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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번 문제는 고려와 조선의 토지제도 비교문제
1. ④
위만 왕조는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여 농업과 무기생산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이 융성해졌고 그에 따라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였고 중국과 삼한 사이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동방의 예(濊)나 진이 중국 한나라와 직접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계 무역의 이득을 독점하려 하였다.
① 기원전 3세기경 부왕, 준왕과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다.
② 위만은 진한 교체기에 고조선으로 유입되었고, 이후 준왕의 신임을 얻어 서쪽 변경을 지키는 박사에 임명되었다.
③ 위만 유입 이전의 단군조선에 대한 설명이다. 단군 조선은 요령을 근거지로 성장하여 만주, 한반도 북부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2. ①
①은 식민사관 중 정체성론이다. 정체성론은 한국이 여러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겪으면서도 능동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당시의 조선사회가 10세기 말 고대 일본의 수준과 비슷하다고 보는 주장이다. 특히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데 필수적인 봉건사회가 형성되지 못하여 사회경제적 낙후를 면치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3. ①
제시된 사료는 정조 때 (1791) 육의전을 제외한 다른 시전들의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상인들의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인정한 신해통공(辛亥通共)이다.
① 포구에 객주나 여각이 크게 발달한 것은 조선 후기이다.
②③④은 고려. 조선 억상정책을 펼쳤던 조선과 달리 상공업의 진흥에 관심이 있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고려는 정부차원에서 도시에 관영상점(다점, 주점)을 설치하고 화폐 사용을 장려하였으나, 유통이 활발하지는 못하였다.
4. ④
제시된 ‘역법서’는 세종 때 제작된 <칠정산>이다.
칠정산(七政算)은 1444년(세종 26)에 이순지와 김담(金淡)이 우리나라 역대의 역법을 정리한 위에서 원나라와 명나라의 역법을 참고하여 만든 것으로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으로 이루어졌다. 외편은 서역(西域)의 회회력법(回回曆法)을 연구하여 해설한 책인데 비해, 내편은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을 이해하기 쉽게 해설한 책으로서, 서울을 기준으로 한 해와 달, 행성들의 운행이 나타나 있다. ④ <농사직설>은 세종 때 문신인 정초·변효문 등이 왕명에 의하여 우리 농법을 정리한 농서이다.
① 고려시대에는 우경(牛耕)에 의한 심경법(深耕法)이 행해지고 2년3작의 윤작법이 시행되었다.
② 이모작의 전국적 시행은 조선 후기이다.
③ 삼국 시대의 농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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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②
제시된 단체는 시전 상인들이 결성한 상권 수호단체인 ‘황국중앙총상회’(1898)이다.
연좌법과 노륙법은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된 법이었다. 연좌법은 죄인의 가족에게 중형을 내리는 법이었고, 노륙법은 죄인의 스승, 아들, 남편, 아비를 죽이는 법이었다. 1898년 9월 11일 고종황제와 황태자가 커피를 마신 후 토하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의 주범으로 전 러시아 통역관인 김홍륙이 지목되었고 관련자들이 체포되었다. 이 ‘김홍륙의 독차사건’을 계기로 수구파 및 중추원 의장 신기선을 비롯한 34인의 의관이 연좌법과 노륙법을 부활해야 한다는 청원서를 올렸다. 또한 경무사 민영기는 이 사건으로 체포된 부녀자와 무고한 사람들까지 무참히 고문하였다. 결국 고문을 받던 공홍식이라는 이가 자살시도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독립협회는 통상회에서 법부의 죄인에 대한 고문과 중추원의 노륙법 및 연좌법의 부활 시도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연좌법, 노륙법 부활 반대 집회는 10월 1일 중추원 문 앞에서 첫 집회를 개최하였다. 이들은 중추원 앞에서 신기선의 사임과 고등재판소에의 고발을 의결함과 동시에 노륙법 및 연좌법 부활 시도를 규탄하였다. 결국 연좌법, 노륙법 반대 집회는 이후 수구파 정부를 몰아내고, 개화파 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집회로 이어졌다. 연좌법, 노륙법 반대집회는 중추원, 고등재판소, 경운궁 순으로 계속해서 열렸다. 집회 참가인원은 계속해서 늘어나 약 1만여 명 이상이 참석하였다. 또한 종로 시전상인들의 단체인 황국중앙총상회와 협력하여 종로 네거리 시전 상인들이 철시를 주도하였다. 심지어 소학교 학생들까지 참여하여 수구파 정권에 위협을 가했다. - 문화콘텐츠닷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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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④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1476년(성종 7) 간행된 안동 권씨(安東權氏) 성화보이다.
내가 생각건대 옛날에는 종법이 있어 대수의 차례가 잡히고 적자와 서자의 자손이 구별 지어져 영원히 알 수 있었다. 종법이 없어지고서는 족보가 생겨났는데 무릇 족보를 만듦에 있어 반드시 그 근본을 거슬러 어디서부터 나왔는가를 따지고 그 이유를 자세히 적어 그 계통을 밝히고 친함과 친하지 않음을 구별하게 된다. 이로써 종족 간의 의리를 두터이 하고 윤리를 바르게 할 수 있었다. - 안동 권씨 성화보 - |
㉠ 고려와 조선의 가족제도 여성의 제도는 대체적으로 비슷하지만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조선은 재가녀의 자손과 손자의 과거 응시를 금지하였으며, 집안의 대를 잇는 자손에게는 상속분의 1/5을 더 지급하였다. 상속분 추가 지급은 차별이 아니라는 점은 주의하여야 한다.
㉡ 친영제도는 조선 후기에 일반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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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③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 다수를 이루고 일부 말갈족도 지배층이 되거나 촌장의 지위에 올랐다. 현재까지 알려진 발해의 지배층은 모두 380명인데 왕족인 대씨가 117명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고씨가 63명이고, 왕씨가 30명, 장씨가 20명, 양씨가 8명, 오씨가 13명, 이씨가 21명, 하씨가 4명 등으로 전체 발해인의 65%를 차지한다.
19. ②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1945.12)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1978.8.15)
② 반민족행위처벌법은 1948년 9월에 제헌국회에서 제정되었다.
20. ④
돌무지 덧널 무덤(積石木槨墳, 적석목곽분) 은 지하에 무덤광을 파고 상자형 나무덧널을 넣은 뒤 그 주위와 위를 돌로 덮은 다음 다시 그 바깥을 봉토로 씌운 신라 귀족의 특수무덤이다. 이 무덤은 도굴과 합장이 어려운 구조이며, 벽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①③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
② 장군총은 계단식 돌무지 무덤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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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마 문동균샘 본인기신가요 ?! ㅋㅋ 자료 감사합니다 ~
본인입니다^^ 전 제가 다 직접합니다ㅋ 가내수공업 정신으로!!
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