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란 무엇인가? -苦의 시작
밑의 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대한 글에서 필자는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책이라고 서술 하였다. 하이데거에게 시간은 즉 불변의 시간은 언어속의 문법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현재 과거 미래 수동태 능동태 현제완료 과거완료 미래완료의 시간을 통해 주어(주체)는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존재이며 미래를 선점하는 존재가 된다. 즉 미래형과 미래완료를 통해서다. 이 불변의 시간을 인간의 물리적 시간과 연결 영원한 존재(신)를 증명하려고 했다. 죽음에 이르는 존재 필멸의 존재자는 언어라는 불변의 시간성을 통해 존재자의 존재와 만나고 하나되는 세계다. 이는 마치 아트만이 브라흐만을 만나고 화두를 잡은 조사가 활연대오하여 無를 만나는 과정과 유사하다. 조사선 화두를 통해 모두 언어도단(言語道斷 언어의 길이 다 끊어짐)의 이름하에 방하착(放下着 다 놓아버림)한 후 불변(불멸)의 실체 無를 만나는 과정과 유사하다. 훗썰 현상학에서 에포케(판단중지=언어도단)를 통해 본질 직관을 하는 경지에 이르면 결국 無를 만난다. 무는 모든 것을 생산하고 탄생 시키지만 그 자신은 그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여호아 신)이다. 영어로 unmoved mover다. 방하착 하고 언어도단은 곧 에포케(판단중지)이다. 하이데거 해석학과 현상학은 여기 지금 나타나는(현상<現象>하고 현현하는) 사상(事象)을 파악하는 것이다. 모든 현상은 언어로 나타난다. 언어는 존재의 드러나고 나타남이다. 즉 존재의 집이다. 존재는 sein(be동사)동사다. " I am. Ich bin. 我在(워 짜이) 나는 존재한다"가 언어의 뿌리이며 근본이며 존재다. 존재자는 sein(be동사)동사를 쓰는 존재이다. sein(be동사)동사를 쓰기에 존재다.
물리적 시간에서 모든 것은 사멸한다. 이 사멸하는 물리적 시간에 무한을 보장하는 것이 sein(be동사)동사다. 신의 존재는 sein(be동사)동사를 쓰기에 보장된다. 말년의 하이데거는 많이 부끄러웠을 거 같다. 보는 내가 부끄럽다. 필자가 조사선의 허구를 부수었을 때 10년을 허비한 조사선 수행자(돈오대각을 한 자하선인)는 많이 부끄러웠다. 이거 뭐 1초에 9천만리를 달려 우주의 끝에 도달한 손오공이 거대한 기둥에 제천대성(하늘을 다스리는 위대한 성인)이라고 표시를 남겼는데 나중에 아미타불의 손가락인 것을 보고 절망하고 돌산에 갖힌 한낱 원숭이가 된 것처럼 역대 조사들은 원숭이 한마리다. 無를 깨달은 조사는 자신을 신선이라고 불렀다. 해서 조사가 죽으면 우화등선(羽化登仙 날개를 달고 신선이 되어 날아오르다)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조계종단 고승인 대종사들이 죽으면 우화등선했다고 발표한다. 참으로 부끄럽다. 도교를 믿는 도사들이 머리깍고 먹물옷 입고는 석가모니 아미타불은 왜 찾나? 차라리 노자 장자를 찬양하고 노래하면 위선자라는 소리는 피할 수 있다. 부처님 보기 부끄럽지도 않나?
하이데거의 패착은 물리적 시간과 언어의 시간을 결합한 것이다. 해서 이 책이 한국인들에게 수수께끼 같은 난제가 된 것이다. 그 어떤 번역도 하이데거의 의도를 나타낼 수 없다. 존재와 시간 원서를 보면 ">ist<" ">sind<" 라는 단어가 책 전체에 수십 번이 나온다. "><" 표시는 강조 표시다. 그리고 ">ist<" ">sind<" 는 단수 복수 표시다. 즉 be동사로 말하면 >is< , >are< 이란 표시다. 모두 이다 있다라는 말이다. 즉 그(그녀 그것)이 존재한다가 ist (영어로 is)이고 우리들(그들 그것들)은 sind(are)이다. 이 책은 독일어를 잘 아는 사람이 볼 때 쉬워진다. sein 동사가 명사화 된 것이 존재(Sein)란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정정한다. 독일어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철학에 대한 통찰이 뛰어난 사람이 독일어로 봤을 때다. 전서울대 교수 소광희나 그 제자 배학수(하이데거로 박사받은)는 필자보다 독일어 실력이 훨씬 엄청 뛰어나다. 그런데도 하이데거의 뼈를 때리지 못하고 하이데거 아류가 되어 해설의 길을 따라갔다. 하이데거 아류로 남았다.
2000년에 하이데거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총정리 하고자 국내에서 구하기 불가능한 하이데거 원서를 배학수에게 부탁했다. Sein und Zeit(존재와시간)와 Holzwege(오솔길 숲길)를 선뜻 복사하라고 내주었다. 하이데거 책들 단편집들은 죄다 국내에 "숲길"로 번역된 Holzwege(오솔길이란 표현을 필자가 좋아하고 이 번역이 하이데거 철학에 맞다고 생각한다)에서 발췌한 글들이다. 이 두 책이 하이데거 철학의 알파와 오메가다. 하이데거에 질린 배학수는 필자가 하이데거에 대해 한 수 배우겠다 토론을 하자고 하니 단호히 거절했다. 복사 끝난 원서는 학과 사무실에 반납하라고 한다. 자기 찾아오지 마라고 한다. 필자가 무서웠나 보다. ㅎㅎ
대학 3학년 말 때 그와 칸트 판단력 비판에 대한 토론을 2시간 했는데 끝까지 우기던 그는 1년동안 60-70대 국내 칸트석학들을 만나 필자의 생각이 맞은 것을 확인하고 1년후 필자에게 사과를 했다. 진리탐구에 악착같던 필자는 1년동안 자료 모은 후 찾아갔는데 번개같이 사과를 한다. "나 같은 인간이 교수라는 게 부끄러워 사표쓰고 싶다"고 한다. 말문을 막아버린다. 그래도 학자적 양심은 있었다. 1년 후 헤겔학회 발표회에 필자를 보조로 쓴 그는 필자에게 교수들 발표내용 이해가 되냐고 묻는다. 자신은 이해가 안된다고 하길래 "제 느낌 견해를 말해도 됩니까?"하니 "아니 말하지 마라 알고 싶지 않다"고 했다. 두 번 망신 당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다. 사실 필자가 그에게 하이데거 토론을 제안했을 때 의문이 있는 부분과 소광희라는 석학이 물려준 견해를 알고 싶었다. 한 수 배우고 싶은 열망이었다. 1992년 그 해 서울대 최우수 논문 저자가 아닌가! 그는 학문엔 관심 없고 교수되고 박사 받았으니 권위를 지키는데 몰두하는 모습이었다. 어째든 그덕에 연립주택 골방에 갖혀 점쟁이로 살던 잡놈에 가난뱅이에겐 독일어 원서를 얻었다는 사실 하나로 참 기뻤다.
1989년 하이데거의 수제자 오토 푀겔러가 부산대에서 강연을 했다. 국제헤겔학회 회장인 그는 강연에서 " 하이데거가 노자를 수천번 독서 했다. 하이데거는 중국어에 능통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혀를 찼었다. 당신들은 수천년간 한자 문화이니 노자를 쉽게 독서할 수 있지 않느냐 왜 독창적 철학을 못 만드는가?"라고 질책을 했다. 1969년 형이상학의 종말을 선언한 하이데거는 젊을 때(10대)부터 노자에서 희망을 걸었고 존재와 시간은 번역된 노자철학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여러 증언들에서 검증되고 확인되었다. 그 노자의 완성이 조사선이니 고형곤이 "선의 세계"라는 책에서 조사선과 훗썰& 하이데거를 비교한 것이다. 이후 한국에서 1995년부터 2010년까지 노자랑 서양철학을 비교하는 머저리 같은 책들이 무수히 나왔다. 지리멸렬 하였다. 1996년경 김용옥(왕부지 주역철학으로 박사. 자기 전공과 무관한 노자강의 해서 수많은 노자 장자 전공자들이 엉터리라고 비난한 강의. 일본식 노자강의. 후일 오규 쇼라이 논어표절)이 뜬굼 없이 노자강의를 한 이유도 하이데거가 노자를 새로운 형이상학의 길로 보았다는 말을 듣고서 유명해지고 싶어 노자강의 했는데 성공했다가 이어서 한 논어강의는 논어표절로 망신 당하고 미국으로 빤스런 했다.. 오토 푀겔러는 스승 하이데거의 유업을 동양인(한중일 삼국에서 이 주제로 강의 했음) 철학자가 해결하기를 원했다(이 말에 킹받아 김용옥이 노자 강의). 한문이라는 언어 장벽을 극복 못했다.
<https://cafe.daum.net/Wahrheit/LZeu/9 참고>
오토 푀겔러 역시 우랄알타이어의 한계를 몰라서 헛소리 한 것이다. 언어 자체에 be 동사에 해당하는 존재동사가 기본이 되는 언어인 인도 유럽어와 중국어 즉 표의문자랑 우랄알타이어인 표음문자의 차이를 몰라서 그런 것이다. 표의문자에는 존재동사가 근본을 이루고 표음문자는 형용사 부사가 근본을 이룬다. 문학이나 예술에 특화되는 것이 표음문자다. 그리고 필자가 조사선의 無(하이데거가 바라본 대안 = 형이상학적 실체인 無)를 박살낸 것을 알면 통탄을 했을거다. 형이상학은 완전한 종말을 맞이했다.
2020년경 '숲길'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Holzwege를 필자는 오솔길이라는 번역이 맞다는 입장이다(2010년부터 한국인들이 하이데거에 심취하며 수요가 많아지자 돈 된다 싶어 겨우 번역되었다. 한심한 한국 인문학이다.1920년대에 나온 이 책은 일본이 1940-1950년 사이에 번역하고 이 일본책으로 공부한 서양철학자들이 서울대 철학과 교수들이다 이러니 친일파들이다). 숲속에 비어있는 길이 오솔길이다. 숲길은 숲을 헤치며 나간다는 의미이고 오솔길은 숲속에 텅빈 공간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 누차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것이 그루터기인데 나무가 잘려진 그루터기도 빛이 들어오는 공간이다. 이 공간들은 無다. 텅 비어야 새로운 것이 생긴다. 노자가 곡신불사(谷神不死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를 말했다. 계곡은 푹 파여있고 텅비어 있으니 새로운 물들을 담아내고 넘치는 물은 흘러내려 모든 생명을 살린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텅빈 계곡신의 모습이 無다. 오솔길이 바로 이 無다. 숲길이란 말은 無의 느낌을 주지 못한다. 숲이라는 개념이 텅빈 길을 압도한다. 숲길은 철학의 숲을 헤치고 나간다는 뉘앙스다. 초장부터 독자를 엉터리로 인도한다. Holzwege는 텅비어 있으면서 모든 생명이 이정표를 찾아 가는 통로이며 계곡신처럼 뭇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다. 그루터기는 숲 가운데서 생명이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신의 사랑은 텅빔 空 無다. 그루터기도 이 無다. 그러나 서양철학은 無가 有를 생할 수 없다. 오직 有만이 有를 생한다. 해서 신을 유일자(The One)라고 한다. 해서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에서 이단이며 결국 중국철학이며 노장사상인 것이다. 마치 인상파와 큐비즘이 일본과 아프리카 회화인 것처럼 그렇다. 중국 노자와 서구 형이상학을 언어학으로 짬뽕 시키니 유럽인도 아시아인도 그의 철학이 수수께끼 같은 것이다. 통찰력으로 보면 좃도 아닌 책이다. 한국 일본인들이 하이데거를 좋아하는 것은 그에게서 본능적으로 수천년간 세뇌된 노장사상을 느끼는 것이며 승려들에게 세뇌된 조사선의 망령이 그 영혼에 빙의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를 좋아하는 거다. 숲길이란 번역은 철학책을 한글로 번역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준다. 언어만 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철학적 통찰이 탁월해야 좋은 번역이 나오는 것이 철학책이다. 노자의 무를 예술에 활용한 것이 Holzwege (오솔길)이다. 노자의 무를 형이상학에 적용한 것이 Sein und Zeit(존재와 시간)이다. 모든 연구가 끝난 1980년대 이후 독일철학자들은 하이데거를 아주 싫어한다. 노자를 표절한 놈이라고 뒤에서 욕한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이라는 개념이 없는 중국철학 無에 인생을 걸었기 때문이다. 웃기는게 미술사에 가장 혁명적인 사조가 인상파였다. 색은 고유하며 영원불멸한다는 회화의 개념자체를 혁명적으로 파괴하였다. 색은 빛이 만든 허상이고 가상이며 환상이라고 증명하였다. 그것이 점묘법이다. 빛이 없으면 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색의 존재론을 파괴하였다. 우리가 보는 TV 컴퓨터의 그림과 동영상이 미세한 점들이 합쳐진 것이라는 것은 지금은 상식이지만 20세기 초에는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뀐 것처럼 혁명이었다. 근데 이 인상파 그림이 일본의 민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일본 민화가 19세기 말부터 모더니즘(낭만주의) 붐을 타고 유럽에 쏟아졌고 그걸 보고 혁명적 사상과 그림을 창시한 것이 인상파다. 피카소의 그림은 큐비즘의 창조인데 아프리카 원주민의 가면을 보고 착안한 것이다.
20세기 유럽인들의 위대한 예술과 철학은 죄다 중국에서는 노자와 조사선 화엄철학 등을 표절하고, 일본 아프리카에서는 예술을 표절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인도철학을 표절하였다. 노골적으로 베다와 우파니샤드를 언급하며 쓴 책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충격을 받은 이가 니체다. 니체 철학의 어머니는 쇼펜하우어인데 니체의 조상은 인도철학이다. 해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켰다. 페르시아(이란) 시대의 최고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조로아스트를 그리스 로마에서 부르던 명칭이 짜라투스트라다. 배화교라는 이름으로 중국에도 남아있는 인도유럽 중국까지 교세를 넓힌 종교다. 기독교 사상은 미트라교와 조로아스터교의 계승발전이다. 산에서 불(광명)을 짊어지고 내려오는 모세와 짜라투스트라....
노자의 무를 노골적으로 예술에 접목시키며 형이상학의 부활을 시도한 책이 Holzwege (오솔길)이다. 독일인들이 혐오할만 하다. 유독 한국 일본인들이 그를 좋아한다.
첨언을 하자면 프랑스의 천재 철학자 싸르트르는 독일까지 찾아가 당대 최고 철학자 하이데거의 강의를 듣고 그의 책들을 독파한 후 답하여 쓴 것이 "존재와무"다. 하이데거 철학에서 無를 발견한 것이다. 무신론자에 유물론자 맑시스트였던 싸르트르는 존재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無라고 말한다(노자의 무와는 완전 다른 소멸의 의미에서 무. 생로병사로 끝나는 무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관념의 총체라는 입장이다. 이 책은 너무 방대하고 지지멸렬하다. 해체주의자들 처럼 깔끔하게 "모든 존재는 기표다"라고 한마디 하면 될 것을 지루하기 짝이 없는 논법을 전개하고 하이데거에게 헌정하였다. 빅엿을 먹은 하이데거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물리적 시간을 우리는 시간으로 알고 있다. 허나 하이데거의 예를 보듯이 언어 속의 시간은 별개이다. 언어 문장 속의 시간은 현재형 과거형 미래형 현재완료 과거완료 미래완료의 시간이 존재한다.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시간대다. 해서 불변의 시간이며 그 시간속에 움직이는 주어는 불멸이다. 일리아드라는 서사시는 2천 5백년을 불멸로 존재한다. 이 불멸의 시간을 주제로 쓴 책이 "존재와 시간"이며 현상학 해석학이란 철학이다. 인도 중국철학 역시 마찬가지다.
시간은 다음으로 분류된다.
1. 물리적 시간 : 생로병사
2. 절대적 시간 : 언어 문장,
3. 자아의 시간 : 의식의 시간
4. 초월적 시간 :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神과 영혼
지구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시간은 생물이나 무생물을 막론하고 생로병사 혹은 생성 퇴화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동물은 시간의식이 없다. 낮과 밤과 배고픔으로 시간이 분배된다. 배꼽시계에 따라 즉 배고픔에 따라 사냥하고 먹을 것을 먹을 뿐이다. 동물중 지능이 높은 것들은 시간을 구분한다고 한다. 하지만 정밀하지 않다. 시간을 정밀하게 느끼고 보고 하는 것은 인간이다. 즉 시계의 발견이다. 그 시계의 발견은 해시계 물시계 등인데 모두 언어 문자를 사용하면서 형성된 개념이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면서 세개의 시간에 종속된다. 절대적 시간인 언어문장의 시간과 자아의 시간 그리고 물리적 시간이다. 이 시간들이 상충하니 고통이다. 육체에 감금된 인간의 숙명이다.
언어 문장을 통한 학습은 결국 초월적 시간과 연결된다. 영적 능력을 가진 영매들(제사장)은 신의 언어를 받아낸다. 그리고 인간의 언어로 해석한다. 이 경험들이 종교 예술 문명을 만들고 그 와중에 약 3천년전 수학의 발달로 인간은 이성을 발견한다. 수학의 공리들을 이성의 힘으로 본 인간들은 철학을 만든다. 해서 철학의 역사는 2천5백년 전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자아의 시간은 어떻게 형성되나?
모든 생명은 삶에의 의지를 가진다. 흔히 생존본능이다. 생물학의 발전에 영향을 받은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무너뜨린 형이상학적 실체를 이렇게 대체했다. 삶의 의지가 바로 형이상학적 실체라고 말했다. 일본은 "生에의 의지"라고 번역했다. 나는 살고 싶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답이다. 니체는 이 삶을 권력으로 바꾼다. 권력(힘)에의 의지가 바로 형이상학적 실체고 존재자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불만이다. 언어문장의 절대적 시간으로 존재론의 부활을 꾀했다. 해서 존재와 시간을 기획하고 쓴 것이다.
삶의 의지, 생존 본능에 언어학습을 하면서 인간은 자아를 만든다. 모든 문장의 시작 I am 나는 존재한다. you are 너는 존재한다....등으로 학습하면서 세상을 배운다. 자의식과 자아가 성장한다. 언어 근본에 숨어있는 "I am 나는 존재한다"는 잠재의식은 곧 진아(眞我 아트만)의 발견과 연결된다. 명상과 학문 일체는 모두 언어로 사유한다. 방법론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해서 인도는 아트만, 조사선은 진아, 서양철학은 존재를 발견한다. 언어학습이 만든 가상이며 허상이다. 이 가상과 허상이 인간의 현실을 절대적으로 지배한다. 삶의 의지만 있는 동물은 자의식이 없다. 자아라는 개념이 없다. 영혼은 있다.(주제를 벗어나서 난삽해지니 이 부분은 논하지 않는다) 그 주변엔 적과 친구 먹이감 및 잡다한 동식물만 있다. 친구랑 공생하고 적은 피해야 하고 사냥감은 사냥해야 한다. 인간의 자아는 보통 10대에서 20대 초중반에 완성된다. 학력이 짧은 사람들은 10대에 의식이 머물러 있고 고학력은 20대 초중반에 머문다. 자아는 더이상 나이먹지 않는다. 고학력도 대개 사춘기에 80-90% 자아가 확립된다. 나머지 시간은 정교하게 추상화 되는 시기다. 이 추상화를 통해 진아(아트만 존재)가 나타나며, 언어로 사색과 명상을 통해 진아(아트만 존재)를 깨닫는 것이다. 70대 80대 노인들이 마음은 청춘이고 10대라고 했을 때 이 말은 사실이다. 인간의 자아는 사춘기에 확립되어 간다. 즉 완성되어 간다. 조선시대까지는 10대 중반에 어른이 되고 자아도 정립된다. 전영갑 학장도 20넌전 사석에서 말했다.
전영갑 :
내가 50대가 되니 어른들이 맘은 청춘이라는 말이 이해된다. 내 생각은 20대인데 거울을 보면 50대다. 또래 남자들 보면 깜짝 놀란다.
필자 손님은 50살 여성인데 한탄을 하면서 말한다. 목욕탕이나 집에서 전신거울을 보면 화가 난단다. 늙은 자기 몸이 너무 싫단다. 이건 여성 공통일 것이다. 해서 마사지 샵이나 피부과에서 고가의 주름 펴는 리프팅 시술을 받는다. 그녀든 그든 모두 맘은 10대 20대다. 70-80대 여성들도 영화나 드라마에 정우성 장동건을 보면 설렌다고 한다. 영화라는 가상세계에선 자기 나이가 잊혀진다. 그럼 그녀 맘의 나이가 작용한다. 청춘이다. 이게 인간의 고통이다. 내 의식은 20대에 머물러 있는데 내 몸은 쓸모가 없어진다. 노화를 확인 하고 길에서 어린애가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깜짝 깜짝 놀란다. 거울을 보면 할머니 할아버지다. 70대 80대 노인들이 연예한다고 난리치는 이유다. 존경 받는 노인이 되고 싶은 분들은 자제를 하지만 그 마음은 젊은 여자나 남자랑 연예하고 싶다. 누구나 동일 하다. 돈과 권력이 생기면 대부분 20살에서 40살 차이나는 이성을 만난다. 지탄(지탄대상이 아니라고 반발 할 수도 있다 이해한다)을 받는 일이 발생하는 이유가 성욕이라는 생리적 욕망 때문이 아니라 물리적 시간과 자아의 시간이 상충하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마음은 20대 10대에 머무는데 몸은 60대 70대 80대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 마음은 10대 20대다. 그리고 60이 넘어서면 유독 10대 20대의 기억들이 선명해진다. 엄청난 회환과 고통이 밀려온다. 다시살면 이렇게 저렇게 했을텐데..... 웃기는게 30대 40대는 10대의 실수를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정상적인 경우다. 60 이후로 일이 없어지면 10대 20대를 회상하면서 살게 된다. 자신의 가장 잘나가고 인정받고 아름다웠던 시절을 위안으로 삼는다.
아무리 못생긴 여자나 남자도 다들 10대 20대에는 자신이 장동건 김희선 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몸에 에너지가 다하거나 극심한 고통이 생기면 죽음에의 의지가 생긴다. 죽고 싶은 것이다. 그게 편하다. 그 다음은 정말 신의 영역이고 영혼의 영역이다. 영혼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자아의 지배를 받는다. 해서 왜곡이 일어나서 영혼은 순수를 잃고 지옥과 천국을 가고 윤회를 거듭하며 동물 인간 벌레 천국 지옥을 오간다. 모두 언어가 만든 자아(자의식)가 영혼을 오염시킨 결과다. 오염이 아주 낮아지면 천국 극락을 간다. 또 그래서 죽으면 자신이 가장 자랑스럽고 좋았을 때의 모습을 얻는다. 영혼은 아무런 모습이나 형태가 없다. 허나 필자같은 영능력자에게 나타날 때 자신이 가장 자부심을 느꼈던 시절 모습으로 나타난다. 자아가 영혼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4번에 해당하는 영혼이나 신의 시간은 구지 언급하지 않겠다. 따로 다루어야 할 작업이다. 1번에서 3번의 시간 개념이 삶의 고통을 만드는 시간이다. 하이데거는 이 문제를 숙고하지 못하고 언어문장의 시간을 절대화 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였다.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석가모니가 잘못을 지적한 것이 하이데거 철학이다. 언어문장에서 존재를 찾으면 결국 나오는 것은 아트만이다. Ich bin = I am 나는 존재한다가 그 근본이다. 아트만은 언어문장을 통한 사유 사색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석가모니 12연기설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해서 아트만(진아)이 없다고 한 것이다. 모든 명상이 결국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이해했으면 조사선은 성립하지 않는다. 조사선이 말한 언어도단은 경전이다. 경전으로 만든 언어의 길을 끊고 화두 참구(참선)를 해야 한다. 그래야 無를 자각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화두(話頭 말<언어>의 머리를 잡아라)는 말 아닌가? 이모꼬는 what(무엇)이란 말이다. "이게 무엇이고"를 줄여서 이모꼬라고 한다. 이모꼬는 준말이다. 요새 애들 은어나 욕이 바로 화두다. 조사선 화두는 모두 단어다. 문장을 보지 말고 단어를 통해 본질을 보라고 한다. 에포케를 통해 본질직관을 하라는 훗썰 현상학과 아주 유사하다. 현상학이 존재를 만난다면 조사선은 無(진아)를 만난다. 언어도단을 조사선은 인도경전 모두를 파기하고 노자의 무를 깨달아야 한다고 해석한 것이다. 그러니 사기꾼이다. 그럼 노자를 숭배하는 도교라고 외쳐야지 왜 삭발하고 승복입고 불교라고 지랄을 하니? 그들에게 진정한 불교는 노자를 스승으로 모시는 것이다. 해서 조사(祖師 조상을 가르치는 스승)다. 조상은 노자다. 도교에서도 無를 깨달은 자를 조사라고 한다. 그 경지가 무극(無極)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은 언어의 길을 끊어라인데, 조사선은 경전 읽지마라고 썼다. 성철스님이 제자들에게 책읽지 마라고 한 것이 언어도단인데 책은 경전이다. 모든 경전을 버리고 노자를 따르라는 뜻이 된다. 머저리 성철은 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노자를 따라간 것이다. 지난 1천 6백년간 한국의 승려들이 이렇게 머저리로 산 것이다.
2024년 2월 18일 紫霞仙人 遊於世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