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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교만한 제가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남을 가르치려고만 한다”고 말하며 감히 겸손한 분들을 가르치려고 했고, “참된 겸손은 남들의 멸시와 경멸 앞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는 것”이라 외치면서도, 저를 무시하는 작은 언행에도 쉽게 분노했습니다. “참된 사랑의 본질은 용서”라고 말하면서도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다른 이의 작은 잘못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철저히 순명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의 핵심이며,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을 다 비우고 사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를 얻을 수 있다”고 큰소리 쳤으나, 정작 제 자신은 사악한 내 안의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참으로 음탕한 자였으며, 명예욕에 연연하면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싫어하셨던 죄는 교만과 위선”이라 외치면서도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더 본받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며, 그저 거룩한 척, 순결한 척 포장되고 위장된 삶을 살았기에, 저의 부끄러운 죄악들을 하느님과 신자 분들께 고백하며 용서를 청합니다. 때로는 남을 용서하는 것보다도 자기 자신을 용서하기가 훨씬 더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에 희망을 둔 자기 반성을 통한 베드로의 아름다운 회개가 아니라, 결국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자살했던 유다처럼 말입니다. 저 또한 희망의 본질인 삶의 기쁨과 감사를 죽여버리는 지나친 자학이라는 절망의 숨 막히는 고통의 그늘 속에 살던 어느 날, 어떤 신부님께서 이런 글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고통에 짓눌려 되갚아야 하는 그런 조건 달린 용서가 아니라, 온전히 새롭게 기쁜 삶을 살아가도록 해 주시는 그야말로 조건 없는 완전한 용서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신다. 이러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는 단지 길 잃은 양들뿐만 아니라 양들의 피로 더럽혀진 늑대까지 그야말로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수없이 배은망덕하여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포기하시거나 외면하시지 않으시며, 오히려 길 잃은 우리가 올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재촉하신다.” 이러한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용서를 하느님께서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주십니다.
사람들 눈에 참으로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 애간장 태우시며 애끊는 사랑으로 “회개하라”고 재촉하시는 하느님의 참된 아버지의 사랑, 사람들 눈에 절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타락한 자라 할지라도 그가 참으로 회개한다면 고해성사를 통해 무조건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의 참된 어머니의 사랑,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이 불멸의 사랑 속에 잠겨 들어온 것이요, 이 사랑을 닮도록 초대 받은 것입니다. 강기남 요셉 신부 해외유학(스페인 꼬미야스 대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