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없어도 바다는/유정이-
멀리서 오는 기차가 선로도 없는 마당에 와 멈추는 꿈을 꾸다 깨었다 왜 매번 기차인가 마당을 지나면 바다 바다를 건너면 창망한 저녁이 낮은 숨을 뱉어내고 있었지만 그것이 꿈꾸는 나를 규명해 주지는 않았다 언제나 가볍게 목을 조여 오는 인후통은 느린 곡조로 흐르는 추억 때문인 것을 안다 목숨 걸 사랑을 만나고자 했다면 푸른 뱀처럼 슬픈 저 바퀴에 올랐어야 했다 마당 끝으로 절벽 같은 바다가 비명처럼 떨어지고 시간을 잘디잘게 부수어 깜깜한 그리움을 실어 날랐다 나를 온전히 엎지르고 싶은 날이 있었다 오늘 만난 시는 고개를 숙이며 우울한 듯 몇 차례 발끝만 차다 가 버린다 머뭇거리는 마른 입술 사이로 달빛 그렁한 밤은 오고 세상은 어제보다 긴 하루를 조용히 끌어당긴다 네가 없어도 바다는 넘실대고 기차는 정해진 시간대로 떠나 또다시 돌아올 것이다 물기 가득한 밤이 나를 재우러 올 것이다
-7월의 바다/황금찬-
아침 바다엔
밤새 물새가 그려 놓고 간
발자국이 바다 이슬에 젖어 있다.
나는 그 발자국 소리를 밟으며
싸늘한 소라껍질을 주워
손바닥 위에 놓아 본다.
소라의 천 년
바다의 꿈이
호수처럼 고독하다.
돛을 달고, 두세 척
만선의 꿈이 떠 있을 바다는
뱃머리를 열고 있다.
물을 떠난 배는
문득 나비가 되어
바다 위를 날고 있다.
푸른 잔디밭을 마구 달려
나비를 쫓아간다.
어느새 나는 물새가 되어 있었다
-바다 토픽/이영숙-
은빛 바다는 유흥업소 늘 영업중이다
쨍그랑!
크리스털 부딪히는 찬란한 소리
비릿한 햇고등어 기억 떠올리며
갈매기와 청파래 춤을 춘다
백골이 부서지도록 아픔을 참아내는 날은
솨르르, 솨르르
글라스 뭍으로 기울고
순도 백 퍼 센트 독한 술을 퍼 부을 때마다
말이 많아지는 바다
흔들리는 귀밑머리 하얗게 센
초록 양말 신은 어느 중년의 사내가
온몸 무수한 은비늘 꽂힌 채로
동해바다에 떠내려온 내 앞에서
코를 땅에 박고 우스꽝스럽게 쓰러진다
밤바람이 잽싸게 넘긴
포개고 싶은 또 한 페이지 너머로
여성잡지처럼 읽을거리 넌출대는
바다 토픽
-바다가 되려는 시인-우대식/이대흠-
너의 우울로 바다를 치유할 것이냐
시인아, 너는 걸렸다
꽃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발바닥이 다 닳도록 걸었으니
이제 너를 죽여 바다가 되어라
사람의 언어라는 것은
그물에 걸린 고래 같아서 슬프고
하늘을 뚫는 독수리 같아서
아프다
가만,
의자 하나 바닷가에 두고
저무는 하늘이나 볼 일이다
또 너는 지는 것이다
그물이라는 말,
바다라는 말에도 독이 있다
극약인 이 세상에 쓸 약은
극약뿐이니
시인이여,
너의 삶이 우리의 연장이다
-바다 속에 잠든 고래가 된다/이현채-
악세레이터를 밟으며 서해로 간다
언제 들어도 좋은 칸소네, 라디오에서는 밀바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무영(無影)으로 떠도는 바람을 따라 악세레이터를 밟는다 장롱 속에서 반지잠을 자다가 멀뚱한 눈으로 방부제 가득한 생각들을 되짚으며 불협화음이나 일으키는 머릿속에 든 잡동사니들, 그 잡동사니들을 버려야 한다
가슴 속에 박혀 있는 못들, 그 못들을 하나 둘씩 뽑아
차창 밖으로 날려 버린다
멀리 보이는 교회의 황금 첨탑 아래 블루칼라들, 그 블루카라들은 하루의 끼니를 때우기 위해 허름한 국밥집을 찾아 든다 일당으로 받은 몇 푼 안 되는 돈을 지갑 속에 넣으며 처자식의 눈빛들을 크로키 한다 자식들의 꿈이 비에 젖는 부스러기 말들을 늘어놓는다
꿈이 비에 젖어 강물 위를 걷고 있다
과거에서 온 사람들이 비에 젖는다
우산 속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연인들의 발걸음은 갈매기의 나래 깃, 냄새 없는 시간 속으로 행방불명된 사람들은 종신형을 받았는지 감감 무소식이다
악세레이터를 밟는다 가로수에 걸린 울음을 안고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 잠든 고래가 된다
-잠자는 바다/남진우-
나무 그늘 아래
잠든 여인이 누워 있다 그녀 숨소리 따라
조금씩 잎사귀들이 흔들린다 살며시 내려앉는
안개와 새 울음소리
머얼리 바닷물은 부풀어 올라
둥근 달을 낳고 달은 소나무 향기를
대기 가득히 풀어 놓는다 푸르른
바람 한 줄기 그녀 입술을 스칠 때
누군가 촛불을 켜들고
우물 밑으로 내려간다 한없이 깊고
어두운 우물 밑 잎사귀들은 쌓이고
달빛은 오솔길을 거슬러 오르는 피를 따라
어두운 숲으로 흘러간다
흘러간다 서서히 밤하늘을 적시며
......이 밤 그들은 뗏목을 타고 사나운 밤바다를 건너가리라
......조금씩 가라앉는 수평선너머 폭풍우는 그들을 기다리고
......이 밤 그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섬을 찾아 헤매리라
점점 자욱해지는 안개 저편
그녀는 미소짓는다 그물을 들고 바다를 내려가는
사나이들의 낮은 휘파람이
들리다 그치는데
아득히 열리는 바다 달빛에 씻긴 물결이
그녀 잠 속으로 밀려들어 물보라를 일으킨다
자욱히 어둠의 가루를 흩날리며 파도가
해변에 토해놓은 부서진 나무 조각들
말미잘 불가사리 물거품의 상형문자들
다시 바람이 일어 잎사귀 흔들리고
그녀 숨소리가 차츰 멀어진다. 서서히 구름의
천막에 갖혀진 밝아오는 하늘 저 멀리엔 차갑게
빛나는 등대 하나뿐
-남포동 바다/정경애-
바다는 늘,
한가지 감정과 풍경만을 지닌 것은 아니다.
지친 해[太陽태양]가 잠자리를 준비하는 분홍빛 이불 틈으로
빈몸으로 돌아오는 조각배의 상처난 언저리,
그 안에서 낡은 닻을 거두며 밧줄을 던지는
작은 어깨근육의 남자가
담담하게 바라보는 저물녘 바다와
멀리서 가끔 찾아와
찾아온 거리보다도 더 먼발치께로
그리웁게 바라보는 나의 바다 사이에는
부지런한 헛손질로도 결코 만져질 수 없는
깊은 거리가 있다.
단단한 부리로 정확하게 먹이를 겨냥하던
갈매기들의 재빠른 날개짓 소리가 그칠 즈음에
아기 문어도 길바닥을 헤매어 꿈결속 바다로 향하는
부산, 남포동의 자갈치 시장.
밀리는 대로 말없이 밀려주는 가난한 사람들이 숨긴
무서운 소금 냄새와
억센 사투리가 가볍게 튕겨서 부서뜨리는 하루의 부대낌이
나의 내부 안에서 가기 다른 바다의 물결처럼 번지듯
젖은 밤거리에 잦아드는 불빛들의 안식이
조금씩은 다른 느낌의 색깔로 숨들을 쉰다.
사람들은 누구나 바다와 같이
한가지 슬픔과 기억 때문에 외로워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캄캄한 어둠의 길목으로 되돌아서는 나의 내력 위로
검은 비닐 봉지의 겉껍질처럼 불투명해지는 바다의
잠자는 피부가
또 다른 슬픔의 내용들을 하나씩
정성껏 포장을 한다.
-서른에 나는 다시 바다를 만났다/김태형-
먹다 남은 과자부스러기 노랗게 손에 쥐인 채
늦은 아침잠에서 깨어 눈을 비빈다
가슴께 숨이 차오를 때까지 달려가면 거기 바다가 있다
밥투정을 하다가 한달음에 달려가던
섬마을 내 어린 바닷가
파란 슬리퍼를 한쪽 먼저 내던지고는
차오르는 숨자락 끝에 남은 한쪽
마저 매달아 차올리면 거기
썰물져 다 밀려나간 빈 바다가 있다
덕지덕지 고동이 붙은 갯바위 따라 들어가면
곧 파도가 밀려와 흰 사자 갈기를 세운 채
비린 내 어깨를 성큼 짓누를 거라는 무서운 말 속에
허넓은 바다가 있다
되돌아서면 이제는 저무는 마른 바다가 있다
백사장에 떠밀려온 검은 미역줄기들
바스러진 조가비들 사이로
모래 파도에 파란 잇몸을 드러내고 있는 두 발의 슬
리퍼
저만치 먼저 물밀어 가 있다
바닷가 저녁 별들은 내 둥근 머리를 쓰다듬으며
웨하스처럼 밤하늘 가득 바삭바삭 떠오르고
굳은살 박힌 사릿물 소리에 나는 늦은 귀를 대어본다
-바다를 주머니에 넣고/원재훈-
소라껍질 속으로 겨울이 온다
바람도 집을 짓고
수평선 너머 더 멀리 쳐다보기만 하는 달밤
한 평생을 걸어온 나그네 같은 달빛이
백사장을 서성거린다
'거기 누구요?'
불러도 아무 대답도 없이 사라지는 썰물
지나온 시간들이 모두 빠져나간 자리엔
그대가 머물렀던 흔적이 있고
나는 없다
그래 내가 없다
바다를 떠 담는다
주머니 속에 쏙 들어오는 작은 바다
내 마음의 그릇모양으로 담긴다
손바닥 가득히 고이는 것은
이젠 슬픔이 아니다
맨발이 시렵지 않는 어느 오후의 서해바다
더 멀리 더 멀리 날아가는 것은
몸부림치며 그리워했던
사랑이 아니다
내가 아니다
잃어버린만큼 채워지는 바닷가
아무도 슬프지 않다
난 잃어버렸다
난 잃어버렸다
내가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반딧불이 한 마리
내 기억의 나무에 무성한 불꽃으로 타오르던
아무도 다가설 수 없었던 聖樹에 달라붙어
빛을 내는 성스러운 곤충들
-바다에 버리고 오다/기형도-
1.
도망치듯 바다로 달렸다
그 바다, 구석진 바위에 앉아
울고 싶어서 술을 마셨다
그냥은 울기가 민망해서 술기운을 빌려 운다
울 수 있을 만큼만 술을 마신다.
그러면 바다는 내 엄살이 징그럽다고 덤벼들었다
노을이 질 무렵, 파도가 한 웅큼의 피를 쏟아내었다
바다는 새벽을 잉태하기 위하여 날마다 하혈한다
일상의 저음부를 두드리던 가벼운 고통도
내 존재를 넘어뜨릴 듯 버거운 것이었고
한 옥타브만 올라가도 금새 삐그덕거리는 우리의 화음은
합의되지 못한 쓸쓸함,
그래 가끔은 타협할 필요도 없이 해결 되기도 했지만
나와 함께 아파 할 아무도 없다면 어떠랴
징징대는 감정을 달래느라 늘 신경은 하이소프라노로 울고
끝내는 당도하지 못할 너라는 낯선 항구,
파도가 쓸고 가버린 것은 빈 소주병만이 아니었을까
시작도 없는 끝, 시작만 있는 끝
늘 함부로 끝나버리기 일쑤인 기약없는 시작이었음을
2.
바다가 잠든 나를 두드렸다
이미 어두워진, 수초내음만이 살아있는 바다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눈을 문질러도
보이지 않아서 볼 수가 없다
보여도 보이지 않는 척 하기로 한다
바이올린의 비명이 나를 대신하는
oblivion, 바다가 슬픔을 풀어놓는 동안
잃어버린 기억 한자락 끼어든다
망각은 내가 너를 견디는 방식
살아가는 것이 무릎 관절염 같은 시린 악몽일지라도
오늘, 단 한편의 아픈 꿈을 허락하기로 한다
오늘만 취하기로 한다
수평선 너머로 밀려가는 아득한 기억상실을 위하여
3
바다는 출산을 위하여 끙 한번 신음한다
망망대해에 부유하는 사연들과 같이 아파했던 까닭으로
바다는 새벽을 낳을 무렵, 푸르고도 투명하게 멍들어 있다
-바다 앞에서/문정희-
문득, 미열처럼 흐르는
바람을 따라가서
서해바다
그 서럽고 아픈 일몰을 보았네
한 생애
잠시 타오르던
불꽃은 스러지고
주소도 모른 채
떠날 채비를 하듯
조용히 옷을 벗는 해안선을 보았네
아, 자연
당신께 드리는 나의 선물은
소슬히 잊는 일뿐
더운 호흡으로 밀려오던
눈과 파도와
비늘 같은 욕망을
잊는 일뿐이었네
잊는다는 일 하나만
보석으로 닦고 있다
떠나는 날
몸과 함께 땅에 묻는 일이었네
-그 바다에 가고 싶다/양현근-
해종일 제 몸 허물어
그 바다는 자유라 한다
물살은 쉬임없이 제 무게만큼의
노래를 부르고
먼 하늘 돌고 돌아
은비늘 세우는 파도
소리∼
그 바다에 가고 싶다
그 바다가 보고 싶다
온천지 출렁임으로 숨가쁜
철지난 가을바다
가슴 귀퉁이를 지긋이 잡아당기면
모래언덕엔 온통
부음뜬 조개들의 헛기침만
사각대고
아, 파도소리
쉰 바람소리만
팔락파락-파도파도
파파파∼
도
바다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일까.
-바다의 물집/정군칠-
환한 빛을 따라 나섰네
지금은 달이 문질러 놓은 바다가 부풀어 오르는 시간
여에 부딪치는 포말들을
바다의 물집이라 생각했네
부푸는 바다처럼 내 안의 물집도 부풀고
누군가 오래 서성이는 해변의 밤
온통 흰 꽃 핀 화엄의 바다 한켠
애기 업은 돌을 보았네
그 형상 더욱 또렷하였네
제 몸 밀어내고 다른 몸을 품고서야 바다는
해변에 닿는다지
버릴 것 다 버린 바다의 화엄이
저 돌로 굳은 것일까
걸러내야 할 것들이 내게도 참 많았네
목이 쉬도록 섬을 돌았네
단지 섬을 돌았을 뿐인데 목이 쉬었네
파도의 청징淸澄한 칭얼거림이 자꾸만 들려왔네
깍지 낀 손 풀어 그 울음 잠재우고 싶었으나
달빛은 바다 위에서만 출렁거리고
나는 서늘한 어둠의 한켠에 오래
오래 머물지 못했네
-초승달 바다에/송문헌-
누구의 한 생애를 기록하고 있는가
만나고 헤어지는일체의 관계들이 정지된 채
어둠 속 텅 빈 바다는
어느 시간의 변방에 앉아 웅얼웅얼
먼 먼 뱃길 항로를 밝혀 들고
유리(遊離)의 초승달이 저 홀로 쓸쓸히
마라도 밤바다에 빈 길을 내고 있다
-눈 속의 바다 건너/유안진-
풀잎 하나에 가을이 내려와 주고
비누 방울에도 무지개가 걸려 주는 이 땅에 태어나
병 되는 줄 알면서도 사랑을 하고
죽을 줄 알면서도 살아들 가는 중에 나도 끼여 있다
인생을 사느라 인생을 팔았고
시간을 아끼느라 시간을 낭비했던
열정은 수난의 맨발이었고
그리움은 눈먼 황홀이었다
여기를 보고 있어도 저기를 보는
뜬눈보다 보다 멀리 보는 눈먼 큰 눈을
딱부리 사팔뜨기 사발눈이라고들 하지만
눈 속에 출렁이는 바다는 아무도 보지 못한다
밤마다 외눈등대에는 불이 켜지고
태풍이 불고 파도가 끓어 넘쳐 뒤집히기도 한다
나의 왕국은 여기 아닌 끓는 바다건너 저기니까
나의 시대는 훗날 언제이니까
눈동자 너머의 저기로 가는 희망 봄
새 우주 새 행성의 신대륙으로 가는 길
물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뜨거운 내 눈물, 그 외길 밖에는,
-내 몸에 바다를 들이고/최광임-
부끄러워 몰래 갔다
이슥한 어둠 탓도 있었지만 바다는 묵묵했다
활어보다 싱싱했던 한때 지나, 까막까막
몇 채 안 되는 외등 켜고
폐경기 맞은 여인처럼 주름져 있었다
속상 여리디여린 곳 갈라 물을 들이고
굴삭기,덤프트럭에 만신창이 된 제 상처 핥으며
자꾸자꾸 어둠을 끌어다 덮는 바다다
부려놓은 인연, 몸 깊숙이 근 박아둔 채
풋것 주렁주렁 달고
목놓아 먹일 것도 없는 황량한 들판 되어
백주 대낮이 부끄러운 나다
가끔 진저리치듯 진눈깨비 몰아가고
바다와 나,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내 몸에 바다를 들이고
짠물에 종기 우려내면 그제서야 낮이 아프지 않을라나
아버지 닮은 누군가 지금도 술을 어둠처럼 마시며
이 거리 저 거리 상한 비늘로 날릴 것인데
바닷가 윗뜸, 이제 술기운 가신 채 누워 계실 아버지
맑은 무덤에도 진눈깨비는 내릴 것이었다
괜찮다, 괜찮을 거다
무덤가 아버지 축축이 젖은 손 뻗어
내 시린 눈 어루어주고 있었다
멀리서 희끄무레하게 흰 파도 밀리다 말다,
바다와 나
붉게
몸 들이고 있었다
-바다시인의 고백/천양희-
그곳에서 이곳까지 바다를 업고 왔다고 그가
말한다 파도처럼 철썩철썩 세상의 귀싸대기
때리며 말한다 끼룩끼룩 말한다 해풍 벗고
온몸으로 힘쓰는 시를 썼으면 좋겠다고 그가 말한다
뻐끔뻐끔 아가미를 벌리듯 물고기처럼 그가
말한다 방파제처럼 단단해진 어둠속에서
잘 때도 눈 뜨고 자는 물고기 눈을 낚아챌
것이라고 말한다 해안을 쓰면서 반대편을
써보려고 수평선을 쫘악 갈라놓을 것이라 그가 말한다
대개 절창이란 자신을 절단낸 뒤에야 오는
것이라고 물결 튀기며 그가 말한다 영감의 순간과
불면의 밤이 같은 세계의 겉과 속이라고 말한다 그를
미치게 하는 건 절벽의 확실성이 아니라 반복되는
파도에 대한 회의라고 그가 말한다
절벽을 바라보며 절망 때문에 울었다고 그가
말한다 울음이 한 사람의 언어라면 침묵도
한 사람의 언어라고 말한다 시퍼런 진실은
울음과 침묵 사이에 있을 것이라고 그가 말한다
그에게 시(詩)는 짐이 아니라 힘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소외와 고독은 자청한 그의 이력이라고
말한다 모든 작품은 자서전이자 반성문이라 그가
말한다 생각해보니 그의 고백이 바닷속에 든
칼날 같은 시다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