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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2월 17일(火)
[1971년] 한필성ㆍ필화 남매, 국제통화 실현
← 1972년 2월 15일, 한필화씨의 오빠 한필성씨가 가족들과 함께 북녘 땅을 바라보고 있다.
“필성 오빠, 필성 오빠” “필화야? 필화야?” 1971년 2월17일, 한필성ㆍ필화 남매가 일본 땅에서 20년 만에 애끓는 목소리를 주고받았다. 같은 도쿄 하늘아래에 있었지만 분단의 장벽은 둘의 만남을 허용하지 않았다.
한필성씨가 전화로나마 동생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한계화라는 또 다른 분단의 희생자가 있어 가능했다. 자매가 아닌 것으로 판명됐지만 삿포로 동계올림픽에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로 출전한 필화가 자신의 동생이라고 주장하는 한계화씨 사연이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필화씨 사진이 신문에 실린 것이 결정적이었다.
필화가 자신의 친동생임을 확신한 한필성씨는 곧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ㆍ4후퇴 때 18세로 고향인 평남 진남포를 떠난지도 벌써 20년이 지났으니 30세가 됐을 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나 동생과의 만남은 북한 조총련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했고, 우여곡절 끝에 아사히 신문이 둘의 통화를 주선함으로써 동생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 만족해야했다. 남매는 다시 통한의 19년을 기다린 끝에 1990년 3월8일 일본에서 재회했다. /조선
[1988년] 남극 세종과학기지 준공
남극지역의 대기, 지질, 동식물 분포, 천연자원 등을 조사할 남극 세종과학기지(世宗科學基地, Korea Antarctic Research Program)가 1988년 2월 17일 준공됐다.
‘대한민국 남극 세종과학기지’가 정식 명칭인 세종기지는 420평 규모이며 남셰틀랜드 군도에서 제일 큰 섬인 킹조지 섬에 위치하고 있다. 남미끝에서 1200Km, 서울에서 직선거리로 약1만7천Km 떨어져 있는 남위 62도5분, 서경 58도45분으로 한국과는 지구의 거의 반대편이다. 남극은 천연가스, 석유, 철광석 등 막대한 양의 천연자원과 크롤새우 등 수산자원이 풍부하고 기상학, 생물학, 지구물리학 등 기초과학 분야의 거대한 실험장이란 점에서 세계각국이 앞다투어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조선
[1993년] 국립민속박물관, 옛 중앙박물관터로 이전 개관
국립민속박물관(國立民俗博物館, National Folk Museum)의 연혁을 보면, 8·15광복과 함께 송석하(宋錫夏)의 노력으로 개관되었던 남산민족박물관이 1950년 국립박물관으로 흡수된 후, 16년 만인 1966년 10월 4일 문화재관리국(文化財管理局)에서 경복궁 수정전(修政殿)에 1600여 점의 민속자료를 수집하여 임시 기구로 민속박물관의 개관을 보았다.
1975년 4월 11일 경복궁 내 전 현대미술관 건물을 수리하여 문화재관리국 산하의 국립민속박물관으로 발족 개관하였으며, 1979년 4월 13일 국립박물관 소속으로 직제가 개정되었다. 1982년 옛 중앙박물관 건물로 이전하고, 1992년 시설공사를 벌여 지하 1층, 지상 3층에 옥탑층을 갖춘 건물로 단장하여 1993년 2월 17일 개관하였다. 2004년 현재 1만 6000여 점의 민속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naver
[1877년] 프랑스의 정치가 마지노(Maginot, André) 출생
← 마지노
1877. 2. 17 ~ 1932. 1. 7
프랑스가 독일의 침공을 막기 위해 구축한 방어선인 마지노 선(Maginot Line)은 그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마지노 선 때문에 프랑스는 느긋한 자기만족에 빠지게 되었고, 프랑스의 이같은 태도는 아돌프 히틀러가 1933년 권력을 잡은 뒤 독일을 재무장하게 하는 주요인이 되었다.
원래 공무원이었던 그는 1910년에 프랑스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3년 뒤에는 육군부 차관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사병으로 입대했고, 전투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평생 동안 불구로 살아갔다. 그는 1915년에 정계로 돌아와 1920년대에 식민장관·원호처장관·육군장관으로 일했다. 다시 시작된 독일의 공격을 막기 위해 프랑스 북동쪽 국경을 따라 방어진지를 건설해야 한다는 마지노의 거듭된 주장은, 그가 2번째로 육군장관에 임명된 1929년에야 비로소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육군장관으로 일하는 동안 그는 군대를 개편하고 프랑스 북동쪽 국경에 이른바 마지노 선을 구축하는 일을 감독했다. 그는 1932년에 죽었지만 그의 방어선 건설계획은 계속 추진되어 1938년에 완결되었다. /브리태니커
[1856년] 독일의 시인 하이네(Heine, Heinrich) 사망
← Heinrich Heine by Moritz Daniel Oppenheim.
1797. 12. 13 ~ 1856. 2. 17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1856년 2월 17일 사망했다. 향년 59세였다. 1797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난 하이네는 일찍이 본-괴팅겐-베를린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젊은 시절 그의 주된 관심은 문학이나 저널리즘에 있었다.
1822년 처녀 시집 ‘시집(Gedichte)’을 출간하고 1827년에 시집 ‘노래책(Buch der Lieder)’을 냈을 때 하이네의 명성은 이미 전 독일에 퍼져 있었다. 하이네는 프랑스의 1830년 7월 혁명에 영향을 받아 급진적 문학운동을 벌인 ‘청년 독일파(Das junges Deutschland)’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1835년 독일 의회는 이들 급진적 문학 그룹의 집필을 금한다고 결의했는데, 집필 금지 작가들의 명단 맨 앞에 하이네가 있을 정도였다.
하이네가 1830년대 후반 파리에 정착하게된 배경도 파리의 혁명적 분위기가 그를 매료시킨 탓도 있지만 ‘청년 독일파’가 독일에서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844년 조국을 그리워하며 파리에서 쓴 ‘독일, 겨울 동화(Deutschland, ein Wintermarchen)’는 조국의 어두운 현실을 한탄하며 쓴 혁명적 장편 서사시다. /조선
[1450년] 조선 제4대 왕(재위 1418∼1450) 세종(世宗) 승하
← 세종 영정, 경기 여주군 영릉전시관 소장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이 1450년 2월 17일 5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2살이던 1408년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16살인 1412년에 충녕대군(忠寧大君)에 진봉되었으며 22살이던 1418년에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에 아버지인 태종(太宗, 1367~1422)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우선 국가체제를 완성해 창업의 대업을 매듭짓는 일이었다. 문물제도의 정비와 유교국가로서의 정체성 확립이 그것이다. 따라서 세종2년(1420)에 정책연구기관인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해 인재양성과 학술진흥에 주력했으니 조선에 맞는 문물과 제도를 창안하기 위해서도 옛 제도를 연구해 참고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수많은 인재가 양성되었고 이들이 추진력이 돼 조선전기의 찬란한 문화를 이룩해낼 수 있었다.
더구나 이 시대에는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허조(許稠) 등과 같이 학덕을 겸비하고 균형감각있는 중후한 인물들이 세종의 태평성세를 보좌하였다. 이들은 모두 청백리에 오를 만큼 청렴결백한 인물들이었고 서로 절친한 친구 사이로 상호협력의 정치풍토를 일궈내었다. 또한 집현전을 중심으로 국가경영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해 각종서적을 편찬했다. ‘치평요람(治平要覽)’을 비롯해 유교윤리의 실천서인 ‘삼강행실(三綱行實)’, 전 왕조인 고려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고려사(高麗史)’와 천문 지리 의서 농서 등의 기술서를 출판해 통치의 기초로 삼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그의 업적은 한글창제에 있다. 당시의 지식인들이 세계문자인 한문을 공부해 우리글을 창제 보급한 문화정책은 세종대왕의 애민정신(愛民精神)의 소산이며 문화의 대중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또한 한글 창제원리의 우수성은 민족문화 고양이라는 차원을 넘어 세계문화의 제고에 기여한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조선
[1909년] 인디언 최후의 전사 제로니모 사망
← 인디언 최후의 전사 제로니모. 미 서부 개척시대의 한 상징이었다.
1829. 6 ~ 1909. 2. 17
‘인디언 최후의 전사(戰士)’ 제로니모가 1909년 2월17일, 포로로 구금돼 있던 미국 오클라호마주의 포트실 요새에서 80세로 숨졌다. 이로써 처절했던 인디언 항쟁사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하품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고야틀라이가 원래 이름이었지만, 멕시코 군인들이 기독교 성자 세인트 제롬을 닮았다고 ‘제로니모’로 부르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제로니모가 전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와 처, 3명의 자식들이 멕시코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하고부터였다. 이때 보인 용기와 결단력으로 그는 아파치족 한 분파인 치리카후아족의 추장으로 우뚝서게 된다. 19세기 후반 지금의 애리조나주와 뉴멕시코주 등 멕시코 접경지역에 주로 살았던 아파치족은 백인들이 “아파치와 싸우느니 차라리 애리조나를 그들에게 줘버리자”고 할 정도로 용맹한 부족이었다.
남북전쟁 뒤 시작된 미국의 서부개척은 인디언들을 강제로 ‘보호구역’에 몰아넣었지만 낯선 땅에 적응하지 못한 인디언들은 수시로 무력항쟁을 시도한다. 대표적인 싸움이 1876년 6월 수우족(族) 추장 시팅 불이 이끄는 인디언연합군이 미 제7기병대를 격파한 리틀빅 혼 전투. 제로니모도 보호구역으로부터 탈출과 체포를 반복하며 미국의 남서부지역을 혼란에 빠뜨렸다. 5,000명의 기병대가 5개월동안 2,600km나 추적했지만 신출귀몰하는 그를 잡지 못해 기병대가 오히려 공포에 떨어야 했다. 1886년 8월 마지막으로 체포됨으로써 ‘전사’ 제로니모도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갔다. /조선
[1972년] 닉슨, 중국 방문
← 닉슨(1970)
1972년 2월 17일 미국 닉슨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순방길에 올랐다. 닉슨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 밑에서 8년 동안 부통령을 역임한 뒤 1968년 대통령 선거에서 허버트 H. 험프리를 누르고 제37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 인플레이션 등으로 국정 운영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21년 동안이나 소원한 관계에 있었던 중국과 대화를 재개해 1972년 2월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이후 발표된 상하이[上海] 공동성명에서 미국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고 타이완[臺灣]에서 병력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는 그해 6월 17일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불법 침입한 5명의 남자가 체포되면서 공화당 행정부의 불법 활동이 폭로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정치적 파국을 맞았다./브리태니커
[1776년]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 출간
← 기번, Henry Walton이 그린 유화(1744)
1776년 2월 17일 2세기부터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 멸망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역사를 기록한 에드워드 기번의 저서 <로마 제국 쇠망사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첫권이 출간되었다. 1781년에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를 다룬 제2, 3권이 출간되었으며, 이후 3권이 더 출간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의 후반부에 실린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삼위일체 논쟁, 이슬람교의 흥기, 로마법의 역사에 관한 항목들을 통해 기번의 뛰어난 재능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로마에 대한 글인 맺음말에서 인류의 지적 자유를 옹호했으며, 그리스·로마 세계의 쇠망은 도덕적 타락에 그 원인이 있다고 피력했다./브리태니커
[1927년] 동양화가 박노수(朴魯壽) 출생
← 선소운(仙簫韻, 남정의 1950년대 작품)
1927년 2월 17일 태어남 ~ .
"동양 예술의 극치는 서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의 그림은 선을 중시하는데 선은 글씨와 기본을 같이하고(書畵同根) 있습니다. 선으로 그리는 이유의 하나는 그것이 대상과 닮지(似) 않게 하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대상의 피상적인 묘사, 단순한 재현으로 끝나면 작가의 정신은 깃들 곳이 없어집니다." - 박노수
박노수는 주로 문인화의 정신이 배어 있는 그림을 그린 동양화가이다. 호는 남정(藍丁)으로 충청남도 연기에서 태어났다. 1949년 서울대학교 미술학부에 들어가 이상범·장우성에게 배웠다.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미술전에서 수상을 했고 국내외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이화여자대학교 및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1983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있다. 1950년대에는 주로 인물상을 그렸으며, 1960년대 들어와서는 몰골(沒骨)의 선염(渲染) 채색과 암시적인 운필을 구사한 독자적인 산수화를 보여주었다. 전체적으로는 동양적 자연관에 입각해 현실과는 거리감이 있는 관념적인 이상향을 추구했다. 간결하고 직관적인 운필과 집약된 채색, 즉 북화적인 준열함과 남화적인 색채의 감각적인 정서를 절충한 그림들을 그렸다고 평가받는다. 대표작으로 <수하 樹下>·<산>·<백로> 등이 꼽힌다./브리태니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확정
1962년 2월 17일 5.16직후 군사정부가 민주당정권이 계획했던 경제개발계획을 토대로 제1차 5개년계획 (1962~1966)을 확정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농업 생산력 증대 2. 전력, 석탄 등 에너지 확충 및 사회간접자본 충족 3. 수출증대로 국제수지 개선 4. 유휴자원 활용 5. 기술진흥 등이다.
따라서 정유, 비료, 화학, 전기기계 등의 기간산업과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에 집중적인 투자가 이루어졌고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에는 일본자본을 포함한 외국자본의 의존도가 60%에 이르렀으며 연평균 8.5%의 경제성장률을 이룩했다. 1인당 GNP는 83달러에서 123달러로 증가했다. /조선
[1960년] 김포국제공항 종합청사 준공식
1960년 오늘, 김포공항의 국제선 청사가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개관식을 가지고 문을 열었다.
국제선 청사는 내부를 대리석으로 장식한 최신식 3층 건물로 지어졌으며, 통신시설과 난방, 조명 등 현대식 설비도 갖춰졌다. 대한국민항공 KNA를 비롯한 각국 항공사들이 이곳에 입주했다.
총 공사비는 이 때 돈으로 3억환.
1942년 개설돼 처음 일본군 가미카제 특공대의 훈련장으로 쓰였던 김포공항. 여의도 비행장의 국제선 기능이 이곳으로 이관되고 국제선 청사가 신축되면서 비로소 국제공항다운 면모를 갖추게 됐다. /YTN
[1827년] 스위스의 교육자 페스탈로치(Pestalozzi, Johann Heinrich) 사망
← Johann Heinrich Pestalozzi
1746. 1. 12 ~ 1827. 2. 17
1746년 1월 12일 취리히에서 출생하였다. 취리히대학교에 재학 중 애국자단체에 소속되어 사회운동에 가담하였으며, 1769년 같은 단체원이던 안나와 결혼하였다. 1771년 노이호프에 농민학교를 세웠으나 실패한 후 사색과 저술생활로 세월을 보냈다.
1798년 프랑스혁명의 여파가 스위스로 밀려왔을 때 슈탄스에 고아원을 설립, 전쟁고아를 돌보았다. 그후 부르크도르프, 이베르돈에 학교를 세워 독자적인 교육방법을 실천하다가 만년에는 다시 노이호프로 돌아갔다.
당시의 유럽 사회를 분석하여, 계층간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지적하고 이의 시정은 정당한 교육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민중에게 바른 지성의 힘을 기르게 하면 민중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 할 것이라는 입장에서 인간학교의 이상을 제안하였다.
또한 바른 지성의 힘을 체질화하기 위해서 형(形)·수(數)·어(語)의 개념을 직관적 경험을 통해서 부여해야 함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인간에게 내재하는 자발성·자기활동에 의해 가능하다고 해석하고 기초도야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펼쳤다. 도덕적 도야의 근원을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믿음의 관계에서 찾으면서 생활이 도야한다는 입장을 역설하였다.
그의 수많은 저서들을 보면, 전생애를 통하여 온갖 고경(苦境)을 참으면서 언제나 교사로서의 뜻을 굽히지 않고 교육이라는 외길을 걸었던 강한 실천성과, 교육에 의한 인류구제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확립하여 소상히 전개한 교육적 천재의 풍성함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이 남을 위해서였으며,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고 새겨진 묘비명은 그의 교육에 대한 모든 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 저서로는, 농민학교 운영에 실패한 후에 쓴 교육선언 《은자(隱者)의 황혼 Abendstunde eines Einsiedlers》(1780),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불후의 교육소설 《린하르트와 게르트루트 Lienhard und Gertrud》(1781~1787), 그의 근본적인 철학적·인간학적 사상이 담긴 《인류발전에 있어서 자연의 운행에 대한 나의 탐구 Meine Nachforschungen uber den Gang der Natur in der Entwicklung des Menschengeschlechts》(1797), 교육방법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전개한 《게르트루트는 어떻게 그의 아이들을 가르치는가 Wie Gertrud ihre Kinder lehrt》(1801) 등이 있다.
또한 만년의 저서 《백조의 노래 Schwanengesang》(1826)에서는 교육이상으로서 전인적(全人的)·조화적 인간도야의 입장을 읽을 수 있다. 이들 저서에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신뢰와 신(神)에 대한 순수한 신앙이 그의 생활과 사상의 바탕이었음이 잘 나타나 있다. /naver
[1781년] 프랑스의 의학자 라에네크(Laënnec, René-Théophile-Hyacinthe) 출생
1781. 2. 17 ~ 1826. 8. 13
브르타뉴의 캥페르 출생. 14세 때 낭트에서 개업하고 있던 숙부 기욤 라에네크의 집에서 지내며 의학의 기초를 배웠다. 1801년 파리에 나와 샤리테 병원학교에 들어가서 나폴레옹의 주치의였던 코르비자르에게 사사하여 정식으로 의학을 수학하였다. 1806년 보종병원의 의사가 되어 병리해부학에 관심을 가지고 그 분야의 문제에 관한 몇 가지 논문을 발표하였다. 1816년 어린이의 놀이에서 힌트를 얻어 비대한 여성을 진찰할 때 종이를 말아서 관 모양으로 하여 가슴에 대고 청음하였다가 청진기를 발명하였다.
그 후 3년 동안 환자를 청진하여 여러 가지 음(音)을 기록하고 죽은 후의 병형(病型)과 대조하여 이러한 음이 어떠한 병에서 나오는가를 알아냈다. 그의 방법과 발견은 《간접 청진법에 대하여 De l’auscu1tation mediate》(1819)에 기술되어 있다. 1823년 파리 의과대학 임상과 교수가 되었다. /naver
[1673년] 프랑스 극작자 겸 배우 몰리에르(Molière) 사망
몰리에르 [Molière, 1622.1.15~1673.2.17]
프랑스의 극작가 겸 배우 몰리에르가 1673년 2월 17일 사망했다. 평생을 연극인으로 살다간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때도 공연기간 중이었다. 무대 위에서 그의 마지막 걸작 ‘상상으로 아픈 사나이(Le Malade imaginaire)’를 연기하던 중 각혈이 심해 겨우 집에 돌아왔으나 그것이 세상과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몰리에르는 예명이고 장 바티스트 포클랭(Jean Baptiste Poquelin)이 본명이다.
1622년 실내장식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넉넉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중등교육도 파리의 명문 클레르몽 학원에서 주로 라틴어를, 오클레앙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했다. 1643년 ‘성명극단(盛名劇團)’을 조직, 활발한 연극활동을 시작했으나 실패의 연속이었다. 1656년 루이 14세의 동생 필립 도를레앙이 그를 지원하면서 그의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궁중에서까지 그의 연극이 공연됐다.
파리에서의 인기와 명성이 높아질수록 그의 육체는 오히려 더 쇠약해졌고 가정생활도 원만치 않았다. 불행한 가정생활은 그를 더욱더 연극에 내몰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날 쓰려졌다. 그의 연극은 탐욕이나 위선 허풍 등 인간 내면의 허를 찌르며 관객을 웃음으로 내몰지만 언제나 삶에 대한 깊고 풍성한 통찰을 수반했다. 몰리에르 연극의 특징 중 하나는 극 중에서 비판하는 자나 비판받는 자나 모두 조롱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조선
[2007년] 베를린영화제 특별상 받은 박찬욱 감독
베를린영화제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로 쾌거
(베를린=연합뉴스) 송병승 특파원 = 57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특별상인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했다.
알프레드 바우어상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기법을 정착시킨 촬영감독의 이름을 딴 상으로 베를린영화제 8대 본상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박찬욱 감독은 17일 밤(현지시간) 베를리날레 팔라스트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한 후 "이 영광을 아내와 함께 나누고 싶다. 이 상 수상으로 가정에 소홀했던 빚을 갚게 된 것 같다. 아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이제 ‘내 남편은 영화감독이지만 괜찮아’라고 말했으면 좋겠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싸이보그지만..’은 베를린 영화제 시사회와 기자회견에서 각국 기자들과 평론가들의 높은 관심을 러 일으켜 수상 가능성이 점쳐져 왔다.
박 감독은 이 영화에서 자신을 사이보그라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정신병 환자에 대해 다른 정신병 환자가 "그래도 괜찮아!"하고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독일 언론도 ‘싸이보그지만..’에 대해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일간지 디 벨트는 베를린 영화제 특집판에서 이 영화의 한 장면을 두개 면에 걸쳐 대형 사진으로 게재했다.
이 신문은 박 감독이 이미 2001년 ‘공동경비구역 JSA’를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했으며 2004년에는 칸 영화제에서 ‘올드 보이’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박찬욱 감독의 이번 수상으로 한국영화의 베를린 영화제와 인연이 더욱 깊어지게 됐다.
한국 영화는 1961년 강대진 감독의 ‘마부’가 은곰상을 수상한 이래 베를린 영화제에 9편의 본선 경쟁작을 배출했다. 1994년에는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이 8대 본상 중 하나인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04년에는 김기덕 감독이 ‘사마리아’로 최우수 감독에게 주는 은곰상을 수상했다. 2005년에는 임권택 감독이 세계적으로 영화 인생을 인정받는 영화인에게 주어지는 명예 금곰상을 받고 특별 회고전이 개최되는 영광을 안았다.
박 감독은 지난 2001년 ‘공동경비구역 JSA’로 베를린 영화제에 첫 선을 보인 이후 2003년에는 ‘복수는 나의 것’이 포럼 부문에 초청됐다. 지난해에는 베를린 영화제의 워크숍 프로그램인 ‘베를리날레 탤런트 캠퍼스(Berlinale Talent Campus)’의 강사(mentor)로 초청받은 바 있다. songbs@yna.co.kr
[1600년] 르네상스의 대표적 사상가 조르다노 브루노 화형
←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가 1600년 2월 17일 로마에서 화형됐다. 교회나 국가는 시민들에게 특정한 생각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죽기 전까지도 이단이라는 이유로 7년여를 감옥에 갇혀 있었다.
1548년 나폴리에서 태어난 브루노는 18세에 엄격하고 완고한 교리로 종교탄압에 앞장서고 있는 도미니크 교단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사제생활을 하며 고대와 자연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그는 결국 가톨릭 교리에 적응하지 못해 1576년 이단혐의로 교단에서 추방됐다. 그후 그의 삶은 ‘고난’ 그 자체였다. 그는 ‘자유 사상가’로서의 이미지 때문에 가는 곳마다 경찰의 감시와 추방령에 시달려야 했다. 제네바, 리옹, 툴루즈, 파리, 옥스퍼드, 마르부르크, 비텐베르크, 프라하, 취리히, 베네치아 그가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던 도시들이다.
1592년 베네치아에서 이단신문에 회부되었으나, 소신을 굽히지 않아 이날 로마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자연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찬 그의 철학은 범신론적인 특징이 강했다. 우주는 무한하고, 신성(神性)은 전우주를 꿰뚫는 생명, 즉 ‘우주령(宇宙靈)’이라고 해석하고, 인간은 ‘영웅적 정열’로 이 우주령의 영원한 활동과 결부된 본성을 자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조선
[1980년] 김태식 WBA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 김태식 선수.
프로 복싱선수 김태식이 1980년 2월 17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복싱 WBA 플라이급 타이틀 매치에서 챔피언 루이스 이바라(파나마)를 2회 1분11초 만에 KO승으로 누르고 세계 왕좌에 올랐다. 이날 경기는 한마디로 김태식의 초전 박살전이 적중한 화끈한 경기였다.
김태식은 1회초 루이스 이바라에게 잠시 밀리는듯 싶었으나 2회가 시작되자 이바라가 정신을 차릴 틈도 주지 않고 좌우훅을 날리며 파고들어 시작 40초 만에 첫 다운을 빼았았다. KO왕다운 통쾌한 경기였다. 이날 경기로 김태식은 프로통산 13승(11KO)1패,10연속 KO승을 기록하게 됐다. 또 한국으론 박찬희 김상현 등 3명의 세계 챔피언을 보유하게 됐으며 처음으로 WBC(박찬희) WBA의 플라이급을 함께 석권하게 됐다. /조선
그밖에
2006년 필리핀 남부 레이테 섬 산사태로 1800여명 사망
1998년 독일 작가 에른스트 윙거 사망
1992년 BC 4천년경 한반도 최고인골, 경남 통영군서 출토
1982년 주5일제 수업, 서울 부산 8개 국민학교 선정
1981년 한국, 수리남과 경제기술협정 체결
1979년 남북대화단절 3년 11개월 만에 판문점에서 1차 접촉
1979년 중국, 베트남 침공
1977년 임영신 중앙대 총장 사망
1966년 프랑스, 과학위성 발사 성공
1964년 가봉 군부 쿠데타 발생
1957년 소련 핵무장에 대처 나토군 특수훈련개시
1955년 보건, 사회 내부통합, 부흥부 신설
1955년 영국, 수폭제조 개시 발표
1954년 포로인수 조인
1954년 합동참모회의 설치
1949년 한미 우편물 교환협정 조인
1943년 조선교육령 개정
1937년 철도국, 경성역을 여객전용으로 하고 청량리역을 화물역화한다고 발표
1933년 뉴스위크지 창간
1933년 장진강 수력전기회사 설립
1894년 스페인 기타연주자 세고비아 출생
1890년 미국 발명가 숄스 사망
1889년 독일 물리학자 슈테른 출생
1871년 일본 세균학자 시가 기요시 출생
1864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시인 패터슨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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