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생인 대전의 향토사학자이며 시인 최문휘 선생의 사적인 기억이 구현하는 서사도, 한국 철도 역사에 관한 연구가 제시하는 공적인 서사도 모두 유사한 기념비화 작업으로서 현대도시 대전의 탄생을 이야기한다. 즉 대전의 탄생에 대한 기억은 항상 그리고 우선적으로 철도, 대전역에서 출발한다. 이 서사는 기념비로 굳어진 역사적 사실임과 동시에 부인하고 싶은 대전의 정신적 외상이기도 하다. 이 정신적 외상은 대전에 대한 서사가 집단적이고 공식적 목적을 띨 때는 지나치도록 암묵적인 동의를 요청하는 것 같지만, 개인의 기억을 서사화할 때는 거침없이 드러난다. 대전을 삶의 터전으로 하는 노년층 세대에 속하는 개인은,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철도를 놓아 번영시킨 도시라고 깎아 내린다”7)라는 트라우마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때문에 이웃하고 있는 고도(古都) 공주나 부여처럼 찬란한 역사성이 부재하는8) 도시 대전의 초상은 과거 모습보다는 현재 모습에 집중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경향이 있다. “지금 대전은 개발의 삽질 소리가 여기저기 들려오고 있다.”9) 이것이 비록 한 개인의 사적인 언표일지라도 대전이 유일한 삶의 터전인 사람들에겐 공감되는 언표일 것이다. 비록 이 언표가 아니더라도 현대도시 대전이 짧은 역사를 가진 것에 비해 급진적 발전을 이룩하였음은 주지적 사실이다. 대전이 다른 지역에 비해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요인들이 작용하였겠지만, 무엇보다도 한반도 곳곳을 잇는 중심부적 길 역할을 하는 지리적 요인도 중요한 몫을 했을 것이다. 이처럼 대전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그 발전상을 설명함에 있어서 ‘길’은 핵심어일 수밖에 없다. 한 도시의 발전상을 해석하기 위해 역사학적 사회학적 기호들을 일렬로 세울 수 있는 주제어들이 많겠지만, 대전을 특징지어주면서 동시에 다양한 인문학적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지평을 갖는 주제어는 ‘길’이다.
현대도시 대전의 건설과 함께 시작된 인효로, 대전로, 중앙로와 자본주의의 극대화에서 기인한 현대산업사회의 병폐를 극복하기 위해 ‘참살이’의 필요성을 자각하면서부터 만들어진 대전둘레산길, 대청호 오백리길, 계족산 황톳길과 최첨단과학도시의 이념을 담은 사이언스길 등, 이 모든 길들은 제각각 다른 탄생 환경을 갖고 있다. 또한 각각의 길이 도시민들의 삶에 원동력 역할을 하면서 특징화된 상을 구축한다. 때문에 이 길들이 지닌 가치를 지리학적 차원을 벗어나 논의해보는 것은 오늘날의 대전에 내재한 문화적 사회적 역량을 예측해볼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길들의 ‘길’이 구축하는 함의는 무엇인가?
3. 대전 최초의 길
게오르규 짐멜(Georg Simmel)은 “현대란 인간이 사회적 이해 집단에 종속되던 체계의 붕괴이다.”라고 정의한다. 현대를 맞이한 인간은 봉건적 전통사회로부터 자신을 떼어낸 주체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즉 현대의 인간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내적·외적 이동의 자유를 갖는 자율적 존재이다. 현대적 인간의 이동은 자신이 종속된 사회에서보다는 자기 자신에게서 그 동기를 찾는다. 때문에 19세기에 방랑을 즐기는 문인들이 서양문학에 대거 등장한다. 19세기의 서양 문인들은 랭보처럼, ‘먼 곳’을 여행하는 자율적 존재들이었고, 그들의 자유로운 이동은 ‘오리엔탈리즘’이란 문예사조까지 이끌어 낸다. 그 배경에는 자유로운 이동의 열망이 큰 길을 걸으며 하는 여행으로만 표출된 것이 아니라, 현대도시를 가로지르는 소로(小路)들을 산책하는 ‘현대적’ 취미를 통해서도 이뤄졌다. 소위 서양 현대문학의 선구자로 간주되는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현대성은, 파리의 좁은 길들을 산보하며, 파리 시내 곳곳에 첨예한 시선을 던지며, 현대도시에서 일어나는 현상들과 군중을 관찰한 개인을 출현시킨 데에 있다. 게다가 20세기 초 한국 현대 문인들 중 “서구 모더니즘의 적자”라 불리는 이상(李箱)은 경성역 부근을 배회하며 도시의 군중을 관찰하는 개인을 출현시킴으로서 새로운 초상의 화자(話者)를 제시한다. 이와 같이 사적인 동기,혹은 동기 없는 단순한 배회나 산보에 의거한 자유로운 이동은 현대적 개인에게 부여된 일종의 현대성인 셈이다.
대전을 지나가는 1905년 개통된 경부선철도의 등장과 함께 대전의 지정학적 위상뿐만 아니라 지역민의 정체성에 변혁이 인다. 철길의 건설과 함께 함께 내적·외적 이동의 자유를 누리는 자율적 존재들이 대전에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 존재들은 “식거먼 연기와 불을 배트며 소리지르며 달어나는 괴상하고 거창한 파충류동물”에 비유 된 현대 문물인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소러서아 눈알푸른 시약시”, “드란 짱골라”, “뒤처 젓는 왜놈” 등의 이방인들이기도 하다10).고향에 있는 할머니가 그리워 이 아프단 핑계를 대고 귀향하는 이도 “배추꽃 노란 사월 바람을” 타고 달리는 기차로 이동한다11).이처럼 서양 문물의 이입과 함께 갑자기 맞이한 한국의 현대화(modernization)는 철길을 달리는 기차로 응집된다. 한국 초기 현대시의 모더니스트로 간주되는 정지용에게도 현대문명의 상징이 오로지 기차이기라도 한 것처럼 시인은 기차를 시적 소재로 자주 활용한다. 그렇다면 이국의 선진기술이 유입되던 현대 한국에서 기차가 달리던 철길과 오늘날 일상에 편의를 제공하는 평범한 철길은 동일한 의미를 갖는가? 간략히 말해서 두 철길에 부여된 의미는 상이하다.
1900년 초기 개발의 중심지였던 지금의 정동, 원동, 인동 땅값은 평균 한 평에 일전(一錢), 이전(二錢)으로도 거래가 잘 안 되던 것이 1904년에는 껑충 뛰어서 2원(圓)으로 거래되었었다. 그만큼 새로운 개발지로 비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신개발지는 대전역 앞뿐이었고 대전천을 건너다니는 다리 하나가 없었다. 목척교 부근에 돌로 싸놓은 징검다리가 있어서 그 다리로 건너다녔으나 비가 오면 그 다리도 냇물에 침수되어 통행은 불가능했다. 당시 대전천을 건너다니는 징검다리로는 목척 다리와 석교동에서 대전천을 건너다니는 돌다리가 유일한 큰 징검다리가 아니었던가 한다.
대전천을 건너다니는 육산교로, 처음은 1906년 7월에 대전 인동에서 문창동으로 건너다니는 다리로 가설된 씨웅교가 처음이다. 대전 목척교가 1911년 다리 폭 2칸으로 가설되고 1912년 4월에 다리 폭을 3칸으로 낙성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더라도 대전천 첫 다리는 이미 목척교보다 6년 전에 가설한 씨웅교가 처음인 셈이다. 대전에 자리 잡는 일본인들이 대전 장터의 필요성과 그 이용가치를 높이려고 가설한 다리가 씨웅교였다.12)
근대도시로 대전이 등장하기 이전 지역 내 길들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대전역-대전천-충남도청-유등천으로 경계 지워지는 현 대전의 원도심 지역에 눈에 띄는 길들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대전천 주변 지역을 모태로 하여 대전이 등장한 이후, 과거와는 다른 길 체계가 대전역과 충남도청 사이 원도심 지역을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될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새롭게 등장한 길 체계는 현재의 대전 도시교통망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
근대적 행정체제 상 대전의 근간이 되었던 대전면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대전역과 대전천 사이에 등장하였다. [......]더불어 본정통(인효로), 중앙로, 중교로, 대흥로 등 시가지 내 주요간선도로와 대전교(목척교), 대흥교, 중교 등 대전천 동-서쪽을 잇는 교량을 건설하고, 하천치수공사와 하수도 공사 등 여러 도시개발 사업이 시행되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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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송형섭, 『새로 보는 대전 역사』, 12쪽
8) 한남대 한기범 교수는 「대전의 문화유적과 산천과 길」 (『대전의 산천과 길 제1권』 대전역사총서 제7집)에서 “대전의 역사가 짧고 전통문화가 빈약하다는 평”에 대해 반박한다.
9) 위의 책, 12쪽
10) 1926년 일본 유학생 회지 『학조』에 발표하였던 시 「파충류동물」에서 인용.
11) 정지용, 「기차」, 『백록담』, 열린책들, 2004 :
“할머니 / 무엇이 그리 슬퍼 우십나? / 울며 울며 녹아도로 간다. [......] // 나도 이가 아퍼서 / 고향 찾아가오. // 배추꽃 노란 사월 바람을 / 기차는 간다고 / 악물며 악물며 달린다.”
12) 최문휘, 「역사이야기 - 되돌아본 대전 100년, 지난 이야기 1900-1920」, 『토마토』 (2010년 7월호)
13) 강성복, 「대전지망 길의 현황과 그 특색」, 『대전의 산천과 길 제2권』 (대전역사총서 제7집), 428쪽
(계속)
첫댓글 대전의 첫번째 다리가 인동에서 문창동으로 이어지는 씨웅교라는 걸 알게 되었네오
사실 대전시는 일제시대 때 철도가 놓이면서 도시가 형성되었다는데 대전역 주변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네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