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버팀목
- 동행-
이 선 재
오늘은 글쓰기 수업이 있는 날이다.
책과 필기도구에 각종 카드가 들어있는 지갑과 휴대전화가 들어있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선다. 요즘은 정장이나 모양새 나는 옷을 입을 일이 거의 없어 유명상표의 고가품이나 장식적 효능이 돋보이는 가방은 들지 않게 된다. 주로 편한 사람들과 부담 없이 소통하는 생활에 익숙하다보니 때와 장소와 상황에 따른 평상복과 어울리는 가볍고 쓰기 편리한 기능적인 가방을 찾는 편이다. 그러고 보면 가방은 내게서 떼어낼 수없는 동행자인 것 같다.
오래전 아버지가 출장 가서 사다주신 빨간 책가방을 메고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밖에 나갈 땐 의례 가방을 든다. 또래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던 그 빨간 가방을 나는 꼬꾸라져가며 38선을 넘어 월남할 때도 메고 왔다. 그 후 초등학교부터 고교 졸업 때 까지는 학생용 가방에 각종 교과서와 노트, 도시락과 실내화까지 넣고 다녔다. 그러다 대학을 다닐 때는 모양을 낸답시고 작은 손가방을 들고 책은 일부러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곤 했다.
나는 1963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교사가 되었다. 학생들을 가르친다기보다 그들과 동료들로 부터 배운 것이 더 많았던 그 고맙고 귀한 교사생활은 5남매의 맏이인 남편과의 결혼으로 3년도 못 채웠다. 현모양처의 표상이셨던 시어머님은 음식 솜씨가 뛰어나신데 요리학원을 두 군데나 수료하셨다는 사실이 나를 더 주눅 들게 했다. 살림살이에 서툰 나는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움직여도 해 놓은 뒤끝은 보이지도 않고 나고 자란 지역이 다른 식구들의 구미에 맞는 음식을 만드느라 전전긍긍만 했다.
그 땐 냉장고도 없던 시절이라 매일 시장바구니를 들고 장을 보는 게 일과였다. 집 바깥 공기가 달콤해 흔들면서 들고 온 빈 바구니에 시어머님이 일러 주신 찬거리를 담을 때는 새삼 주부라는 긍지가 생겨 흐뭇했다가 이것들로 밥상을 차려야 할 걱정에 갑자기 마음과 시장바구니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럭저럭 한솥밥을 먹으며 긴장의 끈이 느슨해질 무렵에 나는 첫 아들을 낳았다. 그 때 시아버님은 49세였고 시어머님은 47세로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호칭이 쑥스럽고 낯설기도 하려니와 세상살이에 한창 물이 오른 젊디젊은 세대셨다. 어쩌다 제자들의 편지를 받게 되면 학생들의 초롱초롱하던 눈망울이 그리웠고 선생님이란 호칭에는 마음이 설레곤 했다. 내가 집안 울타리 안에서 가사와 육아에 허둥대던 중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출산 한 달도 못되었는데 모교 은사님으로부터 남산의 모 여고 교사채용에 응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응시를 했더니 운 좋게 채용이 됐다.
취직이 되자 시댁에서 분가를 하라하셨다. 다시 찾은 교직에의 자부심과 사명감에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고 학사업무에도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세상을 얻은 듯 의욕에 찬 나는 책과 도시락이 든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신나게 학교를 오갔다. 그러나 남편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길에 나서야했고 아이들이 잠자리에 있을 때 가정부에게 모든 걸 맡기고 대문을 나서야 하는 미안함과 애잔함에 마음이 쓰렸고 발걸음은 항상 무거웠었다. 그런데도 교문에 들어서면 신기하게도 집안일은 잊히고 오로지 학생들만 바라보며 학교생활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퇴근해서 집 가까이 오게 되면 갑자기 아이들 생각에 가슴이 뛰어 급한 마음에 가방을 끼고 뛰듯이 걸었다.
그러던 중 은사님의 권고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졸업 10년이 되던 해에 딸을 낳은 후 교직과 대학교 출강을 병행하는 바쁜 일상에 보람과 회의가 엇갈리곤 했으나 용케 견뎌냈다. 고맙게도 아이들은 무탈하게 지냈지만 남의 손에 자라느라 얼마나 외롭고 허전 했을까.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팠다.
1977년 남편의 해외지점 발령으로 런던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네 살짜리 막내딸을 그곳 유아원에 맡기고 패션전문대학에 들어가 디자인과 의복구성을 배웠다. 졸업작품발표회 에선 한복을 응용한 디자인으로 호평을 받았다. 4년 후 귀국하여 S여대 의류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1986년에는 남편이 또 해외지점장으로 발령받아 나도 2년간의 휴직원을 낸 후 세계 최고 패션산업의 본고장인 뉴욕으로 갔다. FIT에서 입체재단을 배우면서 뉴욕 대학에서는 Pat Mulready 교수와 함께 소비자의 수요를 창출하기 위한 혁신적인 패션을 수용하고 재해석해 의류상품을 기획, 생산, 유통하는 패션산업의 실험적이고 이론적인 체계정립방안을 연구했다. 그러다보니 내 가방엔 실습재료와 각종 학술지와 논문자료 등으로 가득했다.
이렇게 맘껏 배우며 가르치면서 활기 있게 내 삶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준 모든 인연들에 감사한다. 그러나 학교생활에 열중하다 보니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와 생각하니 엄마가 필요할 때 자식들 곁에 있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고맙고 죄스럽기까지 하다. 삼남매는 장성해서 가정을 이뤄 자녀를 둘씩 낳아 여섯 명의 손주를 내게 안겨주었다.
어느새 나는 여든 중반이 되었다. 마라톤 경주로 치면 홈스트레치(homestretch)만 남겨놓은 셈이다. 젊어서는 직장에 충실하려고 접어두고 살았던 꿈을 끄집어내 늦었지만 새로운 길을 내딛기 시작했다. 하고 싶었으나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글쓰기 공부를 하러 어깨에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설 때의 기분은 참으로 행복하다.
가방은 소지한 사람의 부와 신분상승의 상징이자 개성과 취향을 나타내는 무언의 통신자로서 외관을 꾸며주고 필요한 물건을 운반해 주는 역할을 한다. 어느 때나 뭘 넣든 어디를 가든 가방은 아무 말이 없다. 가방은 날 대변해주는 신분증과 카드와 휴대폰이 들어있으니 내 분신이기도 하다. 양손에 번갈아 들기도 하고 팔이나 어깨에 걸치기도 하다가 때론 등에 메고 다닌다. 하루 종일 함께 하면서도 가끔 휴대 전화나 카드를 꺼낼 때 말을 건네주거나 다독여 주는 정도다. 그런 가방을 몸에 지니거나 옆에 놓아두기만 해도 내겐 안정감과 신뢰감을 주니 가방은 나를 바로 세워주는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하다.
유치원 때 어깨에 멨던 빨간 가방으로부터 모양과 품질과 크기와 용도는 다르지만 이 나이에도 가방과 즐겁게 동행하고 있으니 가방이야 말로 반려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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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 행 -
내 든든한 버팀목
이 선 재
오늘은 글쓰기 수업이 있는 날이다.
책과 필기도구에 각종카드가 들어있는 지갑과 휴대전화기가 들어있는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집을 나선다. 요즘은 정장이나 드레시한 옷을 입을 일이 거의 없어 고급 브랜드의 제품으로 스타일리시하고 장식적 효능이 돋보이는 가방은 들지 않게 된다. 주로 편안 사람들과 부담없이 소통하는 생활에 익숙하다보니 캐주얼한 옷차림에 어울리는 가볍고 쓰기 편리한 기능적인 가방을 찾는 편이다.
먼 옛날 아버지가 출장 가서 사다주신 란도셀을 메고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밖에 나갈 땐 의례 가방을 든다. 또래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던 그 빨간 란도셀은 38선을 넘어 월남할 때도 메고 왔다. 그 후 초등학교부터 고교 졸업할 때 까지는 학생용 가방에 각종 교과서와 노트, 도시락과 실내화 까지 넣고 다녔다. 그러다 대학을 다닐 때는 모양을 낸답시고 작은 손가방을 들고 책은 일부러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곤 했다.
나는 1963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교사가 되었다. 학생들을 가르친다기보다 그들과 동료들로 부터 배운 것이 더 많았던 그 고맙고 귀한 교사생활을 결국 3년도 못 채우고 5남매의 맏이인 남편과 결혼했다. 현모양처의 표상이셨던 시어머님은 음식솜씨가 뛰어나신 데다 요리학원을 두 군데나 수료하셨다는 사실이 나를 더 주눅이 들게 했다. 살림살이에 서툰 나는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움직여도 해 놓은 뒤끝은 보이지도 않고 나고 자란 지역이 다른 식구들 구미에 맞는 음식을 만드느라 전전긍긍하곤 했다.
그 땐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매일 시장바구니를 들고 장 보는 게 일과였다. 집 바깥 공기가 달콤해 흔들면서 들고 온 빈 바구니에 시어머님이 일러 주신 찬거리를 담을 때는 새삼 주부라는 긍지가 생겨 흐뭇했다가 이것들로 밥상을 차려야 할 걱정에 갑자기 마음과 시장바구니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럭저럭 한솥밥을 먹으며 긴장의 끈이 느슨해질 무렵에 나는 첫 아들을 낳았다. 그 때 시아버님은 49세였고 시어머님은 47세로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호칭이 쑥스럽고 낯설기도 하려니와 세상살이에 한창 물이 오른 젊디젊은 세대셨다. 어쩌다 제자들의 편지를 받게 되면 학생들의 초롱초롱하던 눈망울이 그리웠고 선생님이란 호칭에 마음이 설레곤 했다. 내가 집안 울타리 안에서 가사와 육아에 허둥대던 중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출산 한 달도 못돼 모교 은사님으로부터 남산의 모 여고 교사채용에 응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응시를 했더니 운 좋게도 채용이 됐다.
취직이 되자 시댁에서 분가를 시켜주셨다. 다시 찾은 교직에의 자부심과 사명감에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고 학사업무에도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세상을 얻은 듯 의욕에 찬 나는 책과 도시락이 든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신나게 학교를 오갔다. 그러나 남편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길에 나서야했고 아이들이 잠자리에 있을 때 가정부에게 모든 걸 맡기고 대문을 나서야 하는 미안함과 애잔함에 마음이 쓰렸고 발걸음은 항상 무거웠었다. 그런데도 교문에 들어서면 신기하게도 집안일은 잊히고 오로지 학생들만 바라보며 학교생활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퇴근해서 집 가까이 오게 되면 갑자기 아이들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급해져 발걸음이 빨라지곤 했다.
그러던 중 은사님의 권고로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학위를 받았고 대학졸업 10년이 되던 해에 딸을 낳았다. 교직과 학위 과정과 대학교 출강도 병행하며 바쁘게 살면서도 힘든 줄을 몰랐다. 고맙게도 아이들은 무탈하게 자랐으나 남의 손에 자라느라 얼마나 외롭고 허전 했을까.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팠다.
1977년 남편의 해외지점 발령으로 런던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네 살짜리 막내딸을 그곳 유아원에 맡기고 패션전문대학에 들어가 디자인과 의복구성을 배웠다. 졸업작품발표회에선 한복을 응용한 디자인으로 호평을 받았다. 4년 후 귀국하여 S여대 의류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1986년에는 남편이 해외지점장으로 발령받아 나도 2년간의 휴직원을 낸 후 세계 최고 패션산업의 본고장인 뉴욕으로 갔다. 뉴욕의 대학에서는 입체재단코스와 혁신적인 패션을 수용하고 업그레이드 시키는 패션산업분야의 실험적이고 이론적인 체계정립을 위한 연구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다보니 내 가방엔 실습재료인 옷감과 도구에다 각종 학술지와 논문자료 등으로 넘쳐 늘 보조가방이 필요했다. 이렇게 맘껏 배우며 가르치며 활기 있게 내 삶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준 모든 인연들에 감사한다.
그러나 배우며 가르치는 학교생활에 열중하다 보니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와 생각하니 엄마가 필요할 때 자식들 곁에 있어주지 못 한게 미안하고 고맙고 죄스럽기까지 하다. 삼남매는 장성해서 가정을 이뤄 자녀를 둘씩 낳아 여섯 명의 손주를 내게 안겨주었다.
어느새 나는 여든 중반이 되었다. 마라톤 경주로 치면 홈스트레치(homestretch)만 남겨놓은 셈이다. 젊어서는 직장에 충실하려고 접어두고 살았던 꿈을 끄집어내 늦었지만 새로운 길을 내딛기 시작했다. 하고 싶었으나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글쓰기 공부를 하러 어깨에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설 때의 기분은 행복하다.
가방은 소지한 사람의 경제력과 개성과 취향을 나타내는 무언의 통신자로서 외관을 꾸며주고 필요한 물건을 운반해 주는 역할을 한다. 어느 때나 뭘 넣든 어디를 가든 가방은 아무 말이 없다. 그 가방 안에 낼 대변해주는 신분증과 카드와 휴대폰이 들어있으니 내 분신이다. 양손에 번갈아 들기도 하고 팔이나 어깨에 걸치기도 하다가 때론 등에 메고 다닌다. 하루 종일 함께 하면서도 가끔 휴대 전화기나 카드를 꺼낼 때 말을 건네주거나 다독여 주는 정도다. 그런 가방을 몸에 밀착하거나 옆에 놓여 두기만 해도 네게 안정감과 신뢰감을 주니 가방은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하다.
유치원 때 어깨에 멨던 빨간 란도셀부터 모양과 품질과 크기와 용도는 다르지만 이 나이에도 가방과 즐겁게 동행하고 있으니, 뭘 더 바라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