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폰:
어떤 표징을 말하는 것입니까? [90,3]
유스티누스:
백성이 아말렉과 싸우고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눈의 아들이 전투를 이끌 때, 모세는 양손을 뻗고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으며 후르와 아론은 그가· 지쳐서 손을 내리지 않도록 하루 종일 그의 손을 받쳐 주고 있었습니다. 모세에 관한 기록에 있는 대로, 십자가를 닮은 이 표징에서 어떤 것이 부족하게 되면 백성은 패배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으면 아말렉이 패배했습니다. 그러므로 승리한 편은 십자가로 승리했던 것입니다. [90,4]
☕ 십자가로 승리한 그리스도의 예형이다.
백성이 더 강했던 것은 모세가 그렇게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전투를 이끌 때에 모세가 십자가의 표징을 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탄식과 눈물로 하는 기도, 땅에 엎드려 무릎을 꿇고 하는 기도가 가장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는 것을 여러분 가운데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그때는 모세도 다른 누구도 바위 위에 앉아서는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앞서 증명하였듯이, 바위도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90.5]
☕ 탈출기는 십자가의 신비를 미리 보여준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다른 방식으로도 십자가의 신비의 힘을 보여 주십니다. 그분은 요셉에 대한 축복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덤불에서 나타나신 분의 복이 요셉의 머리 위에, 그의 정수리 위에 내리리라. 그는 형제들 가운데에서 영광스럽게 되고, 그의 아름다움은 맏이로 난 소와 같아라. 그의 뿔은 일각수의 뿔. 그 뿔로 민족들을 땅끝까지 모두 들이받으리라”(신명 33,16-17)[91,1]
아무도, 일각수의 뿔이 십자가를 나타내는 예형이 아니고 다른 어떤 사실이나 형태를 가리킨다고는 말하거나 증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인 뿔은 똑바로 선 나무입니다. 그 윗부분은 다른 나무가 가로로 놓일 때에 뿔처럼 위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양 끝은, 하나인 뿔에 붙은 다른 뿔들처럼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이 매달리게 되는 가운데 부분도 뿔처럼 튀어나와, 다른 뿔들처럼 결합되고 고정된 뿔처럼 보입니다. [91,2]
☕ 일각수의 뿔은 십자가의 예형이다.
이스라엘을 물었던 뱀에 맞선 예형과 표징을 통해서도, 이 표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통하여 뱀에게는 죽음이 선포되고 뱀에 물렸다가 당신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세상에 보내신 분에게 피신한 이들에게는 구원이 주어지리라는 것을 믿는 이들의 구원을 위한 것임이 드러납니다. 예언의 영은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뱀을 믿도록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 영은 우리에게 처음에 뱀이 하느님의 저주를 받았음을 보여 주고, 이사야 또한 원수인 뱀이 큰 칼, 곧 그리스도에 의하여 제거될 것임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91,4]
만일 어떤 사람이 예언자들이 말하고 행한 것을 하느님의 큰 은총을 받아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 말이나 사실들을 똑같이 되풀이하더라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그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사람들에게 그것을 말한다면 많은 이들에게 경멸스럽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92,1]
☕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해석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이로써 신비를 선포하셨습니다. 그 신비를 통하여, 아담이 죄짓게 했던 그 뱀의 힘을 물리치시리라는 것을 선포하시고 또한 이 “표징”으로,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실 분을 믿는 이들에게 뱀에게 물림 곧 악한 행위와 여러 형태의 우상숭배와 온갖 불의로부터 구원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94,2]
☕ 뱀에 물림은 악행과 우상숭배의 결과로 나타난다.
하느님께서 구리 뱀으로 표징을 만들라고 명하셨어도 잘못이 없으시듯이, 십자가에 달린 이들에 대한 율법의 저주도 그러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에게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짓을 저지른 모든 이가 그분을 통하여 구원되었습니다. [94,5]
☕ 그리스도는 저주받은 이가 아니다. 저주받은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하느님이 스스로 저주받는 이가 되었다.
실로 온 인류가 저주 아래 있는 처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세 율법에서는 “이 율법서에 행하도록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신명 27,26)라고 말하는데, 모든 규정을 빈틈없이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95,1]
그런데 만물의 아버지께서 당신의 그리스도가 온 인류를 위하여 모든 이의 저주를 떠맡기를 원하셨다면 ―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다음 당신께서 그를 부활시키실 생각이셨지요 ― 어째서 여러분은 그분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받아들이신 고통을 그가 저주를 받아서라고 설명합니까? 어째서 여러분 자신에 대해 탄식하지 않습니까? 그분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인류를 위하여 고통을 받으셨지만, 여러분이 그분에게 고통을 가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언자들을 죽였을 때에도, 신심을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95,2]
☕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인류가 받아야 할 저주를 떠맡았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죄를 뉘우치고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며 그분의 계명들을 지킨다면, 여러분에게 이미 말했듯이 여러분은 죄의 용서를 얻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분과 또한 그분을 믿는 이들을 저주하고, 할 수만 있으면 그들을 죽인다면, 어떻게 여러분에게 불의한 죄인이며 마음이 완고하고 몰지각한 이들로서 그분을 거슬러 손을 쳐든 데에 대한 갚음을 요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95,3]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신명 21.23)라는 율법서의 말씀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매달려 있는 우리의 희망을 굳게 해 줍니다. 이는 십자가에 매달린 이가 하느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여러분처럼 그분이 만물에 앞서 존재하신 분이며 하느님의 영원한 사제이고 임금이며 그리스도이심을 알지 못하는 다른 이들이 행할 짓을 미리 예고하셨기 때문입니다. [96,1]
☕ 성경은 유다인이 그리스도를 죽일 것을 미리 예고하였다.
그것이 실현되었음은 여러분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회당에서 여러분은 그분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리는 모든 이를 저주합니다. 그리고 다른 민족들은 누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만 해도 모두 죽임으로써 그 저주를 실행에 옮깁니다. [96,2]
후르와 아론이 모세의 손을 받치고 있었을 때, 모세가 저녁때까지 그 자세로 있은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주님도 거의 저녁때까지 십자가 위에 계셨으며, 저녁 무렵에 사람들이 그분을 장사 지냈고, 셋째 날에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다윗을 통하여 이렇게 선포되었습니다. “내가 큰 소리로 주님께 부르짖으면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들어 주시네. 나 자리에 누워 잠들었다 깨어남은 주님께서 나를 받쳐 주시기 때문이니”(시편 3,5-6) [97,1]
이사야도 그분께서 어떻게 돌아가실 것인지 예고하였습니다. “나는 반항하는 백성에게 날마다 팔을 벌리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 멋대로 좋지 않은 길을 걷는 자들”(이사 65,2). 이사야는 그분의 부활에 대해서도 예고하였습니다. “그의 무덤은 제거되고”(이사 57,2 칠십인역 참조) “나는 그의 죽음 대신 부자들을 주리라”(이사 53,9 칠십인역 참조) [97,2[
.☕ 아라마태아 출신 요셉은 예수님의 무덤을 제공했다.
다윗도 시편 제21편에서 수난과 십자가에 관하여 신비로운 비유들로 말했습니다. “그들은 제 손과 발을 뚫었습니다. 그들은 제 뼈를 낱낱이 세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누어 가지고 제 속옷을 두고 제비를 던집니다”(시편 21,17-19 칠십인역). 그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그분의 손과 발에는 구멍이 뚫렸습니다. 또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은 제비를 뽑아 그분의 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여러분은 이 시편이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은 완전히 눈이 멀었습니다. 여러분 종족 가운데에서 아무도 임금인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손과 발이 뚫렸거나 이러한 신비, 곧 십자가의 죽음을 맞은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97,3-4]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은총 덕분에 성경에서 알게 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하느님의 맏아들이시며 모든 창조물에 앞서신다는 것, 또한 그분이 성조들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그들 집안의 동정녀를 통하여 육화하시어, 아름다움도 영예도 없고 고통을 받는 인간이 되기를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100,2]
그분은 당신이 고통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 다음 사흗날에 되살아나야 한다.”(마태 16,21). 당신 자신이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기 때문이기도 하고 ― 앞서 말했듯이 그 동정녀는 다윗과 야곱, 이사악, 아브라함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 아브라함 자신이 지금 언급된 마리아의 조상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딸들의 조상은 그 딸들에게서 태어난 이들의 조상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100,3]
☕ 마리아는 다윗의 후손이다.
더럽혀지지 않은 동정녀였던 하와는 뱀의 말을 받아들여 불순종과 죽음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동정녀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주님의 성령이 그 위에 내려오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그를 덮을 것이며 태어날 거룩한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에 믿음과 기쁨을 잉태했고,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대답했습니다. [100,5]
어떤 사람이 그분께 “선하신 스승님”(루카 18,18)이라고 하자 그분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하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벌레이며 사람이 아니오니, 사람들의 우셋거리, 백성의 조롱거리’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당신께 실제로 일어날 일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분을 믿는 우리는 어디서나 우셋거리가 되고 조롱을 받습니다. ”백성의 조롱거리“라고 하는 것은, 그분이 여러분 백성에게 조롱과 멸시를 당하는 수모를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101,2]
☕ 그리스도가 조롱거리가 되었듯이 그분을 믿는 그리스도인도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저를 보는 자마다 저를 비웃고 입술을 비쭉거리며 머리를 흔들어 댑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었으니 그분께서 그자를 구하시겠지. 그분 마음에 드니 그분께서 구해 내시겠지”라는 말도, 그분께 일어날 일을 예고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을 바라보던 이들은 모두 머리를 흔들었고 입술을 비쭉거렸으며, 사도들의 비망록에 기록되어 있듯이, 코를 찡긋거리며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걸어 보시지. 하느님이 그를 구해 내 보시라지”(마태 27,39-43)라고 하였습니다. [101,3]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리라는 것도 예고되었습니다. “저의 영혼을 칼에서, 저의 목숨을 개들의 발에서 구하소서. 사자의 입에서 저를 구하시고, 일각수의 뿔에서 제 수치를 구하소서”라는 표현은 그분이 어떤 고통으로 돌아가실 것인지, 곧 십자가에 못 박힘을 나타냅니다. 나는 이미 여러분에게, “일각수의 뿔”이 오직 십자가를 나타내는 상징이라는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105,2]
온 땅에서 예수를 믿는 우리를 아무도 위협하거나 예속시킬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참수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맹수의 먹이가 되고, 사슬에 묶이거나 불에 던져지고 온갖 고문을 당해도, 우리는 우리의 신앙 고백을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고통을 겪을수록 예수의 이름으로 하느님을 믿고 공경하는 이들이 늘어납니다. 열매를 맺었던 포도나무 가지를 치면 그것이 다시 자라나 무성하고 열매 많은 새 가지들이 생겨나둣이, 우리도 그러합니다.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심으신 포도밭은 그분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110,4]
트리폰이여, 때로는 “위대한 조언의 천사”라고 불리고 에제키엘은 “사람”, 다니엘은 “사람의 아들 같은 분”, 이사야는 “아기”, 다윗은 “그리스도, 공경받을 하느님” 그리고 많은 예언자들은 “그리스도” 또는 “바위’”, 솔로몬은 “지혜”, 모세는 “요셉, 유다, 별”, 즈카르야는 “동쪽” 그리고 다시 이사야는 “고통받는 이, 야곱,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며 또한 “막대, 꽃, 모퉁잇돌,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분을 당신이 알았더라면, 이미 오셨고 태어나셨으며 고난을 받으시고 하늘에 올라가신 그분을 모독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다시 오실 것이며, 그때에는 여러분의 열두 지파가 울며 탄식할 것입니다. [126,1]
여러분이 예언자들의 말을 이해했더라면 그분이 하느님이시며, 낳음을 받지 않으신 유일하신 분,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세는 탈출기 어딘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나는 주님이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나타났고 그들의 하느님이나, 그들에게 내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고, 그들과 내 계약을 맺었다”(탈출 6,2-3). [126,2]
☕ 그리스도는 이미 구약에서 예언되셨다.
“어떤 사람이 나타나 야곱과 씨름하였다”(창세 32,25)라고 말하는데, 그가 하느님이었다고 단언합니다. 야곱이 “내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뵈 었는데도 내 목숨을 건졌구나”(창세 32,31)라고 말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126,3]
모세는 하느님께서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그는 한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라고 하고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달려 나가 그들을 맞았다”(창세 18,1-2). 얼마 후에 그들 가운데 하나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합니다. “어찌하여 사라는 웃으면서, ‘내가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랴? 나는 이미 늙었는데!’ 하느냐? 하느님께 불가능한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내가 때가 되면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브라함에게서 떠나갔다”(창세 18, 13-14). [126,4]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떠나 올라가셨다”(창세 17,22)거나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탈출 6,29)거나 “주님께서 내려오시어 사람의 아들들이 세운 성읍과 탑을 보셨다”(창세 11,5). “주님께서 노아 뒤로 문을 닫아 주셨다”(창세 7,16)라고 할 때, 여러분은 태어남을 받지 않으신 하느님이 직접 어디에서 내려오거나 올라오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127,1]
☕ 성경에 나오는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은 그리스도다.
그분이 어떻게 누구와 말씀하시거나 누구에게 발현하시거나 땅의 작은 한 구석에 나타날 수 있으셨겠습니까? 백성은 시나이에서 그분으로부터 파견된 분의 영광을 보는 것조차 감당하지 못했고, 모세도 장막이 하느님의 영광으로 가득했을 때에는 그가 지은 천막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으며, 솔로몬이 계약 궤를 예루살렘에 그 자신이 지은 거처로 모셔갈 때 사제가 성전 앞에 서 있을 수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1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