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 신부
율법의 출발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복음의 처음 부분에서 들려오는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엄청난 압박감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어떤 면으로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비교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배운 것으로나 사회적 지위로나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고, 민족의 정신을 지켜오던 사람들과 달리
하느님에 대해서는 그저 고개 숙이고 빌 줄만 알던,
그리고 정해진 율법의 굴레에 맞춰 의무만을 성실히 지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들이 하늘나라에 가기란 불가능한 것이라는 말씀과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하늘나라의 조건을 다 알고 있는 듯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산다는게 도대체 가능하기나 하겠습니까?
이런 경향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살펴보면 하느님에 대해 진리를 가르친다는 사람들과
그것을 평생 배워야 하는 듯 여겨지는 사람들이 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흐르는 생각들 중 하나는 하느님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하늘나라 문의 열쇠를 쥐고 있는 듯 여겨지기에
한쪽이 일방적으로 존중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배워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가르치는 사람보다 훌륭히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거나
혹은 건방지거나, 불손한 생각 정도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은
율법이나 어떤 정해진 진리의 가르침보다 훨씬 더 우리 생활 가까이에 있어서
누구나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게 해 줍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생각해보면
율법이라는 무시무시한 기준을 갖다 댈 필요도 없이 누구나 율법의 근본 정신대로 살아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율법에 적혀 있는 가장 커다란 죄라 할 수 있는
‘살인’을 예로 들어 설명하십니다.
율법에는 ‘살인하지 마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살인’은 대죄입니다.
그러니 그 죄를 지으면 하느님 앞에서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에 제시된 살인만이 죄가 아니며
자신의 형제와 같은 가장 가까운 이를 욕하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이 ‘살인’이라는 율법에 해당되는 죄를 짓기 전
그 죄가 남을 시샘하고, 미워하는 아주 사소한 욕심에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 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옳게 살지 못한다면 '이란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로써 생각지도 못할 엄청난 기준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런 커다란 죄를 짓게 되는 계기를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조심 시켜주시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마주 대하기 전 그분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를 잘 준비하게 하십니다.
또한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의 속뜻을 설명해주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살인하지 마라에서 살인이란 율법은 사실 사람의 생명을 소홀히 여기는 것에서 출발하고
또 그것 역시 살인과 마찬가지라는 가르침이 숨겨진 듯 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훨씬 더 가깝게 있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더 생각하고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록
우리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자격으로는 못할지 모르지만
삶으로는 충분히 그들보다 옳은 사람이 될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부산교구 정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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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현 요아킴 신부
하느님은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옳게 살던 자라도 그 옳은 길을 버리고 악하게 살다가 죽는 다면
그것은 자기가 악하게 산 탓으로 죽는 것이다.
못된 행실을 하다가도 그 못된 행실을 털어 버리고 돌아와서 바로 살면
그는 자기 목숨을 건지는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인생은 끝까지 주어진 시간을 살아보아야 만이
한 개인의 삶을 판단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인간관계 안에서 상대방을 판단하고 말로서 단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고 단언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율법 중에 ‘살인하지마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 는 규정을
새롭게 해석하십니다.
예수님은 살인을 하는 것 이상으로, 말로써 상대를 해치는 사람들의 혀끝을 경고하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인간의 “혀는 휘어잡기 어려울 만큼 악한 것이며
거기에는 사람을 죽이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고 말하며, 인간이 사용하는 말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떤 말을 주고받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대화중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상대방에게 언어폭력을 휘두르고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인간의 언어폭력은 우리가 한 사람을 살인하는 것 이상으로
한 개인에게 영원히 지어지지 않는 상처를 남겨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인들은 마음에 앙금을 품고서 교회 활동에 참여하여 자신의 안일을 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인간관계의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하여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고소하여 시비가 붙었다면 얼른 화해하고
하느님 앞에서 용서를 청하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신앙인은 무죄하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 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한 없이 낮추신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고 우리의 형제와 이웃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너무 많은 고통이 따라옵니다.
신앙인들에게 사랑은 세상이 말하는 달콤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기에는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힘없이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한없는 용서와 사랑을 감히 따라나설
용기조차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지극한 사랑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신 내용처럼 자신을 철저히 이웃을 위해 포기하신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숱한 말을 하고 악한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말과 생각은 우리 삶의 꼴을 결정짓습니다.
적어도 오늘 하루만이라도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세상의 언어와 생각을 멀리하고 하느님의 언어와 하느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하루를 살아야 겠습니다.
부산교구 강우현 요아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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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욱 신부
사순 제1주간 금요일이라는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먼저 여러분들의 주변을 한번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여러분들에게서 상처를 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은 없는지,
여러분들이 함부로 내뱉은 말로 인해서 속으로 울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여러분 주변의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면서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원망하는 사람, 내가 힘들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나를 울게 만든 사람이 아니라 나의 말이나 행동으로 원망을 품게 만들고, 힘들게 하고,
울게 만든 사람이 없는지 말입니다.
누군가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혹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떠오르지는 않습니까?
오늘 아침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바로 그러한 사람들과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들에게 가서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라고 하십니다.
방금 들은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것,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마태오 복음 23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삶이 어떤 것인지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르치는 일은 잘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실행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사랑의 삶을 직접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율법의 정신인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알맹이가 빠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고 질책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즉,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말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실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고 한 말을 너희가 들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고, 바보나 멍청이라고 하고, 이웃 사람을 비난하고 헐뜯고
업신여김으로서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하고, 울도록 만들지 마라.
그리고 그렇게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용서를 청하고 화해해라.”
다시 한 번 우리 주위를 돌아봅시다.
가까운 가족에서부터 친구들, 그리고 이웃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리면서
내가 다가가서 용서를 청하고 화해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다음이 아니라 바로 오늘 그들과 화해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로 지금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를 하늘나라로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부산교구 최현욱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