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통문협 국내교류 2차 행사
(사)한민족평화통일촉진문인협회
탈북 초청문인 과의 문학 간담회
김정오
단체사진
본 협회는 2014년 8월12일 흥사단 대강당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국내교류위원회가 주관하는 제1차 행사를 2014년 10월18일 오후 5시 윤동주 땅집 문학행사로 열었다. 그리고 제2차 행사를 2014년 11월13일 11시부터 인도박물관에서 거행했다. 주제는 탈북 대표 문인 초청 평화통일을 위한 문학 간담회였다. 이번 행사를 인도 박물관에서 열게 된 것 또한 특별한 섭리였다.
인도와 한국은 건국 역사에서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현대사에서는 1947년 유엔에서 “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여 독립 정부를 세우고 미, 소 양군이 철수 한다”는 결의안이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1948년 총선을 치루기 위해 8개국(호주,캐나다,중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대표들로 유엔 조선위원단(UNCOK)을 꾸렸다. 그 총선을 감독 지휘할 대표를 인도 대표 메논(K. P. S. Menon(1898-1982)이 맡았다.
메논은 1948년 1월 8일에 서울에 도착, 총선거를 지원하고 감독(1948.5.10)하였다. 그리고 헌법을 제정(1948.7.17)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1948.8.15)태어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후원을 했다. 그는 한국의 역사를 공부했고, 여러 인사들을 만났다. 그때 여류시인 모윤숙을 만나 인간적으로 한국인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고도 말했다. 그는 간디와 타골을 존경하여 “한국에서 이 등불을 다시 켜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그리고 타고르가 극동을 방문하였을 때 한국에 보낸 시를 자주 읊조렸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빛이 되리라!
메논은 말했다. 미국은 유엔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기로 했다…반대한 나라는 캐나다와 호주뿐이었다. 인도는 두 동료(영국과 호주)나라와 뜻을 달리 미국의 편에서서 찬성하였다…그러나 ”남한의 정부는 하나의 국민정부(a National Government)라고 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한반도에 두 주권 국가가 세워진다면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 날 것이라고 걱정했다. 2년 후에 예언은 현실로 나타났다. 그는 한국 전쟁에 대해서도 말했다. “인도는 북한군대가 남한을 침략했다는 유엔 한국위원단의 보고에 동의했다. 그리고 유엔총회가 북한을 침략자로 선언하는 것을 지지하였다…“.한국전쟁 때 인도가 의무병을 보내고 포로 송환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그의 공이 컸다. 그는 이런 시구를 적고 있다.
겨울이 오면
봄도 멀리 있을 수 있을까?
이렇게 한국과 인도는 깊은 인연을 맺은 나라였다. 아니 그보다 아주 오래전부터 「가락국의 역사」에는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이 인도 왕녀였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이 책에는 허황옥이 인도의 아유타(阿踰陁)나라 공주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도박물관 관장 김양식 시인은 193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타고르 문학에 빠져 인도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의 석사학위 논문이<R. 타고르 작품에 나타난 Upanishad 사상 연구>이기도 했다. 1975년부터 인도를 드나들면서 사재를 털어 그 나라의 특산물과 문화재 급 유물들을 수집하여 인도박물관을 세웠다. 그리고 그 관장을 맡고 있다. 또 지금까지 네루대학교에 장학금을 지급하여 인재를 기르고 있다. 인도 정부에서도 그 공을 크게 인정하여 훈장도 수여했고 그 나라 대표들이 이곳을 찾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인 인연이 있는 인도박물관에서 제2차 한통문협 국내교류위원회 주최로 문학 간담회를 열었다는 것은 여러 모로 뜻 깊은 일이었다.
1부 진행은 오동춘 상임이사가 맡았다.
전덕기 이사장의 아래와 같은 인사말씀이 있었다.
오늘 이 뜻 깊은 행사를 인도박물관에서 하도록 허락하신 김양식 관장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또 그 어려운 환경에서 만난을 극복하시며 자유 대한을 찾아오신 탈북 망명 작가 국제 펜클럽 장해성 이사장님과 이지명 부이사장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행사를 축하해 주시기 위해 자리를 함께 해주신 서영득 변호사님과 한국문인협회 박성배 부이사장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또 두 번째로 이번의 행사를 열기 위해 애를 쓰신 김정오 국내교류위원장과 위원 여러분 그리고 본회 임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추운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이 자리를 빛내주신 차영호 시인과 김영순 북한 여성위원장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한민족이 오랜 분열 상태로 지쳐 있는 이 때, 우리는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외쳐대면서도 그 길은 요원하고 막막한 실정이니 어서 통일의 방향을 찾기 위해 우린 오늘도 모였습니다. 두 연사님들의 강의가 통일을 앞당기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 2014.11.13. 한민족 평화통일 촉진 문인협회 이사장 전덕기
인사 말씀을 하는 전덕기 이사장
2부 순서는 김정오 국내 교류위원장의 진행으로 내빈 소개에 이어서 서영득 변호사의 축사와 김양식 인도 박물관당의 축시가 있었다.
강연회를 진행하는 김정오 위원장
서영득 변호사의 축사
안녕하십니까, 서영득 변호사입니다. 오늘 사단법인 한민족평화통일촉진 문인협회 국내교류위원회 주관으로 탈북 문인 몇 분을 초빙하여 강연회와 문학 간담회를 갖는 귀한 자리에 제가 참석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전덕기 이사장님, 그리고 김정오 위원장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이 모임은 앞으로 번창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 동포 모두 모두가 통일을 염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마는, 변하지 않는 북한을 보며 또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가들의 자국이익만을 추구하는 행태를 보며 과연 한반도 통일은 실현될 수 있는지에 회의를 갖는 사람도 나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분단의 아픔이 70여년에 이르고 있으며 너무나 상이한 문화와 환경이 조성되어 통일의 길은 험하고도 험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언어를 쓰고, 같은 역사와 전통을 가진 우리 민족은 비록 총부리를 겨누고 전쟁을 한 아픔은 있다고 하더라도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로 합쳐질 가능성이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문학을 통한 이질성 극복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여기 계시는 문인 여러분과 탈북문인 여러분의 역할은 지대하다 할 것입니다. 탈북 문인 여러분이 오랜 단절의 체제를 벗어나 여기까지 어렵게 오셔서 이런 좌담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행운이며, 우리로서는 그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보배라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만난 어떤 외국인이 저에게 왜 한국은 많은 동족이 죽어간 6・25 전쟁과 오랜 분단의 아픔을 겪었음에도 이를 직접적으로 다룬 세계적 문학작품이 없는지 물었습니다. 이런 아쉬움을 해결해 주실 분들이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이라 생각합니다.
분단의 아픔과 6・25전쟁의 참화, 이데올로기의 대립, 잃어버린 간도,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독립투사 등, 우리가 발굴하여 문학의 소재로나 분단 극복의 요인으로 활용할 내용은 무궁무진하다고 봅니다.
오늘 좌담회가 횟수를 거듭하면서 더욱 이해력이 높아지고 주변에 널리 파급되어, 통일의 염원을 하루라도 빨리 당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일일 것입니다.
오늘 훌륭하신 문인 여러분들 앞에서 주제넘은 말씀을 드린 것은, 여러분들이 하시는 일이 너무나 고결하고 중요하며 남들에게 모범적인 일임을 여러분들만 자축하기가 너무 아까워 오히려 저와 같은 과문한 사람마저도 함께 축하하러 온 것으로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한민족 평화통일촉진 문인협회 국내교류위원회가 날로 발전하여 세계적인 단체로 거듭나고 한민족 통일에 큰 기여를 해 주시리라 확신하며 오늘의 간담회를 다시 한 번 축하드리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2014. 11. 13. 서 영 득 올림
서영득(徐泳得, 1959년~)변호사,
아메리칸대학교(American University) 대학원 법학 석사,서울대학교 법과대학원 박사과정,
전 대한민국 공군 법무관 대령, 국가보훈처 보훈심사위원, 안중근의사 숭모회 자문위원, 대통령실 행정심판위원, 대한민국 국방부 검찰단 초대 단장, 법무법인 충무 대표변호사, 한국항공대학교 객원교수. 보국훈장 삼일장을 수여. 대한변호사협회 이사, 저서: 변화 한뼘, 희망 두뼘 외
축사를 하는 서영득 변호사
이어서 인도 박물관 관장 김양식 시인께서 아래와 같은 축시를 읊어 감동을 주었다.
우리의 하늘은
初荑 김양식
우리의 하늘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땅도 하나입니다
누가 그 하늘을 가를 수 있으며
누가 그 땅을 가를 수 있으리까
거기, 산 노루 반달곰 또 두루미떼도
모두 자유로이 남북을 넘나들거늘
어찌 5천년 지켜온 백의민족의
그 땅 허리에 금을 긋고 오가지도 못하는
이런 원통한 땅이 또 있으리까
우리 부질없는 과욕도 탐욕도 다 버리고
통일을 향한 진정 뜨겁고 뜨거운 염원으로
횃불에 불 당겨 환히 환히 밝히소서
하나 뿐인 우리의 하늘을-
하나 뿐인 우리의 땅을-
김양식 시인약력
1931년 서울 생. 이화여대 문리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졸업. <R. 타고르 작품에 나타난 Upanishad 사상 연구>로 석사학위 받음. 국제시인의회 아카데미에서 명예문학박사 받음.
시집-<井邑後詞>, <初荑詩集>, <숫고양이 한 마리>, <새들의 해돋이>, <서초동참새>,<겨울로 가는 나무>, <하늘 먼 자락에 구름 날리면>, <아, 어머니>시선집 <풀꽃이 되어 풀잎이 되어>, 장편서사시집 <기치부인전> 등이 있다.
인도박물관장 김양식 시인의 축시 낭송
망명 북한 국제펜클럽이사장 장해성님과 부이사장 이지명님의 강연은 아래와 같다.
북한 김정일 시대 문학과 김정은 시대 문학
장해성
망명 북한 국제 펜클럽 이사장
북한 김정일 시대 문학
김정일 시대 문학의 일반적 특성
0 김일성의 위대성을 최대로 과장 확대함으로서 그 누구도 최고 권력을 감히 넘볼 수도 없게 한 것이다. 사실 김일성은 혼자만 항일한 것도 아니고 또 동북항일연군에서도 어떤 책임적인 위치에 있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북한에서 김정일 시대 문학이 열리던 시기로 보면 아직 많은 정적들이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뿌리 단계에서 원천적으로 짓밟기 위해 김정일은 의도적으로 김일성 우상화 작업에 총역을 다하였다. 총서 “불멸의 역사”의 속편들, “혁명의 여명” “닻은 올랐다” “근거지의 봄” “고난의 행군” “1932년” 등과 영화 “민족의 태양” “조선의 별” 속편들이 소설, 영화들의 하나같이 김일성의 혁명 활동을 최대한 우상화하는데 총역을 다하였다..
0 북한 전체 인민대중도 김부자에게만 충성하도록 하는데 총력을 다했다.
“피바다” “한 간호원에 대한 이야기” “밀림아 이야기하라”“당의 참된 딸”“평양시간” “언제나 한마음” “한 당 일군에 대한 이야기” “이 세상 끝까지” 등에서 노동자, 농민 뿐 아니라 인민군 전사에 이르기까지 김일성에게 충성 다할 때에만 진정한 삶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실례 “이 세상 끝까지”
1957년 12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일성이 남포로 현지지도 나가게 되었다. 강서군 태성리 선거장을 지나다 김일성이 거기에 잠깐 들렸는데 마을에 사는 한 늙은이가 김일성을 우러러 말한다.
...수령님 얼굴이 많이 축 간 것 같다. 종파 놈들이 어쩌고 저쩌고 하여도 우리가 이기지 종파 놈들이 이기겠는가 우리는 수령님만 따를 것이다. 김일성이 거기서 큰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때로 말하면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가 있었고 그 여파에 의해 북한 국내에서도 김일성 일인독재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있었다. 이를 포착한 김일성이 1956년 8월 그리고 1958년 3월 두 차례에 거친 무자비한 숙청을 벌리었다. 이에 당내에서 심각한 불화가 조성되었고 김일성 자신도 위기 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런 때에 태성할머니 같은 어느 촌부의 속없는 푸념이 김일성의 가슴에 큰 힘을 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월이 어떻게 변해도 김일성만 따라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0이와 함께 김일성 우상화 그늘 속에서 서서히 김정일 자신의 우상화를 실현 한 것이다. 김정일은 절대 처음부터 자신에 대한 우상화를 실현하지 않았다. 1980년대 중후반에 들어가서야 장편소설 “아침해”를 시작으로 자신에 대한 우상화 막을 열었다. 이후 김정일은 당의 위대성을 선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에 대한 우상화에 본격적으로 매달렸는바 90년대에 들어서는 완전히 광난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가사 “정일봉의 우레소리”이다
정일봉에 우레우니 천하가 우르릉
먹구름이 갈라지고 불벼락 쏟아진다
김정일 장군님 불호령 소리에
천지가 뒤흔든다...
우레소리 우레소리 정일봉에 우뢰소리
2. 김정은 시대 문학
김정은 시대 문학의 일반적 특성
0 김정은 시대 문학의 일반적 특징은 김정일 시대 문학을 거의 그대로 모방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김정일의 위대성을 최대로 확장 부각시킴으로서 김정은 체제의 당위성을 선전하는 것이다. 김정일이 제 애비 김일성의 총서 “불멸의 역사”를 내놓게 하였던 것처럼 김정은도 총서 “불멸의 향도” 속편들을 내놓게 하였다. “불멸의 향도” 그 속편들만 “전환의 연대” “평양의 봉화” “강계정신” “서해전역” “전환”등을 비롯하여 수 십 편의 장편소설들이 나왔다. 시, 소설, 수필 등은 현재 조선문학 등에서 나오는 거의 모든 작품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0 김정은 시대 문학에서 많은 점들은 김정일 시대 문학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만 일부 차이나는 점도 부정할 수는 없다.
-첫째 차이점은 김정은 자신에 대한 우상화를 제 애비 김정일에 비해 훨씬 속도 있게 추진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김정일은 1974년 후계자로 되었지만 직접적으로 자신에 대한 우상화는 1980년대 중후반 장편소설 “아침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정은은 그 자신이 정치적 무대에 등장하는 것과 거의 때를 같이 하여 “발걸음”이란 노래를 내왔고 현재는 이미 완전히 광난적 우상화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
-시
“위대한 그 이름은 승리의 기치” 라는 노래 가사이다.
태양조선 3천리에 빛나는 이름
인민들의 마음속에 친근한 이름
사랑으로 온나라를 보살펴주고
사랑으로 일심단결 화원 가꾸네
우리의 김정은 동지 그이는
우리 조국 위대한 이름은 승리 승리의 기치
조선문학 2014년 5월호에 난 시 “백두산의 메아리”라는 시다.
감격의 화산이 터져 올랐는가
환희의 열풍이 싣고 왔는가
백두산마을 삼지연 땅에 울려 퍼지는
감격의 환호성 기쁨의 환호성
이 역시 김정은을 직접적으로 우상화한 시다.
-소설
김일성, 김정일 시대 문학과 분명한 차이를 두려한다는 것이다.
2014.5월 조선문학에 실린 한철순의 단편소설 “화창한 봄날의 이야기”
0 간단한 내용
김정일이 농업성으로부터 한 건의 소송을 보고받는다. 덕산군 명지협동농장 김송순에 대한 자료이다. 김송순은 이 협동농장에 있는 김일성 교시 사과나무를 찍어내고 새로운 사과나무를 심었으며 또 백 정보의 농토에 제 멋대로 과수원을 조성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당연히 심각한 문제이며 법대로 하면 이는 매우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된다. 하지만 김정일은 그에 얽힌 구체적 사연을 알아보고 김송순의 모든 죄과를 감면해 줄 뿐 아니라 훌륭한 일군이라고 내 세운다는 내용이다.
물론 북한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서 아무리 김일성의 교시한 과수나무라 하여도 늙고 쓸모없게 되면 과감하게 도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즉 자신은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여 최고 독재자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지난 독재자들의 구태에 얽매이지만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총체적으로 볼 때 김정은 시대 문학은 김정일 시대의 문학이며 철저하게 우상화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장해성-망명 북한 국제 펜클럽 이사장
1972-1976 김일성 종합대학 철학부 졸업
1976-1996 북한 조선중앙 텔레비죤 기자, 작가
1996-5 대한민국 입국
1996.10-2006.10 국가안보정책연구소 연구위원
1012.8-현재 망명 북한 국제 펜클럽 이사장
강연을 하는 장해성-망명 북한 국제 펜클럽 이사장
북한문학의 전통 작가에 관한 몇 가지 해설
이지명;
국제pen클럽망명북한작가센터부이사장
<1> 북한문학의 전통
북한문학에 관한 정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대한민국에서 논의되어 왔던 문제입니다.
저는 직접 그 사회에 몸을 담그고 창작생활을 해 온 일원으로서 몇 가지 문제만 말씀드리려 합니다.
일명 많은 전문가들은 북한문학이 러시아 문학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고 또 일제강점기에 활발하게 진행됐던 카프문학의 정통을 계승했다고도 합니다.
러시아는 10월 혁명이후 레닌을 위시로 한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한 결과 수많은 나라들을 통합해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맹을 결성했고 동구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과시했습니다.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혁명승리 후 집단경영제로 하여 소비에트정부는 국민들을 집단주의 정신, 사회주의 애국주의 정신으로 계몽해야 했고 따라서 문학도 정부의 시책과 그에 따른 국민적 정서에 동참해 사실주의적이며 애국적이고 프롤레타리아적인 창작이 진행되었습니다.
북한문학 역시 이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식민지적 나라의 현황을 놓고 독립정신과 애국주의 그리고 나라 없는 백성의 설음을 있는 그대로 작품에 녹여낸 카프문학의 전통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70년에 들어서면서 그해 북한은 사회주의 공업화실현을 세계에 공표하면서 정권은 새로운 경지의 독재체제완성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6-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북한사회 어느 곳에서든 카프문학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강경애의 인간문제, 최서해의 탈출기를 비롯해 현대 조선 문학 전집이 많이 출간되어 있었고 일제식민지의 우리나라 농민 역사를 그려낸 작품들인 리기영의 “땅,” “두만강,” 그리고 김일성을 칭송해 1953년에 출간된 한설야의 “역사” 같은 장편소설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한설야의 ‘역사’ 같은 소극적인 칭송작품을 가지고서는 변화되는 주민정서를 하나로 이끌어가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근대의 폐쇄된 정치구조와 경제전망에 의거해서는 번영의 길을 탄탄하게 역을 수 없다는 논리 속에 김일성체제에 반기를 든 많은 개혁파들을 잔혹하게 제거한 직후여서 그 후열이 나라전반에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반적이고 객관적 현실을 독재체제강화의 암으로 생각한 사람이 바로 김정일이었습니다. 1968년에 직접 작성한 당의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원칙을 1970년초부터 전민의 사상 및 생활의 준칙으로 내세웠고 이를 조금이라도 어겼을 때는 본인은 물론 가혹한 연좌제로 탄압했습니다. 실제로 북한에서 헌법보다 더 위력을 나타낸 것이 바로 10대 원칙이었습니다.
김정일은 이 시기에 군중계몽에 무엇보다 큰 역할을 감당할 수단으로 다름 아닌 문학예술 창작에 집중적 관심을 돌렸습니다.
1970년 11월 당5차 대회 이후 김정일의 발기에 의해 피바다 가극단이 조직되고 혁명가극 피바다가 창작되었고 1971년에는 꽃파는 처녀가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후 한 자위단원의 운명, 밀림아 이야기하라, 당의 참된 딸 등 북한에서 5대 가극으로 불리는 뮤지컬이 창작되었고 이것이 곧 소설, 영화로까지 만들어졌습니다.
말하자면 문학예술로 전 군중을 수령주의로 무장시키고 우상화를 추진시키는 대 선전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김정일은 이러한 선전을 민족문화전통의 방향을 돌리는 거대한 사업으로 추진시키는 원동력으로 삼았습니다. 위에서 말한 듯이 러시아문학과 카프의 전통으로부터 탈피하고 보다 업그레이드 된 새 전통을 마련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항일문학의 전통입니다. 항일문학전통론이 나오면서 북한교육현장에서는 우리나라 민족역사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명인으로 학생들에게 열려지던 역사 영웅들이 하나 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이순신, 강감찬, 을지문덕 등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켜 싸운 민족의 영웅들의 이름을 그대로 배워주면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에 흠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초등학교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역사 대신 김일성의 위대성을 선전하는 내용으로 가득 찼고 대학졸업시험에는 김일성 혁명사상노작과목이 국가시험문제로까지 등재되었습니다.
<2> 북한문학의 새로운 전통
항일의 전통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민족역사의 뿌리로 새롭게 부각시키는 일입니다.
김일성을 민족재생의 근원으로, 위대한 민족의 영웅으로 추대하고 그 우상화의 새로운 경지를 뿌리로부터 마련하기 위한 사업이 바로 이때부터 본격화되었습니다.
그 첫 공정이 다름 아닌 문학과 예술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총서 불멸의 역사의 연작으로 고난의 행군, 준엄한 봄, 1932년, 등 김일성의 위대성을 칭송한 수십 편의 장편이 나왔고 잇달아 같은 형식의 영화 가극 연극들도 많이 창작되었습니다. 영화로는 바로 시리즈로 된 조선의 별이며 같은 형식의 시리즈물인 민족의 태양의 속편들이었습니다.
김정일은 당시 인민대중의 교양수단으로 가장 위력한 수단으로 영화를 꼽았습니다. 90분, 아니면 120분간 상영되는 화면을 통하여 예술적 화폭으로 군중을 감동시켜 정서적으로 교양하는 영화야말로 대중교양의 위력한 수단이며 영화예술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수령께 충직한 혁명전사라며 명예칭호와 훈장, 메달을 아끼지 않고 내 주었습니다. 1980년 당 제6차 대회를 전후로 그러한 대중교양사업이 수위가 넘치는 물처럼 사회를 완전히 지배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수령을 형상한 영화 한편이 나오면 전민이 조직별로 무조건 관람하게 하고 감상문을 쓰게 하고 또 각이한 형식으로 충성 결의 모임을 하게 합니다.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직한 혁명전사가 되자는 내용의 결의 모임은 북한 전 주민의 의식을 바꿔 놓는데 거대한 효력을 본 것도 사실입니다.
북한에 널리고 널린 노래를 모으면 그 99퍼센트가 모두 수령을 칭송하고 충성하자는 내용의 노래입니다. 단 1퍼센트 정도가 민요나 생활노래라고 보면 정확할 것입니다. 80년대 중반 경에는 시리즈 (민족과 운명)이란 영화를 제작하며 그때부터 북한에는 김일성민족이라는 용어가 자연히 사람들 속에 퍼져가게 되었습니다. 민족의 원조는 단군이 아닌 김일성이란 해괴한 논리가 전 사회를 지배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런 사업이 심화되면 될수록 북한 사회는 김일성 김정일에 대해 열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학으로부터 시작한 인민세뇌정책은 강력한 통제와 처벌로 하여 빠르게 진행되었고 또 공고화 되었습니다. 그러한 반증은 지정된 영화를 보고 그 감상평을 하는 데서도 여실히 나타났습니다. 북한에서 만든 항일영화나 전쟁물 영화들을 보면 자폭하는 장면들과 적들에게 잡혀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사형당하거나 자결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죽으면 죽을지언정 신념을 버리지 않는 혁명 전사들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일관된 내용이었습니다. 지난 6,25전쟁 당시 적진지를 향해 비행기를 몰고 자폭하는 장면에서 폭발직전 조종사가 조국만세를 불렀는데 이를 본 관람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시대에 떨어진 낙후한 영화라고 비평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염두에 둔 마지막순간의 만세는 조국만세가 아니라 바로 김일성장군만세를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군중평가만 봐도 당시 예술에 의한 북한주민들 세뇌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문물의 반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내부에서의 조직화된 군중교육과 교양의 수위가 이처럼 감성과 감흥을 중심에 둔 문학예술이란 수단을 이용하였기에 인민의 세뇌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지금껏 파쇼정권이 아무 일 없이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북한 정권은 단순 정권만이 아닌 민족을 구원하고 민족을 승리와 번영에로 이끄는 위대한 수령이라는 이 논리는 수십 년 간 북한 주민들을 세뇌시켜 마치 제왕처럼 신처럼 각인되어 무조건 받들고 우러르는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3> 문학 예술인들의 위치와 사명, 그리고 탄압
나는 북한에서 군인으로 1972년에 작가로 데뷔했습니다. 병사생활 때 쓴 한 편의 단막극이 인민군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무대에까지 올라 특등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때 쓴 작품을 생각하면 나 역시 북한독재체제를 찬미한 역사의 죄인이란 생각에 얼굴을 붉히기도 하지만 당시는 마치 하늘의 별을 잡은 것 같은 환각에 빠져 스스로 자신을 우러르기까지 했습니다. 이후 제대되어서도 칭송과 우상작품에 몰두했고 그중 몇 편은 영화로까지 만들어지기까지 했습니다.
북한에서 문인이라면 아주 특별한 사람이며 어디가나 우대 받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문학예술은 직업의 아닌 혁명사업이라는 김정일의 지적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작가 예술인은 혁명가였고 최선두에서 당의 사상과 방침을 관철하도록 군중을 교양 발동하는 선봉대였습니다. 북한에서 작품은 독자가 평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에서 평합니다. 엄격한 국가검열과 심의에 의해 출간되거나 신문과 잡지에 실리는 만큼 정권의 노선에 어긋난 사소한 묘사도 절대 허용되지 않습니다.
작가는 작가의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작품에 옮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 정권의 눈으로 본 것을 작품에 옮겨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늘 당 정책학습과 문예부문에 준 김일성과 김정일의 가르침을 공부해야 합니다. 발표문 한 장을 써도 소위 교시라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말을 인용하고 전개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건 당 대열에 끼어든 반당분자에 불과합니다. 작품 역시 정권의 내 놓은 정책적 문제에 입각하여 쓰이지 않는 다면 책이 출간되지 못할 뿐 아니라 작가자신은 반당분자로 몰려 처벌을 당해야 합니다.
60년대에 북한의 이름 있는 작가 천세봉은 장편 안개 흐르는 새 언덕을 내 놓았다가 혁명화로 수년간 경직당한 일도 있습니다. 소설에서 그는 세 가지 당의 군중노선을 위반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 없는 깡패출신을 등장시켰다는 것이고 둘째는 소자산계급출신을 완전 적대계급으로 내버렸다는 이유였습니다.
주인공 강민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깡패입니다. 그런 그가 혁명의 영향을 받아 일제시기 반일성전에 나서게 되고 그 과정에 한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여자의 아버지는 당시 의사였습니다. 의사는 북한정권이 규정한 계급성분에서 내치지 말고 함께 손잡고 가야 할 계층입니다. 그런데도 강민호는 삶의 우여곡절 끝에 끝내 의사의 딸 순영이와의 사랑을 결속 짓지 못하고 다른 여인에게 사랑을 구애합니다. 여기엔 적대계급인 지주의 아들과의 삼각관계도 등장합니다. 순영이를 탐낸 지주아들 한달수의 권모술수에 의해 순영은 마침내 강민호를 떠나 한달수의 아이를 가지게 됩니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강민호가 살아있으나 현실적 압박감으로 결국에는 한달수와 동거하게 되는데 이러한 설정은 당의 군중노선을 심히 왜곡한 것으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손잡고 가야 할 계급을 적대계급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이 엄중한 문학적 과오 앞에서 작가는 마침내 교양대상이 되어 정치적심판대에 서게 되었고 오랜 기간 탄광 지하 막장에서 노동을 통해 자신을 단련해야만 했습니다. 북한에서 이름 있는 김철 시인도 전쟁 염세주의 냄새가 나는 시 (군복단추) 때문에 10년 동안 아오지 탄광에서 육체노동을 강요당하기도 했습니다.
필자 역시 출신성분으로 하여 인정을 받지 못했고 하고 싶은 문학공부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문학과는 인연도 없는 지질대학졸업생입니다. 물론 야간으로 사범대 어문학부과정을 간신히 마치긴 했지만 돌아보면 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재주는 없어도 천성인지 글을 쓰고 싶어 동분서주했으나 북한 사회기준으로 볼 때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나은 출신이어서 좋은 작품을 내놔도 인정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좋은 출신이었으면 저는 북한 작가들이 그처럼 열광하는 명예칭호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역작가로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쓴 작품이 시나리오작가에 의해 영화화 되고 그 영화가 지정영화로, 인민계관상 작품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원작자인 저는 이름 석 자도 못 내고 오히려 감시 대상으로 한쪽 구석에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물론 그러한 계기가 있어 지금 제가 한국에 왔고 오늘 이렇게 마음 놓고 발표도 할 수 있었겠지만 그때는 참으로 암담했고 나에게 글을 쓰는 취미를 준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문인으로 정권의 바라는 대로 좋은 작품을 만들었으면 그것이 곧 충신이 할 바를 한 것으로 평가돼야 했지만 출신이 나빠 위축돼야 한다면 그건 참 불공평한 것이 아닙니까? 만약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한 마디라도 불평을 내 뱉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북한에는 이런 원칙이 있습니다. 어떤 창조물이던 세상에 내놓아 보수가 없거나 그것이 타인의 이름으로 나갔다 하더라도 그것이 수령과 당에 기쁨을 드렸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어떤 평가나 인정을 받으려 하고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불평을 한다면 그건 당의 사상으로 무장하지 못한 한심한 사람으로 평가된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오늘 이 자리에서 문학 그 자체를 정권의 부속물로 만들고 노선의 선전매체로 만들어 버린 북한에는 진정한 문학이 없음을 감히 말하게 됩니다. 작가는 작품으로 군중을 체제의 사상으로 무장시키는 기구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하는 표현이 매우 적절한 표현임은 재삼 말하게 됩니다. 따라서 현재의 북한에는 문학이란 없다고 단언합니다. 저는 오늘 이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음을 말씀드립니다. 재능 있는 작가들은 많으나 그들의 필봉은 잣대에 의해 움직이는 로봇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문학에 의한 향유도 없습니다. 만들어낸 충신과 위인에 열광하고 그들처럼 살아야 하는 북한의 모든 주민들과 작가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는 매우 의미 깊은 이 순간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2014, 11월13일 이지명
강연을 하는 이지명 국제PEN클럽 망명북한작가센터 부이사장
이지명: 국제PEN클럽 망명북한작가센터 부이사장
청진 제1사범대학 어문학부 졸업, 중앙 지질대학 졸업,조선작가동맹 작가(희곡),국제PEN클럽 망명북한작가센터 부이사장,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통일문학포럼 이사, 망명 작가 펜 문학지 편집장, 북한민주화위원회자문위원. 통일안보 강사.2008년 장편소설 (삶은 어디에) 발표, 2009년 1월 KBS라디오극장 드라마(31부작)로 방송, 통일한국, 통일시대, 고정필진 *소설 (삶은 어디에)(한국문단데뷔작),2009년 1월 KBS라디오극장 드라마(31부작)로 방송, 동리목월문학지와 pen문학지에 단편소설 파괴의 현장, 환멸, 복귀, 안개 등 다수 발표
강연이 끝나고 조성국 시인과 차영호 시인의 통일에 대한 열망이 담긴 시를 읊었다.
무슨 바람 불어야
-철의 장막 앞에서-
조성국
무슨 바람 불어야 이 장벽이 무너질까?
어떤 바람 불어야 이 분계선 지워질까
파란 눈 땅뺏기노름에 땅을 치는 한 백년
봄바람 이어불면 옷 벗는다 하더니
탐욕의 뿌리 박혀 굳어버린 칠십년
내 체제 고집을 하다 눈이 멀어 버렸구나
그리다 기다리다 별로 뜨신 님들 앞에
십자가나 붙들고 눈물짓는 아빠 엄마
모두가 더부살이라 묻고 싶은 현주소
믿을 곳 하나 없는 오늘을 또 읽습니다.
장닭 울음 뒤에 새벽소식 없는 오늘
금단의 매듭지은 사람 풀어줘야 하나 되리
별 하나를 그리던 윤동주를 생각는다
별빛 나린 언덕에 이름 석 자 묻고 간 님
한 겨울 다 지난별을 안고 기다리는 봄소식
조성국 시인의 찬조시 낭송
탈북 문인대표 초청 문학 강연을 듣고
志松大岩 車 永 浩
북한은 이념으로 예술을 잃었으며
한은 자유로워 이념을 잃었도다
땅덩이
갈라지더니
사람마저 달라졌다.
분단의 아픔이여 통일의 염원이여
비극은 이어지고 원한은 쌓여간다
문학도
권력자 앞에
갈길 조차 잃고 있다.
풍선을 띄워본들 전단을 보내본들
아성이 무너지랴 체제가 붕괴하랴
오늘도
타오르는 불
검게 타는 가슴이여.
탈북 문인대표 초청 문학 간담회
차영호 시인의 찬조시 낭송
이렇게 강연과 찬조 시 낭송이 끝나고 이어서 간담회를 시작했다.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신 박성배문협부이사장 강연을 듣고 있는 회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