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을 걷다
- 경복궁을 안고 있는 북악산 -
이 근 현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창의문(일명 자하문; 올바른 의를 드러내는 문)에서
성곽길 18.6km 중 한 구간인 혜화문까지 걷기로 한다.
오랜만에 와보는 곳이기에 낯설기도 하였지만 “박정희의 목을 따러 왔다”는 김신조 일당 31명과
교전이 있던 곳이고 교전 중 사망한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말만 들어도 참으로 섬뜩한 현장이다.
50년 전에 남긴 소중한 추억들을 더듬으며 한 발짝씩 옮긴다.
이 길에서 내 인생의 멘토가 되는 소중한 분과의 만남이 있을 줄 어찌 꿈엔들 생각이나 했으랴!
당시 강창희 중대장(후일 국회의장)의 명령으로 칠궁초소에서 근무 중에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한 쪽 발엔 워커를 다른 쪽엔 작업화를 신고, 판쵸 우의를 입고
알철모를 뒤집어 쓴 채로 완전군장을 하고 이 길을 터덜터덜 걸었었다.
축구시합에 다친 다리의 통증으로 절뚝거리며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하는 중대장의 하명이기에
이유도 모르면서 걷긴 하지만 옮기는 발자국 하나하나에 원망을 쏟으며 걷던 길이다.
중대장실로 불려 들어갔을 때
“오늘이 정월대보름인데 부인이 갖고 온 음식을 너와 나누어 먹고 싶어 불렀다”는 말씀을 듣고
가슴이 울컥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후일 국회의장 재임 시 가족(부인, 아들, 며느리 손주)을 초청하여 총리 공관을 구경시켜 주시고
저녁 만찬을 성대히 베풀어 주셨다.
이 일을 계기로 중대장님은 내 인생의 멘토가 되셨고
그 분과의 소중한 추억들이 내 인생의 좌표로 남은 길이기도 하다.
부슬비가 내리던 8월15일11시 경, 비상이 발령되어 초소에 배치되어서야 경축식장에서 일어난
육영수여사의 비보 소식을 접했고
북악산 정상 소나무 뒤에 엎드려 청와대를 떠나던 육여사의 운구 차량을
박대통령이 손으로 밀던 모습도 그려진다.
북악산은 조선시대 백악산신을 모신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 백악산이라고도 불렀다.
1.21 사태 당시 소나무에 박힌 총탄의 흔적을 보면서 숙정문으로 내려가다 보면
북악스카이웨이로 내려가는 길 곁에 있는 과수원에는 늦가을 붉은 사과가 군침을 삼키게 했고
중요한 위치에서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관찰할 수 있도록 둥근 모양으로 성곽을 도출시켜 축조한 곡장도 있었다.
숙정문에 오르니 삼청각에서 들려오는 가야금 소리와 기녀들의 춤사위가 창문에 어른거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숙정문은 음기가 강한 곳이라 하여 성문을 잠가 두고 출입이 통제되었는데
이 문을 개방한 이후에는 여성들의 인권신장과 사회활동이 두드러지게 향상되었다 한다.
서울의 절경이 아름답게 펼쳐지고 백악의 산줄기 끝에 있는 말바위 너래반석에서
가쁜 숨 토해내며 땀방울을 훔친다.
대상포진 치료 차 맞은 주사 때문에 말이 나오지 않고 정신이 혼미하다.
정신을 가다듬으며 계단과 좁은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내디디며 혜화문으로 향한다.
홍화문이었던 혜화문은 창경궁을 확장하며 정문을 홍화문이라 하였기에
부득이 혜화문으로 변경하였고 혜화문 천정에는 용이 아닌 봉황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백성들의 가을걷이에 새를 쫓기 위한 강구책이었다고 한다.
한양천도는 무학대사가 주창한 연세대 터와 정도전이 주창한 경복궁과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었지만
정도전의 풍수지리 의견이 채택되어 북악산을 주산으로 중심이 되어 성벽이 축조되었다.
당시 한양 인구가 오만여 명에 불과하였지만
여름, 겨울에 성벽 쌓기에 동원된 인구가 십일만 팔천 명이었고
세종 때에는 한양 인구가 십만에 불과했지만 인부 삼십이만 명과 기술자 이천이백 명이 동원되어
성곽을 축조하였다 한다.
사대문(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을 두었고
사대문 사이에는 사소문(혜화문, 광희문, 소의문, 창의문)을 세웠다.
개경 수창궁에서 출발한 조선 왕조가 1394년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외부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2회에 걸쳐 십구만 사천여 명을 동원하여 한양 도성의 축조를 마쳤다고 한다.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으로의 변천과 상징으로 구중궁궐의 울타리로 남아 있다가
2022년 청와대에서 칠궁 구간을 개방함으로써 54년 만에 국민 품으로 돌아왔다.
조선시대에 도성을 한 바퀴 돌며 한양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던 ‘한양도성 순성길 탐방’처럼
오늘은 요정 정치의 일번지인 삼청각과 대원각을 둘러보기로 한다.
우리나라 3대 요정으로 당시 군사정부 시절 정부고위급 인사와 재벌들의 비밀회동 장소로 유명했던
대원각은 길상사란 사찰로 변신하였는데 대원각의 주인인 김영한은 일본 유학을 하고
가무에도 능한 문학도였으나 남편과 사별 후 17세에 진향이란 이름으로 기생에 입적하게 되었다.
시인 백석과의 사랑은 헛소문으로 밝혀졌고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감명 받아
요정 터 칠천 평과 건물 약 사십여 채를 송광사의 말사로 시주하여
길상사란 아름다운 사찰로 재탄생 시켰으며 김영한은 길상화란 법병을 얻었다.
후일 법정도 여기서 타계하였고 김영한의 시신은 화장하여 삼청각 인근에 뿌려졌으며
공덕비와 영정이 있었고 법정의 유물과 영정도 전시되어 있었다.
길을 물으며 찾아 간 삼청각은 요정 정치의 산실로 남북 공동성명을 체결하기 위하여
건물 일부를 신축하였고 남북 적십자 장소,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 장소로도 이용하였으나
지금은 한옥카페, 예식장, 식당 등의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 되었다.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름대로 자기 인생의 마침표를 찍어가지만 지난 시간은 늘 그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