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대 점심
다음날에도 비는 계속 내렸다.
수프와 떡라면으로 아침식사를 끝내고 부족한 장비 구입을 위해 그린델발트로 내려갔다.
장비점에서 가스버너와 가스, 두 개의 하켄을 구입한 후 역 쪽으로 걸어가는데 태극 마크의 모자를 쓴 사람들이 갑자기 시야에 들어왔다.
샤모니에서 몽블랑 및 몬테로자(4,634m) 등을 등반한 후, 베르네 알프스의 묀히 등반과 아이거 북벽 정찰차 며칠 전에 온 고대산악회 팀이었다. 옆에는 아이거 북벽을 단독 등반하고자 온 크로니 산악회의 박영배 형(당시 34세, 1977년 설악산 토왕성 빙폭 초등자)이 있었다. 항상 산에서 마주치던 사람들을 알프스 촌구석에서 우연히 만나다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크라이네 샤이데크에서 날씨가 좋아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내려온 길이었다.
마침 비도 그치고 해서 길바닥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빵과 버터, 건포도 등으로 점심을 먹는 그들 사이에 끼어 앉아 우리는 한끼를 해결했다.
넉살이 좋은 우리 동기들은 산에서도 가끔 이렇게 빈대 붙어서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언젠가 동기들끼리 북한산 산행을 한 적이 있었다. 병풍암 암벽 등반을 끝내고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엠포르 산장 밑에서 배낭을 벗었다. 모두 대학 산악부에서 다져진 경력이 6년은 넘었을 때라 누구는 버너를 갖고 오고, 누구는 식량을 가져오기로 사전에 의논 한 번 안 했건만 무엇 하나 부족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날만은 어찌 된 일인지 버너와 코펠만 몇 개씩 나오고 식량이라곤 쌀과 감자 두 알이 전부 아닌가. 할 수 없이 각자 찌개거리를 구걸하기 위해 흩어졌다. 쇠고기를 한 근 이상이나 얻어온 서울 치대의 동기인 김윤만이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무슨 수로 얻었는지 쇠고기가 담긴 비닐 봉지를 돌리며 넘어질 듯이 달려오는 그의 얼굴에 넘쳐흐르던 환희의 표정은 지금도 가끔 이야기거리가 되고 있다.
약간의 식량을 슈퍼마켓에서 구입하고는 걸어서 알피글렌으로 올라갔다. 알피글렌까지는 무척 가파른 길을 두 시간은 족히 걸어 올라가야 했다.
갑자기 식구가 열 명으로 늘어난 우리 움막은 호텔의 일본인 주방장으로부터 수저와 큰 냄비를 빌리고, 앉을 자리를 만드느라 법석대어 마치 큰 원정대의 베이스 캠프 같은 활기가 넘쳤다.
밥, 김치찌개. 라면과 버섯수프 등으로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서울을 떠난 지 오래된 고대 팀은 김치찌개와 라면을 아주 맛있게 먹어서 우리 주방장인 정원이를 기쁘게 했으나, 매운 고추장을 한 숟갈씩 듬뿍듬뿍 떠먹은 고대 팀의 2학년들을 보며 우리는 마음을 졸였다. 혹시나 고추장이 바닥나는 게 아닌가 해서...
역시 한국 사람은 뽀빠이가 시금치를 먹듯이 고추장을 먹어야 힘이 나는가 보다.
고대팀과 영배 형은 다시 내리기 시작하는 비를 맞으며 클라이네 샤이데크를 향해 출발했다.
가스(안개)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제2설원 부근은 신설로 덮여 온통 하얗게 보였다. 등반이 가능하려면 저 위에 쌓인 눈들이 어느 정도 녹은 후 기온이 내려가 다시 얼어붙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도대체 얼마를 기다려야 할까.
밤새도록 눈사태 떨어지는소리가 가까이 울렸다.
정설거사
7월 27일. 어젯밤에 물에 담가두었던 떡으로 끓인 떡국맛이 일품이었다. 이제야 서서히 정원이의 음식 솜씨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나 보다.
지나가는 스위스 등산객이 기상대에 전화를 해보았다며 이번 목요일부터는 날씨가 좋아질 것이라기에 막연한 기대를 걸어보았다.
아이젠(Eisen: 빙설면 또는 빙벽 등반에서 등산화 밑에 부착하여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금속제 장비)에 밴드(Band: 아이젠을 등산화에 부착하는 끈)를 달기도 하고 움막 처마에 자일을 고정하여 유마링(Jumaring: 유마르Jumar는 고정된 로프를 올라갈 때 등반자가 손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고안된 용구로서 그 유마르를 사용하여 올라가는 행위를 유마링이라 한다. 그 외에도 짐을 올리거나 확보 혹은 구조할 때 등 용도가 광범위하다) 연습을 하기도 했다.
밥과 어제 사온 쇠고기로 불고기를 만들어 점심을 먹고는 호텔 식당에 앉아 모두 그림 엽서를 쓰느라 바빴다. 대학교 산악부 선후배들, 사레와 공장, 회사 동료들에게도.....
한 장 초안을 잡으면 나머지 내용은 전부 대동소이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등사기라도 갖고 와서 미는 건데."
정원이가 중얼거렸다.
미역국으로 저녁을 먹고는 코펠을 들고 설거지를 하러 나왔다.
동기 산행을 갈 때마다 각자 알아서 한 가지씩 맡는데 나는 언제나 설거지를 전담했다. 버너 켜서 쌀을 물 맞춰 올리고, 감자나 양파를 깎아 찌개거리를 준비하는 것보다 나같이 게으른 놈은 '설거지를 한다'라고 한 동작으로 표현되는 간단한 일을 맡는 게 훨씬 수월했다. 덕분에 '정설거사(정광식+설거지+도사)'라는 썩 멋있다고 볼 수 없는 별명을 얻긴 했지만 '밥이 설었네', '찌개가 너무 짜네'라는 둥 여러 불평을 듣지 않아 속 편했다.
움막에서 나와 몇 걸음만 올라가면 말구유같이 생긴 큰 나무 물통으로 아이거의 눈 녹은 물이 24시간 콸콸 떨어지는데, 빙하에서부터 내려오는 동안 텁텁한 석회암 성분은 깨끗이 걸러져 물맛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아무리 해도 설악산의 산삼 썩은 물맛에 비할 수야 없지만.....
기다림에 지친 우리들은 내일은 날씨가 흐릴지라도 실제 등반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문제점을 미리 발견하여 보완하자는 생각에서 북벽 밑의 설계(雪係: 눈 덮인 사면)까지만이라도 북벽을 공격할 때와 똑같은 복장과 똑같은 무게의 배낭을 메고 예행연습을 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우리는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갔다. 산에 다니는 사람들이 눈뜨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날씨를 살피는 것이 아닌가.
비는 내리지 않았으나 북벽은 여전히 가스에 잠겨 있었다. 한 참 바라보고 있던 선우가 투덜댔다.
"저 년의 치마를 언제 벗기누!"
베이스 캠프를 설치한 지 4일째인데도 우리는 어직 정상은커녕 아랫부분도 또렷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북벽은 예의 그 소문난 나쁜 날씨를 우리한테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저 밑의 그린델발트는 연일 햇볕이 내리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떡국으로 아침식사를 한 후 배낭을 꾸려서 움막 밖으로 나왔다. 고개를 들어 여전히 가스 속에 가려져 있을 북벽을 올려다본 우리는 함성을 지르고야 말았다. 아이거의 정상 부분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가스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게 아닌가! 지루한 기다림 끝에 아이거는 정상 부분만, 그것도 고작 10분 정도만 자기 몸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저 무시무시하게 우리를 압도하며 오만하게 서 있는 북벽을 오르고자 우리는 그 먼 길을 달려왔던가!
북벽은 참으로 높아 보였다.
어찌 산만을 야속타 하리오
한 시간 25분 가령 완만한 산록을 걸어올라 해발 2,061m의 클라이네 샤이데크에 도착했다. 클라이네 샤이데크에서 바라다 보이는 묀히와 융프라우는 아이거와 달리 가스 한 점 없이 만년설을 이고서 수려한 봉우리와 빙하를 눈부신 햇빛아래 펼쳐 보이고 있었다.
대여섯 채의 호텔을 비롯하여 식당과 기념품 가게들이 있는 클라이네 샤이데크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큰 나무 술통에 둘러 앉아 생맥주를 마시며 웃고 떠드는 패거리도 있고, 알프스 목동들이 부는 큰 호른 쪽으로 몰려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역 바로 옆 뷔페 레스토랑의 3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영배 형을 발견하고 올라갔다. 영배 형은 이종 사촌동생인 '최선희'란 아가씨와 함께 있었다. 대만 유학 중 방학을 맞아 영배 형을 도우러 온 그녀는 독어와 불어도 어느 정도씩 할 줄 아는 재원이었다.
주방장 정원이가 짠 식단에 오늘의 중식은 '빈대'라고 나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영배 형의 없는 살림에 '빈대' 붙어서 스파게티를 얻어 먹음으로써 계획을 충실히 따랐다.
영배 형과 함께 오후 1시 45분에 클라이네 샤이데크를 출발하여 작년 원정대의 베이스 캠프지에 2시 30분에 도착했다.
이곳은 북벽 제일 밑의 설계가 시작되는 지점까지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으며 날씨가 맑을 때는 북벽 전체가 올려다보이고 뒤로는 그린델발트와 알피글렌의 우리 움막이 한눈에 내려다보일 정도로 조망이 좋았다. 텐트를 한꺼번에 여섯 동까지 칠 수 있을 만큼 넓을 뿐더러 바로 옆으로는 물이 흘러 최상의 베이스 캠프지로 여겨졌다.
내 팔을 잡아 끄는 선우를 따라가 보니 작년 사고가 난 후 철수하면서 쓰레기를 소각하던 곳이었다. 찌그러진 채 반쯤 땅에 묻힌 코펠, 식량 잔해, 타다 만 주동규 대원의 옷 들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했다.
작년에 우리가 제상(際床)으로 삼았던 널찍한 바위 앞에서 잠시 묵념을 했다.
"건호, 담배 피우지?"
건호 형과 그다지 가깝지는 않았지만 서로 잘 아는 사이였던(어디나 골수꾼들의 세계는 좁은 법이다) 영배 형은 건호 형이 이제 이세상 사람이 아니란 걸 인정하기 싫은지, 아니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지 '담배 피웠었지'라고 하지 않고 '담배 피우지'라고 현재형을 쓰며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여서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담배는 누군가가 피우고 있는 듯이 점점 안으로 타들어갔다.
우리는 산에서 참으로 크나큰 즐거움을 얻는다. 그러나 산은 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가서 그 즐거움의 양만큼 똑같은 슬픔을 안겨주니 어찌 산만을 야속타 하리오.
젖어오는 눈을 들어 가스가 희미하게 덮여 있는 북벽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예행 연습
처음 설계를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경사가 완만함에도 불구하고 아이젠을 신고 아이스 클라이밍(Ice Climbing: 빙벽 등반) 장비를 몸에 걸친 다음 제2설원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실전 대비의 리허설을 시작했다. 40m 단위로 워트훅(Warthog: 가파른 빙벽 등반시 사용하는 장비로서 보통 파이프형의 것과는 달리 빼려서 박고 돌려서 뺀다)이나 스나그(Snag: 워트훅과 비슷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파이프형으로 생겼다)를 확보용으로 박으며 내가 톱(Top: 등반자들 중 맨 앞에서 오르는 사람. 즉, 선등자로서 가장 위험부담이 크다)으로 전진을 하면 세컨드(Second: 등반자들 중 두번째로 오르는 사람. 중간자라고도 한다)인 선우와 라스트(Last: 등반자들 중 후미에서 오르는 사람)인 정원이가 유마르로 따라왔다. 눈이 단단한 데는 아이젠이 잘 박혀 좋았지만 부드럽고 물기가 많은 데를 지날 때는 아이젠 밑으로 눈이 뭉쳐 가끔 떼어내야 했다.
중간에 설계가 갈라진, 깊이기 20m 정도 되는 크레바스(Crevasse: 빙하의 표면이 갈라진 깊은 틈)를 우측편의 바위로 통과했다. 이 크레바스는 추락한 클라이머가 갈가리 찢겨진 채로 발견되곤 하는 곳이다.
약 200m의 설계를 끝내고 바위가 막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베르그슈룬트(Bergschrund: 만년설 하단부가 빙하로 갈라지며 생기는 깊은 틈)를 건너뛰니 5시 50분이었다.
약간의 간식을 먹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조심 걸어서 내려가다가 글리세이딩(Glissading: 빙설이 덮인 가파른 비탈을 피켈 등을 이용해 제동하며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으로 설계 끝까지 내려왔다. 잘잘한 석회함 조각들이 박혀 있는 얼음 위를 앉지도 못하고 무릎만 구부린 채 빠른 속도로 글리세이딩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영배 형과 헤어지고 경사진 풀밭을 걸어 내려와 움막에 도착했다.
처음으로 거리관념이 혼동되는 경험을 했다. 북벽 바로 밑에서 보면 기껏해야 15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손에 잡힐 듯이 보이던 알피글렌까지 내려오는데 한 시간 이상 걸렸고, 또한 여기서 설계까지 올라가는 데는 30분이면 될 듯 보이나 아무리 올라가도 가까워지지를 않고 두 시간은 족히 걸린다고 선우가 설명했다. 산의 규모가 크기도 하지만 높은 나무 하나없이 경사신 풀밭이 이어져 거리를 가늠하기가 더욱 어려웠다(고산으로 올라갈수록 기압이 낮아지므로 공기의 밀도 또한 낮아진다. 동시에 사물이 실제보다 훨씬 가까이 보인다).
얼마 크지도 않은 것 같던 설계도 제일 위에서 보면 설계의 맨 밑에 서 있는 사람이 손톱 반보다도 작게 보일 정도로 대단한 크기의 설사면이었다. 하물며 하늘을 찌를듯이 서 있어서 바로 밑에서 보면 정상조차 보이지 않는 북벽은 도대체 얼마나 크단 말인가.
우리는 조금씩 기가 죽기 시작했다.
장비 정리 후 각자 오늘의 예행 연습에서 발견된 문제점들을 끄집어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47324B4D707FC209)
(사진: 아이거 북벽의 아침은 햇살과 함께 오지 않는다. 오후의 해가 비치는 것도 잠깐이다)
카라비너(Carabiner: 암벽 및 빙벽에서 두 가지 이상의 장비를 서로 연결하기 위해 가장 널리 유용하게 쓰이는 기본 장비로서 보통 듀랄루민 합금의 개폐 고리)를 조금 더 가져가야겠고, 익숙지 않은 9mm의 더블 로프(Double Rope: 유럽 알프스에서 인공 등반을 위해 발전된 자일 사용 기술로서 자일의 원활한 소통과 안전을 위해 두 가닥을 사용하는 방식)보다는 10mm의 싱글 로프(Single Rope: 자일을 한 가닥만 사용하는 방식으로 자유 등반시에 많이 사용된다)를 택해야겠고, 아이스 해머(Ice Hammer: 빙벽 등반시 피켈과 함께 사용하며 얼음을 내리찍어 잡고 올라가거나 확보물의 설치나 회수에 쓰이는 기본 장비)나 피켈은 손목고리 대신에 몸에 연결시켜 떨어뜨리는 걸 방지해야겠고, 짐의 무게를 덜기 위해 하켄과 양말의 수를 줄여야겠다는 등 여러 가지 좋은 의견들이 나왔다.
미역국, 홍합조림, 버섯스프 등 다양한 메뉴의 저녁식사를 하고는 설거지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을 때 처음으로 밤하늘에 떠오른 반달을 보았다.
'이제는 날이 개려나?'
선우는 내일 장비 구입차 독일 뮌헨의 사레와로 떠나는 선희씨 편에 부탁할 장비 목록을 만들고 있고, 정원이는 버너를 고치는데 골몰하고 있으며, 나는 『아이거: 죽음의 벽』이라는 책에서 각 피치의 개요를 뽑아 종이에 옮겨 적고 있었다.
1982년에 발간된 이책의 저자인 미국의 아서 로스(Arthur Roth)라는 작가에게 나는 상당히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는 54세에 처음으로 클라이밍을 시작한 후 아이거에 흥미를 느끼고, 아이거 북벽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 위해 수년간 아이거 주변은 물론 그린델발트의 도서관과 미국 알파인클럽(American Alpine Club) 도서관 등을 샅샅이 뒤져 종합적인 아이거 북벽에서의 생과 사의 대한 역사를 한데 묶어내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한 등산 장비점에서 이 책을 구입한 나는 한 단어도 빠뜨리지 않고 두 번 통독하여 이이거 북벽에 대한 개념을 자세하게 파악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어느 정도 승산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움막 밖의 밤하늘에는 실로 오랜만에 별이 총총했다.
일본인 주방장 윈터
오랜만에 화창하게 날이 갰다. 구름 한 점 걸린 데 없이 아이거 북벽은 흉악한 몸뚱이를 마침내 드러내고야 말았다(여기 스위스 사람들은 종종 아이거를 처녀로, 융프라우를 수도승으로 그리고 묀히를 바람둥이 남자로 비유하곤 한다).
제1설원(First Ice Field) 위에서부터는 온통 눈이 허옇게 덮인 채로 우리를 두려움에 질리게 하고 있었다. 이틀 정도만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눈이 어느 정도 녹아 등반하기에 그리 큰 어려움은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글쎄, 이 좋은 날씨가 며칠이나 버티어줄런지 의문이었다.
떡국으로 아침식사를 한 후 우리는 따사로운 햇볕 속의 호텔 옆 마당의 의자에 앉아 엽서를 쓰기도 하고 망원경으로 북벽의 구석구석을 살피기도 했다. 책에서만 보던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진 부분들이 마치 오랜 전부터 봐왔던 것처럼 눈에 익어갔다. 북벽은 점점 낮아 보이고 아이거 북벽 등반이라는 말이 그저 꿈같지만은 않은, 현실성 있는 단어로 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뮌헨의 사레와로 장비를 사러 가는 선희 씨와 함께 선우는 인터라켄에 유마르 한 조를 더 구입하겠다고 내려가고, 정원이와 나는 고소 순응을 위하여 융프라우요흐(3,454m)까지 갔다오기 위해 호텔의 일본인 주방장과 함께 기차에 올랐다.
그는 일본 교토의 RCA 클럽이라는 산악단체의 회원으로 작년에는 쉬운 미텔레기 능(1921년 유코마키라는 일본 산악인이 세 명의 가이드를 고용하여 1박 2일만에 초등한 비교적 쉬운 아이거의 동쪽 능선 루트를 말한다. 유코마키는 그 후1956년 히말라야 마나슬루 봉의 초등에 도전하는 일본 원정대의 대장을 맡아 등반을 성공으로 이끌었다)으로 아이거의 정상에 갔다온 적도 있다. 그는 그저 산이 좋아 좋은 직장도 팽개치고 아이거 밑의 호텔에서 형편없는 월급을 받으면서도 언젠가 북벽을 오르는 꿈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했다. 그도 오늘은 휴가를 내서 서릉을 정찰하겠노라며 우리를 따라나섰다. 그는 가끔 주인 몰래 음식을 조리해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었고, 우리도 라면이나 된장으로 그의 입을 즐겁게 해주며 친하게 지내고 있던 터였다.
며칠 내리던 비가 그친 어느 날, 영어를 거의 할 줄 모르는 그가 눈을 허옇게 덮어쓰고 있는 아이거 북벽을 가리키며 '마치 겨울같이 눈이 많이 쌓였다'는 말을 그냥 "Winter!"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윈터라고 불렀다.
1977년 9월 아프가니스탄에서 등반을 마치고 샤모니로 들어온 영국의 법학도인 알렉스 매킨타이어는 미국의 등반가인 토빈 소렌슨을 술집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그 또한 존 할린 직등 루트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차비가 없었던 그들은 각자 차를 얻어 타고 알피글렌에서 다시 만났다. 알피글렌 호텔에서 접시를 닦으며 숙식을 해결하던 이들은 날씨가 좋아졌을 때 북벽을 시작하여 네 번의 비박 후 정상에 올라서는 데 성공하여 존 할린 직등루트는 동계에만 가능하다는 정설을 뒤집었다.
일본인 주방장 윈터가 이들의 후배인 셈이다.
그 후 매킨타이어는 1978년 창가방(6,864m) 서벽에 직등루트를 내는 데 성공했으며, 1980년 다울라기리 1봉(8,167m) 남동벽을 올랐고, 1981년 중국의 시샤팡마(8,046m) 남벽에 새로운 루트를 개척했고, 1982년 안나푸르나 1봉(8,091m) 남벽을 오르던 중 낙석에 맞아 사망할 때까지 평범하지 않은 등반을 해 왔다. 소렌슨 또한 1980년 캐나다 록키 산맥의 앨버타 산을 단독 등반하던 중 추락하여 사망했다.
우리는 클라이네 샤이데크에 도착해서야 융프라우요흐까지 올라가 등반을 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람을 깨달았다. 대신 북벽이 잘 보이는 역 앞의 언덕으로 올라가 햇볕을 쬐며 오후 내내 망원경으로 북벽을 살펴보았다. 눈사태가 쉬지 않고 떨어지고 있었다. 정상 바로 전의 '엑시트 설원(Exit Snowfield)'이 마치 7, 80도 경사의 반들거리는 빙벽으로 보여 사뭇 위협적이다.
7시 10분에 떠나는 막차를 타고 알피글렌으로 내려와 선우가 사온 갈비를 고아서 설렁탕으로 저녁을 먹었다.
일기 예보에 의하면 내일 오전은 맑고 오후는 비, 모레와 글피는 맑겠다고 했다. 아까운 날들이 하루하루 지나가고 쌓여가는 상념에 잠 못 이루며 밤새 뒤척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