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파로스를 찾아…
❍ 미 4:1-5
• 인사
우리 함께 인사하겠습니다.
“당신의 한 걸음을 응원합니다.”
오늘은 제가 왜 이 설교를 준비하게 되었는가를 먼저 말씀드려 볼까합니다. 저는 최근 대한민국과 한국 교회가 정말 큰 위기 혹은 변곡점을 맞이했다고 느껴집니다. 일일이 다 열거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징조들이 많이 보입니다. 나라와 교회의 위기는 결코 우리 인생과 무관하지 않기에 참 곤란한 일입니다. 저는 그것이 추워진 날씨보다 더 으슬으슬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세상이 혼탁하고 인생이 어지러울 때 사람의 행동, 특별히 우리 신앙인의 행동양식은 어떠해야 할까? 그것이 오늘 말씀을 준비하게 된 저만의 경위입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절에 사람은 멀리 내다보기가 어렵습니다. 아니, 섣불리 멀리 보는 것이 위험합니다. 당장 눈앞의 길이 험한데, 멀리만 보고 가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실족의 위험이 있습니다. 빗길에서는 20% 감속 운행하는 것이 운전수칙 아닙니까? 그래서 혼란스러운 시대에는 당연히 희망을 말하기 어렵고, 그 생각과 행동이 생존모드로 전환됩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속에서 거친 생각과 두려운 마음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고, 그것이 더 큰 혼란과 갈등을 유발시킵니다. 그래서 보통 어려운 시절에 가장 저열한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 사람입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아도 그렇고, 인류사를 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작금의 이 나라 대한민국의 정치형태가 그렇고,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갖어야 하는 것은 이런 혼란의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느냐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암흑의 시대를 돌파하는 방법을 두 가지로 허락하십니다.
첫 번째로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우리의 발을 비추는 등불을 허락하시는데, 시편의 기자는 그것을 말씀이라고 칭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이 등불은 높은 곳에 둔 것이 아니라 내 발에 둔 빛입니다. 당장 내 발 앞에 무엇이 있는지를 비추는 것이죠. 그러니까 신앙인은 시절이 어두울수록 따라 한 걸음씩 전진해야 합니다. 아멘? 서두르지 말고, 내 발의 등불이 되는 말씀이 비추는 만큼 ‘Step by Step’ 걷는 것입니다. 급한 마음에 내 생각, 경험, 추측이 우리의 발걸음을 주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때 넘어지면 정말 치명적입니다. 그렇게 주의 말씀을 따라 한 걸음씩 내딛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걷는 것은 좋은데, 그 방향이 맞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아느냐?” 그래서 제가 반문했습니다. “당신 하나님 안 믿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걸음이 어긋나지 않게 하실 것이요, 갈 바를 알지 못해도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비전이 생깁니다. 우리는 그때 비로소 멀리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 번째 하나님이 허락하신 암흑을 돌파하는 무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걸음씩 걷는 자들에게 눈을 들어 새로운 비전을 보게 하십니다. 내가 보려고 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이 신앙의 비전인데, 대체로 성경에서는 이를 환상과 묵시를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그 비전을 향하여 순례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요,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어둠의 시절에는 내 발을 비추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한 걸음씩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비전을 우리의 최종 목적지로 삼고 순례를 이어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어둠의 시대에 우리를 말씀과 환상을 통해서 인도하십니다.
저는 우리가 사는 오늘이 섣부르게 내일을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라고 봅니다. 이때 우리의 발걸음을 잘 내딛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오늘 묵상하는 미가서의 말씀은 매우 중요한 지침을 줍니다. 미가서는 어둠의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자, 환상입니다. 여기에 어둠을 살아가는 중요한 지침들이 가득합니다. 부디 엄혹한 시절에 말씀을 빛으로 삼아 조금씩 어둠을 헤쳐나가는 지혜로운 성도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이름,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요.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미가서입니다. 미가는 당시 흔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미가라는 이름 앞에 그 출신지를 붙여서 모레셋 사람 미가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유다라는 이름이 흔해서 가리옷 사람 유다, 가룟유다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또한 미가라는 이름이 흔한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미가’라는 이름은 미카야후,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요.”라는 뜻입니다.
참 흥미로운 것은 미가 선지자가 자신의 예언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풀어서 마감합니다.
다같이 미가서 7장 18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미 7:18)
이것은 미가의 이름이자, 신앙고백이며, 그가 전할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누가 여호와 하나님 같겠습니까?
이 말은 혼탁한 시절에 생존하기 위하여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이것저것 손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촉구하는 메시지입니다.
실제로 미가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북쪽 아시리아가 발흥하여 북이스라엘이 무너지는 때입니다. 아시리아는 인류 역사 속에서 처음 등장한 제국이자, 파괴적인 힘을 가진 나라입니다. 주변 국가들을 순식간에 초토화하며 그 영토를 넓혀간 아시리아의 침략에 이스라엘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사방을 둘러봐도 희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시절, 선지자는 오롯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주와 같은 신이 또 어디 있느냐 하면서 말이죠.
• 출신, 변방에서 울리는 북
조금 더 살펴봅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 이름만큼이나 그 출신이 특이합니다.
다같이 미가서 1장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미 1:1)
이게 굉장히 특이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표정을 보아하니 뭔 말인가 싶으신 것 같은데.
자, 하나씩 풀어봅니다. 성경은 유다의 왕들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라고 적시합니다. 그러니까 남북이 갈린 시절에 남쪽 왕들과 남쪽 출신 선지자 이름을 거명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대상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고 합니다. 여기서 키-포인트는 유다 출신 예언자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를 전한 것은 이해가 되는 대목이지만, 사마리아에 관한 묵시를 전한 것은 특이합니다. 남북으로 갈린 나라에서 남한 출신이 북한의 일을 예언한 것과 비슷한 형국입니다. 이게 잘 먹히겠습니까? 그래서 유독 미가의 예언이 북 이스라엘에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서 북이스라엘은 망하고, 남유다는 살아남은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게다가 미가는 모레셋 출신이라고 되어 있는데, 모레셋은 예루살렘 주변에 위치한 작은 성입니다. 적들의 침공에 대비한 인계철선(tripwire)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군사적으로는 유효한 지역이지만 상당히 위험하였고, 중심지에서 벗어난 변방입니다. 한 마디로 미가는 시골 출신입니다. 잘 나가는 명문가 집안도 아니요,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지역 출신도 아닙니다. 그런 시골 출신이기에 그가 받은 서러움도 꽤 컸습니다. 미가는 이를 늘 의식했고, 그의 예언에도 묻어납니다. 그가 향후 메시아가 탄생할 장소를 기록할 때 아주 주관적이면서도 감성적인 표현을 가미합니다. 미가서 5장 2절을 보시죠.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성경에 메시아 탄생지를 기록한 곳은 미가서 하나인데, 여기서 그는 ‘베들레헴’을 작은 고을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그 작은 고을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온다고 명시합니다. 작지만 크다는 것이죠. 제가 보기에 약간은 주관적인 감정이 담겨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베들레헴이 다윗의 출생지자 성장기를 보낸 곳입니다.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도 베들레헴처럼 작은 곳에서 태어났고, 부모와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작은 자였으나, 하나님께서 위대한 왕으로 세우셨다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하면서 메시아도 그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예언합니다. 그들도 한 마디로 다윗도 메시아도 시골출신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미가 자신처럼 망입니다.
• 망가지는 사람들, 망가지는 나라
미가의 처음 예언은 시대가 시대인지라 경고와 책망으로 가득합니다.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지적하는 장면을 잠시 봅니다. 미가서 2장 1-2절입니다.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미 2:1-2)
선지자에 따르면, 이 나라는 힘 있는 자들의 패역으로 말미암아 망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침상에서 죄를 꾀하고 악을 꾸미며, 날이 밝으면 그 악랄한 계획을 자신이 가진 힘으로 실행하는 자들의 세상, 정말 생존을 위해 만인을 대상으로 싸우는 정글같은 세상이 작금의 이스라엘이라고 지적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내리시겠다 말씀하셨고(미 2:3), 사람들은 그런 예언 따위는 듣기 싫다고 하면서 욕설을 퍼붓습니다(미 2:6). 그렇게 북이스라엘이 망한 것이고, 남쪽 유다는 히스기야가 그 말씀을 기억하고 여호와 앞에 엎드리면서 생존한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유다가 생존했다고 하나 이미 온 국토가 유린당하고 폐허가 됩니다. 미가는 이런 상황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같이 3장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미 3:12)
이 구절은 잠시 동안 기억하고 계시기 바랍니다.
예언자는 지금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망하는 시간이라.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이 무거진 황무지가 되리라. 가뜩이나 살기 어려운데, 전망은 더 어둡습니다. 이런 예언을 누가 좋아했겠습니까? 그런데 다행인 것은 하나님은 이런 경고 뒤에 환상을 통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이정표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미가서 4장 1-5절의 말씀입니다.
• 세상의 중심으로 향하는 발걸음
4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끝날에”
이는 이 패역의 역사가 종식되고, 재앙이 끝나는 변곡점을 의미합니다. 한 개인의 인생도 그렇고 나라의 운명도 이런 변곡점이 찾아옵니다. 성경은 이런 날들을 몇 번이고 적시하는데, 이날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수평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수직으로 강하하는 하늘의 힘이 작동하는 시간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때를 ‘영광의 시간’으로 표현하는데(cf. 요 13:1), 죽음이 왜 영광이냐 하면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시간이기에 그렇고 하나님께서 그 죽음을 기점으로 전혀 다른 세상, 구원을 여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한 개인의 인생에도 이런 시간이 찾아온다고 말합니다. 그의 시집에서 이런 시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나를 툭툭 쳐 그래서 나는 조용히 칼날을 들기 시작했다.”
릴케는 나를 툭툭 치는 시간을 감지합니다. 바로 그날이 내가 행동하는 변곡점이 되는 것이죠. 끝이 없을 것 같은 전쟁과 폭력이 끝나는 바로 그날,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들을 전개하시는 그날, 예언자는 그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다같이 미가서 4장 1-2절을 읽습니다.
“끝날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미 4:1-2)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바로 앞선 3장 12절에서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요, 성전의 산은 수풀로 변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폐허가 변하여 다른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고, 수많은 민족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몰려온답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러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자.”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시온으로 몰려오는 이유입니다. 바로 거기에 희망이 있고, 바로 거기에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설교 제목을 “옴파로스를 찾아…”라고 정했는데, 옴파로스는 세상의 중심, 배꼽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의류 브랜드로 더 유명하지만 세상의 변곡점이 시작되는 시원이 여기이고, 여기에 내일의 희망이 있기에 사람들이 이 산으로 몰려온다는 뜻입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 중에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온땅을 적시고 소생케한다는 말씀이 같은 의미입니다. 바로 거기가 생명의 근원이기에 몰려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신전이 있는 델포이를 옴파로스라고 불렀고, 미국 사람들은 세도나를 옴파로스라고 부릅니다. 거기 가면 우주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나 뭐라나. 그런데 미가는 폐허로 변한 예루살렘, 성전이 위치한 시온산이 진짜 옴파로스가 되어 사람들이 몰려오는 장소로 적시합니다. 왜? 여기에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여호와의 산이 있고, 야곱의 하나님의 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4장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미 4:3)
그 폐허 위에 하나님께서 새롭게 질서 지우시는 세계가 열리는데, 칼을 녹여 삽(보습)을 만들고, 창을 녹여 낫을 만든다고 하십니다. 미가 선지자가 활동한 시기는 전쟁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전쟁을 종식시키시고, 시비를 판결하시니 전쟁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칼을 쳐 쟁기를 만들고, 창을 쳐 낫을 만들게 됩니다. 전쟁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찾아 여호와의 전으로 올라갑니다.
미가와 동시대에 활동하였던 이사야 선지자도 동일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사 2:4)
지금 제가 미가서를 읽은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2장 4절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은 동일한 말씀을 동시대에 활동하던 두 명의 선지자에게 공히 주셨습니다. 반드시 이런 묵시와 예언을 전하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세상을 꿈꾸며 전쟁의 시대를 감내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인들이 가지는 꿈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비틀즈의 존 레논이 부른 대표적인 노래가 “imagine”인데, 그 제목처럼 한번 ‘상상해 보라’는 것이 그 노래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존 레논이 이 노래를 발표한 1971년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죽이고 죽는 전쟁 속에서 이 가수는 노래를 통해서 전쟁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자고 제안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평화로울지, 또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상상해보자는 것입니다.
그 후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킬링필드>의 주제곡이 바로 이 “imagine”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또 전쟁에 반대하여 다른 삶을 꿈꾸었던 히피족들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가 바로 “imagine”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가 제안한 상상력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애플의 창업자 스티븐 잡스가 히피 출신이었고 그가 강조하는 기업정신이 바로 ‘상상력’이었다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굳이 강조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상상력이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 민족들이 몰려오는 상상을 하고, 박해받고 무너져가는 교회에서 모든 열방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상상을 하고,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시대에 여호와로 말미암아 굳건한 내일을 상상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이 품어야 하는 꿈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비전을 상상하며 그 걸음을 떼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사람들은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지만, 신앙인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세상, 하나님이 가르치시고 판결하는 세상, 그래서 평화로운 세상을 상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에게 이런 상상이 풍부했으면 좋겠습니다. 나 혼자 상상하는 것은 헛될 수 있으나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상상은 하나님의 개입을 부르는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이어집니다.
• 예언자의 상상
또한 선지자 미가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을 이렇게 그립니다. 4절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미 4:4)
선지자는 평화가 없는 세상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평화로운 세상을 당연한 것으로 그립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흔한 나무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나무 아래에 앉아서 평화로운 일상을 맞이하는 세상, 그게 당연한 세상이 바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세상입니다. 5절을 보면, 그런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동한다고 말합니다. 악인은 침상에서 악을 꾀한 대로 행동하지만, 우리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행동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동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선지자는 그런 세상을 꿈꿉니다.
정현종이란 시인은 <요격시>라는 자신의 작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무기가 없습니다. 마음을 발사합니다.
두루미를 쏘아 올립니다. 모든 미사일에
기러기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폭탄에
도요새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전폭기에
굴뚝새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포탄에
뻐꾸기를 발사합니다. 모든 포탄에
비둘기를 발사합니다. 정치꾼들한테
왜가리를 발사합니다. 군사모험주의자들한테
뜸부기를 발사합니다. 제국주의자들한테
까마귀를 발사합니다. 승리 중독자들한테
발사합니다. 먹황새 물오리 때까지 가마우지...
하여간 새들을 발사합니다. 그 모오든 死神들한테
여러분,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폭탄과 전폭기가 날아다니는 세상이 아름답습니까? 아니면 새들이 날아다니는 세상이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정치꾼들, 군사주의자, 제국주의자, 승리중독자들은 새들이 날아다녀야 하는 세상에 폭탄과 미사일을 날립니다. 우리는 새들이 날아 다니는 세상을 꿈꿔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이 시간도 전쟁에 시달리는 모든 나라들에게 평화를 빕니다.
여러분,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돕는 가정이 아름답습니까? 아니면 매일 매일을 싸움으로 일관하는 가정이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왜 사랑하지 못하나요? 그런 점에서 우리의 모든 가정에 사랑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여러분, 교회가 주의 일에 열심을 내고, 하나님의 세상을 일구기 위한 사람들이 가득해야 아름답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고, 지위를 획득하려는 사람이 가득해야 아름답습니까? 그런 점에서 섬김의 기쁨이 가득한 교회를 꿈꾸며 빕니다.
선지자 미가는 세상의 중심, 하나님이 거하시는 옴파로스를 향하는 사람들이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고, 전혀 다른 행동을 일으킨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들은 유다는 살아남았고, 이 말씀을 무시한 이스라엘은 멸망 당했습니다.
바라기는 부디 이 말씀이 들리기를 바랍니다. 엄혹한 시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한 발자국씩 옮기면 여호와의 전에 오르게 되고, 하나님이 거하신 곳에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을 통하여 내일에 대한 상상을 바꾼다면, 우리의 일상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평화롭고, 풍성한 것이 되리라 믿습니다. 아멘.