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구군(楊口郡)에서 출생하였다. 생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의병에 투신한 시기는 확인되지 않지만, 1908년 강원도 양구군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는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 및 군대해산으로 촉발된 의병전쟁이 한창이었으므로 동지를 모아 거병한 것으로 보인다.
1908년 11월 120~13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양구 일대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읍내에 주둔하고 있었다. 낮에는 부하들을 높은 곳에 보내 보초를 서게 하는 등 주위를 경계하는 데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들 의병부대의 활동은 곧 일본군에게 알려져 ‘토벌대’가 구성되었다. 일본군은 춘천수비대 후지이(藤井) 소위에게 보병 30명과 기병 7명 외에 순사를 더한 부대를 편성하게 하여 11월 20일 양구로 보냈다. 일본군은 의병부대가 세워둔 보초를 피해 읍내에 접근하여 의병부대 상황을 파악하는 한편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일제 문서에 기록된 김덕흥(1907.11.26) [판형3] |
저녁이 되고 보초의 감시가 소홀해지가 일본군은 오후 7시 2개 방면으로 나누어 양구 읍내로 진입하였다. 기습을 당한 의병부대는 크게 놀라 흩어졌다. 이 과정에서 부대원을 수습하여 일본군에 맞서려 하였으나 극복하지 못하고 전투 중에 부대원 11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의병부대는 흩어졌고 일본군은 총기 및 탄약, 승마 1두, 안장 등을 노획하고 가옥 1채를 소각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