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7년 신라를 만나다.
아 정 이정화
천년의 세월에도 그림자가 없는 사랑
알에서 나온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935년 경순왕에 이르기까지 천년의 세월을 품은 신라의 수도 경주. 그 속에 켜켜이 쌓인 이야기들을 어디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역사와 문화의 도시 경주는 신라의 수도로 고려의 왕건에게 나라를 내어주기 전까지 시작과 끝을 함께 했다. 그 세월이 천년이다.
먼저 세상에 잘 알려진 불국사의 삼층석탑에 담긴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을 시작으로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낳은 남산의 꼭대기 금오산을 끝으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 가보자.
무영탑은 그림자가 없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무영탑을 떠올리면 먼저 소설가 현진건과 함께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이 생각난다.
그러나 실제 삼층석탑을 축조한 사람은 당나라 사람이라는 논문 발표를 들은 적이 있다. 당나라의 석공에게 함께 온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이 아사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왜 그렇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지던지!
한꺼번에 소중한 것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무영탑뿐만 아니라, 아사녀와 아사달이 몸을 던진 영지 못과 두 사람을 그리며 조각했다는 연화좌대 위 영지석불이 모두 한 줌 바람처럼 사라진 기분이었다.
그림자가 없는 탑이라 전해지지만 실제 그림자가 있어 유영탑이라고도 불리는 삼층 석탑은 불국사 경내에 고요히 서 있다. 불국사를 세운 김대성이 석가탑을 만들 때 당시 가장 뛰어난 석공이던 백제사람 아사달을 청해 석가탑을 만들게 했는데,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 아사녀가 있었다. 남편이 그리워 홀로 먼길을 찾아 온 아사녀는 석가탑이 완성 될 때까지는 여자를 절 안에 들일 수 없다는 문지기의 말을 듣고 절 주변을 맴돌며 아사달을 그리워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떠나지 않고 아사달을 보기를 원하는 아사녀를 지켜보던 스님이 가련한 마음에 영지란 못이 있으니 거기에 가 기다리라고 전했다.
그러나 석가탑이 완성되면 그 못에 탑의 그림자가 비칠 것이라던 스님의 말과는 달리, 아무리 기다려도 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자 아사녀는 영지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석가탑이 완성되고 사랑하는 아사녀가 와 있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갔지만 영지못에 몸을 던진 아내를 찾을 수는 없었다. 아사달은 그립던 아내를 잃었다는 슬픔에 통곡하다가 영지 옆에 불상을 조각해 놓고는 영지못에 몸을 던졌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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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하나의 애뜻한 사랑의 전설이 담긴 이야기가 있다. 경북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의 천연기념물
89호 등나무와 팽나무이다. 등나무는 오월이면 아름다운 보라 빛 꽃을 늘어뜨리며 시원한 그늘을 주는 나무다. 우리 생활과 친숙한 나무이다. 경남에서 자란 나는 등꽃을 자주 보며 자랐다. 등공예를 업으로 삼던 그 집안의 쉼터위에는 언제나 등꽃이 피고 졌다. 불꽃을 일으키며 등나무를 휘는 작업이며 하나씩 올을 걸듯 등나무를 엮어 소파며, 탁자, 장식장을 엮어 내던 모습을 지켜보는 건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등나무의 꽃말이 환영, 사랑에 취하다란 걸 알게 된 것도 연보라빛 등꽃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꽃말처럼 환영 같은 슬픈 사랑의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 등나무 마을 오류리이다.
이야기는 역시 신라시대이다. 이 마을에 예쁘게 생긴 자매가 살았는데 자매는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한 젊은이를 가슴에 담고 있었다.
둘은 이런 사실을 전혀 눈치 못한 채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젊은이가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다. 놀란 두 자매는 마지막으로 젊은이를 보기 위해 달려갔고, 거기에서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전쟁터에 나간 젊은이가 전사했다는 소문이 듣게 되고, 자매는 충격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서로 껴안은 채 연못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 뒤 연못에서 마치 자매의 넋이 서로 얽혀 자라는 듯 두 그루의 등나무가 자라났다고 한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에서 끝이 나지 않았다. 죽은 것으로 소문이 무성했던 젊은이가 살아 돌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자매의 사연을 들은 그는 괴로움에 시달리다 연못에 몸을 던지고야 말았고 얼마 후, 그 자리에서 팽나무가 자라났다.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이루려는 듯 등나무는 팽나무에 제 몸을 휘감고 있다. 이런 전설 때문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가끔씩 등나무 잎을 따간다고 한다. 등나무 잎을 베개 속에 넣거나 삶아서 물을 마시면 부부간의 금실이 좋아진다는 말이 전해지는 까닭이다.
반달을 닮은 반월성
천년이란 얼마만큼의 시간일까? 손가락을 들여다 보지만 손가락으로 셈할 수 있는 세월이 아니다, 그렇다고 숫자로 그 세월을 타진할 수 또한 없다.
그 세월 속의 신라는 어떤 모습으로 있었을지? 궁금해지면 월성으로 걸음을 옮겨보아야 한다. 월성(사적 제16호)이란 이름보다는 요즘은 그 모양이 반달을 닮아 반월성이라고도 많이 불리고 있는 이곳은
파사왕(!01년)때 쌓아 경순왕까지 52명의 왕이 머물던 왕궁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면서 임해전지와 첨성대 일대가 편입됐던, 명실공이 신라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황금의 나라로 불리던 천년 신라의 왕궁지였으니 그 규모와 아름다움은 얼마나 위대했겠는가!
그러나 아쉽게도 건물이며 유적이 넘쳐났을 이곳엔 지금은 호화로웠던 흔적을 찾을 길 없고, 석빙고와 첨성대로 만족해야만 한다. 927년 연회를 벌이던 신라 경애왕이 후백제의 견훤에게 죽임을 당한 포석정은 우리나라의 사적 제1호다. 신라 패망의 슬픈 역사가 서린 곳이지만, 쓸쓸히 서 있는 낙락장송과 주변을 휘도는 수로의 운치는 더할 나위 없이 빼어나다.
월성터는 널찍하고 들처럼 펼쳐진 낮은 지대가 아늑해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좋은 곳이다. 거기다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며 도보로 걷다보면 어느 새 우리 곁에 신라의 향기가 넘나드는 것을 느낄 수 있어 좋은 곳이다.
지금처럼 꽃이 피어나는 봄이면 월성에서 첨성대를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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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에 젖은 안압지 그 투영의 아름다움.
이곳 월성을 지나 동쪽 끝으로 가면 임해전지와 마주한다. 임해전이라는 전각을 세우고 그 주위에 못을 파 연못을 만든 곳이다. 일명 야경의 풍광으로 유명한 안압지이다.
신라 궁궐의 동쪽에 자리한 별궁 정원 혹은 ‘신라동궁과 월지’라고 불렀고 조선시대에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었다고 해서 ‘안압지’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또한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연회나 귀빈 접대 장소로 쓰인 별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안압지의(임해전지)의 풍경을 제대로 보려면 야경을 반드시 보아야 한다. 휘황찬란한 불빛과 아름다운 전각. 그 위에 향기를 더하는 봄꽃과 영롱한 물결 위에 퍼져가는 수양버들가지들, 간간이 피어나는 벚꽃이 흐드러져 준다면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까!
월성에서 계림을 지나면 경주향교와 닿는다. 경주향교는 전설의 경주 최부잣집(경주교동 최씨고택)으로 이어지고 있다.
술익는 냄새로 유명한 명한 교동법주와 고풍스러운 교동한옥마을이 곁을 지킨다.
이곳에서 우리는 만물일체유심조 라는 말로 유명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을 훔쳐 볼 수 있다.
요석궁의 사랑이야기로 유명한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는 <삼국유사>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원래 신라의 화랑이었던 원효스님은 사냥과 전쟁이 뜻이 맞지 않아 황룡사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원효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면 하늘을 받칠 기둥을 다듬겠다”고 말하고 다니는 소문이 태종무열왕의 귀에 들어갔다. 그 뜻을 눈치 채고 홀로 된 요석공주가 머물던 요석궁으로 원효를 유인한다. 남산을 내려와 문천교(유교)를 건너던 원효는 물에 빠졌고 옷을 말린다는 핑계로 요석궁에 들어선다. 그렇게 신라의 대학자 설총이 태어난다. 설총의 부모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그의 외할아버지는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 태종무열왕인 것. 이들의 운명적 만남을 성사시킨데 일조한 것이 바로 문천(남천)이다.> - 삼국유사 인용-
<삼국유사>에 따르면 요석궁은 지금의 경주향교 자리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곳 오셕궁의 자리는 신라 때는 국학, 고려 때는 향학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향교가 되어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 즉 설총의 집터이다.
역사 공부를 하면서 작은 것 하나를 깨달았다면 지금의 향교 자리는 망한 나라의 궁궐이나, 절, 국학의 자리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의 때가 그 위에 고려의 역사를, 조선의 역사를 세운 것이다.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이 익어갔던 요석궁은 지금 향교 자리에 있었음을 추측만 할 수 있다. 원효대사가 건너던 다리는 월정교와 지대를 같이 썼던 유교이고, 원효가 물에 빠진 곳이 지금의 문천인 것이다.
왕족들이 머물던 공간 월성과 신라의 불국토 남산 사이를 가르던 물길이 바로 이 문천이다. 그 둘을 잇는 지붕 있던 최고급 다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월정교다.
2012년, 천년도 넘게 잠들었던 월정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완공단계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잠든 시간이 길었던 지붕 있는 월정교의 탄생은 우리에게 많은 설렘을 줄 것이다. 오래 전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처럼 이곳에서도 또 다른 이야기들이 피어나지 않을까!
하얀 나방이 날개짓 하는 시간........월정교의 다리 위로 흰 나방이 날개짓할 때, 천 오백년을 지난 사랑도 아름다운 그리움으로 피어나리라!
월정교 위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선도산이 보인다. 김유신의 여동생 보희가 소피를 보는 꿈을 꾸어 서
라벌을 물들였다는 바로 그 산이다.
남산의 또 다른 명물은 삼릉 주변의 소나무숲이다. 바람에 지쳐 바람을 닮은 것일까! 굽이굽이 흐르는 물을 사모해 물결을 이룬 것일까! 이리 휘고 저리 굽어 장관을 연출하는 이 소나무 숲은사진 작가들의 발목을 잡기에 충분한 곳이다. 비가 그친 다음 안개가 자욱한 삼릉 소나무 숲은 경주 숲 최고의 풍광 중 하나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 만큼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어딘가에서 그리스 신화속 요정이 달려나와 휘파람을 불며 날아오를 것 같은 환영이 스치고 지나간다.
석굴암을 품고 있는 남산 위를 산책하는 건 어떨까! 남산의 맨 윗부분인 금오산은 금오신화로 유명한 계유정난의 생육신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지은 곳이다. 그 정기가 맑고 기이해 연화의 땅으로도 무색하지 않은 곳. 남산은 천년의 향기를 곳곳에 고스란이 담고 있다고 한다. 어디 한 군데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움이 곳곳에서 유혹하는 곳이다.
삼십여분을 달려 나가면 감포의 바다와 출렁이는 물결이 있다. 그 위에 흐르는 역사를 안고 감포에 젖은 붉은 달빛을 바라보며 우리는 경주의 이야기를, 천년의 신라 속으로 파고들 것이다.
때맞춰 하늬 바람과 경주 왕벚꽃이 꽃봉오리라도 머금어 주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반월성 너머로 하얀 벚꽃 터널을 만들어준다면 오릉으로 향하는 걸음이 참 가벼울 것만 같다.
첫댓글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이 마음을 짠하게 하는군요.
위대한 건축물은 그냥 쉽게 만들어지는게 아니라
어떠한 희생을 치뤄야 걸작이 탄생하는것 같습니다.
장문의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걸작들과 어울리는 봄나들이가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몇 자 걸적거려 보았습니다!!
원효대사가 그렇게 잘생겼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사실인가요? ㅎㅎ
ㅋㅋ 소문이 1500년을 이어 우리 종선샘 귀에까지 들어간 걸 봄 잘생기시긴 했나벼! ㅎㅎㅎ
꼭 가고싶군요~~
알바 꼭 구해서 왔음 좋겠어요!
월졍교 다리 위로 흐르는 달빛 밟아보게!!
선남선녀의 사랑이야기 천년을 되새김질 해내셨군요. 삶이란 온통 사랑입니다.
제가 원래 사랑 이야기엔 훅 하는 편이라서리...!!
1500년이 지나도 지지 않을 사랑이라......!! 그런데 슬픈 사랑이네요. 이번 이야기 속의 사랑은!!
경주를 못가게 되서 정말 안타깝습니다. ㅠ ㅠ
글게....정택씨가 왔더라면 더 좋았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