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관한 시모음 53)
봄의 금기사항 /신달자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
그저 마음 깊은 그 사람과
나란히 봄들을 바라보아라
멀리는 산벚꽃들 은근히
꿈꾸듯 졸음에서 깨어나고
들녘마다 풀꽃들 소근소근 속삭이며 피어나며
하늘 땅 햇살 바람이
서로서로 손잡고 도는 봄들에 두 발 내리면
어느새 사랑은 고백하지 않아도
꽃 향에 녹아
사랑은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리라
사랑하면 봄보다 먼저 온몸에 꽃을 피워내면서
서로 끌어안지 않고는 못 배기는
꽃술로 얽히리니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
무겁게 말문을 닫고
영혼 깊어지는 그 사람과
나란히 서서
출렁이는 생명의 출항
파도치는 봄의 들판을
고요히 바라보기만 하라
봄이 오면 /박정재
마른 가지 사이로
산들바람 고개 내밀면
마른 가지에서
매화꽃 다투어 피고
얇게 깔린 흰눈
아쉬운 듯 녹아내리면
갈잎 아래 숨은 들꽃
얼굴 내밀기 시작하고
늙은이 마른 가슴에
숨죽인 추억 들석이고
힘없는 설레임으로
먼 산을 바라본다
봄이 오는 기척 /목필균
아직 잎눈을 틔우지 못한 나무가, 찬 바람에 낮아진 체온이
이, 마른하늘 바라보며 달콤한 비를 기다리는 대지가 분명,겨
울 끝자락인데 자꾸 가을 냄새가 난다.
떠나 간 것들에 대한 기억이 새롭게 자리잡는 2월. 생각만
으로도 겨우내 움추렸던 육신이 저혈압으로 떨어지고. 꽃샘바
람에 걸려 터지는 기침 소리만 요란하다.
지금은 비워진 것들을 다시 채우려는 시간, 꽃눈 틔울 준비로
부산한 나무들. 어둠 속에서도 속살거리며 물을 길어 올리고는
열꽃 피울 몸살을 심하게 앓고 있다.
봄.1 /문춘식
1.
수탉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고 달린다.
머리만 남은 황소가 햇볕 속에 졸고
개나리 가득 핀 토담 밑에
거꾸로 박힌 소주병
철 지난 겨울이 담겨 있다.
2.
갓 깨어낸 대리석 조각 위에
피 흘리며 누운 새
가장 약한 부분을 쪼다가
가장 철저하게 쓰러진 새
그 주검 옆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핀, 새싹.
떡잎을 떨군다.
3.
허물어져가는 담벼락
전도식기 모양으로 그린 비행기.
하늘이 없어 날지 못하고
그 밑에
누가 캐다 버린, 달래 한 움큼
4.
산등성이마다 붉게 물든 욕정
고름처럼 내 비치는 들꽃들이 피면
자전거를 탄 아이들.
모두 어디 가고
놀이터에 남겨둔, 어지러운 그림자.
그 곳에 혼자 있는 하늘
미인처럼 잠드는 봄날 /박 준
믿을 수 있는 나무는 마루가 될 수 있다고 간호조무사 총정리 문제집을 베고 누운 미인이 말했
다 마루는 걷고 싶은 결을 가졌고 나는 두세 시간 푹 끓은 백숙 자세로 엎드려 미인을 생각하느
라 무릎이 아팠다 어제는 책을 읽다 끌어안고 같이 죽고 싶은 글귀를 발견했다 대화의 수준을 떨
어트렸던 어느 오전 같은 사랑이 마룻바닥에 누워 있다 미인은 식당에서 다른 손님을 주인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의 솜털은 어린 별 모양을 하고 어린 별 모양을
하고 나는 손발이 뜨겁다 미인은 밥을 먹다가도 꿈결인양 씻은 봄날의 하늘로 번지고 나는 손발
이 뜨겁다 미인을 생각하다 잠드는 봄날, 설핏 잠이 깰 때마다 나는 몸을 굴려 모안둔 열을 피하
다가 언제 받은 적 있는 편지 같은 한기를 느끼며 깨어나기도 했던 것이다
봄이 오는 길 /김형태
봄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줄, 깊게 그어진 붉은 상흔을 안고
섬 비렁에 머리를 떨구는
차디찬 동백에서 오는가?
이파리보다 먼저 나와
꽃샘바람에 홀연히 몸을 날리는
뜨거운 벚꽃에서 오는가?
발밑을 내려다보라!
별빛조차 얼어버린 묵정밭에 발을 묻고
간절하게 합장한 냉이꽃의 손끝에서
봄이 오고 있다
그 묵정밭을 일구어 씨를 뿌리려는
농부에게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대여
목이 마르도록
누구를 기다려 본 적이 없다면
스스로 봄이 되어 가라
기다림을 잊은 당신에게
봄은 아직 멀리 있다.
봄날 /강신갑
얼음장 밑에서도 물은 흘렀다.
짓밟힌 땅에서도 싹은 솟았다.
절벽을 휘감는 강
들판을 물들이는 푸르름
바위 틈새 나무도 노니는 물고기도
제 색깔 드러내며 허물 벗는다.
오는 봄 가는 봄 /하영순
화창한 날
솔솔 부는 바람 따라
봄 떠나기 전에 봄 찾아 길을 나셨다
벚꽃은 지고 말았다만
복사꽃이 곱다
양포 감포 구룡포 포항 호미 곳
바다를 겨드랑에 끼고
달리고 달렸다
산천은 울긋불긋 곱게 수놓은 양탄자 같았다
애당초 누가
이 나라 이 국토를 금수강산이라 말 했을까
참으로 아름답다
먼 길 돌고 돌아 내 집에 찾아드니
베란다에 재스민 천사의 나팔꽃이 쌍 나팔 분다
봄도 사랑도 먼 곳에 있지 않고
집안에 있었다.
꽃잎에 입 모아
불러본 옛 임의 노래
내 쉴 곳은
내 집 집 내 집뿐이라고
봄동 /박종영
납작 엎드린 네 얼굴
노란 웃음 선사 받고 보니
저절로 가슴이 환하다
삼동, 눈발에도 어김없이
뜨거운 숨 몰아쉬며 땅심 녹이던 날이 엊그제
이제야 겨우 나를 돌보는 시간
천지간에 부러운 눈총뿐이다.
너의 강인함이 부러워 찾아오는
봄바람이 시샘하고,
푸른빛으로 치장하는 2월의 들녘에서
사람들은 싱싱한 얼굴 다듬어 맛을 실어 나른다
봄동이여,
오늘은 작정하고 너를 꽃으로 부르랴
아니면 얼갈이배추로 다듬으랴
달라붙은 봄기운이 어느새 잎사귀마다 두툼하다.
봄날의 정사 /김선옥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북핵미사일과 같은 활화산이다
겨울을 관통한
갠지스 강바람 끌어들여 묵은 상념 털어내고
는개가 쌀 뜨물 같은 정액을 뿌려놓은
들판을 부둥켜 안은채
발정 난 암캐처럼 물오른 봄 처녀가
뒹굴고 있다는 입소문이 자자하다
양수 터진 자궁이 열였는지
생강나무. 산수유 젖멍울 풀때
지금 막 부화한 노란 병아리 같은
앙증맞은 개나리를 출산 중이다
아침에 사랑하고 저녁에 죽을지언정
하루살이처럼 화끈하게 사랑하는
뜨거운 生
백주대낮에 소곤소곤 귀엣말
온 대지는 오르가슴에 오르는 중이다.
봄날 /靑山 손병흥
연푸른 녹색 카페트 깔아놓은 산야
벌 나비 불러모아 연분홍 꽃장식 하고서
온 가득 풍겨나는 봄꽃 향기 맡으며
따뜻한 봄햇살 속 나들이 떠나고픈
사라졌다가 다시 부활하는 꿈들이
설레이는 마음으로 다가서는 계절
소리없는 향기 파랑개비 날리는
싱그러운 맑은 햇볕 설레이는 마음
활짝 핀 목련꽃 개나리 진달래
수줍은 미소 노랫소리 흐르는 봄
기지개 켠 채 맞이하는 기쁨 설레임
오래 머무르지 않을 허망함 서글픔
그러다 어느새 저만치 달아나 버릴
붙잡으려 해도 머무르지 않을 아쉬움
문득 되살아나는 쓸쓸함 그리움들이
더욱 마음에 와 닿는 인생의 덧없음
결코 길지 않을 화사함에 둘러싸여
토라진 애인처럼 돌아서던 서글픔조차
멋진 풍경되고 분홍빛 색깔로 변해버린
되살아나는 희미한 기운 아련한 옛 추억
쳐들어오는 봄 /김정희
봄은 그 때
마루 끝에 앉은 고양이 이마에서 막 피어나기 시작했는데
햇빛을 씹고있는 그 놈의 반쯤 닫힌 눈동자를 지나
겨드랑이를 비집고 나온 붓꽃잎을 지나
쪽마루 결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는데
몸살처럼 오소소 번지고 있었는데
바위들이 몸을 열고 있었다 그 속에서
미루나무 이파리들이 반짝이며 흘러나왔다
새끼 밴 까만 쥐들이 오목눈이새들이 불개미떼가
나는 그 속으로 아픈 몸을 구겨 넣었다
누워서
햇빛들이 두런거리는 소리 들었다
목련 우듬지를 거슬러 오르는 물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방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그리곤
속절없이 쳐들어오는 봄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 행복한 계절이다 /청초 이응윤
참 행복한 계절이다
내 사랑아
이대로 영원이라면 좋겠다
얄망스럽게
찬 기운 도는 날씨
얼어붙은 봄의 길목이지만
우리 갈망하는 사랑은
뜨겁기만 하네, 참 좋다
내 가슴
아직 녹지 않는 업들 있지만
세상 살 맛 난 단다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어
참 좋다, 행복하다
우리 아름다운 인연만 만들자
서로에게 기쁨이 될
참 좋은 꽃씨만 뿌리며
함께 가꾸는 사랑이 되자
오는 봄엔
우리 꽃이 더 아름다운
우리 사랑의 꽃동산을 만들자
봄날은 간다 /탁영 김병근
찔레꽃 향기 코 끝이 아려
손사래 치 듯 나비 너울 춤춘다
하양 꽃잎 날 리우는 여울물 위로
풀빛 하늘 휘돌아 사라지는 꽃구름이여
노고지리 노랫소리 보릿고개 그리움 짖고
잠 속에 빠져드는 봄날의 허망한 꿈들이여
바람도 숨 고르는 고즈넉한 산사에서
숲 속에 퍼져 우는 풍경소리 청랑한데
불두화 순백의 둥근 꽃잎
열매 맺지 못한 설움 어이할고
황혼길 노을 붉게 불타
산사의 주련柱聯 꿈틀꿈틀 용트림하듯이
촛불 만양 뜨거운 바람 일고
촛농의 눈물 흘러 내리 듯 봄날은 간다
봄 /공석진
첫 울음을
터뜨리는 갓난아이의
세상과의 대면도
바다 수면 위로
스멀스멀 떠오르는
태양의 웅장함도
도로 위를
살포시 감싸는
아지랑이의 손짓도
가슴을
훅훅 쓰다듬는
시골 처녀의 연정도
본다 본다
사랑을 본다
사랑이 보인다.
춘화春畵 /김종제
북한산 쪽두리봉 기슭에
야한 춘화 그려져 있다고
어디서 소문 듣고 구경간다
진달래, 홍매화 처녀들
저고리 풀어헤쳐
탐스런 젖가슴 드러내놓았고
개나리,산수유 저 여인네들
허벅지 슬쩍 보여주며
숲속에 앉아 노닥거리는데
이팔 청춘의
이제 막 물 오른
신갈나무, 작살나무 남정네들
까치발로 훔쳐 보고 있네
누가 그려 놓은 저 춘화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내 속에서 발기하는 것 있어
낙엽 위에 돗자리 하나 깔아놓고
사랑하는 사람 불러내야겠다
절벽에는 또 울긋불긋
사람꽃들이 피었네
너럭바위에 앉아서
꽃밥에. 꽃찬에. 꽃물에 취해서
황홀한 봄 아닌가
불끈불끈 솟는 봄기운을
도대체가 감당할 수 없어서
아직 차가운 시냇가에
풍덩,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