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처 시인>>
<<서영처 시인의 양력>>
* 1964년 경북 영천 출생
* 경북대에서 바이올린 전공, 영남대에서 국문학 박사학위.
* 2003년 계간《문학/판》등단
* 시집 : 『피아노악어』, 『말뚝에 묶인 피아노』
* 산문집 : 『지금은 클래식을 들을 시간』, 『노래의 시대』.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으로 활동 中.
<<서영처 시인의 시>>
피아노악어/서영처
혼자 지키는 집,
늪으로 변해버린다
땀이 거머리처럼 머리 밑을 기어다니고
눅눅한 공기가 배밀이를 하며 들어온다
수초가 슬금슬금 살을 뚫고 자라난다
피아노 뚜껑을 연다
쩌억, 아가리를 벌리며 악어가 수면 위로 솟구친다
여든여덟 개의 면도날 이빨이 덥석 양팔을 문다
숨이 멎는다
입에선 토막 난 소리들의 악취
손가락은 악어새처럼 건반 위를 뛰어다녔는데
놈은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 내동댕이친다
물 깊이 물고 내려가 소용돌이 일으킨다
수압에 못 이긴 삶은 흐물거린다
대궁 아래 숨어 있는 눈망울
나는 수초 사이 처박혀 한없이 불어 터진다
어디선가 웅성거림 들려오는데
핏물 흥건한 이곳으로
물거품이 궤적을 일으키며 다가온다
죽어라 헤엄치다 돌아본 늪엔
수련이 가득
구설수처럼 피어있다
태양, 물 위의 연꽃들/서영처
누각은 기러기나 오리의 날개처럼 세워진다 그 아래 내 안압을 팽창시키는 못이 있다 중얼중얼 물결 퍼지자 대궁은 움켜쥐었던 햇살 펼친다 꽃잎은 손가락이다 못의 근심이 밀어올린 태양, 망막을 찢으며 수면 구석구석을 수런댄다
매표소 근처 바람개비 파는 여자, 장맛비 못 둑 넘치게 울어 눈이 벌겋다 생각난 듯 가슴 헤치고 돌아앉자 주린 젖먹이, 어미의 무덤 속으로 파고든다 아기 잇몸 뚫고 하얀 꽃잎 돋아난다 가쁜 숨들 어둠 삼키고 자맥질 치며 솟아오른다
안산을 기억하다/서영처
수인선 협궤열차는 ! 덜컹거리며 미간을 빠져나온다
푸르른 논들 가로질러
어깨 툭툭 내 려치는 바람이 되어 사라진다
차창 밖 세상 빠르게 지나도
소금밭 한 귀퉁이 몸 어딘가에 박혀
쩡쩡한 햇볕을 기다리는지
꼬막 같은 소래 역
협궤열차가 줄그으며 서해로 밀려가고
노을은 철조망에 찢겨 너덜거리는데
눈자위로 바다는 밀물진다
君子路 네온사인 아우성쳐도
바람은 향기로웠다고,
낡은 사진틀 속을 흐르는 강
기슭 옆구리에 끼고 다리 아래를 거니는 사람이 있다
그의 삶에 다른 계절은 없는 듯
날카로운 창날의 여름이 어깨 위로 쏟아진다
무덤들에서 듣다/서영처
깊이 뿌리내린 섬이네
한 사람씩 들어가 고립되어 버리는,
낙타의 육봉처럼 군데군데 솟아
오-ㅁ 오-ㅁ 낮은 소리를 내네
소를 놓치고 울던 어린 날의 아버지가
여기 봉분에 기대어 잠이 들었네
이장한 곳의 붉은 흙은
생살을 도려낸 듯, 지금도 아프네
원재료들 요리되기를 기다리며 누워있네
구근처럼 양지바른 곳만 골라 태양을 호흡하더니
통통하게 살 오르는 무덤이여
절반쯤 굴러 내린 달이여
삶이 갈증을 일으켜 나는! 다시 무덤을 헤매네
누구에게도 덤은 없다고 무덤은 말하네
먼 길 가려 내 등에도 일찍이 혹을 하나 달았네
隊商들은 보이지 않고
짐 지고 구릉을 넘는 낙타구름
그림자만 가득하네
그 많던 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서영처
메트로놈처럼 똑딱거리던 그 많은 별들은 어디로 갔을까
마름모꼴의 박자기 이제 아무도 태엽을 감지 않는다
우리의 결별에 대해
낫과 망치와 나란히 펄럭이던 붉은 별에 대해 너는 무슨 변명을 하려는가
보이는 세계 뒤의 보이지 않는 세계, 그 뒤의 또 다른 세계가 별의 세계라고
머릿속에 별이 가득한 사람 심장이 뚝딱거린다
소나기 지나가며 먼지 냄새가 훅 끼친다
쓰레기통의 어둠 속에서 불길한 냄새가 풍긴다
먼지와 냄새는 과거, 별은 명백한 과거의 집적
별을 사랑했다 별을 사랑했으므로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에 묶였다
산책길에서 만난 개똥벌레가 유선을 그리며 숲속으로 사라진다
내 별은 추위에 떨며 한데 잠을 잔다
물 위에 뜨던 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맥박처럼 똑딱거리던 그 많은 별들은 어디로 갔을까
산기슭 개망초 군락이 바람에 일렁거린다
절개지에서 인광이 번쩍거린다
별은 사라진 한 무더기 미래, 유혹하고 침몰시킨다
누가 휘파람을 길게 분다
별자리가 출렁거린다
작별이고 이별이며, 석별이고 멀고 긴 송별
거울의 파편 속에서 거미가 줄을 쳐놓고 먹잇감을 기다린다
술막처럼 번지는 거미집*
풀벌레 울음소리가 뚝, 그친다
*오장환
봄밤/서영처
수상쩍은 기미가 몰려온다
최루가스처럼 묻어온 꽃가루들이
다투어 내 몸을 빌리려는 것
폭도처럼 산을 내려와
밤에 더 기승을 부리는 가려움
붉은 삐라를 살포하고
봄은 나를 짓밟고 간다
꽃 진 자리 오래도록 얼룩얼룩하다
장미의 세계/서영처
배고프다고 울어대는 장미
울 때마다 송이송이 향기를 뿜어내는 장미
갓 태어난 장미에게 우유를 먹이는 동안
허벅지를 찍고 등으로 기어올라 잠 속을 기웃거리는 장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장미는 혀를 내밀어 내 눈물을 핥았다
가시 돋힌 팔을 뻗어 얼굴을 어루만졌다
골똘한 생각에 잠긴 골목을 지나 다시 생의 여름이 온다고
자꾸만 옆구리로 터져나오는 꽃들
야옹, 울 때마다 장미가 피어난다
생선을 발라먹고 가시를 토해내는 장미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는 장미
끝없는 갈림길이 있는 정원에서
계속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나무 한 그루 새 한 마리 울지 않는 황량한 세계에 닿았다
가이포크스 가면을 쓰고 나타나 가시 돋친 말을 뱉어내는 장미
입안에서 벌떼가 쏟아져 나온다
그 많은 눈시울 위로 타오르는 장미
그 많은 눈시울 아래로 잠드는 무덤
기억의 지층 아래 묻힌 쓰레기를 파내 장미를 접는다
악취를 풍기는 장미
담벼락마다 장미가 피어오른다
돌연 줄을 풀고 햇살 속으로 사라지는
해마다 넌출넌출 새끼들을 물고 오는 장미, 망각의 장미
경계/서영처
땅만 보며 서 있는 가로등이었다 어두운 모퉁이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차량들이 속도를 내며 달리는 도로가에 성냥팔이 소녀가 사라진 자리에
성냥개비처럼 서 있는 가로등이었다
키만 자라 외눈박이 거인처럼 슬픈 눈으로 서있는 가로등이었다
수런거리며 콩나물 대가리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하는 가로등이었다
세상은 소리에 들어있다고
시끄러운 도심에서 자신들의 음악을 심고 있다
껌벅거리며 음정을 맞추고 있다
느릅나무처럼 자라는 시가지
죽은 가지에 옹이처럼 맺힌 집들
번지수가 커가는 거리를 따라 늑대도 아닌 가로등이 하울링을 한다
차가운 달을 한 덩이씩 문다
재앙이 스며들어 인적이 끊긴 거리
언덕을 따라 불 꺼진 집들이 거꾸로 매달려 잠이 든다
느릅나무 잎들이 떨어지는 막다른 골목을 향해
부적을 문 쥐가 털을 곧추세우고 달려간다
공명이라는 것/서영처
라닥은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땅이다 투링은 암벽위의
꼼빠에 산다 만류하는 어머니를 울며 졸라 열 살에 출가했다
보이는 것이라곤 눈 덮인 산과 맑은 하늘뿐 아이는 또래의
도반과 얼음이 어는 추운 방에서 잔다 새벽에 일어나 양치를
하고 그 물 뿜어 얼굴을 씻는 아이 큰스님 되기가 소원이었지만
휑한 눈으로 멀리 산 아래를 한없이 바라볼 때가 있다
겨울 볕을 해바라기하며 두런두런 경전을 읽는 아이의 팔에
소름이 돋는다 붉은 사리를 두른 이, 혹한의 여백을 밀며
당기며 악기가 되어간다
베를린/서영처
널 만나러 베를린에 간다
부품 상점의 기계 부속 이름 같은 베를린
동서를 가르듯 ㄹ과 ㄹ 사이를 분명하게 가르는 베를린
나사 같은 ㄹ을 두들겨 모음을 조립하면 베를린이 된다
더 단단해지는 ㄹ, 쇠 냄새가 난다
베를린에선 베토벤, 베버, 베르디, 베를리오즈, 베베른, 베르크, 베틀 앞의 페넬로페까지
한꺼번에 열차에 실려 온다
베를린은 비를 맞는 도시
식은 칼국수처럼 내리는 비를 맞으면
도마질 소리와
마지못해 젓가락을 들던 일요일의 점심이 떠오르고
미술관으로 프리드리히 대제의 궁전으로 오페라하우스로 숲으로 노천카페로 은행으로
톱니바퀴처럼 아귀가 물리는 베를린
비가 그친다 바짓가랑이에서 ㄹ을 털어 낸다
이를테면 ㄹ이 거꾸로 걸리거나 먼 곳으로 달아나 나사 빠진 도시가 될 수도 있으련만
기차가 중앙역을 출발한다
자음의 함량이 풍부한 베를린의 철로 위로 나뒹구는 휴지와 캔, 페트병
레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뒷다리 너구리 아가리 알이 밴 우리 종아리
종일 베 짜는 소리를 내며 베를린의 첫여름을 직조한다
구름부족들/서영처
구름부족은 구름 냄새를 피운다 구름부족은 내 이불 속으로 시 속으로 함부로 드나든다 구름부족은 유목민, 국경을 넘나드는 무국적자들, 족장은 부족들을 거느리고 바람과 태양이 다스리는 붉은강의 골짜기에 머물고 있다 천막이 쳐지고 피리소리 울리고 살찐 양떼구름이 흩어져 풀을 뜯는다 빛살 도끼를 휘두르는 부족의 전설은 강을 따라 흘러내려 늑대들도 양떼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한다 부족의 기원은 거룩한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나기와 뭉게, 새털, 장막, 조개, 구름혈족의 내력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지만 그들 상징과 은유는 수많은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다 마술을 부리는 부족이 안개를 흩어 강의 발원지 유서깊은 마을을 휩싼다 마을이 고립된다 사라진다 구리빛의 늙은 카우보이가 구름평원을 달린다 구름보다 빨리 구름보다 자유롭게, 구름평원에 빛의 신비화성이 울러퍼진다 눈시울 빛 꽃이 군락을 이루고 카우보이는 구름부족으로 귀화한 자들의 발자국을 모아 저녁 지을 땔감으로 쓴다 모닥불 타오르는 밤, 구름부족은 광활한 평원에 방랑을 꿈꾸는 시인의 책을 완성한다
오, 나의 태양/서영처
활활 타는 아궁이지요 누군가 닥치는 대로 불쏘시개를 던져 넣네요 만물이 바래져 새 것이 없어요 높고 높은 탑 속엔 실을 잣는 그레첸 물레에 다친 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툭툭 떨어지네요 그래도 끝없이 비단실을 풀어내는군요 농익은 저 열대과일을 가르면 둥근 씨가 흘러나와 또 태양을 열매 맺는 나무로 자라려나 숫 사자 한 마리 으르렁거리다 금새 암컷과 새끼들을 거느리고 내 눈꺼풀 속으로 뛰어듭니다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에서 포효하는 맹수 더위에 지쳐 바다에 가도 으르렁 갈기 나부끼며 몰려옵니다 사는 게 전쟁이라고 포신은 종일 화기를 내뿜습니다 세포 분열한 태양이 케이블 선에 매달려 네거리 차도에도 우글우글 뜨고 지고 그럼요 산목숨들을 삼켜 그 힘으로 익어가는 무덤입니다 무덤이 삼킨 것들을 가지런히 모범답안으로 뱉아놓았군요 산자락 마다 볼록볼록한 음향판들,
거울 속 거울/서영처
바람 한 점 없다 산과 강 누런 들판 반짝거리는 나뭇잎, 거울은 태양을 끌어당겨 봄여름 가을 겨울 봄여름 가을 겨울, 가을이 마흔 번이나 왔다가고 액자 속의 액자, 액자 속의 액자, 지루한 그림을 누군가 그려댔다 거울의 미궁에서 제1바이올린은 제2바이올린을 낳고 제2바이올린은 비올라를 낳고 비올라는 첼로를 낳고 첼로는 더블베이스를 수북이 낳아 시끌벅적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거울 속 거울 골짜기 크리스탈 오르간은 신음하며 쳄발로를 낳고 합시코드와 피아노를 낳고 종이피아노를 낳아 산후우울증 같은 꼭 다문 흑백의 음악을 도모하고, 넷마블 버디버디 네이트 연예뉴스 조이천사 싸이월드, 지워도 번식하는 자손들, 원숭이 떼가 나를 흉내내는지 서른여덟 서른아홉 마흔, 나는 자꾸만 복제된다 이룰 수 없는 꿈과 꿈 사이, 얕은 강을 건너고 또 건넌다 아르보 패르트*의 핏기 없는 거울, 투명한 종 속으로 빨려들어, 들어, 들어, 종추로 박힌다 거울을 표절한 미래가 비명을 지르며 눈부시게 튕겨나간다
* 아르보 패르트: 에스토니아 작곡가, 대표적 작품으로 「거울 속 거울」이 있다.
종유석 동굴/서영처
천 개의 눈이 달린 파놉테스들의 숲을 헤치고
갑옷 아래 푸른 칼날을 숨긴 기사들의 성을 지났다
검은 새 떼가 화르르 날아갔다
늪지를 지나 밀림으로 들어섰다
누구의 발걸음도 허락지 않은 원시림, 그 속에 묻힌
티라노사우루스의 거대한 두개골이 드러났다
두근거리는 동굴 앞에서
보았다, 포효하다 멈춰버린 아가리
육식의 완강한 아래턱과 뻗어내린 이빨
박쥐들 날아오르고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들었다
티라노사우루스의 영혼이
동굴의 영혼이 뿜어내는 소리
긴 어둠 속으로 쫒겨
백악기로 거슬러 오르는 비명을 들었다
“××에서 2시 방향, 46km”
“엄청난 매장량의 음맥(音脈)을 발견했다”
산등성이엔 시원을 그리워하는 티라노사우루스의 푸른 눈,
탐사대는 지도에 표시하고
날카로운 소리 조각들을 배낭에 쑤셔 담았다
음광(音鑛)에서 찬란한 화성이 쏟아져 나왔다
황도(黃道)로 운명을 점쳤다/서영처
바람은 긴팔원숭이 떼처럼 창틀에 매달려 휘파람 분다 들판엔 이어달리기 하는 전신주들 미닫이에 떨어지는 햇살의 분포를 문살은 막대그래프로 정확하게 그려낸다
나뭇가지들은 자라나 방문을 도배해버린다 아침상 받는 동안도 사그라지지 않던 추위의 정체가 저 뿔들이었다 뿔들은 미닫이를 틀어 안고 슬픈 노래를 뜯는다
눈이 세상을 덮어버린다 행불자의 주검처럼 풍경은 흰 천 아래 뉘여진다 사라진 길을 더듬으며 트럭은 달려가고 모든 소리는 봉인된다 누구도 봉인을 열 수 없다
나는 열에 들떠 그림자의 기울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수만 킬로미터의 장정長程에도 태양의 고도를 재며 돌아오는 연어처럼, 어둠이 부풀린 배를 안고 나는 옛집을 찾았다 흑점 인장 찍힌 산봉우리엔 오래도록 얼룩이 남았다
목련/서영처
어디서 홰치는 소리에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니
어라, 둥근 알을 깨고
세상 궁금한 것들이
푸드덕 날개를 펴는 것 아냐?
저 햇것들 좀 봐!
횃대 위에 줄지어 앉아
힘껏 목청을 높이는,
낡은 책을 읽다/서영처
아버지는 책과 노트를 마당귀로 끌어냈다 시루떡처럼 쌓였던 책들이 떡고물 먼지를 흘렸다 책무더기에 기름을 끼얹었다 불길 속에서 활자들 타작마당의 콩처럼 튕겨나왔다 톨스토이와 키르케고르, 루터와 칼빈이 탔다 개기일식인양 불의 혀에 둘러싸여 웅크린 형체 서가書架는 죽은 자들의 무덤이라고 아버지는 재를 흩어버리는 거다 그리곤 이름난 왕릉이나 산을 찾아 만 권의 생애를 감상하러 다니신다
번민도 회의도 타버리고 빈 책장만 남은 방 바랜 노트 몇 권 남겨져 있다 저 갈피 속 붉은 밑줄 여전히 출렁거릴 텐데, 땡볕 아래 초라한 가묘를 손질하고 돌아와 아버지 단잠 드셨다 가벼워지는 몸, 검버섯 자욱한 얼굴, 입을 열어 드렁드렁 잠언을 낭송하고 계시다 선풍기 바람에 펼쳐진 낡은 아버지를 읽어본다
봄밤/서영처
수상쩍은 기미가 몰려온다
최루가스처럼 묻어온 꽃가루들이
다투어 내 몸을 빌리려는 것
폭도처럼 산을 내려와
밤에 더 기승을 부리는 가려움
붉은 삐라를 살포하고
봄은 나를 짓밟고 간다
꽃 진 자리 오래도록 얼룩얼룩하다
살바도르의 시계/서영처
굶주린 이빨들 종일 무언가를 씹는다 열두 개의 공이들 들어앉은 절구 축축한 혀가 입술을 핥고 있다 뼈다귀까지 씹어대느라 각이 진 턱, 틀니를 덜그덕거리거나 합죽해진 입으로 찌꺼기를 흘릴 법도 한데 이 밤 또 요란하게 껌을 씹어대는군
바늘들을 모두 몸 밖으로 밀어낸 태양, 대형시계처럼 공중에 걸려있다 공허한 마음, 그는 감시 한다 베란다의 빨래는 빳빳해지고 수건은 톱니가 돋아 얼굴을 깨문다 독재자의 눈매 매서운 거리엔 검은 햇살의 얼굴 없는 태양들 걸어다닌다 탑 속에 갇힌 허기가 입맛을 다신다 순식간에 덜미를 낚아채 반지 낀 손가락까지 오도독 오도독 씹어댄다 트림하는 입에서 흘러내리는 끈적한 시간
박수치다/서영처
그대는 햇빛과 몸 부비는 숲 속
물든 나무다 노래는
와삭와삭 잎사귀 뒤적거리는 바람을 길들인다
손바닥엔 마주치면 울리는 동굴이 있어
오랜 혈거에 핼쑥한 새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는 것이다
조상彫像처럼 말문을 닫았던
아, 어두운 몸이 방생하는 새떼
검은 잎사귀를 물고 화살처럼 날아오른다
부리를 부딪히며 뭐라뭐라 소란한
새들, 들리는가
겨드랑이를 비집고
빛으로 고물한 바람이 스며든다
조아리는 그대 머리 위로
군무群舞의 새떼들 내려앉는 소리
폭풍우의 밤/서영처
악몽처럼 비 붉게 뿌린다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면
숲은 우리에 갇힌 맹수들처럼 으르렁거린다
내 속의 고요가 반란을 일으켜
나뭇잎 시퍼렇게 흩어진다
비 들이치는 방충망엔 물방울별들
무더기로 돋아났다 사라지고
고대 어느 왕국, 변방의 언어로 몸이 아팠다
알아들을 수 없는 전생, 먹을 두드려 넣으면
낱낱이 상형문자로 찍혀져 나올까
내 산란함이 점점 커져
오히려 적막한 폭풍의 진원지,
오랜만에 나는 격정을 켠다
나무들은 노여워하는 바람에 맞서 허리를 세운다
창살을 뚫고 빗속을 달려오던 얼룩무늬 보았다
심장이 찰칵거리며 기억해놓은,
맹수의 모습은 왜
내 바이올린의 등에 얼룩덜룩 새겨져 있을까
언덕/서영처
전쟁이 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돈 것처럼
아이와 나는 급히 짐을 싸고 그 도시를 떠났다
말라버린 수로 위로 줄지어 선 플라타너스
검은 별들이 가득 매달려 있었다
우리는 밑도 끝도 없이 잤다
공항에서도 터미널에서도
근심의 먹구름이불에 짓눌려,
귀때기 새파란 놈이 다리를 떨며
창틈으로 휘파람을 불어대는 껄렁껄렁한 계절이었다
동파된 수도관에서 눈물 콧물 같은 것이 질질 흘러내렸다
하루 밤새 아이와 나는 하얗게 늙어
이가 뭉청뭉청 내려앉는 꿈을 꾸었다
새벽에 장작불이 꺼지듯 한 시절이 사라졌다
나는 쌀을 씻어 밥을 앉히고 마음을 앉히고
뜨물처럼 흐린 하늘
쌀낱같이 박혀 있는 별들을 본다
저 별빛은 아직 소식이 전해지고 있는 오래된 과거
포화 속 천막을 치고 허무는 동안에도
밤이면 별이 총총한 언덕을 생각했다
우린 왜 거기 있지 않고
나는 여기 당신은 멀리
동굴처럼 울리던 컴컴한 트럭 안
쑥과 마늘을 앞에 두고 사람이 될 기회를 앞에 두고
당신은 내렸다
국경 근처에서 사람들이 죽어갔다
나는 기다린다
별모양의 총구멍 숭숭한 벽에 기대
이따금 머리칼을 들치면
흰 쥐처럼 소복이 들어앉아 소스라치게 하는 세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