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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14;18-33. 결정은 어떤 동기와 원리이어야 하는가? 2024. 4. 7.
여러분,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말씀처럼 참고 믿고 바라며 견디시는 삶으로 살아가십니까? 공감과 동행이 무엇일까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이 말씀위에 세워질 때에 공감과 동행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공감과 동행의 관계가 쉬우면서도 또한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어야 하기 때문에 쉽지가 않습니다. 왜요? 사람의 생각과 마음으로는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면서 모든 것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내 자신의 영역이 있기 때문이고, 삶의 현실과 문제를 푸는 방법이 상대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2024년을 시작하면서 다짐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선도적 삶의 입지 확보와 주님을 향한 삶의 글로벌 확장과 경계를 넘나드는 지경의 확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머리되는 경쟁력 확보를 위한 믿음의 용기와 열정, 거기에 대한 종합적 리스크 관리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잘 되던가요? 여러분, 우리는 다짐과 결정을 하고서도 또 다시 넘어질 수가 있습니다. 나의 잘못이든지 아니면 주어진 환경과 역경 때문에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넘어진 문지방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과 실수한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은 무엇이든지, 어떤 경우이든지 내 자신의 잘못이라는 사실입니다. 시73:26 나의 육체와 마음이 쇠약하나 하나님은 나의 마음의 반석이시고 영원한 분깃이시라.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알았습니다. 마음과 육체가 쇠약했습니다. 때마다 중요한 것을 잘 인식하기도 했지만 어느 때는 중요한 삶의 현장에서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어느 때는 자책한 것 때문에 피폐된 마음과 육체가 쇠약했지만 언제든지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반석이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분깃이라고 믿었습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자신도 없다고 뜨거운 신앙과 가슴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열정과 용기와 믿음과 바라봄으로 말하고 그렇게 살려고 힘써 노력을 했습니다. 이 것이 무엇입니까요? process and progress 자기 인식과 자기 성장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항상 기다림은 있어도 걱정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사람에게는 때를 따라 지위가 주어지고 때를 따라 거기에 맞는 체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지위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체면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체면을 내려놓는 것과 동료와 수고하는 사람에게 체면을 내려놓는 것은 무엇인가를 만들고 무엇을 이루어 가는 관계에 더욱 아름답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의 가락과 말씀의 화음과 말씀의 선율과 말씀의 생명의 빛이 늘 항상 언제나 나의 두 귓가에 들려지고 나의 매 마르고 간절한 심령에 심겨지고 나의 예정된 삶의 호도스에서 시온의 대로로 확연히 드러나야 머리되고 이름이 창대케 되며 모든 사람들 가운데 의뜸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인생이란 갈등과 화해를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말씀해 줍니다. 33절을 보면 우여곡절 끝에 다윗과 압살롬이 화해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후에 이어지는 압살롬의 반란을 상기하면 진정한 화해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화해가 되었더라도 다시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결과가 있기 때문에 중간에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압살롬이 그런 길을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아버지 다윗의 책임은 없었을까요? 그렇다고 모든 것을 아버지 탓만 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과 화해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반란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 그 궁극적인 이유를 통하여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결정의 근거가 되는 동기와 원리가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말씀드립니다. 아프리카에 결혼을 앞둔 처녀들에게 한 가지 행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처녀들이 옥수수 밭을 한 고랑씩 맡아 거기서 제일 크고 좋은 옥수수 한 개씩 따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일 큰 것과 가장 좋은 것을 딴 처녀가 그날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규칙이 있습니다. 한번 지나친 것은 다시 돌아 볼 수도 없고, 다시 돌아 갈 수도 없습니다. 오직 앞만 보고 가다가 마음에 드는 옥수수 하나만을 따야 합니다. 한 번 땄으면 도중에 좋은 것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버리고 다시 딸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경기에 임한 처녀들은 아주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제일 좋은 옥수수를 따러 들어간 처녀들이 한 결 같이 풀이 죽은 모습으로, 못나고 형편없는 옥수수를 들고 나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이다 싶으면 저 앞에 더 좋은 것이 눈에 띠고, 저것이다 싶으며 그 앞에 더 좋아 보이는 것이 눈에 띠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고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앞에서 놓친 것이 아쉬워 마음이 상하고, 할 수 없이 아무 것이나 따 가지고 나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윗의 가정에 문제가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다윗의 큰아들 암논이 문제를 일으키고 거기에 압살롬이 형 암논을 보복 살해 합니다. 그 일로 압살롬은 외가 집이 있는 그술에서 3년간 도망친 아들로 지냈습니다. 그 뒤로 우여곡절 속에 예루살렘으로 귀국 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압살롬이 아버지를 반역한 충격적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일로 이번에는 다윗이 도망자가 되어 광야로 도망가는 수모를 겪고 다윗이 반역을 평정할 때 압살롬은 요압의 병기든 자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 됩니다. 여러분, 다윗 가정에 첫 문제는 순서와 절차와 허락을 받지 않은 왜곡된 사랑이 문제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어디서 그 문제가 시작 되었을까요? 잘못된 동기와 원리에 근거한 결정 때문 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압과 다윗이 도망 중에 있는 압살롬을 데려올 때 잘못된 동기에 근거해서 결정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물론 압살롬도 잘못된 원리에 근거하여 행동하게 되면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13-18장까지 이어 지는 이야기인데 구성이 복잡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배워야 할 큰 교훈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어떤 동기와 원리에 근거해야 하는가? 여러분, 삶은 단순치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원리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삶의 문제를 모두 규명하고 모두 커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원리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아픔을 겪게 됩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1.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결정의 원리로 삼았습니다. 14;1-20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압살롬은 형을 죽인 후 아버지 다윗을 피하여 3년 동안 그술에 있었습니다. 압살롬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다윗도 아들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접울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쉽게 데리고 올 수 없었습니다. 압살롬도 돌아오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허락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요압장군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군대장관으로서 대단히 교활한 사람이고, 정치적인 수를 잘 읽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가지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한 여인의 입에 자신의 말을 넣고, 다윗에게 보내어 압살롬의 귀국을 허락하도록 다윗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내용은 여인이 자신의 두 아들이 서로 싸우다가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이고 한 아들만 유일하게 남았는데 사람들이 죄 값을 갚기 위하여 그 아들을 내어 놓으라고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남은 아들이 대를 이를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보복하는 것을 막고 아들을 보호해 달라는 간청이었는데 아주 끈질긴 설득이었습니다. 간청을 1번, 2번, 3번 할 수 있는데 여인은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왕이 묻고 대답하고 이 모든 이야기를 듣던 다윗이 14;19절 이 모든 일에 요압이 너와 함께 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다윗은 이제 이야기의 핵심이 자신과 압살롬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압이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압살롬을 데려 오라고 허락을 합니다. 그러면 왜 요압은 압살롬의 귀국을 위하여 다윗의 마음을 집요하게 움직였을까요?
1-1. 요압은 두 사람 사이에 딜레마를 해결해 줌으로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려고 했습니다. 1절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요압은 왕의 마음을 읽는데 재빠른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고 그것을 해결해 주면서 다윗의 신뢰를 다시 얻으려고 했습니다. 다윗이 요압의 청대로 허락을 했을 때 22절, 내 주 왕이여 종의 구함을 허락하시니 종이 왕 앞에서 은혜 받을 줄을 오늘날 알았다고 감사했습니다.
1-2. 요압을 다음의 후계자로 생각을 했습니다. 여인의 비유에서 남은 한 아들마저 죽게 되면 대를 이을 수 없듯이, 만일 압살롬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마땅한 사람이 없다고 설득했습니다. 다윗에게는 다른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요압은 압살롬을 지지했을까요? 다윗이 뛰어난 외모를 가진 압살롬을 좋아하고 백성들이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꿰뚫는 눈이 있었습니다.
1-3.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것은 압살롬이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왕이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고, 그 아들은 아버지 때문에 돌아 올 수 없으며, 백성들은 거의 모두가 압살롬을 좋아하고 있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 요압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라 판단했습니다. 여러분, 문제가 무엇입니까? 철저하게 인간인 생각이었습니다. 다윗과 압살롬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었는데, 그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왕이 불편하게 여기는 것을 해결해주고, 왕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압살롬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적이냐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탁월한 외모를 가졌고, 백성들이 그를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압살롬은 고의적으로 살인을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차기 지도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것이 요압에게는 중요한 결정의 원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입지를 강화하고, 후계자를 생각하고,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려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 이라는 원리에 의하여 결정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압살롬이라는 엄청난 시한폭탄을 이스라엘 안으로 끌어 들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요압은 다윗과 압살롬의 문제를 너무 잘 해결했고, 동시에 국가적 문제를 잘 해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시간만 흘렀습니다. 압살롬의 문제는 장차 요압에게도 고통이 되었고, 끝내는 자기 손으로 압살롬을 죽여야 했습니다.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행한 일이 가장 복잡하고 고통스런 문제가 된 것을 두 눈으로 보아야 했습니다. 여러분, 삶의 결정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생각 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잠언3;5∼6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왜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입니까?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를 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현실적 생각을 넘어 하나님의 뜻입니까? 궁극적으로 가장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2. 인간관계를 결정의 원리로 삼았습니다. 21∼24절의 내용입니다. 다윗은 요압이 보낸 여인의 말에 의하여 압살롬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왔지만 2년 동안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습니다. 왕궁 출입을 금지시키고, 자기 집에 가택연금을 시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압살롬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다윗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형을 죽인 살인자이었고, 율법의 기준이면 죽어야 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뛰어난 외모를 가졌지만 그의 내면의 특성과 성향에 위험한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왕궁 출입을 허용하는 것은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고, 여러 가지 위험을 초래한다고 여겼고, 바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압살롬의 얼굴을 2년간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들의 얼굴을 보지 않을 것이면서 왜 귀국을 허용했을까요? 차라리 그술에 그냥 두었다면 불씨를 키우지 않았을 것인데 왜 불러들여서 반역을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을까요?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때문입니다. 1절의 향한다는 표현은 압살롬을 향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굉장히 사랑했습니다. 이 사실을 더 확증할 수 있는 대목은 압살롬이 요압의 병긴 든 자들에 의해 살해 되었을 때 다윗이 보인 반응입니다. 삼하18:33절.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5번이나 내 아들이라고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었습니다. 왜 형 암논이 죽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반응을 보였습니까? 압살롬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압살롬은 뛰어난 외모를 가졌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흠모하고 칭찬할 정도로 뛰어난 외모입니다. 또 이유가 있습니다. 요압과의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상당히 부담스런 존재이었습니다. 교활한 사람이고, 쉽게 사람을 죽이는 폭력적인 사람이고, 이익을 따라서 쉽게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다윗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요압이 다윗에게 얼마나 부담스런 존재인지를 삼하3;39절.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 지로다. 이 말씀은 다윗이 요압에게 아브넬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고 났을 때 다윗이 보인 반응입니다. 아마도 요압이 다윗에게 압살롬의 귀국을 종용한 것이 처음이 아니고 여러 번 말씀을 드렸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여인이 말할 때 다윗이 대뜸 요압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고 말했습니다. 이런 정황들 때문에 다윗이 요압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결정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관계가 더 나빠졌고, 아들에 의하여 반역을 경험해야 했고, 아들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인간관계, 특히 가족관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가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사랑보다 인간관계에 의한 사랑이 더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3. 이기심을 결정의 원리로 했습니다. 14;25∼15;12절의 내용입니다.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철저한 회개와 겸손한 태도이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고의적 살인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다윗이 왕궁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2년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아버지를 만나게 해 주지 않는다고 요압의 밭에 불을 질렀고 그래서 요압을 만났고, 요압의 주선으로 아버지와 극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 때 압살롬이 아버지와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은 사실 아버지를 속이는 입맞춤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화해를 한 압살롬은 그 때부터 사람들을 미혹해서 자기를 추종 하게 한 이후에 아버지를 반역했습니다.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무엇이 이 같은 행동을 하게 했을까요? 철저한 자기중심적 이기심입니다. 어디서 나온 것이었을까요? 25∼26절.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저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그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년 말마다 깎았으며 그 머리털을 깎을 때에 달아본 즉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얼마나 아름다웠으며 외모에 어떤 흠도 없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이 크게 칭찬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스스로의 자만심이 이스라엘 최고의 에고이스트가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친가와 외가를 왕족으로 둔 정통 왕족이었었습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모든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 가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조금도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형 암논의 문제를 하나님의 공의에 맡기지 않고 자신이 죽였습니다. 아버지의 목에 칼을 겨누었습니다. 상상키 어려운 국가적 혼란을 야기 시켰습니다. 백성들이 압살롬과 다윗 편으로 나뉘어져 싸워야 했습니다. 왜 성경은 압살롬의 외모에 대한 평가를 압살롬이 죽은 후가 아니라, 그술에서 돌아 온 후 곧바로 써 놓았을까요? 외적특성보다 내적특성이 더 중요함을 암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외적인 것에 근거하는 사람은 파멸로 몰고 갈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서가 시작될 때 압살롬과 같이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비극으로 이끌었던 한 사람이 사울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서는 외적인 것을 의지하는 사람의 위험을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삼상16;7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여러분, 삶의 선택과 결정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외적인 것입니까? 내적인 것입니까? 그 때나 이 시대의 가장 고상한 가치는 내적으로 뛰어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얼굴이고, 어떤 사람은 학위이고, 어떤 사람은 세상의 지위이고, 어떤 사람은 재산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이런 것을 삶의 모든 원리로 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세상의 본질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일2;16∼17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신앙인은 달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원리는 벧전5;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4.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의 관계 형성입니다. 아버지와 어떤 관계를 형성하였느냐? 다윗왕은 첫째 아들 암논이나 압살롬이 암논을 죽였을 때도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암논의 죽음은 잊어져 가고, 압살롬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지만 5년 동안 전혀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무엇입니까? 방임형입니다. 문제에 간섭하지 않았고, 칭찬도 꾸중도 하지 않으며, 상대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모 밑에서 성장한 자녀들은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며, 제멋대로 행동하고, 반성하지 않습니다.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으며, 기존의 권위에 반항합니다. 압살롬에게 이런 성향이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이 자기중심적으로 결정하여 이복형을 죽이고, 반란도 일으키며, 행동한 일에 대하여 전혀 반성하지 않습니다. 백주대낮에 아버지의 후처들을 성폭행하는 부도덕한 행위도 서슴없이 행했습니다. 하지만 과잉보호도 문제가 됩니다. 독립성 결여로 사회적응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관계일지라도 주님을 절대 신앙화 하고 믿으면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압살롬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 될 기회가 있었지만 그 기회를 놓쳤습니다. 변화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버지 다윗 왕을 만났지만 자신의 죄의 문제가 처리되지 않았습니다. 처리되지 않는 죄는 상황과 조건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다시 드러나게 됩니다. 용서가 없는 화해는 겉모습일 뿐입니다. 용서받고 용서할 때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다윗 왕이 자신을 향하여 무조건적으로 용서했다는 마음을 알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윗은 13;37. 압살롬이 그술 왕에게로 도망칠 때 날마다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슬퍼했습니다. 슬픈 마음속에 용서가 있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변함이 없고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다시 예전의 감정이 나타나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다윗왕의 용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고 일관성 있게 나타났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과 전쟁 중에도 삼하18;5.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고 합니다. 나중에 압살롬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는데 그가 올라가면서 삼하18;33.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이것이 자신의 큰 아들을 죽이고, 자신에게 반역하고, 자신의 후궁들을 범하고, 자신을 죽이려 한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용서의 반응이었습니다. 압살롬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일관되게 용서했습니다. 정말 아쉬운 것은 압살롬이 이런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의 마음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혼하여 자녀를 낳으면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자녀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보면서 우리 부모님도 나를 향하여 이런 사랑을 주셨구나! 하는 마음이 들면서 부모님과 화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주님의 놀라운 용서의 사랑을 깨닫고 언제 어디서든지 그 용서의 유효함을 삶가운데 드러내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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