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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4.
언제부터 인가 가보고 싶었던 김제지평선축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김제만경평야...
기차여행으로 일정을 잡아 본다.(축제 홈페이지에서 정보수집)
광주송정역에서 08:14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김제역에 내려 1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김제 지평선축제장으로...
올때는 15:30경 반대로 축제장에서 셔틀버스로 김제역으로 와 16:06 김제발(10분 연착) 광주송정역으로.. (5,200원 인디 경로 우대 3,800원)
우리나라 참 좋은 나라..지하절 우대에 열차도 30%나 할인해 주고...(새마을호 이상은 주말,공휴일 할인 없음..주중에만..)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 사진이 크게 나옵니다.
처음 와 본 김제역
금의 언덕-황금의 벌판 뜻이 담긴 김제
축제장 입구
김제 지평선축제장은 벽골제 일원이다.
벽골제 단야루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지정종목 | 사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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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사적 제111호 |
지정일 | 1963년 01월 21일 |
시대 | 백제 |
종류/분류 | 저수지둑 |
소재지 |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 119 지도 |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김제 벽골제는 한국 최고(最古)·최대의 저수지 둑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330년(백제 비류왕 27)에 쌓았고, 790년(원성왕 6)에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후 고려·조선 시대에 수리하였다.
제방은 포교리(浦橋里)를 기점으로 월승리(月昇里)까지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어 약 3km의 거리에 남아 있는데, 수문지임을 알려주는 거대한 석주(石柱)가 3군데에 1쌍씩 있다. 그리고 1925년 간선수로로 이용하기 위한 공사에서 원형이 크게 손상되었으며, 제방은 절단되어 양분(兩分)된 중앙을 수로로 만들어 농업용수를 흐르게 하였다.
1975년 발굴·조사에 따르면, 제방 높이는 북단(北端)이 4.3m, 남단(南端)이 3.3m이고, 수문 구조는 높이 5.5m의 2개 석주를 4.2m 간격으로 세웠으며, 서로 마주보는 안쪽 면에 너비 20cm, 깊이 12cm 요구(凹溝)를 만들고 목제(木製) 둑판을 삽입하여 수량을 조절하였다. 석축(石築)은 약 6m이며 가장 낮은 곳이 1.1m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제 벽골제 [金堤 碧骨堤] (두산백과)
단야루...김제 태수의 딸 단야를 기리는 누각
단야를 들어봤나요?
단야라는 처녀가 심술을 부리는 청룡에게 스스로 몸을 바쳐 벽골제 보수공사가 성공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벽골제가 오래되어 보수공사를 해야 했어요. 왕이 원덕랑을 김제에 보내게 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토목기술자인 원덕랑은 김제 태수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는데, 태수의 딸이었던 단야도 일을 도우면서 원덕랑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덕랑에게는 이미 '월내'라는 약혼자가 있었습니다.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는가 싶더니 마무리 무렵 그만 둑이 터져 버리는 것이었어요.
벽골제 주변에는 청룡과 백룡이 살고 있었는데요, 백룡은 천재, 폭우, 변란 등을 막아주었지만, 청룡은 백성들을 괴롭히고 사람을 죽이는 등 온갖 피해를 입혔습니다. 백룡의 만류에도 청룡이 벽골제 보수의 완성 단계에서, 공사를 못하게 천둥, 번개를 동원한 폭풍우를 내리고 제방을 헐려고 온갖 심술을 다 부렸어요.
산 처녀를 청룡에게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져만 갔습니다. 이런 와중에 원덕랑을 보기 위해 월내낭자가 왔고, 김제 태수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월내낭자를 보쌈해 청룡에게 제물로 바치면 공사를 성공할 수 있고, 딸도 원덕랑에게 시집보낼 수 있어서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에요. 김제 태수는 사람들을 시켜 밤중에 월내낭자를 보쌈해 청룡이 사는 못으로 데려갔습니다. 낭자를 못에 던지려고 할 즈음, 사람들은 그녀가 단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김제 태수의 음모를 눈치 챈 단야가 대신 보쌈이 되어 왔던 것입니다. 단야는 순식간에 못에 몸을 던졌고, 그 후 보수공사는 순조롭게 끝날 수 있었습니다.
단야의 숨결을 간직한 벽골제의 물은 풍부히 흘러 만경 들판 수많은 농민들에게 젖줄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단야의 희생과 사랑을 더욱 칭송하게 되었고, 단야의 벽골제는 더욱더 빛이 나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무한히 베풀지만, 또한 가혹하기도 합니다. 전설에서의 백룡과 청룡이 이러한 자연의 두 얼굴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단야 이야기]는 전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김제 지역에 전승되는 쌍용놀이의 기원설화이기도 하고, 죽은 단야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세웠다는 단야각과 단야루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쌍룡놀이에서는 단야의 아름다운 마음씨에 청룡이 감복하여 단야를 살려주고 다시는 피해를 주지않는것으로 놀이를 이끌어 갑니다. 아래 동영상 참조...
기다란 볏짚 줄이 양쪽으로 늘어져 있는데 무슨 놀이인지? 공연을 대기하는 중
메인무대...아무 공연도 없다.
이곳에는 김제 농경문화 박물관이 있어 들어 가 본다.
예전에 사용하던 것도 있고 보지 못한 것도 있다.
조선시대 임금이 그해 농사의 풍흉을 가늠하고,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궁궐 안에 경작지를 만들어 직접 농사를 주관했던 권농행사
외출을 하였다가 귀가한 뒤에 특별한 이유 없이 갑자기 심한 두통·복통·오한(惡寒) 등을 앓게 되면 ‘잔밥각시’에게 잔밥을 먹여서 질환의 원인을 찾고, 그에 따라서 적절한 조치를 하는 일종의 치유(治癒) 의례.
잔밥먹이기는 부정(不淨)한 장소나 다른 집안의 혼인 잔치, 장례(葬禮) 등에 다녀온 뒤에 까닭 없이 아플 경우에 행한다. ‘잔밥각시’가 일러주는 질환의 원인은 대개 네 가지이다. 곧 성주, 터주 등 가신(家神)이 빌미가 된 경우, 객귀가 침입한 경우, 집 안에 각종 물건을 잘못 들여 놓아서 발생한 동토(動土)의 경우, 몸 자체가 허약해져서 생긴 병환의 경우이다. 이 가운데 가신과 객귀로 인한 질환에만 잔밥먹이기를 한다. 이때 가신에게는 잘못을 빌고 위로를 하며, 객귀는 된장국밥을 주어 내쫓는다.
1. 잔밥먹이기의 성격
잔밥먹이기는 글자 뜻 그대로 ‘잔밥을 먹이는 의례’이다. 잔밥의 정확한 뜻은 다소 불분명하지만 잔반(殘飯), 곧 먹고 남은 밥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잔밥은 ‘먹고 남은’ 밥이 아니라 쌀·콩 등 곡물을 가리킨다.
여기서 잔밥을 누구에게 먹이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잔밥을 먹이면서 외는 주문(呪文)에서 보면 잔밥은 ‘잔밥각시’에게 바치는 제물로 이해된다. 잔밥각시는 호남지방에서는 ‘뒷박각시’로 불린다. 이는 곡물을 됫박에 담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잔밥각시는 강남(江南)에서 온 어린 새색시로 인식된다. 그녀의 남편이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녀에게 병을 치유해 달라고 애원도 하며, 잡귀 침탈의 유무 또는 그 밖의 질병의 원인을 알려 달라고 요청한다. 병자의 질환을 모두 걷어 달라고 간절히 빌기도 한다.
잔밥각시는 미지(未知)의 병인(病因)을 됫박의 쌀을 증표로 삼아 일러줄 수 있다. 됫박 안 어느 곳의 쌀을 잔밥각시가 먹었는지, 곧 어느 위치의 쌀이 파여져 있는지를 유심히 살핀다. 쌀을 담은 됫박을 주문을 외면서 환부(患部)에 문지르면 됫박 안의 쌀이 이리저리 흔들려서 어느 부분은 다소 움푹 파이게 마련이다. 이를 두고서 잔밥을 먹였다고 관념하는 것이다.
이런 절차를 통하여 성주, 조상, 터주 등 가신(家神)이 빌미가 된 것인지 동토가 난 것인지 객귀가 붙은 것인지 몸에 이상(異常)이 있는 것인지 등을 판별할 수 있다. 이는 잔밥각시가 어리석고 답답한 인간을 위하여 됫박 안 특정 부분의 쌀을 먹음으로써 그녀의 신의(神意)를 나타낸 것이다. 일종의 신탁(神託)인 셈이다.
실제로 잔밥을 누가 먹는 것인지는 다소 불분명한 측면이 있다. 잔밥각시가 먹는 것인지 가신이나 객귀 등이 먹는 것인지 아니면 잔밥각시가 가신이나 객귀로 하여금 어떤 부분의 쌀을 먹으라고 인도하거나 지시를 하는 것인지 모호하다. 그러나 대개의 주문(呪文) 내용에 따르하면 잔밥각시가 잔밥을 먹는 것으로 이해된다.
잔밥각시는 환자의 질환을 거둘 수 있는 존재로 믿어진다. “잔밥각시가 환자를 당장에 살려 내라.”든가 “잔밥각시가 아픈 것 다 걷어 가지고 가라.”는 등의 주언(呪言)은 그러한 믿음에 기초한다. 이러한 요청이나 명령은 잔밥각시에게 공양(供養)된 잔밥, 곧 쌀에 대한 반대급부(反對給付)로 이해된다. 잔밥각시는 자신에게 제공된 쌀을 먹으면 그 대가로서 병인의 증표(證票)를 보여 주어야 하고, 더욱이 병을 거두어 마침내 완쾌하도록 해야 한다.
잔밥각시에게 “잔밥을 덜컥 먹으라!”는 재촉이나 “많이 먹고 배불리 먹고···세닐곱 스물하나를 먹여 줄 테니···” 등의 회유(懷柔)는 잔밥각시가 잔밥을 먹어야 하는 당위성을 보여 준다.
잔밥각시에게는 칭송과 아부의 기도문(祈禱文)도 바쳐진다. 기도문에서는 인간은 한없이 무능하고 미련한 존재로, 잔밥각시는 대단히 영험한 신령으로 각각 묘사된다. 이에 따라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 급박한 병세에 갑갑하고 당황스러워서 잔밥각시에게 병인(病因)을 가르쳐 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잔밥을 먹고 환자를 살리는 데 도움을 주지 않으면 대칼로 목을 쳐서 무쇠 둠벙에 가두거나 한강에 내버린다는 등 협박성의 주문(呪文)을 퍼붓기도 한다. 잔밥먹이기에 애원, 청탁, 회유, 협박, 강제의 태도와 감정이 함께 섞여 있다.
2. 잔밥먹이기 절차
잔밥먹이기는 객귀물리기와 마찬가지로 집안의 부녀자가 주로 한다. 그러나 때로는 신(神)할머니, 선거리, 영신 등에게도 의뢰한다.
잔밥먹이기를 하려면 먼저 쌀 한 되를 됫박이나 그릇에 소복이 담고, 그것을 환자의 옷이나 보자기로 단단히 싸매 쌀이 빠져 나가지 않도록 한 다음에 그것으로 환자의 아픈 곳을 문지르면서 주문을 왼다. 동일한 주문을 세 번이나 일곱 번, 아니면 스물한 번을 반복한다. 또는 환자의 나이 수(數)만큼 외기도 한다. 주문을 외는 횟수만큼 환부(患部)를 문지르기도 한다.
주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곧 아무것도 모르는 한심한 인간이 갑자기 찾아온 질병으로 그 원인도 모른 채 고생을 하고 답답하여 잔밥을 먹이려고 한다고 전제를 하고 나서 아무쪼록 강남에서 나온 영검하신 잔밥각시가 병인(病因)이 가신(家神)에 의한 것인지 객귀에 의한 것인지 동토에 의한 것인지 몸에 이상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를 됫박의 쌀로 표징 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리고 됫박의 쌀을 많이 먹고 환자의 병을 거두어서 속히 떠나가라고 명령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칼로 육신을 해체하고 무쇠 둠벙 등에 가두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렇게 주문을 외는 동안 가신이나 객귀가 빌미가 되고 이로 인하여 동토가 난 경우라면 그들이 “사각사각” 또는 “찰각찰각” 하고 쌀을 먹는 소리를 낸다고 한다. 주문은 세 번, 일곱 번, 스물한 번을 외거나 환자의 나이 숫자만큼 왼다. 주문이 모두 끝나면 됫박을 싼 옷가지를 벗겨서 쌀이 어느 곳에 어떤 모습으로 파여져 있는지 유심히 살핀다.
각 지역이나 마을의 전통에 따라 쌀의 파여진 위치와 모습으로 병인을 파악하는 기준은 조금씩 다르다. 이에 대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객귀가 들면 되의 옆쪽 부분이, 성주가 빌미가 되면 되의 위쪽이, 그리고 터주가 서운했으면 되의 아래쪽이 움푹 파인다.”
“됫박 한가운데가 파이면 조상이 왔다고 여긴다.”
“바가지 큰 귀 부분의 쌀이 파였다면 성주가 먹은 것으로 간주하고, 옆 귀가 파였으면 잡귀가 먹은 것으로 여긴다.”
“바가지 꼭지 부분의 쌀이 파였으면 조상이고, 바가지 주변이 그런 경우라면 객귀로 인정한다.”
“바가지의 꼭지 부분이 움푹 들어가 있으면 조상이 먹은 것이고, 중간 부분이면 객귀, 그 반대편 끝이면 터주로 간주한다.”
“바가지 윗부분의 쌀이 줄었으면 동토가 난 것이고, 옆 부분이면 바로 ‘뜬 것’이 붙은 것이다. 손잡이 부분이 줄었다면 조상이 탈 난 것이다.”
“바가지 꼭지 부분이 파여 있으면 조상신이 붙었다고 하고, 배꼽 부분이 그러면 객귀가 붙었다고 헤아린다.”
이처럼 병인(病因) 판정의 기준에 많은 차이가 있어서 보편적 원칙을 추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보아 됫박의 옆이나 가장자리 등은 객귀의 침탈로 판정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신의 빌미와 객귀의 침탈인 두 경우에만 다음과 같은 조치가 이루어진다.
1) 가신(家神)의 경우
이들 가신에게 무엇이 서운했는가를 조심스럽게 여쭈어 보며, 간단한 제물을 마련하여 비손을 한다. 이러한 태도에서 가신과 식구간의 종교적 관계를 잘 볼 수 있다. 무엇이 서운했는가 하는 질문은 미련한 인간은 어떤 언행으로 가신을 섭섭하게 했는지 잘 모른다는 고백이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 인간이 잘못했으니 아무쪼록 노기(怒氣)를 풀라고 애원을 한다.
가신은 객귀처럼 내칠 대상이 결코 아니다. 정성 들여 메를 짓고 나물을 마련하여 청수와 함께 간단한 상(床)이라도 성주나 조상 또는 터주에 올려서 잘못을 빌고 그들을 진정시키고 위로할 뿐이다.
성주는 항상 조상·삼신과 함께 있거나 다닌다고 하여, 성주 상(床)에는 제물을 세 몫씩 놓기도 한다. 나무를 함부로 베거나 집 안에 헌 물건 또는 헝겊·옷 등을 잘못 들인 경우에도 성주는 서운할 수 있다. 터주에 탈이 나면 뒤꼍 장광의 터줏가리 앞에 청수와 쌀 등을 차려 놓고 비손한다.
2) 객귀(客鬼)의 경우
객귀의 침입으로 판단되면 본격적으로 객귀를 물릴 채비를 서두른다. 잔밥먹이기의 후반부 절차로 행해지는 객귀물림은 대체로 풀어먹이기, 짚신이바지, 짚끄랭이가 보편적 방법이다.
그러나 이들 방법에는 모두 객귀물리기의 기본 절차가 반영되어 있다. 객귀로 밝혀지면, 먼저 됫박의 움푹 파여 들어간 부분의 쌀로 그를 풀어먹이기 위한 하찮은 음식이 준비된다. 됫박 쌀 자체를 쓰든가 그것으로 밥이나 죽을 마련한다. 먹다 남은 찬밥이나 반찬 등을 쓰기도 한다. 이들 잔반(殘飯)을 흔히 된장국에 말기도 한다. 여기에 환자의 머리카락과 침도 넣는다.
이것을 객귀에게 풀어먹이면서 주언(呪言)과 칼로 달래고 협박하여 객귀를 집 바깥으로 내친다. 부엌칼을 대문 바깥쪽으로 던져보아 객귀가 정말 쫓겨 나갔는지를 확인한 뒤에 대문 앞에 부엌칼로 엑스 자를 긋고 그 교차점에 부엌칼을 꽂아 놓는다.
세 방법 가운데 풀어먹이기는 객귀물리기와 거의 동일하다. 다만 객귀를 풀어먹이는 주된 방식이 짚신에 음식을 담아 태우거나 내버리는 것인가 짚끄랭이에 담아 그렇게 하는 것인가에 따라 짚신이바지와 짚끄랭이 방식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곧 짚신이바지는 짚신에 담은 잡음식(雜飮食)을 객귀의 제물로 삼아 객귀를 풀어먹인 뒤에 내치는 치병 의례이다.
잔밥을 환부(患部)에 문지르다가 쌀 됫박에서 “찰각 찰각” 하며 객귀의 먹는 소리가 들리면 곧바로 짚신이바지를 행한다. 먼저 환자가 귀가한 길을 역순(逆順)으로 가서 마을 어귀에 이르면 왕겨를 담은 짚신, 아직 불씨가 남아 있는 재, 뒷박의 쌀, 된장국, 고추 등을 진설하듯 죽 펼쳐 놓는다. 재의 불씨로 짚신을 소각하면서 객귀에게 속거천리(速去千里)하라는 위협적인 주문(呪文)을 퍼붓는다. 부엌칼을 몇 번이고 던져서 객귀 구축을 확인하면 마을 어귀에 부엌칼을 꽂아 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귀가한다.
짚끄랭이(짚수세미)의 기본 의미도 거의 비슷하다. 짚끄랭이 안에 ‘됫박 안 파인 부분의 쌀’을 비롯하여 고춧가루, 소금, 된장, 동전 등을 넣고 이것을 환자의 머리 둘레 좌우로 각각 여러 차례 돌린다. 환자의 병을 모두 거둔다는 의미이다. 다음에는 짚끄랭이를 대문이나 동구(洞口) 부근의 나무에 매달아 놓거나 불에 태운다. 짚끄랭이가 매달려 있는 나무를 지날 때 사람들은 객귀가 자신에게 붙지 않도록 침을 세 번 뱉어 준다.
이 밖에 쌀 까부르는 키[箕] 위에 제물을 담아 놓거나 삼거리 또는 사거리에 제물을 가지고 나가 음식을 묻는 다소 변형된 방식들도 나타난다. 특히 하위의 잡신이나 수부 등에게 음식을 차려 줄 때 키를 사용할 때가 많다. 키는 곡식은 남기고 쭉정이, 검부러기 등은 날려 보내는 기구이기 때문에 잡귀 등도 음식을 먹은 뒤에는 마치 그렇게 흩어져 버리라는 뜻이다.
예컨대 충청북도 보은지역에서는 객귀물림 때 먼저 키에 세 무더기의 밥, 소금 한 줌, 물 한 그릇을 놓고 이를 환자의 앞에 갖다 놓는다. 그리고 축귀의 주문을 왼 다음에 다시 된장국을 마련하여 객귀를 물린다. 이렇게 하여 잔밥먹이기가 모두 끝나면 ‘잔밥을 먹여준 사람’이 남의 집 사람인 경우 결코 환자의 집으로 다시 되돌아가지 않는다. 심지어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수고했느니 어떠했느니 하는 등의 인사말도 주고받지 않고, 잔밥을 먹인 쌀을 가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야 한다. 형편에 따라서는 추후에 잔밥을 먹여 준 사람에게 약간의 돈이나 선물을 사례(謝禮)로 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잔밥먹이기 (한국민속신앙사전: 가정신앙 편, 2011. 12. 15., 국립민속박물관)
박물관 실외 물레방아...더운 날씨에 참 시원해 보인다.
송점순할머니...축제관련자가 집에 찾아와 사진을 달라고 해 주었더니 여기에 이렇게 전시해 놓았다고...
박물관을 나와 벽골제 쪽으로...
벽골제비
쭉 늘어선 외국 음식점들...
제방으로 올라가니 연을 날리고 있다.
뚝길에 갈대와 억새가 어우러져 있다.
옛날의 수문...
제방 안쪽에서 줄다리기대회가 한창이다.
억새와 연
벽골제 수로
벽골제는 두개의 뚝 사이일로 물이 흐르는 수로역활만 하고 지금의 물놀이터는 인공으로 만든듯....
유람선도 있다. 저수지를 한바퀴 돌아 오는데 운임...1,000원...11시 40분에 가니 오전 운항이 끝났다며 13시에 오란다...결국 타보지 못했다.
호수에 설치된 조형물
여기도 수상카페 뒤로 다리로 연결된 섬에 설치된 조형물
호수 뚝길이자 코스모스 길...
ㅋ코스모스 밭...김제에 와서 아직 지평선은 보지 못했는데 여기는 꽃평선...꽃과 하늘이 맞다아 있다.
꽃평선이라 이름 붙여 본다.
코스모스 꽃밭에 해바라기 몇송이가...
날씨가 무지무지 덥다. 햇볕도 따갑고...
꽃은 민들레인데....줄기가...
허수아비쉼터에 허수아비는 없다.
전망대
전망대 3층에서 내려다 본 논에 새겨진 글씨
벼를 참 섬세하게 심어 완전 그림같다.
매뚜기잡기 체험장
4층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풍경들
4층에서 보니 더 넓게 잘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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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를 내려와 지나는 광장의 물길...꼭 용이 꿈틀거리는듯 길게 뻗어있다.
이곳에서 소머리국밥으로 점심을 먹는다. 도토리묵은 5,000원 저렴한데 맛이 별로...
여기가 정문일까?처음 들어 온 문은 축제장 문이고?
여기서 형을 집행했을까?갖가지 형틀이 있다.
도의문
명인학당..훈장님이 어린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곳
훈장님
지평선축제 그씨가 새겨진 논이다.가까이서 보니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다.
메뚜기잡기 체험장..나도 한바퀴 돌아 본다.
아직 날개도 없는 새끼 메뚜기
위의 용처럼 흐르는 수로의 원천
ㅇ우리 애들 어렸을때 즐겨 보던 스머프
백설공주와 7곱난장이
벽골제 쌍룡
옛날 물을 터 올리던 용두레힘들지만 물이 퍼 올려진다.
물자세--옛날에 참 많이 해 본 일인데..
유형 | 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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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민속놀이 |
전승지 |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과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 전승되는 민속놀이.
김제의 쌍룡놀이는 ‘벽골제(碧骨堤) 쌍룡놀이’라고 하는데, 벽골제는 명금산(鳴琴山)과 포교(浦橋)마을을 막아 노령(蘆嶺)에서 흐르는 자연수를 모은 큰 저수지이다. 이 쌍룡놀이는 현지의 전설과 놀이를 토대로 재현되어 1975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하였다.
신라 원성왕은 궤몰상태에 있는 벽골제를 쌓도록 원덕랑(元德郞)을 파견하였다. 원덕랑은 당시 김제태수의 딸 단야(丹若)를 알게 되었고 서로는 어느 사이에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원덕랑에게는 고향에 월내(月乃)라는 약혼녀가 있어 단야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큰 축제(築堤)를 할 때에는 처녀를 용추(龍湫: 용소)에 넣어 희생으로 바쳐야 탈이 없는데 원덕랑의 고집으로 처녀를 용추에 바치지 않았더니 사고가 자주 일어났고 둑이 터졌다. 이때 김제태수는 월내가 원덕랑을 찾아 김제로 온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 딸의 행복을 위하여 월내를 제물로 삼을 묘책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계책을 눈치챈 단야는 오히려 자기가 죽으면 백성들의 원망도 사라지고 제방공사도 순조로울 것이고 원덕랑도 행복하게 될 것이라 믿고 몰래 월내 대신 용추에 빠져 죽었다. 이 연못에는 백룡이 살고 있었고 근처 연포천(連浦川)에는 청룡이 살고 있어 이 두 용을 쌍룡이라 하였다. 백룡은 인명을 수호하고 온순했으나 청룡은 풍우를 일으키고 비바람을 몰고와 인명 피해가 심하였다. 여기에서 백룡과 청룡이 서로 싸우는 쌍룡놀이가 발생하게 되었다.
쌍룡놀이의 제1장은 축제공사의 현장으로 동진강(東津江) 하류 왜뱀이들의 중앙을 인위적으로 막아 벽골제를 쌓았으나 청룡의 심술로 파괴되어 간다. 이때 나라에서 기술자 원덕랑을 보내 7개 주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보수의 역사(役事)를 시작한다. 김제태수 유품(由品)은 원덕랑을 도와 인부를 독려한다.
둑을 쌓기 위해 인부들은 토석을 운반하면서 <말밖기노래>를 부른다. “(메김) 어야라 동동 상사도야/(받음)들어라 동동 상사도야(얼럴럴) 상사도야/(받음) 얼럴럴 상사도야/열두자 막을 박을라면 우리네 인부들 욕들 보겠네/떴다 떴다 감독이 떴다 번득 들었다 번득 놓세/힘만 세도 소용없고 소리만 잘하면 제일이다…….”
제2장은 쌍룡의 출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일고 비바람이 치니 인부들은 겁에 질려 창백해지고 불안 때문에 동요가 일기 시작한다. 청룡이 나타나고 주위는 수라장이 된다.
사람들은 “예로부터 큰 공사에는 처녀를 청룡에게 바치는 법인데 원덕랑의 고집으로 바치지 않아 이런 변을 당한다.”면서 원성을 한다. 이때 백룡이 나타나 청룡을 달랬으나 막무가내였고 드디어 싸움이 벌어졌으나 청룡을 당해내지 못하고 쫓겨 사라진다.
제3장은 단야의 희생으로, 청룡은 본성을 드러내어 광란을 부리며 둑을 무너뜨린다. 이때 이속들이 가마에 여인을 태우고 청룡 앞에 놓고 포대를 벗기니 단야의 모습이 드러나 모두 놀란다. 단야는 비통한 자세로 자기 부모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청룡에게 다가서서 “나를 제물로 할 것이니 앞으로 둑을 해치지 말고 잘 보호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한다. 그 같은 의연한 모습을 지켜본 청룡은 그 의로움에 깊이 감동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사라진다.
제4장은 단야의 소원무(所願舞) 장면으로, 태수는 달려와 기절한 딸을 끌어안는다. 다행히 기절한 단야가 깨어나고 태수는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사람들은 경사를 맞아 농악을 치고 <농부가>를 부르며 춤을 춘다. 이 놀이는 전설적인 요소가 강한 도작농경시대 초기에 발생한 향토신사(鄕土神祠)로 추측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쌍룡놀이 [雙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쌍룡놀이를 보고 시간이 남아 벽골제로 다시 가 본다.역시 억새가 예쁘다.
파아란 하늘에 하아얀 구름이 있어야 아름다운데 미세먼지때문인지 파란 하늘도 하얀 구름도 없어 아쉬운데로 구름을 담아 본다.
셔틀버스에서 찍은 축제장 가는 길의 코스모스
단야루앞에서 농악이 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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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고 싶었던 김제 만경평야 벽골제 ...
청정님 덕분으로 잘 보고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즐감 하고 감니다~~
코스모스가 지평선을 대신하네요.
멋져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