트만)와 유럽어나 중국어의 존재(在)를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없다. 한국어에서는 저 하늘(초월세계) 위에 있는 것이 존재다. 해서 중국철학과 인도유럽의 철학을 한국인들이 이해하기 힘들고 그래서 독창적 철학자가 한국에서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위대한 사상가들은 전부 중국철학을 재해석 한 분들 밖에 없다. 우랄알타이어의 한계다. 위대한 철학자로 불린 이들은 모두 중국어(한문)과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사유한 사람들이고 그들의 글이 한문,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쓰여졌을 때 인정 받는다. 결론적으로 한반도에서 위대한 철학자로 불린 사람들은 한문을 사용한 엘리트들이었다. 중국어와 유럽어는 가장 기본적이고 간단한 그 대답 자체가 존재 승인이다. 해서 하이데거는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유한다"고 말한 것이다. 존재는 모든 언어의 근본이다(한국어를 포함한 우랄알타이어 제외). 일제시대부터 일본과 한국의 철학자들은 한국어로는 철학적 사유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이유다. 일본은 한문을 사용한다. 히라카나 가타가나는 한문을 보조하는 역활이다. 그래봤자 일본어는 한국어와 같은 우랄알타이어니 지금까지 일본에 독창적 철학자가 나온적이 없다. ㅎㅎ
"우리는 늘 어떤 존재에 속해있다. 존재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존재한다."라는 이 말은 조사선 화두를 의미한다. 특히 "이모꼬"가 이에 해당한다. 이모꼬는 What=Was(독일어)라는 뜻이다. 이모꼬를 통해 활연대오하면 나타나는 것이 진아(眞我)다. 결국 모든 화두의 주체는 "워 짜이(我在)= I am 나는 존재한다"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내가 없으면 모든 문장은 성립불가다. 모든 세계가 성립불가다. 세계는 언어세계다. 즉 "나레이터가 없는데 무슨 이야기가 전개되는가?"라는 뜻이다. 소설이든 시든 영화든 학문이든 모두 내러티브이고 그것은 나래이터를 전제한다. 나레이터는 "I am 나는 존재한다"의 나, I, Ich다. 이 나, I, Ich는 곧 아트만이고 진아다. 해서 하이데거 철학은 조사선과 일맥상통한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평생의 좌우명이며 그의 철학의 알파와 오메가다. 그런데 아 형이상학이 붕괴되었다. 언어학은 20세기 초 기호학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기호학은 모든 언어는 기의와 기표로 나누어진다고 본다. 기의는 그 단어가 지시하는 뜻이고 기표는 기호 표식이다. 이 기호학은 비트겐슈타인과 프랑스 해체주의를 만나 철학의 용어들과 문장 나아가 모든 문학예술 학문들은 기표와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고 분석하였다. 즉 Sein은 기표 표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존재의 집이 무너진 것이다. 진아 아트만도 그냥 기호 표식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그냥 기호 표시이다. 석가모니가 아트만(진아)이 없다고 했을 때 그걸 허상이라고 지적했는데 비트겐슈타인과 프랑스 해체주의도 동일하게 이걸 지적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남은 인생을 형이상학적 실체는 기표에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 주장을 깨뜨리려고 필사적으로 매달렸으나 실패하였다. 언어의 근본을 해체한 기호학을 언어를 통해 어떻게 반박하는가? 남은 것은 예술뿐이다. 해서 하이데거는 "시와 진실" 등등 휄더린 등 낭만파 철학자들과 그들의 시에 심취하였다. 휄더린 시를 찬양하고 시가 진리를 담지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철학의 포기 선언이다. 시는 애매모호의 세계다. 인식론적으로 이율배반이다. 명석판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서 1969년 하이데거는 철학의 종말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이 논문에서 그는 형이상학의 부활을 꿈꾸며 후대 천재가 그 길을 열어줄 것을 기원하였다.
형이상학과 철학의 부활은 필자처럼 신화의 세계에 들어가 악마 귀신 영가 뱀 용 거미구신 등등 이매망량을 보고 듣고 제거하는 작업과 천상계 극락 지옥을 넘나드는 작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소크라테스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화와 철학을 분리하고 명석 판명한 이성의 세계를 추구하여 왔고 존재증명은 결국 기호학을 만나 해체되었다. 공자로부터 시작하는 동양 인문학도 동일한 길을 걸었다. 이성을 사용하고 이성이 절대적 기준이 되는 사유로는 형이상학의 세계를 인지할 수 없다. 칸트는 존재를 인식할 수는 없으나 생각할 수는 있다라고 말했다. 생각의 세계는 시 소설 등 예술의 영역이고 신화의 영역이다. 신화를 포기한 철학은 결국 해체와 소멸의 길을 걸었다. 마찬가지로 리(理 성리학 화엄철학)나 無(조사선)를 실체로 규정해온 동양철학도 붕괴한다. 형이상학의 세계는 명석판명한 이성의 세계가 아니라 모호하지만 분명한 영적 수련과 체험을 통해 인지되는 것이다. 철학은 2천5백 년간 착각하며 산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칸트부터 시작된 전통적 존재론의 해체가 결국 존재론의 붕괴로 이어진 것임을 증명하는 책이다. 전통적 존재론의 마지막 발악이며 언어학으로 존재론의 부활을 노리던 그 시도는 언어학(기호학)에 의해 해체되었다. 자가당착이 되었다. 정확히 전통적 존재론은 칸트에 의해 붕괴 되었고 존재 부활을 기도한 인물들이 헤겔과 하이데거 였었다. 그리고 그 둘 다 언어라는 가상세계에서 한 편의 SF 소설을 쓴 것이다.
20세기 초반부터 신화에 학자들이 관심을 가져온 이유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등 그리스 철학자들이 신화를 카오스(혼돈)으로 규정 폐기처분 한 것을 2천5백년이 지나 되살리려고 한다. 근데 완전 실패했다. 이유는 신화의 해석을 이성을 사용하거나 언어학(구조주의)를 활용하여 연구하였다. 결론은 형이상학의 붕괴와 같다. 복희와 여와가 뱀이었다는 중국 신화는 어떻게 해설할 것인가?
뱀신에 빙의된 영혼을 구원할 때 교미하는 음양의 뱀신을 만난다. 이리하여 수천마리의 뱀신들이 탄생한다. 뱀들은 영적으로 성장하면 용(龍)이 된다.이들 악마 신들은 언어로 사유한다. 이걸 이성으로 해석한다면 실패다. 신화학 종교학이 실패한 이유는 철학의 길= 명석판명함 혹은 이성사용을 통한 분석이다. 영적으로 출중한 능력을 가진자만 가능한 세계다. 필자는 이들의 언어를 듣고 보고 제도한다. 이때 현혹되지 않게 해주는 것이 이성적 통찰이다. 동서철학을 마스트 한 필자에겐 어떤 탁월한 논리도 소용이 없다. 악마(신)들은 엄청난 철학적 종교적 소양을 갖추고 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는 망상과 빙의의 집이기도 하다. 빙의 환자들의 발작과 망상도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주술과 주문이다. 그럼 언어는 악마의 집이기도 하다. 빙의 한자들은 항상 소리를 듣고 망상을 본다. 망상은 언어로 만든 복제된 공간이며 소굴이며 집이다.
2024년 2월 15일 紫霞仙人 遊於世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